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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다루는 그의 훌륭한 개론 강좌-신Gods, 영웅Heroes, 신화Myth의 머리글자를 따서 GHM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학생들에게 큰 인기였는데, 콜먼의 태도가 직설적이고 솔직한데다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설득력이 컸기 때문이다.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스테인』(1,2권)의 주인공 실크 콜먼는 고전학자이다. 콜먼은 매사추세스 서부 버크셔에 있는 가상의 대학인 아테나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강의실로 복귀한 콜먼은 출석을 부르다 수업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학생들(나중에 흑인으로 밝혀진다)을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spooks로 지칭했다는 혐의를 받고, 그 문제를 해명하고자 맞서다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자 않고 사직해버린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아내 아이리스까지 급사한다.

 

이런 거짓된 비난의 전말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겠다며 주커먼을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커먼은 이 소설의 사회자 격인 일인칭 화자다. 주커먼은 이 작품 말고도 그의 『미국의 목가』(1997)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서도 화자로 등장하는데, 때문에 이 세 작품은 일종의 삼부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네이선 주커먼은 필립 로스의 분신처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또 하나, 그는 ‘결연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작품에 자전적인 요소를 섞어 넣기를 즐긴 작가이다. 이 점에서 그의 프로필을 살피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 하나가 시카고대학과의 인연이다. 그는 이 대학의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잠시 이 대학의 강사 생활을 했다. 시카고대학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부터 시작하는 서양의 고전 읽기를 교양교육의 기본으로 시스템에 편입시킨 특별한 대학이다. 시카고대학을 변화시킨 ‘위대한 고전 읽기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언젠가 다뤄볼 예정인데, 어쨌든 1929년 시카고대학의 5대 총장으로 부임한 로버트 허친스(당시 30세)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라, 85년 동안 8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2014년 기준) 대학교의 초석을 놓은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필립 로스가 소설  『휴먼스테인』에 설립한 가상의 아테나대학은 그의 프로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콜먼이라는 인물, 그리고 고전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수업 장면을 녹취하듯 펼쳐놓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살피는 데서 찾아보자.

 

“여러분은 유럽 문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나요?” 콜먼은 강의 첫 시간에 출석을 부르고 나서 이렇게 묻곤 했다. “바로 불화에서입니다. 유럽 문학 전체가 싸움에서 기원했죠.” 그리고는 준비해온 『일리아스』를 집어들고 처음 몇 줄을 읽어나갔다. “‘시의 여신이여, 아킬레우스의 저주를 부르는 분노를 노래하라……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위대한 용사 아킬레우스가 맨 처음 불화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난폭하고도 힘센 두 인물은 무엇을 놓고 불화하는 걸까요? 기본적으로 술집에서 사내들이 벌이는 싸움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한 여자를 놓고 다투는 것이니까요. 처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그녀의 아버지한테서 강탈해온 처녀, 전쟁 와중에 유괴된 처녀지요. ‘마아 코우리Mia kouri'. 이게 이 서사시에서 그 처녀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미아‘라는 낱말은 현대 그리스어에서도 가튼 의미를 지니는데 영어의 부정관사 ’a‘에 해당합니다. ’코우리‘ 곧 ’처녀‘라는 낱말은 서서히 변화해 현대 그리스어에서 딸이라는 뜻인 ’코리kori'가 되었습니다. 자, 아가멤논은 이 처녀를 본처 클리타임네스트라보다 더 좋아합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 처녀를 따라올 수 없다.’ 아가멤논이 말합니다. ‘이목구비나 몸매 어느 쪽을 봐도.’ 이만하면 왜 아가멤논이 이 처녀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지 분명하지 않나요? 이 처녀의 유괴를 둘러싼 정황에 분노해 흉포해진 아폴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처녀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만 아가멤논은 거부합니다. 아킬레우스가 포상으로 받은 처녀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다시 폭발할밖에요. 쉽게 격분하는 인물은 아킬레우스는 어느 작가라고 기꺼이 그려보고 싶어 할 법한, 그야말로 폭약 같이 쉽게 격발되는 거친 인물입니다. 특히 자신의 위신이나 욕구와 관련된 경우, 전쟁사에서 가장 과민한 살인기계로 변하는 인물이죠. 모두에게 칭송받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에 가해진 모욕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소외됩니다.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는 모욕, 처녀를 빼앗긴 모욕에 대한 분노의 위력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한때는 그가 영광스러운 보호자였고, 그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던 집단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다툼은 그러니까 젊은 처녀, 그리고 처녀의 싱싱한 몸과 성적 강탈에서 얻을 쾌락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좋든 나쁘든 정력가인 용사 군주가 수컷으로서의 권리와 위엄을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는 것에서 위대한 상상력이 넘쳐흐르는 유럽 문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류로, 삼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가 불화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는 것이며……”(이 책 1권 16~17면)

 

 

우리의 단군신화의 주제가 ‘홍익인간(弘益人間: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임을 떠올리면 참 다르지요. 그들이 그들의 문학의 기원을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런가보다 하면 될 것을, 긴 인용까지 해가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크 콜먼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강의 스타일을 엿보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우리말 원전번역  『일리아스』(천병희)을 읽으면, 콜먼이 언급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배경은 좀 차이가 있다. “아킬레우스가 포상으로 받은 처녀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라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조건부가 아니었다. 아가멤논의 속마음이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브뤼세이스를 취하였다.’이지 조건부는 아닌 것이다. 희랍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번역된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다루는 그의 훌륭한 개론 강의)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도 아니다. 인용은 실크 콜먼의 강의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한 ‘녹취록’ 수준의 옮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크 콜먼이 직면한, 출석을 부르다가 우연히 던진 한마디가 그의 ‘아름다운 노년’을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곧 명예의 실추와 그에 따른 분노는, 그 스스로가 아킬레우스적임을 이 작품은 초반에서 일종의 배경으로 까는 것이다. 그가 평온을 되찾는 한 여자와의 만남(71세인 그가 만난 34살의 여인, 포니아 팔리), 그 만남은 한 여자가 중간에 낀 ‘삼각 관계’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의 서막이 되기도 한다.

『일리아스』를 어떻게 해석하건, 『일리아스』는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으로, 그리고 필립 로스의 자전전인 기록과 무관하지 않게, 이 작품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급반전’까지는 아니라도, 실크 콜먼의 인생이 간직한 아이러니는 작품 후반에 드러나는데, 그리스 비극으로 치면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와 같은 면모를 또한 그는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주요한 고전 몇 편을 읽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써본 글이다. 사실 『일리아스』의 표면 주제인 트로이아 전쟁 원인 중 주요한 하나는, 헬레네를 되찾아 명예를 회복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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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 엄비

군주의 음식물을 준비한다며 날마다 새벽이면 가마를 타고

시전(市廛)으로 나갔을 길은, 시전이 있는 종로 방향인 중학동 길이 아니었을까? "

 

『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서울 도심 중학동 골목 수문동 바그다드카페에서')의 한 대목이다. 저자는 동십자각 부근 한 카페에 앉아 역사기행을 하고 있다. 조선의 왕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아관파천' 이후의 일이다. 세계 만방에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선언이었는가, 불과 한두 해 전에 겪은 일만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그 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종로통 시전으로 식료품을 사러 가는 나인들의 가마를 타고 왕세자와 함께 지금 경복궁 정동(正東) 문(門)인 건춘문을 통과해야 했다. 한 나라 왕이 자신이 주인인 궁궐을 눈속임까지 하며 탈출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사진>조선 후기 경복궁 건춘문 밖에서 신식군대(별기군)가 훈련하고 있다. 문 앞 삼청동천 위로 종친부로 건너는 돌다리가 놓여 있다. 지금은 복개되어 개천이 있었는지조차 잊혔지만 고종은 마차에 올라 이 건춘문을 통해 경복궁을 탈출하였다(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895년 10월 8일 새벽, 당시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의 왕비(민자영, 1851~1895)는 궁궐을 습격한 일본 낭인들의 칼에 무참하게 시해되었다.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을 제거해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저지른 만행이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들어옴),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에 일제가 가세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기에 앞서 지아비로서 아내 하나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괴로워할 틈도 없었다. 고종은 고정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고종 자신이 신변의 위험을 느꼈고, 그해 11월 궁의 동북문인 춘생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실패하고(춘생문 사건), 기회를 엿보던 차에 이듬해 이른 봄 재차 탈출을 시도한다.

 

이런 역사 배경을 고려하여 인용문을 천천히 읽으면, 그것이 임기응변이 아니라 사전에 기획한 각본에 따라 엄비가 가마행렬을 이끌고 같은 시각 궁과 시전을 오가기를 되풀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엄비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비로 책봉된다. 왕비는  승하한 상태이고, 그렇기에 더욱 그 역할이 커진 귀하신 몸이 손수 시장을 보러다녔다는 것을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거사를 준비하는 사전 행동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규모의 전쟁의 원인을 그것을 주도한 세력들의 입장에서 살피곤 한다. 때문에 거대한 양대 세력들 사이에 낀 군소국가의 운명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투퀴디데스의 함정'을 소개하는 『예정된 전쟁』에서 조선은 청의 속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정도로 잠시 기술될 뿐이다. 또한 외침보다 더 무서운 전쟁은 한 나라 내부의 세력간 펼쳐지는 권력쟁취를 위한 전쟁이다. 기원전 431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발견한 한 에피소드와 비교해보려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은 왜 일어났는가? 보수적인 스파르테는 과두정체를 신봉하며 강력한 중무장보병에 힘입어 그리스 본토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배했다. 진취적인 아테나이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강력한 해군력으로 에게 해의 해양제국을 건설했다. 둘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주도세력으로, 호시탐탐 그리스를 노리던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이끈 주역이었다. 두 차례, 페르시아 군의 잔류 병력(육군)을 퇴각시키기까지 세 차례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3년가량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들 두 나라만 치른 것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제국 가까이 해안가에 위치한 크고 작은 그리스 국가들부터 본토의 군소 국가들이 참여한 전쟁이기도 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재침이 두려워 보다 안전한 방어책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육상 세력 스파르테보다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제해권을 장악하던, 아테나이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델로스(해상)동맹을 이끌면서 특히, 크고 작은 해상국가들의 보호국 역할을 하게 된다. 공짜는 없다. 아테나이의 해군력에 보호를 받는 나라들은 함선이나 병력을 그 댓가로 지불했고, 나중에는 군자금(현금) 형식으로 동맹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해마다 지불했다. 이를 기반으로 아테나이의 해군력은 급속히 신장되었고 동맹국들의 안보(지킴이)만이 아니라 에게 해의 해상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한 동맹이지만 안전한 해상무역을 위해 함선(해군력)들이 필요했던 것, 이것이 황금기의 아테나이('페리클레스의 시대'라 부른다)를 일군 배경이다.

이처럼 페르시아제국과의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결성된 델로스동맹(기원전 478년)을 발판으로 아테나이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한다. 이처럼 200여 개의 도시국가 중 절반이 아테네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스파르타와 주요 동맹국들은 아테네의 번영과 과도한 팽창정책을 견제할 목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기원전 6세기 스파르타의 주도로 결성)의 결속을 강화하게 된다. 이 동맹은 기원전 500년을 기준으로 아르고스를 제외한 전 펠로폰네소스를 통합하는 도시동맹이었다. 어쨌든 그리스의 양대 진영이 맞붙은 이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전쟁사'에서 투퀴디데스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며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사 1권 23장(6)

'공포감'을 '두려움'으로 옮기기도 하고 '질투'(아테네의 번성과 스파르타의 질투가 부른 비극)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최근 들어 뜨거운 이슈로 등장한 '투퀴디데스의 함정'(혹은 '덫')이란 용어의 출처다. 불과 한 세대만에 경제력에서 군사력에서 주변 세력들에 대한 영향력에서 중국의 급부상은 미-소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세계1위 국가의 지위와 특권을 누리던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 두 세력의 긴장과 갈등을 사전에 해소하지 않으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세계 3차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제 전 인류의 노심초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는 이들 두 세력이 맞붙는 접점에 위치하고 있어, 자칫 예상되는 전쟁의 도화선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강대국들의 세력 대결에서 희생양이 되기도 했고 전장(戰場)이 되었다. 그때그때 그들의 세력 개결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지만, 어느 것도 완전하고 안전한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 불안은 지속되고 있다.
27년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촉발한 '불꽃' 역할을 했던 사건(쟁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대한 양대 세력의 틈에 낀 군소국가의 운명은 '눈에 보이는' 전쟁의 원인에 좌우되기에 하는 말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한국인의 관점은 이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에 직결되어 있지 않겠는가?

◀코린토스만과 사로니코스만 사이 코린토스지협을 중심으로, 오른편의 메가라, 아테나이 등과 왼편 아래 스파르테의 위치 등을 살펴보면, 메가라가 거대 세력 사이에 낀 국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펼쳐진 그리스와 에게 해 일대의 지도를 살핀다. 육상세력으로 육군이 우위인 스파르테가 아테나이(가 위치한 아티카)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육로를 통해야 한다. 해군력이 우위인 아테나이로서는 여차 하면 수많은 함선들을 국토로 삼을 작정으로 스파르테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테나이가 대책없이 스파르테의 육군을 견제하지 않고 수비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다. 영화 <300>1에서 보았던 유명한 전투, 300인 스파르테 전사들이 페르시아 대군들을 막아낸 고개 테르모뮐라이를 기억할 것이다. 아테나이 입장에서 스파르테의 육군을 1차로 막아낼 수 있는 그런 지형이 바로, 코린토스지협이다. 보유한 함선도 변변치 않거니와 육로로 침공해야 하는 스파르테는 코린토스 지협을 거쳐야만 아티케를 공략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은 스파르테의 오랜 동맹국인 코린토스가 영토이며, 코린토스지협과 아테네 사이에 있는 도시국가가 메가라인데, 이 나라 또한 스파르테의 오랜 동맹국이다. 부상하는 아테네에 기존 주도세력인 스파르테가 느낀 '두려움' 때문에 이 전쟁이 발생했다고 보는데, 그것은 아테나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불가피하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설 준비를 차근차근 해야 한다, 아테나이의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는 그렇게 준비한다. 그것이 이 전쟁의 도화선 중 하나인 페리클레스가 공표한 '메가라 법령'이다. 또 하나 두 세력 사이에서 전쟁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나라가 코린토스(식민시의 주도권을 두고 싸운 코린토스-케르퀴라 전쟁)다. 코린토스와 메가라는 바다를 낀 국가들이라 해상무역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고, 아테네의 해상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쯤에서 지도를 한 번 살피면, 해안선 부근에 위치한 메가라시와 아테나이의  페이라이에우스 항 사이에 그 유명한 살라미스 섬이 있다. 영화 <300>2의 배경이다. 코린토스지협을 경계로 서쪽 바다는 코린토스 만(灣)이고, 동쪽은 사로니코스 만이다. 사로니코스 만을 사이에 두고 아테나이 건너편이 아르고스인데, 이 나라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에 우호적인 세력이다. 아테나이와 아르고스 사이의 바다 사로니코스 만이야말로, 에게 해 일대의 해상(해안) 국가들과 아테나이의 무역에서 가장 활성화된 시장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432년(이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이), 아테나이(의 페리클레스는)는 메가라 법령을 발표한다. 메가라인들이 아테나이의 사원에서 불경한 언행을 저지르고, 아테네에서 도망친 노예를 숨겨준 데 대한 벌로 메가라에 가한 일종의 경제제재다. 메가라 속한 동맹과는 별도로  메가라는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해상무역권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지 않은가! 2018년의 기사 하나를 살핀다.

 

"인류 최초의 경제 제재는 실패했다. 왜 2421년 전 아테네가 메가라에 부여한 무역금수 조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을까? 아테네는 메가라 법령을 '사소한 조치'라고 여겼지만, 메가라는 '적대의 의도'로 읽었다. 압력은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생산했다. 위협이 공포를 부르자, 제재가 전쟁으로 이어졌다. 현대 외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제재도 마찬가지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재라는 수단은 얼마나 효과적일까?"
-김연철 칼럼(통일연구원 원장, 한겨레, 2018-09-02)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0301.html#csidxda67d0013b76af5ac4652ac09950c7f

 

투퀴디데스는 27년 전쟁의 불꽃 역할을 한 '눈에 보이는' 두 세력의 갈등을 세 가지로 보고 있다. 1)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해전(소극적이지만 아테나이가 케르퀴라를 지원한 점), 2)메가라 법령 공포, 그리고 3)'학살'로 표현되는 아테나이의 멜로스섬 침공이다. 이것들은 두 세력이 30년 평화조약을 깬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평화가 얼마나 불안했는가를 가늠하게 하는데, 특히, 메가라에 대한 경제 제재는 스파르테의 역린을 건드린 결정적인 사건이다. 실제 전쟁 발발을 대비한 아테나이의 포석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인류 최초의 경제 제재라는 점에 유의하자. 공성전에서 성을 포위하는 것도 식량을 비롯한 생활재 유통을 막는 경제 제재이기는 하지만, 한 나라의 경제권을 제약하는 현재에도 유용한 그런 조치이기 때문이다. 장사로 먹고사는 메가라 사람에게 아테네와 인근 항구 출입을 못 하게 했으니 '벌'의 효과는 전쟁만큼이나 쏠쏠하다. 메가라의 동맹국인 스파르타는 아테나이에 법령 철회 요구하지만 아테나이가 거부함으로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파르테의 정치 체제는 정확히 과두정과 왕정을 혼합한 형태였다. 그러나 아테나이는 민주정으로 가령, 페리클레스가 유능하고 인정받는 정치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회를 설득하지 않고서는 어떤 결정도 자의적으로 내릴 수가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쟁과 같은 중대사의 결정에서 스파르테의 왕도 중지를 모아야 하는 설득전을 펼쳐야만 했다.

『예정된 전쟁』의 저자는, '전쟁사'에서 전쟁을 결정하기까지 두 세력 내부에서의 갑론을박을 소개한 것에 근거해, 두 지도자(페리클레스와 스파르테의 왕 아르키다모스는 친분이 두처운 관계였다)의 혜안에 따른다면 전쟁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 진단한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중대사는 양국 정부 내 각 분파들의 대립과 협상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는 얘기다. 페리클레스의 경우 민회의 실력자였지만 정치인 중 한 명이었고, 설득(정치연설) 여부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었으며, 당시 아테네의 법률시스템은 독재를 막기 위한 도편추방제가 살아 있었다. 스파르테의 경우,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동맹국들(각 1표를 가진), 특히 코린토스·메가라 등이 동맹회의에서 결사적으로 개전(開戰)하기를 압박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메가라만이 아니라, 두 동맹에 속한 나라들은, 그들이 속한 동맹의 맹주국이 전세에서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따라 정체(스파르테의 과두정과 아테나이의 민주정)를 둘러싼 내전에 휘말린다. 스파르테는 자신들의 강점(육군력)을 이용해 수시로 아티카에 침공하여 아테나이를 압박하고, 아테나이의 경우 자신들이 승기를 잡았을 때는 특히, 코린토스지협의 스파르테 동맹국을 침공하여 괴롭힌다. 특히 아테나이는 코린토스지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메가라를 수시로 침공한다. 함선을 동원해서 가볍게 침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아테나이로서는 힘든 전투가 아닌 것이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에피소드를 살필 차례다. 전쟁 7년차 아테나이는 스파르테 인근의 퓔로스에 거점을 마련하고 이를 회복하려는 스파르테와 싸워 승리한다. 스파르테인들은 평화조약과 동맹조약을 맺자고 제의하지만 거절당하다고, 스파르테 군사들은 끝내 항복하고 아테나이로 끌려가서 구금된다. 전쟁 8년차 아테나이는 시켈리아의 헬라스인 이주민들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함으로써, 중요한 현안을 해결한다. 바로 이즈음, 메가라에 내전이 발생한다. 이 전쟁에서 아테나이가 주도권을 잡자, 메가라 내부의 친아테나이파가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아테나이 군을 불러들이는 것. 잠시 전쟁 8년차 여름의 '전쟁사'를 인용한다.

"같은 해 여름 메가라 시내의 메가라인들은 양면으로 압박을 받았으니, 전쟁에서는 전군을 동원해 매년 두 번씩 영토를 침범하는 아테나이인들에게 시달리는가 하면, 내전 중에 민중파에게 쫓겨난 뒤 페가이를 거점 삼아 약탈 행위를 일삼는 자신들의 망명파에게도 시달렸다. 그래서 메가라인들은 망명파를 다시 받아들이고 협공으로 도시가 망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제안을 자기들까지 논의하기 시작했다."-'전쟁사' 4권, 66(1)

급기야 민중파 지도자들은 1)민중들의 지지기반이 굳건하지 않고 2) 망명파의 위협이라는 '상수'를 해결할 수 없다, 고 판단, 아테나이에 나라를 넘기기로 결정하고, 아테나이 장군들과 접촉하여 아테나이군이 그들의 성을 제압하도록 협조한다. 메가라인들은 민주정(민중파, 친아테나이)과 과두정(친 스파르테)파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고, 여기에 두 세력의 원군이 파견되어, 두 세력은 그들의 교두보를 놓고 치열한 전쟁이 벌이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전쟁사'를 참조하시고) 이 내란 초기의 에피소드 하나를 인용한다.

 

"(3)날이 새려 했을 때, 이 메가라인 반역자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했다. 그들은 성문을 열어두기 위해 얼마 전부터 밤에 수비대장의 허가를 받고 약탈하러 간다는 핑계로 조정 경기용 보트 한 척을 사륜거에 싣고 해자를 건너 바닷가로 나가 출항했다가, 날이 새기 전에 보트를 사륜거에 싣고 성문을 지나 성벽 안으로 들여오곤 했는데, 새벽에 항구에는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을 테니 미노아 섬을 봉쇄한 아테나이인들이 어리둥절해할 것이라고 했다. (4)그래서 이번에도 사륜거는 어느새 성문에 도착했고, 성문은 여느 때처럼 보트가 들어가도록 열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아테나이인들이 각본대로 매복처에서 뛰쳐나와 문이 도로 닫히기 전 사륜거가 문틈에 끼여서 문이 닫히는 것을 방해하는 사이 문에 도달하려고 재빠르게 달려갔다. 동시에 메가라인 반역자들이 문간에서 보초들을 죽이기 시작했다."-'전쟁사' 4권, 67(3~4)

 

'메가라인 반역자'란 아테나이에 나라를 넘기려는 민중파 일부(친아테나이파)를 말한다. 정황상 민중파가 득세한 상황이라도 나라를 넘길 정도(민중파 대부분이 친아테나이파는 아니라는)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메가라인들로서는 당파를 떠나 아테나이도 스파르테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전투는 스파르테의 승리로 끝나고 메가라의 과두정은 오래 지속된다. 이제 타임머신에 올라, 1896년 2월 11일 우리나라, 일명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그날로 가보자.

 

아관파천은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지금의 덕수궁 대한문 왼편에서 시작되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옛 러시아공사관에 이른다. 이곳까지 당시 조선의 왕이 궁궐(경복궁)을 장악한 칭일파의 위협에서 피란한 사건이다. 고종은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을 통해 궁을 벗어났다. 그곳이 어디든  왕이 머무는 곳(행재소)이 수도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함으로써, 러시아공사관은 요즘의 청와대 대톨령 집무실이 된 셈이다.『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김란기 지음, 발언미디어, 2017년 12월)에서 필자는 고종을 태운 가마의 이동경로를 추적한다. 고종은 왜 떠나야만 했으며(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의 살해, 일명 '을미사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얘기를 읽는 동안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 아관파천 두 달 전에도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일명 '춘생문 사건'이다.

"춘생문사건(春生門 事件)은 1895년 11월, 한성부에서 발생한 친러파-친미파-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고종을 친미파 및 친러파, 개화파가 계파를 초월하여 협력, 왕궁 밖으로 탈출시키고자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위키백과

◀1800년대 후반이나 1900년대 초반 서울 사진으로 추정. 1926년 경복궁의 정면을 가로막고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궁궐 벽을 끼고 서 있는 건물이 건춘문이다. 사진 오른쪽 중앙쯤이 종로통일 것이다.

 

춘생문은 경복궁의 동북쪽에 있는 문(門)이다. 건춘문은 경복궁의 정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지금 동십자각에서 북쪽으로, 북촌한옥마을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있는 경복궁의 동쪽 정문이다. 그런데, 이 건춘문은 궁궐의 나인들이 군주의 식탁을 차리기 위해 시장을 보러 오가던(최단거리), 곧 종로 시전을 오가는 관문이었다. 아관파천 때에 고종이 건춘문을 통과했다는 기록은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고종이 건춘문을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교의 『대한계년사』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아관파천 때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종과 세자를 태운 가마는 건춘문을 나온 후 어떤 경로로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했을까?" -앞의 책

그런데, 고종의 아관파천을 주도한 인물은 엄비(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로 보인다. 필자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인데, D-day를 정한 이후에 엄비가 몸소 종로의 시전으로 쇼핑을 핑계로 오가지 않았을까, 추정하는데, 필자는 거기에 공감하면서도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의 군주가...

"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엄비(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가 군주의 음식물을 준비한다며 날마다 새벽이면 가마를 타고 시전(市廛)으로 나갔을 길은 시전이 있는 종로 방향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앞의 책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엄비가 손수 장을 보러 종로의 시전을 오가는 퍼포먼스를 했고, 고종을 모신 가마가 그런 일상적인 행차로 가장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친일파의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메가라시의 관문과 경복궁의 건춘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서 벌인 두 사건을 비교하자니, 마음이 씁쓸하다. 이 간단한 비교를 하려고 얘기가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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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3-1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에 지도를 봤어요.˝라는 영화 <접속>의 명대사를 조금 바꾸어, 제목을 정했다. 지도의 지도 없이 ‘전쟁사‘ 읽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_필자
 

『메넥세노스』, 플라톤의 저작 중 위작 논란이 있는 대표적인 대화편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플라톤의 대화편의 우리말 원전번역은 크게 세 흐름― 박종현 교수(서광사), 정암학당 연구원들(이제이북스), 천병희 선생(숲)―으로 진행되고 있다. 천병희 선생의 경우 어떻게 번역가 한 사람이 플라톤의 주요한 대화편들을 연이어 번역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속도감 있게 작업했다. 그 배경이 되는 당대의 전후한 주요 고전들을 번역했기게 가능했으니라. 다른 두 그룹은 철학 전공인 까닭에 해설과 역주에 노고를 보내야 하는 것과도 상관이 있으리라. 어쨌든 천 선생은 거의 대부분의 플라톤 대화편들을 번역하면서도 <메넥세노스>는 번역하지 않았다. 이런 선택은 위작 논란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일까? 궁금증 가운데 하나였다. 반면 다른 두 '그룹'은 최근에(2018년 12월) 박종현의 역주 <메넥세노스>가 추가됨으로써 (이제이북스 이정호의 번역은 2008년 출간) <메넥세노스>가 위작논란에서 벗어나 있음을 느끼게 한다. (물론 위작 논란 중인 작품이라도 번역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메넥세노스>는 소크라테스의 연설문(추도사)을 다룬 대화편이다. 연설문을 메인으로 전후에 대화편들이 으레 그렇듯이 대담자(참가자)와의 농담 섞인 편안한 대화가 펼쳐지지만, 연설은 무한정 길어질 수도 없고, 정해진 시간에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그 분량이 짧다. 때문에 번역은 하되 한 권의 책(단행본이라고 하면 흔히 요구되는 볼륨)으로 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정호의 번역은 정암학당 플라톤전집 시리즈가 그렇듯이 연구논문이라고 할 적잖은 분량의 작품해설을 앞세우고, 디테일한 후주가 대미를 장식하며, 그 중간에 본문(텍스트)을 배치하는 형식이다. 해서 <메넥세노스>만으로 한 권의 책을 낼 수 있었다. 물론 부록에는 이 대화편과 연관되어 있는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된 유명한 연설, '페리클레스가 전몰자를 위한 장례식에서 한 추도연설' 전문과 해설이 실려 있다. 아직 박종현의 역주(『고르기아스/메넥세노스/이온』(서광사, 2018년 12월)는 읽지 못한 상태이고, 좀 늦었지만 이정호의 번역은 읽은 상태이다. 두 버전의 번역을 읽어보아야 <메넥세노스>의 본문(텍스트)에 대한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박종현의 신간은 앞서 간행된 천병희의 (『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숲), 『이온.크라튈』(숲)와 더불어, 독자들의 선택 폭을 넓히며 풍요로운 독서가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메넥세노스에서 소크라테스가 행한 연설이 (이하 '소크라테스의 추도연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된 '전몰자들를 위한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과 어떤 식이건 비교되면서 '대립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크라테스-플라톤(플라톤이 대화편들에 소크라테스를 내세움으로써, 실제 소크라테스의 말인지 구분할 수 없기에 그 자체가 '문제'로 끊임없는 논쟁거리이다. 이런 복합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한다)이 이 대화편의 필자가 분명한가 하는, 곧 위작논란과 관련해서 진위를 가리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 결정적인 근거(진품임을 확신하는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넥세노스>는 후학들의 흥미로운 논제(論題)이자 관련된 논문(論文)과 토론의 논재(論材_조합이다)로 텍스트 자체와 집필 배경들이 사용되었고,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논란에 숟가락 하나 더 얹고 싶은 마음도 그럴 ‘내공’도 없다. 그럼에도 대표적인 소재들을 중심으로 관련 근거들을 대강이나마 살피는 일이 숙제처럼 다가온다. 문제를 해결이 아니라, 스스로 숙제를 내는 일에 머물게 될지라도.

 

플라톤의 대화편들 대부분은 '소크라테스-플라톤'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이 대화편은 존재 자체에서부터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분리해서 살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곧 플라톤이 비극시인이라면 그의 비극 무대에는 소크라테스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대화편 제목에 이 주연급 배우가 등장하는 것은 단 한 편, <소크라테스의 변론>뿐이다. 그것도 다른 대화편들처럼 그냥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그러므로 여느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있듯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도 그러한가, 난데없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세히 살피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사실 상당수 ‘변론’을 거론하는 글들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다만, 대놓고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 뿐(그런 논문이 왜 없겠는가).  실제로 플라톤은 상당수의 대화편(구성 형식)에서 '인간적인' 소크라테스를 내세우기 위해 애를 쓴 흔적들이 보인다. 그런데 어딘지 어색하고 '작위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의 도입부처럼, "그렇게 오래오래 잘 살았단다."로 대미를 장식하는 것처럼. 그렇고 그런 설정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줄 알고 본론에서 발언하는 소크라테스의 '입'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며, 그러라고 하는 듯하다. 

 

무엇이 A인가, A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때에, 무엇이 A가 아닌가, A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 더 쉽다면, 그렇게 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A가 '인간'이라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통해 그들이 창안한 특유의 방식으로 진행하는 대화를 통해 숱한 발견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인용할 때 쓰는 통례적인 방식을 따른 것이다. 오늘날 의미에서 A를 '철학자'로 대입하자. '철학자(A)'를 정의하기 위해, 무엇(어떤 것)이 철학자가 아닌가(~A) 그 사례를 자주 드는데, 동네북처럼 소환되는 ~A가 수사학자이다. 그리고 수사학을 기술의 일종인 '수사술'로 취급하는 등 이 분야에 대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태도는 늘 시종일관 근엄하다. 어떤 대화편은 '수사술'의 한계를 입증하는데 거의 전부를 할애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대화편에서는 '수사학'을 조금은 유연하게 '인정'하기도 한다. 전자가 <고르기아스>라면 후자는 <파이드로스>라고 할 수 있으려나.

이것은 철학자(라고 하자) 혹은 철학(이라고 하자)이라고 그 범주(範疇: 동일한 성질을 가진 부류나 범위)를 획정(劃定: 어떤 범위나 경계 따위를 명확히 구별하여 정함)하는데 수사학과 수사학자의 존재가 늘 걸림돌이 되어서였을까? 철학자와 수사학자, 철학과 수사학의 경계가 모호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는 때로는 목숨, 나아가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우려되고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희생양'이 소크라테스인 것이다. 

'수사술'에 능할 뿐만 아니라(오늘날의 성공한 연설가≒말도 잘하는 정치가라고 하자), 그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들, 그것을 배우려는 젊은 수강생들이 많아 나름의 교육시장(사교육)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을 이끄는 선생님들을 '소피스트'라고 불렀다. 아테나이 시민들이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 가운데 대표주자일 뿐더러, 제일 ‘잘나가는’ 소피스트였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중 하나인) '소피스트 혐의'로 기소된다. 때문에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변론’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입증한다. 그렇게 나는 (시민들이 생각하는) 소피스트가 아님을 변호한다. ‘변론’을 읽어보면 그런 대목들이 적지 않아 일일이 인용하기가 벅찰 정도다. 어쩌면 이를 입증하기 위해 신탁을 끌어들이는데, 그러다가 문득 또 하나의 기소 이유(아테나이인들의 신을 섬기지 않았다는)까지도 변론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양수겸장 (兩手兼將)의 변론을 펼친 셈이다.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소피스트 협의야 말로 그를 죽음으로 이끈 진짜 이유로 보인다. 젊은이들을 선동했다고? 나는 결코 그들로부터 (금전 혹은 물적인) 대가를 받지 않았어, 강조할수록 배심원들은 ‘그렇다면 왜, 무엇으로’ 촉망받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느냐, 더욱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테나이 시민들의 고정관념은 그렇게 견고했고, 플라톤-소크라테스는 절망하였지만, 바로 그런 상태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은 열망이 있고, 그것을 실행하며 살았으므로 그런 이유로 기소되는, 딜레마에 (적어도 그의 육신은) 사로잡힌 것이다.

 

플라톤은 그 법정에서 스승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 전언(傳言)에 의존했다는 ‘설정’가 필요 없는, ‘필요해서도 안 되는’ 유일한 대화편이다. 대화가 아닌 형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종일관 소크라테스의 말씀으로 일관한다. ‘배심원 여러분 좀 조용히..’, 변론 중 한마디를 통해, 배심원들의 반응을 엿볼 뿐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여느 ‘수사술’에 능한 그들처럼(소피스트) 변론하지 않았기에, 배심원들은 낯설고 우리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본 것 같다. 다름은 때론 무서운 결과를 부른다. ‘다름’이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는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다르지 않음’을 역설하는 동안 ‘다름’을 변론한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에 따르면(‘변론’), 소크라테스-플라톤 문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행한 변론이라는데, 어느덧 엄혹한 세월은 갔고, 변론은 '작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인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한 방법으로 크세노폰을 잠시 소환한다. 그가 스승을 나름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소크라테스 회상록>에는 (한 반에 명예와 권력과 부를 획득하는) 현실정치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전공필수’과목으로 수사학을 꼽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친형(글라우콘)이 그런 정치 현장에 투신하려는 것을 말리고(3권 6장), 플라톤의 외삼촌(카르메데스)는 정치가로 나서라고 떠밀기도 한다(3권 7장). 크세노폰의 저작은 요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노량진 학원가를 찾아야 하듯(신림동 고시촌의 요즘 풍경은 잘 모르겠다), 그런 아테나이 젊은이들의 취업현장을 스케치한다. 당시 법정에 있지 않았고 사형수에게는 오래 수감돠었지만 면회할 수도, 스승의 최후를 지켜볼 수도 없었다. 때문에 전언(傳言)에 따라, 당시의 스승을, 그가 아는 당신을 '회상하였을 뿐인데, 거기에 문득 소크라테스의 초상화 한 점이 걸려 있다. 무엇 때문일까?
『메넥세노스』와 『수사학』,  『메넥세노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관련하여, 시작한 작업을 마무리하는 데는 박종현의 <메넥세노스>까지 살펴야할 것 같다. <메넥세노스>는 작품 안팎의 배경들, 작품 안에도 수수께끼가 산재하여 신중함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투퀴디데스, 로마의 키케로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저작뿐만 아니라, 전기들도 감안해야 한다. 플라톤에게 수사학(수사술)은 스승을 죽음으로 이끈 것으로 평생 동안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크세노폰은 정치에 입문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플라톤의 친척들 얘기까지 거침없이 다룬다. 플라톤 자신이 정치지망생이었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수사학』을 저술 가운데 하나로 추가하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은 깊었으리라(물론 그 자신의 생전에 출간되지는 않았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들은 필사본만 돌아다니다가 기원전 1세기 뤼케이온 학원의 원장이던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로마에서 출간되었다.) 잠시 숨고르기를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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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은 이동순 시인의 시집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가짜 뉴스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너무나 그럴 듯해서 속는 경우도 있고, 특히, 유투브라는 플랫폼을 타는 상당수 ‘●●●TV’들의 범람과 활동이 이런 어지러운 질주에 속도를 더하고 있다. 비단 유투브만이 아니고 인터넷 환경에는 이미 빅데이터를 활용한 맞춤형 서비스가 일상이 되었다. 특정 네티즌의 관심사가 반영된 검색 환경이 제공되는 것이다. 각종 인터넷쇼핑몰은 말할 것도 없다. 해당 영상을 올린 매체(게시자)를 ‘구독’하지 않아도 한두 차례 본 영상들에 대한 흔적(기록)이 저장되고 분류되어 그것과 관련된 영상들이 첫 화면에 ‘메인’으로 노출되어 유사한 주제의 관련 영상들을 자주 보게 되는 ‘쏠림’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흐르면 단편적인 앎에 머물지 않고 교양의 ‘깊이’를 더하는 데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될 것이나, 악성 루머가 휘발성이 더 강하듯이, 정보의 진위도 문제지만 그러한 정보의 쏠림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고,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악을 잉태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아는 것이 힘이다.’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이 남긴 말이다. 그는 영국 경험론이라고 부르는 유파의 시조가 된 사람이다. 베이컨은 연역, 즉 일반화된 법칙에서 개별의 결론을 추론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오히려 오류를 야기하기 쉽고, 올바른 지식은 항상 실험과 관찰이라는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해서 생기는 오류, 베이컨은 경계해야 할 네 가지 유형의 ‘우상’을 제시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동굴의 우상(개인 경험에 의한 우성)은, 각 개인의 고유하고 특수한 본성이나 자신이 받은 교육과 타인과의 교류에 의해서 생기는 우상을 동굴의 우상이라고 명명했다. 자신이 받은 교육과 경험이라는 편협한 범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단정해버리는 오류로 한마디로 ‘독선’이다. 다음은 시장의 우상(전문轉聞의 의한 우상)이다. 언어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생기는 우상,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다. ‘전해들은 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현혹되는 것. 한마디로 거짓말인데, 오늘날 ‘가짜뉴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미리 ‘경계’한 듯하다. 극장의 우상(권위에 의한 우상)은 저명한 이의 주장 등 권위와 전통을 아무런 비판 없이 믿는 데서 생겨난 ‘편견‘을 뜻한다. TV나 신문에 등장하는 전문가의 주장은 무조건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인데, 오늘날은 이러한 ’미디어의 우상‘에서 특히 자유롭지 않다. 또 하나, 종족의 우상(자연 성질에 대한 우상)은 인간이란 종족이 가진 한계성 때문에 ‘착각’하는 것으로, 앞선 네 가지 우상들에 우선하기도 하고, 이 때문에 이러한 우상들에서 쉽게 빠져들고 쉽게 헤치고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이상은 최근에 발간된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라는 책의 40번째 ‘도구’, <오해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우상> 편을 요약하면서 필자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일본 저자인 야마구치 슈(지은이)의 저작을 번역한 책(김윤경 옮김, 다산초당(다산북스), 2019. 01.)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이 18년 동안 유배지에 머물며 집필한 책들 상당수가 제자들과 협업한 ‘편저’이고 보면, 그 정신을 계승한다는 면에서 이 출판사(다산초당)의 정체성에도 맞는다고 해야 할까? 넓게 두루 살피면서 핵심을 뽑아내는 것도 그렇고, ‘실시간’의 세계를 읽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책이다.

특히, 오래전에 읽고서 잊고서 지내던 철학자의 세계를 상기(想起)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내게는 베이컨의 제시한 ‘우상’에 관한 기억이 그랬다. 그리고 앞서 정리한 대목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가짜뉴스’가 극성을 부르는 최근 상황에 대한 ‘경계(警戒)’가 맞춤한 것처럼 정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앞서 거론하였거니와 특히, 유투브 시청의 쏠림 현상 때문에 시청자들은 우물 안에 갇혀(동굴의 우상),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폐해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전 대통령 전두환 씨가 광주광역시의 법원까지 ‘강제구인’되어 재판정에 섰거니와, 진상규명과 인정 ‘투쟁’을 거쳐 이미 국립묘지까지 조성되어 안장된 5.18 희생자와 유족들을 모욕하는 세력들의 ‘준동’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때다.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 어쨌든 가짜뉴스와 유투브의 시청시의 편향성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더욱'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싶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이동순 시인이 있다. 이 시인의 제5시집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된 해는 1992년 봄이었다.(알라딘에 ‘품절’로 분류된다) 앞서의 현상들을  ‘이것 참 문젤세’하며 지켜보면서 떠올린 시집이다. 이 시집의 표제시가 동명의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이다. 시집들이 모인 서가에서 오랜 만에 이 시집을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와, 검색을 통해 모처럼 시를 읽었다.(인용한 시에 오탈자가 있다면 책을 찾은 다음에 수정할 계획이다)  

“저 풀꽃들은/ 어디서 아침을 맞지/ 어떤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지// 밤비에 젖어/ 글썽이는 속눈썹으로/ 그들은 함초롬히 실눈도 떠볼 거야// 사랑아 어둠 속에서/ 깊이 뿌리를 박고 선 풀꽃의 아침처럼/ 흩어질 듯 맺혀 있는 내 사랑아// 마음이 아픈 풀꽃은/ 어떤 표정을 짓지/ 궂은 비 나리는 가을 저녁// 풀꽃의 아랫도리가/ 서늘하게 젖어올 때면/ 저절로 알게 될꺼야// 풀꽃 언저리에/ 송글송글 맺혀 동그마니/ 작은 어깨를 떨고 있는 이술방울// 두 볼이 서서히/ 다갈색으로 물들어가는/ 저 가을 들판의 수줍음을//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시 전문. 

 

이제 이 시를 읽으려면 도서관에 가거나 이동순 시선집 『숲의 정신』(산지니, 2010)을 구매해야 할 것 같다. 시의 내용과 제목을 연결 짓기가 좀 낯설다고 할까,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이고, 설명이 간단치 않으며 길어질 것이다. 때문에 이 시집이 출간되었을 때 한 신문의 ‘출간단신’으로 대체할까 한다. 단지 이 한 편의 시만이 아니라 이 시집에 수록된 상당수의 시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표제시로 압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동순 시집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 "이제 세상은 어느 틈에 `어리석은 지혜자'의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한탄하는 이시인은 삶의 가난함, 고통으로 얼룩진 민족의 역사, 그러한 것들이 뒤엉켜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정황을 담백하게, 그러나 읽는 이의 가슴에 쓸쓸함이 깃들게 하는 어조로 노래한다.”

사법농단으로 마음을 놓고 재판을 받을 수 있나, 의구심이 커지는 요즈음 주목하는 책 한 권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다. <수사학>은 『정치학』과 뗄 수 없는 관계일 뿐 아니라 『시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저자는 수사학에서 이미 언급한 부분들이 있어 <시학>을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을 (원전)번역한 천병희의 『수사학/시학』을 제1원전번역(텍스트)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안보-군사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전략가들에게 국내외를 막론하고 오래된 전쟁 교과서 역할을 하듯이, <수사학>은 정치인(연설), 법조인, 그리고 작가에게 필독 교과서 중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변론을 하거나(변호사) 기소장을 쓰거나(검사) 판결문을 내는데(판사), <수사학>은 참으로 쓸모가 많은 책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연설문을 작성하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함으로써 ‘그런 것으로 여기게’ 하는데 노하우를 집대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던가! 기왕 가짜뉴스로 대중들의 마음을 현혹하는 일을 일처럼 일로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정독하여 노하우를 습득하시기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를 때라고 하지 않는가, 완벽에 가까운 거짓말은 작품이 되어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니까. KBS1의 <저널리즘 토크쇼J>를 꾸준히 보는데, 가짜뉴스를 비롯하여 특정 언론들의 무소불위의 횡포를 견제하는 몇몇 착한 콘텐츠들이 언론인의 자정과 자성의 메시지를 생산하고 있어 다행이다. 이런 프로그램의 애시청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힉>을 꼭 챙겨 읽기를 바란다. 보다 깊이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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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에서 다룬 그 전쟁이 발발한 진짜 원인은 따로 있어요, 그는 속삭이듯 그러나 세 차례나 강조한다(이 글에는 인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쐐기를 박는다.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에 따라 현대의 사가들에게도 역사기술의 모범을 제시한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의견'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 22장 3절.  그의 예감은 이후 역사, 특히 전쟁의 역사에서 예언이 되었고 적중했다. 인류의 전쟁은 갈수록 첨단무기에 의존하지만, 끝내 핵을 사용하여 공멸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전쟁이 없는 인간의 역사는 없다. 해서 전쟁은 무역전쟁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회적인 전쟁인 것 같지만 전쟁은 자금없이 행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피를 흘리지 않을 뿐이지 예나 지금이나 경제력의 대결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삶은 전쟁이라, 일상의 인간이 마주한 삶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투퀴디데스의 '역사'는 지금도 작동한다.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가 환기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새로운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패권 국가가 두려움을 느끼고 무력을 통해 두려움을 해소하려 하면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 그러나 간단치 않은 개념이다. 

 

FT는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s trap)을 2018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FT는 파이낸셜타임스로 영국의 경제 전문지다. 2019년에도 올해의 단어가 될 수 있을까, 전망은 그럴 것 같다. (오늘은 베트남 하노이 제2차 북미정삼회담 첫째날, 두 정상들은 지금 회담 첫날 일정인 만찬을 하고 있다.) 2018년의 미중무역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어 특히 주목을 받은 이론이다. 이러한 흐름과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가 묘하게 맞물렸다. 제1차 북미정상회담(싱가폴),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오랜 기다림 끝에 '실시간으로' 진행중이다. 이 정상회담이 열리는 곳이 왜 하필 베트남(하노이)일까? 패전국의 대통령이 그 현장에서 승리라고는 할 수 없는 전쟁의 또 다른 상대, '불편하기 짝이 없는' 나라의 정상을 만나고 있다. 북한과 베트남. 제2차 세계대전(특히 태평양전쟁)의 승전국 미국이 아시아 변방의 그렇고 그런 나라쯤으로 여기고 참전했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본 전쟁의 상대국이다. 두 차례 연이어 패배한 전쟁, 아픈 손가락이다.

 

한국전쟁이야 객관적으로 시작 전의 균형(대립) 상태로 돌아간 것이니 '비긴' 전쟁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16개국이나 참전한 UN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면서도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국으로서는 '실패한' 전쟁이다. 실제로 미국은 오래된 전쟁의 종지부를 찍느니 마느니 평화선언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의 결과를 두고 미국은  전승기념행사를 단 한 차례도 연 적이 없다고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그때그때 곳곳에서 격돌한 세력들이 저마다 승리했다면서 승전비를 세우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한반도에 평화의 이정표를 찍는다면, 이야말로 그들의 전승기념행사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의 평화를 운운하면서 그리는 밑그림은 우리의 바람과는 다른 것 같다. 그간 오랜 세월 동안 '한미동맹'을 굳건히 유지해 온 까닭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태평양에서의 제해권(制海權)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며, G2 운운하며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또한 미국이 원망(怨望) 관계인 베트남을 안고 가는 것도(2차 북미회담 장소가 그곳인 것도) 중국 견제의 일환이라고 읽는 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작년 이맘때 특별한 번역서 한 권이  '조용히' 발간되었다. 『예정된 전쟁』(세종서적, 2018.1.31.)이다. 부제에서 언급하는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이 국제 정치판에서 전문가들의 입에서, 그것을 다룬 언론에 회자되먼서 주목받기 시작한 책이다.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이란 용어를 만든 그레이엄 앨리슨의 저작이다. 원제는 <Destined for War: Can America and China Escape Thucydides’s Trap?>인데, 한글판 부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이다. 원서의 부제를 직역하면 "어떻게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혹은 '미·중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방법' 쯤으로 정리할 수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한반도의 평화무드가 조성되면서 번역서의 부제에 '한반도의 운명'이 추가된 것이다.
앞서 그런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비핵화 프로세스는 2018년 1월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로부터 촉발되었다.『예정된 전쟁』은 신탁이라도 받은 듯 기다렸다는 듯이 출간되었다. 예정된 전쟁처럼 '준비된 출판'이었다. 해외의 저자와 출판계약을 하고, 번역자를 섭외하고 번역하고 그 원고를 받은 이후 한 권의 책을 펴내기까지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이 있다. 이를 감안할 때, 김 위원장의 신년사를 대단한 변화의 조짐으로 보고, 실제로는 2018평창동계올림픽(2018.2.9~25.)을 전후한 시점에야 한반도의 평화가 무르익었음을 감안하면 이 책의 출간 시점은 미묘하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영문판 원저는 2017년 5월(5.30.)에 출간되었다. 원전이 출간된 이후 우리말 번역본 출간까지 8개월이 소요되었다. 원서와 번역서가 동시출간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다룬 책은 아니었다. 어쨌든 저작권이 있는 책의 번역출판에 주어진 8개월은 결코 넉넉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번역의 아쉬움을 지적하는 소리가 들린다. 출간 일정을 너무 서두른 결과인 듯히다. 세계 유수의 지도자들, 유명인들의 찬사가 추천사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 번역본이 출간된 2018년 한 해, 국내외 언론은 '투키디데스 함정'을 인용한 기사를 마구 쏟아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와 맞물리고 매스컴의 요란한‘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판매량은 그에 비례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전적으로 추정이다). '예정된 전쟁'은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개정판을 낸다면, 저자와 협의하여 ‘투키디데스 함정’을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새로운 언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깊이 읽는 가운데 탄생했다. 오래된 새로움이다. 그런 발견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발견이려면 대중(독자)들의 독서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건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당사자 중 하나인 우리(국민 독자들은)는 과연 '투키디데스 함정'을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정된 전쟁'에 대한 국내에서 반응이 시들하다면 그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숙독한 독자들이 그리 많지 않음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작년과 올해 '전쟁사'의 판매 부수에는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개략적인 내용을 숙지하는 딱 그 지점에서 생각도 행동도 멈춘 것은 아닐까? 원전 텍스트를 제대로 읽은 독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현상은 그런 짐작을 하게 한다. 사실, 전자책을 포함하여 종이책 읽는 독자층이 줄어든 시대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인은 늘 보다 근본적인 데에 있다. 이러다가 대학입시나 입사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는 시사용어쯤 하나로 '투키디데스 함정'이, 투퀴디데스의 '역사'까지도 가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오이디푸스 콜픔헥스나 플라토닉 러브처럼.

 

"투퀴디데스(기원전 460~400년경)는 상류계급 출신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장군으로 선출되어(야전사령관으로) 참전하지만 작전에 실패한 전투(기원전 424년)의 때문에 장군직에서 해임되고 추방되어 무려 20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그 동안 스파르테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여행하면서 사실(事實)을 수집하고, 확인했는데 이런 자료가 '전쟁사' 집필에 밑바탕이 되었다."

 

"깊은 산 작은 연못 예쁜 붕어 두 마리~" 『펠로폰네스 전쟁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김민기가 노래한 <작은 연못>의 멜로디와 가사가 떠오른다. 저자는 이 전쟁의 주인공들, 아테나이인들과 라케다이몬인들의 입장에 얽매이지 않고 제3의시선으로 살핀다. 이들 그리스 세력을 제압하려던 두 차례의 쓰라린 전쟁에서의 패배를 딛고 지중해의 주도권을 쥐려는 영원한 제국 페르시아가 있다. 그들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양대 세력 모두의 몰락을 부추긴다. 전쟁자금이 고갈된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하면서, 용병처럼 부리며 '밀당'을 한다. 그러나 어부지리(漁夫之利)를 하는 세력은 따로 있으니 필립포스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마케도니아다. 그들 또한 가만히 기회만 엿본 것이 아니었다. 이 전쟁 시기에 아테나이인들과 스파르테인들 사이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작업'을 하였다. <전쟁사>는 대충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금껏 나타난 역사가들 중 가장 위대한 역사가", 이렇게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머콜리는 투퀴디데스를 평가한다. 19세기 독일의 랑케 등은 투퀴디데스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가의 이상으로 추앙했다. "나는 주워들은 대로 또는 내 의견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든 남에게 들은 것이든 최대한 엄밀히 검토한 다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투퀴디데스는 자신이 참가한 전쟁임에도 객관적인 제3자의 시선으로 서술했다. 함축적인 문체와 날카로운 분석으로 역사의 교과서를 썼다. 그는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를 주제에서,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사료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에서 극복하였으며 너무도 일찍 '역사의 완성자'로 자리매김했다. 절제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역사가의 '의견'까지 담아 역사 저널리스트의 면모도 보이는데, 그의 예언과도 같은 메시지는 섬뜩하다.


 

"헤로도토스는 두 차례 치른 그리스의 대(對) 페르시아전쟁을 중심으로 '역사'를 쓴다. 헬라스(희랍:그리스)인들로서는 두 차례 비헬라스인(페르시아제국)들의 거센 침공을 막아냈다. 그러나 저들의 힘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의문을 풀기 위해 발품을 팔면서 탐사하고 기록한다."

 

두 차례(기원전 480/489)의 '위대한' 그리스인들의 전쟁이 끝났을 때, 한 편의 ‘특별한’ 비극이 경연무대에 오른다.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456/5)의 「페르시아인들」(472년)이다. 비극의 배경은 살라미스해전에 패배한 페르시아 궁전, (승리자인 그리스의 입장이 아니라) 패배자인 페르시아 인들, '전범'인 그들의 왕이 전쟁에서 겪은 불행을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오만’했다. '교만' 때문에 자제하지 못하였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끝내 쓰라린 패배를 안게 된 것이라고. 이 작품이 헤로도토스에게 끼친 영향(집필 동기와 <역사>(전반부에서)에 담은 내용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투퀴디데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보여주었고, 배웠으며, 그리 실행했다. 투퀴디데스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통해 아테나이인들에게 인류에게 경계하고자 한 바가 그렇다. 아이스킬로스(비극 시인)와 헤로도토스(역사가) 같은 선배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투퀴디데스는 차분하게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가급적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또 하나의 비극 작품(역사)을 쓴 것이다.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진 해(기원전 431년)에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53세인데 처음 몇 년 동안 전쟁을 체험한다.  『역사』는 기원전 424년에 이미 간행되었고, 그는 곧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한다."

 

팝콘 영화와 같은 일회용 읽을거리가 아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채 서가에서 장기투숙중인 역사는 더욱 아니다. 세계는 왜 지금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 에 주목하는가? 2018년 그레이엄 앨리슨의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이 국제사회에 울린 '경종'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인 것 같다. 당동행 전용열차에 오른 김 위원장이 중국 변방에 위치한 한 역사에 잠시 내려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는데, 그 답뱃불을 라이터로 붙였든 성냥으로 붙였든 그것이 그리도 대단한 뉴스가 되어 전파낭비를 일삼는 것일까? '전쟁사'의 한 대목이나 그 고전을 깊이 읽는 가운데, 우리가 당면한 비극을 예견하는 텍스트를 이야기하면서 김 위원장의 구상이나 트럼프가 쥔 카드를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일까?

『펠로폰네스 전쟁사』를 제대로 읽었다면 그 경고('투키디데스 함정')가 사전이 아니라 사후에 보낸 재난문자에 지나지 않음을 절감할 것이디.『펠로폰네스 전쟁사』정독한 국내 독자들이 많다면 그와 비례하여 번역서인 『예정된 전쟁』의 판매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펠로폰네스 전쟁사』를 제대로 읽어야, 드센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당사자인 남한이나 북한이 한반도 평화의 길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다. 그에 필요한 살아있는 팁(Tip)을 ‘득템’할 수 있으리라. 청와대를 비롯하여 관련 부처의 고위공무원들, 국정을 입안하는 이들부터 읽어야 할 책이다. 세종대왕처럼 독서휴가라도 줘서 읽게 해야 할 고전인데, 이런 얘기까지 꺼내는 것이 좀 슬프다. 과도한 기대는 금물! 그럼에도 내일의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과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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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2-2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글을 오늘 올리고 보니,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마무리된 모양이다. 강자는 논리는 늘 정의라는 이름으로 펼쳐진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통용되는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