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우리들의 이야기 - 1980년 5월,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광주서석고등학교 제5회 동창회 엮음 / 심미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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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아, 두껍아,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목포 구도심, 국도1호선과 2호선의 기점임을 알리는 표지석 뒤로 일제강점기 시절 (구)일본영사관 건물이 서 있는데, 지금은 사적 제289호로 지정, 근대역사관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근대역사관 본관에 전시되어 있는 '결전' 식기. 우리 입장에서는 해방의 그날이 다가오던 무렵,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전국의 모든 쇠붙이를 징발해갔다. 놋그릇을 수탈하고 대신에  사기 밥그릇을 공급했는데, 주발에는 ‘결전(決戰)’이라는 글씨를 로고처럼 새겨놓았다. '두껍아, 두껍아' 살피다가 떠올린 동요 한 대목이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 어느덧 39주기를 맞이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생각해보니 5.18 이전과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 생각해보니 프로야구가 생겼고, 때가 되어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흑백TV 시대가 가고 컬러TV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국풍81>이라는 듣보잡 축제를 아마도 컬러TV로 보았을 것이다. 야구광인 형님을 따라 멀리 시골 농촌마을에서 광주까지 가서 무등경기장에서 열리는 프로야구를 관전했던 기억이 있고, 오래지 않아 그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랬구나, 역사의 저 편으로 잊히기를 바라는, 세력들이 있었구나, '결전' 식기를 보다가 왜 이런 기억을 상기했는지 알 수 없다.

 

그랬구나, 역사의 저 편으로 잊히기를 바라는, 세력들이 있었구나,

39주기를 맞이하는 5월의 첫 날, 의미 있는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인터뷰에 문득 저자 중 한 분이 등장했다. '편의대'라는 낯선 이름, 현역 군인들이 근무하는 군부대 이름이라는데 부마항쟁 때도 광주  5.18 때도 이들이 시위군중 속에서 이른바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미군의 정보원으로, 보안사 일원으로 당시 활동했다는 두 분의 증언도 폭풍 급이었지만, '편의대'라는 단어를 기억의 창고에 보관하게 된 일이야말로, 2019년 5월 광주의 특별한 일이 아닐까 싶다.

 

당시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를 할 때 총상을 입은 사람, 시위대원으로 위장한 계엄군 ‘편의대’에 의해 고문을 받고 영창에 갇힌 사람,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진압할 때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 가두방송으로 유명한 전옥주 씨의 가족이 자취방 옆집에 살아 누나가 간첩혐의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사람,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전남대와 광주교도소에서 46일간 고초를 당한 사람---.

 

광주광역시 한 고등학교 5회 동창생들이 자신들이 체험한 5월 광주 이야기를 엮은 책,
『5.18, 우리들의 이야기-1980년 5월,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광주서석고등학교 제5회 동창회 지음, 심미안, 2019-05-01) 이야기다. 이 책은 광주서석고 제5회 동창회(회장 임영상)에서 1980년 5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동기들의 5·18민주화운동 체험담을 기록한 것이다. 모두 12명으로 구성된 ‘5·18체험담출판준비위원회’는 한 사람이 각 30여 명의 동기들을 대상으로 2년여 동안 체험담을 수집, 정리했다.
준비위원 중 한 사람인 고재철 님(광주 전남공업고등학교 교사)의 <역사의 현장이 된 자취방>이 첫 번째 글인데, 누나와 여동생, 셋이서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였는데, 2층 옆방에 살던 부부 중 아저씨의 여동생이 가두방송으로 유명한 전옥주 씨였다는 것. 인터뷰에서 소개된 '편의대' 부대원의 활동을 증언하는 이야기도 그렇고, 시민군 트럭에서 검도를 가르치는(이 학교는 체육시간의 일부를 검도에 할애한다) 선생님이 타고 있어 조우했다는 얘기도 흥미롭다. 당시 광주서석고 3학년이던 졸업생 61명이 참여했다(아래 사진은 이 책의 뒷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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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최혜영 지음 / 푸른역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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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천병희의 플라톤전집(7권) 완간은 그 자체로 사건인데, 2권에서 처음 선보이는 세 편의 신규 번역이 눈에 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메넥세노스」다. 「메넥세노스」는 대화라기보다는 한 편의 연설문으로 보아야 하는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투퀴디데스) 2권의 유명한 연설, 전몰자를 위한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내세워 패러디하고 있다.

 

천병희의 번역까지, 세 가지  「메넥세노스」 원전번역을 만날 수 있어
가장 먼저 이정호의 원전번역(2008, 이제이북스)이 있었고, 2018년 12월에 박종현의 번역이 그리고 이번에 천병희의 번역까지, 세 가지  「메넥세노스」 원전번역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6개월도 안 되는 시간에 두 종의 번역이 추가된 것이다. 이정호의 번역만이 존재할 때, 이 대화편을 다룬 논문을 읽었다. (인터넷 보기 가능) 장지원의 논문, <플라톤의 대화편 『메넥세노스』의 교육적  해석>(2015)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01751
초록을 잠시 살피자.
"『메넥세노스』에서 플라톤은 페리클레스와 대조적으로 신적 질서에 따라 자족할 수 있는 덕 있는 시민들의 폴리스를 아테네의 이상향으로 제시하며 시민들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민회와 희극, 비극 작품과 같은 방식을 통해 시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매체가 발달해 있었는데, 전몰자 추도 연설 역시 시민들의 이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

 

시민들에게 영향 미치는 매체가 발달, 추도연설도 유사한 기능을 수행
페리클레스는 전몰자 추도 연설에서 아테네는 전 그리스인의 학교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폴리스는 실제로는 델로스 동맹의 기금과 시민들의 희생에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플라톤이 구상한 아테네의 이상적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을 읽은 후에 「메넥세노스」를 읽어야 플라톤의 기획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의 핵심(새로움) 주장은 추도식, 전몰자를 위한 추모 의식 자체가 시민 교육마당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리스 비극 공연이 시민(교양) 교육의 일환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데, 추도식 또한 그랬으며 특히, 당대의 가장 유력한 인사가 행하는 추도사는 그 자체가 뚜렷한 교육 목적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을 읽은 후에 「메넥세노스」를 읽어야
반공이 거의 국시처럼 여겨지던 시절,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주요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국적인 차원의 반공궐기대화를 하던 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장년과 노년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생 상담을 하는 할머니 한 분을 알고 지낸 지 오래 되었는데, 성인들을 대상으로 가치관을 변화시키느니 하는 강연이나 계발서 등은 거의 대부분은 허구라고 단정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어떤 식이건 성인이 될 즈음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이 형성되고(머리가 굳어지고), 이를 바꾸는 일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는 것. 그러므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글짓기를 반공 글짓기로 시작했던, 기성세대가 이념갈등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논하기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만큼 청소년기에 접하는 교육이 평생 영향을 미치는 것, 추도연설 형식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하는 플라톤의 「메넥세노스」에서, 추도식마저 교육의 일환이었음을 앞서 소개한 논문을 짚어내고 있는 것.

 

추도식마저 시민교육의 일환이었음을  「메넥세노스」 분석으로 밝혀
때문에 비극 공연이 시민교육의 일환이었음은 당연한 것, 그런데, 최혜영의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그리스 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그리스 비극의 공연 의도(집필 목적)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그리스 신화에 뿌리로 하여 인간의 고뇌, 욕망, 운명, 복수, 저주 등 인간 심연의 본성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시공을 초월하여 인기를 끈다. 그리스 비극이 그러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을 문학 작품으로만 이해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는 것. 특히, 1부에서는 비극 작품들의 공간 배경을 중심으로, 주요 비극작품들을 살피는데, 궁극적으로 아테나이 입장에서 아테나이 시인들이 쓴 작품을 아테나이 시민들을 관객으로 공연되었다는 점, 그러므로 거기에 아테나이 중심의 세계관이 작품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장 테바이 배경 비극, 2장 아르고스, 3장 스파르타, 4장 코린토스 그리고 5장 아테네 배경 비극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 비극을 문학작품으로만 이해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 풀어
아테나이와 테바이는 인접한 국가이지만, 한일관계가 그러하듯이 오래된 갈등관계를 유지하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데, 테바이를 페르시아 전쟁 즈음에 가장 먼저 페르시아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인다거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는 스파르테와 협력하며 아테나이를 코앞에서 괴롭히면 긴장하게 만든다. 아르고스는 친아테나이 정책을 펼치지만 필요시 '중립'을 선언한다거나 등거리 외교가 기조였다. 코린토스는 시종일관 아테나이와 적대관계일 뿐만 아니라 스파르테 펠로폰네노스 동맹의 주도국으로 오랜 전쟁에 뛰어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페르시아 전쟁 발발 이전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이후까지 비극작품들이 공연된 시기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에서 작품을 교육적 목적을 읽는 일을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하고 있다.

 

아테나이 입장에서 대립·협력 관계 나라(비극 공간배경)와 친소 관계 반영
"아테네 비극작가들은 사회의 교사이자 공인된 유행어의 입안자, 공인된 전통의 생산자이기도 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의 녹을 먹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작품을 조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비극시인들이란 사회를 가르치는 교사요, 국가에 유용한 조언자들이라고 평가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27면)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이처럼 테바이를 폭군이 지배하는 사회, 신들의 불문율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 명예로운 행동이 짓밟히는 사회, 남자와 여자가 전도된 사회, 왕가 여성이 결혼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되지도 못하여 왕실의 후손이 끊어지는 사회로 그려낸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테네는 민주정의 나라, 신들을 경외하는 나라, 남성이 남성다운 사회, 자손이 번창하는 사회로 그려지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60면)

 

아리스토파네스, “비극시인들이란 사회를 가르치는 교사요, 국가에 유용한 조언자들”
비극 공연은 공동체 디오니소스 제전에 바쳐진 전체의 종교 행사였다. 뿐만 아니라, 테바이 등 '적국'의 기세를 꺾기 위한 심리전의 도구이기도 했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정치적인 행사이기도 했다. 추도식까지, 「메넥세노스」를 교육적 효과 차원에서 해석하는 논문을 소개한 것은, 비극은 오죽했겠나 하는 것이었는데,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이러한 측면에서 비극 작품의 탄생 배경을 밝히는 흔치 않은 국내 비극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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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인질이다 열다 페미니즘 총서 3
디 그레이엄.에드나 롤링스.로버타 릭스비 지음, 유혜담 옮김 / 열다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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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논문 형식이라 잘 읽히지는 않는데, 그래도 다루는 내용이 놀랍다. 제시하는 사례 말고도 살면서, 꼭 <그것이 알고 싶다>(SBS)를 즐겨 시청하지 않아도 주변 혹은 의외로 가까운 데서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때마다 왜 그럴까, 던진 질문에 대한 일련의 대답을 담고 있다. 정확히는 ‘이거 뭐지?’ 하면서도 질문으로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 생성되는 경험일 것이다. 머리말 첫머리에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다.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거 뭐지?’  질문으로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 생성되는 경험

맞는 얘기인데, 이처럼 책을 읽는(이론을 확인하는) 과정이 힘겨운 여정이 된다는 것. '어렵다‘는 난해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흔히 철학서적 읽기에서 겪는 어려움과 다른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이하다. 고정관념이 한 방에 깨질 것이며, 그럴 내용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렇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독서를 통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깰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훌륭한 과정이며 기다리는 순간인가? 또 하나 여성들을 지칭할 때 '그들'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에 대한 배경설명이다.

"'우리'를 쓰기로 한 건 이 책이 여자들에 의해, 여자들을 위해, 여자들을 대상 독자로 쓰인 여자들에 대한 책이라는 점을 모든 독자가 확실히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43면)

라고. 그렇다면 남자 독자인 나(필자)는 봐서는 안 되는 책을 '훔쳐보고' 있는 것인가?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이보다 더 그럴듯한 설정이 또 있겠나 싶다. 그 진의를 몰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문제를 우리가 자각하고 우리가 먼저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가 특히 남자들일 수도 없고 그들이 '해주는' 것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더라는 사실 확인으로 읽는다.

 

누군가 특히 남자들이 '해주는' 것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더라

페이퍼로 이 책을 다룬 바 있거니와, 이 책의 근간(출발점)이 되는 여남 간 유대감을 다룬 그레이엄의 논문이 발표된 해는 1991년이란다. 이 논문은 발표되자마자 전국적으로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는데, 그만큼 논문의 결론은 충격적이며 도발적이었다. 필자는 페이퍼에서 양귀자의 개정판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연동하여 다뤘는데, 양귀자 작가가 이 논문을 읽고 이 작품을 썼는지 여부가 궁금해진다. 그만큼 이 책이 다루는 사례들과 소설 속 상황은 다른 듯하면서도 의외로 깊이 있고 복합적인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상황은 그 인질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점, 그리고 제기하는 문제점을 폭로하고 사회문제로 등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질극을 행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의 헤드라인은 「여자의 삶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다! 지난 25년간 상담가, 심리학자, 페미니스트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책!」이다. 첫 문장을 이미 얘기했다. 25년이란 아마도 이 책의 원전 초판 시점(1994)을 기점으로 하는 듯하다. 4반세기가 흘렀음에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수정 교수 등 범죄심리 전문가들의 멘트를(최근의 사건을 다룬 콘텐츠까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몇 회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스톨홀름 증후군에 대한 언급이 숱하게 나왔을 것이다. 
 

25년간 상담가, 심리학자, 페미니스트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책, 25년이라니..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벌어진 인질극을 취재하던 기자 대니얼 랭은 인질범과 인질 사이에 싹튼 '일종의 공동체 의식'에 흥미가 생겨 당사자들을 인터뷰한다. 이 책 2장에서는 1974년 미국 잡지 「뉴요커」에 실린 랭의 기사를 바탕으로 사례를 소개한다. 이 시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주저자인 그레이엄은 논문을 통해 스톡홀름 증후군 이론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어 이 이론에서 가지를 친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을 서술한다. 여남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질극은 우리의 너무도 가까운 일상 속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

필자가 흥미롭게 읽은 한 대목을 고르라면 1장(네 원수를 사랑하라)의 스웨덴 스톡홀름을 포함한 실제 인질극의 사례와 74면에서 시작되는 '인질 생존을 위한 행동 원칙'이다. 인질극이 벌어졌을 때 협상팀은 인질의 안전을 위해서 웬만하면 인질점-인질 간의 유대감을 키우려고 노력한다는 것. 스톡홀름 증후군을 역이용하여 인질의 안전을 기한다는 얘기다. 이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어쨌든 저자도 머리말에서 '경고'했지만 단숨에 읽기에는 벅찬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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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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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수협공판장에서는 왁자지껄 경매시장이 펼쳐진다고 한다. 그렇고 그런 항구가 아니니까, 볼만할 것이다. 가까이에 있지만 아직 가보지는 못하였다. 후미진 어디쯤에서 소매도 가능은 하다는데, 낮에 지나다보니 소매를 금하는 문구가 있다. 그래도 '야매' 구입은 가능하다는 얘기다. 어쨌든 그러므로, 보다 가까이에 있는 □□시장에서 반(半)건조 생선을 비롯해 필요한 것은 구할 수 있다.
 

‘가격차이야 좀 있겠지, 그러니까 도매고 소매지’ 그런데 도·소매 시장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문제라면 문제이겠지‘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고, 마땅히 밥을 해먹을 상황도 아니라서 한두 개씩 삶의 소품들을 사서 배치하는 동안 매식을 했다. 혼밥이 얼마나 어려운지, 가격도 그렇거니와, 아예 문전박대. 외로움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이름이 중하(중간 크기의 새우)라던가, 가는 식당다 간장에 절인 그 반찬이 나오는 것이다. 수염과 머리를 뚝 떼어버리고 양념된 간장(게장 양념과 별 차이는 없는 듯)에 빠뜨리는 그런 반찬.
 

‘왜 가는 집마다 이것이 있지요,’ 하니 ‘얼마 전에 많이 잡혀서’,

싼값에 공급되었다는 얘기다. 사실 백반 하면 전라도 백반인데, 깔리는 반찬이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단가를 생각하면 고민이 깊어진다. 많이 잡혀서 쌀 때 다량을 확보해서 말리거나(반건조) 절일 수 있다면, 그렇게 가격 저항을 이겨내면서 다양한 찬거리를 확보하는 것. 해서 나는 내가 만드는 첫 반찬으로 간장에 절이는 중하(간장새우)에 도전했다.

깐 바지락도 사가고, 가끔 반건조 생선도 한 묶음씩 사가는 나를 시장 입구의 할머니가 눈여겨보신 모양이다. 마침 중하가 적잖게 잡혔나 보다. 가는 집마다 특유의 플라스틱 바구니에 쌓여 있다. 기회다. 해서 그동안 간장게장(꽃게장은 아니다)을 서너 차례 사먹으면서 비축해준 게장국물을 떠올리고는 만 원어치 중하를 샀다. 하루 전 5천원어치를 사다가 삶아먹은 적이 있는데, 씻어서 데쳤더니 새우 수엽들이 엮어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간장새우는 반 토막인 것이 밥상에 올랐던 것이구나. 해서 문득 사장 할머니에게 문의했다.

 

"요것들, 머리랑 수염 떼고 간장에 담가야지요,"

했더니 할머니 말씀, “아이고 잘도 해묵소, 어지간한 여자들보다 낫소! 요새 젊은 것들은 뭣이 뭔지도 모르고…….” 그나마 '주부'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칭찬으로 느꼈는데(사실 나는 어지간한 식재료에 대해서는 고급정보를 확보하고 있는, 이 분야의 일을 좀 했던 사람이다) 생각할수록 집이 가까이올수록,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장 사장 할머니에게 이런 느낌을 얘기하면 이해하실까, 요리는 여자가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그분에게…….”

 

주문한 책이 왔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2년에 첫 발간된 양귀자의 개정판 소설이다. 읽다보니 책으로는 처음 읽는 것임을 알았다. 아마도 영화로 본 모양이다. 그때는 샐러리맨으로 정신없을 때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중하 1만원어치를 구매하면서 받은 이상한 느낌을 사장 할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이 나의 리뷰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하나의 시작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반을 이루었다." -강민주의 노트에서(책 269면)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사례가 될 수 있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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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7 - 알키비아데스 1.2 / 힙피아스 1.2 / 미노스 / 에피노미스 / 테아게스 / 클레이토폰 / 힙파르코스 / 연인들 / 서한집 / 용어 해설 / 위작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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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훈련소에서 일정 기간 훈련을 마친 신병들을 여러 부대(자대)로 배치하는 인사담당관의 기분이랄까, 천병희의 ‘플라톤전집 7권’에 실린 플라톤의 저작들을 두루 읽었는데, 글로 정리하려니 난감하다. 처음 읽는 작품들이 상당수가 있어 반가웠지만 몇 마디씩만 얹어도 장문의 글이 될 것이니 어찌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구구절절 읽으면서 메모한 것들을 모두 늘어놓을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한두 편만 언급하는 것도 좀 그렇다. '위작들'로 묶였지만 그 안에는 길이가 들쑥날쑥한 6편의 대화편이 있다.「서한집 Epistorai」에는 짧은 편지도 있지만, 플라톤이 직접 쓴 것으로 평가하는 일곱 번째 편지의 경우는 자전적인 내용을 포함한 상당한 분량이다. 우선 이번 전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 먼저 출가된 원전 번역 사례들을 살핀다.

 

처음 읽는 작품들 상당수라 반가웠지만, 두려운 스크롤 압박
먼저 『알키비아데스 1,2』(김주일/정준영, 이제이북스)는 2014년에 출간되었다. 앞서 정암학당 플라톤전집 시리즈로 「서한집 Epistorai」은 『편지들』(김주일/강철웅/이정호, 2009년 3월)이란 제호로 출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미노스 Minos」와 「에피노미스 Epinomis」다. '법률에 관하여' 논하는 「미노스」와 '새벽회의 또는 철학자에 관하여'가 부제인 「에피노미스」는 플라톤 최후의 역작 『법률』과 관련이 깊은데,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묶일 때 두 작품은 부록으로 『법률』편의 앞과 뒤에 붙여 소개된다는 것, 『플라톤의 법률』(서광사, 2009년 9월) 역주서를 내면서 박종현 선생도 부록으로 두 편을 소개하여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에피노미스(Epinomis)는 '<법률> 부록'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새벽회의'는 『법률』12권에서 언급되는데, 『법률』에서 새벽에 나랏일을 논하는 엘리트집단을 말한다(「에피노미스」는 '그 지혜를 추구하도록 새벽 회의 회원들에게 촉구해야 합니다'로 끝난다). 이 말들을 곧게 펴셔 다시 얘기하면, 「미노스」와 「에피노미스」 읽기는 쉽지 않다는 것. 『법률』과 연계해야 하니 품이 좀 들어가는 독서가 될 것이다.

 

『법률』과 연계해야 하는  「미노스」와 「에피노미스」 
이상은 철학 연구자들의 번역이니, 친절한 해설이나 주석을 참고하시고, 천병희의 텍스트와 간명한 주석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알키비아데스 I·II」와 관련해서는 플라톤의 『향연』(후반부)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알키비아데스 전'으로 독립시켜 읽고 싶을 정도로 풍운아 알키비아데스의 전력이 담겨 있어, 역시 필독해야 할 참고서가 아닐까 한다. '비교열전(대비열전)'으로도 불리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알키비아데스는 로마의 장군 코리올라누스(기원전 490년 활동)와 비교되는데, '영웅전'에서 알키비아데스는 후세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지 않아야 할 일종의 반면교사(反面敎師)의 대표사례다. 그러나 천병희의 '영웅전'에는 그리스 5인 로마 6인의 영웅들만을 선별하여 수록하고 있어 '알키비아데스 전'은 다루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투퀴디데스)와 『헬레니카』(크세노폰)를 토대로 '알키비아데스 전'을 썼다고 한다. 『헬레니카』도 좋은 알키비아데스 참고서다.

 

현대의 ‘나쁜 남자’의 신화 알키비아데스 읽기 지도
「알키비아데스I·II」, 특히 「알키비아데스I」에서 소크라테스는 애증(愛憎) 관계인 알키비아데스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정치계로 나서려는 것을 만류한다. '사람의 본성에 관하여'란 부제가 심상치 않다.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04년에 살해당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사랑받는 제자였다. 이점이 소크라테스의 사형 선고와 무관하지 않다. 양부였던 페리클레스의 사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시민들과도 원망관계에 있던 인물이다.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록」6장에는 20세도 채 안된 플라톤의 형 아리스톤이 국가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대중연설가가 되려고 나서는 것을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설득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반면 같은 책 7장에서는 노 글라우콘(플라톤의 외할아버지)의 아들인 카르테미스가 이미 저명인사이고 당대의 정치가들보다 유능함에도 정치에 입문하려 하지 않아 소크라테스가 이를 설득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I·II」와 함께 살피면 흥미로운 텍스트다.

 

정치가의 꿈 접은 플라톤의 속마음 엿보기
「힙피아스I Hippias meizon」(아름다움에 관하여)에서 소크라테스는 ‘잘나가는’소피스트 힙피아스를 만나 '무엇이 아름다운지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무엇이냐'를 집요하게 묻는다. 흥미로운 미학논쟁인데 정의가 일단락되었다 싶으면 다시 뒤집는, 힙피아스를 괴롭히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논쟁술이 흥미롭다. '사물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과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플라톤이 쓴 것으로 확실시되는「힙피아스II Hippias elatton」의 부제는 '거짓에 관하여'다. 힙피아스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힙피아스가 아테나이에 출장올 때면 머무는 집의 주인 에우디코스가 등장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아킬레우스)와 『오뒷세이아』(오뒷세우스)를 읽은 이들을 위한 ‘작품토론’이랄까, 두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등장인물들의 품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피게 될 것이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 더 능력자이며 좋은 사람냐, 현재의 상식과는 이반되는 역설이 왜 가능한지, 논의의 결과를 내는 흥미로운 대화편이다. 길지 않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
「테아게스」(Theages)의 부제는 '지혜에 관하여'인데, 데모도코스-테아게스 부자(父子)와 소크라테스 셋이 나누는 대화다.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참주라도 되겠다는, 그래서 최고의 선생님(소피스트)을 만나게 해달라는 아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데모도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맡기고……. 앞서 거론한 알키비아데스를 설득하는 듯한 소크라테스의 논리가 등장하는데, 결국 소크라테스는 테아게스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인다. 정치란 무엇인지 복잡하지 않게, 소크라테스가 왜 젊은이들을 선동한 죄목을 받게 되었는지, 실감나게 당대의 소크라테스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대화편이다. 「클레이토폰 Kleitophon」(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클레이토폰의 도발은 통쾌하며, 「힙파르코스」(이득을 사랑하는 사람)는소크라테스와 그의 학우가 나누는 대화인데, '(셜령 그 과정이 사악하더라도) 이득을 사랑한다고 남을 나무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힙피아스II」에서 이미 맛본 현대의 상식과 부합하는 역설을 나름의 논리로 입증하고 있다. ‘악용(惡用)’은 금물.

 

현대의 상식과는 다른 역설을 입증하는 논쟁, 악용은 금물
(arete)미덕: 최선의 성향; 사멸하는 생명체의 그 자체로 칭찬받을 만한 상태;

그것을 가진 자가 그 때문에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마음가짐; 법률을 준수하는 것;

그것을 가진 자가 그 때문에 더없이 탁월하다고 일컬어지는 상태; 준법정신을 낳는 마음가짐.
미덕(arete)에 대한 이와 같은 풀이처럼「용어 해설 Horoi」에는 184개의 개념에 대한 간명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수사학/시학』)에서 다루는 풀이들과 비교하면 흥미롭지 않을까?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아도 사람의 마음(감정)은 거기서 거기, 많이 달라진 것은 없더라.

 

184개 용어 간명하게 정리「용어 해설」,『수사학』과 함께
6편의 「위작들 Notheuomenoi」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자. 수록된 어느 작품이라도 얘기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작품 자체보다는 위작 논란으로 더욱 주목받은 작품들이 천병희의 ‘플라톤전집 7권’에는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특유의 산파술도 그렇고, 주요 대화편들에서 복잡하게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비해 간명하게 논쟁의 기술을 엿볼 수 있어, 플라톤 대화편 읽기의 개론서라고 할까, '그리고 플라톤전집 7권'(의외로 7권이 보물일 수 있다)이 가지는 의미는 현재로선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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