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개의 거짓말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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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픽 샤미?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지은이다. 보통 지은이를 보고 책을 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나에게는 그 생소한 지은이의 책을 덜렁 사서 읽는 다는 거은 일종의 모험이였다. 과감히 모험의 길로 접어들기로 한 나. 그 길의 화려함에 먼저 반했고(책의 표지 디자인) 그 길의 한없음에 겁도 덜컥 났다.(책 두께) 어쨌든 이건 내가 할 이야기와는 다른 얘기다.

제목을 `천일가화`라고 붙여보았다. 물론 천일야화에서 따온것이고 100개의 `거짓말`이라는데서 `거짓 가`를 붙여 보았다. 당연히 그 1001개의 거짓말이라는데서만 `천일가화`란 간판이 내달린것은 아니다. 이 시대 누구라도 알법한 그 유명한 `천일야화`. 그 이야기의 길지 않으면서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못차리게 하는 흥미진진함은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 만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담은 주지 않으면서 흥미를 주는 것으로 해석하면 좋겠다. 천일 가화라 붙인것도 이 천일야화의 전처와 별반 다를게 없다는 생각에 감히 붙여 본것이다.

현재 나오는 출판물들은 지적 버라이어티(?) 사회의 무대에 맞추기 위해 그만큼 복잡하고 읽는 사람의 두뇌를 `팽팽` 돌게끔 만든다. 그런 현대의 상황속에서 단순하고 부담없는 글은 또다른 나름의 존재의의를 가진다. 복잡, 혼란, 자극에서 단순, 평온함으로의 회귀. 현재 심심치 않게 일곤하는 복고열풍, 자연으로 돌아가고자하는 현대인의 심리에 걸맞음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딱딱한 네모상자속의 텍스만으로 즐기는 현대인들이 그 때 그 시절 할머니의 옛이야기가 그립듯.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시대 진정으로 보존하고 가꾸어나가야할 문학의 한 분야가 바로 이 책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을 덮으며 진짜 오랜만에 부담없이 머리를 즐기게 한, 뇌의 휴식시간을 준듯한 느낌을 받았다. 뭔지 모를 과거로의 향수를 더불어 일으키며 말이다. 하지만 아쉬운것은 바로 그저 이야기로만 끝맺을 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비록 부담없이 읽을수 있음의 중요함을 역설했지만 그래도 책장을 막상 덮었을때 가슴에는 어떤 의미가 남기를 바라는 것은 어쩔수 없나보다. 옛이야기를 여럿들은것 같은 향수의 감정만을 일으키고 훌쩍 끝나버린 그 모험의 길. 하지만 그 길은 뜻 깊었다. 라픽샤미의 그 많은 이야기 꾸러미 중 하나를 풀어 보았다는 그 기쁨. 그리고 오랜만에 과거로의 향수를 부드럽게 일게 해준데에 대한 감사의 마음.오랜만에 부담없이 책을 즐기고가 하는 분들께 적극 권장합니다. 외적으로는 두터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결코 두껍지 않은 이 `1001개의 거짓말`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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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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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교양. 다치바나는 여기서 교양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전반 상식만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인간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인간사회지식전반의 포괄적 안목을 기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명명했다. 그런데 그런 교양의 정의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면 뭐하나. 장담컨데 도쿄대생, 일본의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인간지식전반의 포괄적 이해는 커녕 인간이라면 갖추어야할 기본적 상식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의 학생이 그렇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글을 적고 있는 나까지도 포함해서..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교육 6년, 중등교육 3년, 고등교육3년 그리고 대학. 10년을 넘게 교육받아오며 결국 내 머리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없다`였다. 자질구레한 잡다한 지식은 있을 망정 정녕 이 시대 대학생이라 할 만큼의 체계적인 지식은 하나도 갖추어져 있는 것이 없었다. 다치바나는 교양이란 일반적 상식이 아닌 인간사회에 대한 포괄적 이해로부터 시작한다고 하는데, 일반적 상식조차 체계적으로 갖추지 못한 나로써 어찌 부끄럽지 않았겠는가.

책의 부류를 보고있자면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종(?)이 있다. 바로 흔히 말하는 `자기 계발서`이다. 게으르고 나태한 자기를 일깨워줄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매이다 보니 결국은 `이대로 하시오! 그럼 성공하오리다!` 라고 장담하는 자기 계발서에 손길이 가길 마련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내가 읽어왔던 자기 계발서의 감흥은 대체로 원론적이었다는 것이다. 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였다. 예를 들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가 지극히 원론적인 자기계발서의 표본이였다. 구체적 사례없이 그냥 누구나 중학수준이상의 글짓기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이른바 충격없는 원론적 자기계발서였다. 이런 책들이 자기 계발서라고 불려지려면 읽는 독자들에게 자기를 계발 할 수 있는 `계기의 충격`을 가하는 것은 기본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를 진정한 이 시대 학도들의 자기 계발서로 적극 권장해 주고 싶다. `무언가를 배워야지 배워야지.`하고 생각은 있으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나태한 나에게 크나큰 충격을 가해준 이 책. 교육비판이라는 책의 부류를 떠나 `이 시대 학도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란 새로운 부류의 제목을 지어주고 싶다. 이 책을 읽고도 아무런 충격이 없다면 이미 대학생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이 책을 읽고도 동감만하고 행동이 없다면 더이상 학도의 길을 걸을 가치고 없다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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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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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삶의 곧 일부이다.`,`산다는 것 그것 자체가 곧 바로 죽음이다.` 죽음에 관한 이런저런 유명한 표현들이 많다. 죽음을 찬미하는 시적표현도 있거니와 죽음 그 자체로 모든것은 소멸이다라는 지극히 리얼리즘적인 표현도 무수하다. 허나 누가 정녕 알겠는가? 결국 죽음이란 죽어봐야 아는데 안타깝게도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이 책의 시작은 한 중년부부의 죽음으로써 시작한다. 허나 흔히 생각하는 `죽음=끝`의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원제를 보면 `Being dead`다. 쉽게 말해 끝나지 않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그리고 죽음이 아닌 죽음 그리고가 낫지 않았을까?) 소설의 시작부터가 죽음이라.그리고 그것으로 소설이 시작한다.어째 좀 으스스하다.

중년부부의 죽음은 모든 죽음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한 방 펀치를 먹인다. 터져나온 뇌수, 인간의 모든 구멍에서 나오는 참기힘든 냄새의 노폐물. 그리고 그 노폐물을 양식삼아 살아가는 환경의 파수꾼들. 이런 작가의 아주 리얼한 죽음에 대한 직시는 죽음을 찬양하는 `기뻐하십시요. 드디어 괴로운 꿈에서 깨어나시게 되었습니다.` 라는 표현들에 대한 반어적 블랙유머였다.

그럼 과연 이런 죽음에 대한 직시적 관찰표현은 무엇인가?이 책이 죽음 그 자체만으로 내용을 꾸려 나갔다면 이 책은 인생회의적인 분위기에 더불어 그저그런 포스트모더니즘에 국한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희망은 없고 종교도 필요없다. 죽음은 그저 추한 화학적 분해일뿐이다.` 이런 암흑적 분위기에 휩싸이며 책을 덮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죽음은 희망이 있다. 마지막 중년부부의 죽은 모습에서 우리는 미약하나마, 허무하나마 인간생활에서의 작은 희망을 느낄 수 있다.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도 자기 아내의 발목이나마 잡을려고 하는 한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은, 비록 인생말로는 무상하더라도 그 무상한 인생속에서는 집착할만한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것을 보여준다.

죽음은 그러한 것이라면 과연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을 얻어야 할까? 이 책에서 작가는 `흔들기`라는 것으로 산사람의 죽은사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다.죽음은 추하다.하지만 산사람은 그 추함을 이 `흔들기`라는 의식을 통해 승화시켜 준다.그 흔들기의 뿌리가 죽은이가 천국으로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데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갈망과 함께 죽은이에 대해 추억을 되살림으로써 그의 죽음을 암흑의 구렁텅이가 아닌 어스름 잿빛 애틋함으로 포장한다.

이 흔들기 의식의 완성은 책 중 `실비아`의 몫이였다.언제나 부모를 거부하고 연락조차 거의 두절하고 있던 실비아는, 죽음이란 매개체로 부모와의 단절의 끈을 잇게 된다. `죽음을 아직 인지 하지 못한 상태 → 불안한 심리 상태 → 부모의 죽음 인지 → 잠시간의 공황기 → 부모의 애상`이란 실비아의 행동구조는 `단절상태 → 접촉의 시도 → 접촉대상의 상실 → 해방감 → 흔들기 의식`으로의 구조로 연결된다. 이 모든것은 부모의 죽음으로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고 있던 실비아에게 자신의 젖니가 담긴 병을 발견함으로써 흔들기 의식의 완성으로 귀결된다. 실비아가 자신의 젖니가 든 유리병을 발견하고 취하게 되는 흔들기 의식의 태도는 우리에게 그저그런 감상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인간존재로써의 삶의 구심점을 비쳐주고 있다는데에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죽음`은 어둡고 침울,우울하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이 책의 작가가 흔들기의식을 그저 죽은 이들만 추모하자는 뜻에서 내세운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삶은 곧 죽음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태어나면서 곧 예정된 죽음의 행로.우리는 그 고독한 행로를 걸어야 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흔들기 의식`은 그저 죽은 사람의 추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써 곧 죽음으로 이르는 자기자신의 내면의식에 흔들기를 행함으로써 보다 긍적적이고 희망적인 삶, 곧 죽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우리가 실비아의 마지막 태도에서 죽음의 안타까움보다는 자기자신의 내면승격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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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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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르헨티나, 쿠바등 체 게바라는 신화적 혁명가로 추앙받는다. 불가능한 꿈을 이룬자로써, 흔한 게바라라는 이름에 `체`가 붙으면 그 흔한 이름이 신화속의 거대 신적존재로 탈바꿈 한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두개의 얼굴을 지녔었다. 하나는 체 게바라로서의 혁명가, 또 하나는 에르네스토 게바라로서의 휴머니스트. 혁명가가 지녀야 할 냉철하고 딱딱한 모습에 반하여 인간적이고 따뜻한 휴머니스트의 모습을 모두 지닌 게바라는 가히 신화적 인물로 떠받들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체에서 에르네스토, 에르네스토에서 체로의 전환은 환골탈태쯤?

체는 열정적이었다. 자기가 맡은 일은 무엇이든 철저하게 처리했고 자기가 일을 맡게 되기 기다리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일을 찾아서 처리했다. 그의 열정을 보여주듯 이 책의 겉표지는 `빠알갛`다. 그의 그 열정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은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혈기왕성한 젊은 층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무엇이든 도전해보려고 하는 자세. 비록 현실에 충실하더라도 그 현실을 벗어난 꿈을 하나씩은 가져보려는 자세는 수동적인것을 거부하며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보다 큰 꿈을 가지는 것에, 평범한 삶보다는 극적인 삶, 흔히 말하는 `대박`을 터뜨리는 삶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이들이에게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현재 특히 젊은층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진보성향. 보수를 거부하고 진보를 떠받드는 현상을 체 게바라라는 한 사람의 공도 있었다고 표현한다면 과장일까?

체는 현실의 세계를 떠났다. `우리 모두 혁명가가 되자.` `우리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하지만 마음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고 외치던 그는 이제 우리의 현실 세계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우리들의 마음 속, 정신 속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리잡고 있다. 그는 비록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우리에게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 세계를 그렇게 살다간 체를 배워야 할 것이다. 괜히 할일없는 한 사람이 근 10년의 공을 들여 체 게바라의 인생역정을 그려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 이념은 맞지 않더라도 그 의 열정적인 정신만은 증발시켜 흡수할 영양가가 너무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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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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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디언 하면 백인들을 습격하고 물건들을 약탈해 가며 무자비 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야만인이라고 알려진 경향이 있다. 물론 이것들은 고귀하신 백인들의 논리에 의해서이다. 사실은 정반대인데 말이다. 오히려 인디언들의 주거지를 약탈하고 이유없는 대 학살을 행한 백인 미국인들은 현재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에게 행하였던 일제시대 야만행위를 비난할 자격이 손톱만큼도 없다.

왜 현 상황도 그렇지 않은가. `미군장갑차 사건` 시대는 세계민주주의라며 그리고 명색히 세계경찰을 자처하고 나서는 나라에서 이같은 비행을 저질러 놓고도 나 몰라라 하는 시국인데 하물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전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미국민들에게 방해가 되는 인디언들에게는 어떠했겠는가?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미국인들의 야만행위와 그에대한 인디언들의 대처, 실정을 현장감있게 그려내었다. 평화를 신봉하는 인디언들에 반해 자기네들의 이익에만 반하면 무차별적학살도 서슴치 않는, 그네들을 학살하기 위해서라면 협상을 하면서도 조약을 파기하고 포로로 잡는 아주 저능적인 야만행위도 서슴없다. 과연 기독교를 신봉하며 `이 땅에 평화를 인간에게는 자비를` 외치는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나라 뿐아니라 이웃 몇몇국가에서도 반미감정이 심각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에만 치우친것은 무엇이든 극으로 달릴 위험성을 가지고 있듯 자칫 우리나라세어도 험악한 분위기로 내닫지 않을지 심히 걱정스러운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속에 오히려 이 책은 반미감정을 더욱 부추기고 합리화시키는데에 공조하지 않을지 조심스레 염려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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