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일의 유리 1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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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리스 신화부터 비극와 희극, 플라톤의 대화편들까지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 읽기에 푹 빠져 지냈고, 이곳에 상당한 리뷰, 페이퍼 등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2년 반 가까이 훌쩍 지나갔다. 가끔 책을 사려고 이곳에 들렀을 뿐(지방의 오프 서점에서 원하는 책 구하기란 너무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다 최근에 『이솝우화』(천병희 옮김) 관련 리뷰 등을 읽게 되었고, 공감하는 바 있어 한 작가의 작품을 소환한다. 


일본 작가가 쓴 소설. 그러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독특한 구성 그렇다고 우화로 분류하기엔 좀 애매, 딱 이 정도였다. 책 표지를 보면 알겠는데 작가도 떠오르지 않고 작품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에야 3년 만에 겨우 공간을 확보하여 박스에 담겨 여기저기에 피로감을 준 애물단지 책 짐들을 겨우 푼 상태였기에, 두 권으로 엮인 이 책들을 직접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나절을 할애했지만 실패. 


막고 푼다고 이곳에서 ‘국내도서> 소설/시/희곡> 세계의 문학> 일본문학’이라는 분류에 따라 정확히는 번역 출간된 ‘일본소설’을 하나하나 검색하기 시작했다. 25권의 책이 한 묶음으로 모니터에 나타나는 검색을 얼마나 했을까? 국내도서로 번역 출간된 일본소설이 과연 몇 권이나 될까? 지루하고 단순한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문득 ‘유희’라는 단어가 그 책과 관련하여 떠올랐다, 유희(遊戲).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와 뭔 상관? 뭔가 연관이 있는 듯하기는 하지만 그간 검색에 할애한 시간이 아까워서 계속 막고 푸는 검색을 계속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책이 『천일의 유리1』과 『천일의 유리2』다. 원제 ‘千日の瑠璃’(1992년).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2007-04-04) 펴냄. 자주 나가는 책은 아닌 모양이다. 며칠 기다려야 함에도 이 작품을 구매하여 입수했다. 


지난해 봄, 난데없는 부음(訃音)을 수신했다. 서울 출장에서 돌아오는 KTX 안이었다. 약간의 ‘불법’을 감행하며 목적지를 광주로 변경했다. 해남에서 누군가를 만나 그이의 집에도 갔는데, 문득 그대가 생각이 나더라, 종가(宗家)의 후손이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확인차 전화했을 정도로 나와 닮은꼴이 많았던 형이었다. 


그해 여름, 그 형과 나는 그 형의 집(문화재)에서 특이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길이 5m 최대지름 3m인 계란(유선형) 모양 조형물을 대나무로 엮어 닭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장태’, 인근 동학혁명기념전시관에 전시될 소품을 만드는 일을 둘이서 하기로 한 것이었다. '장태'란 '닭장'인데 대나무로 엮은, 천적들로부터 닭들 보호하려고 왕대를 쪼개고 얇게 다듬어 타원형으로 엮은 일종의 닭 사육장이다. 


동학농민혁명 때 우리는 칼과 화살로 원군인 왜군들의 조총 방사에 맞서야 했다. 그 장태 안에 솜이불을 넣어 이것을 엄폐물로 삼아 굴리면서 전투를 했다. 그런 동학혁명전쟁의 상징인 장태를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그 형과 진행한 것이다. 


그렇게 전시품을 재현하는 며칠 동안 윤 형(‘윤’이라고 하자)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취중진담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에피소드는 적지 않았다. 그렇게 거기 머무는 동안 내가 그의 서재에서 간택하여 읽은 책이 『천일의 유리1』과 『천일의 유리2』다. 


문득 생각하자니 윤의 책장에서 읽는 책의 주인공이 어쩌면 윤과 비슷한지, 그렇게 읽던 책에 메모를 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그 집을 떠나면서 이 두 권을 책을 양해 없이 가져왔다. 그런데, 숱한 책 짐에도 없는 것을 보니, 누군가에게 그의 책을 빌려준 모양이다. 


1,000개의 시선 혹은 관점. 우화적인 너무나 우화적인 발상의 소설, 우화적이든 우회든 우의이든..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기술적으로는 시발점은 영화 <감시자들>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소년의 시선이고 관점이지만 1,000일의 1,000가지 관점이 에피소드인데 연결이 되어 한 편의 작품(소설)이 된다. 


빨간 우체통/윤재철


누구에게도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쯤은 있어

빨간 우체통 거기 서 있다


... (2연 생략) 


그래도 누구에게나

아직 받고 싶은

편지 한 통쯤은 있어

빨간 우체통 거기 서 있다. 


돌려줄 수도 돌려받을 수도 없게 된 이 책들, 그 주인공에게 조금 미안하고 화가 난다. 

지난해 봄 그 주인공이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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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계보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시오도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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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은 늘 힘겹고 비참하다. 인간에게도 그렇다. 이를 전제로 헤시오도스는 우리에게 교훈과 함께 경고한다. 인간들은 땀 흘려 농사짓고 배를 타고 장사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었다. 그 어느 날부터? '그 어느 날'에 대한 이야기다.

“헤시오도스는 그 원인을 인간들에 대한 신들의 시기심에서 찾는다. 인간들은 분수 이상으로 잘살고 싶어 하고, 그래서 신들이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는 것. 신들은 인간적 존재와 신적 존재의 차이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운명을 개선할 기회가 생기면 신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고통을 부과하여 그 ‘차이’를 유지한다. 이런 경향을 헤시오도스는 인류의 옹호자인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에서 발견한다. 

신들과 인간들이 재물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을 속여야 했다. 때문에 신들은 화가 나서 양식을 감춰버렸고, 인간들은 더욱 힘들게 양식을 구해야만 했다. 제우스는 불도 감춰버렸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들이 고도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벌로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가장 뻔뻔스럽고 교활하고 멋있게 치장한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갖은 악(惡)을 인간들에게 보낸다(<신들의 계보> 591~612행 참조).“ _『신들의 계보』 (천병희 옮김), <헤시오도스 작품의 이해> 중 정리.


신들의 시기심 발동, 인간 존재와 차이 유지하고 싶어

제우스가 이처럼 여자를 매력 있게 만든 것은 인간들이 "모두 자신의 재앙을 껴안으며 마음속으로 기뻐하게"(「일과 날」 58행) 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일과 날」에서 프로메테우스 관련 기술을, 90행까지는 「신들의 계보」를 따르는데, 이후부터는 독창적으로 전개한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인데, 정확한 번역은 '판도라의 항아리'다. 프로메테우스는 불(火光)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물하고 그 응징으로 제우스가 인간들에게 보낸 재앙이다. 이름난 절름발이 신(헤파이스토스)이 제우스의 계획에 따라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을 흙으로 빚은 것. 그런데 「신들의 계보」에서는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뿐 이름은 없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일과 날」(47~105행)에서야 등장한다. 판도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일과 날」은 자세하게 기술한다. 제우스의 명에 따라 헤파이스토스는 곧바로 '정숙한 처녀를 닮은 것을 흙에서 빚어냈고'(71행) 아테네는 그녀에게 허리띠를 두르며 치장해준다 등등.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신들의 계보)은 판도라(일과 날)

"……그러나 그녀의 가슴속에 아르고스의 살해자인 심부름꾼은/ 거짓말과 알랑대는 말과 교활한 기질을 만들었소./ 요란하게 천둥 치시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신들의 전령은/ 안에다 목소리를 넣고는 이 여자를 판도라라고 이름 지었으니/ 올륌포스의 집들에 사시는 모든 신들께서 빵을 먹고 사는/ 인간들에게 고통이 되도록 그녀에게 선물을 주셨던 것이오." -「일과 날」 77~82행

판도라가 신들이 인간(들)에게 준 선물이라면 그 판도라, ‘그녀에게 선물을’ 주었다는 것(82행). 따라서 선물의 주인은 판도라이므로 판도라가 개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녀에게 준 선물’이 그녀에게 부여한 여러 권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쨌든 제우스가 보낸 선물은 '상자'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항아리(pithos), '판도라의 항아리'(천병희의 번역)다.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된다. 제우스의 선물을 수령한 이가 에피메테우스다. 그의 형 프로메테우스는 지혜롭기에 사전에 제우스의 의중을 간파하고 어떤 선물도 받지 말라 당부하였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이름에 ‘사전에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가 답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형과는 대조적으로 동생은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에피메테우스)'이었다. 재앙을 당한 뒤에야 그런 줄 알게 되는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pithos), '판도라의 항아리'다.

이들 형제의 출생(「신들의 계보」 511행 전후 정리)은 이렇다. 복사뼈가 예쁜 오케아노스의 딸 클뤼메네와 이아페토스 사이에서 아틀라스(1,하늘을 떠받들고 있는)가 태어났다. 클뤼메네는 또한 거만한 메노이티오스와 '꾀 많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프로메테우스(2-1)와 '얼빠진 에피메테우스를'(2-2) 낳았다. 

복사뼈가 예쁜 오케아노스의 딸 클뤼메네 & 이아페토스→아틀라스(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클뤼메네 & 거만한 메노이티오스→프로메테우스(사전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사후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가 빵을 먹고 사는 인간들에게 끼친 최대의 재앙은 제우스의 선물, 판도라를 아내로 받아들였다.(<신들의 계보> 507행~514행) '머리가 잘 돌아가는' 프로메테우스가 속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제우스는 '얼빠진' 에피메테우스라는 틈새를 공략한다. 판도라는 '호기심'이 많았다. 본래 인간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처럼 판도라는 인간이 된 것이고, 그 항아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애를 태웠다. 집안 곳곳을 뒤져 항아리를 찾은 그녀는 마침내, 뚜껑을 열고야 만다.


"그러나 여자가 두 손으로 항아리의 큰 뚜껑을 들어 올려 그런 것들을/ 모두 내보내니, 인간들에게 그녀는 큰 근심을 안겨주었던 것이오./ 오직 희망만이 거기 부술 수 없는 집 안에, 항아리의 가장자리 아래 남고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는데,/ 그러기 전에 여자가 항아리의 뚜껑을 도로 놓았기 때문이오." -「일과 날」 94~98행


이와 관련하여 『이솝우화』 358편 중 제일 첫 번째 에피소드 <001.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들에게 좋은 일은 자주 생기지 않지만 나쁜 일은 날마다 일어나는 이유가 뭘까, 에 대한 해석이다. 


”좋은 것들은 허약한지라 나쁜 것들에 쫓겨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갈 수 있겠는지 제우스에게 물었다. 제우스가 좋은 것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에게 다가가되 한꺼번에 몰려가지 말고 하나씩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쁜 것들은 가까이 사는 까닭에 늘 사람들을 공격하지만, 좋은 것들은 하늘에서 하나씩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드문드문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판도라(인간들이) 어떤 이유로, 문제의 항아리를 가끔 열 때만, 인간들에게는 좋은 일이 가끔 생긴다는 것일까? 호기심에 따른 결과는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과 부정이 있는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호기심이 발현되어야만 좋은 결과도 낼 수 있다는 것일까?  


<판도라의 항아리와 노동의 탄생2>로 이어짐. 

[알라딘서재]판도라의 항아리와 노동의 탄생2 (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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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세트 - 전7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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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온라인서점에 왔다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플라톤전집 '세트'가 나왔음을 알았다. 지난 4월 하순이던가, <플라톤전집2>와 <플라톤 전집7> 간행으로 사실상 플라톤전집이 완역(완간)되었고, 주요 일간지들에 실린 인터뷰를 읽고 소개한 기억에 있어 반가웠다. 하지만 전7권이나 되는 전집 세트가 발간되기까지 시일이 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세트 완간이 이뤄졌다. 그리고 문득, 앞서 기술한 경지정리가 한창인 겨울 들판의 논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체가 신규번역이거나(전집7), 수록된 8편 중 3편(에우튀프론/에우튀데모스/메넥세노스)이 신규번역인 전집2는 큰 고민없이 전집의 일부로 펴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2012년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향연> <파이돈> 등을 묶은 플라톤 대화편 첫 권을 출간한(플라톤전집1에 해당) 이후 신규 번역원고가 들어올 때마다 몇 편씩 묶어 간행된 천병희의 플라톤 대화편 단행본이 한두 권이 아니다. 거기다 양장본들이니 재고 부담도(반양장에 비해) 클 수밖에 없다. 완역을 했고, 마지막 번역까지 책으로 간행되어 플라톤전집을 완간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집 '세트'로 단장하는 일은 물심양면으로 겨울논들의 경지정리 못지 않은, 또 나름대로의 고민을 안은 '사업'이지 않았을까? 여느 때보다 출판시장이 위축된 사정을 감안하면 물심양면 더욱 그렇다. 천병희 선생의 플라톤 대화편들이 간행될 때마다 빠짐없이 구입해서 읽은 필자로서 '전집 세트' 제작 과정을 복기(復棋)하듯 살피는 것이다.

생각보다 일찍 전집 세트가 출간된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고민의 흔적을 엿본다. 물론 기존 독자들은 억울함이 없지 않다. 새롭게 장정된 전집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어렵게만 느끼던 플라톤의 대화편들 상당수를 천병희 선생님 덕분에, 출판사의 끊임없는 투자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제 새롭게 플라톤의 세계에 진입하는 한국어 독자들에게 전집 세트 발간은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독서의 모든 시작과 끝은 텍스트 자체의 독해(와 해독)에 있다. 신비평이 지향한 작품 자체에 집중하시오, 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텍스트 자체를 읽으면서 그 행간의 의미까지 읽을 수 있다면, 번역서에서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한겨레>인가 완간기념 인터뷰에서 “끝까지 읽도록 쉽게 번역하는데 공을 많이 들였죠.”(기사 제목)라고 번역가가 밝혔듯이, 천병희의 번역이 난해하기로 소문난 플라톤과 한국어 독자들이 친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얘기가 길어지고 있다. 다시 한 번 플라톤전집이 완역되어 세트로 제작된 일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주머니가 헐거운 독자들, 특히 청년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을까? 무엇보다 책의 장정이 고급스러워지고 두꺼워지면, 가격만이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 오류를 수정하거나, 표현을 더 다듬는 일이 더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테아이테토스>나 <향연>과 같이 반양장으로 저렴한 가격에 플라톤의 대화편들의 낱권들을 펴내는 일, 이 출판사의 푸른시원 시리즈도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계속 나왔으면 좋을 듯하다. 낱권들의 쇄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보다 매끄러운 번역으로 수정하는 일이 계속되고, 전집의 낱권들이 쇄를 거듭할 때에 반영되면 좋지 않을까, 반가움에 이런저런 생각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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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2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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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칸느영화제)을 받았다. 축하한다. 며칠 전 집 뒷편의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올랐다가 중턱 전망대에서 항구 도시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이곳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살다 이사갔는데, 그리워서 옛 보금자리 주변을 살피러 왔다는 부부를 만나 뜻밖의 도시의 내력에 대해 들었다. 여행 책자에는 없는 새로운 이야기들, 행운이었다.
마침 그날이 부처님 오신 날,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전망대 아래에서 들려, 보통 등산객들은 가지 않는 샛길을 따라 절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산기슭에 종려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데, 꽃이 활짝 핀 상태다. 그런데 꽃이 황금색이다. 축하용 화환이건 조문용 화환이건 화환의 장식으로 종려나무 잎은 자주 사용되기에 익숙한데, 맘껏 개화한 꽃을 본 기억은 아마도 처음이었지 싶다. 다른 영화제의 그랑프리 황금사자상이나 그리스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황금양모피, 뭐 이런 식으로 '황금'을 종려나무 앞에 접두사처럼 붙인 것이려니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은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들은 거의 읽은 상태이고, 소장 도서들이라 당연히 있겠지, 싶어 찾아보지만 없다. 아마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나 보다. 몇몇 장면은 떠오르는데, 정확히는 나무들로 변신하는 이야기, 필자에게는 익숙한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도 아슴프레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에 푹 빠져 살던 때는 아니었다. 관련하여 어딘가에 쓴 글이 있는데 그것도 찾을 수가 없다.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급한 김에 eBOOK으로 주문해서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미리보기]로 도입부는 이미 읽은 상태, 좀더 읽어나가니 옛 기억들(첫 만남의) 새록새록 재생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식물들도 이동을 한다. 『식물의 정신세계』(정신셰계사)에서 입증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중에서 수긍이 가는 연구 결과이다. 그런데 이 책의 부제는 '식물도 생각한다'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철학에세이 중에는 「동물들에게도 이성이 있지에 관하여」가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을 읽는데 기본 바탕은 정적인 식물이 가진 식물성, 동적인 동물이 가진 동물성의 대비 혹은 대조다. 능동성과 수동성의 대립과 갈등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의 감동은 많이 사라져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종류의 나무로 변신하는 이야기, 특히, 「월계수가 된 다프네」신화는 이 작품의 밑그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모티브일 뿐만 아니라, 나의 형의 <나무들의 변신 이야기>라는 기록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들(34편 가량)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향연』인데, 거기 등장하는(대담자) 인물 중 하나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하는 사랑론, 자웅동체설로 소설 속에는 직접 인용되면서 '변주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는 고대 서양 고전들의 영향이랄까, 반영이랄 수 있는 모티브들이 이것 말고도 등장하는데, 동서양의 신화가 닮아 있으니 꼭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읽어야 하는데, 자꾸만 그 배경이 떠올라 '감동'이 처음 같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므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일단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은 독자라면, 앞서 언급한 이 작품에서도 직접 거론한 고전 두세 권쯤을 읽는 것으로 책읽기의 새로운 길을 내보시라는 것.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익숙한 독자라도(희랍어) 신명, 영웅이름, 지명들이 라틴어로 표기되기에 낯설 수 있다. 그래도 오비디우스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일단 펼친 책을 덮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앞서, 황금종려상 이야기로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잘 알려졌듯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이 소설의 작가 이승우야 말로 한국 작가들 가운데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가장 근접해 있다는 찬사를 보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한 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 없었디. 이승우 작가에 대한 찬사와 기대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노벨문학상과 같은 상의 수상자가 선정이 되기 마련이고, 그만큼 그들의 정신세계의 원형에 해당하는 신화나 고전들을 바탕에 깔고 새롭게 창조하는 작품일수록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평할 수는 없지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뭔가를 건드린 작품인지가 관람 포인트가 될 것 같다.

4인 가족이 식탁에 앉아 만찬을 한다. 『식물들의 사생활』이 마무리되는 즈음이다. 여지껏 제각각 생활공간만 공유하던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대목이 나온다. 4인용 식탁(부부와 두 아들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간행된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19년 4월)의 눈시울을 젖게 하는 모티브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4인용 식탁#1_55면/4인용 식탁#2)56면) 이안 감독의 오래된 대만 영화 <음식남녀>의 요리사인 아버지와 그 딸들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가족소설로의 면모가 확인되는 지점이다. 4인용 식탁에 앉기 위해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었구나,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 같은 장면이다. 작가의 최근 저작에서의 언급처럼 "그러나 음식은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듯"(『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도 느리게 읽기, 단숨에 읽었더라도 그 배경이 되는 콘텐츠들을 읽으면서 다시 읽으면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다만, 한 가지 필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읽을수록 화자인 나(기현)의 캐릭터가 좀 작위적이랄까,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작품이 처음 선뵌 때가 2000년이란 점을 감안하면(그리스-로마 등 서양 고대 고전의 원전번역이 쏟아져나온 것은 그 이후이다) 저자의 성실한 독서에도 박수를 보낼 만하다. 이승우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007이라는 점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흥미롭다. 영화 007시리즈는 다시 봐도 새롭고 재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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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섬 - 강제윤 시인과 함께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섬 여행
강제윤 지음 / 꿈의지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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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섬』을 읽기 전에 당신은 독자들, 강제윤 시인의 가이드를 받아 섬을 여행하게 될 사람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에 몇 꼭지씩 그 섬들을 여행하듯 읽기를 다 마친 지금 내게 제호는 <섬, 당신에게>로 다가온다. 찾아간 섬 하나하나와 저자가 만나 나누는 대화, 다녀와 '인격'이 된 섬에게 보내는 편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01."다리가 생긴 섬들은 육지와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대신 섬의 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금오도 주민들은 육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금오도를 섬으로 남겨 놓았다. 초창기에는 섬 주민들 대다수가 연육교 공사에 찬성했지만 섬의 정체성을 잃고 몰락한 타 지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끝내 섬으로 남기로 결정한 것이다. 참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선택이었다. 그 결정 덕에 금오도는 섬의 향취를 찾아오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62면(금오도_전남 여수)

 

#02."실상 섬에 다리가 놔져서 주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많지 않다. 육지와 소통이 쉬워지는 것 말고는. 대문 없이 살던 사람들도 늘 도둑 걱정을 해야 한다. 섬에 관광객이 많이 올 거라고 선전하지만 대부분은 차로 한 바퀴 휙 돌아보고 나간다. 섬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섬사람들도 다리가 생기면 좋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졌었지만 직접 겪어보고야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리가 놔지면 섬은 그저 육지의 또 다른 오지로 편입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섬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다리보다 섬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반환경의 조성이다."  -78면(시산도詩山島_전남 고흥)

 

#03."사람이 섬으로 와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풍경일까, 휴식일까. 싱싱한 해산물들일까. 얻을 수 있다면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섬에 오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 오롯한 자신의 것은 아니다. 누구도 얻지 못하고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뿐이다. 새로운 '한 생각'을 얻는 일이야말로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한 생각'을 떨칠 수 있는 지름길아다. 섬에서는 걷기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자동차의 방해 없이 걸음에 몸 맡기고 온전히 걸을 때 생각은 자유를 얻는다. (온전히 걷기)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는 정신의 운동이기도 하다." -110면(연화도_경남 통영)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을 만나는 섬
곳곳에는 [인용3]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자신만의 '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데, 인용하고 싶은 구절들이 많다. 좋은 글(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인용1]과 [인용2]는 섬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섬이 섬인 이유를 깨닫고 섬이 섬으로 남기를 랐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릅답다. [인용1,2]와 같은 지킴이 없이 [인용3]과 같은 섬이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을 있을 수 없다. 물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뱃길도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에 난 길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섬에는 마침표가 있다. 육지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자그마한 섬들에는 한 컷의 사진, 한 편의 시가 그렇듯이 깨달음의 순간이 반드시 그리고 자주 온다고 해야 할까? 시와 사진이 그렇듯이 섬들은 시인 강제윤을 만나면서 '순간의 꽃'의 범주에 포함된다.

 

시와 사진처럼 한국의 섬들은 시인을 만나 '순간의 꽃'이 된다
그리고 섬에는 사람들이 산다. 그것도 연식이 오래된 승용차와 같은 사람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섬들에 살고 있다. 문득 메모를 하다가 '연식'이란 단어를 검색한다. 두 가지 한자가 다른 의미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연식(年式)이다. '기계류, 특히 자동차를 만든 해에 따라 구분하는 방식'이다. 흔히 '연식이 오래된'이라고 비유할 때 쓰인다. 그런데 연식(年食)이 있다. '사람이나 생물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온 해의 수효'다. 이 경우는 '나이가 많은'과 같은 의미로 곧바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신에게, 섬』에는 섬에서 살아가는 연식이 많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섬에 사는 당신들의 이야기,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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