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인 케미스트리 1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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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진한 에스프레소같은 느낌을 준다.

부드럽고 우아하지만 매우 강렬하다.


두려울 때면 기억해야 할 유일한 사실, 변화란 화학적으로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저자, 보니 가머스는 소설가로 올해 예순다섯 살 생일을 맞은 문학계의 후발 주자다.

미국과 영국에서 카피라이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다. 야외 수영을 즐겨 하며, 조정 선수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최근까지 시애틀에 살다가 두 명의 딸과 남편 그리고 강아지 99와 함께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녀의 데뷔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20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는 보니 가머스의 원고 『레슨 인 케미스트리』였다.

“올해의 출판 센세이션”이라는 평과 함께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영국에서 16개의 출판사가 경쟁한 뒤 데뷔작 사상 가장 높은 계약금 200만 달러(한화 약 25억)에 출판권이 계약되었다.

출간 후에는 아마존 4.7점, 굿리즈 4.5점의 기록적인 평점을 달성했다.

현재는 35개국에 판권이 수출되었고, 애플TV는 이 소설을 브리 라슨 주연의 드라마로 제작하고 있다.




험난한 환경 속에서 꿋꿋이 꽃 피웠던 그녀, 엘리자베스 조트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그녀와 그녀의 오빠는 방치되며 살아왔었다.

그녀의 부모는 거짓 종말론을 사람들에게 설파하며 이와 관련된 성물을 판매하였는데 그들의 자녀는 그들의 관심사 밖이였다.

그렇게 방치된 채 자란 두 남매였다.

그녀에게 하나 남은 오빠는 동성애자였고 이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평범한 가정 속에서 살지 못했던 그녀의 운명은 초년부터 기구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구한 인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캘빈, 그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인생이 참 기구했다.

보육원에서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평범하게 사나 싶었지만 양부모가 사고로 죽어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야만 했었다.

그런 그는 "살아갈 날이 많으니까 힘내자. 내일은 달라질 거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캘빈에게 있어서 엘리자베스는 말그대로 '빛'이었다.

이렇게나 힘든 환경 속에서도 절대로 지칠 줄 모르는 오뚝이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녀의 자존감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자존감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녀는 전도유망한 화학자였다.

그렇기에 과학자다운 합리주의에 따라 모든 것을 생각해본다.

사실에 근거해서만 판단을 내리기에 자기 확신이 흔들릴지라도 무너지는 법이 없다.

그녀는 독학으로 학사 과정을 마치고 헤이스팅스 연구소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밝혀내지 못한 ‘진화 이전’ 분자의 비밀을 연구하고 있었다.

1955년, 당시 여자들은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으며 일을 하더라도 보조원이나 행정직원이 전부였다.

즉,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를 심부름이나 시킬 수 있는 보조원이라 생각할 뿐 동등한 화학자로 생각하진 않았다.

단, 한 사람을 빼고! 노벨과학상 후보인 캘빈 에번스만이 오롯하게 그녀를 봐주었다.

앞서 설명한 엘리자베스가 사랑했던 인물이 바로 캘빈 에번스이다.

이 때 둘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화학자 엘리자베스 조트라는 이름을 지키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동거를 하게 되었으며 둘 사이에 예쁜 딸도 낳게 되었다.

그렇게 행복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알았지만, 그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캘빈이 사고로 죽고 비혼모가 된 것이었다.

마냥 슬퍼하고 울부짖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아이 딸린 여자라며 연구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뚝이다.

이미 훌륭한 화학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집 부엌을 실험실로 개조해 연구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딸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우연한 기회로 TV 요리 프로그램 「6시 저녁 식사」의 MC로 발탁된다.

그런 말이 있다.

초년 고생길을 걸었다면 중년, 말년에는 꽃길만 가득하다고.

TV 요리 프로그램을 계기로 그녀는 미국 최고의 슈퍼스타가 된다.




참 대단한 인물이라 평할 수 있겠다.

소설이지만, 어쩌면 현실은 더 험난하기에 더 공감하며 읽은 게 아닐까 싶다.

진한 에스프레소같은 느낌을 준다.

부드럽고 우아하지만 매우 강렬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곧장 떠오른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Hidden Figures이다.

Hidden Figures는 Lessons in Chemistry와 달리 실화를 다룬 영화로, 천부적인 수학 능력을 가진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이란 인물이 나온다.

그 당시에도 백인·남성 우월주의인 시대였기에 흑인 그리고 여성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나사에서 전산원으로 일한 캐서린 존슨은 "흑인 여성"이었으니 자신의 천부적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는 없었다.

소설 속 엘리자베스 조트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캐서린 존슨 또한 오뚝이 같은 뚝심이 있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손가락질에도 자존감만큼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세상은, 참 어렵고 험난하다.

어떤 일이 닥칠 지 모르기에 더 긴장할 수밖에 없다.

자존심은 내려놓을 수 있지만 자존감은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했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 안주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는 뚝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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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6-17 09: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엘리자베스 정말 대단하네요! 배우고 싶은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 관심 갖고 있었던 책이었는데 덕분에 도움을 받습니다^^ 히든 피규어스도 함께 보고 싶어졌어요.

하나의책장 2022-07-23 17:2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히든피겨스 꼭 보세요! 몇 번이나 더 봤을 정도로 정말 재미있었거든요ㅎ
아마 거리의화가님 마음에 쏙 드실 거예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2-06-17 12: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질거같은 책이네요. 리뷰만으로도 약간 힐링이 되는 기분입니다. ^^

하나의책장 2022-07-23 17:2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비가 오긴 하지만 기분 좋은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2-06-17 18: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첨들어본 작가인데 표지도 인상적이고 내용도 인상적이네요~! 판권이 크게 계약될 정도면 책도 재미있을거 같아요~! 중요한건 역시 뚝심 ^^

하나의책장 2022-07-23 17:23   좋아요 2 | URL
맞아요!ㅎㅎ
주말 내내 비소식이긴 하지만 행복하게 보내세요♥

mini74 2022-06-17 1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히든피겨스 넘 재미있었어요. 유색인종의 여성과학자들이 실력으로 이겨내는 모습 멋있었어요. 이 책도 넘 재미있겠어요 하나님 ~

하나의책장 2022-07-23 17:26   좋아요 1 | URL
역시 미니님도 보셨군요^^
재미도 있고 영어공부도 할 겸 보고 또 보는 영화 중 하나예요!
요새 인문/철학서만 읽는 것 같아 소설도 살짝 살짝 보고 있는 중이에요ㅎ
미니님,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 - 이어령의 서원시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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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2022년 2월 26일,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셨던 이어령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

【하나의책장】을 열어 이어령 선생님의 책이 책장에 몇 권이나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적지 않은 권수를 보니, 그의 작품을 꽤 읽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때, YES24이었는지 알라딘이었는지 기억은 나질 않지만 한 해의 키워드 중 하나가 '이어령'이었으니깐.

2월 말, 이어령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선 그와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기 위해 3월에 새로운 책을 집어들었는데, 바로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이다.


저자, 이어령은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문리대학보》의 창간을 주도 ‘이상론’으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한국일보》에 당시 문단의 거장들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발표, 새로운 ‘개성의 탄생’을 알렸다.

20대부터 《서울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두루 맡으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논객으로 활약했다.

《새벽》 주간으로 최인훈의 『광장』 전작을 게재했고,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아 ‘문학의 상상력’과 ‘문화의 신바람’을 역설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자로 ‘벽을 넘어서’라는 슬로건과 ‘굴렁쇠 소년’ ‘천지인’ 등의 행사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을 각인시켰다.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과 국립국어원 발족의 굳건한 터를 닦았다.

2021년 금관문화 훈장을 받았다.

마르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 쉼 없는 말과 글의 노동으로 분열과 이분법의 낡은 벽을 넘어 통합의 문화와 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끝없이 열어 보인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2022년 2월 향년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Ⅰ 흙과 디지털이 하나되는 세상


서구의 두 모험가가 에티오피아를 구석구석 다니며 지도를 만들었었다. 금과 은을 구하기 위해 돌까지 조사했을 정도로 세밀하게 살펴보았으니 황제는 그런 그들에게 선물까지 내렸었다.

그렇게 그들이 에피오피아를 떠나기 위해 배에 타려고 하자 근위병들이 조심스레 그들의 구두를 벗기고 깨끗하게 닦아 황제의 말을 전했다.


그대들을 멀리 떨어진 강한 나라에서 왔다. 그대들은 에티오피아가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그대들의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땅의 흙은 우리에게 소중하다. 우리는 그 흙에 씨앗을 심고 우리의 죽은 자들을 묻는다. …… 에티오피아의 흙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그대들을 환대했으며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흙을 단 한 알갱이도 줄 수 없다.


모험가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한 알갱이의 흙에서 나오는 힘이 에티오피아인들을 지켜준 것이었는데, 흙의 감동과 아름다움때문에 3000년의 긴 역사를 읽고 서구인의 지배를 받았으니 말이다.

서양인들은 에티오피아를 침략해 먹지도 않는 땅콩을 대지에 잔뜩 심었었지만 이는 토양에 맞지 않았고 결국 심었던 땅콩이 아프리카 땅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결국 흙의 시대, 그 지혜와 생명의 시대는 끝이 난 것이었다.

단순히 보이는 흙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었다.

모험가의 구두에는 나라를 구석구석 다니며 얻었던 보이는 흙이 아닌, 보이지 않는 흙의 정보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는 결국 흙과 디지털이 하나되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는 흙의 지혜를 압도한다.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지식을 검색해 습득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스마트폰이 활성화되기 이전에는 모두가 사전을 이용했었다.

모든 면에서 방대하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으며 심지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기까지 한다.

일론머스크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우크라이나를 위해 스타링크를 전격 지원하지 않았는가.

과거 아프간 전쟁도 모두가 10년은 걸릴 것이라 했지만 불과 석 달 만에 끝났으니 디지털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비행사들에게 수직 폭격의 기술을 가르쳐 수평 폭격의 적중률을 높였었던 반면에 스마트탄은 날렵하고 지능을 가진 폭탄이라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교량 하나를 파괴하려면 200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어야 했는데 레이저 유도 폭탄이 생겨나면서 12.5톤으로 줄었고 이후 이라크전에서는 4톤이면 충분히 폭발시킬 수 있었다.

GPS 유도탄처럼 위성으로 받은 위치 정보로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가격하여 적중률을 높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스마트탄이 마냥 스마트하지는 않다.

걸프전 때,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대통령궁을 폭격한 일이 있었다.

물론 스마트탄은 완벽하게 투하되었지만 후세인은 죽지 않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때,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자는 풍습이 있었는데 미군이 이를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즉, 목표물을 파괴하는 정보기술은 뛰어났으나 문화에 대한 정보는 백지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정보기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유도탄같이 기계를 다루는 하드웨어의 정보기술이며 또 하나는 상대방의 문화나 인간의 마음을 읽는 소프트 콘텐츠에 관한 것이다.

전자를 기계 기술, 후자를 지식 기술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정보기술은 부국과 강병의 수단이자 도구이다.

지식이나 문화를 목적으로 정보기술이 사용되는 경우는 미미한 편이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드 파워에서 소프트 파워로 옮겨지는 추세로 바뀌었다.

교육, 학문, 예술, 과학, 기술 등 인간의 이성과 감성적 능력이 빚어내는 창조적 산물과 연관되어 있으며 외교와 국방에서도 커맨드 파워 command power 가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 cooperative power 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는 더 나아가 하드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할지 결정하는 기술인 스마트 파워를 강조하는 추세이다.




Ⅱ 벽을 넘는 두 가지 방법


허허벌판에서 살 수 없기에 인간은 벽을 만들었다.

그림은 벽에 뚫어놓은 마음의 창인 듯하다.

창을 벽의 상처라고 말하듯, 그림 또한 피가 흐르는 벽의 상처인 것이다.

벽은 태양보다, 구름보다, 바람보다 강하며 오직 날카로운 설치류 쥐만이 구멍을 뚫을 수 있다.


벽은 바람을 막고 풍경을 도살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이 때 날카롭고 빨리 자라는 송곳니가 필요하다.

한밤의 어둠 속에서 갉고 갉은 색채와 선 그리고 회화의 구도가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그림의 탄생이다.


희랍의 전설에는 회화와 조각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한 청년을 마음에 품은 소녀가 그와의 이별을 앞두고 상심하여 앓게 되자 소녀의 아버지가 그 마음을 알고 그 청년의 옆얼굴이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따라 윤곽의 선을 그리고 색을 칠했다.

곧 청년과 꼭 닮은 릴리프, 즉 그림과 조각의 중간인 부조가 생겨났는데 딸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그림자를 그림으로, 조각으로 옮긴 이야기는 상징적이라기보다 사실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벽을 긁는 것, 벽에 어리는 그림자, 그리고 벽 너머로 사라질 연인에 대한 그리움.

긁는 것, 그림자, 그림, 그리움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따로 떨어져 불리던 그 말들이 하나의 초점으로 합쳐지면서 떼어낸 달력의 벽면 윙는 글과 그림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하나의 관자놀이처럼 뛴다.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벽은 무엇일까?

저자는 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할 때 그 주제를 '벽을 넘어서'라고 했다.

그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도 철의 장막이 무너졌으니 서구 문화는 즉 벽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다.

도시든 개인의 삶이든 무엇이든 간에 두꺼운 벽을 기본으로 이루어지니깐.

성벽 안에 세워졌던 도시들로 이루어진 서양만 봐도 그렇다.

유럽은 섬이 아닌 대륙인데도 성벽이라는 제한된 도시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일찍이 고층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도시가 커져도 옆으로 퍼지지 못하고 위로 치솟아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양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두께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말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가 있는데, 그만큼 벽이 얇고 허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서양 집은 대개 적조식으로, 돌이나 벽돌로 벾을 쌓아 만든 것이다.

거기에 비해 한국 집은 가구식이라고 하여 기둥을 세워놓고 집을 지은 비내력벽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한옥은 벽을 터도 무너지지 않지만 양옥은 집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Ⅲ 전통 물건에 담긴 한국인 생각


전통적인 물건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 뜻이 담겨져 있다.

문풍지와 한복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은 정밀함에서 문화의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적당히 문을 짜서 단 후에 틈이 생기면 문풍지로 막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반면에, 일본은 융통성보다는 정확성에 중점을 두어 문을 닫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꼭 들어맞도록 만들기에 문풍지라는 것이 없다.

바지, 버선 그리고 되질, 말질 등도 치수를 무시하곤 한다.

즉, 한국의 멋은 약간의 비규격이 있는 멋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양의 양복 바지는 기능주의, 합리주의를 지향해서 허리춤에 꼭 맞도록 만들었었다.

반면, 한복 바지는 인체의 허리 부분은 밥 먹을 때와 굶었을 때가 다르고 건강할 때와 병을 앓고 있을 때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치수를 재서 만들었기 보다는 풀어 입을 수도 있고 조여 입을 수도 있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저자는 전통 물건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바로'융통성'이다.


치수가 잘못되면 사람이 옷에 몸을 맞추어야 하는 주객전도의 양복 문화, 그것이 인간 소외 현상을 낳는 것이라면, 넉넉한 한국의 허리춤은 끝없이 인간을 감싸주는 융통성 있는 문화의 상징이다.


서양은 자아를 중심으로 개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어 그들의 문화는 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자아의 문화란 너와 나를 구별하는 방벽과 도시와 도시를 분리하는 성벽의 문화라 할 수 있다.

한국은 물론 동양권 시인들은 두꺼운 벽이 아닌 병풍을 둘러치고 작업을 하였다.

병풍은 가볍고 신축성 있는 벽으로, 펴면 벽이 되고 접으면 한 공간이 된다.


병풍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밝고 가동적인 벽이라고 할 수 있다.

병풍의 가동성과 신축성은 한국을 비롯한 동양적 기술의 원형이며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를 나누는 가장 상징적인 경계다.

즉, 병풍의 공간은 하나이면서 전체인 것이다.


(지금은 없지만) 어릴 적에 외가집에 가면 큰 병풍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저 보기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일종의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벽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 또한 누군가의 작품이었다고 하니 그때 봤던 병풍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다.

병풍이 다락방 옆에 있었기에 더 쭉 피면 조그마한 공간이 새로 만들어져 그 안에서 동생과 함께 놀기도 했다.

8살과 6살이 뭘 알겠냐마는 이미 그때 느꼈던 것이었다.

병풍의 공간은 하나이면서 전체라는 것을.




2022년 2월 26일.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셨던 이어령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쓰셨던 작품 중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이 무엇이었는지 책결산을 살펴보니 『너 어디에서 왔니』였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작품들을 적지 않게 읽었었고 책장에 있는 그의 책들을 살펴보니 80년대에 출간된 책도 가지고 있었다.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은 다름아닌 엄마의 책이었다. 20살이 되고서부턴 책을 더 읽었다는 엄마도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외가집에 가면 오래된 LP부터 핑글핑글 돌려서 거는 전화기 그리고 책이 다락방에 가득해 병풍을 친 뒤 다락방으로 올라가 동생과 함께 탐험 놀이를 했었다.

그러다 다락방에서 엄마 이름을 새겨놓은 책 한 권을 보게 되었고 오래된 책이 신기해 그 책을 들고 다락방에 내려왔었다.

아, 그러고보니 내가 이어령 작가님의 책을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에 집으로 데리고 왔으니, 그 책을 중학교 1학년 되는 시기에 읽었었다.

참 신기하다. 책 한 권으로도 나의 과거의 흔적들이 생각난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소재로 생각될 수 있는데 소재 하나로도 이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 생각이 이어진다.

국문학과도 가고 싶었던 학과 중 하나였는데,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비슷한 과목이 교양으로 나와 한 번 들은 적이 있었었다.

그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어령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었는데, 그 때 다시금 느꼈었다.

'역시 지성인이 맞구나. 지성인이구나!'


2월 말, 이어령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선 그와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기 위해 3월에 새로운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 책이 바로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이다.

14년 전, 「날게 하소서」란 제목의 시에 구술 해설을 입혀 서문을 완성한 책으로 열 세가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메시지를 꼭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 소개해 보았다.

앞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고 표현하였었다.

틀에 박힌 생각은 결국 제자리 걸음하는 것과 다름없어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될 수 있다.

틀에서 걷히는 순간, 그 때 창의적 사고가 발휘되는 것이다.

에세이지만 사고에 대한 메시지가 분명해 인문서와 다름없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책은 3월에 읽었는데 3개월만에 올리게 되었다.

쓰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이제야 재독하고 제대로 올리게 되었다.

책을 읽고선 글쓰기 노트에 정리를 마친 후에야 글을 쓰는 것인데, 지금까지 쭉 해왔던 방법이지만 바꿔야 하나 생각중이다.

아날로그적인 방식은 느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새는 노트북 앞에 앉다가도 아프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니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아 더 느려지고 더 느려진다.

그럼에도 쭉 고수해 왔기에 쉽게 바뀌어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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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6-16 0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어령님 마지막 병실에서도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하셨다고 합니다
육체의 고통과 쇠락의 끝자락에서도 글과 그림을 그리며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정신력에 탐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책장 스케치 멋져요
알라딘 이달의 굿즈로 줬으면 ㅎㅎㅎ

하나의책장 2022-07-17 18:26   좋아요 0 | URL
역시 시대의 지성이셨던 분이네요.
마지막 병실에서도 스케치하고 채색하셨다니.. 저 또한 그 정신력에 탐복했습니다!

오늘도 역시나 꽤 덥네요.
한여름인 8월에는 얼마나 더울지;
scott님은 주말 시원하게 잘 보내셨나요?^^
 
우리는 이미 여행자다 - 일상이 여행이 되는 습관 좋은 습관 시리즈 13
섬북동 외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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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해외여행 수요가 급증한 것을 보니 이제야 조금씩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이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코로나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여행의 욕구를 해소시키고 있었을까?


저자, 섬북동은 2011년 11월 서울 출생으로 양손잡이다.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이십 대로도 보고, 오십 대로도 보는 신기한 외모다.

사정상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을 떠돌며 자라 딱히 서울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힘들다.

카피라이터, 드라마 작가, 영화 마케터, 번역가, 디자이너 등의 직업으로 밥벌이를 한다. 책을 좋아한다. 아니, 그보다는 책을 읽고 나서 떠드는 걸 더 좋아한다. 그렇게 10년째 격주 토요일마다 떠들어댄 결과물은 브런치 ‘뒷book’에 기록하고 있다.

애인과 나란히 캠핑 의자에 앉아 책 읽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지만, 까뽀에이라로 몸을 만들고 시장이나 온라인에서 구입한 식재료로 요리하는 것도 즐긴다. 주말에는 따릉이를 타고 한강을 달리며 노을 지는 하늘을 구경하기도 한다.

다양한 부캐를 품고 살아가는 나를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섬북동 씨~'

참고로, 섬북동씨 안에는 7인의 여행자가 있다.




Ⅰ 방구석 생존 여행


뉴욕의 봄. 드디어 뉴욕에도 봄이 오나 보다. 두꺼운 파카를 벗고 올해 처음으로 코트를 입고 출근했다. …… 퇴근길, 강 너머로 보이는 뉴욕 도심 풍경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 친구와 헤어져 돌아가는 귀갓길, 강 너머로 내다보이는 불 켜진 뉴욕 풍경.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주말 아침. 오늘은 전철을 타지 않고 걸어서 골목 구석구석을 걷다, 다리 건너 루즈젤트섬으로 가본다.


후쿠오카의 여름.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시작됐다. 커피에 얼음을 잔뜩 넣어 냉동실에 잠시 넣어뒀다. 그 사이 빵을 한 장 꺼내 굽는다. 밤새 더위에 잠을 설친 뒤 조금은 멍한 여름날 아침에는 역시 믹스 커피가 좋다. …… 오늘은 아침부터 미용실에 가기로 했다. 마스크에 양산까지, 요즘은 나가려면 챙겨야 할 짐이 너무 많다. 이 더위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려니 괴롭다. 언제쯤 마스크를 벗게 될까? 이러다 친구들 얼굴도 잊을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며 세계 여행지가 담긴 책을 읽고 있으려니 얼른 여행을 떠나고 싶다. 사우나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푹푹 찐다. 그래도 이제 8월 말이니 이 여름도 어느새 끝나겠지.


에든버러의 가을. 스코틀랜드에 오고 난 이후에는 모든 계절을 사랑하게 됐다. 특히 햇볕이 귀한 나라에 오니 가을 햇살은 더 귀하고 사랑스럽다. …… 토요일이라 외출을 감행했다. …… 제일 자주 사고 또 좋아하는 기념품은 에코백과 책갈피다. 흔해 빠진 것 같아도 오래 그곳을 기억할 수 있는 부담 없는 선물이다. 폐장 시간이 다 되었다. 바깥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더 해가 짧아지는 계절로 들어서고 있다.


스톡홀름의 겨울. 아침을 먹은 다음 든든히 껴입고 딸, 남편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 남편은 딸의 썰매에 줄을 매달아 끌고 눈 쌓인 길을 앞서간다. …… 겨울이 길어서 힘들지만 날씨가 좋은 날은 지상의 풍경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눈 쌓인 꽁꽁 언 호수 위로 우리처럼 해를 보러 나온 사람들의 발자국이 길게 찍혀 있다. …… 거의 한 달 만에 해가 뜨는 날, 이런 날을 놓칠 수 없어 온 가족이 근처에서 썰매를 타기로 했다. 도시가 온통 눈 천지다. 양옆으로 늘어선 삼나무 위에도 하얗게 눈이 쌓였다. …… 요즘은 오후 한 시가 넘으면 해가 진다. 그러니 더욱 부지런히 움직여 해가 떠 있는 시간을 즐겨야 한다. 다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던 <HEYJOO>

남편과 딸과 함께 스웨덴에 사는 <펩선PEPSUN>

뉴욕에서 회사에 다니는 <배배 뉴욕BaeBae NY>

남편과 후쿠오카에 살며 일상을 공유하는 <윗시 wish>

옷도 음악도 취향도 감각적인 뉴욕의 <정윤 UniAvenue>

영국 런던에서 회사에 다니며 집안과 출퇴근 생활을 담아 올리는 <Yookyung's Day유경데이>

앞서 각 나라의 계절을 묘사했던 일상이 바로 위와 같이 나열한 유튜버들의 일상이다.


코로나로 인해 국내는 커녕 집에만 갇혀 있다보니 여행을 '낙'으로 살았던 이들에게 특히 유튜브는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낙이었을 것이다.

유튜브 외에도 패션을 통해 현지를 느낄 수 있는 브랜드, 가고 싶은 나라의 특색있는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맛 그리고 화면으로 만나는 영화와 드라마, 글로 만나는 책 등을 통해 방구석에서 여행을 떠났으리라.

나는 여행이 너무 고플 때 어떻게 하더라?

책 중에서도 특히 여행 에세이를 보고 외국 영화 중에서도 「Midnight in Paris」 등을 보고 굳이 드라마나 예능으로 여행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꽃보다 누나」, 「꽃보다 할배」를 보곤 한다.

여행 에세이는 일반 여행서와 달리 저자의 관점에서 재미있게 풀어쓴 글이기에 읽다보면 같이 여행하는 느낌이 절로 들게 된다.

글과 그림이 동시에 같이 움직이면서 당시 저자가 느꼈던 느낌들도 함께 느낄 수 있기에 여행 에세이는 특히나 함께 하는 재미가 있다.

영화를 많이 보고 드라마, 예능은 거의 보지 않는 편인데, 여행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는 꼭 「꽃보다 누나」, 「꽃보다 할배」를 본다.

꽤 오래 전에 방영했었던 아임 리얼 시리즈나 잇시티도 어렸을 때 보던 기억이 선명해 가끔 보곤 하지만 그래도 나의 픽은 현지 느낌을 잘 느낄 수 있는 영화인 것 같다.

더 추가하자면, 바로 유튜브이다!

몸이 좋질 않아 어쩔 수 없이 집에 콕 박혀 있을 때 유튜브를 보곤 했는데, 유튜브는 새로운 것을 터득하고 습득할 수 있는 공간으론 최고인 것 같다.

온갖 학습의 장인지라 전문가들의 교육이 담긴 영상과 다큐멘터리 위주로 보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어느 순간 RECIPE나 DAILYLIFE에 빠져 (해외) 일상, 여행 브이로그를 보다보면 순식간에 1-20분이 훅 지나간다.

책에서 나온 채널 영상을 한 번씩 쭉 봤었는데 저자가 이렇게까지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박에 알 것만 같았다.




Ⅱ 집 밖 일상 여행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프리랜서 생활로 돌아오면서는 조바심이 났는지 일을 무리하게 받았다가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 정도로 깊이 가라앉았지만, 어떻게든 일어났다. 그러고 무작정 걸었다. 언덕을 넘어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옆 동네 마트라도 갔다.


2만 4,905걸음. 제주에서 돌아온 문언니의 소환에 금요일 밤 공덕역으로 향했다. …… 공덕 꽃길을 걸어 어느새 홍대입구역까지 왔다. 헤어지기 전, 홍대입구역 7번 출구 앞 노점에서 문언니는 한 다발에 5,000원 하는 '옥시'라는 꽃을 하나씩 사서 안기고는 사라졌다. 옥시의 영어 이름은 'starflower'. 별을 꼭 닮아 붙은 이름이란다. 밤 11시에 퇴근하면서도 벚꽃을 보면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는 옥 언니, 제주가 너무 좋다면서도 서울에 오면 외국이라도 온 것처럼 탄성을 질러대는 문 언니. 나와 봄밤을 같이 걸어 주는 별처럼 따뜻한 친구들. 휴대폰을 보니 2년 전에 갔던 부다페스트 여행에서 비틀거리며 걷고 또 걸었던 그 날의 걸음 수가 나왔다.


1만 3,219걸음. 7시에 일어나 30분 정도 걷고 돌아와 아침 글쓰기를 한 뒤 30분 정도 요가를 했다. 달걀 두 개를 꺼내 삶고, 그 사이에 머리를 감았다. 오늘은 연남동까지 걸어가서 일할 계획이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좋은 점 한 가지는 평일 오전 시간에 카페를 한적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날 저녁에는 합정역에 살다가 얼마 전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친구를 만났다. ……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팔을 휘적대며 꽃잎을 잡느라 분주했다. …… "저기저기, 저거 잡아!" "와앗! 2021년 대애박!" 용케도 내 손 안에 꽃잎이 들어왔다. 우리는 부적이라도 되는 듯 휴대폰 케이스 안에 꽃잎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에는 꼭 다시 떠날 수 있게 해달라는 소망도 함께 넣었다.


2만 2,327걸음. 윤문 일을 같이하기로 한 선배와 일을 준 회사의 대표와 광화문에서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동네 친구에게 맥주 한잔하자는 연락이 왔다. 오늘은 어차피 일하긴 글렀다. …… 친구와 나는 어느새 만석이 된 가게를 나와 배도 꺼뜨릴 겸 연남동 카페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아직 밤공기는 쌀쌀하다. 그래도 이 시간에 걸어 다닐 수 있는 계절이 왔다는 게 믿을 수 없이 좋다. 하루 건너 하루 보는 사이인데도 도통 마르지 않는 수다를 떨고 횡단보도에서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섰다. 걸음 수를 확인한다. 또 해외여행 다녀온 기분.


1만 9,878걸음. 다음 날 점심엔 효창공원까지 걸어가 친구와 각자 싸 온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 카피라이터 생활을 접기로 한 12년 전, 친구가 살고 있던 미국 버클리에 작은 집을 빌려 3개월간 영어 수업과 도서관, 마트만 오가며 한가롭게 지냈던 시간이 가끔 그립다. ……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이와 시간, 지금 이 시간도 몇 년 뒤에 뒤돌아보면 또 다른 추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 언제나 지금이 내 인생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1만 6,379걸음. 거의 3년 만에 알고 지내던 편집자에게 연락이 왔다. 마지막에 만났을 때 나는 잡지사에 들어가기 전이었고, 편집자는 출판사를 막 그만둔 뒤였다. …… 새로 작업할 책이 든 가방이 든든하다. 새 책을 번역하는 기분은 새로운 도시에 처음 발을 내딛는 기분처럼 언제나 두근거린다. 이 도시에 내가 모르는 즐거운 이야기가 더 많기를 바랄 뿐.


1만 3,895걸음. 작년에 번역가 작업실에서 나온 뒤부터는 작업하는 공간이 늘 고민이었다. 카페를 가자니 밥 먹기도 애매하고 오후가 되면 사람이 많아졌다. 도서관은 좀 답답하기도 하고 방역 시간이 있어 자리를 비워야 할 때도 있었다. 물론 집은 그보다 더 답답하고 침대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 여름처럼 더운 날이다. 날씨가 더워지니 2년 전 가을, 언니네가 사는 캄보디아로 떠났던 날이 떠오른다.


1만 9,883걸음. 작업료가 입금된 기념으로 함께 일한 선배가 밥을 사고 내가 커피를 사기로 했다. 오랜만의 이태원 약속. …… 오후에는 동네 친구의 생일 축하 겸 집들이 모임을 다녀왔다. 이사 당사자이자 생일자인 친구는 어제 미리 봐 둔 장으로 화려한 손님상을 차려냈다. 실컷 배부르게 먹고, 배도 꺼뜨릴 겸 불광천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나는 걸으며 여행의 감각을 기억해내려 한다. 새로운 골목과 나무와 풍경을, 친구와 함께 와야지 어느새 다짐하고 있는 식당과 카페를, 그리고 잊은 줄 알았던 여행자의 기분을.


반복적인 루틴에서 조금의 산뜻한 순간을 더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이것 또한 여행이 아닐까 싶다. 집 밖으로의 여행!

누군가는 플랭크를 통해, 다른 누군가는 만 보 걷기를 통해, 또다른 누군가는 자전거를 통해, 달리기를 통해 집 밖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나는 '산책'을 통해 즐기는 편이다.

어느 한 곳에 탁 내려놓으면, 그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적당한 걸음을 유지하며 걷고 있는 그 곳들을 눈에 담는다.

언제부터 이렇게 걷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생각이 많을 때, 여유로움을 느껴보고 싶을 때, 새로운 것을 담고 싶을 때,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걷곤 한다.




Ⅲ 기억에 기댄 여행


여행을 통해 남기는 모든 것은 곧 추억이 된다.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기념품은 역시 사진이다.

휴대폰으로, 카메라로 곳곳을 담아내면, 이후 사진을 통해 그곳에서 있었던 일부터 감정까지 순식간에 되새길 수 있으니깐.


그 외에 꼭 챙기는 것이 있다면 엽서와 마그넷 그리고 영수증이다.

엽서와 마그넷은 그렇다치지만 누군가에게 영수증이라고 말하면 갸우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영수증은 최고의 기념품 중 하나이다.

어차피 버리기에 대부분 영수증을 받지 않지만, 나는 다녀온 곳의 영수증을 테이핑처리하여 일기장에 붙여놓고 그 때의 기록을 한다.

기억을 상기시킬 때 영수증은 사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아 모으고 있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진부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닐까. 다음 여행을 다 같이 기다린다. 반드시 찾아올 여행을.




나의 활동은 코로나가 딱 터지자마자 멈추었었다.

코로나에 호되게 당했었던 그 날들이 조금은 두렵게 느껴져 아직도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코로나도 잠잠해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아프기도 정말 아팠었고 지금도 후유증이 심한 편이라 아직은 무섭게 느껴지나 보다.


코로나 터지기 두어 달 전에 갔던 제주도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었으니 반년 이상을 집과 병원에서만 맴돌았다.

한 두달에 한 번씩 갔던 미술관이나 전시회 그리고 꾸준히 VIP이었을 정도로 자주 갔던 영화관도 코로나 터지자마자 발길을 뚝 끊었으니깐.


그러다 6월 첫째주부터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외식을 하고, 외출다운 외출을 하고, 여행을 하고, 극장을 가고.

원래의 일상인데 이 모든 것들이 올해 처음으로 한 일이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 어디에 감금되어 있었던건가 싶을 정도로 헛웃음이 난다.

그런데 갇혀있었다는 느낌을 크게 받지는 않았다.

저자들처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나만의 방법들을 통해 답답하고 지친 마음을 나름 위로해줬었으니깐.


일상을 여행처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습관을 잘 습득한다면 단순히 코로나때문만이 아니고 지친 일상 속에서 한 줌의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코로나가 끝나는 시점에서, 온라인으로 이루어졌던 것들이 오프라인으로 다시 전환되면서 이전에 빡빡하게 느껴졌던 삶을 다시금 느껴야 할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생각해보라. 이전의 삶이 평범한 우리네 일상이긴 했지만 단점도 있지 않았던가!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면서 본인에게 정신적으로 이로웠던 점도 있었을 테니깐.


책상에 잔뜩 쌓아놓고 공부할 수 있었고,

책도 잔뜩 읽을 수 있었고,

그간 봤던 영화와 미드들을 다시 볼 수 있었고,

피아노, 가야금 외에 하프와 기타를 시작할 수 있었고,

마스크 꼭 쓰고 늦은 저녁 산책을 할 수 있었고,

마당 한 켠에 나만의 조그마한 텃밭이자 식물원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사진으로도, 글로도 남겼으니

나는 이미 여행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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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6-16 0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코로나 후유증으로 고통 받으셨다니 ㅠ.ㅠ
유월 맑은 공기로 심신의 휴식과 평온을!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여행은 이제(비행기 타고) 목숨을 걸어 야 하는 시대가 된것 같습니다 ㅎㅎㅎ

하나의책장 2022-07-13 21:27   좋아요 0 | URL
코로나 걸렸을 때도 정말 아팠었는데 이제는 후유증으로 고생중이니.. 참 답답해요ㅠ
몸이 아프다보니 잠수 아닌 잠수를 타게 되네요ㅎㅎ
저는 미각, 후각 돌아오는 것만 해도 6개월이 걸렸었는데 완벽하게 돌아오지는 못하고 후각 신경에 조금 이상이 있는 것 같아 시간이 약이라 생각하고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어요. 사실 후유증이라고 해도 별 것 없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ㅠ
정말, 건강이 최고임을 절실하게 느꼈던...^^

요새 정말 미국으로, 유럽으로 여행다녀오기 시작하더라고요.
많이 부럽긴 하지만 전 아예 백신을 안 맞은 상태인지라 해외여행은 지금도 여전히 꿈도 못 꿀 일이에요>.<

요새 코로나 확진자가 알게 모르게 더 늘어난 상태라 병원에서도 조심하라고 했으니 여름 휴가는 생략하고 추석 연휴가 끝난 이후에 상황 봐서 국내 어디라도 다녀오려고요ㅎ
scott님은 여름 휴가계획 있으신가요?
 
설레는 오브제 - 사물의 이면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궁리가 있다
이재경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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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당신은 무엇을 수집하시나요?

수집에 취미가 없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남들처럼 평범하게 모으는 무언가 혹은 상상치도 못한 특별한 무언가를 모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오브제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품이나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한 후 작품에서 사용해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물체를 일컫는다.

즉, 사물 하나에도 사연을 가지게 된다.


어쩌면, 막연히 평범해보이는 오브제지만 번역가인 저자에게 사물 하나도 이야기로 보이는 것만 같다.

그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치 고전부터 현대를 배경으로 타임슬립하며 영화 한 편 보는 기분이 들 것이다.


저자, 이재경은 서강대학교 불어불문과를 졸업했다.

경영컨설턴트와 출판 편집자를 거친 월급쟁이 생활을 뒤로하고, 2010년 전업 번역가가 됐다. 번역가는 생각한 만큼, 겪은 만큼, 느낀 만큼 번역한다.

자기객관화와 감정이입에 동시에 능해야 한다. 그간의 내 이력이 밑천이요, 비전공자로 산 세월이 저력이었다.

어느덧 번역이 가장 오래 몸담은 직업이 됐다. 밑천이 바닥날까봐 번역가의 참호 안팎에서 틈틈이 소소한 모험을 추구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거기서 얻은 발상과 연상을 기록한다.

산문집 『젤다』, 시집 『고양이』, 고전명언집 『다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해』를 엮고 옮겼고, 『편견의 이유』 『쓴다면 재미있게』 『깨어난 장미 인형들』 『민주주의는 없다』 『바이 디자인』 『소고기를 위한 변론』 『가치관의 탄생』 『셜로키언』 『뮬, 마약 운반 이야기』 등 50권 넘는 책을 번역했다.




Ⅰ 소소한 모두스 오페란디


지난 시대의 실용, 장식이 되다! 【뱅커스 램프】

"특정한 분위기가 있지만 놀랍게도 어느 공간에나 어울린다.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위에 올라앉아 있어도 멋스럽고, 차가운 철제 가구 사이에서도 멋진 포인트가 된다. 어둠 속에서는 고양이 눈처럼 빛나고, 데이지 화분 옆에서는 더없이 정겹다."

초록색 유리 갓과 황동 받침대 그리고 쇠줄 스위치가 달린 탁상용 전등!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영미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이템으로 일명 뱅커스 램프이다.

뱅커스 램프는 영롱한 초록색 유리 갓이 포인트로 안쪽은 오팔처럼 유백색이고 바깥쪽은 에메랄드빛이라 불을 켜면 아늑하게 밀도감 있는 빛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뱅커스 램프라 불리우는 것일까? 은행보다는 법정과 도서관에 더 많이 등장하는 느낌이던데 말이다.

분명한 것은 녹색이 피로를 덜어주는 색이기에 아마 장시간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애용했을 것이고 은행업 종사자를 비롯해 장시간 장부를 보며 계산하는 사람들이 녹색 바이저를 쓰고 일했다는 것이다.

초록색 갓이 달린 전등을 뱅커스 램프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이렇게 시력 보호용 바이저라는 꽤 실용적인 연결고리가 있다. 아니, 있다고 추정한다.



참을 수 없는 수집의 가벼움! 【페이퍼백】


책을 정리했다. 눈 딱 같고 정말 많이 버렸다. …… 20대부터 가방에 늘 한 권씩 넣고 다니며 출퇴근길에, 카페에서 누구 기다릴 때, 짬짬이 버릇처럼 읽던 작은 책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쓰인 텍스트와 '먹고사니즘'과 상관없는 내용은 뇌의 정보처리 프로세스가 평소 닿지 않던 구석들을 은밀하게 자극하는 쾌감을 주었다.


페이퍼백은 대중적 수요가 있는 책을 값싼 종이로 다시 찍어낸 보급판 종이커버 책을 말한다. 즉, 하드커버, 페이퍼백 두 가지로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양장본 아니면 반양장본 식이라 외국과는 조금 다르다.

나 또한 외서를 구입할 때 소장가치가 있는 것은 하드커버로 구매하고 단순히 읽기만 할 책들은 페이퍼백으로 구매한다.


나는 페이퍼백 책들을 한참 버리다가 문득 미련이 생겼다. 그래서 마지막 몇 권은 충동적으로 표지를 뜯어내고 버렸다. 표지만 남겨서 뭐할 건데? 나중에 메모장 만들 때 표지로 쓰자. 아니면 북마크로 활용? 아니면 카드 대용으로? 껍데기의 용도 변경. 껍데기의 재해석.


저자의 말처럼 참 동감하는 것이 사람의 수집욕이란 참 묘한데서 황당한 핑계로 발동한다.

사실 나도 이렇게 책을 수집할 줄은 몰랐다. 지금은 북카페를 차릴 정도의 책을 가지고 있으니 10년, 20년 후에는 도서관을 세워야 할 지도 모르겠다.

책장으로 데려온 만큼 선물하고 버리고 팔고 있는데도 금세 채워지는 건, 내 책장에 꼬마 마법사가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페이퍼백들의 표지만 남겨둔 것도 한때 읽은 것에 대한 일종의 목록화다. 하지만 거기에는 가치의 고백(의지)도 선혐의 발현(운명)도 없었다. 그저 충동적 미련이 남긴 경험의 조각들이었다.


책을 읽고 수집하기도 하지만 책에 있어서 꼭 수집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책을 찍은 사진이다.

사람도 프로필이나 증명사진을 찍듯이, 나 또한 새롭게 들어오는 책들의 사진을 꼭 남겨준다.

예전에는 책표지를 인쇄하여 독후감을 쓴 후에 붙여넣는 식으로 글쓰기 노트를 채워갔었는데 나의 실수로 인해 글쓰기 노트 절반 이상이 쓰레기통 신세가 되어 그 때 이후로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남기다 보면, 쌓여가는 기록물이 되고 이는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나'를 표현하기도 하니깐.



Ⅱ 일상의 궤도 밖에서


지구 서식자의 행복! 【에스프레소】

1996년 7월, 나는 브장송을 떠나며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이켰다. 프랑스에서는 그냥 "커피 주세요." 하면 우리가 아는 에스프레소가 나온다. 커피가 곧 에스프레소다.


우리나라에서 밥을 깨작거리는 것만큼 프랑스에서는 커피 한 잔을 오랫동안 홀짝 거리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에스프레소와 에스프레소 음료, 그 중 카푸치노를 수없이 마셨다는 저자는 특히나 20대의 어느 여름 브장송 기차역에서 3.8프랑 내고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플랫폼을 바라보며 선 채로 마셨던 그 에스프레소가 최고였다고 찬사한다.

그 때만 해도 번역가가 되어 처음 번역하는 책이 커피의 역사에 관한 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니 인상깊었던 첫 경험은 평생 가는 것 같다.


에스프레소는 원두를 곱게 갈아 다져 넣고 뜨거운 물을 고압으로 통과시켜 빠르게 추출하는 커피로 열대 원시림의 축축한 바닥에서 자라던 작은 나무가 커피 전용 추출 기계의 발명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6세기 말, 커피콩이 유럽 대륙에 처음 상륙했지만 커피머신은 파리 만국박람회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이후 이탈리아 장인들의 손을 거치며 발전되었다고 한다.

espresso는 이탈리아어로 '특급'을 의미하는데, 십여 초만에 커피가 완성되는 추출 속도를 반영한 이름이다.

또한 '특별히'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주문 순서대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한 잔씩 뽑는 것이니 이 의미도 들어맞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에스프레소는 지구 서식자의 행복이라고.

삶의 애착을 일으키고 무위에 짜릿함을 주고 집중의 고통을 덜어주는 각성의 영약이라고.



도시 산책자의 자의식! 【트래블러 태그】

트래블러 태그는 여행자의 신분을 부여함으로써 능동적 자기 보고라 할 수 있다.

초현실의 경험을 제공해주는 여행자의 신분을 제대로 누린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소설가 스콧&젤다 피츠제럴드 부부이다.

집 없이 유럽과 미국의 호텔들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젤다는 호텔을 "세상사에 포위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 여행자의 신분이 되면 생활에서 분리되어 관찰자의 자의식을 얻게 된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질수록 여행이 더 간절해진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설레고 참 좋을 수밖에 없다.



Ⅲ 욕망의 부득이함


시간을 밀봉하다! 【차통】

땅이 넓고 생산물이 다양해 자국 생산만으로도 충분했던 중국은 아쉬울 게 없었다.

17세기 중반, 중국 차는 포르투갈에서 시집온 왕비를 통해 영국 왕실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 이후로 차 문화가 왕실에서 귀족층으로 퍼졌고 산업혁명 이후에는 중산층, 서민층에게까지 퍼지면서 차 수입량이 크게 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차' 문화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중국이 아닌 영국부터 떠올리게 된다.

중국과 맞교역할 수 있는 아이템이 없었던 영국은 그 금액을 은으로 지불하면서 심한 국부 유출을 겪었는데 이를 뒤집기 위해 수를 쓰게 된다.

바로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에 밀수로 유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영국의 차 열풍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편에 중독되었고 이를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청나라의 선종이 아편 반입 금지령을 내리게 되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를 영국이 그냥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빅토리아 왕은 곧장 전쟁을 일으켰고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전쟁이 나도 티타임은 꼭 해야 할 만큼 영국인의 차 사랑은 매우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저자는 이 차보다 티캐디로 불리는 차통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사치품이었던 차는 주인이 차통 뚜껑에 자물쇠를 달아두고 안주인이 직접 보관하면서 차를 냈다고 알려져있다.

그래서 부엌이 아닌 응접실에 어울려야 했기에 차통은 매우 화려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저자는 차는 꼭 향수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원래의 용도를 다한 후에도 녹을 훈장처럼 달고 추억과 앞날을 모아두는 용도로 쓰이니 담아둘 수 없는 것들을 담아두려는 인간의 노력 가운데 꽤 성공한 케이스라고.


대학교 때, 예쁜 카페에 가서 먹었던 홍차가 나의 첫 홍차라 할 수 있겠다.

밀크티는 먹어봤지만 순수하게 우린 홍차를 처음 마셨을 때의 느낌은 딱 이랬다.

'이게 무슨 맛이지?'

절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면서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만큼이나 차를 좋아하고 차에 대해 이해도가 높았던 언니에게 홍차를 배웠고 차츰 그 맛과 향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 때, 한창 틴케이스도 모으면서 커피보단 차를 많이 마셨었었다.

특히 버찌 그림이 있는 카렐 티를 참 많이 마셨는데, 마지막으로 언제 마셨었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4-5년 전에 시즌티를 직구해 마셨던 것이 마지막인 것 같다.

차통은 브랜드별로 특색있게 예쁘다보니 모으는 재미가 있긴 하다.

집에 있는 차통도 꽤 오래되었는데 시즌 틴케이스는 창고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연필꽂이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저자의 마지막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차통은 원래의 용도를 다한 후에도 녹을 훈장처럼 달고 추억과 앞날을 모아두는 용도로 쓰인다. 담아둘 수 없는 것들을 담아두려는 인간의 노력 가운데 차통은 꽤 성공한 케이스다.




'검색'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을 꼽자면, 번역가인 저자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직업적인 이유때문에도 검색하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이해하고 터득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사물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그녀는 사물이 지닌 물성을 넘어 감성을 소유하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갖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수집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된다.


당신은 무엇을 수집하시나요?

수집에 취미가 없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남들처럼 평범하게 모으는 무언가 혹은 상상치도 못한 특별한 무언가를 모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오브제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품이나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한 후 작품에서 사용해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물체를 일컫는다.

즉, 사물 하나에도 사연을 가지게 된다.


“매일 언어의 국경에서 텍스트가 건널 다리를 짓고 그림자처럼 참호 속에 숨습니다.”

사물 뒤에는 문화적 맥락이 쌓여 있을 때가 많다. 사물에 붙은 이름과 그것이 일으키는 심상도 그 맥락들과 무관하지 않다.

…… 우리가 읽는 텍스트는 거기 등장하는 사물들 뒤의 사연들까지 모두 합쳐서 완성된다.


엄마도, 동생들도 내 방에만 오면 꼭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신기하다는 것이다.

뭐 하나만 톡 건들이면 보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볼거리가 많아 이것저것 헤쳐보면서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다.

외할머니께서 그리고 엄마가 물려준 오브제도 물려받아 잘 보관하고 있을 정도로 희한한 것도 참 많다.

이 외에도 물건으로 보관하기 힘든 것들은 꼭 사진으로 남겨 보관한다.

그 사진이 곧 그 물건이리라.

앨범 속 사진 하나하나를 짚어내면 그것과 나의 추억을 저절로 읊게 되는 것이다.

수집가는 꼭 온전하게 사물의 모양을 유지시키며 보관할 필요는 없다.

저자의 말처럼 단순히 사물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 그리고 감성까지 수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물의 뒤를 캐다 보면 고전부터 대중문화까지 인문의 다양한 분야가 두루 소환된다. 사물을 매개로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지식과 감상이 얽힌다. 범주화가 없는 대신 교차점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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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죄송합니다 - 왜 태어났는지 죽을 만큼 알고 싶었다
전안나 지음 / 가디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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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현실이었다.

그녀에게 닥친 모든 일은 현실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손 내밀어 준 것은 바로 책이었다.

어떤 책이 그녀를 구렁텅이에서 꺼내준 것이었을까?


저자, 전안나는 19년 차 직장인이자 『1천 권 독서법』, 『기적을 만드는 엄마의 책 공부』, 『초등 하루 한 권 책밥 독서법』, 『쉽게 배워 바로 쓰는 사회복지글쓰기』, 『초등 6년, 읽기 쓰기가 공부다』 등을 쓴 작가이고, 전국을 다니며 독서법을 강의하는 강사이다. 아동 학대 트라우마를 벗어나려 노력하다 보니 아동·청소년 담당 사회 복지사가 되었고, 가정 폭력 전문 상담사가 되었고, 아동 인권 강사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오랫동안 몸 바쳐온 직장 생활에 대한 회의,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 등이 겹치면서 우울증과 식욕 부진, 불면증에 시달렸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던 중 기적처럼 독서의 기쁨을 알게 되어 하루 한 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100권을 읽자 불면증이 사라졌고, 300권을 읽자 미웠던 남편과 시어머니가 이해되고 관계도 좋아졌다. 500권을 읽자 삶에 대한 의욕이 다시 타올랐고, 800권을 읽자 책이 쓰고 싶어져 글을 쓰기 시작했다. 1천 권을 읽자 『1천 권 독서법』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Ⅰ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 다치바나 다카시


자기 역사를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즉 자신의 존재 확인을 위해서이다.


전안나

생년월일 1982년 2월 24일

출생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출생 신고일 1987년 12월 21일.

출처 입력


최초 공식 서류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이름도 생년월일도 모두 다르다.

저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처럼 태어난지 5년이 지나서야 양부모님 집으로 가게 된다.

바깥세상과 분리되어 존재 없는 아이들, 태어나서 죄송한 아이들이 대규모로 수용되었던 고아원은 1980년대부터 소규모 가정집 형태의 그룹홈으로 변해갔으며 한참 한국에서는 고아원이 번창하던 시기였다.

한편으론 마음 아픈 일이다. 그 시기가 대규모 입양 아동 수출이 이루어진 시기였으니깐.


무한도전에서 해외프로젝트 중 미국으로 입양된 딸과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의 만남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엄마는 아이를 낳았는지조차 몰랐고 집안 어른들은 또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핏줄을 버렸던 것이었다.

다행히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 훌륭하게 컸지만 이유가 참 황당할 수가 없었다.

실제 다른 입양 프로그램들을 보면 그 시기에 아이를 버린 이유가 참 어처구니가 없다.

고아원에 버렸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모두 해외입양을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또한 해외입양을 간다해도 모두가 안정적인 가정으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미국에서 아이를 입양할 시에 지원하는 보조금이 있어 이를 악용하여 아이를 마구잡이로 입양해놓고 방치하며 학대한 선례도 분명 있다.

버려진 이들의 잘못이 절대 아니다. 분명 버린 이들의 잘못인데, 그렇게 고아원에 버려진 이들은 오히려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짙은 남색에 둥근 아치형 철문으로 된 고아원 출입문이 생각난다.

안에는 생활관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고, 어린이집이 있었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여자아이가 살았고, 수용실처럼 널찍한 방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 여자아이들 십여 명이 함께 지냈다. 언니부터 동생까지 여러 명이 한방을 썼는데, 자다가 밤 12시쯤 되면 선생님이 우리를 깨우곤 했다. 이불에 오줌 싸지 말라고 일부러 깨워서 화장실에 보내는 것이다. 비몽사몽간에 긴 복도를 따라 줄을 서서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비몽사몽 잠을 자곤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언니들에게는 책상이 한 개씩 배정되었다. 나는 고작 다섯 살뿐이었지만 자기 책상을 가진 언니들이 부러워서 일부러 올라가서 앉아 보던 기억 조각이 있다.


어느 날은 어린이집 준비물이 우유갑이라 담당 보육 선생님에게 준비물을 말하니 마침 책상 위에 있던 우유 한 팩이 있었는데 이를 주욱 들이키더니 빈 우유갑을 그녀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게 참 먹고 싶어 스스로 애처롭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말한다.

"대개의 사람들의 최초 기억에는 강한 희로애락의 감정이 동반되어 있다.


저자의 최초의 기억은 '먹을 것'에 대한 슬픈 기억일까? 어린이의 마음을 읽어 주지 못한 '어른의 무심함'에 대한 분노의 기억일까? 지금도 남아 있는 '식탐'인 것일까?




Ⅱ 하염없이 작아지는 밤 |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유난스러운 자들이여,

온 힘을 다해 스스로의 특별함을 지키자.


화가 날 때 표현하지 않고 꾹 꾹 참는다는 저자.

간혹 그녀의 화가 겉으로 드러날 때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라고 한다.

그렇게 참고 참는 그녀가 2009년 5월 5일 태어나서 가장 분노했던 날이라고 한다.

그 날은 양어머니와 완전히 인연을 끊게 된 날이었다.

집안일을 해야만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었으며 대학 학비 내준 적도 없고 용돈도 없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근로 장학을 하고 총학생회 활동으로 봉사 장학금을 받다가 저녁에는 초등학생,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외를 하고 주말에는 마트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등록금을 충당하고 양어머니에게 생활비도 매달 주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양어머니가 급여 통장을 본인 명의 통장으로 바꾸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규정 상 그렇게 안 된다고 선을 긋고 급여 명세서도 보여주질 않으니 보란듯이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돈을 주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썼다고 하니 어렸을 때는 얼마나 심했을지 눈에 훤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결혼할 때 준다고 얼버무렸지만 돈이 적다며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6000만원이었다. 가져다 준 돈이 무려 6000만원이었지만 결국 저자는 3개월 할부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엄청난 욕과 함께 생활비를 요구했고 저자는 결국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보지 않고 전화를 차단하는, 소극적 저항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저자에게는 충분했다.

이렇게 양어머니를 해결하고 나니 이제 시어머니가 문제였다.

뜬금없이 불쑥불쑥 내는 화로 인해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병원에 데리고 가니 '화병'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시어머니 본인이 받았었던 시집살이의 울분을 주체할 수 없으니 애꿎은 며느리들에게 화살이 간 것이었다.

다행히 약을 먹고 치료를 하고 나니 고부갈등이 언제 있었냐는 듯 관계는 좋아졌다고 한다.


저자의 어린 시절을 낱낱이 듣지 않아도 눈에 훤할 정도이다.

그간 얼마나 힘들고 고되었을지 추측하기도 힘들다.

저자야말로 진즉 화병에 걸렸을 것이다.

미국 임상 심리학자 타라 브랙이 「받아들임」에서 말한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의 경계는 우리 자유의 경계"라고.


마음의 분노와 화를 잘 다루어 '자신 안에 있는 화와 분노가 있음'도 수용한다면 분명 꽉 차 있던 분노가 조금씩 사그러지지 않을까?


그냥 살아남으면 돼.

그게 다야.


그렇지만 살아남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보통 큰일이 아니다.

대단한 일이다.




Ⅲ 살기 위해 읽다 | 「수전 손택의 말」, 수전 손택·조너선 콧


엄청난 양을 읽었는데 상당 부분은 무념무상으로 읽었죠.

전 사람들이 TV를 보듯이 책 읽기를 즐겨요.

읽다가 잠들기도 하고요.

우울할 때 책을 한 권 집어 들면 기분이 좋아져요.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교통사고로 한 달간 입원했을 때 양아버지가 사다준 위인전을 계기로 저자의 생존독서가 시작되었다.

부모가 없다는 것, 입양되었다는 것, 학대를 받았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손을 뻗은 유일한 것이 책이었다.

그렇게 독서는 유일한 취미이자 친구가 된 셈이었다.


신실한 신자였던 양어머니는 새벽 기도를 가고 금요 철야 예배를 드리고 매일 성경을 읽고 성가대를 하고 전도를 하면서 수많은 영혼을 살렸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남편과 입양딸에게는 폭력과 폭언을 일상화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당화되는 법은 없다.

저자는 양어머니를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고자 성경까지 읽어봤지만 그것은 양어머니의 인성 문제였을 뿐이었다.


나는 충전기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배터리처럼 살았다.

사랑스러운 아이도, 직장도, 남편도 충전기가 되어 주지 못했다. 술도, 쇼핑도, 종교도 충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자, 책은 곧바로 충전기가 되어주었다. 마음속에 에너지가 살아났다. 오랫동안 방전된 핸드폰을 잠시 충전기에 꽂는다고 바로 100% 충전이 되지 않듯이, 처음에는 책 한 권 읽으면 5% 충전이 되었다가, 다시 책을 덮고 육아와 회사 일을 하다 보면 1%로 떨어지기를 무한 반복했다. …… 책은 나에게 충전기였다.




그간 버틴 것이 대단하다는 말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의 마음이 들었다.

저자에게 책은 충전기와도 같다고 표현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지 감히 예상해보지만 마음 속 생채기가 심할 것이라 생각한다.

참 희한한 게, 어린 시절의 상처는 억지로 지우고 싶어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어제 일인 것 마냥 선명하게 그려진다.


나에게 있어서, 책은 안식처이자 도피처이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이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이정표나 다름없다.

글쓰기 노트에 쌓여져만 가는 책들 중 나의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다.

그것이 나의 기록물이자 하나의 역사인가보다.

하루가 너무 아까울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데 나는 정작 그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모르겠다.


책 읽는 내내, 저자와 커피 한 잔씩 놓고 그녀의 지난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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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2-04-25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그 아이가 보육원 아이인 걸 몰랐지만 고아원에 초대받아 친구네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고아라는 티를 내지 않던 다른 아이들도 만나게 되어 그 아이들이 당황해해서 무척 놀랐던 적이 생각나요. 그 이후로는 누가 집에 오는 것도 싫고 제가 초대받아 가는 것도 좀 싫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또 친구네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고아원이어도 별 생각도 충격도 없이 그냥 고아원 동생들이랑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ㅋㅋ
버팀목이 없을 때 책만큼 위로가 되고 든든한 존재가 없는 거 같네요.
(물론 고아도 기아도 탁아도 있고 탁아의 비중이 높아 싸잡아 고아라고 말하면 좀 뭣하지만 요건 좀 봐주세요. ^^;;)

하나의책장 2022-05-03 23:05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사람한테서 위로받고 격려받으면 그만한 힘도 없긴 하지만 나와 가까운 사람들, 그러니깐 가족이나 친구 등 모두가 나에 대해 온전히 이해해준다고 할 순 없으니 온전하게 위로받고 격려받으려면 사실 책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정말 힘들 때 책장에서 책부터 마구마구 집어들어요ㅎ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보다 때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응원받고 격려받는 게 더 큰 힘이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항상 응원할게요, persona님^^

새파랑 2022-05-07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축하드려요 ㅋ 몸도 괜찮아지시고 좋은 날씨 5월을 즐겁게 즐기시길 바라겠습니다 ^^

하나의책장 2022-05-19 23:5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5-07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하나의책장 2022-05-19 23: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5-07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의책장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05-19 23: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굿밤되세요⭐️

서니데이 2022-05-07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05-19 23: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2-05-08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의책장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ㅎㅎ 책은 충전기 ㅎㅎ 공감합니다 ㅎ 읽을땐 충전되는데 리뷰쓸땐 배터리 떨어지는건 저 뿐이겠죠? ㅠ ㅎㅎㅎ 하나의 책장님 리뷰도 사진도 넘나 예뻐서 참 좋아요 ㅎㅎ 항상 힘내시고 건강하세요~

하나의책장 2022-05-20 00:04   좋아요 0 | URL
앗! 러블리땡님도?ㅎㅎ 전 정말 마무리짓지 못한 리뷰가 너무 많아요. 중반부까지 쭈욱 써놨으니 마무리만 지으면 되는데 쉽지 않네요ㅠ 항상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굿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