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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터넷신문 동영상 인터뷰를 보고 김두식 교수를 알게 되었다. 너무 고전 그것도 서양고전에 빠져 헤어오지 못하고 있어서일까, 스테디셀러 책들까지 거의 읽지 않게된 것도 한 이유이고, 이 책 저자도 언급하는 것처럼, 힐링이니 치유니, 성공학이니 긍정주의심리학에 기반한 자기계발서의 다른 버전으로 보이는 것들이 책이니 강연이니 해서 너무 요란스러웠다. 그 세계에 침잠해본 사람으로서의 경계의 한 방법이었다. 지금이야 지방도시에 머물지만 2008년 촛불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했던 입장에서, 인터뷰에서 그리고 책에서 카메라와 관련된 얘기에, 맞아 그래.. 지금도 열심히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았고, 그 현장에서 그 상황을 살피는 분들 중에 이런 분도 있었겠구나 생각하니, 묘한 동지의식이랄까, 어린 시절 구입하기를 욕망했으나 그 욕망을 실행하지 못했던 장난감에 카메라를 비유했지만, 사실 카메라를 만져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촬영을 한다는 것은 그 말 자체로 프레임을 안다는 것이다.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필자의 글이 가지는 선명성, 그리고 진정성이 다가오는 것은, 그 끝을 찾아내고 한쪽의 끝은 다른 쪽의 시작일 것인데, 그 경계를 본다는 것, 바로 프레이밍이주는, 사태와 상황과 나를 관찰하게 하는 힘일 것이다. 서두가 길었는데, '사자가죽'과 관련된 상징과 그렇게 풀어나간 이야기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좋았는데, 어쩌면 그것은 고전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최근에 면밀히 살핀 358편에 이르는 정본이솝우화에 소개된 <사자가죽을 쓴...> 우화는 다음과 같다. 

 

267. 사자 가죽을 입은 당나귀와 여우

당나귀가 사자 가죽을 입고 돌아다니며 동물들을 놀라게 했다. 당나귀는 여우를 보자 역시 겁을 주려 했다. 여우는 [전에 당나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던 터라] 당나귀에게 말했다. “잘 알아둬. 네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면 나도 너를 겁냈겠지.”

간명하다. [ ] 안은 원전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른바 공식 교훈은 "이와 같이 무식한 사람도 점잔을 빼며 잘난 체하지만 수다를 떨다가 본색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코스프레 정도였던 것 같은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야기 스스로가 가진 힘인지 스토리텔링을 거치면서 숱한 이본들을 만들어내고, 본래 이야기가 뭐였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어서 인용했다. <사(士)자 가족, 사자가죽> 편을 가장 흥미롭고, 그리고 김두식 교수의 책에 실린 어떤 에피소드보다 주제에의 충성도가 높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 못 본 책이 많은지라, 위 우화의 패러디랄까 써머싯 몸 장편(掌篇)소설 얘기를 이 책에서 보고 무척 반가웠다. 달은 예술적 가치나 창작의 위대함, 6펜스는 현실을 의미하는 상징, <달과 6펜스>의 작가는 장편이나 손바닥 소설이나 프레임을 분명하게 기획하고 주도하는 작가인 것 같다. 

 

<사자가죽>의 주인공 로버트 포리스티어, 그는 당나귀와 매우 비슷한 사람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풍경으로 보면, 지금은 꿈도 꿀 수 없지만, 몇년 전까지의 미용실 원장(대체로 여성이다) 남편들의 캐릭터가 아닐까, 많이 웃었다. 지금은 미용사의 인구가 60만 명이라는 대한민국 국군의 숫자보다 더 많단다(얼마전 이곳 지방도시를 찾아온 전 의원에게 들었다). 그 미용실 원장 아내들이 있어 기본생활은 되고, 남편은 자신의 유예했던 꿈을 찾아 더 매진하고, 뭔가 빛나는 성과를 낼 수 있었으면 참 좋았으리라. 자식도 없었다는데, 단지 아내가 아끼는 개여서가 아니라, 자식 대신이었을 개를 살리기 위해 포리스티어는 불 속으로 뛰어들었을 수 있다. 신사 코스프레를 하고 살아가야 했던 포리스티어는 이미 신분이 들통난 상황에서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런 그가 마음을 준 대상이 개였을 수 있다. 소문 안 나게 부자인 사람들이 사람을 믿지를 못해 친구는 없고, 개를 정도 이상으로 사랑한다는데, [결론] 이솝우화의 정본은 그 교훈에서 보듯, 말조심만 했어도.. 이다. 얼마나 믿을 사람이 없었으면 꼼꼼히 메모했겠나, 말하는 대신.. "잘 알아도, 네가 말해야 할 순간에 말하지 않고, 메모만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면.. " 여우 같은 여우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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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사이는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러할까요? 부모와 자식 사이에 대해서는 아주 냉정한 얘기가 있습니다. 또 나으면 되지 않느냐고, 아마도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비극 <안티고네>에 나오는 대사일 것입니다. <오뒷세이아>를 촘촘하게 살펴 읽고 있습니다.

 4권. 메넬라오스는 바다노인에게 형의 소식을 듣다 모래밭에 뒹굴며 애곡을 합니다. 이 남자들, 참 와 닿죠, 한류열풍을 얘기할 때, 일본 여인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우는 남자에 반응을 했다지요? 메넬라오스는 파리스, 헥토르는 아가멤논 그런 장남과 차남의 대입과 비교가 가능한데, 어쨌거나 차남인 메넬라오스 형이 죽었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립니다. 멋집니다. 모양이 좀 구겨져도 진심으로 한 사람의 떠남을 슬퍼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런저런 마음씀씀이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서 자기 마음을 억제하는 그들의 모습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일리아스>를 읽건, <오뒷세이아>를 읽는 중이건, 아이스퀄로스나 에우리피데스가 쓴 그리스 비극을 읽는 분이건 간에, 정리가 좀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대체 이 사람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는데,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먼저 펠롭스가의 족보부터 살펴보기로 하죠.

제우스->탄탈로스->아들인 펠롭스가 힙포다메이아와 결혼하여 세 아들
아트레우스(1),

튀에스테르(2),

핏테우스(3)를 낳았죠.
핏테우스는 아테네의 아이게우스 왕의 아내로, 테세우스를 낳는 아이트라의 아버집니다. <플루타르코스영웅전> '테세우스 전'에서 핏테우스의 지혜로, 아이게우스는 아이트라와 자고, 테세우스라는 후사를 이를 소중한 영웅 자식을 낳게 되는 것, 이 부분은 딸들 쪽이니 그렇다치고,

 

아들로는 아트레우스(1)와 튀에스테르(2)가 대권 경쟁을 싫든좋든 하게 되겠지요. 더구나, 튀에스테르는 형 아트레우스의 아내인 형수 아에로페를 유혹하다가 발각되어 추방됩니다(오뒷세이아 부록 576~577면 아트레우스). 나중에 형 아트레우스는 화해하자며 동생을 불러들이고 잔치를 벌입니다. 튀에스테르의 두 아들을 죽여 그 고기로 음식을 장만한 것인데, 나중에 이를 알게 된 튀에스테르는 질겁하고 달아다며 형을 저주하지요. 이후 튀에스테르는 모르고 자신의 친딸 페로피아와 교합하여 아이기스토스를 낳는데, 바로 이 아이기스토스가 사촌 형제 둘이 트로이아와 원정 간 사이에 사촌 형수인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유혹하고, 정부가 된 상황.
<오뒷세이아> 3권에서 왕홀이 펠롭스->아트레우스->튀에스테르를 거쳐 아가멤논에게 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지는, 이 집안에 피의 복수가 점철되는 갈등관계로 보아,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왕위 경쟁도 심상치 않았으리라는 것. 그 피가 어디 가것습니까? 메넬라오스가 그대로 뮈케네에 머무는 상황이라면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우리의 조선시대 왕위 계승 관계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결국 메넬라오스가 헬레네를 차지하기 위한 구혼자들의 경쟁에서 최종 선출됨으로써 헬레네의 남편이 되는 점도 행운이지만, 튄타레오스의 사위가 될 뿐만 아니라 데릴사위로서 스파르테의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점, 바로 이 덕분에 아가멤논은 순조롭게 왕위를 지킬 수 있는 득을 본 셈이라는 것이죠. 헬레네가 없는 스파르테는 끈이 떨어진 갓인 셈이니, 헬레네가 제자리에 돌아와야 메넬라오스도 왕다운 것이지요. 해서, 헬레네에게 늘 부드러운 남자라야 해요. 그것이 그의 행복이면서 슬픈이지요. 메넬라오스만으로는 왕위를 지키기란 힘든 것, 더구나 헬레네에게는 제우스 핏줄이건건, 사람 튄타레오스 딸이건 남자 형제가 둘씩이나 있는 상황입니다. 트로이아 원정에 이 남자 형제들 둘이 왜 오지 않았지 하고 헬레네가 스카이하이에서 찾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 말입니다.

 

<오뒷세이아> 4권. 메넬라오스는 아가멤논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아기기스토스가 공모하여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바다노인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지만, 본인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결국 귀향이 늦어지고, 오레스테스와 그 누이가 복수를 끝낸 상태에서 돌아오는데, 가만 보면 메넬라오스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다독거리기만 하는 상황. 텔레마코스는 그냥 전우의 아들만은 아닌 조카인데, 하여 좀더 적극적으로 도울 방법을 찾을 듯한데, 선물을 주고 환대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도에 머물지요. 그런데, 메넬라오스의 입장에서 비록 형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헬레네와 동행하여 집(메넬라오스의 집은 뮈케네)으로 돌아가는 입장인데, 처형인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여야 하는 상황. 헬레네는 언니를 죽여야 할 것인데, 헬레네의 입장에서는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언니의 행실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지요. 메넬라오스도 난처한 입장이고요, 그러나 꼭 나서야 한다면 메넬라오스는 다른 관계를 떠나 형의 복수를 할만한 위치에 있지만(앞서 <안티고네>를 언급했지요), 신의 핏줄을 받은 헬레네 덕분인지 '영생'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정리하면, 4권에서 메넬라오스가 들려주는 아이귑토스 부근에서의 환상여행을 저승에 다녀온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죠. 앞서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가 지옥을 다녀왔고 이후에 오뒷세우스도 저승여행을 할 참인데, 이곳에 다녀오면 사람이 이전과는 달리 정상이 아니라네요. 한 번 죽은 사람이 두 번씩이나 저승에 가야하니, 암튼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겠지요. 말하자면 4차원. 바다노인이 들려주는 메넬라오스의 앞날, 헬레네와 함께이겠지만 암튼 만사를 떠나서 행복한 노년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있습니다. "그가 잘나서라기보다는 부인을, 장인을 잘 만나서, 제우스 사위로서의 덕을 톡톡히 보는 메넬라오스!

 

아가멤논의 귀향과 사망, 그 복수극, 어쩌면 할아버지인 펠롭스의 결혼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아트레우스 가의 그늘진 이야기는 작은 트로이아 전쟁, 혹은 트로이아 전쟁의 속편으로까지 이야기할 정도이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화, 서사시, 비극을 관통하는 고전읽기가 그렇게 함으로써 많이 편해진달까, 그런 장점이 있습니다.

 

"펠롭스가의 저주"
펠롭스는 펠로폰네소스(펠롭스의 섬이란 뜻의 이 지명은 펠롭스에게서 유래했다) 반도로 가서 힙포다메이아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아버지 엘리스의 왕 오이노마노스와의 전차 경주에서 반드시 이겨야 함, 그는 오이노마노스의 마부 뮈르틸로스를 매수해 경주 때 바퀴가 빠져 왕이 전차에서 떨어져 죽게 만든다. 그러나 펠롭스는 약속한 보수를 주기는 커녕 마부를 바다에 던져 죽인다.  

위위 도표에서 보듯이,, 암튼 약속을 지키지 않아, 펠롭스 가의 저주가 시작된 겁니다. 
파리스의 사과에서, 제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사랑했으나  그녀가 아버지보다 더 강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는 그녀를 아이아코스의 아들 펠레우스와 결혼시킵니다. 이 결혼식에 다른 신들은 모두 초대 받았으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이 초대받지 못하자, 그녀는 앙심을 품고 거기 모인 신들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황금 사과를 던집니다. <일리아스> 723면 파리스 소개 부분입니다.
서운함이 없게 하라!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제대로 챙기지 못해 서운한 사람이 생기면 그 원한이 깊게 아로새겨지는 모양이니다. 아로새겨진다, 쉬운 표현이 아닙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 일단 대접을 하고, 댁은 누구시오, 라고 나그네를 접대하는 그들의 접대문화가 그가 고귀한 신일 수도 있으니, 소홀함을 원천적으로 방지하자는 데서(물론 인정이 넘치는 공동체를 위한 ..)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이제 동양신화로 잠시 여행을 할 시간.  

<산해경>에는 서왕모에 대한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 , 서왕모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반은 짐승이고
반은 사람의 모습을 한 반인반수의 여신, 중국의 서쪽 끝에 있는 곤륜산에 산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돌림병이나 재앙 같은 무시무시한 일들과 더불어 코를 베거나 손발을 자르는 등 다섯 가지 잔인한 형벌을 다스리는 여신, 그러한 책무 더하기, 서쪽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 서쪽은 해가 지는 곳으로 어둠과 죽음의 땅, 고대 중국에서 동쪽은 서쪽과 반대로 생명과 탄생의 땅이지요.

우리나라 조선시대, 서쪽에는 감옥과 처형장 등 형벌과 죽음에 관련된 기관을 배치, 한양 서쪽의 고태골은 처형장, 고태골로 간다, 골로 간다 골로 보낸다. 1970년대까지 서울 시내의 서쪽에 형무소(감옥), 소년원, 화장터 등이 지속된 방향입니다. 이와 달리 전농동은 '설농탕'의 어원에서 보듯이 농업 장려 곧 생명산업과 관련된 것, 동쪽과 관계가 있죠.
그러나 극은 극과 만나는 법이라, 서왕모는 죽음의 신만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힘, 곧 영생과 불사의 능력을 지닌 생명의 여신이기도 했습니다. <산해경>에 의하면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에는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열매가 자라는 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천도)복숭아 얘깁니다.
-주나라 때의 목왕, 주목왕은 여신 서왕모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러스스토리,
-한나라 때는 동왕공이라는 서왕모의 남편 신을 만들어내기도, 여성에게는 보호자인 남성이 있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관념의 침투가 가져온 결과, 음과 양이 평형을 이뤄야 한다는 음양오행설에 의한 짝짓기 산물,
그런데, 서왕모의 열렬한 팬은 바로 한무제입니다. 장수를 열망한 그는 서왕모의 강림을 기원, 칠월칠석날 서왕모가 아홉가지 빛깔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천상에서 내려와 선물로 불사의 복숭아 선도(仙桃)를 선물합니다. 서왕모가 관리하는 '반도원'이라는 복숭아밭에서 딴 것으로 이곳의 복숭아나무는 3천년 만에 꽃이 피고 다시 3천년 만에 열매를 맺으며 그것을 한 개라도 먹으면 1만 8천년까지 살 수 있답니다. 바로 선물을 주고받는 이곳에 한무제의 신하이던 동박삭이 있었으니, 그는 서왕모의 귀한 열매를 훔쳐먹은 재담꾼으로(나쁜 남자!) 한무제를 즐겁게 해주던 그는 이미 신이었던 것, 그렇게 오래살았다 해서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얘기 속에 그는 양생하네요.


*반도원은 이후에도 크게 도둑을 맞는데, 명나라 때 지어진 유명한 환상소설 <서유기>, 서왕모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손오공이 홧김에 반도원의 선도를 거의 다 따먹어버렸다네요. 그래서 벌을 받고 삼장법샤가 조건부로 해제를 해주고 부리고? 일할 기회를 주고, 비정규직 같아..

바로 이 대목에서, 에리스가 앙심을 품고 던지는 파리스의 사과와 비교해 볼 만하죠. 그것이 펠롭스의 저주의 연장선인지 알 수 없으나 세 아들 중에서 핏테우스 쪽의 가계에도 흥미로운 사건, 다사다난한 사건이 끊이지 않으니,
<흥부전> 제비 다리를 고치는 흥부는 무엇을 바라고 그리 하지 않았지요. 힘들고 치친 그리고 다친 나그네를 없는 살림이지만 잘 대접하여 보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복을 내리게 된다. 반대로 의도를 가지고 제비 손님을 맞이한 놀부는 도리어 잃고 망하게 된다. 유사성이 있습니다.

펠롭스와 그의 손자 메넬라오스는 신부를 차지하는 경쟁에서 어쨌거나 우승하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네요. 그러나 당첨은 순간, 이후 댓가가 너무 크네요.  <오뒷세이아> 4권을 읽으며 너무 생경하게 생각하지 말지니,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고뇌랄까, 이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던 거이고, 그들은 필명의 인간이었던 것 아닐까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들의 표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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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았다. 참 좋은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를 읽고 원작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마침 주부들이 참여하는 고전읽기모임에서 플루타르코스의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로 토론할 때였는데, 이 영화를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에 따라 극장으로 간 것이다. 순전히 리차드 파커라는 영화 속 뱅골 호랑이의 이름과 그 시튜에이션이, 원작소설을 읽지 않았음에도 어딘지 익숙하다는 느낌,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센델의 책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다가 다시 펼치면서 아래의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육지에서 1600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을 표류했다. 이들이 타고 있던 미뇨네트 호는 폭풍에 떠내려갔고, 구명보트에는 달랑 순무 통조림 캔 두 개뿐, 마실 물도 없었다. 선장(더들리), 일등항해사(스티븐슨), 일반 선원(브룩스)이 살아남는데, 신문은 이들이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보도한다.
그런데 그 구명보트에는 네 번째 승무원이 있었다. 집무를 보던 열일곱 살 남자아이 리처드 파커, 고아인 그에게 긴 항해는 처음이었다. 그도 구명보트에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 무슨 일이 있었을까? 표류 사흘째까지 그들은 순무를 정해놓은 양만큼 조금씩 먹었다. 나흘째 되던 날은 바다거북을 한 마리 잡았다. 이들은 며칠을 더 연명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던 날, 음식이 바닥났다. 이때 파커는 구명보트 구석에 누워 있었다.

선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바닷물을 마셔 병이 난 것. 고통스런 하루하루가 가고 19일째 되던 날, 선장 더들리는 제비뽑기를 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정하자고 했다. 그러나 브룩스가 거부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한다. 다음 날, 선장 더들리는 브룩스에게 고개를 돌리리고 말하고는 스티븐슨에게 파커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몸짓으로 전했다. 선장은 기도를 올리고,  파커에게 때가 왔다고 말한 뒤 주머니칼로 파커의 경정맥 급소를 띨렀다. 양심상 섬뜩한 하사품을 거절하던 브룩스도 나중에는 자기 몫을 받았다. 나흘간 세 남자는 아이의 살과 피로 연명했다. 그리고 24일째 되던 날 이들은 구조되었다.

2010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상 소개된 예화를 기억할 것이다. 실화라는 얘기다. 그리고 살아 남은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브룩스는 검찰측 증인으로 출석했고, 더들리와 스티븐슨은 피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은 파커를 죽여 그를 먹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피고측은 한 사람을 죽여 세 사람을 살릴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약하고 병에 걸렸으며 무엇보다 부양가족이 없는 파커가 적절한 후보였다고. 마이클 샌델은 2장 '최대행복 원칙_공리주의' 초반에 이 얘기를 소개하며, 제러미 반담의 공리주의 소개와 함게 자기 주장을 펼친다. 

흥미롭지 않은가. 항해중 조난과 표류, 구명보트.. 라는 단어와 더불어 17세 소년인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등장하는 뱅갈 호랑이의 이름도 리처드 파커이다. 1월초에 개봉된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브 오브 파이>의 원작소설은 <파이 이야기>(얀 마텔 저/공경희 역, 작가정신 , 원제 Life of Pi)다. 2001년 출간 후 이듬해 부커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주요 언론으로부터 ‘『로빈슨 크루소』『걸리버 여행기』『백경』을 잇는 소설’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소설’ 등의 극찬을 받았다.

부커상(The Booker Prize)은 '부커 맥코넬상'의 약어로, 해마다 지난 1년간 영국 연방 국가에서 영어로 씌어진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수여된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소설문학상이라 할 수 있는데,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고 한다.

문학성은 물론 대중적 즐거움까지 갖춘 이 작품의 황홀한 상상력을 스크린으로 옮기고자 여러 영화감독이 시도했지만, 그 타이틀은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이 거머쥐게 되었고 그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중인 것이다. 소설은

1부 토론토와 폰디체리

2부 태평양

3부 멕시코 토마틀란의 베니토 후아레스 병원

와 같이 3부이다. 영화에서 다루는 비중은 2부>1부>3부 순이다. 2부는 소년 파이가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 벵골 호랑이 등의 동물과 함께 227일간 태평양의 험난한 파고를 헤쳐 나가는 무섭고도 기묘한 생존기록이다. 3부는 호랑이와 공존하며, 살아돌아온 이야기를 도무지 믿지 않은 인간들(일본인 선주 관계자)에게 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파이가, 구명보트 위에서의 동물들을 선박에서 생존한 사람들도 대체하여 인간들의 이성에 부합하는 식으로 들려주는 꾸민 이야기다. 3부의 이 대목은 영화의 러닝타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별로이지만 반전이 이뤄지는 대목이다. 영화에서 장황하게 보여준, 2부의 탐험기가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그들의 원하는 식으로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파이는 말한다. 내 엄마를 죽인 주방장을 자신이 직접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앞서 소개한 1884년 여름 대서양에서 생긴 일을 이쯤에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발상에 도움을 준 실제 사건이 이 소설 3부에서 믿거나말거나 식으로 임기응변으로 꾸며대는 얘기처럼 문제를 던지니 하는 소리다.

 

파이가 들려주는 얘기는 궤변이지만 진실이다. 무엇을 믿을까? 눈에 보이는 것, 상식에 가깝고 사실적인 것, 인간들끼리 생존을 위해 살육을 했으므로 판사가 판결해야 하는 것, 판사는 진실을 찾아야 하지만 그 진실은 신앙(신념)의 문제와 맞선다. 어쨌거나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 속 뱅골 호랑이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라는 사실이다. 소설 1,2부에서 리처드 파커는 호랑이의 이름이지만 3부에서 리처드 파커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된다. 1884년 대서양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인도에서 캐나다로 향하는 화물선에서의 조난이라는 배경으로 바뀐 소설의 모티브를 추정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공리주의를 논의하기 위한 예화였고, 그러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법정에서 유죄여부를 가리는 사건이 되었다. 이쯤에서 고민해볼 문제는 위 소설의 경우, 생존을 위해 동물이 희생된 경우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데, 사람이 희생된 경우는 1884년의 사건처럼 법으로 죄과를 판단해야할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주방장이 파이의 엄마를 죽였고, 복수 차원에서 파이는 그 주방장을 죽였다. 결국 살아남은 사람은 파이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파이에게는 죄가 없는 것일까? 동물과 인간의 차이 운운하는 것은 비약인 듯 하나, 마이클 샌델은 위의 책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여러 차례 인용하는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나왔다.

샌델은 정치학의 아주 일부를 예화로 들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데, 독자들에게 <정치학>이라는 녹록치 않은 책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뿌듯함을 안겨준다. 정치학을 비롯하여 몇몇 주요저작들의 리뷰를 담은, 책을 다룬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음에도. 암튼, 독자들은 힘들더라도, 소개받은 저작들을 충실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암튼, 앞선 명제는 '인간은 동물이다'를 기본 전제로 한다. 그리고 정치학의 저자는 국가공동체의 본질을 규명하면서 이와 같은 명제를 제시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20면)이라는 대목이다.

"인간이 벌이나 군서 동물보다 더 국가공동체를 추구하는 동물임이 분명해졌다. 자연은 어떤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logos)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단순한 목소리는 다른 동물도 갖고 있으며, 고통과 쾌감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다른 동물들도 본성상 고통과 쾌감을 감지하고 이런 감정을 서로에게 알릴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해한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밝히는 데 쓰인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차이점은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21면)

이런 인식의 공유에서 가정과 국가가 형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얘기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 차별화된 능력을 가졌음에도 어떤 인간들은 동물보다 더 사악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소설)에서 소년 파이와 교감을 나누고, 생존을 위한 공동운명체임을 인정하게 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 대해, 단지 소년에 의해 조련된 결과라고만 할 수 있을까? 3부에서 동물들을 인간들로 대체하는 건 납득을 하면서도, 뱅갈 호랑이 리처드 파크와 동시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이라야 하므로, 동물은 이러해야 한다, 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이게 되는 것,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nomos)과 정의(dike)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정치학)

무장한 불의는 다루기 어렵다. 생존을 위해 소년을 잡아먹을 수 있는 호랑이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인간은 지혜와 탁월함을 위해 쓰도록 무기(대표적으로 언어)를 갖고 태어나지만, 이런 무기들은 너무나 쉽게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 쓰일 수 있다. 그래서 탁월함(arete)이 없으면 인간은 가장 불경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색욕과 식욕을 가장 밝히는 존재가 된다. 마침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하는데,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주고, 정의감은 무엇이 옳은지를 판별해주기 때문이란다. 언어를 가진 인간들은 소통하고, 공동체를 이뤄 공공의 목표를 이뤄간다. 인간에게는 있으나 동물에게는 없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학을(원전번역으로) 국내 최초 완역한 옮긴이(천병희 교수)는 주석에서 그리스어 arete(아레테)라는 단어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가 또 있을까? 라고 질문한다. 여기서는 '탈월함'으로 번역했으나, 미덕, 덕, 자질로 번역하는 게 더 적합한 경우가 많다는 것, 어쨌거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도,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도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을 통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규명하고 있다. '동물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긴장감 속에서 교훈을 전하는 숱한 우화들이 바로 여기에서 탄생하고 그 존재감을 유지한다.

 

우화의 일종이라고 할 플루타르코스의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그리스로마 에세이>와 <수다에 관하여>에 수록)에는 이안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 담긴 철학이 뭔가, 곱씹어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데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인도 소년 파이가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 벵골 호랑이 등의 동물과 함께 227일간 태평양의 험난한 파고를 헤쳐 나가는 무섭고도 기묘한 생존기록이다."
소년과 뱅골 호랑이의 공존, 그들의 교감, 다른 말로는 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판타치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에는 진정한 친구는 제2의 자아이다. 나를 사랑하듯이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우정이다, 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들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점은 하늘에 사는 것이든 물속에 사는 것이든 뭍에 사는 것이든, 또 길들여진 것이든 야생의 것이든 짐승들도 마찬가지라네. 우선 짐승들은 모두 자신을 사랑하네. 이런 감정은 모든 생물이 똑같이 타고났기 때문이네. 그다음 짐승들은 자신과 하나로 엮일 수 있는 같은 종류의 다른 동물들을 끊임없이 찾는다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짐승들을 부추키는 충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사랑과 닮았다네. 사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지. 인간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인간들도 둘이 거의 하나가 될 만큼 정신적으로 서로 완전히 결합될 수 있는 짝을 찾기 때문일세"(<우정에 관하여> 81절 전문)

 

'동물'이라고 하면 인간도 포함되니까 '짐승'이란 단어로 번역함으로써 변별성을 둔 것인데, 이것은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에도 적용이 된다. 어쨌거나 인간과 동물은 자연의 일부로, 그 자체가 자연인데, 이 영화의 리뷰에서 '철학적인 뭔가가 있다'라고 하는데, 그 뭔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약간의 탐사를 해본 글이다. (아래는 영화의 스킬컷, 소년과 호랑이, 호랑이와 소년)

 파이가 바라보는 뱅골 호랑이 리터드 파커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바라보는 파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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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러나 그들은 테르모퓔라이에서 아르테미시온으로 보낸 사자들에게서 레오니다스(스파르테 왕으로, 페르시아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수 테크로퓔라이 고갯길을 지키다가 300명의 결사대와 함께 옥쇄했다.)가 전사하고 크세르크세스가 고갯길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의 헬라스 내륙으로 철수했다. 이 때 전쟁에서 크게 용맹을 떨치고 고무되어 있던 아테나이인들이 후미를 맡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플루타르코스영웅전> '테미스토클레스 전', 143면, 9장)
[2]헤로도토스는 <역사> 후반부인 제7~9권에 이르러서야 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마라톤에서 좌초한 다레이오스의 원정에 이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전쟁 결의, 군대의 사열, 영화 <300>으로 널리 알려진 테르모퓔라이 전투, 아르테미시온 전투에 이어 살라미스, 플라타이아이, 뮈칼레에서 거둔 그리스의 대승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역사』는 절정을 이룬다. (헤로도토스 책소개)

[3]<역사>의 해당부분으로 가보자. "테르모퓔라이에서 페르시아 왕을 기다리는 헬라스인들은 다음과 같다. ..." 헤로도토스는 역사 제7권 202절부터 239절, 제7권의 끝부분까지 테르모퓔라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몇 년 전에 개봉되었던 영화 <300>은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거니와 <역사>의 이 부분이 영화의 배경이면서 소재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므로, 영화에 대한 얘기도 <역사>에서의 이 부분에 대한 얘기도 생략하거나 아주 간단하게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이 협곡을 지키는 군의 지휘자는 가장 경탄할 인물은 아낙산드리데스의 아들 레오니다스라는 라케다이몬인(스파르테)이다. 그는 자신에게 배정된 300명의 전사들-슬하에 아들이 있는 자들 중에서 선발해-을 데리고 테르모퓔라이로 향했다. 그리고 이들은 비교가 되지 않은 페르시아군을 무찌르며 결사항전으로 막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 진영에서 이 협곡으로 산을 넘어 접근할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곳은 포키스인들이 산 위에 올라 지키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이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을 때, 에피알데스라는 멜리스인이 나타나 테로모퓔라이에 이르는 산속 오솔길을 알려주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오솔길을 따라가도록 군대를 파견했다. 페르시아 인들은 밤새 행군하여 동틀무렵 산 정상에 도착한다. 그곳은 1000여 명의 포키스 중부장보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자국을 방어하고 오솔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온산이 참나무로 덮여 있어 포키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올라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결국 이 길을 뚫림으로써 스파르테의 전사들은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이 길을 열리고 만다.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침략 때인 기원전 480년 8월의 이야기다.
[4]'대 카토'로 불리는 마르쿠스 카토는 기원전 234년에 태어나 149년 85세에 사망했다. 그는 로마의 웅변가, 정치가로 유명한데 그의 수명으로 볼 때 절반쯤에 해당하는 40대 초반 때의 일이다. [기원전 194년 카토는 집정관 티투스 샘프로니우스의 사정로 활동하며 트라케 지방(그리스 북동지방)과 히르테르(도나우강의 하류) 유역을 정복하도록 도왔다. 그는 또 마니우스 아킬라우스 휘하 참모장교로 안티오코스 대왕(3세-재위 기원전 223~194년에는 세레우카이아 왕조의 세력을 부활하고 동지중해 지방에서 로마의 세력에 대항하려 했다.)에 대항하여 싸웠다.
안티오코스는 헬라스인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헬라스를 침공했다(기원전 192년). 이때 동요하는 코린토스인들과 파르라이인들과 아이가이인들, 코린토스 만에 있는 도시들을 달랜 것은 카토였다. 안타오코스는 테르모퓔라이의 고갯길을 군대로 막고 그곳의 자연적 요새에 울짱과 방벽을 덧붙인 다음, 헬라스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믿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은 정면 공격으로 그곳을 통과하기를 포기했다. 바로 이때 카토는 페르시안둔이 헬라스군의 방어망을 우회하여 포위했던 유명한 작전을 떠올리고는 약간의 군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출발했다. 우여곡절 끝에 적진에 가까이 간다.
"그러나 얼마쯤 갔을 때 길이 끊어지며 발아래 낭떠러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또다시 겁이 나고 낙담했으니, 사실은 자신들이 찾던 적군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플루타로코스 영웅전)

어느새 날이 새고 실제로 낭떠러지 아래도 헬라스식의 울짱과 전초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자 카토는 부하 몇몇에게 지시하여 적군 파수병들 가운데 한 명을 생포하게 하고, 그를 심문하여 적군의 주력부대는 왕과 함께 고갯길에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아낸다. 그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고 경계가 소홀하다는 것을 알고 카토의 군사는 낭떠러지를 내려가 공격한다. 그 사이 평지에 있던 마니우스(집정관)가 고갯길로 전군을 투입하여 적의 방벽을 공격했다. 안티오코스는 돌에 입을 맞아 이가 부러지자 괴로워 말머리를 돌렸고, 그의 군대는 도처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받아 뒤로 물러섰다. 도망갈 길이라야 지나기 어려운 험로뿐이고, 깊은 늪이나 가파른 절벽은 통과해보았자 미끄러지고 떨어질 게 뻔했지만, 안티오코스의 군대는 고갯길을 지나 그렇듯 위험한 길들로 뛰어들었고 로마인들의 칼에 맞을까 두려워 서로 밀치고 짓밟다가 자멸하고 말았다.
이상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마르쿠스 카토 전' 13장과 14장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카토는 자화자찬에 어색해하는 사람이 아닌 데다 공공연한 자랑도 위대한 공적의 당연한 귀결이라 여기고 전형 주저하지 않았지만, 이때의 공적에 관해서는" 특히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군사적 업적을 본 사람들은 "그가 로마 국민에게 신세진 것보다 로마 국민이 그에게 신세진 것이 더 크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대표적인 '자랑질'의 사례다. 집정관 마니우스가 그를 껴안으며 "자기도 로마의 모든 국민도 그의 선행에 적절히 보답할 길이 없을 것"이라며 함성을 질렀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카토는 자신의 승보를 몸소 전하려고 로마로 출발했다. 좀 낯 뜨거운 일이긴 한데, 기원전 191년의 일이다. [이보다 앞서 기원전 279년에도 그리스인들은 침입해오는  켈트족을 바로 이곳 테르모퓔라이에서 지연시켰다.]
[5]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os, 기원전484?∼BC425?)와 마르쿠스 카토(기원전 234년~149년)의 생몰연대를 비교해보라. 단지 책 형식이 아니라도-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아니라도- 앞선 시대의 전쟁사는 장군들에게 반드시 익히고 기억해야할 커리륨럼이었으리라. 어쨌거나 "기원전 191년에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군을 막기 위해 이 길을 요새화했"던 것을 역발상으로 무너뜨린 사례는 당연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마르쿠스 카토가 특히 테모퓔라이에서의 자신의 승리에 쾌재를 부르고, 끊임없이 '깔대기를 들이댔던' 것은 테모퓔라이에서 벌어진 앞선 전쟁의 사례를 적절히 활용했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그렇다면 안타오코스는 이곳에서 벌어진 레오디다스 왕과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사이의 전투사례를 몰랐을 것인가!
[6]테모퓔라이 협곡은 아테네 북서쪽 약 136㎞ 지점이다. 고대에는 이 길의 절벽이 바다에 가까이 있었으나 물에 의해 운반된 침니 때문에 그 거리가 1.6㎞ 이상으로 넓어졌다. '뜨거운 통로'라는 뜻의 이곳 지명은 유황 온천수가 있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길이 7.2㎞의 이 고개는 수많은 침략으로 인해 유명해졌으나, 이제는 협곡이라고 할 수 없으니,

[7]역사(전쟁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유사한 케이스의 승리나 방어벽을 구축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만약 카토가 이 토론에서 여느 때 자신의 작품에서 그랬던 것보다 더 유식해 보인다면 그것은 그리스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하게나. 그가 노년에 그리스 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말일세"(키케로가 <노년에 관하여>에서 주 대담자로 나선 마루쿠스 카토에 대해 소개하는 대목)
"나는 노인이 되어서야 그리스어를 배웠으니 말일세, 나는 마치 오랜 갈증을 식히려는 것처럼 열심히 그리스어를 배운 까닭5에 자네들도 들었다시피 방문 인용한 문장들을 알게 된 거라네..아무튼 그르시어만큼은 나는 열심히 배웠다네."(<노년에 관하여 8장 후반부, 마르쿠스 카토가 하는 말)
마르쿠스 카토가 테모퓔라이에서 승리를 거둔 때의 나이는 43세 무렵이다. 아마도 노년에 이른 마르쿠스 카토가 그리스어를 더욱 열심히 배운 동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힙입은 전공을 회상하는 즐거움과 겹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정 중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베개속에 넣어 베고 잤을 정도로 애독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만큼 <역사>의 한 페이지와 이어진 전쟁사. 한 장소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이야기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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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2012-11-2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영화 300으로 설명하는 상황이 아쉽지요. 완독을 해야 하는데 하는 숙제.. 재밌습니다. 험준한 그 고개에서 역사는 되풀이되는군요.

timeroad 2012-12-0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영화제작을 위해서는 별도의 장소를 물색해야 했겠지요. 물론 CG의존도가 높으니 하나마다한 소리지만. 감사`

oren 2013-11-05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 <300>이 나오기 전에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고 레오니다스 왕에 관한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된 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timeroad님의 이 글을 읽으니 테르모필레 협곡에선 또다른 흥미진진한 역사가 또한번 멋지게 펼쳐진 적이 있었군요. timeroad님의 해박한 지식에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라틴어를 제대로 배운 몽테뉴 또한 레오니다스와 그의 딸의 훌륭한 인품을 격찬해 마지 않던데 그 대목이라도 덧붙여 봅니다.

* * *

레오니다스의 경우

가장 용감한 자는 때로는 가장 불행한 자이다. 그러므로 개선 못지않은 패배도 있는 것이다. 태양이 그의 눈으로 보아 온 중에 가장 아름다운 승리인 살라미스·플라타에아·미칼라·시칠리아 등 4대 승리의 영광 전부를 뭉쳐 보아도, 테르모필레 협곡에서의 레오니다스와 그의 부하들이 전멸당한 영광에 감히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 * * * *

레오니다스의 딸

나는 스파르타 왕의 아내이며 딸인 켈로니스의 아름다운 마음을 얼마나 존경하고 싶은지. 그의 남편 클레옴브로토스가 혼란의 틈에 부친 레오니다스에게 대항해서 우세하던 동안, 그녀는 착한 딸 노릇을 하며 추방당한 부친의 어려움 속에 그의 편을 들며 승리자에게 반대했다. 그런데 운이 뒤집힌 다음 이 여자는 행운의 편을 들려고 하지 않고 용감하게 자기 남편의 편을 들며 그가 패하여 달아나는 뒤를 따라간다. 그녀는 자기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며 자기가 가련하게 보아 주는 편으로 투신하는 것밖에 선택의 길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세도가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약한 자들에게는 거만하게 굴던 피로스보다는 당연히 플라미니우스의 본을 더 좇고 싶다. 그는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보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빌려 주었다.

oren 2013-11-0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imeroad 님께서는 테르모필레 협곡의 실제 사진을 당연히 보셨겠지요? 저도 3년 전쯤 '레오니다스의 경우'라는 짤막한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뒤져보다가 우연히 테르모필레 협곡의 실제 사진을 보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그렇게 유명한 협곡이 그렇게 허무하게 변했을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었거든요. http://blog.aladin.co.kr/oren/4297944
 

필자는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 리뷰(알라딘)에서 용병에 가까운 크세노폰의 참전을 '원군' 나아가 '원정'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변론'을 진행하였다. 그를 변호하기 위해 당시 아테나이와 더불어 그리스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스파르테의 왕 아게실라우스도 이집트 용병으로 나아가 조국의 다른 전쟁을 위한 비용을 벌어야 했던 사례를 꺼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1:1 형식으로 비교하고 있어 '비교열전'으로도 불린다. 영웅전에서 아게실라오스(그리스)의 파트너는 폼페이우스(로마)였다. 비교열전이 그렇듯 비교 대상은 두 사람의 삶은 여러 면에서 닮아있고, 그렇게 비교하고 나니까 또 다른 점(대조점)들이 있더라, 해서 비교하는 글이 이어진다. 두 영웅들을 비교하는 글 말미에 플루타르크는 두 사람이 이집트에 간 이유를 언급한다. 폼페이우스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어쩔수없이 이집트로 항로를 정했다. 그리고 아게실라오스는 보수를 받기 위해(어쩔수없이) 야만족의 장군에게 고용되어 이집트에 갔다. 그리고 용병으로의 소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이집트의 입장에서 동족인 그리스인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84세에 생을 마감하는 아게실라오스 왕이 죽음을 몇 해 앞두지 않은 노년에 벌인 일이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비교열전')에서 그를 폼페이우스와 비교했지만, 필자는 용병으로 나서면서까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던 아게실라오스의 모습에서 로마의 영웅, 대 카토(마루쿠스 카토)의 노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은 노년의 대 카토(로마) 대 아게실라오스(그리스) 에 대한 비교열전이다. 더불어 이 글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라는 책의 배경을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잘 알다시피 마르쿠스 카토는 키케로가 지은 <노년에 관하여>에서 주 대담자로 등장한다. 대담에 참석했을 때 그의 나이는 84세. 불과 1년 후면 죽게될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노년에 대한 오해를 조목조목 반박하는(불식시키는) 대 카토의 삶에 대한 성찰이 깃든 견해에 따르면 1년후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1년이란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대 카토가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조국 로마의 안위를 위하여 쏟아낸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윤시내의 '열애') 애국심이다.

그렇다면 간명하게 마르쿠스 카토(일명 大 카토)의 프로필을 살펴보자. 마르쿠스 카토(기원전234~149). 그는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다. 본래 성은 프리스쿠스였지만 재능이 뛰어나 '카토'라는 성을 얻었으며, 붉은 얼굴에 회색 눈을 하고 있었다.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집정관, 감찰관 등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에스파냐 전쟁에 출정했으며 그리스에서 아시아 군을 몰아냈다.(동서문화사 플루타르크 영웅전) 이제 인물 됨됨이를 조명해보자. "(대 카토는) 사치에 물들기 전 옛 로마의 ‘도덕심’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검소한 생활, 꾸준한 체력 단련, 불굴의 정신력, 적극적인 정치활동에 힘입어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재정관, 조영관, 집정관을 거쳐 기원전 184년에는 감찰관으로 선출되었으며, 최초의 라틴어 산문 작가로서 라틴 문학에 끼친 그의 영향은 막대하다."(숲출판사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의 소개) 대 카토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의 마지막 정치적 업적은 카르타고의 파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카르타고와 누마니아(지금의 동알레지와 튀니지 지방) 왕 맛시닛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카토는 분쟁원인 조사차 사절로 파견된다. 카토가 죽기 4년 전인 기원전 153년의 일이다. 마시닛사는 로마에 우호적이지만 페니키아의 식민시인 카르타고는 로마의 대 스키피오에게 패한 뒤(제2차 포이니 전쟁에서) 로마와 우호조약을 맺고 제국을 잃었으며 무거운 배상금을 물어야했다.
그런데 대 카토는 그들이 비참하게 몰락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전사가 득실대로 엄청난 부가 넘치고 각종 무기와 군수품이 가득하여"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며 저들이 곧 로마를 위협하겠구나 경각심을 갖게 된다. 서둘러 로마로 돌아온 카토는 카르타고의 누미디아인들과 분쟁은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하다며 그들의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해서 화제가 다른 질문에 대답할 때에도 대 카토는 "내 생각에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앞세우고는 답변했을 정도라고 한다. 카르타고가 로마를 정복할 만큼 강하지는 못해도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강하다고 판단한 것. 이렇게 대 카토는 카르타고에 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쟁을 부추켰다.
이쯤에서 대목에서 포이니 전쟁에 대해 정리가 필요하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에 걸쳐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이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시(植民市)이다. '포에니(poeni, 포이니)'라는 말은 라틴어 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인의'라는 뜻.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불렀다. 로마인들은 원래 시켈리아(시칠리아, 당시 이 섬은 여러 문화가 뒤섞인 곳)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힘썼는데, 이 섬 일부 지역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날 당시 카르타고는 광범위한 제해권을 갖춘 서부 지중해의 패권국이었으며,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이었으나 카르타고 수준의 해군력이 없었다. (1)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 23년 동안의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였고,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고 막대한 전후 배상금을 부과한다. 제1차 전쟁 이후 6년간 로마는 팽창을 거듭하여 지중해 대부분을 장악한다.

(2)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리는데,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다. 기원전 218년에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에스파이나)의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갈리아 남부를 돌아 알프스를 넘었고, 이 때에 상당수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하나,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해서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무찔렀다. 당시 한니발은 그 이름만으로도 로마인들을 공포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할 정도였다.(범죄영화의 완벽한 구성을 갖추고 있는 걸작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양들의 침묵, 1991>에 등장하는 한니발 렉터 박사(Dr. Hannibal 'The Cannibal' Lecter: 안소니 홉킨스 분)의 이름도 이 전쟁의 주역이름을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는 일명 ‘카니발-식인종- 한니발’이라고 알려진 흉악범으로 죽인 사람의 살을 뜯어먹는 흉측한 수법으로 자기 환자 9명을 살해하고 정신 이상 범죄자 수감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플루타르크 영웅전 소개된다)의 지연 전술로 만회할 시간을 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지 못한다. 양(兩) 군은 이탈리아 말고도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그리스에서도 격돌했으나 끝내는 로마군이 모두 승리한다. 특히, 전장은 아프리카로 넘어가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여 전쟁이 끝났다.
일명 '대 스키피오'로 불리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기원전 236~183년)는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꼽힌다. 전쟁사에서 다시 보기 힘든 명장끼리의 대결로 유명한 자마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찔러 승리를 거둠으로써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한다. 바로 이 때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라는 의미에서 그 유명한 별칭인 '아프리카누스'가 그에게 붙여졌다. 그는 적지에서 제2차 포이니 전쟁을 치르며 아프리카, 그리스, 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혀 지리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창시자'로. 문화적으로는 '로마문명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로마 외교술의 근본원칙인 '패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쳐, 세계 공동체의 실현을 추구하는 세계정치가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커다란 성취를 이룬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의 정치적 파벌과 질투의 희생양이 된다. 그는 결국 탄핵을 당해 망명과 같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배은망덕한 조국이며, 그대는 내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삶을 마감했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에서 바로 이 스키피오도 다뤘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B.H.리델하트 지음, 사이 펴냄)라는 번역서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아홉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국을 등진 뒤 코끼리부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36년 만에 조국 카르타고로 돌아와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스키피오에게 패배한 한니발의 인생이 너무도 극적이었기에 사람들은 스키피오의 승리를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이는 끈질긴 성취보다는 극적인 패망을 미화시키는 인간의 성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키피오를 평가하는 <역사의 천칭>은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 마루쿠스 카토 얘기를 하다가 대 스키피오 얘기를 하고 있지만, 둘은 정적 관계였다(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어쨌거나 대 카토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찰한 결과 카르타고가 다시금 도발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전쟁준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그리스로마에세이>,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를 노년에 이른 대 카토(가 주로 얘기하고)와 두 젊은이가 말씀을 듣는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다.
두 젊은이 가운데 하나가 일명 소 스키피오(기원전 185년경~129년)인데, 앞서 2차포이니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이다. 그런데 소 스피피오는 대 스키피오의 친 손자는 아니고,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파울루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대 스키피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에게 입양된 상태였다. 그리고 소 스키피오의 친누이는 대 카토의 며느리가 된다. 그러니까 사돈 관계인 이들이 등장하는 바로 '노년' 대담에서 대  카토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한다. 우선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를.
"나는 병사로서, 연대장으로서, 장군으로서, 사령관으로서 온갖 전쟁을 수행했지만 지금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으니 자네들에게는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지. 하지만 지금도 나는 어떤 전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원로원에 조언을 해주고 있다네. 오래전부터 음모를 꾸미고 있는 카르타고에 나는 미리 앞질러 선전포고를 해주고 있다네. 그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나는 그 도시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을걸세."(18절) 그리고 소 스키피오에게 할어버지의 유지를 받들라는 예언을 한다. "스키피오여, 자네가 조부님의 위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불사의 신들께서는 승리를 유보해두시기를!"(18절) 실제로 카토가 죽기 직전인 149년에 시작된 제3차 포이니 전쟁에서 소 스키피오는 과연 카르타고 시를 함락하고 파괴한다. 바로 이 대담에서의 희망사항이 실제로 이뤄진 것. 대 카토는 전쟁의 위험성을 진단하고 대비하도록 하였고, 소 스키피오는 실제 그 전쟁에 출정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이므로, 노회한 대 카토의 안목이 훌륭하다. 율곡 이이 선생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며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던 예지와 비교해볼만한 것이리라.

 

물론 제3차 포이니전쟁은 앞서 언급했듯이 새로 집권한 카르타고의 군사세력이 많은 로마인에게 불안을 조성하자, 급기야 기원전 149년 로마는 카르타고가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조건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한다. 싹을 밟아버리기 위해, 로마는 전쟁을 유도한 것. 카르타고는 이 요구를 묵살하여 세 번째 전쟁에 돌입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공성전을 벌였다. 카르타고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활의 시위로 쓰게 할만큼 거세게 저항했으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소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2년에 걸친 공격으로 결국 카르타고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으며 도시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려 폐허로 만들었다.
마르쿠스 카토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는 순간까지 조국 로마의 평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여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한 나라의 진정한 원로의 모습을 보여준 대 카토에 비교될만한 그리스인을 꼽으라면 단연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우스(기원전 444무렵~360년)이리라. 그는 "당시 그리스 최고의 인물로서 뛰어난 왕이자 장군이었다.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전의 그가 거둔 화려한 전력은 생략하자. 바야흐로 팔십 세가 넘은 이 양반은 말년에 '메세네라는 작은 땅덩어리라도 손에 넣으려고' 갖은 애를 쓴다. 전쟁 경비가 모자라 시민과 친구들에게 경비를 빌린다. 쉽지 않다. 급기야 이집트의 왕 타코스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전쟁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용병으로 출전한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당시의 숱한 반대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장군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위대한 그가, 이집트의 한 야만인 우두머리에게 고용되었다는 것은 추태다. 세상의 평가가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타코스가 보낸 돈을 받아 용병을 모집한다. 그리고 그 병력으로 함대를 구성한 뒤-페르시아 원정 때처럼 30명의 스파르테 장군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이집트로 출항했다. 이제까지의 전쟁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늙은 장군(왕)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그의 속마음(믿음)을 플루타르크는 이렇게 읽고 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자기 자신만의 명예가 아나라 나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집 안에 틀어박혀 죽는 날만 기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앞서 <노년에 관하여>의 주 대담자인 대 카토 주장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대 카토는 잘 나가는 로마의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아게실라오스는 꺼져가는 국운에 불씨라도 되기 위해, 갖은 반대와 수모를 견뎌내는 노년의 왕이었다. 누가 더 위대하다고 해야할까, 80대 중반까지는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장수한 경우인데, 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참으로 애틋하고 눈시울이 젖게 한다.
18대 대통령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야권 후보단일화를 '압박하시던' 원로들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노인들 대다수는 여권지지"와 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가슴이 아프다. 지난 삶의 굴곡 너무 컸으리라. 그 얼룩은 트마우마가 되어 무너뜨릴 수 없는 벽으로 우쭉 서 있는 것이리라. 미래로 가는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상당수라고 선거전 얘기는 씁쓸하다. 그런 노년들을 비판하는 지금의 젊은 우리들은 나라와 민족을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행에 옮기는, 대 카토와 아게실리우스 왕 같은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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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2012-11-2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원로들의 역할이 정말 아쉽고 안타깝고 목마를 뿐이네여, 오늘 아침에 보니 타는 목마름의 시인이 여성대통령을 지지한다네여, 죽음의 굿판 운운하던 때의 울분을 다시 느끼면, 가끔은 주목받는 삶이고 싶다, 이건가요 김지하!

timeroad 2012-12-0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이 힘든 걸까요? 그들은 이미 본 세계를 아직은 젊어서 못 보는 것일까요? 그렇게 지역주의 벗어나야 한다던 이들이 이 판에서 지역발전을 핑계로 참 안타까운 모습들.. 과거는 흘러갔다! 버릴 것 버리고 새로움을 찾으면 좋을 텐데.. 고전읽기좀 해야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