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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리뷰로 쓴 것인데, 여러 책과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페이퍼로 작성한 것입니다.  

호/불호가 눈에 띄게 엇갈리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모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안고 있는 어떤 틀, 그러니까 그 작품의 성과와 한계를 같이 언급하면서 알맞은 수위를 유지하는 언론매체의 평가-몇몇 리뷰를 읽었지만-에서는 얻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정치적'이기도 하고 어쩔수없이 적절한 '예우'와 우회적인 비판 정도에 머물고 있으니까,

악마를 보았다, 내게는 악마가 보이지 않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영화 제목은 악마를 보았다, 라고 하는데 내게는 악마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캐릭터)들의 어떤 연기에서도 악마-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하겠으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피시방 컴퓨터 앞에서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건 말건 소리를 내지르면서-헤드셋이 있어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방법이 있음에도- 게임에 열중하는 손님들이 있고, 거의 대부분 피시방을 찾는 고객들이 게임을 위해서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목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사람도 있음을 무시하는 피시방의 직원들의-사장도 예외는 아닌듯- , 수수방관하는 고객관리만이 있을 뿐이다. 모방범죄를 유도할만한 잔혹한 장면은 없지 않으나 너무나 극적인 몰입을 이끄는 데에 무신경한 영화이며, 또 그것이 이 영화(감독)의 의도라고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 하나마나 한 소리이겠지만, 리뷰는 감독이나 제작자와 대화가 아니라, 그 영화(제품)의 소비자들간의 공유라는 점에서 하고싶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늦지 않았다면, 이 리뷰는 스포일러성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소설, 이야기)의 묘미는 반전이므로 내용을 먼저 아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포일러성 리뷰에 대해서 의연한 두 작품군(群)을 떠올려보자. 1)아무리 내용을 많이 알아도 그 감동은 반감되지 않는다. 나아가 알면 알수록 새로운 것이 보인다. 2)내용을 알거나 말거나 영화를 제대로 읽는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까지는 (1)과 같은데, 어차피 이 영화의 제작의도는 '스토리'에 있지 않으니까? 적어도 <악마..>의 생산자들은 앞서의 (2)의 입장에 서 있는 듯하고, (2)의 입장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고 있다. (매체 면에서)장르가 다르지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의 스토리나 디테일한 제작배경에 대해서 (많이)아는 것과 실제 보는 것이 재미와 감동을 반감시키기보다는 배가시킨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1)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생산자가 우리가 만든 이 영화는 (2)의 지점에서 기획된 것이므로 스포일러성 리뷰가 상관이 없어요, 라고 강변해도 소비자(관객)는 (1)이건 (2)이건 암튼 '편견' 혹은 '선입견' 없이 그 상품을 소비하려고 할 것이므로, 나는 그런 분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으리라. 그것은 서로에게 불행이다.

거기서 거기인 복수 드라마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둘째, 이 영화의 내용상의 주제는 '복수'이다. 아직도 '복수'를 주제로 말하고 또 뭔가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우문이 된다.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고 누군가를 적절히 이용(활용)하는 것이 '당위'를 넘어서 '미덕'인 되어버린 이윤추구와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숱한 원한 관계가 발생하고 그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는 어쩌면 현실의 칼부림보다도 더한 마음의 칼부림이 잔인하게, 날마다 일어나고 있으니까? 마음으로도 간음하는 것도 죄가 되듯이, 아마도 관객들은 저마다의 피해자로서의 기억, 가해자였지만 그때는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에 대한 자기반성, 나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서의 마음을 가다듬고 다스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을 것이니까, 그러므로 '복수'라는 주제는 사람의 이야기(소설, 이야기)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것이다. 저, 그리스 비극의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은, 대를 잇는 복수 3부작이라고 할 수 있고, 비슷하게 박찬욱은 복수 3부작을 스크린에 담아내지 않았던가. 기타 등등 숱한 복수 이야기가 있지만, 그래도 '복수'를 주제로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지 않을 것이며 그 끝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악마...>는 복수를 주제로 한 이야기의 바닥을 보았다는 듯이, 지지부진한 거기서 거기인 복수 드라마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잡았다 풀어주고 잡았다 풀어주는' 사냥놀이일 뿐이라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이 말은 복수의 기본 공식이다. 영화(만화) <이끼>에는 아예 이 대목을 언급한 성서와 해당 페이지가 등장한다. <악마를 보았다>가 펼치는 복수극도 바로 이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복수물과 아주 다른 점은 복수를 '왜' 하는가, 그리고'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개연성 자체를 무시하면서까지-일부러- 갖은 희생이 이어지는 (사회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눈에 어떤 눈을, 어떤 이에 어떤 이러 맞서는지 그 복수의 행위 자체에 집착(집중?)하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느냐, 이보다 더 잔인할 수는 없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가 아니고. 그러므로 그런 복수행위를 서슴지않는 이들은 악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악마의 다이어리를 훔쳐보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마를 보고 있는 것이다. 잔혹한 장면들 앞에서 관객들은 이런 생산자들의 '의도'에 성실하게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가 쉽지 않다. 해서 나는 게임에 비유하였으며, 현실감 있는 섬뜩함 대신에 영화가 초반부를 벗어날 즈음부터 '몰입'에서 훌훌 벗어나 불행하게도 살인의 관찰자 역할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해서, 나는 이 영화를 보실 분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심야상영과 같은 한적한 시간대에, 맨 앞자리나 맨 뒷자리, 주위 사람들이 거의 없는 데서 친구(지인)과 함께 앉아 충분히 논평하면서(속삭이면서) 영화를 봐도 된다고, 내가 산 말이 1등으로 완주해주기를 바라는 경마장의 풍경처럼. 수현인가 경철인가, 아님 그들을 지켜보는 영화 속의 눈들인가, 아님 그 생산자들인가. 진정한 악마는.. 

복수과정만을 보여주기 위해 스탠바이 된 인물들 그리고 시스템
오로지 복수를 위해 재산을 처분하고 거기에만 집중해서 10년을 기다리며 준비할 필요도 없다(<모범시민>), 15년쯤 사설 감방에 처넣고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육도 없다.(<올드보이>) 광랜 시대에 맞게 15일이면 충분하다. 처음부터 용서할 마음이 없다. 용서가 무슨 뜻이지요? 되묻는다. 아니 그의 사전에는 '용서'란 단어가 애초에 없었다. (<용서는 없다>와 달리) 엄밀하게 피해자 가족과 친지 혹은 패밀리(수현과 그의 장인, 그리고 방관하는 경찰 동료들, 지원하는 국정원 후배까지)들의 조직력을 전용(轉用)-예정되어 있는 곳에 쓰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돌려서 씀-이 있을 뿐이고, 그 시스템을 전용(專用)-1.남과 공동으로 쓰지 아니하고 혼자서만 씀. 2.오로지 한 가지만을 씀. 3 일정한 부문에만 한하여 씀-한다. 인터넷 게임에서 의상과 무기를 고르듯 수사자료를 입수하고(피해자의 아버지, 전직 강력계 형사인 수현의 장인이 건넨다), 최신 추적장비는 국정원 후배로부터 제공(?)받으면 되며, 수시로 경찰의 행적을 감청하고 있다. 그런 자세한 것은 묻지말아요! 그리고 15일이면 충분한데, 어차피 수배전단에 오른 놈들은 사회의 악이고 쓰레기이므로 만나는 족족 처리해버리면 된다. 왜, 분리수거를 기다리는 쓰레기니까? 이놈이 범인이 맞아라는 단서인 약혼자의 반지(커플링)은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의 초반부에 수현(이병헌)의 눈에 들어온다. "저, 여기 있어요, 이미 알고 왔죠?!"라는 듯이. 경철(최민식)은 극악무도한 살인자, 살인을 밥먹듯이 할 뿐만 아니라 인육을 먹고-태주라는 친구의 식탁에서 보이지만-, 개새끼의 먹이로 인육을 던져주는 싸이코패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영화에는 싸이코패스(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알고 보면 표정만이 냉정과 열정일뿐 너무나 인간적인(?) 순간들이 있다.

복수영화의 '한계', 아님 장르영화의 '경계'?
시간관계상(지면 관계는 아니므로) 줄이거니와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복수 영화-정통의 영화읽기-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스타일을 중시하는-장르영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그런 환경이 갖춰진다는 것은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할 수 있다- 감독의 작품세계를 감안하여, 장르영화로 봐줄때 이 영화는 보통의 영화와 장르영화의 '경계'에 있다. 그런데,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경계'로 보기에는 이미 본듯한, 시츄에이션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점, 해서, 복수영화의 종합세트같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지울 수 없다. 영화를 고르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이 영화는 실화(實話)인가의 여부인데, 무슨 시사프로그램의 재연 장면들을 모음과도 같다. <살인의 추억>, <추격자>을 비롯하여 우리 영화만 거론해도 많이 본듯한 장면들을 보는 듯하다. 심지어 그녀가 김옥분인 줄 착각(사실은 김인서)할 정도로 <박쥐>에서의 캐릭터와 아주 유사한 배역이 등장하여, 그럴듯한 장면까지 연출하는 서비스를 잊이 않는다. 여러분, 그동안 보신 스릴러-대체로 복수극인-는 우리랑은 차원이 달라요, 라고 패러디를 하듯.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재기를 노리는 노회한 복서처럼-마음은 팔팔한데 몸은 약간 말을 안 듣는- <악마> 대열에 합류했고, 수현(이병헌)은 <아이리스>를 촬영하다가 연인의 비보를 접하고 잠시 휴가를 내어-15일쯤- <악마>전선에 합류한 듯한 인상을 준다. 심지어 수현의 국정원 후배인 이준혁(<수상한 삼형제>에서 막내 아들 김이상 역)은 경찰청 소속에서 국정원으로 전직(특채)하지 않았나 싶다. 한마디로 그들 개개인의 연기가 빛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마> 속으로, 해당 캐릭터로 몰입하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것이 어찌 배우 탓이라고 할 것이며, 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인생은 새옹지마다. 산에 올랐으면 내려가기도 해야 한다.

<노부인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잘 들으세요. 부디 이것만은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옳은 일을 했어요. 우리는 그 남자가 범한 죄를 벌하고 앞으로 발생할 불상사를 차단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한 것이예요. 아무것도 마음에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무라카미 하루키 <<1Q84>> 2권 429-430면, 문학동네 간행 번역본 인용)

<악마..>에는 잔혹한 복수에 대해 관객의 지지를 호소하는 한마디가 거의 없다. 피해자인 1)수현의 약혼녀나 또다른 2)희생자가 되는 처제는 새로운 인물(배우)으므로, 전작의 영향 때문에 이 영화에의 '몰입'에 걸림돌이 될 인물들이 결코 아니므로, 1-1)왜 복수가 그토록 잔인하게 해야 하는지 특별한 계기점이나, 2)무모해보이는 형부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짧지만 특별한 복수의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뭔가가 필요했다(김인서가 깜빡 등장하는 그 순간들 못지 않은). 경철의 친구인 태주와 '김옥빈'이 구급대 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형사반장(천호진)이 던지는 "저런 놈들까지 살려야 하나"(정확하지는 않다, 대사가)하는 냉소와 대사는 흘러보내기에는 적지 않은 시서점이 있는 것 같다. 아예 넣지 말거나 '옳고 그름'에 대한 뭔가를 던져야 할 순간이었다. 장르문학(소설)으로 매니아층이 두터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틀을 벗어나 대중성을 확보하는 소설로, '안전장치'(위 인용은 소설에서 자꾸 반복된다. 주문을 걸듯)를 잊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저런 인간쓰레기들은 죽여야 마땅해!"라는 식의 발언을 법집행자 그것도 해당사건의 책임자가 관망하듯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것인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천호진-좋아하는 배우다-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애드립도 아니고 진지하지도 않는 뭔가 겉도는 듯한 대사들을 토해내고 그렇게 연기한다. 모든 것은 오로지(ONLY) 복수의 속도 올리기에 복무하고 있다. 이런 관내(?)의 카르텔이 작동하면서 목숨줄을 죄어오는 가운데 경철(최민식)이 생각하는 최대의 반전(복수)는 경찰에 자수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감옥 안보다 세상이 더 무섭고, 사람보다 무서운 존재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것 가운데 없다. 그것이 수현을 가장 아프게 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간파하는데, 그 과정에서 살육은 멈추지 않는다.

눈(SHOWING)에는 풍년, 입에는 흉년(TELLING)?
해를 입은 만큼 앙갚음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보이는 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대로 영화의 장면들을 요약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이르는 과정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어느 끔찍한 영화에서도 하지 못했던 그 장면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사실 <용서는 없다>의 부검장면은 반전을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나, 라는 입장이고,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에도.

1)"아니, 그냥 좀 신경이 쓰여서, 경찰에선 내가 장경철의 뒤를 쫓는다고.. 경찰에서도 장경철을 쫓는 모양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어떨까? 그만 뒀으면 좋겠어"(장인이 수현에게 전화로)
2)"형부 나예요. 형부는 잘 지내세요. 그래요, 무슨 일로 바빠요... 모르게 하는 일을 묻는 거예요. 아빠에게 수사자료.. 형부 마음 잘 알지만 그일을 그만 두었으면 해요. 어떤 처벌을 가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그런다고 언니가 살아돌아 오는 것도 아니고, 복수 같은 것 영화에서나 하는 거지"(처제가 수현에게 전화로)

1)의 대해 수현은 "저기요 아버님......", 2)에 대해서 수현은 "미안한데 처제한테 해줄말이 없어"라고 대답한다. 해서 처제가 반문한다.

처제: 나는 딴 식구예요. 뒤돌아봐요. 그런데 해줄말이 없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그러니까 형부, 의미 없어요 이제 그만 둬요.
수현: ...이 일 그렇게 의미 없지 않아.

뭐가 '미안하고' 없지 않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렇게 대사는 이어진다. 도무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들려는 개연성은 애초에 거세시켜놓고 시작하는 영화-영화 초반에 용의자 중에 한 녀석의 성기를 불능으로 만들어버리듯이-가 아닌가!
'말하기(TELLING)'를 거세함으로써 '보이기(SHOWING)'에 집중했다. 물론 이 영화에 찬반이 엇갈리듯 잔혹한 장면들을 맘껏 보여주는(여러분, CG로 이렇게도 만들 수 있답니다) 데서 눈(眼)에는 풍년(?)을 만끽한 이들이 있을 수 있으나 입(말하지, 이야기)의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무감각으로 일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개연성을 획득하기 위한 말하기(TELLING)가 왜 필요하지? 그 공감과 이성적인 판단에서 무신경했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가 싸이코패스적이다. 반면에 정작 싸이코패스로 보여져야 할 '악마'들은 영화 속에는 없다. 대신에 아들의 복수를 위해 조폭들(?)을 야산으로 끌고 가서 땅에 파묻는 어느 대기업회장의 자식사랑(?) 같은 무모함은 엿볼 수 있다.

크레타 섬 사람이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할 경우 크레타 사람이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악마를 보았다라고 강변함으로써 정작 이 영화에 악마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오로지 악마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쭉 나열한 영화소개프로그램의 편집된 영상을 보는 기분이다. 영화 대 영화, 오버 엔 오버... <아Q정전>에는 물에 빠진 개를 끝까지 때려잡아야 한다는 노신의 유명한 글이 나온다. 제 때에 범인을 처리하지 못함으로써, 여고생, 아가씨, 별장주인인 아줌마(?), 택시강도(그들이 아무리 사회악이라도), 장인어른, 처제, 의사.... 숱한 피해자들이 속출하는 것을 방치하는, 오로지 복수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통의 문장이라면 "…."으로 처리했어야 할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 어쩌면 이 영화의 상영불가 여부 고민은 잔혹한 장면들보다는 사회악을 근절해야 하는 소명을 띤 '시스템'의 작동불능 상황이 더 문제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러한 그것이 옳고 그느냐를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 쪽에 유리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스템이 작동하는'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한 냉소쯤으로 받아들여야 할지-그렇다면 참 좋은 영화다.

"소설이 상품으로 유통되고 소비되어야만 하는 조건을 한탄하는 문장을 보았다..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오히려 소설이 상품으로서 소비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피 하루키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을 소설로서 직접 보여줬다고, 일본의 비평가가 그의 이번 작품(앞서 인용한)이 거둔 성과를 두고서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소설' 대신 '영화'라는 단어로 대체해서, <악마를 보았다>를 평가하고 싶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오리혀 영화가 상품으로서 소비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만들었노라고. 장르영화를 표방했으나 대중영화와의 '경계'가 불문명하며, 대중성을 표방한 영화로서의 '한계'가 너무도 분명한 영화라고. 어쩌면 그리스 비극 3대작가가 활약하던 시절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연출되는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는 충분히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의 작가들은 참 불행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절하고 참혹하기로 한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결코 그리스 비극이나 신화의 세계를 따라잡지 못한다. 단지 보여줄 수 있게 된 도구(TOOL)을 가지고 있다고 인간 본성의 끝을 탐색하는 작업이 진지해지고 깊이를 더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비극은 무대에서 잔혹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처절한 장면을 전달했다.

우리 사전에 복수는 있고, 그 정의를 보다 완전하게 할 뿐
사실 어떠한 사전도 온전하게 믿을 수는 없다. 나폴레옹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불가능'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가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소설이나 영화, 곧 이야기는 인간본성의 이모저모를 그리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변화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탐색을 멈출 수 없다. 이창동은 왜 <밀양>과 <시>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입장에서 '용서'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것일까?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영화)는 앞으로도 우리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동안 새롭게 변주될 것이다. 아래 러셀의 지적처럼 만족할 수 없지만 만족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고, 어느 시대나 가장 최고의 작품은 이것이 완결이라고 '만족'하거나 '착각'하게 만드는 작품일 테니까,

"어떤 말을 정의 한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그것을 다른 말로 정의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말을 골라서 그것은 정의 없이도 이해될 수 있는 말이라고 간주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버트란드 레셀,

너무 가혹한 평가였다면, 장르문학(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사람쯤의 푸념쯤으로 여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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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든손예쁜손 2010-08-16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우리 영화만 사랑해달라고 하기 전에, 좋은 영화는 알아서 보잖아요.

timeroad 2010-08-17 13:10   좋아요 0 | URL
제작비의 한계가 영화의 한계도 되지만, 대로는 그 한계가 작품성 높은 작품을 만드는 역할도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치 2010-08-1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글 감사해요. 영화를 보기는 좀 꺼려지지만, 책읽기에 도움을 주는 글인듯해요

timeroad 2010-08-17 13:13   좋아요 0 | URL
영화 보시는데 부담 드린 것은 아니지요, 어쨌거나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분명해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미나사랑 2010-08-1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았다 풀어주고 잡았다 풀어주는' 좀 심했지요? 하긴 그러기 위해서 싱겁게 두 악마(?)가 만난 것이지만..

timeroad 2010-08-17 16:3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리뷰를 쓰고 난 다음에 생각해본 것인데, 동해안에서 명태(생태)를 가공하여 북어를 만드는 과정이나 포항 등지에서 꽁치로 만드나요, 과메기를 만드는 과정이 떠올랐어요. 밤이나 추우면 얼었다가 해가 드는 낮이며 해동되고 그렇게 반복하는 과정처럼, 복수놀이를 하는 것이 꼭 그런 식이라는..

라라 2010-08-17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에서 최근 영화, 최근 소설까지 아우르는 글 잘 읽었습니다. 소금의 역할을 하시는 듯

timeroad 2010-08-17 16:39   좋아요 0 | URL
소금도 소금 나름이겠지요. 햇살에 잘 말라 굳어진 자연산 소금이기를, 감사

yess1985 2010-08-1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고요, 영화는 보겠지만 큰 기대는..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작품외적인

timeroad 2010-08-17 16:41   좋아요 0 | URL
저 때문에 영화가 싱거웠다는 말씀은 하지 않기입니다.

motoko3 2010-08-1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속시원한 글입니다. \뭔가 아쉬움을 잘 드러낸듯 싶네요

timeroad 2010-08-17 16:40   좋아요 0 | URL
아무튼 고마워요, 잘 읽으셨다니..
 

시대에 따라 우리는 플루타르코스를 플루타크, 플프타르크로도 불렀다. 우리말은 외국말의 우리말표기에도 뛰어난 언어라서, 이렇듯 인명이건 지명이건 외래어 표기의 변천에서도 시대 흐름을 읽을 수 있게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어를 원전 그대로 충실하게 읽은 것으로(옮긴이 천병희 님), 앞으로도 그를 플루타르코스라고 하는데 이의는 없을 듯하다. 가령, 플라타너스를 프라타나스, 플라타나스로 발음하고 표기했던 때를 생각해보면, 인터넷 검색에서도 그렇고 한순간에는 힘들겠지만, 외래어표기에 대한 기준이 정착되었으면 싶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정확하게는 그의 <<비교열전>>에도 플라타너스가 언급이 된다.  <테미스토클레스 전>에서,  

"아테나이인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존경하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타너스 취급을 한다며, 날씨가 궂으면 가지 밑으로 피신을 하지만 날씨가 좋아지기만 하면 가지를 쳐 자라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곤 했다."(158면, 천병희 옮김, 숲 펴냄, 2010년) 

책을 읽다가 이 대목 좋아,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야, 라는 생각에 밑줄을 긋거나 내 생각을 덧붙여놓는 그런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오늘 그런 대목 가운데 하나, 플라타너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테미스토클레스에 관해서는 앞서 한 개의 글을 이곳(알라딘)에 쓴 적이 있거니와 그에 대해 아는 이들은 정말 그다운 말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리라. 그만큼 그의 인생이 그랬고 그가 민중(시민)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때도, 또 그들의 질투와 시기 혹은 경계심 때문에 도편추방까지 당해 쓸쓸한-이전의 화려한 인생에 비교하여- 노년을 보낸 점을 생각하면 절묘한 지점이다. 이렇게 민중들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 왜 추방까지 당했을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는데, 자신의 재능을 믿고 너무 나대다가 그런 불행을 자초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뒤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지음, 천병희 옮김, 숲펴냄(2010) 

플라타너스는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이면서 녹음수이다. 위 인용은 좀더 정확하게는  '날씨가 궂으면'의 경우, 날씨가 궂여 눈비가 오는 날일 것인데, 비오는 날에 우산이 없으면 한동안 그 넓은 잎파리가 비막이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가장 그 고마음을 느끼는 때가 요즘처럼 땡볕의 폭염기가 아니겠는가.  

필자의 초등학교 교정에는 운동장 한 귀퉁이에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가 지금도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이 기괴하다. 마치 말잔등 모양으로 밑둥에서 2미터쯤 되는 지점부터 한 차례 구브러지고 그렇게 말등에 해당하는 부분이 3미터쯤 이어지다가 다시 수직으로 솟구쳐올라 멀리서 바라보면 말뚝박기 놀이감으로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어린시절 우리는 말잔등에 오르듯 그 나무를 타고 올라 놓았던 추억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 나무 거대한 그늘 아래에는 비록 시멘트로 만든 것이지만 의자들이 있었고, 오르간을 옮겨 음악수업을 하곤 했는데, 우리는 그곳을 녹음교실(綠陰敎室)이라 불렀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무울에에~" 그런 합창이 이어지는 동안 어느덧 의자도 조무래기들도 오르간도 모두 초록으로 물들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학교의 건물이 불탔는데 당시는 지붕이 기와였다고 한다. 그런데 불에 달궈진 기왓장이 날아와 이 나무의 줄기에 상채기를 냈는데 그것이 허리가 구부러지게 된 전설이고 내막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그런 기막힌 사연이 있지 않고서야 학교 운동장-이 넓기도 했고 한가운데는 아니지만-의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어 당장 파내서 옮겼어야 할 나무가 애매한 지점에 서서 버티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사연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어쨌거나 지금도 내 기억 속 플라타너스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가로수는 아니다.  

가로수로서의 플라타너스는 참으로 가혹한 운명을 해마다 반복적으로 맞이한다. 아주 속성으로 자라니까 전국의 산에 아카시나무나 들판 곳곳의 포플러나무가 그러하듯, 플라타너스는 녹화사업을 주창하던 개발독재 시대에 안성마춤인 수종이었으리라. 가령, 귀화식물 군(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줄기차게 자라는 메타세쿼이아(영화 <화려한 휴가>의 첫 장면인가 담양의 그 가로수)와 비교하면 해마다 거의 모든 가지가 잘리는 아픔을 견뎌야 하는 플라타너스의 운명은 가혹하다. 서울의 가로수 가운데에는 상당수가 은행나무이고-늦은 가을 혹은 초겨울 첫서리가 내릴 즈음에 거의 한 나절 만에 잎을 떨구는 은행나무에서 인생무상을 느낀다. 그리고 은행나무가 늘 가까이 있었음을 인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곳에 따라 감나무(양천구의 경우, 구의 상징나무라고 함)도 있고, 드물게 마로니에(서초구 구반포에서 신반포-고속터미널로 이어지는 대로에 있다)도 있지만 플라타너스의 비중이 크지 않나 싶다.  

그런데, 과연 테미스토클레스가 살았던 그 시대에 플라타너스가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던 것일까? 나는 앞서 인용에서 전기 전체에서는 그야말로 곁가지에 해당하는 이 나무에 대한 탐색에 들어갔다. 내 상식으로 우리가 '플라타너스'라고 부르는 나무는 미국 혹은 북아메리카 원산이고, 우리말로는 '양버즘나무'로 불린다. 그리고  '서양 버즘나무'를 즐겨 심은 때가, 메타세쿼이아가 가로수로 많이 심어진 역사와 거기서 거기라고 알고 있다. 버즘나무(혹은 양버즘나무, 플라타너스)는 그 줄기가 얼굴(혹은 피부)에 난 버즘처럼 생겨서 그리 부르게 되었다. 표준어로는 '버짐'이 맞다.

정확성을 위해 실제로 검색해보니, 양버즘나무(Platanus occidentalis L.)는 <북아메리카 동부가 원산지인 거대한 교목으로 흔히 플라타너스로 불린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아테나이)에서 플라타너스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우리가 아는 플라타너스와는 조금 다른 나무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이번에는 버즘나무(Platanus orientalis L.)를 찾아보았다. "버즘나무는 서아시아에서 지중해 지방에 이르는 지역이 원산지인 나무"라고 나와 있다. 분명하게 서아시아와 지중해를 언급하고 있다. 흔히 외래어로 부를 때는 '플라타너스'라고 하면 그것이 양버즘나무도 버즘나무도 포괄한다고 할 수 있지만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버즘나무'로 번역하고, 주를 달아 저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밝혔으면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버즘나무의 경우,  

"30m까지 자라며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특성상 천근성, 속성수이므로 뿌리가 얕고 위로 높게 자라며 잎이 넓기 때문에 다른 수종에 비해 여름철 우기시 비바람에 의해 도복될 우려가 있어 가로수의 경우 매년 늦겨울에서 초봄사이에 전정작업를 실시한다." (위키백과)

우리 주변에서 보는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와 그 생태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가혹하고 무참한  전정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을 알 수 있다. 정말 앙상하고 을씨년스럽게 거의 원줄기만 남기는 특단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또한 테미스토클레스의 비유나 그것을 전기에 인용한 플루타르코스의 섬세함이 새삼 돋보이며, 2천년도 넘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게 된 것이, 원문에 대한 직역과 의역 사이에 다소 의역에 가깝지 않나 하는 한 예시로 꼽았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옮긴이의 번역을 살핀다. 특별히 어느 것을 골랐다기 보다는 집에 있는 것으로, <<플루타르그 영웅전1>>(홍사중 옮김, 동서문화사)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인이 자신을 존경하거나 찬미하지 않고 대나무처럼 여긴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날씨가 궂을 때 그 나무 밑으로 피했다가, 날씨가 좋아지면 바로 그 잎을 뽑거나 가지를 자르기 때문이라고 했다."(220면)  

놀랍게도 홍사중은 플라타너스를 '대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대나무가 가로수처럼 흔한 나무인가 하는 질문은 접어두자. 그 밑으로 피할 수 있는 나무인가, 잎을 뽑는 것은 할 수 있으나 대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대나무로 번역한 것도 문제지만, 본래 발화자의 비유와 한참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번역서를 봤다. 범우사의 <<플루타르크 영웅전1>>(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38-1, 김병철 옮김, 범우사 펴냄, 1999-02-05)에는,  

"그는 말하기를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으며 그저 쥐방울나무 취급을 할 뿐이라, 날씨가 사나울 때는 그 그늘 밑에서 피신하지만 날씨가 좋아지면 곧 잎을 따고 가지를 쳐버린다고 하였다."(330면)  

양버즘나무는 쥐방울나무로도 불린다. 서양 버즘나무(플라타너스)인데, 아메리카프라타너스, 서양플라타너스, 양방울나무로도 불린다. 그러니 여기서는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라는 등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쥐방울나무라고 함으로써 학명상 '버즘나무'일 수도 있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그런데 '잎을 따고'라는 풀이는 위 홍사중의 '잎을 뽑거나' 못지 않게 녹음수로도 쓰이는 거대하게 큰 플라타너스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서 잎을 따겠는가, 아니면 잎을 딸 정도 크기의 플라타너스 아래서 눈비를 피하고 드센 태양광을 피하겠는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리스로마신화 등 관련서적을 많이 펴낸 이윤기 씨의 해석을 살폈다. 아마도 조선일보에 연재한 것을 어느 카페에 옮겨넣은 글을 통해서인데, 이 분은 <[플루타크 영웅열전] 아리스테아데스④ - 정적 테미스토클레스>(조선일보 (1997.11.24)에서, 아리스테아데스를 다루면서 테미스토클레스를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이분은 영웅열전으로 왜 테미스토클레스를 다뤘는지 모르겠다며 회의적이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열전에서와는 달리 별도로 연재글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를 다루지 않고, 아리스테이데스(천병희 님 표기)의 인물됨됨이를 보완하는 자료 정도로 쓰고 있다. 어쨌거나 이윤기는,  

"아테나이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아. 그들에게 나는 버짐나무(plane tree)와 같아. 날 궂으면 내 아래로 모여들지만 날이 개면 내 잎을 따고 가지를 잘라 버릴 것이거든."(출처는 위 본문에) 

이라고 옮겼다. "plane tree"라는 영어명 표기에 '버짐나무'라고 표기했다. 그런데, '버즘'은 '버짐'의 옛말로, 강원도나 제주에서 사용하는 방언이다. 그런데 우리말 나무명으로 굳어진 말이 '버즘나무'이므로, 고유명사에서까지 '버짐'을 고집하는 것은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다. 어쨌거나 대체로 원만한 번역이나 "잎을 따고"라고 하는 대목은, 적절치 않게 생각되는 위의 두 건의 번역과 대동소이하다. [버즘[명사]<방언,옛말> 1. ‘버짐’의 방언(강원, 제주). 2. ‘버짐’의 옛말.] 

누가 딱딱한 논문을 읽는 듯한 주석을 읽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나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자 할 때는 설명이 불가피하다. 그냥 지나쳐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고 할 수도 있는, 사소해보이는 이 대목이 테미스토클레스의 생각이나 인물 됨됨이를 단적으로 읽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주민소환제가 발의되는 과정에서 또 그 실효성을 두고도 아테나이의 도편추방제도는 아주 중요하게, 그리고 대입수험생들의 논술주제로도 예시되지 않았던가, 테미스토클레스는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에 힘입어 아리스테이데스를 도편추방해버리며, 나중에는 자신이 도편추방을 당하는 처지가 되기도 하는데, 대중들의 사랑과 그들로부터의 인기라는 것이 어느 순간 물거품이 된다는 비유는 어느 대목 못지 않게 < 테미스토클레스 전>에서는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리스어 원문을 본 적이 없지만, 또한 봐도 정확한 번역을 할 수도 없지만 아마도 영어로 된 책을 번역 원본으로 삼은 데서 다른 세 권의 책이 '잎을 딴다'는 것과 같은 공통점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이외에도 여러 권의 번역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이 글을 쓰는 동안 구할 수 있었던 것들만을 비교대상으로 삼았음을 밝혀 둔다.  

플라터너스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김현승 시인(1913~1975)이다. 시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잡문은 거의 남기지 않으셨다는 것, 에세이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오로지 시 쓰고 강의(숭실대학교)하고 사셨다고 한다. 그는 <플라타너스>라는 시를 짓고 세상에 발표하던 무렵, 그 이전부터 그후로도 오랫동안 광주(광역시)의 양림동에서 생활했다.  

"나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플라타너스> 2~3연>

어느 문학평론가는 이 시를 소개하고, "외로울 때 같이 걸어주는 길 플라타너스 모가진 왜 저리 댕강댕강 처벼려 살벌하게 하나요!"라고 느낌을 적었다(인터넷 글쓰기 같아 이름은 소개하지 않는다). 플라타너스를 생각할 때 공감이 가는 한마디다.  

김현승 시인이 광주에 머물던 시절에 자주 어울렸던 천경자 화백은, 위 대목을 인용하며 김현승 시인을,   

"이제 알 것 같다. 내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깨닫지 못했던 김현승 씨의 절대고독과 견고한 고독의 경지를 말이다. 그분은 삼십 대에 다 깨달았던 것이고 그 숭곡한 차원에서 뭇 속물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김현승 시 논평집>>김인섭 지음, 숭실대학교출판부, 2007-06-28, 재인용)

라고 회고하고 있다. 시인은 궁핍한 화가를 찾았다. 아들 손에 쌀자루를 들려 안으로 보내고 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그 기억을 천 화백은 아른 기억으로 되살린다.  

김현승 시인이 오래 살았던 광주 양림동은 그 지역의 작가와 시인, 화가 등 문화예술인들에게 파리의 몽마르뜨언덕에 비유할 만큼(다리 아래로 흐르는 광주천 거기는 세느강이 되나) 특별한 곳이다. 필자 또한 그곳의 작가와 화가를 만나기 위해 자주 들렀던 곳이지만 거기에서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보았는지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그 화가 중 한 사람이 한희원 화백인데, 2005년 초(1.28-2.11) <오아시스 광주전>(광주신세계 갤러리)에 한 화백은 특별한 작품들을 출품 전시했다. 당시에는 양림동의 오래 되고 낡은 집들이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헐리는 중이었고(2005년 5월부터 철거작업에 들어가고 7월부터 본격적인 재개발공사가 시작되었음)  이미 700여 세대가 양림동을 떠난 시점이었던 것.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지상의 마지막 풍경을 향해 먼지 나는 거리며, 낡은 전봇대 사이로 보이는 퇴락한 골목길, 거의 쓰러져 가는 집들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의 누이와 형, 친구들이 걸었던 풍경 속으로….”(<전라도닷컴>, 2005-03-16, 재인용> 

 

(사진은 <전라도닷컴>, 한희원 화백의 그림 중에서) 그리고 한 화백은 철거작업이 진행되는 양림동 헐려진 집들 사이를 하루종일 걸으며 버려진 창틀을 주웠다. 한때는 그 창틀로 보았을 풍경들을 생각하며 창틀을 액자 삼아 그림을 그렸다.  

문화의 거리니 예술인의 거리니 예술인 아파트니 하지만, 정작 이런 곳이야말로 일부라도 남길 수 있는 운치가 있는 예향(藝鄕)고 문화수도 어쩌고 하는 그이들에게는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자본과 이윤을 앞세운 시대흐름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김현승의 시 <플라타너스>의 고향도 사라졌다. 가혹한 전정(전지)작업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생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영어 원서를 줄줄 읽으셨다는 김현승 시인의 '플라타너스'와 어감도 비슷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의 한 대목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원전은 원전대로 옮기면서 우리말과 우리가 쓰는 고유명사(학술용어)에 충실하면서, 우리의 정서에도 걸맞는 번역을 해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찌는 여름,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바라보며, 혹은 그 아래를 거닐며 너무 많은 생각을 해버렸다. 플루타르코스의 플라타너스, 너의 파아란 우산 아래에서,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아래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추후에 본문과 관련된 사진으로 대체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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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0-08-10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테나이인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존경하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천병희 옮김)라는 대목이, 글을 마치면서 보니까 사실은 다른 번역본과 더 큰 차이점이 있는 것 같네요. 이어지는 플라타너스의 비유, 곧 민중들의 인기는 영원하지 않고 변덕이 심해, 라는 대목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앞의 문구가 다른 번역처럼 ***하지도 **하지도 않아, 가 되어서는 곤란하지요.

책든손예쁜손 2010-08-10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지만 지루하지 않게 잘 읽었습니다. 플라타너스와 김현승과 사라지는 창작의 고향, 연길이 재밌습니다.

timeroad 2010-08-17 13:14   좋아요 0 | URL
고맙고요, 너무 오지랖이 넓었나요. 그냥 좀 특별한 리뷰성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여치 2010-08-10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코 보는 가로수가 달리 보이는 것 같아요. 책도 그 번역도 참 다르구나 생각되고요.

timeroad 2010-08-17 13:15   좋아요 0 | URL
실패와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우리 삶도 그러했으면 참 좋겠어요. 플라타너스는 해마다 거의 IMF상황인 거잖아요.

미나사랑 2010-08-1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이 흘러도 나무는 변함이 없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데 사람들은 참 많이 위대해지고 힘세 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만아닐까싶어요

timeroad 2010-08-17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사람 사는 이치라는게 그때나 지금이나, 아니 어쩌면 그 때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움직이지 못하지만 참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저 나무들한테서. 그 정적인 생명의 방식이랄까 그런 생각해봐요
 

-그리스 3대 비극작가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페데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쓴 작품 가운데 현존하는 비극은 모두
33편.
-이 가운데 신화가 아닌 역사를 소재로 한 유일한 작품은,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
정답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이다.  


이 비극은 패배자의 시각에서 본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이며, 페르시아 군세의 파멸은 분수를 모르는 오만, 곧 히브리스(hybris)의 결과였다는 것이 그 주제이다.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 이 관념은 어디까지나 그리스 고유의 전통적 종교관념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이 현존하는 비극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비극이 신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초기의 영향 탓인지 그 주제에서만은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의 오만도 전쟁을 일으킨 페르시아에 대한 간접적인 비난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5)는 생전에 90여 편의 비극을 썼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7편, 그 가운데 <페르시아인들>이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출세작이다. 기원전 472년 그는 이 작품이 포함된 비극 3부작으로 그는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살라미스해전에서의 페르시아의 패배를 다룬 작품이 있었으니, 프뤼니코스의 <포이니키아의 여인들>(기원전 476년)이다. 두 작품은 모두 무대가 페르시아의 궁전이며 등장인물이나 주제도 비슷하여  아이스퀼로스가 프뤼니코스를 모방해서 극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포이니키아의 여인들>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극의 전개에는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작품의 또 다른 공통점이랄까,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두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한 사람을 꼽으라면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4년경~459년경)일 것이다. 그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막강 함대를 살라미스의 좁은 수로로 유인해 수적 우세를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살라미스 해전을 빛나는 승리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나중에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어 이국을 떠돌다가 객사하는 등 파란이 많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의 <테미스토클레스전>에서 가장 실감있게 그리고 알맞은 분량으로 살필 수 있다. 가령, 헤로도투스(<역사>)는 테미스토클레스를 인성을 폄하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그의 부정과 단점을 지적하면서도 그의 공적인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또한 테미스토클레스의 삶 자체가 그리스인(아테네)들의 시각에서 공로와 과실이 혼재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저마다의 사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면면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소중한 것들이다.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와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통해 살라미스해전과 그의 활약을 살피려면 배리 스트라우스가 지은 <<살라미스해전>>을 살펴볼 것을 권한다.  

 

 

 

 

 

 

 

 

어쨌거나 김진경 님(<<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에 따르면(아래) 테미스토클레스의 '영광과 몰락'은 앞서 거론한 두 비극작품과 상관성이 깊은 것 같아 흥미롭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몰락하는 시점을 기원전 471년으로 보는데, 마지막 기록을 보이는 것은 기원전 476년으로, 그해에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1)그가 올림픽 경기에 참관하게 되는데 경기장에 들어서자 관중들은 선수들을 제처 놓고 그에게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비록 아테네에서 그의 인기는 하락했지만 아테네 외의 그리스지역에서는 그의 위대한 업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은 이 일을 그의 생애에서 최고의 기쁨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또 하나,  

2)그해에 그는 프뤼니코스의 비극 <포이니키아의 여인들>의 코레고스(합창단의 비용을 책임지는 사람)가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이었던 그로서는 자기의 명성을 상기시키고 선전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아낌없이 그 비용을 후원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현판을 내걸기도 했으니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그런데,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71년에 도편추방(또는 망명)을 당한다. 그가 도편추방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명성과 우월성, 그리고 자신의 공적 선전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질투를 든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선전을 하는 그가 그의 정적들에게 곱게 보였을리 없고, 기원전 472년에 상연된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의 흥행(성공)이 그의 도편추방을 결정차였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  

사실 <페르시아인들>은 살라미스 해전을 다뤘을 뿐만 아니라-작가 아이스퀠로스 자신이 이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직접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마라톤 전투에 형과 함께 참전하여(형은 전사하고) 여러 군데 부상을 입었으며 살라미스 해전에도 참가한 역전의 용사였다.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은 비극이라기보다는 (그리스인들의 입장에서는) 페르시아에 승리를 축하하는 송가라는 느낌이 강하며, 아이스퀼로스의 애국심을 극단적으로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까?

사실 테미스토클레스는 대중과 친밀했다. 1)그가 시민의 이름을 일일이 즉석에서 부를 수 있었고 2)개인적인 거래관계에서 믿음직한 중재자 노릇을 했다. 그는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득세하고 마침내 반대당을 이기고 라이벌인 아리스테이이데스를 도편추방하는데 성공한다.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생략하거니와 아테네의 해군력을 증강하여 전쟁을 대비하는 혜안, 그리스연합군을 결집시키는 설득력, 실제 전쟁에서 정보전을 겸비한 전략가로서의 기질, 축재한 부를 적절하게 국내외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근래의 정치가들은 저리 가라할 그의 면모는 독보적이다. 

그러나 그 스스로가 도편추방을 당하고, 또 사형선고를 받아 망명하며, 종국에는 적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에게 의탁하였다가 말년을 보내는, 그가 물질적으로 빈곤하지 않았다고 해도 조국을 등지고 말년을 맞이한 점은 쓸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스스로 후원자가 되었거나 그가 도편추방 되는데 민중의 질시와 경계심을 자극하는 결정타가 되었던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그 스스로가 경계했어야 할 드라마이고, 그의 비극을 예견한 것이지 않았나싶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일단 교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820-822행)
 

그리스 원전고전들의 번역에 독보적인 분이 천병희 선생이라면, 서양고대사 연구와 강의로 평생을 매진했던 작고하신 김진경 교수는 특히, 앞의 책에서 그리스의 고대사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다룸으로써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데, 김진경은 이 대목을 "인간은 오만한 마음을 품지 말지어다./오만은 꽃을 붙여 파멸의 열매를 맺게 하며/추수의 계절에는 그칠 길 없는 눈물을 얻게 하리라."라고 번역해서 인용하고 있다.   

1)한 인간의 세력이 강해진다. 2)그러면 자기의 분수를 잊고 '미망'(아테)된다. 3)그 미망의 결과로 능력 이상의 의욕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키려 한다. '오만'(히브리스)헤지는 것이다. 4)그러면 신들의 질시라는 신의 뜻에 따라 야욕은 좌절되고 그 자신은 파멸한다.  

인간의 교만에 대한 신의 심판! 그것은 3대 비극작가 중에서도 가장 선배인 아이스퀼로스 비극들, 특히 여기 <페르시아인들>의 핵심주제이다. 프뤼니코스의 <포이니키아의 여인들>은 남아 있지 않으나 주제는 물론이고 여러 면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유사하다고 했다. 어쨌거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공적이 두드러지는 살라미스해전을 다룬 비극이라는데에 우쭐하고 후원을 아끼지 않으며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정작 그 비극작품을 자신의 삶을 경계하는 지침으로 새기지 못했던 것일까,   

헤겔은 "역사상 살라미스 해전만큼 정신의 힘이 물질의 힘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역사철학>)라고 했다. 그렇다면 살라미스해전을 다룬 비극 <페르시아인들>이 전하고자 한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이었겠는가! 극이 상연될 즈음, 테미스토클레스는 분수를 지키는 삶을 살고자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비극으로 각성된 시민들이 그 비극이 다룬 전쟁의 영웅이면서도 실제 삶은 오만하여 자중할 줄 모르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추방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게 한 것일까?  

그리스인의 입장에서 페르시아가 그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요인을 드러내는 비극 <페르시아인들>을 보는 그리스 시민들의 (집단적인) 자기반성의 결과, 테미스토클레스를 도편추방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페르시아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영광이면서 몰락을 자초한 작품이다. 이것이 이 작품을 읽는 하나의 관전포인트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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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든손예쁜손 2010-08-1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편추방은 몇년째인 우리의 주민소환제는 다른 면이 있는 것 같죠. 그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미나사랑 2010-08-1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극과 역사에 그렇게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은 글!

motoko3 2010-08-17 13:4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이 대목을 관심 있게 봤어요
 

아마 지금도 극장 한두 곳에 상영중일 <경계도시2>나 송두율 교수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듯하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경계의 이편과 저편, 혹은 경계지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책과 영화 등에서 만나보는 시리즈물로 기획한 글이기에 그러하다.  

0.그때 거기, 지금 여기 

오래된 생각이지만, 흔히 쓰는 '여기와 저기'와 '거기'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듯하다. 전자와 후자는 시간의 차이라는 점에서, 전자 안의 ''여기'와 '저기'와는 공간적인 거리에 또 다른 차이 혹은 경계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늘 궁금한 것은 '여기'와 '저기'의 차이인데, 흔히 상대방을 부를 때, 호칭 혹은 이름을 모르거나 '아저씨' '아줌마'라고 부르기엔 좀 그래서-실제 그렇게 불리면 화가 날 혼기가 늦어지는 어른들이 의외로 많다- 예우(?)한다는 것이 '저기요!' 아니면 '여기요!'가 되는 것이다. 시선집중에서 손석희 교수가 바로 옆에 앉아있는 인터뷰 대상에게 "안녕하세요!" 대신에 "여보세요!"하여 웃음을 자아내듯이 우리는 습관적으로 여기요와 저기요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여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저기'가 되는 것일까? 여기와 저기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경계가 있을 것이지만 음절의 차이 말고는 분명한 경계 지점을 짚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에 '거기'는 여기와 저기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시간차가 있는데, 그 차이는 아주 오래된 것일 수 있고 최소한 영화의 장면의 차이 이상은 있다. 다만, 그렇게 부를 때에는, 상대방과 당사자가 '거기'에 같이 있었거나 그런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기나 저기와는 구분이 된다.

 

 

"인생이란 드라마의 다른 막들을
훌륭하게 구상했던 자연이
서투른 작가처럼 마지막 막을
소홀히 했으리라고 믿기 어렵네."
-20면, <노년에 대하여> 5절 중에서
 

키케로지음, 천병희 옮김, <<노년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숲 펴냄)

언제부터인지 사용 빈도가 늘고, 지금은 어떤 개념어로 자리잡은 '경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거기 어디쯤에선가 와서, 이승에서 살다가 저승으로 가야하는, 그것이 돌아가는 것인지 생소한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입창의 차이와 숱한 경계선이 그어지는 지금 이 세상에서, 경계에 대한 이야기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삶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경계가 무너짐으로써 행복과 불행이 뒤바뀌고, 그 경계의 장벽이 턱없이 높아짐으로써 또한 행복과 불행이라는 경계가 모호해지게 되는 일은 삶의 곳곳에서 잠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에서 만나는 경계랄까-사실은 이것도 숨쉴틈이 없이 말해도 부족할 만큼 벅차다- 그런 얘기를 해볼까 한다.

1.경계에는 '선(線)'이 있다.

벌써 데뷔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유일하게 단 한 권의 시집(<<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7,)을 내놓은 젊은 시인, 장만호의 시에서 발견하는 것은 절묘하게 포착된 선(線)의 아름다움이다.


개구리밥 가득한 수면
물뱀 지나간 궤적

늪은
가만히
푸른 실눈을 뜬다
--68면 <악어> 전문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저녁이 오고
세계는 조금씩 녹슬어간다
새들은 허공에 밑줄을 긋거나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다
--48면 <시월> 처음 4행

너무 멀리 왔다, 생각했을 때 나는
벌써 이 길의 식도(食道)를 넘은 것이다
새벽 한시,
돌아갈 길은 입을 다물어버리고
이 길을 가다 보면 태백은 있다는데
앞서가던 한 떼의 차량들이
저마다 밤의 기나긴 위장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시 빠져나온다
--84면 <태백행> 첫연.

물뱀과 새들과 차량은 수면, 허공 ,깊은 산의 적막을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놓는다.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기에 좀 그렇지만 경계는 경계이다.
문인수의 시집 <<배꼽>>의 표제시 <배꼽>에서도,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 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 나온다
."(초반부 4연)

잡초만 무성한 빈집으로 통하는 길이 생겨 공간을 이편과 저편으로 나누어놓는데, 장만호의 그것이 식도와 창자('밤의 기나긴 위장')이라면 문인수는 경계인 길을 '탯줄'에 비유하고 있다. 창자와 배꼽은 우리 몸 안(내부)에 있어면서 밖(외부)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또 다른 경계가 된다.  

    

 

 

 

 

 

 

 

 

<<무서운 속도>> 장만호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7,), <<배꼽>>문인수 지음(창비, 2008년 4월), 창비시선49 <<깨끗한 희망>> 김규동 지음(창비, 1985. 3.) 

2. 시간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경계'
 

"번개같이 스치는 것은/깨끗한 한 개의 희망이다"(시 <희망>의 두 행)  

바로 이 대목에서 김규동 시인의 대표시집 <<깨끗한 희망>>이라는 책제목이 나왔다.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버리고 싶은, 시인이 경험한 해체된 풍경에는 1)'일정 때/ 두만강변 회령 경찰서 취조실' 안에서 흘러나오던 그 사나이의 비명이 있다. 그것은 평생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다.  2)"6.25때/한강을 헤엄쳐 건너온/백골부대의 한 병사가"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던 일도 잊히지 않는다. 강(한강)의 저편에서 이편으로 왔다는 것은 저편의 죽음에서 이편의 삶으로 건너왔음을 의미하며,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다. 3)시인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38선을 넘으면서 안내꾼에게 회중시계를 그 대가로 건네주어야 했다. 남과 북의 경계, 휴전선의 경계를 사이에 둔 쓰라린 기억도 있다. 
 


3. 경계에 핀 꽃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김규동의 시집처럼, 표제시가 따로 없고 수록된 시행(<꽃>) 가운데 시집의 제목을 뽑았다는 점에서, 함민복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도 빼놓을 수 없는 시집이다.  

시인은 스스로가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놓인, 화분('흙의 공중섬'이라는 점에서 역시 경계가 명확한)에 핀 국화('전생과 내생 사이'-경계-에 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 화분에 대해, 의미(추측)를 부여한다.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 인 담은 철책에 비유되고, 그 위에 놓인 화분'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에 해당한다. 화분은 나의 공간의 남의 공간(혹은 공유)과 구분짓는 깃발이 되는데, 압권은 그 다음이다. 담 위에 놓인 꽃의 향기마저 안과 밖으로 나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나 싶은데, 시인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고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필자의 느낌에는 사족 같다. 뭔가 마무리를 해야 하므로 하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지음, 창비(1996년 10월) 

받들어 꽃
곽재구 지음, 미래사(1992년 5월)   


4. 전쟁과 평화, '받들어 총!'과 <받들어 꽃!> 사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MBC와 KBS 양대 공중파방송에서 한국전쟁을 재조명한 <로드넘버원>과 <전우>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천안함 침몰'이라는 사건이 어쩌면 예기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만 그런 것일까?   
함민복이 궁극적으로 꽃에서 경계를 읽어냈다면, 발표시점이 198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되는데, 곽재구 시인의 <받들어 꽃>은 '받들어 총!'의 전쟁을 상징하는 '총' 대신 한 음절의 '꽃'이라는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16~19행)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24~29행)

창작과 발표 시기에서  <받들어 꽃>이 함민복의 <꽃>보다 10여 년쯤 앞서지만, 우리나라 "해안가 철책에 초병"은 여전히 귀를 곧세우고 "받들어 총!"을 외치며, 김규동 시인에게 회한인 38선(휴전선)은 여전히 다만 휴전인 상태를 의미하는 경계로서 경계근무중인 상황이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2008년 10월),  <<그리스 비극 걸작선>> 아이스퀼로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2010년 2월) 

 

5.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Anti-고뇌苦惱>
사람들은 보통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에서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고, 그 지은이가 소포클레스라는 것을 상식으로 떠올린다. 그러나, '경계'를 얘기할 때, 가장 비극적인 등장인물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아니겠는가! 오이디푸스 왕이 남성인물(남성성)이면서 부모(아버지)이자 아들로서의 고뇌를 대면한다면, 안티고네는 여성인물(여성성)이면서 자식(딸), 친족(오빠들과 여동생 사이에서)으로서의 고뇌를 대변하는 '경계'인이다. 반대를 의미하는 '안티-'나 '-고네'는 고뇌(苦惱)라는 한자어 우리말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을만큼 삶 자체가 파란만장(波瀾萬丈)이다. 그저 말장난처럼 하는 얘기이지만, <Anti-고뇌苦惱>로 그녀의 캐릭터를 함축할 만큼 그녀는 삶에서 죽음으로의 경계를 넘어섬에 있어 초연하고 당당하여, 그녀에 대한 해석들은 세계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다행히 그리스어(희랍어)로 된 작품을 우리말로 직접 번역한, 천병희 선생의 노고에 힘입은 원전번역으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만날 수 있다. 영원한 고전 그리스비극 원전을 직거래 번역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 아이스퀼로스비극전집, 에우리피데스비극전집 1,2권과 함께 소포클레스비극전집까지 그리스비극 3대 대표작가의 현존하는 33편의 비극이 완간된 상태이나, 3대작가의 대표작 두 편씩을 다룬 <그리스 비극 걸작선>으로 그리스 비극 맛보기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걸작선에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가 실려 있는데, 그리스비극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옮긴이의 배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전번역된 작품을 읽고 한 발 더 나아가 살피는 것을 전제로, 나라 안과 밖에서 씌어진 주목할 책 한 권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한정숙 지음,  길(2008년 3월) 

안티고네의 주장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순 옮김, 동문선(2005년 3월)

 

6.  나라 안팎 두 여성학자와 다시 만나는 안티고네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와 <안티고네의 주장>
한정숙은 '서양 고전과 역사 속의 여성 주체들'이란 부제가 붙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안티고네-국가보다 존엄한 인간의 영혼을 위해 죽다>라는 장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속의 여성주체들1'로 안티고네의 삶을 현대 '한국인의' 정서와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그런데,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에 매장의 예를 베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안티고네의 선택을-여기까지가 한정숙의 시각이라면-, 주디스 버틀러는 근친상간의 표현으로 강력히 주장하는 최근의 연구자이다. 그녀가 펴낸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친족관계'라는 부제가 붙은  <<안티고네의 주장>>이 그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경우, 역자해설부터 읽는 편이 접근하기에 쉬운데, 주디스 버틀러에 이르면 안티고네는,   

"더 이상 순수하지도 영웅적이지도 못하며, 애도의 주체이기보다는 적절한 애도에 실패한 '우울증 환자'일"(145면)
 

뿐이다. 버틀러는 더 나아가 안티고네의 우울증과 죽음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가족구조의 우울증으로까지 확대하여 해석한다. "이성애 제도의 규범 속에서 동성애 가족은 인식 불가능한 삶으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우울증이 되었다"(146면)는 것이다.  
<안티고네-국가보다 존엄한 인간의 영혼을 위해 죽다>라는 소제목(한정숙)과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친족관계'라는 부제(버틀러)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우리 정서에는 한정숙이 다룬 부분이 안티고네를 이해하는 개론서쯤에 해당한다. 반면 버틀러의 저작은 원론서쯤이라고 해야할런지. 
<안티고네>라는 비극 작품에서 만나는 등장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경계에서부터 현재에도 계속되는 삶의 경계 혹은 그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작품 속에서 발견하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저작들에서도 이어가기로 하고, 일단락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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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ko3 2010-07-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들에 대한 해석이 참 마음에 들어요. 오이디푸스왕하고 안티고네는 읽었는데, 전집 전 작품을 읽고 싶네여.

timeroad 2010-07-30 16:22   좋아요 0 | URL
마음 먹었을 때 전작을 읽어나가도록 해보세요.

새우 2010-07-2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오랜 만에 님의 글을 다시 읽게 되어 기분 좋고,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timeroad 2010-07-30 16:22   좋아요 0 | URL
늘 감사, 다른 일로 좀 바빴어요.

yess1985 2010-07-2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웃으로부터 새로운 글을 올렸다는 연락을 받고, 와서 읽었어요. 미처 못읽은 좋은 시들이 있다는 점, 안티고네 관련 글들을 꼭 읽어볼 생각이랍니다.

timeroad 2010-07-3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이웃을 두셨군요. 이 주제로 안 걸리는 시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많은 시집들 가운데 아끼는 시들을 골라봤어요

라라 2010-07-30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ti-고뇌 재밌는 말이네요. 고뇌 속을 가다라는 러시아 소설이 있었지요. 잘 읽었습니다.

timeroad 2010-07-31 15:56   좋아요 0 | URL
알렉세이---톨스토이 소설인데, 나중에 고난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가 그래요, 감사
 

1.
최근에 본 영화 <이끼>(2010.07.14)와 연초에 본 영화 <용서는 없다>(2010.01.25),  두 영화의 공통점은 <18세 이상 관람가>라서 안타깝게도 딸아이와 함께 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작품성도 좋지만 흥행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영상비지니스 관계자의 입장에서 15세와 18세 차이는 대단히 크지요. 그런데 <이끼>를 보고 나서 나는 가장 먼저, 굳이 18세이상으로 제한해야 했을까, 또한 그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장면은 무엇이었나를 따져봐야 했습니다. 반면에 <용서는 없다>의 경우는, 그리스 신화의 주역 중 하나인 아프로디테의 사지가 잘린 조각상(비너스상으로 알려진, 책의 표지 아래)이 중요 모티브로 등장하고, 시신 부검하는 장면이 '리얼해야' 할 이유가 있었음을 영화가 끝날 즈음에 알게 되지만 보여주기에 충실한(?) 나머지 18세이상 관람가를 자초하지 않았나 싶네요.
강우석 감독은 애초에 15세를 기대했으며 "18세 수위를 염두에 둔 장면은 단 한 컷도 없기에 수정은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250만 관객을 넘겼고, 손익분기점도 넘었다 하니 인터넷 만화 원작의 힘도 그렇지만, 영화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끼>원작만화, 영화 <이끼>, <용서는없다>[원전으로읽는그리스신화] 

얘기를 꺼낸 김에 두 영화를 비교하는 하나의 기준이랄까, <이끼>가 30년간 은폐된 마을을 찾은 한 사람(박해일)과 낯선 얼굴을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간의 숨막히는 대립을 그렸다면, <용서는 없다>의 경우 환경운동가-꼭 그런 설정이 필요했는지 아직도 의문이고 유감이지만-인 범인이 오히려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경계'의 벽을 무너뜨리고 수사망과 복수의 대상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역시 말이 나온 김에, 이끼(Moss)의 꽃말은 '모성애'입니다. 생일꽃(양력 1월 22일)이니 생일점이니 하는 해석을 필자 나름대로 다듬어보면,
"(1)주위를 포근하게 감싸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때라야 온화한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 (2)이 부드러움이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일부러 격렬한 사랑을 자아내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것이 당신만의 멋이니까요. "
인데,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영화에서 그 역할이 상당했던 이영지(유선)라는 캐릭터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만화 원작보다는 영화에서의 영지 캐릭터가 모성애가 짙다고 할까(유일한 모성을 가진 여자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따른 남자배역들의 캐릭터 분석도 가능하겠지요. 영지는 영토(領土)의 유의어인  영지(領地)는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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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영화나 정극인 연극, 그리고 드라마와 뮤지컬,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다른 장르로 갈래지워지고 나름대로 진화하였지만, 현대 '드라마'의 원형은 그리스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대에서 상연된 일종의 희곡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숱하게 변용되어 활용되는 이야기의 원형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살피면 그리스 비극들은 대단히 폭력적이며 피비린내가 나는 현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1)아가멤논이 '집 안'에서 살해된 뒤 문이 열리고 시신이 보여지게 되고(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2)아가멤논을 죽였던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도 '집 안'에서 살해된 뒤에 (관객에게는) 그 시신만이 보여지게 됩니다.(에우리피데스 비극 <엘렉트라> 등) (3)이오카스테가 자살하고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데서는, 사자가 나와 장황하게 설명하고, 오이디푸스가 피를 흘리며 문(집) '밖으로' 나오는(소포클레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 식이지요. 
 

 

 

 

 

 

 

대개는 "퀼뤼타이메스트라, 집 안으로 퇴장"(1141행과 1142행 사이) "엘렉트라, 어머니를 따라 퇴장"(1146행과 1147행 사이)과 같은 지문을 통해 '아, 이제 죽이고 죽는 잔혹한 장면이 나오는구나'를 짐작하게 되고,

퀼뤼타이메스트라: (집 안에서)얘들아, 제발 이 어미를 죽이지 말아다오!(1165행~)
코로스장: 그대들은 집 안에서 나는 저 소리가 들리세요?
퀼뤼타이메스트라: 아, 슬프고 슬프도다!
코로스장: 제 자식들의 손에 쓰러지는 저 여인도 불쌍하구나!(~1168행)

와 같이 관객은 집 안에 호소하는 퀼뤼타이메스트라의 목소리와 집 밖에서 이 상황을 논평하는 코로스장의 대사를 연이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오레스테스, 퓔라데스, 엘렉트라 집에서 나온다. 시종들이 두 구의 시신을 집 앞에 내려놓는다'"와 같은 지문을 끝으로, 잔혹한 살해장면은 음성으로 처리되거나 최소한 관객에게 참혹한 장면이 직접적으로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을 읽다보면 지문에서의 '집 안'만이 아니고, 등장인물의 대사나 코러스에서도 '집안'과 '집 안'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쉽지 않은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왕가에 속한 사람들이므로 여기서 '집'은 '궁궐'이고, '집안'이란 '왕족'을 의미하게 되며, 얽히고 섥힌 '집안'(가족들, 친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1)(당시의)기술적인 한계-얼굴마저도 드러내지 않았던 당시의 옷차림으로 실감나는 연기는 무리였으리라-라고 볼 수 있으나, 2) 비극 시인들이 폭력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3.
그런데 왜 근래의 영화에서 관객들은 폭력(그리고 노출)을 그 자체로 즐기게 되고, 영화감독은 폭력적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을 수요와 공급-닭이 먼저이냐 달걀이 먼저이냐-의 관계로 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이 되어버렸을까요? 김상봉은 "폭력적 상황을 일삼아 재현"하는 것이 관객들이 현실의 폭력적 상황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생하게 보여주기가 비극성을 배가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지요.  

아내와 정부가 남편을 살해하고, 또 그들을 그 아들과 딸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해하여 복수하고, 앞서 거론한 것처럼 자신의 눈알을 찌르는 충격적인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그 처연한 슬픔이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텍스트(글)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보다 근원적인 물음, 대체 우리가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과 기억의 기능이 기계적으로 확장된 것이 사진이라 할 것인데, 사진술의 등장 이전과 이후의 상황, 회화와 사진 등에 대해 도움을 받았던 책은 <본다는 것의 의미>(존 버거 저 | 동문선 | 2000년 4월)였습니다. 역설적으로 게오르그 루가치의 <소설의 이론> 서문에서 총체성을 잃어버린 현재를 안타까워하면서 북극성만을 바라보고 항해할 수 있었던 시대는 차라리 행복했다는 저 유명한 구절도 본다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고 하겠습니다.  
 

 

 

 

 

 

  

인물사진이 대표적이겠지만 좋은 사진은 대상을 과감하게 클로즈업하는 데서 시작된다, 좋은 사진을 언급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지요. 집중할 수 있는 사물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촬영작가의 의도(메시지)를 명확하게 한다는 말인데, 이 말을 바꾸면 군더더기를 과감하게 제거하는(마음속에서 그리고 앵글에서 트리밍) 과정이기도 합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이는 것을 도드라지게 하는 보여주기, 달리 표현하면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기와 유사한 효과가 아닐까요?
극단적이지만 그리스 비극 얘기를 꺼냈으므로, 그리스 비극=오이디푸스왕(=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오이디푸스의 왕은,

"눈을 잃고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삶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김상봉의 앞의 책)

합니다.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또 보려고 했을 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던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보기를 포기함으로써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국내에는 지난 5월에 개봉된 이란 영화 <참새들의 합창(2008)>, 앞서 개봉되었던 <천국의 아이들(1997)>로 잘 알려진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윌로우 트리>에서 시각장애인을 내세워 던지는 질문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연관이 깊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맹인으로 살다 시력을 되찾은 사람(시각장애인 대학교수 유세프-파비스 파라스투이 분)이 그 욕망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 그동안 자기를 보살펴준 아내가 갑작스레 지겨워지고 그 자괴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 것도 신이고 새로운 시련을 안겨준 것도 그 신이다. 눈을 뜸과 동시에 광기에 휩싸인다...

오이디푸스와는 반대로, 유세프는 실제 눈을 뜨면서 마음의 눈을 닫아버리고 행복 끝 불행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이 감독의 영화 중에서 시각장애인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는 <컬러 오브 파라다이스(1999; 천국의 색깔)가 있고, 근년에 흥행했던 다른 감독의 이란 영화 <블랙>도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컬러 오브 파라다이스> 포스터
사건 하나하나를 살피면,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그들의 아들이 그 어머니를 살해하며(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3부작),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찌르며, 남편에게 버림받아 그 복수로 친아들들을 살해하는 메데이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비극은 요즘 식으로 하면 그 <18세이상 관람가>인 폭력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비극이 상연되었던 디오니소스 극장의 구조를 살피는 데서도 명확해지지만 영원한 이야기의 원천으로, 드라마라는 장르의 원조로 그리스 비극이 고전의 자리에서 빛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윌로우 트리의 슬로건)을 위해 일부러 시각을 잃을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다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찍는 ‘눈사진’이 더 아름답고 오래 간다는 사실을 드라마(영화)를 만드는 이나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이 잘 활용했으면 싶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집안'과 '집 안'이 대사와 지문에서 어찌 쓰이는지를 살피는 일은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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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0-07-29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거세게 내리는 어느 날, 눈을 감고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에 집중하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motoko3 2010-07-29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안'과 '집 안' 둘 차이에 이런 깊은 뜻이.. 새롭게 알았습니다.

timeroad 2010-07-30 16:24   좋아요 0 | URL
대사 속에서 새롭게 생각해볼 여기가 있는 부분은 아직 올리지 못했네요. 감사

새우 2010-07-2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끼를 봤는데, 님이 해석하는 새로운 리뷰가 기대됩니다. 따로 영화리뷰도 가능한지요?

timeroad 2010-07-30 16:2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적당히 못하는 성격이라 마음 먹으면 다른 리뷰들도 읽어야 하고, 쓰기 위해 쓰는 식은 바람직하지 못한 듯하여, 원작과 비교하여 새로움이 있다. 아니다로 엇갈리는 의견들이 많은 것 같죠. 이 영화에 대해서

yess1985 2010-07-2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다는 것, 집착함으로써 또 새로운 병이 생기는 것이지요. 좋은 영화들인데, 그 기억들을 잘 정리하는 계기가, 잘 읽고갑니다.

timeroad 2010-07-3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도 어린이였을 때는 보였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 아마도 위에 든 영화들 중 어린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대개가 그런 것 같죠. 가령, 티비 쇼프로그램을 보면 편집자의 의도가 자막처리되어 나오는데, 너무 심하지요. 시청자를 바보로 만든다는 느낌.. 보고 있는데 또 보라고해요? 감사해요.

kangkang술래 2010-07-3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책 읽기에 탄복하며, 그 내공을 이렇게 풀어내주시니 귀동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timeroad 2010-07-31 15:57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에 감사, 요즘 시대가 그렇잖아요. 어느 장르만 고집하기에도 그렇고, 너무 보기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요,,

라라 2010-08-24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었군요, 축하드리고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흥미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