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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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자신이 열정적이었다고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나는 인생이 너무나 반복적이라는 생각에 허무와 염세라는 과속적 감정과 종종 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 지루하고 적막한 인생의 여로에서 한때나마 인생에 열정의 감정과 함께한 적이 있는지, 비록 그 열정의 끝에는 무엇도 없이, 한 터럭의 지스러기 없이 오히려 그 동안의 삶을 갉아먹었다 하더라도 진동한동 살아가며 정열로써 삶을 불태운적이 있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한다.

이 때,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며 던지는 산도르 마라이의 질문에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삶의 편린에 미약하나마 정열을 쏟아 부었던 과거를 잠시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열을 부었다고 믿는 그 시기의 나는 순간의 정열에는 충실했을지 몰라도 그 삶 자체에 열정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삶의 한 편린에 자기만의 삶을 쏟아 부을 때 우리는 그 삶을 정열적이라고 하긴 하지만 순간이 아닌 그 끝이 지속적일 때, 그리고 그 정열을 자신이 진심으로 껴안고 있을 때, 그 때만이 삶이 정열을 뛰어넘는 열정이 될 수 있다. 지속적인 정열, 그 끊임없는 염염함이 열정,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에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우리 삶의 뒤편에 있는 아니, 어쩌면 우리 삶의 목적이자, 그 자체일지도 모를 화두, 열정. 그 곳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사건이라는 것은, 모두 열정에 사로잡힌 삶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사건아닌 그 삶.

그 삶이란, 헨릭과 콘라드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괴로워했던 크리스티나의, 어찌보면 단조롭기까지 한 삶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중요한 질문은 순간이 아닌, 생명의 흔적이, 생명의 핏자국이 묻혀 있는 전 생애로 답한다는 말에 눈길이 가게 한다. 질문을 위한 헨릭의 기다림. 대답은 중요치 않았으며 그저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자신을 불살라 온 그 열정적인 기다림. 그 기다림이 중요했고, 그 열정이 중요했다.

그래서인지 헨릭은 촛불을 떠올리게 한다. 자기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어둠을 살라먹는 촛불의 삶. 비록 자기 자신조차 파괴해 버리는 너무나 극단적인 삶이지만, 촛불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보다는 뭔가 모를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끼지 않을까? 촛불은 꺼지는 순간, 그 마지막에 희미한 불빛을 다시금 밝히며 마감한다. 생의 도착지에 체념이 아닌 마지막 힘을 다해 다시금 한 번 어둠에 흔적을, 우리의 눈에 잔영을 남기고 가는 그 모습. 그것이 촛불의 삶이고, 헨릭의 삶이었고, 바로 열정이 아닐까?

물론, 우리가 접하는 삶의 공간 속에서 겪는 모든 질문에 촛불과 같이, 헨릭과 같이 자신의 전 생애를 걸 필요는 없다. 전 생애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열정으로 가득 껴안고서 후회없이 내밀 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족하다. 그런게 진짜 열정이고 그게 바로 사람의 인생이다.

이 기다림이라는 열정을 매개로 <열정>은 삶에 대해 냉혹하고도 직설적인 시선으로,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담담한 어조로, 오히려 삶이란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이 너무나 담담한 어조로 읊조린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그의 글들에 귀 기울이게 해 주었고 그 담담함으로 그의 삶에 좀더 여유있고 깊숙한 참여가 가능했다.

헨릭의 40여년의 고독과 그 비등점에서 화하는 열정에 조금씩 공감해 가던 나는 문득,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모습과 겹치게 되었다. 그들, 헨릭과 마라이는 열정적인 삶을 살았고, 무슨일이 일어났던 그것을 체험하는 삶을 살았기에 결코 헛살지 않았다. 헨릭의 인생과 열정, 그리고 결국 전 생애로 세상에 답했던 산도르 마라이를 한데 뭉치며 다시금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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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법칙
로저 도슨 지음, 박정숙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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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초기. 멋모르고 설문조사 한답시고 끌려간 곳에서 책을 구매하라는 어이없는 광고를 접하게 되었다. 생애의 첫 상경에 이곳저곳도 구분 못해 나의 이성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던 덕택인지 나는 그만 설득 당하고 말았다. 분명 처음은 간단한 인터뷰였는데, 어느새 장면은 그걸 잊고 열심히 광고를 듣고 앉아 있는 나 자신으로 탈바꿈해 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내가 왜 이랬지? 라는 생각으로 본사에 전화를 걸어 그 사람과 연결해 달랬더니 비밀상 안된단다. 옳거니, 끝이다. 이제 바로 환불 태세로 들어간다. 환불을 안해주려 버티려던 회사원에게 내가 미성년자란거 아느냐? 이러쿵저러쿵, 알지도 못하는 법적 지식을 아는냥 쫑알쫑알 뱉고 있었더니, 보통 부탁을 하는데 몰아세우면 되느냐고 한다. 대체 나의 자세에 무슨 자세를 바라냐고, 그러곤 바로 환불해 버렸고 그 뒤로는 광고를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지나친 냉대를 면치 못한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분명 설득의 기술은 뛰어났다. 금방 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나를 순식간에 매료시켜 버렸으니. 로저 도슨의 <설득의 법칙>에 의하면 그 사람은 유머의 기술, 유대감의 법칙. 등등을 정말 절묘히 쓴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설득이 끝난 후의 '산 정상에서 데려오기'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그런 비참한(!) 말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물론, 나를 '산 정상에서 데려내려' 왔었어도 설득이 끝까지 유효했을까하는 의문은 들지만, 한 사례로 본다면 해석에 큰 공감이 간다.

보통 독자들에게 변화를 주고자 하는 계발서들은 읽을 때는 공감하지만 막상 책을 덮고 나면 깨끗이 잊어버리기 일쑤다. 왜 그럴까? 계발서들은 원론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계발서들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항시 제시하는데, 우리 대부분은 일상에서 잊어먹고 살기 쉬운 것들을 이런 책들이 다시금 제시해 주기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감은 할지라도 그 실천과 계발에는 어려움이 따르기에 '원론적'이라는 평이 나오는 것이다. 이 원론적이라는 비난을 면하려면 계발서는 '무엇을'에서 벗어나 반드시 '어떻게'를 제시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저그런 수준으로밖에 머물 수 없다.

로저 도슨의 <설득의 법칙>도 대체로 '무엇을'에 치중을 하는 듯 보였다. 2부까지는 대부분 '무엇을'만을 서술하여 여타의 계발서와 다를 점이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3부에서는 그 '무엇을'을 '어떻게'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해 놓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책으로 변모했다. '유머, 카리스마를 가지는 법' 등은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독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그 빛이 나는 것이다.

다만, 제4부는 차라리 읽지 말고 덮어 버릴 것을 하는 생각이 팽배했다. 예로, 고객이 제품 설명을 듣고 형편없다며 화를 낼 때, 점원은 이렇게 하란다. 절대 비아냥거리지 않게 '그럼 고객께서 더 잘 만드실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럼 '그래요, 사실 난 이 제품을 만들었었어요' 등 고객의 허심탄회한 말을 들을 수 있단다. 여기서, 저자는 아주 순수한 인물이거나 순수한 인물만을 만나 왔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서양과 동양의 정서의 틈은 메울 수 없을 만큼 너무 크다는 결론밖에 내지를 못하겠다.

일반 계발서가 '무엇을'에만 치중하여 읽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설득의 법칙>은 '어떻게'까지 서술을 해주어 어느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다만, 설득하는 주체로 판매사원 등 고객을 상대로 하는 입장에서 서술을 하여 독자들의 일상생활에까지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 같기에 책을 읽고 설득의 실력이 향상돼 변모하는 모습 같은 것은 얻지 못할게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자신이 '이렇게 설득을 당했구나'고 생각을 해 본다면 또 다른 면의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든다. 계발서들을 보고 읽기만 하면 나도 된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조그만 도움 하나라도 건지는 게 올바른 목적이라 보는 나이기에 그 정도의 도움이면 많은 것을 얻어낸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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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환상이다
기시다 슈 지음, 박규태 옮김 / 이학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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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환상이다. 우리는 본능으로 이성(異性)을 찾게 되고 또 그리워하게 된다는 일반의 통념에 과감히 출사표를 던지는 이 한 마디. '성은 환상이다.'과연 환상일까? 아니면 인간 본능으로써의 실재일까?

저자 기시다 슈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에대한 생각은 근대이후의 문화적 산물로 인한 환상이라 주장하고 있다. 근대 이전에는 성이란 아주 개방화되어 있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성적 터부가 강화되고 그 터부로 인해 강력히 금지된 공간이 생기며 인간들은 그 금지된 공간을 향해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성적 터부란 근대이후 아주 강력해 지긴 했으나, 옛날에도 존재했었고 그 존재의미는 바로 인간의 성에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라 주장하는 점이다. 저자는 인간이란 본시 성에 대한 본능이 망가져 있기 때문에 자연상태 그대로라면 인간은 이성에 대해 끌리지 않는단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인간의 종족 유지가 불가능해 지기에 인간들은 할 수 없이 성적 터부를 만들어 내면서 인간 내면의 죽어버린 성에 대한 욕구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해석은 참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다. 하지만 흥미로울지는 몰라도 공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아닐런지.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인간은 본능이 망가져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원숭이 태아적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진화의 중간적 단계로 본능 역시 그로 인해 망가져 버렸다는 주장을 답습하고 있는데, 그 학설이 설혹 가능성이 있고 또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그 주장의 내용의 신뢰도가 이 책을 읽는 일반인들의 생각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칠지에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냥 읽을 때에는 고장났나보다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이 '인간의 본능이 고장났다'가 저자의 가장 큰 무기인데, 모든 명제 진행에 막히는 부분 또는 가정 설정 부분에 항상 인간은 본능이 고장났기에 이것은 사실이다고 맺는다. 그로 인해 저자 주장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저 명제를 신뢰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기본명제 자체는 전혀 공감하는 바가 아니지만, 사랑은 일종의 환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 볼만하다. 보통의 심리학자들은 사랑은 일시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표현을 잘 쓰곤 한다. 과연 사랑은 본능에 이끌리는 행동이 아닌, 환상적 기대 속의 휘둘림일까?

흔히들 쓰는 곱상하다는 표현을 빌려보자면, 그 곱상한 사람이 스포츠 머리에 청바지 차림을 하고 있다고 치자. 관찰자가 남자일 경우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관심의 유발 여부를 좌우한다. 그 사람이 남자라면 참 곱상하게 생겼다로 넘겨버릴 일을 여자라고 인식하는 순간에 성적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여자라는 인식. 관찰자가 남자라면 우리는 겨우 이런 여자라는 단어 하나에 내포되어 있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진짜 사랑은 느낌이 아닌 인식일까?

과연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고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이란게 문화적, 인위적 산물이며 우리가 믿는 사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의 귀추는 어떻게 되었던지 일상생활에, 우리의 관계에 팽배하는 사랑이라는 낭만속에 저런 실존적 의미를 해석하기보다는 차라리 낭만적 사랑은 존재하며 우리는 본능에 이끌려 서로를 찾아 나서고 이성간에 서로를 위로한다고 믿는 편이 훨씬 나을거란 생각이 든다. 지금 사랑을 하고 사랑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하나의 낭만으로 존재하는게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 다만, 이럴수도 있다는 것을 한 번 본 것이다. 나중에 그 낭만이 깨질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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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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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작가 신경숙이 좋았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아픔, 상실, 허무를 겪는 다소 우울해 뵈는 소설들의 어머니이지만, 보는 이에게는 절망이 아닌 애잔함을 남겨주는 작가 신경숙이 나는 좋았다. 내가 하면 우울증 말기 증세일 것처럼 보이는 말투와 행동들은 신경숙이라는 여과기를 거치면 절망하지만은 않는, 회색빛 작가란 말처럼 희뿌연 아픔만을 아련히 남겨 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바이올렛은 적어도 아니다. 그녀에게 따라붙는 수식어인 '회색빛작가'란 말에 너무 집착을 한 나머지 아픔을 나타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적은 글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픔이란 아련히 보여질 때 보는이도 그 진솔함을 느끼지만 지나치게 자기의 아픔을 드러내려고 하면 보는 이의 외면을 살 뿐이다.

바이올렛 속의 그녀, 산이의 아픔은 지나치게 내보이려는 경향이 짙다. 자신의 아픔을 조금도 숨김없이 그대로 내보이려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나는 덜컥 겁이 났고 회피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기보다는 산이, 그녀는 왜 저러지? 라며 그냥 지나치는 행인의 눈길과도 같이 애써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의 아픔 속에서 작가는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을까? 아련한 아픔은 절대 아니다. 대놓고 아파하기 때문에, 보란 듯이 아픔 속에서 시달리기 때문에 절대 기존의 신경숙식 아픔은 아니다. 사랑의 아픔을 나타내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산이의 행동과 분열은 딱 3류다. 다소 뜨악한 그녀만의 공상과 일련의 행동. 그렇게 되면 바이올렛 자체가 3류가 되는 것일게다. 자아의 분열, 자신의 파괴를 나타내려 한 것일까? 그렇다면 산이의 행동표현은 흔히들 말하는 오바다. 상황의 구조에서 모든 것을 자연히 우러나오게 표현하던 신경숙 작가답지 않은 처리일뿐더러, 빈약한 상황으로 무리하게 표현하려는 자아 분열 모습은 그저 지나치다. 오산이란 인물이 매조키스트가 아닌 이상 지나침이란 표현은 지나치지 않다.

무수한 아픔 끝에 덩그러이 남겨두는 상실감. 그녀가 강요하는 아픔과 상실은 지나치다. 신경숙, 그녀답지 않은 글이고 바이올렛 속의 그녀, 산이는 두 번 다시 쳐다보기 싫은, 인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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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1 - 개정판, 종합편,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 휴머니스트 교양을 읽는다 3
최병권.이정옥 엮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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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읽는 내내 과연 이것이 내가 지나쳐 온 고등학교 3학년이란 지위의 지적주순인지에 감탄적 시선을 가졌다. 다소 무리가 따르는 비약과 엉성함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론 도출에 이르기까지의 논리정연함은 나도 저런 위치의 시기에 있었기에 감탄의 대상이 된 것이다. - 물론 우리와의 교육환경자체가 다름으로 인해 오는 차이이기에 존경으로까지의 감정 발전은 없었다.

솔직히 지금의 나조차 이런 류의 철학적 질문을 받았을 때 짤막하게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도출해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신이 서질 않는다. 아니, 자신이 없다. 철학에서 사회과학,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어느정도의 기본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저런 체계적인 서술이 가능하기에 나 자신의 교양수준을 잠시 되돌아보기도 했다.

다만, 여기에 실린 답변들은 다분히 작위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펼쳐놓는 논술이기에 여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답들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긴 하다. 하지만 논술의 강점을 나타내 주는 또 다른 특징인 독창성은 왠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대부분의 답변들이 너무 정해져 있는 틀을 따르는 듯 하다. 주어진 질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한다. 좋다. 또는 나쁘다 등등으로. 그 뒤로는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다른 대상을 찾는다. 소크라테스에서 헤겔로 헤겔에서 루소로 루소에서 사르트르로. 거의 대부분의 답변들이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전개해 나가기보다는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이렇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저렇게 말했다. 그래서 옳다는 식으로 과거의 굴레에서만 맴도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둘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 채 결론을 내리고 만다. 물론 그런 생각들을 조리있게 맞추고 중간중간에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과거의 학문들의 틀에서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지, 우리나라의 주입식과는 다르지만 또 다른 프랑스식 주입식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교양적일지는 모르지만 논술로서의 방향으로는 아니라 본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의 범위 내에서 말하겠지만 이런 글들에서는 오히려 그들보다 아는 만큼이 더 좁은 사람들에게서 나올법한 독창성은 찾기가 힘들어 보인다.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세계의 교양으로서, 즉 철학이란 학문을 위해서는 대단한 지식의 깊이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어진 질문의 궁극적 답으로서는 추천작 모음보다는 다분히 현학적 모음이 어울린다 생각이 든다. 의견전개는 자신만이 아닌 모든 이들이 쉽게 이해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체계적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하더라도 그 구성이 다분히 복잡하고 어려운 낱말선택이 취해졌을 때, 그것은 쉬운 의견개진이라기보다는 지식기반을 갖추기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또 다른 지식의 계층을 산출해 내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각 질문들에 나와 있는 답변들의 현학적 내용이라든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전개자체에 감탄만 하며 책을 덮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런 질문에 과연 대답할 수 있는가, 대답을 하기 위한 지적 수준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하는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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