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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카드뉴스로 만든 ‘출판사 제공 책소개’가 눈길을 끌어  책(『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을  살피게 되었다. 삶과 비즈니스 현장에서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답을 도출하는 법을 알려 주는 실용 철학서란다. 부제는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다. 목차만 읽어보아도 그러한 컨셉트에 충실한 책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그리스 3대 철학자의 저작만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04 사람은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_수사학]

[38 ‘결국 이런 뜻이죠?’라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 : 소크라테스_무지의 지]
[39 이상은 이상일 뿐,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지어다 : 플라톤_이데아]

 

철학(고전 혹은 인문을 적용해도)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본 사람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언뜻 주워들은 한마디에서도 깨침을 얻기도 하거니와 무심코 읽는 동안 기대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나아가 좀 더 깊이 있는 질문으로 이어져 관심 분야로 진입하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는 말처럼 어려우니까 철학이다, 라는 말로 언제까지나 위안을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다만, 몇 가지 눈에 띄는 점에 이의제기를 해야겠다.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고, 그 역도 가능하듯이 책의 발상에 걸맞게 책 소개 또한 형식(방법)의 새로움을 제시하여 귀감이 되었다. 그런데, 일러스트와 함께 실린 우화의 내용은 다듬어질 수 있기에 논외로 하고 ‘이솝 우화’를 언급한 본문과 관련하여 할 얘기가 있다. 본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가 있다.]

"여우가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발견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이 닿지 않았다.

결국 여우는 "이 포도는 엄청 신 게 분명해. 이런 걸 누가 먹겠어!”라며 가 버린다."

-<철학은 어떻게..> 50면.[01 타인의 시기심을 관찰하면 비즈니스 기회가 보인다 : 프리드리히 니체_르상티망]

이 우화가 현재 어린이들의 교과서에는 어떤 번역으로 실려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지만 제목부터 문제가 있다. 물론 필자도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라 「여우와 신 포도」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이솝 우화 전편(358편)을 총망라하여 (원전) 번역한 책이 몇 해 전에 나왔다. 희랍-라틴 고전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다.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이솝 우화』(숲, 2013.5.)인데, 당시 신문의 신간 안내에서 이 책을 다루면서 화제가 되었다. 「여우와 신 포도」로 알고 있는 우화가 원전을 살피니 그 제목부터 좀 다르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므로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굶주린 여우가 나무를 타고 올라간 포도 덩굴에 포도송이들이 매달린 것을 보고 따려 했으나 딸 수가 없었다.

여우는 그곳을 떠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포도송이들은 아직 덜 익었어."*

-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 전문, 『이솝 우화』 53면

짧지만 우화에도 처음과 끝이 있고 중간이 있다. 이것을 ‘전체’라고 하며, 처음과 끝과 중간이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다. 어쨌든 첫 인용은 우화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이 짧은 이야기의 요약이 왜 필요할지는 모르겠으나) '신 포도'가 아니라 '덜 익은' 포도라는 점을 이야기하자.

옮긴이의 설명(주석)를 살핀다. <*'덜 익다'의 그리스어 omphax(복수형 omphakes)는 '시다'는 뜻이 아니라 맛과 관계없이 '덜 익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sour grapes'라는 영어 표현은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주석에 따르자면 영어판을 우리말로 옮기는(중역) 과정에서 생긴 오류다. 덜 익은 포도가 대체로 신 맛이 나고,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 쓴 맛일 수 읽고 설익었을 때는 단 맛이 더 지배적일 수도 있다. 신 맛은 덜 익은 포도가 내는 여러 맛 가운데 하나일 수 있는데 단어 하나를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바람에, 그리고 그것이 교과서나 동화(그림)로 널리 읽히면서 어느덧 '신 포도'로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필자는 결코 사소하게 여길 수 없다. '사소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대단히 복잡한 문제도 차근차근 관련된 사소한 질문부터 풀어가노라면 풀리는 것을 일상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고전은 여러 층위의 질문들(해석의 여지가 넓다고 달까) 을 함유하고 있어, 스포일러에도 지장 받지 않으며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하는' 그런 저작이다.
사실, 이 책(정본 이솝우화)의 경우도 몇몇을 제외하고 우화마다 주석처럼 '교훈'이 붙어 있는데, 해당 우화 아래 '교훈'을 주석처럼 배치해놓아 우화를 읽고, 이거 뭐지(모든 우화가 그렇게 의도한 바, 친절한 교훈으로 일대일 대응하지는 않거니와) 하다가 '교훈'을 읽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달까, 생각의 폭을 좁히게 되는 '결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가령, 두 번째로 인용한 우화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의 교훈은

"이와 같이 사람도 더러는 자기가 맡은 일을 능력이 부족해서 해내지 못하면 시운(時運)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다. 어쩌면 이런 교훈은 훗날 편저자들이 덧붙인 것으로, 어쩌면 교과서에는 없지만 교사용 교재에는 있는 '지침'인데 이것이 해당 우화들과 짝을 이뤄 남게 된(고착된) 것이 아닌가 한다. 책의 내용을 보완하는 각주(脚註: 본문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래쪽에 따로 달아 놓은 풀이)는 가급적이면 해당 면((이나 양면의 각주를 오른쪽 면 아래에)에 있어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좋다. 대체로 주석이 많은 학술논문들에 질린 경험 때문에 주석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으면, 난해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 후주(後註: 책에서 한 편이나 장 등의 끝이나 책의 맨 끝에 보충하여 주는 말이나 글) 처리를 하는데(이는 출판사의 의도), 꼭 필요한 주석이라면 해당 면에 자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석이 필요 없으면 없을수록 좋겠지만 필요한 주석이라면 그 목적에 맞는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교훈'의 경우는 후추 처리하여 책의 끝부분에 배치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한 편의 우화를 읽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을수록 좋은 우화이고, 대부분의 우화들은 실제로 그러하기에, 알고 보면 '교훈'이 곧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해석의 여지를 미리 차단해버리면 왜 책을 읽는지 회의감이 들게 된다. 책을 읽는 것은 질문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구나 나름대로 대답할 있는 질문을 ‘해석적 질문’이라 하는데, 가령, "부자가 된 흥부는 왜 형을 찾아갔을까?"(<흥부와 놀부>라면) 같은 질문이다. 정답은 없다. 다양한 견해(의견)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대답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우와 포도송이」의 경우도 교훈을 배제하고 조금만 더 생각하고, 질문을 찾으면 철학자 니체의 '르상티망'을 경험하지 않겠는가? 우화가 실린 해당 면에 '교훈'을 함께 싣는 것처럼 ‘A는 B다’와 같은 '작위적인' 연결은 위험성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지금 논하는 책과 관련하여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던질 수 있는 해석적 질문을 다룬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일 수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 이해하고(외우고)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읽지 않는다면, ‘플라토닉 러브’의 개념만 파악하고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이나 사랑에 대한 논의를 심화한 『파이드로스』를 읽지 않게 된다면 그런 삶(사고)은 얼마나 건조할 것이며, 풍부하고 기지 넘치는 대화를 이끌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그 유명한 비극의 정의('완결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하면서 '전체'에 대해 설명한다.  '전체는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다.'는 것.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처음'과 '중간'과 '끝'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하나마나 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아래]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논의가 심각해질 것이니, 이만 하기로 하고. '50가지 생각 도구'를 섭렵하되, 그 과정을 살피는 독서로 이어지기를, 또한 가능하면(특히, 번역된 텍스라면) 한없이 원전에 가까운 번역을 골라 읽으면 좋을 것이다. 제대로 옮겼다면 결코 어려울 리가 없다.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죄목 가운데 하나) 이유로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았을 리 없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어렵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면 말이다.

“진정한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담론보다는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나는 원래 이야기꾼이 아닌지라 …아이소포스의 우화들을 운문으로 고쳐 썼단 말일세.”(플라톤 「파이돈」 61b)
독배를 마시고 죽던 날,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의 고백한다. 아이소포스와 겨룬다는 건 쉽지 않으며, 그와 겨룰 생각이 전혀 없다(아이소포스는 이솝의 그리스어 이름이다). 이솝의 내공을 당대의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 소크라테스가 인정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는 독자라면 역시 일본인 저자가 시라토리 하루히코가 쓴 『독학獨學』(이룸북, 2015)이란 책을 참고하기를. 분량도 많지 않고, 독서를 통해 뭔가를 얻으려는 이에게 특별한 정보를 준다. '스스로 공부하려고 해도 어쩐지 불안하고 미덥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용기와 지침을 주고, 독학 요령을 알려주는 데' 책을 쓴 목적이 있단다. 제목 때문에 독학을 위한 노하우를 담은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자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터득한 독학하는 방법의 일부분은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평범하게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의문이 생긴다. 순수한 의문이 많이 떠오를수록 좋을 것이다.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의문이 지식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독학하는 동안 살아있는 지식을 얻게 된다. 사소한 의문 하나를 규명해가다보면 기대한 지식의 바다를 만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을 이어본 것이다. 괜히 꼬투리를 잡아 보라는 달은 못(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탓만 한 것은 아닌지, 숙고하게 된다. <능엄경>(불경)이었던가! 가끔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눈길을 주어야 할 때도 있다. 말이 길어졌다.

*      *      *      *      *      *

[아래] ;"'처음'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이다. 반대로 '끝'은 필연적으로 또는 대게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간'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시학』 중 <시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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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5권에서 두 번째로 그려지는 군중 전투(트로이아가 우세한 상황)에 앞서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자기 부하들을 격려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체면을 잃지 말라고 역설한다.

 

"친구들이여! 사나이답게 행동하고 마음속으로 용기를 내시오.
격렬한 전투에서도 서로 남 앞에서의 체면을 존중하시오.
체면을 존중하는 자들은 죽는 자보다 사는 자가 더 많을 것이나
도망치는 자들에게는 명성도 구원도 없을 것이오.” _『일리아스』5: 529~532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란 말이 떠오른다. 충무공이 자주 사용했다는 이 말의 출처는 『오자병법』(필사즉생 행생즉사 必死卽生 倖生卽死)이다. 생사(生死)가 엇갈리는 절체절명의 전장에서 아가멤논이 강조하는 것은 '체면'이다. 대체 체면이 무엇이기에, ‘덕분에’ 살 수 있고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까? 평자들은 이 대목을 희랍 문화가 죄의식의 문화(guilt culture)보다는 수치의 문화(shame culture)에 가깝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하곤 한다.

 

덕분에’ 살 수 있고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수치의 문화(shame culture)
수치심(羞恥心)은 불명예를 안겨줄 성싶은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비행(非行)과 관련된 일종의 경멸 또는 무관심이다. 파렴치는 똑같은 비행과 관련된 일종의 경멸 또는 무관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시학』 <수사학> 2권 6장 수치심) 아리스토텔레스는 들고 있던 방패를 내던지거나 싸움터에서 도주하는 경우를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다. 우리 자신이나 돌보는 사람들의 명예를 실추시킬 성싶은 비행은 무엇이든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 또한 수치심은 불명예에 대해 느끼는 '인상'이고 그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명예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의견'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그들의 의견이 우리에게 중요한 (그) 사람 앞에서 수치심을 느낀다. 인지상정이다. 그런 사람들이란, "우리에게 감탄하는 자들, 우리가 감탄하는 자들, 우리가 감탄 받고 싶은 자들, 우리의 경쟁자들, 그들의 의견을 우리가 존중하는 자들이다."(앞과 같음)
그리고 뒤집어 생각한다. 우리는 별로 믿을 게 못 되는 자들 앞에서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아이들이나 동물들 앞에서와 같이). 그런데, 또한 안면이 있는 자들과 안면이 없는 자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좀 다르다. 안면이 있는 자들 앞에서는 '실제로' 수치스러운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안면이 없는 자들 앞에서는 '관습적으로' 수치스러운 것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

 

'실제로' 수치스러운 것과 '관습적으로' 수치스러운 것
플라톤(기원전 427~347)의 『향연』은 기원전 381년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데, 비극작가 아가톤이 기원전 416년 레나이아 제(祭)의 비극 경연에서 처음 우승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베푼 술잔치(symposion)가 배경이다. 이 자리의 참석자들은 에로스(eros; 사랑)에 관해 발언하는데, 첫 번째로 나선 파이드로스는 신화적인 관점에서 에로스를 찬미한다. 그는 곧바로 에로스가 인간들에게 베푸는 가장 큰 은혜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자기를 사랑해줄 연인을 갖는 것, 그리고 연인은 자기를 사랑해줄 소년을 갖는 것이란다. 나이차가 좀 있는 있는 남자들 사이에서 싹트는 '사랑'이 에로스가 준 최고의 선물이란다. 오늘날 말하는 동성애와는 차원이 다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나이어린 소년(연동)과 성인 남자(연인) 사이의 동성애를 사랑의 최고 경지로 보았다. (『향연』) 옮긴이는 사랑하는 자를 '연인'(戀人: erastes), 사랑받는 소년을 '연동'(戀童; paidika 또는 eromenos)으로 옮기고 있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연상의 연인)이 사랑받는 사람(연하의 연동)을 평생 동안 인도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은 '사랑'인데, 이것은 혈연, 공직, 부(富)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원칙으로 수치심과 자긍심을 제시한다. "수치스러운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훌륭하게 행동하는 것에 자긍심을 느끼는“ 이런 감정 없이는 국가도 개인도 위대하고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운 행위와 관련하여 그것을 자신의 연동에게 들킬 때가 가장 괴롭지 않겠느냐, 역설적으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위를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한 사람만 꼽으라면 그의 연동(연인)이다. (물론 '수사학'보다는 '향연' 집필시기가 앞서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제로' 수치스러운 것(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것)을 피하고 싶은 거다. 아버지, 친구들,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는 들킨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었으면 하는데, 그가 연동이며, 연동에게는 연인이다.
'그러므로' 파이드로스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국가든 군대든 잘 다스려지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연인들과 연동들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때 그들은 추한 것은 모두 멀리하고 서로 경쟁적으로 명예를 추구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싸우게 되면 비록 소수라 해도 말 그대로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연인)은 대열을 이탈하거나 무기를 내팽개치는 것을 연동에게 보이는 것을 가장 싫어할 것이며, 그런 것을 보이느니 몇 번이고 죽기를 택할 것이라고. 이때에 에로스가 불어넣어주는 것은 '용기'인데 사랑의 힘이다.(플라톤의 <향연>, 189e~197a 정리)

 

파이드로스, 연인들과 연동들로 군대를 구성하자
부왕 필립포스가 뷔잔티온으로 원정을 떠나고 없는 사이에, 알렉산드로스(흔히 '알렉산더 대왕'이라 부르는)는 16세밖에 되지 않지만 마케도니아의 섭정 겸 옥새 관리자로 뒤(宮)에 남게 된다. 이 기간에 어느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무찌르고 그들의 도시에 헬라스 식민시를 세우고 '알렉산드로폴리스'라고 개명한다. 2년 후, 18세 무렵에는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338년)에 참가해 헬라스 연합군과 싸웠는데, 그가 맨 먼저 테바이인들의 <신성부대> 대열을 돌파했다고 전한다.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338년)는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이아 근교에서 벌어진, 필리포스(2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아테나이-테바이 연합군을 상대로 싸워 압도적으로 승리한 전투다. 마케도니아는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의 주도권을 잡는다. 앞서 아테나이가 델로스동맹의, 스파르테가 펠로폰네소스동맹의 주도국으로 그리스 패권을 잡았던 것처럼, 이후 마케도니아는 코린토스동맹의 맹주국으로 오랜 동안 그들의 시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제압했다는 '신성(神聖)부대'가 흥미롭다. 그 당시에도 십자군 같은 것이 있었단 말인가!  

 

18세 알렉산드로스가 무너뜨린 '신성부대'
'신성부대(hieros lochos)는 테바이의 명문가에서 가려 뽑은 300명의 중무장 보병으로 이루어진 정예부대다. 이 부대는 150쌍의 동성애자들로 이루어져 유난히 결속력이 강했다. 이 부대는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에서,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에서 스파르테군을 격파하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했으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었다. 기원전 338년 아테나이와 테바이 연합군이 필립포스에게 패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다 옥쇄했다.'(『플루타르코스영웅전』, <알렉산드로스 전> 주44)
사료에 따라 조금 보충하면(출처: 위키백과), 신성부대는 기원전 378년에 보이오타르크(사령관)였던 고르기다스가 창설했는데, 그리스에서 최강이란 찬사를 받은 부대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테바이는 엘리스와 함께 동성애에 가장 개방적인 도시였다는 것. 테바이가 위치한 그리스 중부의 보이오티아 지방에서는 소년애로 알려진 헤라클레스 숭배가 활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실된 저작에는 헤라클레스의 조카이며 종자이자 애인이었던 이오라우스의 묘소에 관한 묘사가 있는데, 그곳은 고대 테바이의 남성 동성애자 커플이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플루타르코스는 '신성부대'라는 호칭이 이런 풍습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헤라클레스의 동성애(신화)에서 '신성부대'라는 호칭 유래
플라톤의 『향연』 집필 연대가 기원전 381년이고, 이 대화편이 기원전 416년의 '향연'에서 나눈 이야기인 점을 상기하자. 파이드로스의 제안이 3년 후(기원전 378년) 테바이 군대에 도입된 것일까? 플라톤은 생전에 시켈리아(시칠리아)섬에 있는 시라쿠사이를 세 번 방문했다, 자신의 철인정치론을 현실에 도입해보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만약 ‘향연’의 언급이 신성부대 창설과 인과 관계라면, 플라톤으로서는 뿌듯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사랑의 힘으로 똘똘 뭉친 이들 테바이의 신성부대가 최후를 맞이하는 전투가 그들이 아테나이와 연합한 전투였다. 연동과 연인의 나이차를 감안할 때(이상적인), 150쌍의 그들은 요즘 군대의 '사수와 부사수' 쯤으로 대입할 수 있으리라. 사랑만이 아니라 전술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관계이기도 했다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으리라. 하필 이들을 멸망시킨 이가 18세의 알렉산드로스였다는 점도 놀랍다. 굳이 인용문을 찾아 그의 면면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알렉산드로스야말로 출중한 외모에 지혜(인문학도)와 기예를 겸비한, 연인이라면 누구나 탐하는 연동이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어쨌든 이 전투에서 테바이 신성부대 300명 중 254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46명은 부상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이들의 숫자가 짝수인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기원전 381년 『향연』 집필, 기원전 378년 '신성부대' 창설
(내친 김에) 한편, 이들 신성부대가 활약한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는 테바이가 주도한 보이오티아동맹군과 아테나이+스파르테+만티네이아 연합군이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치른 전투다. 보이오티아 동맹군은 에파메이논다스가 이끄는 보이오티아 군이 좌익을 맡았고, 이들과 맞서는 연합군은 만티네이아 군과 아카디아 군이 스파르테 군(스파르테 왕 아게실라오스 2세)과 함께 우익을 맡았다. 보병끼리의 싸움에서는 보이오티아 군과 스파르테 군이 격전을 벌인다. 그 와중에 에파메이논다스는 몸소 수하들을 이끌고 적들을 공격한다. 적의 총사령관이 최전선에 나가 있음을 간파한 스파르테는 에파메이논다스의 죽음이 승리의 관건이라고 보고 많은 손해를 보면서도 그를 공격하는데 집중했다. 그는 마침내 적이 던진 창을 가슴에 맞고 쓰러진다. 그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은 안티크라테스(스파르타인)라고 플루타르코스는 말하고, 파우사니아스(143~176년 활동 그리스 지리학자, 여행가)는 크세노폰의 아들 그륄로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직업군인이자 저술가인 크세노폰(기원전 428년경~354년경)의 두 아들이 이 전투에 참전했는데, 장남 그륄로스가 전사한 것. 크세노폰의 사망 시기는 정확하지 않은데(기원전 354년경으로 추정), 그가 쓴 『그리스 역사』가 다루는 마지막 사건(기원전 35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을 기준으로 가늠한다. 크세노폰이 쓴 『그리스 역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의 막바지(기원전 411년)와 그 이후 4세기 초반의 그리스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투퀴디데스가 그의 '역사'(『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완성하지 못하고, 쓰기를 멈춘 시점(기원전 411년 가을)에서 기원전 362년 여름까지 49년 동안의 헬라스(그리스) 역사를 크세노폰은 서술했다. 크세노폰의 『그리스 역사Hellenica』 마지막 Ⅶ권이 '기원전 369년~기원전 362년'인 것.

66세쯤의 크세노폰은 장남이 전사한 만티네이아 전투를 그의 역사에서 다루었을 것인데, 그런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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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2-26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을 때 자주 등장하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마침 플루타르코스의 고향도 카이로네이아여서 더욱 흥미롭고, 숱한 후세의 사람들이 그리스 최고의 영웅으로 인정하던 에파메이논다스(키케로는 그를 ‘최초의 그리스인‘이라 불렀고, 플루타르코스를 ‘최후의 그리스인‘이라 불렀지요.)가 스파르테군을 격파한 레욱트라, 만티네이아 전투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50명의 인물 가운데 에파메이논다스와 대(大) 스키피오의 전기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 건 두고두고 아쉽기만 합니다. 4세기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람프리아스 목록‘(플루타르코스의 작품 목록)에는 그들 두 사람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던데 말이지요.


timeroad 2019-03-09 01:00   좋아요 0 | URL
오이디푸스 아버지 라이오스가 펩롭스의 궁전으로 피난 갔다가 그의 아들 크뤼십포스에게 반해-이때부터 남자들 사이에 동성애가 시작되었다고 한다.-어린 소년을 납치하자 펠롭스가 라이오스를 저주한다. 그러자 라이오스를 벌주기 위하여 헤라가 테바이로 스핑크스를 보내는데.. <오이디푸스 왕>의 스핑크스 주석(천병희) 일부입니다. 테바이가 동성애에 관대했다는 것이, 이유가 있었네요. 다음 글을 준비하다가, 긴가민가해서 이 글을 수정할까, 했는데 여기에 메모하고 갑니다. 그리스 등 일대의 고지도를 구해서 벽에 붙여야 할지 지명에는 약해서요. 최근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천천히 읽었는데, 시간도둑이더군요. 뒷편 지도 확인하느라 정신없고.. 감사합니다.

oren 2019-02-26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크세노폰의 반응은 『몽테뉴 수상록』에도 나와 있어서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옛날에 그 대목을 필사해 놓은 게 있어서 덧붙여 봅니다.
* * *
가장 심한 고난에 대한 위안이며 진정제

크세노폰은 화관을 쓰고 제물을 바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들 그릴로스가 만티네아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이 소식을 들은 첫 충격으로 화관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대단히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화관을 다시 집어서 머리에 썼다.

에피쿠로스도 역시 그의 종말에는 자기 문장의 영원성과 유용성에 위안을 느꼈다. ˝영예와 명성이 수반하는 모든 노고는 견디기가 수월하다.˝(키케로) 똑같은 상처이며 똑같이 처지가 어렵고 힘들더라도, 군대의 장수는 병사만큼 그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크세노폰은 말하였다. 에파미논다스는 승리가 자기 편으로 넘어 왔다는 소식을 받고,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어 갔다. ˝이것이 진실로 가장 심한 고난에 대한 위안이며 진정제이다.˝(키케로) 그리고 이러한 사정들 때문에 사물 자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빗나가며 헷갈려진다.

timeroad 2019-02-27 03:3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어떤 책은 가까이 있어도 자주 펼치지 못하는데 몽테뉴 수상록이 그런 것 같고요, 이런 대목이 있었군요. <그리스 역사>가 다룬 마지막 시점과 아들이 죽은(전투) 시기가 거의 같은 시기 같아(더 살펴야해서, 그러다가 글을 맺었지요. 신라의 화랑 관창은 아버지 김품일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16세의 나이에 잘 알려진 대로 황산벌 전투에서 죽지요. 살아 돌아온 아들을 꾸짖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디까지가 팩트일까(가짜 뉴스가 횡행하니 별 소릴 다하는 군요) 눈앞에서 자식을 보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처자식을 죽이고서 출전한 계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런저런 생각했네요. 크세노폰이 군인이었다고는 하지만 절규하는 모습이 그답다는 생각은 들어요. ,
 

플라톤(기원전 427~347)은 <향연>을 기원전 381년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데(집필 시기), 비극작가 아가톤이 기원전 416년 레나이아 제(祭)의 비극경연에서 처음 우승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베푼 술잔치(symposion)가 배경이다.
크세노폰(기원전 428년경~354년경)도 플라톤과 동일 제목의 대화편을 남겼다. 크세노폰의 <향연>은 기원전 421년 대(大)판아테나이아 축제 때 칼리아스가 자기 집에서 베풀었다는 '가상의' 만찬회에서 있었던 일을 (크세노폰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비록 ‘설정’이라 해도 작중 ‘향연(대화)’ 시점을 크세노폰이 명기한 것은 당시의 소크라테스의 생각(철학)을 추정하는, 단초가 된다. 당시의 소크라테스라면 이런 식으로 발언했을 것이라는, 제자의 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향연>과는 달리 크세노폰이 이 대화편을 쓴 시점은 특정할 수가 없다.

 

한 작가가 특정 작품을 ‘언제’ 썼을까, 하는 문제를 푸는 데는 그의 전기적인 기록을 살핌으로써 가능하다. 크세노폰의 대표작 중 하나인 『페르시아 원정기』(이하 ‘원정기’)에 고스란히 담긴 그의 ‘원정(용병 참여)’은 그가 직업군인이자 저술가로 생을 일관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크세노폰은 이 원정을 떠나기에 앞서(기원전 401년 3월 이전) 소크라테스를 만나 상담한다(‘원정기’에 수록). 만 2년에 걸친 원정이 일단락되었을 때는 기원전 399년 봄으로, 그해에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사형을 당한다. 원정이 끝났음에도 크세노폰은 곧바로 귀국하지 못한다(그리고 잠시라도 언제쯤 아테나이에 들렀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지켜볼 수 없었고, 멀리서나마 비보에 애통해하였을 것이다. ‘원정기’는 여느 저술보다 크세노폰의 자전적인 저술이기에 '전기적' 관점에서 크세노폰을 추적하는데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이력을 따라가는 글은 별도로 다루기고 하고) 크세노폰에게 <향연>은 어떤 의미였을까, 관련된 저작들을 살피면서 생각을 펼쳐볼까 한다. 

 

크세노폰이 아테나이에서 추방된 시기(기원전 394년)를 기점으로 이후 시골에서 살며 집필활동에 전념했다는 20년을 계산하면 기원전 374년까지가 된다. 또한 그가 코린토스(펠로폰네소스반도의)로 거처를 옮기기(기원전 371년) 전까지 20년을 집필에 전념한 시기(기원전 391~370년)라고 볼 수도 있다. 아테나이에서 추방당한 그가 스파르테가 준 (올룀피아의) 영지에 정확히 언제부터 머물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추방령이 철회되어 기원전 366년 조국(아테나이)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쯤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집필에 전념한 시기에만 집필을 했을까? 다산(정약용)이 유배지에서 18년을 그리 살았던 것처럼.
그런데 그의 사망 시기 또한 특정할 수 없어 (그의 다른 저작인) 『그리스 역사』에서 그가 다루는 마지막 사건을 근거로 추정하고 있다. 『페르시아 원정기』(다른 원정기들에 반론을 제시하는 데서) 또한 말년에 쓴 것으로 보는 점 등(천병희의 옮긴이 서문)에 따르면, 크세노폰은 죽는 순간까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향연>을 언제쯤 쓴 것일까, 그 시기를 특정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다만 그 집필 시기가 플라톤의 <향연>(기원전 381년)보다 앞서는 것일까, 그 이후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답할 수가 있을 듯하다.

 

크세노폰이 쓴 일련의 글들(<소크라테스 회상록>, <향연>,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거의 같은 시기에 쓴 '소크라테스 회상‘ 모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에서 그는(당시 자신은 페르시아에 머물렀고, 이후에도 한동안 아테나이에 올 수 없었기에) 소크라테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에게 듣기도 하고, 관련된 기록들을 살폈음을 밝히고 있다. 관련 기록물에는 플라톤의 관련 대화편들이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또한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고'에 속하는 글들은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크라테스-플라톤'(플라톤에 의해 재구성된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 문제를 감안하고 쓴 것으로 보인다. 아니 누구보다도 먼저 플라톤의 ’권위에 의한 논증‘ 작업에 이의제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련의 다른 글들보다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그런 흔적(집필 동기)이 두드러진다.

"나는 진실로 훌륭한 사람들의 행동은 진지한 것뿐 아니라 장난삼아 한 것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경험을 했기에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밝히고자 한다."

크세노폰의 <향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물론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산파술'에 의거한 대화의 진행방식(언어유희처럼 보이기도 한다)이나 곳곳에서 재담을 즐길 뿐만 아니라 밉지 않게 짓궂은 장난을 행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그런 정도로는 평소의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을 제대로 담았다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향연'이 열렸다는 기원전 421년, 대(大)판아테나이아 축제 때 칼리아스가 자기 집에서 베풀었다는 가상의 만찬회라는 '설정' 자체에서부터 뭔가가 있다.
그리고 그 ‘뭔가’는 플라톤의 <향연>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플라톤(<향연>)을 본격적인 패러디했다고 보기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서두에서부터 패러디적인 요소를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다만 크세노폰은 자신의 <향연>을 통해(‘의해’가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소크라테스의 적통 제자인 플라톤에게 '이의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집필 시기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고, 후기로 나아갈수록 소크라테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플라톤 자신의 철학(혼불멸론이나 이데아론 같은)을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대화편 전체에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플라톤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향연>은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에 속하는데, 적어도 크세노폰은 <향연>을 비롯하여 그 이전에 쓰인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섭렵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제 좀 스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라고!" (‘절제, 절제, 절제’ 스승을 앞세운 마케팅에도 '절제'가 필요함을) 크세노폰은 플라톤에게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플라톤의 <향연>은 기원전 416년의 일을 다룬 것이고, 크세노폰의 <향연> 기원전 421년의 일을 다룬 것이니,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이나 어려서 그 '향연' 자리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사랑’을 토론 주제로 두 번의 ‘향연’은 불과 5년 차이인데 소크라테스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다는 말인가? 또한 플라톤의 <향연>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는 이가 상기(想起)한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설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단한 발언들이 쏟아진 자리였다고 하자. 그러나 기억을 재구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필요에 따라 덧붙여지고, 재구성을 하였을 것이다. 크세노폰은 플라톤 당신도 그 자리에 참석한 당사자가 아니면서 너무 '진지하게' 술잔치에서(나) 나눴을 법한 얘기를 무겁게 전개하는 것 아냐, 반문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나의 스승이기도 했어!' 비록 직업군인으로서 전선을 누비고, 추방당해 오랜 기간을 고국(아테나이)을 떠나 있(었)지만, 크세노폰은 플라톤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초상에 '불편함'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나만 불편한가?’  크세노폰의 독백이 행간에서 읽히는 것이다.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패러디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로저 스크루턴(1944~ )의 『프뤼네의 향연』(김재인 옮김, 민음사, 1999)을 우연히 읽었다. 소설이라고 해서 ‘그렇고 그런’ 책이다 싶어 서가에 꽂혀 있을 뿐이었던 책이다. 비록 철학자가 쓴 철학소설이지만,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본격적인 (그리고 노골적인) 패러디로, 플라톤주의자들은 금서(禁書) 목록의 1호로 지정하고 싶은 책일 것이다. 본래 『프뤼네의 향연』은 저자의 『크산티페의 대화』(한 권으로 엮은)이란 저서에 수록된 대화편(철학소설) 가운데 하나인데, 한국어판에서 독립시켜 한 권으로 펴냈고, 나머지는 대화편들은 『크산티페의 대화록』이란 별권으로 출간되었다.
『프뤼네의 향연』의 주제도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향연>이 그렇듯이 '사랑'이다. 그런데 저자는 책 뒷부분에에 수록한 글(<‘프뤼네의 향연’과 그 안에 묘사된 인물들>)에서 의미 있는 언급을 한다. ['향연'은,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것 이외에도 몇몇 예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4세기 아테네의 정착된 문학형식이었다.]라는 대목이다. 출처는 J. 마르틴 <심포지움: 한 문학적 형식의 역사>(Paderborn, 1931)다. 아마도 '기원전 4세기'를 말하는 듯한데, 인용에는 '4세기'라고만 되어 있다. 앞서 기원전 얘기를 하고 있으므로, '기원전'을 생략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인용에서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것 이외에도'라는 대목이 중요하다고 나는 보았다.
『프뤼네의 향연』은 플라톤의 <향연>과는 대조적으로 등장인물이 모두 여인들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는 그의 미망인 크산티페다.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라는 용어의 의미는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서 기원한다.(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 하나로 다 알았다고 하는 것과 비교할만한 이야기다) 어쨌든 '위키백과'에 따르면, '플라톤 사랑은 순수하고 강한 형태의 비성적(非性的)인 사랑'이다. 그러나 『프뤼네의 향연』에서는 육체적인 사랑의 가치를 폄하하고 시종일관 근엄한 플라톤의 이미지는 심하게 훼손된다(물론 소설이다). 『프뤼네의 향연』에는 플라톤의 누이와 그 누이의 딸이 ‘향연’에 참석하여 나름의 주장을 필치고, 플라톤마저 간접적으로 등장하여 <향연>(플라톤) 패러디의 임계점을 넘나든다. 크산티페의 우정 어린 변호에 힘입어 플라톤 또한 ‘트라우마’에서 해방되기는 하지만, <19금>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위험한’ 발상을 이 소설은 서슴지 않는다.
'더 이상의 패러디는 아마도 없다'라고 해야 할까? 절판되어 도서관에서나 구해 읽어야 할 상황이라(알라딘 정보) 아쉽지만 말이다. 로저 스크루턴은 그 자신이 철학자이기도 하지만,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용기를 얻어, 이런 철학소설을 쓰지 않았나 싶다(움베르토 에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장미의 이름』을 구상했듯이). 로저 스크루턴에 비하면 크세노폰의 <향연>은 플라톤의 '작품'을 점잖게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또래이면서 집필 시기도 비슷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크세노폰의 '용기'가 돋보인다. 사랑에 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플라톤이 합리적인 논증 형식을 고집했다면, 크세노폰은 철학적 '직관直觀'에 따라 시원스럽게 가상의 '향연' 한마당을 펼친 것이다.

 

 

-천병희의 (원전번역) <향연>은 세 편의 대화편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2012년, 양장본)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현재는 2017년 개정판이 나와 있다). (아마도) 개정판을 펴내면서 ‘푸른시원 시리즈’로 『향연』(2016.9.)을, 이어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다룬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2017.3.)을 반양장본으로 펴내, 새롭게 다듬은 번역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향연>에는 철학자 양운덕의 해설(<사랑의 진리를 찾아서_<향연>읽기, 사랑의 향연에서 진리의 향연으로>)을 곁들여 사랑의 탐구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고 있다.
"철학적 에로스는 '주체의 금욕'을 바탕으로 함께 '진리로 상승하는 길'을 찾는다. 이처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랑은 새로운 사랑방식을 제시하고, 사랑을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는 '새로운 연예술이자 새로운 '생활양식'이다."
해설의 끝부분 언급은 이렇다. 이 해설은 자신의 책 『문학과 철학의 향연』(문학과지성사) 제4장, 『사랑의 인문학』(삼인) 제2장을 수정·보완한 원고라고 한다. 원전번역과 함께 이처럼 고전 자체가 함유한 ‘미덕’을 읽는 데 도움을 주는 ‘후속작업’에 박수를 보낸다.

-천병희가 원전번역한 크세노폰의 「향연」은 『소크라테스 회상록』에 「소크라테스 회상록」,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절판되었지만 『프뤼네의 향연』(로저 스크러턴, 김재인, 민음사, 1999)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프뤼네의 향연>을 읽으면(철학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플라톤의 『향연』을 다시 펼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비로소 크세노폰의 『향연』(의 가치에도)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프뤼네의 향연』과 세트로 동시에 출간된 『크산티페의 대화』(1999, 절판)도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크산티페의 대화』에는 <크산티페의 국가>, <페릭티오네의 파르메니데스>. <크산티페의 법률>까지 세 편의 대화편(철학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제목들만 보면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법률><파르메니데스>(박종현/천병희/정암학당 필진들에 의해 [원전]번역되어 있다)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크산티페의 대화』는 플라톤의 주요 대화편들에 대한 패러디로 플라톤 대화편 전편과 관련된 '소크라테스-플라톤'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어쩌면, 인간 그리고 스승 소크라테스의 미덕을 플라톤이 여러 대화편에서 설파하려 한 것을 한 권에 담아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과 『크산티페의 대화』는 저마다의 역할을 하면서 상당수 난해한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접근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되리라, 필자는 그렇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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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케의 108명이나 되는 사내들 중에 페넬로페의 마음을 흔든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을까? 오뒷세우스가 떠날 때 아들 텔레마코스는 갓 태어난 상태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돼지치기 막사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지만 여신 아테네가 개입한 덕분이다. 피를 나눈 상태는 아니라서 그런가? 귀향하여 궁궐에 와 있는 남편 오뒷세우스를 페넬로페는 알아보지 못한다. 한 나라 왕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 남편의 부재,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다. 무엇보다 집을 떠나기 전 오뒷세우스가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작년에 나온 개정판 <오뒷세이라>을 최근에 다시 읽었다. 주석을 해당 면으로 옮기는 변화만이 아니라, 날로 새롭고 다듬어지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도 읽을 때마다 새롭다. 웨스턴 영화 <셰인>과 이 서사시의 주인공 오뒷세우스의 심리를 비교해보았다. 좀 길다.(글쓴이)

 

서부 영화의 고전 <셰인>, 1890년 초여름, 태양이 내리쬐는 어느 날. 초록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와이오밍 고원에 한 사나이가 말을 타고 나타난다. 단정한 몸차림에 침착한 태도, 눈매는 온화하면서도 예리함이 번뜩이며 뜨내기 카우보이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곳에는 동부에서 이주해 온 개척민들이 살고 있다. 개간한 토지는 그들 소유로 법률이 보장했다. 수수께끼의 사나이는 개척민의 한 사람인 죠 스타레트의 집에서 물을 얻어 마시고 저녁 식사까지 초대 받는다. 사나이는 스타레트의 호의를 받아들여 하룻밤 신세를 진다.

이 사내의 이름은 셰인, 그를 살갑게 맞이한 이들은 스타레트와 아내 마리안과 아들 조이, 단출하지만 단란한 가족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지방에서 오래 전부터 목축업을 하고 있는 라이커 일당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라이커는 툭하면 개척민들을 못살게 들볶으며 이들의 모든 땅을 차지하려 한다. 스타레트가 부리던 일꾼들도 라이커의 등쌀에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린 상태다. 그러한 사정을 말한 스타레트는 셰인에게 월동준비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머물러 달라고 한다(신작 영화가 아니기에 스포일러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이 영화에 대한 디테일을 기억해야만 와 닿는 것이 있을 것이기에-필자)  
부탁을 받아들인 세인은 소재지에 물건을 사러갔다가, 라이커 일당에게 곤욕을 치르지만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스타레트의 당부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라이커 일당 때문에 소재지를 오갈 때는 단체로 움직이기로 한다. 이때 또다시 시비를 걸어오는 스타레트 일당과 싸움이 붙은 셰인은 물러서지 않고 적시적절한 스타레트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를 지켜보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죠이... 소년의 간절한 요청에 셰인은 사격시범을 보이고, 어머니 마리안도 셰인에게 점점 더 깊은 호감을 느끼는데 셰인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평화는 거기까지다. 마을 사람 하나가 라이커가 고용한 총잡이 잭 윌슨에게 사살되자, 겁을 먹은 마을 사람들은 떠나려 한다. 한 집씩 떠나면 공동체는 무너지고 모든 목장부지는 라이커의 소유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스타레트는 라이커와의 결투를 위해 집을 나서려 한다. 셰인은 이런 스타레트를 쓰러뜨리고 대신 싸우러 가는데, 죠인와 마리안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죠이는 셰인을 뒤쫓아간다. 처음으로 소재지에 총을 차고 나타난 셰인. 생사를 가르는 결투가 벌어지고 셰인의 총에 윌슨은 나자빠진다. 그리고 나머지 라이커 일당도 처치한다. 그리고 죠이 덕분에 마지막 한 녀석까지 처치하고 자신도 한 쪽 팔에 부상을 입는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그러나 그가 떠나지 말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소년 죠이. 사람을 죽인 사람은 계속 머물 수가 없다고 눈물을 흘리는 소년에게 말하는 셰인에게 셰인이 당부한다.
"어머니에게 더 이상 이 마을에 총이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라"
그리고 셰인은 떠난다. "잭은 총도 뽑지도 못했어요! 돌아와요 셰인!" 하고 소리치는 소년의 메아리를 뒤로 한 채.

 

<셰인>의 줄거리다. 소년기에 TV(주말의 명화)로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전편에 흐르는 이 영화의 주제는 셰인과 소년의 우정이다. 나아가 스타레트와 그의 아내 마리안과 아들 조이라는 한 가정과 정처 없이 떠돌던 셰인 사이의 특별한 우정이다. 그러나 셰인이 이들의 오두막을 찾은 바로 그날부터, 마리안이 셰인을 대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소년 조이는 셰인에게 기대하는 것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하고 셰인은 그런 소년의 요청을 받아주는 등 둘의 호감이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셰인과 마리안 사이의 호감은 미묘하면서도 잔잔하게 배경처럼 깔리고 있다.
보다 놀라운 사람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스타레트다. 처한 상황 때문에 셰인의 도움과 그의 머묾이 절실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필요 때문이라고만 단정하기에는 호의적인 태도로 셰인을 맞이하고 대한다. 내 가정을 지켜야 하기에 지금 라이커 일당에게 시달리고 있지만, 나도 한때는 좀 놀아본 적이 있는 총잡이였다는 것이, 라이커 일당과 결전을 위해 떠나려고 몸부림치는 그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이를 통해 이전에 스타레트가 셰인에게 가진 감정의 일단을 짚어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결투에서 죽게 되면) 아내와 아들을 지켜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앞서 스타레트를 지도자로 한 정착민들의 독립기념일 축제에서, 자신과 아내의 춤에 이어, 셰인과 자신의 아내가 춤을 추는 장면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특히, 마리안이 남편을 담장 밖으로 밀어내면서 셰인에게 춤을 요청하는 장면에서도 그저 부드럽게 바라볼 뿐이다. 셰인과 아들 조이가 가까워지는 상태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지만, 아내와 불과 얼마전까지는 이름도 존재도 몰랐던 떠돌이 총잡이 셰인은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러므로 질투가 생길 것이고, 이를 표출할 것 같기도 한데, 결코 그러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자는 것인가? 라이커 일당이 스타레트와 셰인 측을 자극하는 대사에서도 셋의 미묘한 상태를  언급한다. 영화 전편에 미묘한 '트라이앵글'이 설정되어 있다.

 

먼저 셰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오두막을 찾기까지 셰인의 삶은 한마디로 '길 위의 인생'이다. 단란한 가정을 만났다. 그 풍경 속에 한 사람이 되어 이제는 머물고 싶다. 그간 억누른 정착에 대한 욕망이 꿈틀댄다. 더구나 세 가족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보여주는 호의를 뿌리치고 싶지 않다. 마당 한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거목의 그루터기를 제거하기 위해 도끼로 이를 찍어내고 있는 장면에서 스타레트가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데, 셰인과 스타레트 둘이 힘을 합쳐 거대한 그루터기를 드러내는 시점에서 둘의 혹은 셰인과 이 가족이 맺는 협력관계는 자연스럽다. 얼마나 머물게 될지 모르지만 있는 동안만큼은 내 역할을 하자. 더구나 떠도는 삶,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누군가를 살상하는 삶에도 염증이 나 있는 상태이기에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던 참인데 참 잘된 것이다.

 

반면에 스타레트의 입장에서는, 당장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 그러나 한 발만 잘못 내딛으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부숴질지 모르는 행복이다. 이 상태를 그는 잘 안다. 법적으로야 합법이지만 공권력이 그 권리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성질 같으면 라이커 일당과 한 판 겨뤄 내가 죽든, 네가 죽든 불안정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남겨질 아내와 자식, 이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머뭇거릴 수밖에. 그러한 때에 나타난 셰인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다. 어쩌면 최악의 상태에서 가장인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줄 수도 있는 사람이다. 라이커 일당의 압력 때문에 떠나버린 기존의 일꾼들과는 다른 존재다. 셰인에게서는 그런 포스가 보인다. 

마리안의 남편, 곧 한 남자로서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당면한 상황을 냉정하게 살필 때, 만에 하나 자신이 잘못되어도 식구들은 살아야 한다. 스타레트게 셰인은 자신의 부재시를 대비한 남져질 가족들을 위한 일종의 종신보험이다. 젊은 날 자신도 셰인처럼 떠돌며 총잡이 생활을 했다. 정착하고 가정을 이루고는 있으나, 현재 셰인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점에서도 동병상련, 동지애를 느낀다. 셰인은 부재시 자신을 대신해줄 수 있는 상태에 있음을 확신하는데, 이 점을 살피는 것도 이 영화를 새롭게 해석하는데, 관건이다. 가장으로서의 갈등과 냉정한 선택, 차선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창한 도발적인 제안 처자공유제를 살펴보아야 할까? 어쨌든 집(가정)이 절실하게 그리운 한 남자와 행복하지만 그 행복을 지키느라 고단한 한 사내가 맺고 다지는 미묘한 우정이 이 영화가 간직한 함의이며, 해체를 위한 핵심키다.

이제 <오뒷세이아>를 살펴보자. 20년이 흘렀는데도 감감무소식인 남편을 기다리는 페넬로페, 참 대단하다. 한데 기나긴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오뒷세우스의 귀향도 집요함에서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부창부수다. 그래서 오랫동안 두고두고 읽히는 고전이겠지만,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 20년의 기다림은 개연성이 좀 떨어진다. 전쟁을 치렀다는 10년 세월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생사를 알 수 없는 이후 10년의 기다림은 기약이 없다. 이 정도면 전사했거나 귀향하다가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가장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밤이면 밤마다 가산을 축내는 파티를 하며 선택을 강요하는 108명의 구혼자들, 페넬로페에게는 108번뇌다.
아무리 지혜가 많은 오뒷세우스라지만 20년 만에 집을 찾으면서도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인다. 사전에 그럴만한 준비를 해놓고 떠났기 때문일까? 아들 텔레마코스의 양육을 절친인 멘토르에게 맡겼던 것처럼. [페넬로페에게나 오뒷세우스에게나 신혼 시절 맺은 맹세가 대체 무엇이었기에.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처럼 <오뒷세이아>의 또 다른 주인공은 텔레마코스이며, 소년에서 성인으로 변신하는 성장이 또 하나의 주제이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아버지를 만나고, 그런 아버지가 제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텔레마코스는 어른이 된다.]

<셰인>에서 가장인 스타레트는 가정을 지키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활 기반은 안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만 그것이 기능하다. 나 하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 그러나 내가 죽는다면... 아내와 아들이 겪을 고초가 눈에 밟힌다(<일리아스> 6권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별 장면이 떠오른다). 보통의 사내라면 아버지이자 남편인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 특히 다른 사내는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셰인에게 남겨질 가족을 부탁한다. 그것이 스타렉트가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소년 조이에게 셰인은 관객들이 웨스턴 영화에서 만나고자 하는 그런 영웅이다. 그러나 아직은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다. 라이커와 그가 고용한 쌍권총잡이 잭 월슨을 모두 물리쳤다. 이제 조이네나 인근의 개척민들은 자기들이 개간한 땅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숙원을 이룬 셰인은 왜, 왜 떠나야만 하는 것일까? 
"잭은 총도 뽑지도 못했어요! 돌아와요 셰인!"
조이의 한마디가 긴 울림으로 남아 있다. 셰인은 결코 돌아갈 수가 없다. 자칫 자신이 대신할 수도 있었던 한 가정의 행복,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확인하였기에, 그 돌아갈 수 없다.
"어머니에게 더 이상 이 마을에 총이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라."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에게 전하란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평화다. 그러나 셰인은 그 자체가 전쟁인 삶으로 복귀한다. 그러한 길 위에 다시 섰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를 쓰고 50년쯤 후에 『오뒷세이아>를 썼단다. 『일리아스』가 인간의 전쟁 이야기라면, 『오뒷세이아』는 평화와 안정을 찾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다. 오뒷세우스에게는 바다라는 막강한 적이 남아 있다. 아직 불법이 횡행하는 미국의 서부는 강한 자, 빠른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적자생존의 전장(戰場)이다. 셰인에게 서부의 사막은 오뒷세우스가 직면하여 각종 모험을 겪어야만 하는 바다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오뒷세이아』를 이끄는 힘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천병희 옮긴이 서문)이다. 정황상 다시 황야로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셰인에게, 10년이고 20년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이나 가정이 있을 리 없다(그러나 이 기억은 쉽게 떨치지 못할 것 같다).  

오뒷세우스는 아내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나우시카아를 떠난다. 그가 파이아케스 족의 나라를 떠나는(『오뒷세이아』 13권) 대목을 떠올려 보라. 물론 텍스트에서는 이러한 이별을 밋밋하게 다룰 뿐이지만, 지난 10년의 모험담이 사실은 파이아케스 족의 나라에서 오뒷세우스가 들려준 이야기라는 점. 사윗감으로서의 적합성을 심의한 심층인터뷰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런 사람이요! 이야기보따리만이 아니라 오뒷세우스도 거기 주저않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얘기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고, 이전에 만나 한때 안주했던 여인(요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끌림을 주는 인간 여인 나우시카아가 있다. 그간의 여행에 지친 오뒷세우스는 하마터면 나우시카아라는 여인을 집으로 삼을 뻔 한 것이다.

 

그는 더운 물을 보자 반가웠다./ 머릿결이 고운 칼륍소의 집을 떠난 뒤로/  보살핌을 자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때 신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받은 나우시카아가/ 지붕을 튼튼하게 떠받치는 기둥 옆으로 다가섰다가/ 눈앞의 오뒷세우스를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에게 물 흐르듯 거침없이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 고향땅에 가 계시더라도 이따금 나를/ 생각하세요. 그대에게는 누구보다 내가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나우시카아여, 고매한 알키노오스의 따님이여!/ 헤라의 크게 천둥 치시는 남편인 제우스께서는 내가 그렇게/ 고향에 돌아가서 이제 귀향의 날을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좋으련만!/ 그러면 그곳에서도 나는 신께 기도하듯 그대에게 기도하겠소,/ 언젠까지나 날마다. 그대는 나를 구해주었으니까요, 아가씨!"(『오뒷세이아』 8권 450~468행)

 

나우시카아는 담담하게 오뒷세우스를 붙잡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속마음까지 그럴 리는 없다. 헤라의 남편으로서의 제우스를 강조하는 오뒷세우스의 말 이면에 흔들림이 있다. 서사시에서 직접 언급한 두 사람, 오뒷세우스와 나우시카아의 이별 장면. 어쩌면 나우시카아를 만남으로써 한때 안정을 찾은 오뒷세우스는 그 때문에 고향, 곧 자신의 집을 간절하게 그리고 문득 그리워하며, 다시 귀향길을 이어가게 하지 않았을까?
영화 <셰인>의 마지막 장면, 소년에게서 자꾸만 멀어지는 말 위에 오른 셰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마터면 자신이 가장(家長) 역할을 할 뻔했던 마음의 집을 떠나는 그는 그는 어디선가 자신만의 홈 스위트 홈을 찾았을까? <셰인>이 어른들(만)을 위한 흔치 않은 웨스턴 영화로 평가 받는 까닭을 나름 살폈다. 잔잔하지만 머무름과 떠남 사이에 고뇌하는 오뒷세우스의 모습도 보았다.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 말'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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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2-25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셰인>과 <오뒷세이아>를 절묘하게 엮어주셨군요. 저도 그 영화를 까마득한 옛날에 아주 흥미롭게 봤었답니다. 이렇게 다시 그 영화 속 인물들을 글 속에서 만나고 보니 그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눈앞에서 다시금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그리고, 오뒷세우스의 기나긴 모험 이야기도 여전히 흥미롭게 들리고요. 나우시카아 공주와의 이별은 사실 영화로 꾸며졌더라도 `결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가슴 아린 장면`이 될 수밖에 없었겠다 싶습니다. 사실 오뒷세우스가 천신만고 끝에 그 섬에 안착해서 그녀와 함께 보낸 `꿈같은 세월`이 결코 적지 않았는데, 그 두 사람의 `석별`이 생각보다 너무 밋밋하고 짧게 마무리되는 게 이상할 정도이긴 했다는 말씀을 듣고 보니, 저로서도 마음 한켠에 그런 느낌을 가졌던 터라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 `삶`을 `연연해` 하기에 그런 걸까요?
* * *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이별했을 때처럼, 그렇게 삶과 이별해야 한다. ㅡ 연연해 하기보다는 축복하면서.
- 니체, 『선악의 저편』



timeroad 2019-02-13 09: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렇게 댓글까지 써주시니.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은 샘이라고 비유하는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글감을 줍니다. 님이 쓰신 여러 리뷰에서도 그 경지를 느낍니다. 사실 페넬로페가 집 안에서 벌인 전쟁이 더 참혹하지 않았을까,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한때 전북 남원에서 살았습니다. 시내에서도 40여 분을 가야 하는 시골에서 살았는데, 오일장을 보려면 시내까지 버스로 나가야 했습니다. 공설시장 부근에 광한루가 있는데, 사는 동안 두 번밖에 둘러보지 못하였네요. 광한루라는 건물 옆 유원지의 동북쪽에는 성춘향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묘하게도 그 건물 뒷편으로 상사화가 참 많이도 피어있었어요.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평생을 혼자 사시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사찰 같은 곳에 심는 꽃이지, 여염집에서는 심지 않는다는 꽃 말이죠. 페넬로페와 춘향의 삶을 비교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108명의 구혼자들은 오뒷세우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죠. 나중에 거치 차림을 하고 춘향의 마음을 떠보는 이몽룡은 거지로 변장하고 페넬로페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과 오버랩이 되고요. 춘향에게 러브콜을 던지 사내가 어찌 변학도뿐이었을까요? 어쨌든 페넬로페가 당면한 전쟁 같은 상황이 참혹하기에, 아우시카아와 오뒷세우스의 `사랑`이 행간을 읽어야 할 정도로 밋밋하게 처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명연설 모음 고전 필사다이어리-북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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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있다. 아끼는 내 책이다. 절판이라 더욱 그렇다. 양주군 광릉내에 있는 봉선사 주지 스님을 지내고 지금은 당신 말씀대로 '뒷방 늙은이'로 지내신다는 월운 큰스님의 수상집. 달 월(月) 구름 운(雲)을 법호로 따라 수상집 이름은  <달처럼 구름처럼>(대원사 펴냄)이다. 한때 큰스님이 매월 한 꼭지씩 글을 쓰시게 하고, 담당기자임을 빌미로 한 번이라도 더 뵙기 위해 교통 불편을 감수하며 광릉내 봉선사를 찾곤 했다. 그리고도 오랜 세월을 흘렀다.

언급한 책에「<반야심경>은 왜 독송하는가」라는 글이 있다. 서당을 떠올리면 "하늘 천 따 지..." 하듯 불경 가운데 하나이면서 그것도 너무 짧은 경전을 예불을 드릴 때, 독송하곤 하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 상당히 곤란한 주제의 글을 청탁 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답을 찾는 글이다. 좀 길지만 부분부분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야심경은 왜 독송하는가」
위의 제목으로 글을 쓰라는 청을 받고 좀 겸연쩍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반야심경을 독송해야 할 긍정적인 이유를 표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듯하여 붓을 들었다. 이 물음에 대해 똑떨어지게 대답할 수 있는 자료는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반야부경전들이나 일반 경전에 있는 말씀들에 근거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단일 경전으로서 극히 짧다는 데 있을 것이다. <기신론>에 “혹 어떤 사람은 짧은 문장에 많은 뜻이 들어있는 것을 좋아하여 그것에 의해 깨달음을 얻으려한다” 하였으니 간결한 경전을 좋아하는 근기는 언제나 있기 마련인 것이다. 요즘도 모든 모임에서 다같이 심경 1편을 독송하는 것이 거의 보편화된 데는 가장 짧은 단일경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심오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심경이 반야부에 속한 경전임은 이미 다 아는 바이지만 그 내용이 방대하여 분량이 600부에 이른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반야부의 주된 사상은 모든 사물에 집착된 상(相)을 여의고 반야 지혜를 터득하여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의 이치를 터득해야 되고, ‘공’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실상(實相)·관조(觀照)·문자(文字)의 세 가지 반야에 의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심오하고 방대한 내용이 불과 260여자의 짧은 경 속에 수록되어 있으니, 어찌 압축된 경전이 아니겠는가. 당(唐)의 규기(窺基)는 그의 저서 <반야바라밀다심경유찬>에서 모든 사물을 ‘공’으로 보고 많은 문장에서 비유를 추려내니, 그래서 심경(心經)이라 한다고 했다. ..나아가서는 대승의 심오한 이론이 모두 들어있다니 이 한 권의 경을 읽을 때 그 많은 경을 읽은 공덕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즐겨 독송한다고 본다.
셋째, 공덕의 부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경전은 참된 말씀을 전달하는 면과 공덕을 이루어주는 면의 두 기능이 있다. 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강조되는가에 따라 골경(骨經)이니 육경(肉經)이니 하는 말이 있다. 사실 특수한 경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인원들은 그 경전을 수지독송하는 데서 얻어질 공덕에 대하여 더 관심이 가는 것이다. 아니면 조건없이 믿는 데서 얻어지는 공덕에 대하여 더 관심이 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뜻을 관하면서 독송하면 그 공덕은 성불에 이르거니와 그냥 독송만 해도 복덕이 헛되지 않다고 미륵송(彌勒頌)에서는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경을 수지하는 공덕은 죽은 이에게도 미친다고 풀이하였으니 누군가 말씀하시기를 “반의 ‘공’ 사상에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으니 집착을 비우고 업장을 소멸하고 원한을 풀고 복이 늘어나고 악도가 소멸한다‘고 하였다.

다음은 스님이 소개하는 <반야 심경>의 에피소드다.
-또 현장 법사가 17년 동안 인도의 138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왔는데 그간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반야심경을 독송했기 때문이 일이 가능했다고 한다. -또 <반야심경>은 아니지만 내용이 비슷한 <금강경<을 독송하고 지옥문을 연 이야기도 있다. 당의 청허 스님은 젊어서부터 금강경을 독송했다. 그후 어느날 ...(생략) ...이렇게 해서 경전을 독송한 공덕은 이승과 저승에까지도 두루 나타난다고 하셨으니, 왜 독송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명한 것이다.  ...(생략) ... 부처님이 떠나신 지 오래인 말법에는 오품법사(五品法師)가 그 신행을 떠맡고 나가게 되었으니 5품이란, 경전의 내용이나 공덕에 대하여 믿고(1) 받아지니고(2) 읽고(3) 쓰고(4) 설법하는(5) 등 다섯 가지 일을 말한다. 즉 이 다섯가지 방법으로써만이 부처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이 독송해야 한다.

끝으로, 수행의 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여러 가지 사유에 의하여 착실히 독성하는 그 행위 자체가 공덕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망상을 재우는 수행이 된다. 그러므로 삼업을 순화시키는 한 방법으로도 독송해야 한다. -<법륜> 1987. 2.


'절판'이란 언급도(알라딘의 경우도) 없는 책이라 좀 길지만 상당 부분을 인용하였다. '독서'의 한 방법으로 오래된 '필사'가 과연 어떤 의미? 어떤 효과가 있을까? '힐링'이니 '치유'니 여러 가지를 거론할 수 있으리라. '불경'을 필사하거나(이 부분은 따로 얘기할 필요가 있다) <성경>을 봉독하는 일은 주일마다 이뤄지고 있다. <성경>을 필사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인데, 어쨌거나 '필사'를 얘기할 때 필사는 '종교적인' 일종의 '수행' 차원과 연관이 깊은 듯하다. 그래서 긴 인용을 하였다, 번역 문장의 필사라~ 조금 말설여질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공을 들여 갈고 다듬은 문장에 대한 나름의 자신감이 있어, 서양고전 번역을 필사함으로써 더 깊이 있는 독서를 하자는 제안을 책으로 펴낸 것 아니겠는가?

동국대학교, 동국역경원 가까운 어느 강의실. 언젠가 월운 큰스님이 법문하시는 가운데 농을 섞어서 하신 말씀이 있다. 정부 지원이 들쑥날쑥이라 역경 사업이 역경이다(<한글대장경> 번역사업=역경사업)이라고. "(말이 씨가 된다고) 역경(飜經)사업이라 그런지 늘 역경(逆境)이다". 그런데, 천병희-숲의 서양 고전 원번번역에는 정부 지원이란 일절 없다. 나라의 기간산업과도 같은 번역사업에 국가지원은 어느 정도일까? 오로지 독자들의 호응과 사랑이 역경을 딛고 한 발 한 한 발 내딛게 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남다른 의미다.

거두절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고 거론되는, 페리클레스의 추도사(연설문)를 포함한 명연설을 모은 텍스트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말을 잘하기 위한 하나의 훈련과정 중 하나로, 이 책을 필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자주 읽은 책이기에, 여기 선정한 연설문들이 어떤 배경에서 한 것인지,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연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수준 이하의 정치인들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그 보좌진들부터 쓰면서 읽기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국가가 이분들의 자녀를 어른이 될 때까지 국비로 부양할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이 이런 시련을 겪은 데 대한 보답으로 고인과 그 자녀들에게 국가가 바치는 상(賞)이자 영관(榮冠)입니다. 용기에 가장 큰 상을 주는 도시에는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이 책 <펠리클레스의 추도사>(아테나이인 전몰자들을 위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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