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 <티스베>(1909년)

 

"시기심 많은 담장이여.

왜 연인들을 방해하는 거니?
우리가 서로 온몸으로 결합하도록

네가 허락하거나, 그것이 과하다면

우리가 입이라도 맞출 수 있도록
네가 조금씩 열리는 것은

너에게는 얼마나 사소한 일이니?
우리가 네 고마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야,

우리의 말을 사랑하는 이의 
에 전해줄 통로가 주어진 것이

네 덕분임을 우리는 알고 있어."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183-185면

 

세월이 흐르면 곧 해묵은 기억이 되겠지만, 주말드라마 <내 딸, 금사월>이 후반부에 이르면서, 금사월이 친엄마에게는 철천지 원수인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선언하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의 반감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거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운운하는 금사월의 대사에 시정자들은 반응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가, 스토리는 그것이 일종의 속임수였음을 금사월이 친엄마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수습한 듯하다. 이런 해프닝을 보면서 느낀 바는 이렇다. 시청자들은 그간의 누적된 억울함을 지켜보았기에, 속시원한 '징악'을 바란다는 것.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아주 드문 사례의 해결이라고 할지라도 드라마니까, 영화니까, 드라마나 영화에서만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고자 하는 시청자들 마음을 읽는다. 드라마가 너무 복잡해졌지만, 어쨌든 작가는 사월(백진희)과 찬빈(윤현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능한 사랑으로 바꾸고자 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들의 사랑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불타오른다는 것이 사랑의 방정식 중 하나이니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린 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애절한 사랑 이야기 하나를 꼽으라면, 「퓌라무스와 티스베의 사랑」를 나는 선택한다. 이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한여름밤의 꿈』이다. 벽돌 벽을 성벽 수준으로 에워쌌다는 높다란 도시 바뷜론.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잘 생긴 퓌라무스와 동방의 모든 처녀들 가운데 가장 미인 티스베. 두 젊은이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이웃이다. 한데 두 집 사이에 놓인 담장은 어마어마하게 높아, 벽돌로 쌓았지만 성벽에 가깝다. 살다보니 서로 알게 되고 사귀다가 그 사랑이 깊어졌다. 머지않아 둘은 결혼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두 집안의 가장들은 자식들의 결혼은 물론이고 교제조차 무조건 반대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은 가까이 있으나 먼 두 집안 사이의 감정의 벽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장벽에도 틈새는 있다. 부실시공 때문에 생긴 하자(瑕疵), 아주 좁은 틈 하나가 있다. 벽에 금이 가 있는 것(하자는 틈 하(瑕)에 흠 자(疵)이다.) 이 틈새를 통해 두 연인은 목소리로 사랑을 나눈다. 막으면 막을수록 더욱 불타오르는 사랑!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갈구인지, 집안 어른들, 특히 가장의 독단에 대한 반항인지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의 로맨스에서도 통용되는 시츄에이션이다. 조건 없는 사랑이란 세파에 시달리며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두루 경험한 기성의 시각에는 철부지들의 불장난에 불과함에도. 

둘은 마침내 목소리만을 겨우 듣는 감질나는 사랑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진도를 나가자고 약속한다. 어둠이 내리면 감시자들을 속이고 대문 밖으로 나와 만나기로 결정한 것. 약속 장소는 집 밖 탁 트인 들판을 가로질러 어디쯤 무덤가에 서 있는 어떤 나무 아래다. 바뷜론 성벽을 쌓았다는 세미라미스의 남편인 나누스의 무덤가에 서 있는 뽕나무다. 그곳에는 "눈처럼 흰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키 큰 뽕나무 한 그루가 시원한 샘물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오로지 텍스트만으로 저편의 누군가와 소통하던 PC통신 시절, 사람들은 불원천리를 탓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차를 몰았다. 이처럼)

 

대문을 나선 티스베가 먼저 약속 장소인 나무 아래로 간다. 그런데 암사자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난다. 방금 소 떼를 습격했는지 주둥이가 온통 피투성이다. 달빛 덕분에 재 빨리 위험을 감지한 티스베는 부근의 어두운 동굴 안으로 피신하는데, 엉겁결에 목도리를 떨어뜨리고 만다. 연못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돌아오던 사자는 그 목도리를 발견하고는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렇게 티스베의 목도리에는 사자의 입와 입가에 묻는 피가 묻는다. 뒤늦게 약속한 나무로 향하던 퓌라무스가 바로 이 목도리를 발견한다. 모두 내 탓이야! 나 때문에 내 사랑 티스베가 처참하게 죽었구나! 퓌라무스는 절규한다. 그리고 티스베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그는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그는 상처에서 칼을 뽑았다고 한다. 파손된 수도관의 작은 틈새로 물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듯, 피는 청년이 쓰러진 자리 주변을 적시기 시작한다. 그의 피가 뿌려지자 나무의 열매는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그의 피에 흠뻑 젖은 뿌리와 거기에 매달려 있던 오디들도 자줏빛으로 물든다.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는 본래 다 익어도 흰색이었는데, 검붉은 색으로 열리기 시작했다는 '변신'설이다)

이쯤이면 사자가 갔을 거야, 내 사랑 퓌라무스가 진작에 와 기다리고 있을 거야, 티스베는 약속한 나무로 돌아오는데, 장소와 나무 생김새는 익숙한데 열매의 색깔은 그녀를 헷갈리게 한다. 그러나 잠시 후 자신의 연인을 발견한 티스베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연인의 칼로 티스베도 자결한다.


"죽음만이 그대를 내게서 떼어놓을 수 있었지만 죽음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어요.

..부모님들이시어. ..우리가 한 무덤에 함께 눕는 것은 시샘하지 말아주세요!"

티스베의 마지막 기도다. 그녀는 칼끝을 가슴 아래에다 대고는 연인의 피로 따뜻한 칼 위에 엎어져 자결한다. 그녀의 기도는 신들과 부모님들을 감동시켰고, 두 연인의 죽음을 지켜본 뽕나무 열매는 그때부터 오늘날처럼 익은 뒤에는 색깔이 검어지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을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BC43~AD17)  가 쓴 『변신 이야기』다.  이 책은 『신들의 계보』와 같은 당시에 현존하는 문헌이나 당대에는 현존하였을 신화 이야기에서 소재를 수집하여, 재창조한 이야기집이다.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처럼 도서관의 서지목록처럼 간결하게 정리된 신화집이 있기는 하나, 희랍의 신화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와 같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녹아든 형식으로 널리 유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서사시에 비하면 그보다 조금 후세에 집필된 『신들의 계보』는 서사시의 형식이기는 하나, 신들의 족보에 가까운 간결함이 있다. 본래의 신화 이야기를 호메로스처철 작품에 녹아들게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헤시오도스처럼 계보에 충실한 글을 통해 신화를 정리한 경우도 있다. 『변신 이야기』는 전자 호메로스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변신담'은 전설이 그에 걸맞는 증거물이 남아 있어야 하듯, 이후로 A가 B로 바뀌었다는 구체적인 사물이 있어야만 한다. 실제로 위에 소개한 오디가 다 익었을 때 오늘날처럼 검붉은 색을 띠게 되는 것은... 과 같은 이야기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이솝의 우화 한 대목에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214 강도와 뽕나무

강도가 길에서 사람을 죽였다. 강도는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쫓기자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를 버리고 도망쳤다. 맞은편에서 오던 행인들이 손이 왜 그렇게 더럽혀졌느냐고 묻자 강도는 방금 뽕나무에서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강도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뒤쫓던 사람들이 그를 따라잡았다. 그들은 강도를 붙잡아 뽕나무에 매달았다. 뽕나무가 강도에게 말했다. “당신을 처형하는 데 도움이 되어도 내 가슴은 아프지 않소. 살인은 당신이 저질러놓고 그 피는 나한테 닦으려 했으니 말이오.” 

이 우화의 교훈은 "본성이 착한 사람도 때로는 하찮은 자에게 명예를 훼손당하면 주저 없이 적의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변신 이야기』는 『이솝우화』보다 한참 후에 집필된 것이지만, 다루는 시대는 『이솝우화』가 화자되던 시대보다 앞선 때를 다루고 있다. 다만,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는 처음에는 푸른 색이다가 하얀 색으로 변하고 흐물흐물 농익을 무렵에는 붉다 못해 검은색을 띤다. 예전에는 명주실(비단옷의 재료)을 뽑기 위해 누에를 치고, 그 누에의 먹이가 뽕잎이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뽕나무를 '오디'를 확보하기 위해(잼이나 와인의 재료로) 재배한다. 열매가 완숙되면 보관성이 아주 낮아 흐물거리기 때문에, 수확기의 날씨나 투입할 적정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일년 농사를 한방에 망치기 십상이다. 조금만 신중했으면 좋았을 것을, 일부의 단서를 가지고 속단하여 죽음에 이르는 퓌라무스나 연인을 따라 죽음을 선택하는 티스베의 사랑처럼, 오디에 얽힌 변신 이야기는 완숙기의 오디 열매처럼 쉽게 떨어져버렀다. 어쨌든. 앞선 시대에 집필된 『이솝우화』가 훗날 집필된 『변신 이야기』보다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놓익은 검붉은 오디 열매의 표면에는 하얀 가루가 날려와 내려 앉아 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착안하여 '변신' 이야기가 재정리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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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오스트리아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봤습니다. 며칠 전 jtbc뉴스룸에서 최근 개봉영화 (<좋아해줘>) 홍보차 출연한 배우 이미연에게 손석희 앵커는. "칸막이가 있는 옴니버스 영화가 흥행한 사례가 거의 없죠,"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이 영화야말로 그러한 옴니버스 영화의 전형입니다. 2년 전에 국내에 소개되는데, 예술영화로 분류되어 개봉관 상연은 못하고 예술영화관으로 직행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영화 <셜리>는 여느 옴니버스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칸막이가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미국의 대표적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3편을 가지고,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미국의 30년대, 40년대, 50년대, 60년대 초반까지를 시대상을 스케치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 분류되는데, 13점의 호퍼의 그림을 재현한 세트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사람이 연기하는 것이지요. 막이 있는 연극을 영상으로 옮긴 느낌이랄까, 옴니버스라는 형식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ABBA의 히트곡으로 뮤지컬 <맘마미아>가 만든 것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장면이 시작될 때마다 세 가지씩 세계 곳곳의 라디오 뉴스가 제기되는 등 딱 그 정도로 시대상을 얘기합니다. 일종의 사진의 캡션(사진설명)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지요. 호퍼의 그림을 소품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어, 호퍼의 그림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영화를 제대로 음미하기가 어려운, 불친절한 영화인 셈인데, 그래도 이러한 실험 자체로 의미 있는 시도가 아니었나 그리 생각합니다.

<Hotel Room>(1931), <New York-Movie>(1939),

<Room in New York>(1940), <Office at Night>(1940),

<Hotel Lobby>(1943) <Morning Sun>(1952),

<Sunlight on Brownstones>(1956),<Western Motel>(1957),

<Excursion into Philosophy>(1959), <Woman in the Sun>(1961),

<Intermission>(1963), <Sun in an Empty Room>(1963), <Chair Car>(1965).

이상 13점이 영화에 사용된 작품인데요, 호퍼의 그림은 (국내 독자들에게는) 한 출판사의 피츠 제럴드의 소설 표지로 사용되어, 익숙한 그림들입니다.

 

 

 

 

 

 

 

 

 

 

 

 

 

 

=맨 왼쪽부터 표지의 삽화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간이식당>(1927), <293호 열차의 객실>(1938), <뉴욕의 방>(1932)임.

특히, '단편선2'에 사용된 그림, <Room in New York>(1940)을 배경으로 사용한 이 영화는 비록 내레이션뿐이지만 미국의 경제대공황을 얘기합니다. 현직 기자인 남편은 실직 상태인데, 이 사실을 숨기고 날마다 출근합니다. 사실은 식량배급을 받으러 가는 것이라고, 이 장면의 스틸 컷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죠?

그림에는 문외한이지만 소감을 말하자면, 호퍼의 그림에는 햇살이 살아 있습니다. 그림 자체로 영화의 세트를 만들었는데, 영화의 곳곳에서도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이 빛과 그림자의 처리입니다. 왜 그러한가, 1959년을 다룬 <Excursion into Philosophy>이란 작품이 배경이 된 부분에서 알 수 있는데,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플라톤의 <국가> 중 동굴의 비유(7권 앞부분)을 직접 읽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래 위는 그림 아래는 스틸 컷.

 

케이프 코드 오전 11시.(여자 주인공이 <국가>를 읽는다)

어릴 때부터 동굴에 갇혀 살아온 죄수들이 있다. 팔다리가 묶여 움직이지 못했고 머리도 고정돼 벽만 봐야 했다.

(어릴 때부터 동굴에 갇혔다니)
그들 뒤로는 거대한 횃불이 있다. 그들과 불길 사이로 통로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 길로 각종 동물과 식물의 모형을 들고 나타난다. 동굴 벽에 그 그림자가 비치면 죄수들이 놀라 바라본다.

(여자 읽기 멈춤, 갈매기 울음소리, 그림자)

뿐만 아니라 모형을 든 사람이 말을 하면 소리가 울려 마치 그림자가 말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죄수들은 게임에 빠져들게 된다

(게임, 그림자의 형상을 맞추는 게임?)

비록 이미지의 그림자만 보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이 아는 유일한 현실이다. (책을 가슴에 얹은 채 눈을 감고 생각. 현관 문소리, 남편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지만, 자는 척 한다. 이제 남편이 이어 읽는다.)

 

만약 사슬에서 풀려나 벽에서 돌아선다면 횃불에 눈이 멀 것이다. 실물은 그림자보다 리얼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 앞에 서면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처음에 보이는 것은 그림자 같은 어두운 형상뿐 조금씩 밝은 것을 보기 시작한다. (생각, 창밖을 잠시) 마지막으로 태양을 보게 된다. 결국 그들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계절과 해가 바뀌는 원인이 되고 보이는 만물을 주관하는 힘. 그간 동굴에서 봐 왔던 모든 것의 근원이 태양이라는 것을.

(책을 놓고 아내를 한 차례 보다가 밖으로 나간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부분이 '동굴의 비유'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본성이 교육을 받았을 때와 교육받지 않았을 때의 차이를 비교해보기 위해 동굴 비유를 든다. 위는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고, 가령, 천병희의 번역을 따르면

 

"여기 지하 동굴이 하나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게. 동굴의 입구는 길고 동굴 자체만큼 넓으며 빛을 향해 열려 있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에 언제나 같은 곳에 머물러 있으며, 쇠사슬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앞쪽밖에 볼 수 없네."(국가 514a)

"그들의 뒤편 저 멀리 위쪽으로부터는 불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으며, 불과 수감자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서는 나지막한 담이 쌓여 있네. 그 담은 인형극 연출자들이 인형극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들 앞에다 세우는 무대와도 비슷하네."(국가 514b)

영화 <셜리에 대한 모든 것> 한 장면,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읽는 대목인데, 실제 책의 표지인지는 알 수 없다.

 

특정 상품을 영화 및 방송의 소도구로 이용하는 일을 PPL(피피엘) 광고라고 하는데, 이 영화 셜리에서는 플라톤의 <국가>와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시집이 소품 이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에밀리 디킨슨은 55년 5개월 5일을 살면서 2000여 편에 달하는 시를 썼으나 생전에는 겨우 일곱 편만, 그것도 익명으로 발표한 시인이다. 은둔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사람을 피했으나 영혼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던 여인. 에밀리 디킨슨은 새로운 사상, 시형을 만들어 낸 선구적 여성 시인이다. 끝으로,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최근 공유와 공효진이 등장하는 광고에도 사용되었다. (아래, 그림은 호퍼의 <Sunlight on Brownstones>(1956)이고, 그 아래는, 공유, 공효진이 등장하는 CF의 한 장면, 호퍼의 그림이 영화 '셜리'의 배경이 되고, 영화 셜리의 한 장면이 광고로 등장하는 물고 물리는 영화 관계가 흥미롭다. 호퍼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책들의 표지로 그림이 사용된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닌 것이다. 보통은 책(소설)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데, 그림과 그림 속 배경과 그 주인공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걸어나오는 점, 거기에 녹록지 않은 철학서와 시의 세계가 녹아드는, 암튼 영화 <셜리>는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시사점이 많은 독특한 그리고 기념비적인 영화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시는 분은 꼭 한번 찾아서 보시기를.

왼쪽은 호퍼의 <Sunlight on Brownstones>(1956)이고, 오른쪽은 공유,공효진이 등장하는 최근 CF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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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22.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다. 음력으로 15일. 굳이 오늘이 정월대보름임을 언급하는 이유는, 음력 1월 1일 설날부터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스스로) 수소폭탄(이라는) 실험에 이은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위성발사, 남측에서는 개성공단(사업) 중단으로 대응하여 나라 안팎이 혼란스럽다. 가장 우려스러운 점 가운데 하나는 이런 정국이 코앞으로 다가온 4.13총선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를 둘러싼 것들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노태우 정부부터 시작되고, DJ 정부에서 본격화된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대북한 정책의 기반이 흔들린 상태이고, 현 정권은 이러한 흐름을 집권기 내내 유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잖아도 분열한 야권의 입장에서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선전하기가 버거운 상태인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악재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햇볕정책이란 말의 출처가 된 원전 이솝우화를 찾아보았다. 교과서에도 실려 널리 알고 있는 이야기다. 희랍어 원전번역으로 358개의 우화를 우리말로 옮긴, 천병희의 정본 이솝우화가 그것이다. 73번째 이야기 <북풍과 해>는 다음과 같다.  

 

 

073 북풍과 해

 

 

북풍과 해가 서로 제가 더 힘이 세다고 다투었다.

그들은 둘 중에서 누구든지 길 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는 쪽이 이긴 것으로 하기로 정했다.
먼저 북풍이 세차게 입김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사람이 옷을 졸라매자 북풍은 더 세차게 공격했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자 사람은 옷을 껴입었다.

그러자 북풍이 지쳐서 사람을 해에게 맡겼다.

해는 먼저 알맞게 비추었다. 사람은 껴입은 옷을 벗었다.

해가 더 따가운 햇살을 쏘자 사람은 더위를 견디다 못해

드디어 옷을 벗고 근처 강에 멱 감으러 갔다.

 

 

그리스 신화에서 북풍은 Boreas이고 해는 Helios다. 이 이야기의 공식 교훈은 "때로는 설득이 강요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때로는'이라는 말을 갈무리한다. 북풍이 필요할 때도 있고, 햇볕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얘기다.

이 글에서 "해는 먼저 알맞게 비추었다."라는 대목이 와 닿는다. '알맞게'다. 그리고 이어 "해가 더 따가운 햇살을 쏘자" 사람들은 드디어 옷을 벗고 멱을 감으러 강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알맞게' 그 다음에는 '더 따가운 햇살을' 쏘았다고 한다. 한 나라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나라간 공조하여 펼치는 정책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안보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다는 말이 맞다면, 한번 시행한 정책은 그 효과를 내오기까지 진득하니 추진해야 한다.

개성공단사업에 참여한 이들의 이야기에 따르거나, 현지에서 사업을 담당했던 학자에 따르면, 지난 8년 동안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난 이후, 개성공단사업에 두 정부는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개성공단 사업은 민주정부 10년 안에 성과를 낼 수 있는 그런 단기적인 사업이 아니었다. 민주 정부 10년이 '알맞게'에 해당한다면, 이후 정부는 '더 따가운 햇살'을 쏘지는 못할망정 일정한 기조는 유지했어야 하지 않았나. (그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얘기하는 이전 정부의 치적이라고 여겼다는 데서 비극은 시작된다. 5년단임제 대통령제에서 말이다.)

뿐만 아니라, 개성공단 사업은 당근과 채찍 두 트랙으로 대북한 정책을 펼치는데 있어 대표적인 유화책이었다. 관계에서는 강요도 필요하고 설득도 필요하다. 이 두 가지는 대화와 소통의 방법이다. 투 트랙 중 하나를 놓아버린 일은 두고두고 뼈아픈 후회할 일로 남을 것이다.

북풍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다. 우화 속에서는 그저 '찬바람'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북한과의 연관 관계에서 남한의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바람으로서의 북풍(北風)과는 좀 다르다. 햇볕정책 폐기선언이라고 할 개성공단 중단이라는, 북풍을 선택한 것은 우리 정부다. 북한에만 북풍이 분 것이 아니라, 공단의 사업자와 그 가족들, 협력업체들 그리고 우리 경제의 주가 등에 영향을 미치는 불안 요소, 대중 무역에서 예견되는 데미지를 고려하면 북풍이 불고 있는 것은 맞다. 그것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어느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그 다음 문제다. 남반구에서의 남풍은 북반구에서의 북풍에 해당한다. 그냥 속이 상해서 해당 우화를 한 차례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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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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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처음 읽었다‘고 하지 않고 ’다시 읽었다‘라고 하는 책들이 고전(古典)이라고 비꼬아 말하는데,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 고전들을 읽는 소회는 이와 조금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리아스』를 읽으니 참 좋다! 문득 뜨거웠던 지난 여름 청량감을 선사한 영화의 명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먹을 수 있어 좋구나!“ 다시 맞이한 여름 새로운 마음으로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삼 세 판이다.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세 차례는 해야 지는 쪽의 아쉬움이 덜할 수 없다. 이기는 쪽에도 단지 운(運)만으로 이긴 건 아니라는 뿌듯함을 선사한다. 얼마 전에 고전번역가 천병희의 『일리아스』 개정판이 나왔다. 세 번째 수정판이다. 간명한 ‘옮긴이 서문’에서 30년 넘는 세월 동안 고전 하나를 우리말로 다듬고 또 다듬은 노장의 소회를 읽을 수 있다. 천병희의 『일리아스』 첫 우리말 원전번역은 1982년에 이뤄졌다. 1996년에 1차 수정판이 나왔고, 정년퇴임 직후인 2006년 2차 수정판부터 도서출판 숲에서 펴내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한 권이라도 더 옮기고자 하는 선생의 바람과 일상생활의 거의 전부가 된 꾸준한 번역작업, 덕분에 지금 우리 독자들은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쉬운 우리말로 그리스 라틴 고전들을 읽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새로운 원전 텍스트를 한 권이라도 더 내고자 몸과 마음이 바쁜 와중에도 고전 중의 고전, 고전들의 고전 우리말 『일리아스』를 틈틈이 다듬은 결과가 이번 3차 수정판(2015년 6월)이 되었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설전에 이어 알렉산드로스와 메넬라오스의 결투, 하이라이트인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에 이르기까지 『일리아스』에는 인류 최초의 전쟁 서사시답게, 유명한 전투들이 등장하는데, 이번 개정판 출간 또한 의미 있는 ‘삼 세 판’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리아스』 속 세기의 대결이 그러하듯

개정판 출간도 의미 있는 ‘삼 세 판’의 결실
무엇보다 이번 수정판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후주 체제에서 각주 체제로의 전환이다. 선생의 뜻을 출판사가 받아들여 거의 새로 펴내는 공정을 마다하지 않은 결과다. 후주가 더 나은지 각주가 더 알맞은지는 책의 성격에 따라(주석들이 본문 텍스트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무엇이 무엇보다 더 나을지 1차 판단은 저자와 출판사의 몫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호(好)/불호(不好)가 엇갈리는 주문이 이어졌으리라. 일반적으로 책이라는 물품을 공급하는 입장에서는 깨알 같은 주석들이 독자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에 후주 체제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특히 고전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독자들이 구매한 데서 그치지 않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 하나까지 가급적 이른 시간에 완독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고전이며, 잘된 번역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무엇보다 그럴 때라야 지속적인 출간과 업그레이드, 곧 사후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번역은 이미 그 진가가 입증된 다른 문화권의 다른 언어로 된 이야기를 우리 문화권에 우리말로 접목한다는 점에서 ‘창조’에 가깝다. 읽고 또 읽어도 그때마다의 새로움을 준다는 점에서 결국은 주석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번역이라야 한다. 한 차례 읽고 지나치는 소품이 아니라 소장하면서 읽고 또 읽는 걸작이 고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후주 체제를 각주 체제로의 전환은 예견된 일이었으리라.

 

주석 하나하나까지 알차게 읽어야 소화가능한 고전, 

후주체제에서 각주체제로의 전환은 예견된 일
흔히 시(詩)는 문학예술의 꽃이라고 하는데, 24권 분량의 『일리아스』는 시 중에서도 서사시(敍事詩)에 해당한다. 창작은 말할 것도 없고, 운문이기에 시 번역은 흔히 반역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나름의 애로사항이 있다. 호메로스는 서사시라는 까다로운 장르로 그리스인들에게 처음 복잡한 신(神)들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두 사람은 헬라스 인들(그리스인들)에게 신을 선물해주었다고 말한다.

나보다 기껏해야 4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헬라스 인들을 위해 신들의 계보를 만들고, 신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신들 사이에 직책과 활동 영역을 배분하고, 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역사』 제2권 53장)”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서사시의 두 거장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스 신화를 체계화하면서 경쟁했다. 그런데 신들과 영웅들의 세계가 처음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인류사의 사건인데, 서사시라는 형식에 담았으니 우리말 번역은 오랫동안 무거운 숙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시 장르라는 점에서 번역의 어려움은 가중(加重)되었다. 또한 희랍어 문장구성은 곧잘 한문 문장의 구성과 비교되는데, 번역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번역을 할 수 있어 매번 난해한 공정일 수밖에 없다고. 내용을 오롯이 전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시를 시로 번역해야 하니 더욱 어렵다. 더구나 구술 형식으로 전달되던 것들이 글자로 고정된 것이라, 구어체로 다듬어진 유려함을 재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천병희 선생이 한 한 인터뷰에서 “다른 고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리스 라틴 고전들도 원전으로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작가 또는 저자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정확히 알아야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고 했겠는가.

 

시라는 장르로 펼친 복잡다단한 신(神)들의 세계,

구술로 다듬어진 유려함 재현 결코 쉽지 않아
세월이 흘러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의 시기를 살아가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취업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 놓인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계속해서 배우기가 쉽지 않다.” 고전을 최초로 쓰인 그 언어로 읽을 수 없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천병희를 이을 ‘청출어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인지,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다. 이런 까닭에 한 작품이라도 더 기왕이면 번역이 쉽지 않은 작품을 선택하여 우리말로 옮기고자 하는 천병희 선생의 초조(焦燥)를 읽을 수 있다. 천병희는 번역이 잘 되었다는 영역이나 독역으로 『일리아스』를 읽어도(지난한 번역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알쏭달쏭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말한다. 해서,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면, 우리말 번역을 읽는 것은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리아스』를 다듬고 또 다듬어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에 이르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뜻이다.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 걷기라면,

우리말 번역 읽기는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또한 3차 수정판 발행은, 그동안 ‘높은 문턱’으로만 알았던 그리스 고전들을 읽는 우리 독자들의 꾸준한 독서가 바탕이 되어 가능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서양 철학의 삼태성으로 불리는 세 사람도 평생 동안 호메로스의 독자로 살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말과 글을 남겼다. 어렵다는 플라톤의 대화편 거의 대부분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는 고전번역가 천병희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이의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다듬어낸 『일리아스』 개정판을 만나는 마음은 각별하다. 더 이상 책 후반부의 후주 등을 떼어내 별도로 제본하여 『일리아스』를 읽지 않아도 된다. 양장본의 책을 휴대하면서 읽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주지만, 무엇보다 무거워서 분책(分冊)하여 읽기도 하였다. 읽고 또 읽을수록 숱하게 등장하는 지명과 인명과 배경이 익숙해질수록 새로운 맛을 주는 『일리아스』 거듭 읽기는 명품 뮤지컬을 '보고 또 보아도' 그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얻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아니 거듭 읽어도 매번 새로운 감동을 주는 『일리아스』 읽는 즐거움이 명품 뮤지컬에서도 발견된다고 해야겠다. 흔히 ’처음 읽었다‘고 하지 않고 ’다시 읽었다‘라고 하는 책들이 고전(古典)이라고 비꼬는데, 천병희 표 원전고전을 읽는 소회는 예외라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리아스』를 읽으니 참 좋다! 문득 뜨거운 지난여름 청량감을 선사한 영화의 명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먹을 수 있어 좋구나!“ 새로운 마음으로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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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신화집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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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이나 문자를 수단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 또는 체계가 언어(言語)다. 언어는 그 수단에 따라 음성과 문자로 나뉘는데, 음성언어가 말이고 문자언어가 글이다. 소크라테스는 칠십 평생을 살았지만 글 한 줄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은 팔십 평생을 살았는데 현존하는 많은 글들을 남겼다. 서양 대학의 시초인 아카데메이아를 설립, 운영한 이가 어찌 글에만 의지했겠는가? 다만, 본인 저작이 분명한 26~28편의 대화편이 고스란히 전해짐으로써, 교수나 총장 플라톤보다는 저자 혹은 작가 플라톤을 우선 떠올리게 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글에 생전의 소크라테스 님 '말씀'을 오롯이 살려놓고 있다. 최후 저작인 『법률』과 후기 대화편 일부를 제외하고는 ‘말하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대화편들의 주인공이시다. 어느 드라마 작가의 작품(드라마)에는 어느 어느 배우가 반드시 등장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제자 플라톤의 글에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소크라테스의 말들

‘플라톤 신화집’이란 제호를 보고 첫 번째로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제호의 단어들을 인수분해하면 ‘플라톤 + 신화 + 집[모음]'이다. 플라톤이 서양철학사에 남긴 업적이 위대하여 그야말로 ‘신화적’이란 건가? 그렇다면 ‘플라톤의 신화’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플라톤이 창조한 플라톤의 신화들을 모은 책이라는 것인데, 플라톤의 수집한 신화라는 의미와 플라톤이 지은 신화, 두 의미 모두를 가지게 된다. 실제로 두 종류의 플라톤의 신화들을 모은 책이 플라톤 신화집이란다. 신화(神話)를 신(神)들의 이야기(話)라고만 한정할 것은 아니지만, 신화가 창작이 가능한 그런 대상임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단히 불경(不敬)스런 얘기지만 그리스 신화니 로마 신화니 단군신화니 하는 것도 맨 처음에 그 이야기를 지은 사람이 있으리라. 신화를 한 사람의 창작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다수가 그렇게 믿음으로써 ‘신적인’ 존재의 존재성을 부여하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확신-확고의 단계를 거쳐 신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니겠나. 다만, 그러한 신들의 이야기를 지은 작가가 분명하지 않기에 지음(作)의 결과라는 생각마저 하지 않게 된 것이리라.

 

신화(神話)를 창작한다고? 신화적인 작가 플라톤?

그러므로, 플라톤 신화집에서의 신화는, 신령(神靈)스럽고 신기(神技)한 그리고 신묘(神妙)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야기인데, 거기에는 흔히 신화는 곧 신들의 이야기라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그러한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신화’(myth)는 플라톤이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이러한 말이 처음 쓰일 때부터 myth의 번역어 신화는 순정한 의미의 '신들의 이야기'보다는 보다 넓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 신화집에는 9개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가려 뽑은 11개의 신화가 (에피소드 모음 형식으로) 모여 있다. 1)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2)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그러나 중대한) 진리, 3)비가시적인 세계를 다룬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경험으로 터득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이야기들의 진실성은 확보될 수 있는 것일까? ‘오리지널’ 신화에서 답변을 위한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신화’(myth)는 플라톤이 처음 사용, 처음부터 넓은 의미의 신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일명 ‘신통기’)를 참고하면, 그리스 창조 신화에는 주목해야 할 분명한 원칙이 있다. 서사 조직의 논리가 억압, 반역, 거세(去勢)의 반복이라는 것.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와 충돌하고 반역을 일으켜 선행 세대를 거세한다. ‘낮’과 ‘빛’은 ‘밤’과 ‘어둠’을 반역하고 그들을 거세하거나 추방한다. 어둠을 몰아내야 빛이 들어설 수 있고 밤을 몰아내야 낮이 올 수 있다. ‘카오스’(‘혼돈’으로 명명하기 이전의 그냥 카오스)가 땅, 어둠, 밤을 낳고 땅이 하늘을 낳는 태초의 사건들, 이들을 살피면 “어둠과 밤의 관계(유사성)는 그 다음 세대인 빛과 낮의 관계(유사성)와 같고, 어둠/밤 빛/낮의 두 쌍은 서로 반대쌍의 관계에 있다. … 거세와 추방은 후속 세대가 태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의 확보이고 기회의 쟁취이다”(도정일, <문학동네> 1998년 봄호 중) 곧 가시적인 있음을 근거로 비가시적인 세계를 상정할 수 있다. 이 말을 플라톤의 신화(설정)에 도입하자. 가시적인 세계의 가능한 이야기가 있으므로, 비가시적인 세계의 불가능(해 보이는)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된다. 가지(可知)적인 것이 ‘있음’으로 불가지(不可知)적인 ‘없음(있을 수 없는)’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가시의 가능한 세계 있어, 비가시의 불가능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어

어쨌거나 플라톤은 기존 신화들을 수집하고, 약간씩 이야기를 뒤틀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신화(myth)’의 개념을 넓게 잡음으로써 불경(不敬)의 부담을 조금 덜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봐도 될까? 그렇다면 몇몇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말에 취해서 신적인,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얘기했노라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하필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은 스승의 죄목 가운데 하나가 불경죄(不敬)다. 좀 가혹하지 않나? 당시 아테네에서의 불경죄란 우리의 국가보안법처럼 ‘걸면 걸리는’ 그런 죄였다고는 하나…….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플라톤은 ‘신화’를 분명히 정의(定意)함으로써, 스승의 불경죄가 무리한 법 적용이었음을 ‘변호’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신화’라는 장르를 선택했더라도 고지식한 이들에게는 그런 말들을 시쳇말로 ‘구라’로, 그를 구라에 능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인데, 작가 플라톤이 주인공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한 역할로는 '쫌' 그렇다.  

 

‘신화’를 분명히 정의(定意), 스승의 불경죄가 무리한 법 적용임을 ‘변호’

'플라톤 신화집'의 신화에는 우화(寓話), 전설(傳說), 신탁(神託) 등의 설정을 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쏙 빠져들게 하는 유형들이 있다. 하나하나 살피는 재미가 어렵지만 쏠쏠하다. 다만, 신화의 첫 대목에서 비록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지만 신뢰도 향상을 위해, 출처를 언급하는 대목들은 이들 신화의 성격만이 아니라, 이런 신화들을 수집하고, 뒤틀고, 창작했는지 그 목적을 가늠할 수 있다. <고르기아스>(523a-527a)에서 가져온 ‘혼의 심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 말마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자네는 아마 이 이야기를 설화[mythos]로 여기겠지만, 나는 실화[logos]로 여긴다네. 나는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이야기하는 것이니까."(<향연> 201d-212c ‘에로스의 탄생’ 중)
‘이제는 사람들 말마따나’, '옛날 옛적에'처럼 옛날이야기를 시작할 때와 같은 관행적인 문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전에 마티네이아 여신 디오티마한테서 들은 에로스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그녀는 사랑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도 해박했는데, 한번은 아테나이인들로 하여금 미리 제물을 바치게 하여 역병(疫病)의 내습을 10년 동안이나 늦출 수 있었지. 바로 그녀가 나에게도 사랑에 관해 가르쳐 주었다네."
주석에 따르면 ‘디오티마’는 실재했다기보다는 플라톤의 작명이다. ‘만티네이아(mantineia)’는 동(東) 아르카디아 지방의 도시로, 'mantis'('예언자' '예언녀')와 발음이 비슷하다. 신의 권위를 빌릴 뿐만 아니라, 가공의 이름을 실제 지명까지 참고하여 끼워 넣는다?!

 

<파이드로스>(258e-259d)에서 들려주는 ‘매미 신화’의 초반부는 다분히 우화적이다. 당대에 플라톤이 집필할 무렵에 이솝 우화가 널리 읽히고 있었다. 초반부의 한 대목이다.
"무사 여신들이 태어나면서 노래가 나타나자 당시 사람들 중 일부는 노래의 즐거움에 미쳐서 먹고 마시고는 일도 잊어버리고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대. 훗날 이들에게서 매미 족속이 생겨났다, 무사 여신들은 매미들이 일단 태어나면 먹을 필요 없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노래만 하게 해주었대. 이게 무사 여신들이 매미에게 준 선물일세."

 

 ‘매미 신화’의 초반부는 다분히 우화적, 플라톤 다른 대화편에서 이솝우화 언급해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님,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내 이야기가 몹시 이상하게 들릴는지 몰라도, 일찍이 일곱 현인 중에서 가장 현명한 솔론이 말했듯이 틀림없는 실화예요.” (<아틀란티스 섬과 고대 아테나이> 중 <티마이오스> 20d-c)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외종숙으로 훗날 ‘30인 독재’를 주도하지만 8개월가량의 집권 후 처형되된다. 플라톤이 정치 입문의 뜻을 접는 계기 가운데 하나다. 또한 플라톤의 가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아테나이의 ‘전설적인’(추앙의 의미다) 입법가 솔론에 이른다. 이야기가 곧이곧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을 우려하고 있는 크리티아스., (플라톤은) 신뢰도 제고를 위해 역사적 인물인 조상까지 동원한다. 이어지는 <크리티아스>(의 다음 대목도 흥미롭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은, 헤라클레스의 기둥들 바깥쪽에 살던 사람들과 안쪽에 살던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진 이후로 기록에 따라면 9천 년쯤 경과했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 이 전쟁을 소상히 언급하려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 한쪽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테나이가 지휘했고, 다른 쪽 군대는 아틀란티스 섬의 왕들이 지휘했대요."(<크리티아스>108e)

 

대화편 <크리티아스>에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추구한 ‘이상국가론’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오늘날까지 이야기되는 아틀라티스 섬 관련 전설의 출처다. 아쉽게도 미완성 상태라, 아틀란티스에 대해 더 알려면, <티마이오스>도 읽어야 한다.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1,2/김석희 옮김)에는 물 속에 가라않은 아틀란티스 섬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해저 2만리』의 시간적 배경은 1866년쯤이다. 플라톤 신화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이어지는 다음 “옛날 옛적에 신들은 대지 전체를 추첨을 통해 자기들끼리 영역별로 나누어 가졌고, 그 때문에 다투지는 않았어요.(<티마이오스>109b)에서도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역시 신화이지만, 이런 이야기와는 달리 전통적인 그리스 신화에서는 포세이돈과 아테나 여신이 앗티케 지방의 영유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신들이, 설마 신들이 그럴 리 없다. 각자에게 적합한 몫을 몰랐겠느냐, 다툼으로 차지하려고 했겠느냐, 신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의심하는 이야기까지 대화편에 담는다. 이렇듯 플라톤은 자신이 빚어내는 작품(신화)의 완성도를 위해 전통적인 신화의 일부를 흔들기도 한다.

 

자신이 빚어내는 신화를 위해 전통적인 신화의 일부를 뒤틀기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는 전설 속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들리는 소리에 따르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들을 모은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이 곧 출간될 예정이란다. 거기에는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로 포함된다 하니 기대된다. 플라톤 신화집에서의 쬐끔 맛보는 것이 아쉬웠다면, 신간에서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왜 플라톤은 이렇게 창조한 이야기(신화)들을 무엇에 썼을까? 문답에서 대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 곧 교육 효과를 극대화를 위한 장치인 건 분명한데, 이렇게만 얘기하는 것은 좀 매정하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문학작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이야기들을 가려서 모아놓은 ‘플라톤 신화집’ 덕분에 확보되는 것은 아닐까? 희랍어로 쓰인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읽은 로마인 오비디우스는 신화를 일종의 ‘변신’으로 해석하여 책를 다룬 책,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집 『변신 이야기』를 라틴어로 썼다. 플라톤 대화편들의 문학성을 재조명하고, 플라톤을 작가로 읽는 단초가 역시 책을 다룬 책인 『플라톤 신화집』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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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5-05-22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적인 명시(名詩)의 9할은 30세 미만의 시인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 절반이 25세 미만의 시인인 것이다.˝ -H.L.멩컨 <偏見>
˝얼마간의 광기가 엇으면 시인이 되지 못한다.˝ -M.T.키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