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아이테토스 - 지식에 관하여 푸른시원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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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대화만이 아니라, 언론의 인터뷰에서도 상대방의 질문이나 의견에 '추임새'처럼 하는 말이 있다. "맞아요!"다. '네.'라고 하거나, "그래요"나 "네, 그렇습니다."하면 될 것을 습관적으로 "맞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려니 하지만 좀 생각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맞아요'는, 상대방에 의견(주장)에 동참하는 나의 '의견(판단"을 포함한다. 'A는 B이다.'는 상대방의 진술이 참이라면 '맞아요.'는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A는 B이다.'가 아닌 경우에도 습관적으로, '예우'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다. '맞아요'라고. SNS나 각종 기사 등 콘텐츠에 습관적으로 붙이는 '좋아요'는 그나마 주관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맞아요'는 '좋아요'와 사뭇 다르다. 발언자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 포함하고 있음에도 그런 줄 모르고 말하는 것이다.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견에 '맞아요!'라고 대응하는 사람이 싫지 않다. 또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맞아요'는 나는 당신의 '하나뿐인 내 편'임을 인증하는 일이기도 한다. '맞아요!'에는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당신의 의견에 대한 반응이기보다는 나는 그렇게 진술하는 당신을 항상 '믿어요'라는 진단이 전제되어 있다. 나는 당신을 항상 믿는다. 때문에, 이번 진술도 '맞을 것'이라는 '신뢰' 또는 동지적인 '믿음'의 반영이며, 'A가 실제로 B가 아닌' 경우에도 '그렇군요.'하고는 나름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맹목적으로 그런 줄도 모르고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의 틀린 진술을 교정할 기회 자체를 앗아버리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과 정말 그렇다고 믿는 것의 차이는 크다.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되는지, 사유의 발생학이랄까,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는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함으로써, 진정한 앎이 무엇인가를 꼬치꼬치 그리고 천천히 복기(바둑에서)하고 있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서구 철학을 이끈 사람은 플라톤이다. 세계를 인식하고 반응하는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자가 '신들'에서 '인간들'로 이행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널리 알리는데 힘을 쏟은 철학자, 그가 플라톤인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직접 펼치지 않는다. 일련의 대화편들을 통해 문제를 툭 던지는 것이다. 연못에 던진 돌이 동심원을 일르키게 하듯이다. '대화편들'은 나라의 운명이 갈리는 결정적은 순간에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유력한 정치가가 하는 정치연설처럼 하고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하면 여느 비극과 다르지 않는 하나의 '문학 작품'일 뿐이다.

공연을 통해 당대의 시민들이 처한 상황과,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정치행위(여론몰이)를 한 장르는 희극(아리스토파네스로 대표되는)이었다. 반면, 비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의 인간됨의 정체성을 캐묻는 데 집중했다. 오늘날 철학 영역에서 플라톤이 '대화편'작품)을 통해서 하고자 한 일을 비극 작가 중에서는 소포클레스가 했다. 그가 작시술을 배웠던 선배 아이스퀼로스가 전적으로 신의 영역에서 신들의 세계에 의지했다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이성에 입각하여 세계를 보려 했고, 그런 작품 세계를 펼쳐 놓았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이 비록 7편뿐이지만, 소포클레스가 완성한 비극의 세계에 대해 가장 정확히 '수석 대변인'  역할을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시학>)가 있어, 그의 작품 세계의 의미는 입증되고 있다. 인문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학문의 시원(始原: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비롯되는 처음)이 아리스토텔레스인 것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비해, 3대 비극시인 가운데, 제3시인 에우리피데스에 대해, '비극의 창시자'(아이스퀼로스)나 '비극의 완성자'(소포클레스)처럼 딱 떨어지는 규정(닉네임)이 힘든 점이 있다. 서양철학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3대 비극작가 중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자리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 것. 시대정신을 자신이 익숙한 장르에 담아낸다는 것, 이렇게 볼 때 플라톤과 소포클레스가 한 일은 장르가 다를 뿐 큰 차이는 없다. 저마다의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플라톤의 '작품'은 정치연설이 아닌 것이다. 

5.18광주항쟁의 의미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여 하는 말이지만. 1980년대를 대표하는 몇몇 시인들이 참여하여 동인을 형성했다. <5월시>다. 일종의 협동조합을 결성한 이들의 목표는 1980년 5.18의 진실을 시를 통해서 온 나라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시가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그런 '서정시인'들도 상당수 속해 있었다. '맞아요!'라고 동의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데.. 작품'은 대상화되는 것이라서 작품의 생산자로서의 한계를 인지한 움직임, 그런 '한계'를 안고서 나름의 움직임을, 노고를 집중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일어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시인들이 시로 나섰다. <시학>에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또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시를 쓴다 해도 그는 시인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에도 개연성과 기능성의 법칙에 맞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 점에서 그는 이들 사건의 창작자[역사상 많은 사건 중에는 시인-여기서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가도 포함된다-이 그 전후 관계의 인과 관계를 밝힘으로써 스토리를 '창작'하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옮긴이 주석]이기 때문이다."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창작자에 의해 그 사건이 재구성됨으로써(전후 관계의 인과 관계를) 비로소 '보인다'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 사건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플롯'이 좋은 작품의 필수요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한다. 가령, <그것이 알고 싶다>(sbs)는 그런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제 문필가 플라톤의 작품 <테아이테토스> 이야기를 하자. <테아이테토스> 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지금 멜레토스가 제출한 고발장에 답변하기 위해 왕의 주랑으로 가야 하네. 하지만 테오도로스 님, 우리 내일 아침 이곳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멜레토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1) '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2)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아테나이인 중 1인다. 왕의 주랑이란 아테나이 아고라에 있던 주랑.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하는데, 대화편 <소피스트>의 대화가 바로 다음 날 진행된다. 기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행정적인 절차를 위해 소크라테스가 잠시 법정에 간 날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소피스트>이후에 <정치가>의 대화가 이어진다. <변론>을 해야 하는 본 무대(법정)에 나서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무려 세 편의 대화마당을 가진 것이다. 

-<정치가/소피스트>[플라톤(지은이), 천병희(옮긴이)|도서출판 숲 | 2014년 7월]의 대화 시점은 '소피스트'가 먼저이고 '정치가'가 다음이다. 이들 대화편 이전에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지의 지"를 역설한 <테아이테토스> 대화가 이뤄졌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있고, 대화순으로 보면 <크리톤>과 <파이돈>이 이어진다. 플라톤은 참 뒤끝이 '상당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변론'을 중심에 놓고, 평생에 걸쳐 스승을 변호하고 있다. 그렇고 그런 것으로 받아들리자면 그렇다. 좀 그렇지 않은가!

-<정치가>는 소송을 당한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앞서 아테네법정에 출두한 다음날, 나눈 대화이며 이날에 앞서 나눈 대화들이 <소피스트>에 수록되어 있다. 그 하루 전에 나눈 대화가 <테아이테토스>(지식에 관하여)로, 소크라테스가 인생을 마감하게 결정적인 재판을 코앞에 두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이런 대화를 나눴단다. 그런 대화편 3부작이다.

-(숲의)<정치가/소피스트>의 수록 순과는 달리 사실은 <소피스트>가 <정치가>보다 먼저 진행된 대화다.  특히 앞부분, 소피스트란 어떤 존재인가 찾아가는 짧은 문답들이 흥미롭다. 두 대화편은 궁극적으로 철학자의 고유한 영역을 찾는 과정이다. 진정한 철학자를 찾아내기 위해 주의해야 할 '유사품' 소피스트(<소피스테스>)의 실체를 규명하고 있으며, 사이비 정치가와 거리를 두고자(<정치가>) 한다.

-<정치가>에는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전 대화편의 소크라테스 자리(역할)에는 낯선 '방문객'이 앉아 있다. 말하자면 외부초빙강사인데,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요즘말로 'X맨'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대화편에 스승을 등장시켜 자기 이야기를 하던 플라톤이 집필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를수록 자기 사상을 '주창'하기 시작한다. 그 과도기에 방문객(X맨)이 주대담자이자 이론을 주창하는 이로 나서는 것이다.

어쨌든 <테아이테토스>는 '변론'을 보완하는 대화편으로 '무지의 지'의 근거를 제시한다. 초점은 '변론'에 맞춰져 있다. 소크라테스가 실제 그렇게 발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으로 만드는, 설정 그것이 <테아이테토스>다.

 

"소크라테스: 자네가 처음에 그랬듯이, 대답하기를 망설이기보다는 이렇게 열성적으로 말해야 하네. 테아이테토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찾게 되든가, 아니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든가 둘 중 한 가지 일이 벌어질 테니 말일세. 사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 보담이라고 할 수 있지."(187c) 

 

"소크라테스: 테아이테토스, 자네가 앞으로 다른 생각들을 임신하려다가 임신에 성공하면 지금의 이 탐구 덕분에 더 훌륭한 생각들을 임신하게 될 걸세. 설령 임신하지 못하더라도 자네는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덜 부담스럽고 더 유순한 사람이 될 걸세. 자네는 지혜롭게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 기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이고, 더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210c)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든가', '자네는 지혜롭게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변론'을 보완하는 결정적인 말씀들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변론'에 앞서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자 한다. "그렇군요."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 모르는 것이 무엇이든 있다는 것을 안다. 무지의 지. <테아이테토스>는 안다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변론>의 부록이다. '그래요'보다는 '맞아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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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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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중인 연극 <오이디푸스>의 대본 일부와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해당 텍스트 비교를 포함하고 있는 글입니다.

변이나 해수욕장, 혹은 유치원 야외 놀이터 등 모래가 있는 곳이면 할 수 있는 놀이가 있다. 그러나 ‘모래성 쌓기’와 같이 이 놀이에 알맞은 이름을 간명하게 붙일 수가 없다. 해서 ‘거 있잖아’라는 말로 시작하거나 ‘말하자면 일종의 보드게임인데’로 설명하는 놀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은 작은 모래성 한가운데에 막대기를 꽂고 참가자들이 모래를 한 움큼씩 원하는 만큼 덜어내다가, 막대를 쓰러뜨리는 이가 꼴찌를 하는 놀이 말이다. 물가에서 하는 놀이라는 교육 관련 게시물에 이 놀이를 ‘막대 쓰러뜨리기’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적절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다.

일단 이 놀이 설명은 다음과 같다. ‘여러 명이 모래밭에 앉아 젓가락 길이의 막대기를 세우고 번갈아 가며 모래를 자기편으로 모은다. 막대를 쓰러뜨리면 탈락한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규칙은 여기까지였다. 지는 사람은 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어쨌든 이긴 자들이 된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 가운데 모래를 더 많이 모은 사람이 이긴다.’가 더 있다. 이 한 문장을 적용하면 이 놀이에서 꼴찌만이 아니라 1등에서 꼴찌까지 서열화가 가능한 것이다. 딱히 참가자 중 누구 한 사람의 전적인 책임이 아닌데, 그러한 과실의 책임을 서열화할 수 있다는 것이 좀 씁쓸하다.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원인은 개인에게도 있고, 그것을 도운 사람에게도 있고, 알면서도 모른 체 방관한 사람, 사회가 나아가 나라가 제 때에 조치하지 못한 기관의 책임까지 따지고 보면 가해의 주체는 복합적이기 마련이다. 저마다가 “나 때문이야”라고 과실을 인정하면서 발생한 문제에 접근한다면 그 해결은 원만하고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너 때문이야’로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쪽으로 흐르고, 그러다가 유사한 사건일 재발되는 것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대부분의 이솝우화(전체 258편)마다 따라 붙는 ‘교훈’처럼 한마디 하자묜, 이 놀이 이름을 ‘내 탓이야 놀이’쯤으로 붙렀으면 한다.

얼마 전에 연극 <오이디푸스>를 보았다. 관람 전 예습으로 번역가 천병희의 최근 번역 <오이디푸스 왕>을 읽었다. 2500년 전 비극경연에서 상연될 때도 이 작품은 작품이 다루는 사건들(스토리)과 관련된 배경을 시시콜콜히 설명하지 않았다. 가령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가 낸 어떤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카드모스 성)를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구했는지를 작품은 얘기해주지 않는다. 특히, 그 수수께끼가 무엇이었는지를. 그 괴물이 스핑크스였다는 것도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의 대사에서 딱 한 번 언급될 뿐이다('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가'[129행]). 대신 스핑크스는 '가혹한 여가수'(35-36행), '저 날개 달린 소녀'(508행)와 같이 암시될 뿐이다.

이 비극의 원전번역(‘텍스트’라 하자)을 기억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연극의 실제 대본(희곡보다는 ‘대본’이라고 하자)과 많이 다름을 곧바로 느겼다. 출판 과정의 중 교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교정(校訂)과 교정(校正)이다. 전자는 오탈자를 바로잡는 과정이고, 후자는 그 과정을 거친 1차 교정지와 교정을 반영한 2차 교정지를 비교(比較)하면서 지적한 내용이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교정(校正)하듯 ‘텍스트’와 ‘대본’의 해당 부분을 비교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둘은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각색 정도에 따라 그 차이는 비례할 것이지만. 비극의 최초공연과 지금의 연극 상연까지 2500년가량의 시간차가 있을뿐더러, 번역을 통해 원작을 재현한다는 점에서(누가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발생하는 차이도 크기 때문에) 이중삼중의 굴절과정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개봉영화로 치면 기자 시사회에 해당하는 '연극 <오이디푸스>의 연습실 공개' 영상(3~6장)이 유투브에 올라 있었다. 한 부분을 골라 공연 대사를 입력한 것(대본)과 옮긴이가 최근에 '언어란 끊임없이 바뀌기도 하거니와 예전 작업의 오류를 바로잡을 때가 되어 새롭게 번역을 손을 본"(옮긴이 서문) 원전번역 텍스트(『<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일대일 비교를 해보았다. (이러한 비교에 따른 고려사항 등을 실제 사례에 맞게 정리했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상식 차원에서 짐작하는 선에 맡기고 실제 사례를 소개하는 데 집중하기로 하자) 다만 한 가지, 그리스 비극은 비극경연에서 공연된 상태라야 비로소 ‘썼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공연용 대본이었고, 지금 공연 중인 연극의 대본도 마찬가지이다. 연극뿐만 아니라 드라마의 기원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라는 점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또한 그리스 비극도 상연을 전제로 한 것으로서 알맞은 ‘길이’(특히 공연시간)라는 제한을 받았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연극 <오이디푸스> 대본(대사 중심으로 그대로 타이핑한 것으로, 비극 <오이디푸스 왕> 텍스트를 기준으로 707-734행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오카스테-IO/ 오이디푸스-OI/ 코러스장-CO)

 

IO(배해선 분): 그런 일이라면 마음 상하지 마세요. 지금부터 제 말을 들어주세요. 테이레시아스가 언젠가 라이오스 왕과 제게 신탁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OE(황정민 분): 신탁.
IO: 신탁으로 포장한 저주였어요. 끔찍한 저주, 그 저주는 라이오스 왕이 자신의 아들 손에 살해당할 운명이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라이오스 왕께서는 엉뚱한 곳에서 도둑들에게 목숨을 잃으셨어요. 스핑크스한테 당했을 수도 있지요.
OI: 또 스핑크스.
IO: 스핑크스가 자주 노리던 곳은 라이오스 왕이 죽은 삼거리였으니까요.
OI: 삼거리.
CO: 삼거리,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삼거리.
IO: 왜 그러시죠?
OI: 나는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삼거리에서 라이오스 왕이 살해되었다는 말을 지금 당신에게 들은 것 같소. 대체 어디였소. 왕이 죽은 그곳은.
IO: 델포이와 포키스와 다울리아로 나뉘는 삼거리.(까악~)
CO: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IO: 나뭇잎 줄기처럼,
CO: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다음은 원작, 비극 <오이디푸스 왕>(천병희 옮김)의 원전번역(해당 부분)이다. 파란색으로 지정한 부분은 대강 위 대본과 텍스트가 일치하는(음절 단위) 부분이다. 

 

(이오카스테-IO/ 오이디푸스-OI

IO: 그런 일이라면 조금도 염려 마세요. 그대는               [707]
말을 듣고 명심해두세요.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미래사를 예언할 수 없어요.
이에 대해 내가 간단한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710]
전에 라이오스에게 신탁이 내린 적이 있었어요.
아폴론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사제로부터 말예요.
신탁이란 운명이 그를 따라잡아 그이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손에 그이가 죽게 되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소문대로라면 라이오스는 마차가 다닐 수 있는      [715]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어느 날 다른 나라 도적 손에
살해당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들은 태어난 지
사흘도 안 돼 라이오스가 두 발을 함께 묶은 뒤
하인을 시켜 인적 없는 산에다 내다 버렸어요.
그리하여 아폴론께서는 아이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720]
라이오스는 아들의 손에 죽는다는, 그이가 두려워한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셨답니다. 
그렇게 되도록 신탁이 미리 정해놓았던 거예요.
그러니 신탁이라면 염려하지 마세요. 신께서 필요해서
구하시는 것이라면 몸소 쉬이 밝히실 거예요.                    [725]
OI: 여보, 이제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내 마음 갈피를 잡지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는구려.
IO: 무엇이 그리 불안하고 두렵단 말예요?
OI: 나는 마차가 다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라이오스살해되었다는 말을 당신에게 들은 것구려.   [730]
IO: 그런 말이 떠돌았고, 지금도 떠돌고 있어요.
OI: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대체 어디요?
IO: 그 나라는 포키스라고 불리며, 델포이에서 오는 길과
다울리아에서 오는 길이 서로 만나는 곳이지요.                 [734]

 

대본(연극이 원전을 많이 벗어났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쓰는 글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이오카스테의 대사를 주고받는(대화) 효과를 내기 위해 잘라내고, 코러스까지 개입해서 구두점을 찍듯이 그러해야 하는 부분을 강조하기도 한다. 삼거리가 '나뭇잎 줄기처럼' 세 갈래로 나뉜다는 비유까지 덧붙였다. 삼거리는 스핑크스가 출몰하는 우범지대였다는 설명도 새로운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공연 시간은 100분이다. 2500년 전 비극경연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상연시간은 이보다 길었을까, 짧았을까? 천병희의 번역기준으로 비극 텍스트는 1530행으로 연극보다는 길었을 것(코러스는 합창 곧 노래로 가사를 전달하니까)이다. 현대의 대본은 제한시간에 맞춰 특히 원작의 앞뒤를 가리지 않고 어떤 대사는 배제(선택)하고, 위치를 옮기고,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 설명용 대사를 추가할 수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이다.
이번 연극(대본)에서 두드러지는 ‘집중’은 오이디푸스의 ‘트라우마’를 작동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대사를 재구성하고 배사의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관객들을 (오이디푸스의 트라우마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시간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건 현장인 ‘삼거리’(2),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범죄(근친상간)으로 자신을 초대한 수수께끼를 낸 ‘스핑크스’(3), 그리고 ‘부은 발의 오이디푸스’(0)라는 그의 이름 자체에 깃든 비극의 시작이 그것이다. 연극에서 오이디푸스는 누군가 이 말들을 문득 언급해도 움찔하고 무너진다.

 

결론은 대본은 대본이고 비극은 비극이라는 것이다. 연극 또한 그리스 비극이 그러하듯 행동의 모방이고, 대사는 행동의 모방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주재료이다. 어쨌든 대사 위주로 비교한 것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앞서 글머리에서 ‘막대 쓰러뜨리기’ 놀이를 언급했다. “네 탓이야!”라는 말을 듣는 게임에서 꼴찌를 면하려면 아무리 원전 비극을 재구성하더라고 건드리면 안 되는 ‘핵심 포인트’가 있기 마련이다. 인용한 부분에서는, 라이오스 왕 일행을 살해한 살인범이 ‘한 사람’인가 ‘여럿’인가 하는 점이다. 두 번째 이오카스테의 대사에서 "도둑들에게"는 반드시 '도둑에게'로 대체될 수 없다. 그 살인자가 '혼자'이냐 '여럿'이냐는 오이디푸스가 범인이 될 수도 있고('도둑'이라면), 혐의를 벗어날 수도 있는('도둑들'이라면) 이 비극의 ‘발견’(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오이디푸스 자신이 그 범인임을)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연극(대본)이 무너뜨릴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그러나 ‘선택과 집중’에 따라 대본은 삼거리 를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도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강 언급하는데, 텍스트에 집중하면 상황은 다르다. 텍스트에서 오이디푸스는 "마차가 다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이 어디냐 묻고, 이오카스테는 (삼거리가 있는 곳은) "그 나라는 포키스라고 불리며, 델포이에서 오는 길과 다울리아에서 오는 길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전해들은 이야기므로 그 지점을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연극) 대본에서 이오카스테는 "델포이와 포키스와 다울리아로 나뉘는 삼거리."라고 한다.
이제, 그 지점이 어디이며, 어떤 의미인지 문학기행을 떠나보자. 구글지도를 따라 가는 인터넷 기행이다.(사진은 펠포폰네소스전생사 부록, 일대의 고지도> 그런데 해당 삼거리를 끝내 특정할 수 없었다. 델포이(델피) 다울리아(=다우리스?), 포키스(현대 그리스어로 Foks), 등 지명들이 혼재되어 장소 검색이 힘든 경우가 있다. 왜 이런 ‘답사’를 하나, 그만하자 하면서도 끝까지 가보았다. 결국 그 시대를 전후하여 저술된 그리스 저작들과 위키백과(다음)의 도움을 받았다.

델포이는 그리스의 포키스(Phocis) 협곡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해발 2457m)의 남서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만약 델포이를 등지고 정남향으로 걷는다면 코린토스만 바다와 만난다. 건너편이 코린토스이기는 하나 코린토스 지협에서부터 코린토스는 시작된다. 오이디푸스가 양부 슬하에서 자란 나라다. 델포이에서 코린토스만을 끼고 동쪽 아테니아 방면으로 가면 오른편이 코린토스지협이다. 배로 아테나이와 살라미스 섬이 있는 만(灣)에서 코린토스만으로 가려면 펠로폰노소스반도를 돌아가야 했는데, 당시에는 배를 지상으로 올려 육상에서 코린토스 지협을 통과하기도 했다.) 델포이는 포키스(나라)에 속하는 곳이다. 그 '삼거리'도 포키스라는 나라의 어느 지점으로 델포이에서 멀지 않다. 그런데 (텍스트와 대본에서) 포키스라고 할 때는 ‘포키스라는 도시’를 지칭하는 것이 되는데 델포이를 기준으로 할 때 포키스(수도/시)는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파르낫소스 산기슭에 위치한 델포이에서 해변(코린토스만, 남쪽으로)으로 내려와 우측으로 난 길로 접어들어야 포키스(시)로 갈 수 있다.

문제는 다울리아의 위치다. 다울리아는 아테나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정도로 위치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델포이에서 해안(코린토스만)으로 내려오다 좌측 길(동쪽)로 접어들어야 갈 수 있는 어디쯤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다울리아 쯤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테바이(카드모스 성이 있는)고, 직진하면 아테나이이며, 아테나이 방면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코린토스지협에 이르면 코린토스다. 다시 정리하면 그 ‘삼거리’는 파르낫소스 산의 남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델포이보다는  낮은 곳이며, 해안으로(코린토스만의) 가다가 세 갈래로 나뉘는 길인데, 우회전하면 포키스(시)이고 좌회전하면 다울리아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신탁을 들은 이후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로는 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코린토스의 왕(폴뤼보스) 곧 아버지(실제는 양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거리'에서 라이오스 왕(사실은 친부)을 죽이고 그가 도착한 곳이 테바이(카드모스 성)다. 그러므로, 그 삼거리에서 오이디푸스는 델포이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남은 길은 포키스시 쪽이 아니면 다울리아 방면이다. 그런데, 그 삼거리도 다울리아도 포기스(나라)에 속한다. 라이오스 왕은 테바이를 떠나 델포이(신탁)를 찾아가던 길에서 죽음을 당한다. 사건 현장은 '삼거리'이지만 마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길은 두 대의 마차가 교행(交行)할 수 없는, 마차의 폭 정도의 길이다. 때문에 시비가 붙었고 살인까지 저지른 것, 라이오스 왕은 그 '삼거리'에 진입하기 직전이고,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오이디푸는 그 '삼거리'를 막 벗어나 다울리아 방면으로 진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지점은 이 삼거리 부근만이 아니다. 살해를 하고 다울리아 방면으로 가다가(혹은 지나서) 코린토스(시)로 가지 않기 위해 택한 좌측 방면에 테바이(카드모스)가 있었던 것. 두려운 신탁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만 아니면 어디든 찾은 곳이 테바이(사실은 자신의 진짜 고향)였다.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제2의 가해와 그녀와 낳은 그 자식들(2남2녀)의 아버지가 되는 제3의 가해가 이어지는 곳이니까. 오이디푸스가 친부를 살해한 그 삼거리는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으며, 그러므로 또 다른 '운명의 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울리아'가 정확히 어디쯤일까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권 29장 참조)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인문지리’를 따르는 기행이다. 전설적인 아테나이 왕 판디온의 딸 프로크네가 테레우스와 결혼하는데, 테레우스는 '지금은 포키스라고 하지만 그때는 트라케인들이 살곤 하던 다울리아'의 왕이었다. 결혼한 테레우스는 처제인 필로멜레가 탐나 범하게 되고 그 범행이 탄로날까봐 그녀의 혀를 잘라버린다. 프로크네는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튀스를 죽여 그 고기(요리)를 테레우스에게 먹인다. 이 사실을 안 테레우스가 두 자매를 쫓아가 죽이려 하자 제우스가 그는 '후투티'로, 프로크네는 '밤꾀꼬리'로, 필로멜레는 '제비'로 변신시켰다고 한다(아폴로도로스의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도 나온다). 여인들이 이튀스에게 범행을 저지른 곳이 이곳 다울리아이고,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밤꾀꼬리를 언급할 때 '다울리아의 새'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판디온 왕이 딸을 테레우스에게 시집을 보낸 것은 다울리이가 아테나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사시 상호원조를 고려한 전략적인 선택인 것. '역사' 등 관련 저작에 따르면 '삼거리'는 포키스 영역 안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가급적 아테나이에 가까운 곳에 있다.

 

사는 동안 선택은 불가피하고, 세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듯이 그렇게 살아간다. 어쨌든 연극에서처럼 그런 인생의 ‘삼거리’만을 강조하는 데서 비극(텍스트) 읽기는 멈출 수가 없다. 삼거리의 세 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끝까지 가면 만나는 지명(나라)이 어느 곳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이 테바이라거나 코린토스라면 사정은 다르다.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선택지 가운데 하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 발생 시점(삼거리 부근)과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고 산자락을 내려왔을 때와는 시간차가 있다.

 

"오이디푸스: (신탁을 듣고) 난 뒤 나는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고
별들을 보고 멀리서 그곳의 위치를 재면서
내 사악한 신탁이 정해준 치욕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않게 될 곳으로 줄곧 떠돌아다녔다오.
그렇게 방황하던 차에 나는 왕이 살해당했다고
당신이 말하는 그곳에 이르렀소." (<오이디푸스 왕> 794-799행)

 

‘부은 발의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신탁)에서 내려와 향한 곳은 서북쪽 포키스(시) 방면일 수 있다. 그러다가 문득 델포이 부근을 다시 지나게 되었고, 문제의 그 삼거리(사건 현장)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거기서 그는 다울리아로 가는 길을 선택했고, 곧이어 친부를 살해했으며 그 길을 곧장 가다가 또 하나의 삼거리를 만난 것. 그리고 그가 선택한 '(돌아)가지 않은 길'(코린토스 행)은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한 길이 '신탁을 따르는 길'(테바이행)이 돠었는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스 비극을 원전으로 하되 연극은 연극일 뿐이다. 그러나 비극(텍스트)은 비극대로의 고유한 독서의 대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 책에서 만나는 천병희의 「오이디푸스 왕」은 최소한 네 번째 오류를 바로잡고 현재의 어감(말 느낌)에 맞게 다듬은 번역이다(개정판이거나 새로운 책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창작자가 아닌 번역가가 져야 할 고역이다. 우리말로 오롯이 그 시대에 맞게 텍스트를 옮기는 것이 이러하거늘 연극 대본과 원전 텍스트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연극을 잘 이해하기 위해 원전 번역을 읽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고유한 영역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삼거리"란 연극의 대사가 맴돈다. 사는 동안 끊임 없이 선택하는 인생을 길(road/way)로 시사점이 있다. 그러나 텍스트로 만나는 삼거리에는

도 다른 본래의 길(road/way)의 의미가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하지만 때론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도 또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연극 <오이디푸스>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비교하면 발견한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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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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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의 공연연대를 기원전 430~425으로 추정한다. 소포클레스는 '그 해' 비극경연에서 2등을 차지한다.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 2등(엄선하여 출전한 3인 중)이라니, 좀 아쉽다. 그만큼 작품의 주제가 충격적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왜 공연 시기를 특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6년 중 어느 해의 가을이나 봄일 텐데, 추정되는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당시 그리스의 ‘역사’를 펼쳐야 할 때다. 공연연대로 추정하는 기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 초기에 해당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참고하자.

 

무려 27년에 걸쳐 진행된 전쟁이지만 트로이아 10년 전쟁(『일리아스』가 다루는)이 그랬듯이 전쟁 기간 내낸 치열한 전투만이 이어진 것응 아니다. 당시 항구를 낀 아테나이시에는 거의 모든 아테나이인들이 도시를 성(城)으로 삼아, 변두리 농촌지역의 시민들이 파란을 온 상태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부터 거의 대부분의 전쟁기간을 그들은 그렇게 버텼다. 해군력에서 우위에 있는 그들은 넓은 바다가 피란처였고, 그들의 전쟁자금원인 식민시들이 지중해 곳곳, 특히 페르시아 연안에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수많은 함선에 올라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육상전에서 우위인 라케다이몬인들(펠로폰네소스동맹의 주도국)에 맞서 싸우는 전략이었다. 그러므로 어지간한 천재지변이 아니고는 아테나이 시 안에서는 일상적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리라. 봄가을 두 차례의 주요한 축제 기간에 열리는 비극경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극이 시작되기 전에 발생한 역병(疫病)으로 테바이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러나 당시 왕은 지혜롭기로 인류 최고로 추앙받는 오이디푸스였다. 그는 몇 해 전 테바이를 위기로 내몬 괴물 스핑크스의 위협으로부터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도시를 위기에서 구한 사람이다. 때문에, 시민들은 왕을 찾아와 그때처럼 이번 위기에서도 도시를 구해주기를 바란다. 비극의 초반 상황을 주목한 학자들은, 이처럼 역병으로 위기를 맞은 상황이 극 중 상황이, 비극경연이 이뤄지던 당시의 아테나이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27년 전쟁' 2년차(기원전 431)에 발생한 역병으로 아테나이인들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다. 전쟁 기간 동안 라케다이몬인들은 수시로 아테나이를 침공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며 ‘도시라는 요새’를 박차고 나온 그들과 일전을 겨루기를 바란다. 역병이 창궐하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우외환, 아테나이는 안팎으로 위기 상황이다. 그해 여름이다.

 

"처음에는 무슨 병인지 몰라 의사들은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다. 환자들과 접촉이 잦으니 실제로 의사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인간의 그 밖의 기술도 전혀 소용없었다. 신전에 가서 탄원을 해도, 신탁에 물어도, 그 밖에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해도 소용없기는 매일반이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불행에 압도되어 그런 노력마저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2권 47장)

 

이 나라에서는 대지의 열매를 맺는 이삭에도,
목장에서 풀을 뜯는 소 떼에게도, 여인들의 불모의
산고에도 죽음이 만연해 있나이다. 게다가 불을
가져다주는 신이, 가장 사악한 역병이 도시를 뒤쫓으니

(『오이디푸스 왕』5~8헹, 전체 1530행 중)


아테나이를 휩쓴 역병은 기원전 429년까지 이어져 그해 여름, 당면한 전쟁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의 황금시대를 지휘했던 페리클레스가 사망하는데, 역시 역병 때문이었다. 그런데 앞서 소포클레스는 테바이를 배경으로 한 「안티고네」(441년 공연)로 비극경연에서 수상한 바 있다. 이즈음 앞선 작품과 내용상 연결되는 <오이디푸스 왕>을 구상하고, 초안을 써놓았을 수 있다. 그러나 비극경연에 참가하여 발표되지 않으면 그것은 쓰이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공연연대가 곧 집필연대인 것이다. 그만큼 그리스에서 비극의 공연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 모두가 엄선한 그 해의 필독서 몇 권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경우랄까, 시민들은 기꺼히 관객으로 참여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기원전 430~425년에 해당하는 6년 가운데 어느 해의, 봄이나 가을에 공연된 것일까? 


역병이 그해 여름에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하면 기원전 431년 가을(비극경연은 봄가을 한 해 두 차례 열림) 이전일 수는 없다. 역병 발생 초기의 어수선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듬해인 430년 봄쯤으로 공연 시기를 늦춰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430~425년 가운데 어느 해라고 하면 그 범위가 넓다. 그만큼 이 시기에 축제도 비극경연도 정기적으로 열리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그 어수선함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왕>의 공연 시기는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전일까, 이후일까? 단지 역병만이 아니라---. 테바이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비극이 공연되던) 아테나이인들에서 페리클레스의 존재감은 무척 컸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의 죽음이 가져온 아테나이인들의 상실감과  <오이디푸스 왕>은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인다’. 공연 시기가 그가 사망한 기원전 429년(여름) 이전일지 이후일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이 물음 하나를 가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초입 부분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작품은 작품이고 현실은 현실, 또한 비극은 비극이고 전쟁은 전쟁, 역사는 역사일 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속수무책으로 번지는 메르스를 제압하지 못하던 몇 년 전을 기억한다. 질병 확산을 막지 못해 온 나라가 뒤숭숭하였고, 지자체의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연기되거나 끝내 열리지 못하였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전쟁 중인 아테나이의 상황 또한 축제(비극경연)을 열기에는 '불편한' 상황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한편으로 역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전에 가서 탄원을 해도, 신탁에 물어도” 해법을 찾지 못했다는 ‘역사’ 기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비슷한 행위'는 또 무엇일까? 오히려 그런 방편으로 <오이디푸스 왕>은 무대에 오른 것은 아닐까?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개최한 축제에서 당시 시민들의 염원을 반영한 작품을 소포클레스는 쓴 것이 아닐까?  

 ‘왕의 부덕한 소치’로 가뭄,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은 일어나고 나라는 위기에 처한다. ‘오이디푸스 왕’을 희생양으로 삼아 역병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닐까? 희생 제의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해석하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고전학자 베르낭(Vernant)이 대표적인데, ‘신들의 응징으로 집단이 위기에 빠질 때 규범적인 해결책은 왕을 희생시키는 것’이 한 방법이다. 『일리아스』는 역병(疫病)이 창궐하여 전멸 위기에 처한 그리스연합군 진영에서 시작된다. 신탁에 따라 역병의 원인을 밝히고 역시 신탁에 따름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역병의 원인제공자는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인간들의 왕의 교만 때문이다. 이 일로 하여 아가멤논의 리더십은 복구 불가할 정도로 훼손되며, 참혹한 비극이 이어진다. 일종의 응징이다.
베르낭은 ‘왕을 희생양 삼기’라는 점에서 그리스의 오스트라시즘(ostracism; 도편추방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기원전 6세기 아테나이에서 실행되던 이 제도는 독재자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추방하기 위한 제도였다. 공정한 재판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 아고라에서 공동집회가 열리면 시민들은 질그릇조각(도편:陶片)에 자기가 생각한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그렇게 지목된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먀, 지목된 사람은 방어할 수 있는 절차도 없다. 떠나야 하고 떠나는 것이다. 아테나이의 입법자 솔론은 이러한 관행을 “한 도시는 그 도시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살라미스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도 그렇게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을 찾아가 말년을 의탁하고 이국땅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뒤이어 아테나이를 해상제국으로 이끈 사람이 페리클레스가 아닌가, 물론 아테나이가 역병(과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페리클레스를 제거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희생양-왕’으로 해석할 때, 또한 관객(시민)들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전쟁의 진짜 원인을 투퀴디데스는세 차례나 강조하는데 요지는 이렇다. 펠로폰네소스동맹이라는 육상세력의 주도국 라케다이몬인들(스파르테)이 해상 세력(델로스동맹)의 주도국 아테나이인들의 세력이 날로 확산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라고 단언하는 투퀴디데스의 진단을 저버릴 수 없다. 사망하기 반 년 전 초겨울 페리클레스가 행한 '아테나이인 전몰자들을 위한 추도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된 40여 편의 연설문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히며 가장 빈번하게 인용된다.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업적에 관해 들으면 샘이 나서 연사가 과찬을 한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 ’남들에 대한 칭찬은 각자가 자기도 들은 대로 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선까지는 용납되지만, 일단 그 선을 넘어서면 시기와 불신을 사게 됩니다.(이 책, 2권 35[2] 살아있을 때는 누구나 경쟁자들의 시기를 사지만 죽은 자들에게는 누구나 경쟁심이 없어져 따뜻한 경의를 표하기 때문입니다.’(2권 45[1])

 

페리클레스가 스스로에게 하는 당부처럼 들린다. 리클레스는 이 전쟁이 터지고 2년 6개월을 더 살다 죽었다. 그거 남긴 유언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은인자중하며 함대를 증강할 것, 전쟁동안에는 제국을 확장하지 말 것, 도시를 위험에 빠뜨릴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것임." 아테나이인들은 이런 경고를 묵살했고, 전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끝내 멸망의 길에 접어든다. 소포클레스가 말년에 쓴 또 하나의 명작「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오랜 기다림 끝어 '마침내' 추방되어 방랑하지만 곧 신의 구원을 받고 신적인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콜로노스의 수호신이 된다. 그가 영면하게 되는 그 땅을 그 도시를 그가 지킬 수 있는 일종의 선물을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중엽 페리클레스의 주요 정적을 배출한 귀족가문출신이고 스스로가 민주제의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었음에도, 아테나이의 민주제를 확립한 페리클레스를 열렬히 찬미자하였다. 미처 하지 못한 얘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희생양-왕-오스트라시즘’ 부분은 이 책 말미에 수록된 철학자 양운덕의 해설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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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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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이 연극 무대에 오른 모양이다. 반갑다. 두근거린다. 공연이름은 <오이디푸스>다. 서울공연(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2019.01.29~02.24)은 시작되었고, 3월에는 지방공연[전북(8~9일), 광주(15~17), 경기(22~23), 전남(29~31)]이 이어진다.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한 TV 프로그램은 이번 <오이디푸스> 공연에 출연하는 세 배우(황정민: 오이디푸스 역/ 배해선: 이오카스테 역/ 남명렬: 코린토스 사자역)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 연극의 원작인 <오이디푸스 왕>이 수록된 책을 한 권 구입해서 읽었다. 천병희의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반양장)다. 원전 번역인 점도 있지만, 가장 최근의 책에는 기존의 번역을 끊임없이 다듬은 노고가 담겨 있으리라는 점도 감안했다.

 

 왜 이 인터뷰에 이 세 사람이 등장했을까? 이들이 맡은 배역의 중요도에 따른 것일까? 어떤 다른 이유(흥행) 때문에 이 세 사람이 그 배역을 맡은 것은 아닐까? 사소한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 배우가 누구냐가 아니라 <오이디푸스 왕>에서 중요도에 따라 세 배역을 고르라고 한다면, 세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런 이야기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얼마나 힘들었을까) 연기파 배우들이 천만 영화의 주역으로 드라마, 케이팝과 더불어 한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나름대로' 상당수 조연급 주연들은 그런 영화들에 다수 출연하여 어지간한 주연급 배우 부럽지 않은 조연으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잔뼈가 굵은' 세월은 배고픔도 견뎌야 하는 그런 시간이다. 모든 순수예술이 그러하듯 그가 금수저든 흙수저든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활동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해서 연극판의 수준급 연기자들은 스크린이나 드라마 등에서 '새롭게' 발견되었고, 그들이 맡은 역할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아도 소비자들은 열광하고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연극판을 떠나 (시장의 언어로) '출세한' 연기자들은 행복할까? 대체로 (각종 인터뷰들을 살피면) 연극무대가 본인의 본 무대이고 스크린과 TV는 연극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는 듯하다. 물론 스크린에서 성공하기 위해 연극 마당에서 고생하면서 기예(機藝)를 갈고 다듬을 수 있다. 어쨌든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과 생계를 위한 노동이 일치하지 않은 삶이 거의 대부분인 때에 새삼 배우들만의 문제인 양 강조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연극은 시간예술(공연예술)이면서(리플레이는 없다) 일정한 공간(무대와 객석)을 필요로 한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 NG도 재촬영도 편집도 허용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PLAY만이 있을 뿐이다. 배우들로서는 같은 내용을 연기할 때마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공연 회차가 늘어날수록 연기는 완숙해질 것이나 그렇다고 자만은 금물이다. 무대라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배우는 관객들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때문에 부담스럽지만 덕분에 현장 반응을 직접 그리고 즉시 확인할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대면하는 직거래이기에 가능한 일이며, 이것은 일종의 대화다.
연극 무대야말로 연기자들에게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훌륭한 연기학교이고 그 참여 자체가 예술행위이며 작품의 일부다. 그렇기에 배우라면 연극 무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시간에 행하는 예술이기에 참여하는 관객들의 입장료 부담은 불가피한 것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생산한 작품이 보다 많은 소비자들을 만나는 점접 형성에서 연극은 스크린(TV)을 따라잡을 수 없으며,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연기자들에게 연극 무대는 떠나 있을 때도 늘 향수의 대상이고, 귀향을 다룬 소설(대체로 성장소설)이나 영화처럼 가끔씩 찾는(무대 위든 객석이든) 연극 마당에서는 회한이 가득하지 않겠는가? 

 

이번 <오이디푸스> 공연에서 황정민은 오이디푸스 역을 맡았다. 배해선(이오카스테 역)과 남명렬(코린토스 사자역)도 출연한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익숙한 배우들만 거론하면 세 사람이다. 그런데 이 연극의 원작자인 그리스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가 최초로 비극의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를 두 사람에서 세 사람으로 늘린 개혁을 한 사람이다. 그리스 비극을 얘기할 때 3대 비극 시인(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들의 작품과 그들의 역할을 이야기 하는데, 아이스퀼로스는 제2배우를 추가함으로써(이전에는 한 사람이란 얘기다) 음악(노래)를 담당하는 코러스(장) 없이도 배우들만으로 '대화'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아이스퀼로스에게 작시법을 배운 소포클레스가 제3배우를 추가한다. 오늘날의 연극 무대를 생각하면(물론 모노드라마도 있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드라마의 출발은 이러했다. 아이스퀼로스를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 소포클레스를 비극의 완성자로 부른다. 또한 소포클레스는 연극 무대의 배경을 도입했고, 비극 3부작(축제 중 진행된 비극경연에는 세 시인이 출전하였는데, 저마다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사튀로스극을 세트로 무대에 올렸다)에서 3부작 모두가 하나의 주제를 연속해서 다루는 연속 3부작(아이스퀼로스의)의 기법을 버리고 개개의 비극이 그 자체로 완결되도록 했다. 이것은 인간 운명의 주역을 신이(아이스퀼로스처럼) 아닌 인간으로 보는 그의 인생관과 무관하지 않다.

 

어쨌든 이러한 비극 개혁에 기여한 점만으로도 소포클레스를 비극의 완성자라고 보는  데에 지장은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위대한 창조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반성적인 문헌학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비극의 기원에 대한 물음을 묻기 시작하였지만-김상봉: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322면)는 <시학>에서 비극 위주로(서사시에 대한 언급이 일부 있다), 예술론을 전개하는데, <오이디푸스 왕>을 최고의 작품, 가장 비극다운 비극작품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제3배우의 등장은 <시학>에서 제시하는 비극의 6대 구성요소(플롯, 성격, 조사措辭, 사상, 볼거리, 노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플롯(사건의 짜임새) 그리고 성격(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 결정되지만, 행복과 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내용'을 담기에 기존 '형식'(2명의 배우라는)은 한계로 작용했고, 보다 비극다운 비극을 위해 그 형식을 파괴한 것, 그것이 제3배우의 등장이다. 무대배경(미술) 도입도 기존 무대를 일종의 '마당극'에서 '무대'를 독립시킨 것이다(대상화 함). '연속 3부작'의 틀을 깬 것도 혁명이다. 그 해 축제의 비극 경연에 출전한 세 명의 시인이 비극 세 편씩, 9편의 비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전에 비해 그 주제가 얼마나 다채로웠을까,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top10 다음에도, 인간 세상을 읽는 키워드는 숱하게 널려 있다. 

 

'제3배우의 등장'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잠시 살펴보자. <오이디푸스 왕>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가 등장한 이후(924행~)부터다. 이 사자는 실제로는 양부이지만 (오이디푸스가) 친부로 알고 있는 코린토스 왕의 사망 소식을 가져온다. 이제 코린토스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오이디푸스라는 희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친부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어머니)을 하게 된다는 신탁 때문에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하다가 위기에 처한 테바이를 구하고(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그 상으로 공석인 왕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전왕(라이오스)의 왕비(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이했다.] "사자는 오이디푸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그를 모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오지만, 그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시학> 11장)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와 사자(가끔 코러스장이 끼어들지만 그는 배우가 아니다), 세 배우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한 사람을 빼는 것이 가능할까? <시학>은 이 대목을 '급반전'(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다. 또한 '발견'(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급반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하다고 한다. "발견은 급반전과 결합될 때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비극이 그런 행동의 모방이라는 것은 이미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불행해지느냐 행복해지느냐 하는 것도 발견과 급반전으로 야기된 사태 변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시학> 11장)

 

재판은 판사와 변호사(원고)와 검사(때론 피고측 변호사)라는 세 그룹의 활동으로 진행된다. 최소의 조건이면서 더 이상은 군더더기다. 증거가 우선이다.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경우는 심판이 있고, 관계자 둘을 직접 만나게 하는 삼자대면을 해야 그 증언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런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 최종적인 판사의 판결은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다'라는 결론은 못 내리고 '그렇게 보인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국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국정농단(행정부)에 이어 사법농단까지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삼권분립은 회복불가할 정도로 오염된 상태로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얘기다.  소포클레스는 자신의 비극 무대에 제3의 배우를 등장시킴으로써 그리스 비극이라는 장르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정점을 찍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도 소크라테스의 발언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가끔씩 인용되는 고발자(원고)의 발언이나 술렁이는 객석(배심원들)을 진정시키는 소크라테스의 당부 등을 감안하면 세 그룹이 등장하는 비극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지방공연이라도 가까이서 상연될 이번 <오이디푸스 왕>을 꼭 보고 싶다. 해서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었다. 아마도 천병희의 '오이디푸스 왕'만을 기준으로 할 때 그의 원전번역은 이번이 최소한 네 번째가 아닐까. 단국대 출판부(5편 수록)에서, '소포클레스비극전집'(숲, 현존7편 수록)으로, 다시 '그리스비극걸작선'(여기에는 <안티고네>도 실림> 그리고 이번까지 개정판을 배제하고 최소한 네 번째다. 천병희는 오래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원전번역한 번역가다.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비극의 모범답안으로 삼는 그리스 비극의 정점이다. 책을 새롭게 펴낼 때마다 번역가 천병희는 끊임없이 기존 번역을 다듬고 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그런 흔적들을 발견하였지만 이는 [가능하다면]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이번 연극 <오이디푸스>의 대본도 궁금하다(가능하다면 이것도 또 하나의 글감이..).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크게 세 부분 구성인데, 두 편의 비극과 비슷한 분량의 해설(『오이디푸스 왕』을 읽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1)고전학자 베르낭과 2)역사학자 르네 지라르 그리고 3)장-조셉 구스(Goux)을 따라가며 '오이디푸스 문제'를 개관한다. 그리스 비극을 좀 읽었다는 독자들에게도 새롭게 오이디푸스를 만나게 하지 않을까? 특히, 구스(Goux)의 견해는 흥미롭고 진행형이다.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철학(자)의 탄생을 알렸다면, 앞서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인간의 탄생을 선언했음을 가늠하게 한다. 플라톤은 오이디푸스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자연인 소크라테스의 초상화에 드리워진 오이디푸스의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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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2-14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병희 선생님이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라는 책에서 다시 한번 번역을 가다듬은 모양이군요. 이번에 무대에 올릴 연극도, 새로 나온 번역본도 모두 궁금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이디푸스 왕』을 생각할 때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밝힌 이야기가 늘 마음에 걸리더군요. 오이디푸스는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는 주장 말입니다. 그걸 믿어야 옳을지 지어낸 얘기로 흘려야 옳을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되더군요.(☞ http://blog.aladin.co.kr/oren/6827813)

timeroad 2019-02-15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지방공연이라도 꼭 챙겨 볼려고요, 대본을 구할 수 있으면 좋은데.. <역사>를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워낙 설화가 많을 뿐더러, 그것이 또 읽는 재미이기도 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투퀴디데스의 <역사>와 바교대상이 되나 보니, 신빙성에 대한 논의가 되는 듯합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회상한' 저술들의 '발견'은 그간 플라톤에 ‘의해’ 추정할 수밖에 없던 소크라테스 읽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 <향연>,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그것이다. 그간 번역가 천병희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필두로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시작하여, <국가>를 위시한 중기 대화편들, 후기 저작을 대표하는 <법률>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원전 번역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번역사를 ‘새로’ 썼다. 위작 논란에서 자유로운 플라톤의 대화편들 대부분을 한 번역가가 우리말로 옮겼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며 새로 열린 길이었다.

 

새로운 번역사를 쓰다, 대부분의 플라톤 대화편을 원전번역한 천병희
그런데 궁금했다. 그런 천병희 선생이 우리말로 옮길 다음 책은 무엇일까? 그런데, 뜻밖에도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관련 저작이라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번 저작은 이후에 출간되었지만 선생은 오래 전에 번역하여, 플라톤 대화편 번역에 가늠자로 삼지 않았을까? 플라톤의 자상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화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문득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저 산 저 너머에 걸린 무지개나 그 숲 어디쯤에서 노래하는 파랑새처럼.
그런데 천병희의 크세노폰 번역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래 전에 펴낸(단국대 출판부) 것을 새롭게 다듬어 펴낸 <페르시아 원정기>(숲, 2011)가 있다. ‘원정기’에 이어 필자는 번역 출간된 크세노폰의 다른 저작 <키로파에디아 -키루스의 교육>(이은종 옮김, 주영사, 2012)를 읽었다. <페르시아 원정기>도 흥미진진했지만 그 연장선에서(저자가 페르시아에 원정 과정에서 취재한 자료를 기반으로) 쓴 <키로파에디아>는 한 편의 소설(실제로 옮긴이는 소설로 규정했다)처럼 부담 없이 읽혔다. "이 사람 뭐지?" 필자는 크세노폰이 다루는 주제도 그렇거니와, 그의 글이 가진 독특한 스타일(문체, 기술 방법)에 매료되었다. 크세노폰은 그 시대에 어떻게 ‘작품’인 듯 ‘작품’이 아닌,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술을 하였을까? 그 '용기'가 궁금했다. 무엇을 위해? 그 ‘무엇’을 한동안 고민하면서 찾아야 했다. 부제에서 보듯 <키로파에디아>는 일종의 전기로 교육 문제를 다룬다. 한 인물의 혈통, 타고난 자질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아 탁월한 지배자가 되었는지, (비록 적성 국가의 위인이라도) 아테나이의 독자들에게 모범을 제시한다.

 

플라톤 대화편 번역의 가늠자로 '회상록'은 미리 번역되지 않았을까?
크세노폰은 그리스에 大퀴로스(페르시아, 아카이메니다이 왕조의 시조)의 리더십을 소개하는 것이다. '리더는 따르는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당연하신 말씀이다), '항상 좋은 리더는 없다'(때론 따르는 사람이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리더십의 발휘에 필수적인 도구(tool) 중 하나가 '두려움'이란다. 국내에서만 17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에서 충무공은 전사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이처럼 <키로파에디아>에서 소개하는 리더십에는 야전의 지휘관이기에 현장에서 터득가능하였을 생생함이 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적진에서 터득한 그 나라의 리더십을 자국의 1만 용병들을 탈출시키는데 적용한다. <페르시아 원정기>는 그런 이야기다. 세월이 흘러도 빛날 뿐만 아니라 응용 가능한 가치를 담고 있다. 때문에 <키로파에디아>와 함께 <페르시아 원정기>는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알렉산드로스가 휴대한 고전이 <일리아스>만은 아니었던 것).
크세노폰이 사건을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 기술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 원정기>도 예외가 아닐뿐더러 자전적 저작으로, 그러한 저작을 대표한다. 이 <원정기>에 퀴로스2세의 용병 제안을 받아들인 크세노폰이 고민하는 대목이 있다. 적성국가의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한다! 이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왜 사전에 용병 참여 여부를 나와 상의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란다. 용병대의 참여가 훗날 고향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 출전하더라도 신탁에 가서 묻는 등 (신중했다는) 모양새를 갖추라고 조언한다(머잖아 국가의 신들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될 소크라테스의 당부다). 두 사람이 부자(父子)나 다름없는 사제지간이었음을 엿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믿어지고.'(천병희 해설) 있다. 

 

생전의 소크라테스와의 마지막 만남이 담긴 <페르시아 원정기>
이것이 크세노폰이 생전의 소크라테스를 만난 마지막으로 기록이다. 그런데 크세노폰(기원전 430/25년경~355/50년경)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와 플라톤(기원전 427~347)과는 달리 5년 남짓의 특정할 수 없는 세월이 있다. 어쨌든 2년 동안의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 기간(기원전 401년 3월~399년 3월)에, 아테나이의 소크라테스는 사망한다.
때문에 그는 기원전 399년의 아테나이, 소크라테스가 고발되어 재판정에 펼친 세기적인 변론을 지켜볼 수 없었다[플라톤은 이 재판을 참관했다(1)]. 투옥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감옥에도(2), 사형 집행 현장(3)에도 크세노폰은 배석할 수 없었다. 가까이에서 이 과정을 지켜본 플라톤(당시 28세)에 비해(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이란 대화편에 이 과정을 담았다), 물리적인 거리에서 시간상의 차이에서 크세노폰은 스승의 죽음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임종할 때 그 자리에 배석했다는 헤르모게네스로부터 들은 내용을 토대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쓴다. 동명의 플라톤의 대화편에 비해 길이는 짧고 깊이가 없다고 평가된다. 또한 스승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담담하다. 재판 현장의 속기록을 읽는 듯이 세세한 플라톤의 <변론>에 비하면 무성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자신의 '변론' 서두에서부터 단도직입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깔린 핵심을 짚는다. 집필에 앞서 크세노폰은 (헤르모게네스로부터)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최후의 삶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플라톤을 비롯한)의 글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읽었다.

 

단도직입, '변론' 서두에서 스승의 죽음을 진단하는 크세노폰
그런데 이들의 기록은 그(소크라테스)의 '잘난 체하는 말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고 일축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당한 것은 그가 고발된 죄(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고/새로운 신들을 들여오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 때문이 아니라(변론 자체에서는 이겼으나) 당시 기득권자들(시민배심원)의 심기를 거슬린 '괘씸죄' 때문에 죽었다, 라고 결론짓는다. 소크라테스가 행한 변론 내용보다는 그의 변론 태도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거침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것이 아니라 '자초한' 것이라는데, 행간 곳곳에서 "이 양반, 큰 코 닥칠 줄 알았어."라는 저자의 혼잣말이 튀어나오는 듯하다.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소크라테스와 나눈 평소의 대화 스타일(말투, 태도 혹은 근성)을 잘 알기에 가능한 진단이다. 스승의 죽음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이들 사제지간의 우정은 두터웠고, 그만큼 허물없었음을 엿본다. 당대에 그리고 훗날의 독자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그들은 훨씬 가까웠을 것으로 예상한다. 때문에 거두절미(去頭截尾) 크세노폰은 헤르모게네스가 증언하는 비밀, 그(소크라테스)가 "의도적으로 잘난 체하는 말투를 썼음"을, 짧은 지면에도 일부를 할애하여 소개한다. 

 

헤르모게네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변론해야 할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 자네는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헤르모게네스: 어째서 그렇습니까?
소크라테스: 나는 불의한 짓이라고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살아왔으니, 그것이야말로 변론을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변론> 앞부분의 서술을 대화로 구성_필자)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길게 늘어놓을 이유가 없으며 그의 스타일도 아니다. 이런 짧은 길이 때문에 장황한 연설문(변론 내용) 형식의 플라톤의 <변론>에 대한 일종의 소회(리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변론’은 플라톤의 관련 대화편 <크리톤>과 <파이돈>에 대한 리뷰이기도 하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왜 그랬을까(독자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대답할 수 있는 해석적 질문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처럼 간명하게 '의견'을 제시한다. (1)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 (2)배심원들의 반감을 ‘산’ 탓에 자신의 유죄를 더 '확실하게' 만들었다. (3)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일단 결정하자 죽음 앞에서도 유약해지지 않고(플라톤의 <변론>) 죽음을 기다릴 때도(<파이돈> 죽을 때도(<파이돈> 쾌활할 수 있었다.(크세노폰의 <변론> 32~33)
크세노폰의 '변론'은 같은 책에 수록된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의 연장선에 있는,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아니 '변론'은 상대적으로 긴 '회상록'(이 논문 전체라면)에 대한 개요(그 논문의 '초록')이며 서문이다. 그런데 간명한 '변론'에서 크세노폰은 고발자 중 1인인 멜레토스를 논박하는 소크라테스가 발언을 상세히 재구성한다. "…… 나를 인류 최대의 축복인 교육 전문가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나를 사형에 처하라고 그대가 고발하는 것이 더 놀랍다고 생각하지 않소?"라고. 재판에 관해 세세히 보고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던 크세노폰이 굳이 '소크라테스는 인류 최대의 축복인 교육 전문가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는 걸까?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결연한 태도(일련의)를 '통해' 최후의 순간까지 시민들을 교육하였다고(가르침을 행하였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당대의 플라톤에게, 훗날 플라톤을 의해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마중하는 후학들에게 크세노폰은 '가볍게'(경박 혹은 경솔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인류 최대의 축복인 교육 전문가', 회상록은 그리스판 <키로파에디아>
크세노폰은 용병으로 참전한 경험에서 <페르시아 원정기>를 썼고, 더불어 <키로파에디아>라는 그 성격을 "역사서도 정치철학서도 아니며 사실을 바탕으로 쓴 역사소설로 규정"(역자 서문)할 수밖에 없는 저술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두 권의 대표 저술을 하게 되는 원정 기간에 고국에서는 스승이 사형선고를 받고 ‘서거’했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크세노폰은 세 편의 회상록에 늘 가까이 있었지만 그 때는 몰랐던 ‘파랑새’를 상기함으로써, 또 하나의 아테나이 시민교육을 위한 ‘키로파에디아’를 남긴 것은 아닐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플라톤의 ‘작품’들(대화편들)은 말과 행동으로 그려볼 수 있는 자연인 소크라테스의 '그리는' 데 걸림돌이 된다. 당대의 시대가 맞닥뜨린 문제들에서 해결책을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그처럼 어려웠다면, 그런 소크라테스를 아테나이의 젊은이들이 골프스타의 행보를 쫓는 갤러리처럼 따랐을 리 없다. 오히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을 통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상식적인) '설득하는' 소크라테스(삶과 철학)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는지, 크세노폰이 그리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고유의 철학 세계도 엿보는 단초가 되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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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2-12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의 행적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크세노폰의 저작들과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함께 설명해 주시니 소크라테스의 행적이 훨씬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느낌이 아주 좋습니다.

저는 크세노폰이 지은 책은 여태껏『페르시아 원정기』밖에 읽은 게 없는데, 그 책에 나타난 크세노폰의 불굴의 용기와 지혜에는 정말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겠더군요. 여담입니다만, 크세노폰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여기저기 등장하는데(<아게실라오스 편>, <안토니우스 편> 등), 숱한 영웅들의 가슴 속에 귀감으로 남아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어서 기분이 좋더군요.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의 교육』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나오고, 다른 책에서도 자주 마주친 적이 있는데 여태껏 읽어보지 못했네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크세노폰의 저작들을 한꺼번에 쭉 읽어보고 싶습니다.
* * *
두 사람의 갑작스럽고 이상한 죽음은 나에게 고통과 아쉬움을 남긴다. 나는 한니발에게도 존경을 표한다. 그는 그토록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에 나오는 크리산테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칼을 뽑아 적을 치려는 순간, 후퇴 명령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곧바로 무기를 거두고 겸손하게 물러났다. 이런 것에 비하면 두 영웅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어리석게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렇다고 두 영웅의 행동이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펠로피다스는 적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복수하고자 용기를 내어 한 일이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펠로피다스와 마르켈루스의 비교> 중에서

timeroad 2019-02-14 18:42   좋아요 2 | URL
플라톤에게 28세는 터닝포인트입니다. 턴레프트인지 턴라이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그렇게 보인다이지 숱한 연구 결과가 있을 (후손들) 그들의 논의야 어찌 알겠어요, 다만 뭔가 다름이 있다. 소포클레스가 처음으로 비극경연에서 우승활 때 그 나이가 28세라네요. 고맙습니다.

oren 2019-02-12 1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를 인류 최고의 인물로 숭앙했던 몽테뉴도 크세노폰을 자주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난 김에 『몽테뉴 수상록』 중에 <이름에 대하여>라는 글 속에 있는 흥미로운 글을 덧붙여 봅니다.(옹테뉴는 도대체 모르는 게 없는 둣한 사람인데도, 평생 동안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화두로 삼고 살았다니, 그저 기가 막힐 뿐입니다.)
* * *
수많은 혈족들에 동성 동명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잡다한 민족·시대·국가에도 또 얼마만큼 많은가? 역사상에는 소크라테스가 셋, 플라톤이 다섯, 이리스토텔레스가 여덟, 크세노폰이 일곱, 데메트리오스가 스물, 그리고 테오도르가 스물 있었다.

timeroad 2019-02-14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세계는 이미 인간 세상에 펼쳐지지 않았을까? 채색이 화려하지는 앉지만 비록 흑백화라도. 4B연필은 스케치에 필요하지만 건설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2B연필이더군요. 현장에는 비도 내리니까요. 몽테뉴는 밑그름의 가치를 알았던 사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