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서: 관노트                                                     

2024년417

제목: 요즘

 

요즘, 봄이다.

나무마다 각각 고유의 색깔로 핀 꽃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아침 저녁 날씨도 적당히 춥지도 덥지도 않아 산책하기도 좋다.

저녁을 먹고 설겆이를 마친 다음 완산과 나는 소화도 시킬겸 아파트 단지내를 돈다.

보통은 나와 완산은 5바퀴를 돌기로 사전에 합의를 한다.

같이 나란히 걸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설이 설해 학교 공부 상황, 옆 집 누구누구 최근 근황, 배드민턴 클럽에서 생겼던 일들 등등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면서 아파트 단지를 돈다.

그러다가 가끔 서로 실갱이를 벌이는 순간이 있다.

나는 5바퀴 다 돌았다고 집으로 돌아가자 하고 완산은 4바퀴째니 아직 한바퀴 더 남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럴때 마다 기분 좋게 선심쓰듯이 한바퀴 더 돌아주면 되는데

그게 참, 한바퀴 더 도는게 무슨 손해 보는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 뭐. 한바퀴 더 돈다고 무슨 손해 보는것도 아닌데...

 

 

사실 이런 일상이 참으로 소중한 순간인데.

그런데 마음 한편으론 뭔지 모르지만 우울한 기분이 깔려 있다.

무슨 큰 문제는 없는것 같은데

웬지 뭔가 탁 트이지 못한 마음으로 사는것 같다.

지켜보기는 하는데 잘 모르겠다.

갱년기인가 싶기도 하는데...

 

이번달 달력에 법어가

<내가 했다는 것을 내려놓아야 가정도 잘 이끌어 갈 수 있다.> 이다.

이대로만 살면 되는데...

주인공, 너만이 잘 이끌수 있어.

우울한 기분에 빠지지 않게 해.

주인공, 둘로 보지 않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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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럴 링크 - 21세기를 이끄는 거대한 연결,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임창환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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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뉴럴 링크

지은이: 임창환 지음

제목:  일론 머스크의 두마리 토끼 잡기에 대해서

 

 

내가 초딩때 접한 영화 <터미네이터> 는 상당한 충격을 남겼다.

영화는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미래에서 온 기계 인간 터미네이터가 영화속 주인공들을 암살하기 위해 과거로 간다는 설정을 가졌었다.

특히 터미네이터가 주인공들의 저항에 몸이 박살이 났어도 기계의 골격을 이루는 해골 같은 몸체로 기어 가면서 까지 주인공을 쫓는 장면은 당시 어렸던 나에게는 충격적 이었다.

이때 부터 인공 지능 이란 이미지는 내게는 막연한 두려운 인상을 남긴것 같다.

그런데 미래의 인공 지능에 대한 이런 두려움은 나만 느낀게 아닌것 같다.

 

 

 

일본 SF만화에 나오는 미래 세계는 인간과 기계의 대립 또는 융합의 소재를 가지고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그려내는게 많다.

특히 인간의 뇌에 기계를 연결 시키는 소재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탄생 되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생각으로 살아 왔는데 알고 보니 자신은 인간의 복제품이라던가 혹은 기계 인간, 로봇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소재는 계속 변주 되어 졌다.

특히 <공각 기공대> 같은 유형의 작품은 기계가 인간의 영혼을 가질수 있는가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그보다 훨씬 전에 나온 데스카 오사무의 <아톰> 에서는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사회를 그려 냈지만 항상 인간은 로봇을 지배하려 했고 그를 거부하는 로봇과의 갈등이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인공 지능은 대체 왜 그렇게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것일까?

인공 지능이 곧 인간을 대체 하거나 인간을 지배하리라는 무의식이 깔리게 된 배경에는 알수  없는 것에 대해서 불안시 하는 인간 본능의 감정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제목인 <뉴럴 링크(NEURAL LINK )>는 일론 머스크가 만든 스타트업 회사라고 한다.

일론 머스크가 지금 우리 인류의 지능을 넘어서는 단계까지 온 인공지능과 대항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라고 한다.

뉴럴 링크의 주요 연구는 인간의 뇌에 마이크로 칩을 이식하는 것이다.

이식된 칩은 인간의 뇌의 기능을 증강 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란다.

인지 능력 기능이 비약적으로 높아져 컴퓨터에서 업로드를 하는 것 처럼 한순간에 정보나 기술을 업로딩 저장하고 바로 적용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에서 그런 장면들이 나온다.

키아누 리브스가 맡은 네오는 컴퓨터 시스템의 지원을 받아 배우지도 않았던 무술이나 헬기 조정 같은것은 쉽게 해낸다.

이건 영화속의 한 장면 이었지만 상상속에 존재하는 기술이 이제 곧 현실화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음을 우리 세대는 목격하고 있다.

2016,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 

그 당시 이세돌이라는 천재 기사가 한낱 기계에 불과한 알파고에게 지게 될 줄은 대부분의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1 4패라는 처참한 기록을 갖게 되는 일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내가 볼 때 그 시기 이후부터 우리가 본격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된게 아닌가 싶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나오는 인공 지능과 인간 사이의 전쟁이 어쩌면 현실화가 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이 참 아이러니 한게 두려우면 안하면 되는데 그렇질 못하는데 있다.

공포 영화를 보면 꼭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하면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피해자들은 꼭 보면 말을 안듣다가 킬을 당하고야 만다.

 

공포 영화라서 그런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심리가 그런것 같다.

하지 말라고 하면 또 하고 싶은 그런 심리 말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 넘게 되는게 두렵다면 개발하지 않으면 되는데 말이다.

 

 

 

일론머스크는 미래를 생각해서 인류가 인공지능과 대항하기 위한 준비로 뉴럴 링크를 설립했다는데 또 한편으로는 인공지능 연구소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2023년 발표한 챗GPT.

이때 생성형 AI 라고 불리는 챗 GPT는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기계가 아닌 인간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대답을 하는 놀라운 성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GPT는 일론 머스크와 마이크로 소프트가 투자한 인공지능 연구소 <오픈AI>  가 만든 대화형 인공 지능이다.

일론 머스크는 각기 다르게 뛰는 두마리 토끼를 쫓는 셈이다.

모순되어 보이는 두려움과 설레임이라는 감정을 공존 시키고 있는것 인가?

 

 

 

책의 저자 임창환님은 한양대학교 뇌공학 교수이다.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뇌공학 부분에서 전문가라 칭 할수 있는분 같다.

책은 전반적으로 인공지능의 개략적 시대별 연구와 현재 진행중인 연구에 대한 소개가 주를 이루고 있다.

비전문가라도 충분히 일독을 할 만한 내용들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몇가지 상념들이 떠오른다.

첫번째는 지금 이 시대에 미래를 예측 하려는 전문가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 전문가가 예측을 잘 맞추는지의 적중성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이 책을 쓴 저자 조차 2015년 경에 향후 15년간의 뇌 컴퓨터 인터페이스 미래에 대한 발전 여부를 묻는 질문에 '0' 퍼세트 라고 답한적이 있다고 밝힌다.

불과 10년전 이고 또한 자신이 그 분야 전문가 임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도 자신의 전문 분야가 어떻게 될 지 전혀 알 수 없었다는 뜻 이다.

 

 

누군가 그랬었다.

우리 주위에 소위 전문가라는 집단이 많다고 해도 그들 대부분의 예측 능력은 비 전문가인 우리 보통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하기야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시험을 쳐도 침팬치가 그냥 찍은 시험 성적보다 더 낮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적이 있다.

그러니 전문가의 말 이라고 무조건 다 신뢰하지 말라고 한다.

 

 

저자는 인공 지능의 발전에 따라 4가지 시나리오가 예상 된다고 했지만 그 범위를 벗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이 책을 읽는다고 해도 인공 지능에 대한 미래 예측에 대한 도움은 될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떠오르는 생각은 뇌 라는 기관이 정말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단순히 보면 1.4킬로 그램의 회백색 단백질 덩어리인 뇌.

뇌는 인간의 몸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고 인간의 뼈중 가장 단단한 두개골안에 쌓여 있다.

뇌는 머리에 붙어 있어 가장 중요해 보이긴 하다.

 

 

현대에 와서 뇌의 많은 부위는 서로 다른 영역에 따라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많은 과학자들이 하나하나 임상 실험을 통해 밝혀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뇌의 신비를 점점 밝혀내고 있지만 아직도 모르는 부분의 영역인것은 확실 하다.

 

 

그런데, 우리가 동양의학이라고 일컫는 한의학에서는 왜 뇌를 연구하지 않았었을까?

한의학에서는 오장육부를 중요시 한다.

오장육부(,심장,비장,, 신장인 오장, 대장, 소장,쓸개, , 삼초, 방광 등 육부)가 경락과 경혈로 연결 되어 있다는게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엔 뇌는 없다.

2천년 전통이 넘는 동양의학에선 뇌를 중요시 여기지 않았을까?

뇌는 왜 현대 서양 의학에서만 그토록 중시 하는 기관이 된 것일까?

과연 중요한 기관이 맞는 것일까?

 

 

 

셋째는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인공 지능이 발전한다 해도 대체 할 수 있는 영역일까?

단순히 뇌와 컴퓨터의 인터페이스에만 촛점을 맞추었지만 물질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역인 마음은 이들 관계속에서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뇌와 마음은 같은 것인가? 마음과 육체는 분리 할 수 있는 것인가?

인공지능은 마음을 대체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상념이 계속해서 머리속에서 떠 다닌다.

 

 

 

뇌 과학과 공학의 발전, 그리고 둘의 융합과 대립, 인공 지능과의 관계는 과학적 흥미를 떠나 여러가지 분야에서 흥미로운 주제 임에는 틀림없다.

거기다가 미래 예측까지 하게 되면 근사한 소설이나 영화 작품을 얼마든지 재 생산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 지능이 재앙이 될 지 미래 생활의 동력이 될 지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어릴때 은하철도 999란 만화가 티비에 방영된 적이 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으로 시작 되는 주제가 )

 

 

은하 철도를 타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주인공 철이와 메텔이 우주의 행성을 돌며 겪는 에피소드가 주를 이룬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란 다름아닌 인간의 육체를 기계화 하는 것이었다.

이 만화에서도 인공 지능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었고 부자인 인간들만 신체를 기계로 바꿔 기계 인간화가 되어 오래 도록 살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철이는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시점에서 자신은 기계화가 되길 거부해 버린다.

 

 

 

나는 철이 처럼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인공 지능이 아무리 발전을 한다 해도 인간의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 스스로 체험을 통해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의 경험은 살아있는 생명체만 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일 인간 스스로가 멸망을 초래하게 되어 인간이 다시 석기 시대로 회귀 한다고 해도 그래서 다시 또 문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해도 인간은 스스로가 깨닫기 위해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뇌와 컴퓨터 그리고 인터페이스. 그것만이 인간이 진정 미래의 인공 지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인가?

일론 머스크가 전체 인류를 대표하는 것은 아닐진데 우리는 그의 생각과 행동에 너무 휘달리는 것은 아닐까?

 

 

2500년전 기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다던 기우(杞憂) 이길 바랄 뿐이어야만 할 까? 

 

 

 

그의 두마리 토끼 잡기를 통해 나는 무엇을 고민해야 할 까?

 

초지능 기술의 구현을 통해 개인의 노동 생산성이 향상되고 고령자의 은퇴 시기가 늦추어지면 산업 전반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 P257

정신적으로 강화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시민들 사이에서 능력의 격차가 발생 할 수밖에 없다.<중략>

뇌공학 기술과 가상 현실 기술이 접목되어 현실감을 극대화한 ‘완전 몰입형 가상현실 서비스‘가 구현될 것으로 예상된다. - P258

인간의 능력이 타고난 지적 능력이나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뇌에 삽입한 전자 두뇌의 성공에 의해 크게 좌우될 것이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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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고익진 교수님이 들려주는
고익진 지음 / 광륵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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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고익진 교수님이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

지은이: 고익진/ 광륵사

제목:  대장경의 미로속에서 만난 안내서

 

 

앞으로 누군가에게 불교에 관한 쉬운 책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 책 <고익진 교수님이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을 꼽게 될 것 같다.

지금 까지 읽었던 불교 서적중 불교 기본 법문에 대해서 가장 쉽게 정리가 된 책이다.

 

 

우선 이 책을 통해 알게된 점 2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병고(丙古) 고익진 교수님에 대해서 알게 된 것과, 두번째는 <아함경(阿含經)>에 대해서도 알게 된 점이다.

고익진 교수님은70~80년대에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를 가르치신 교수님이시다.

원래 그는 불교 전공자가 아니였고 의학을 공부하다가 이유를 알수 없는 병을 얻게 되어 병원에 5년간 누워 있게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병에 걸려 죽을수도 있는 운명 앞에 그는 자연스레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그뒤 우연히 접하게 된 반야심경 의<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 味觸法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구절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되는데...

 

 

 

 

 

우리는 분명히 몸을 가지고 살고 있고 또 몸안에는 눈,,, 입이 다 있지 않는가?

어찌하여 반야심경은 '무안이비설신의'  즉 눈,,,, ,뜻이 다 없다고 하는지?

당시에 그는 '무안(無眼): 눈이 없다' 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됐다고 한다.

그것이 화두가 되어 3년을 참구하다가 결국 불교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때가 31, 동국대학 불교학과로 다시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고교수님이 불광사에서 하신 아함경에 관한 강연을 책으로 편찬한것이다.

대학에서 불교를 전공하는 학생이 아닌 일반 불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이니 만큼 비교적 쉽게 설명이 되어 있다.

 

불교의 경전은 팔만사천법문이라고 전해지는 만큼 무수히 많은 법문이 존재한다.

일생에 걸쳐 다 볼수도 없고 배울수도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 에서도 핵심은 존재한다. 

이 강의에서는 불교의 가장 핵심되는 6가지 법문에 대한 소개를 눈여겨 볼만하다.

'십업설 법문, 육육법설 법문, 오온 사제설 법문, 십이연기설 법문, 반야바라밀다설 법문, 일불승설 법문' 까지 6개 법문 이다.

그중 앞의 4가지 법문은 이 책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아함경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뒤의 '반야바라밀다설 법문'은 반야경에, '일불승설 법문' 은 법화경에  속한다.

 

 

 

책에서는 아함경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소개가 나온다.

솔직히 우리나라 조계종 불교 신자들에게 아함경은 비교적 생소하다.

조계종에서 일반적으로 예불시(禮佛) 에는 반야심경, 천수경을 외운다.

신자들이 사경(寫經) 을 한다고 하면 금강경을, 참선을 공부한다고 하면 육조단경이나 선어록을 보게된다.

그외에도 그 유명한 유마경, 화엄경, 법화경 등을 따로 공부하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이 경전들은 전부 대승불교 경전들이다.

즉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 북방불교 라고 학창시절에서 부터 배워 왔다.

그러나 아함경은 초기 불교, 즉 부처님 당시에 전해진 설법을 중심으로 만든 경으로 초기 경전으로 분류를 한다.

 

이러한 정리를 책에서는 각 법문의 핵심 내용을 군더더기 없이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책이 대장경의 미로속에서 안내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얼마전에 유튜브 통해 봤던 숏츠의 한장면이 있다.

D.J가 된 스님 한분이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소리를 치며 청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 를 외친다.)

스님의 법명은 뉴진스님. (순간 뉴진스라는 아이돌 그룹이 떠올랐다.)

뭔가 이상하다. 다시 알아보니 어느 한 개그맨이 스님으로 분장한것 이었다.

그러나 법명은 조계종에서 정식으로 받았다고 한다.

(NEW) ( 나아갈 진) , '새롭게 나아간다' 는 뜻이 담겨 있다.

불교의 '정진' '수행' 을 뜻한다.

앞으로 불교의 미래는 이러한 시도가 많이 늘어 갈 것 같다.

단순히 개그의 소재를 넘어선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진짜로 스님의 법명처럼 새롭게 나아가는 정진이 불교의 미래가 되지 않을까?

 

 

 

진리는 불변하는 것이지만 진리를 전하는 형식은 고정되지 않았다.

마치 물의 고유한 성질은 변하지 않지만 담는 그릇이 바뀜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듯이 진리를 전하는 방식도 그런게 아닐까 싶다.

 

 

 

 

부처님께서 전한 8 4천 법문 그 모두가 한가지 사실을 중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전한 방편이라고 했다.

그 한가지 사실은 우리 모두가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다는것.

 

우리집에서 키우는 앵무새, 길 가의 고양이, 옆 집의 멍멍이, 가축장의 소나 돼지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 까지.

착하고 순진한 사람만 부처가 되는게 아니라 이기적인 나쁜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 해가 되는 범죄자  같은 사람과 심지어 사이코패스 살인자 까지. 부처를 이룰수 있다고 하셨다.

 

부처님 당시 '앙굴리마라'100명의 목숨을 해친 무법 살인자로 부처님까지 살해하고자 했으나 후에 부처님에게 교화 되어 승려가 되었다.

또한 부처님에게 반역을 하고 암살까지 감행한 '데바닷다' 까지도 법화경에서는 내세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까지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불교는 바다와 같은 포용력을 지녔다.

세상의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산골짜기 계곡의 물도, 시냇물도, 강물도 결국엔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가 부처가 되는것은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중에 진리를 깨닫기가 세수할 때 만지는 코만큼 쉽다고 하셨다.

그처럼 쉽다고 하셨는데 난 어째서 코를 만지질 못하고 있는가?

나는 세수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닦고 있는게 아닐까?

 

 

 

 

 

 

 

 

봄은 왔다.

누구는 심춘(尋春)이라 봄을 찾는다고 했는데

 

 

나는 심안(尋眼). 부터 찾아야 겠다.

 

 

가만, 무안(無眼) 이라 했는  없는데 눈을 어떻게 찾노?

 

 

 

 

 

 

 

만일 모든 것이 절대적 존재에 의해서 창조되고 지배되다고 하면 두 가지 현상이 설명되지 않는다.<중략>
‘인간의 죄악의 책임 문제‘ 와 ‘자율적인 노력의 문제‘ 이 두 가지가 마땅한 도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삼종외도 비판 중에서> - P38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P43

아함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진리를 제시하기 전에 우리 인간의 현실 세계를 먼저 보자는 것입니다. - P44

결국 세계라는 것은 ‘여섯 가지 감관 기관(육근)‘과 ‘여섯 가지 인식 대상(육경)‘으로 이루어진 ‘일체 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유명한 12처설 입니다. - P50

우리는 나 아닌 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고,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정반대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 P67

변화하려고 하는 작용과 변화를 허용할 수 없는 아집이 서로 팽팽히 맞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괴로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그래서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라고 할 수 없다‘ 라고 불교에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 P71

커다란 태양이건, 바다건, 모든 중생들이 업력을 일으켜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서 우주가 성주괴공하게 되는 것입니다.업력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큰 힘을 작용합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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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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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체호프 단편선

지은이: 안톤 체호프/ 박현섭 옮김

 

 

러시아 대문호(大文豪)하면 항상 언급되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같은 작가들의 명성은 이름부터 듣는 사람 기를 죽인다.

<전쟁과 평화>, <죄와 벌>,<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처럼 제목은 알지만 막상 책을 대하면 바로 읽어보길 포기하는 고전 문학 작품들.

그래, 책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파지는 고전을 읽지 않아도 인생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지.

나는 그렇게 소위 러시아 대문호 작품은 제목만 아는 수준으로 거의 반평생을 보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독서를 하다보니 여기 저기 접하는 책속에서 러시아 작가나 작품들의 내용이 인용되거나 언급이 되어진다.

몰라도 되지만 막상 알면 더 좋을것 같은 생각들.

약간의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들의 작품이 왜 위대한 고전 인지를 이해 할 수 있는 시기가 된 것 일까?

 

 

 

그렇게 나는 이제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러시아 작품을 제대로 만나게 되었다.

(비록 단편 소설이지만....)

곧바로 러시아 대문호 작품은 부담이 되고 비교적 쉬워 보이는 단편소설 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한 체호프 단편선. 작가는 안톤 체호프.  

안톤 체호프의 명성은 앞서 언급된 대문호 만큼은 아니지만 단편소설계에서는 세계 3대 단편소설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사실 안톤 체호프(1860~1904) 에 대해서는 이번에 읽은 단편소설 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것은 아니다.

4년전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위즈덤 하우스> 이란 책에서 언급된 안톤 체호프에 대한 내용을 먼저 접했었다.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 <권력의 법칙>, <유혹의 기술>같은 책과 함께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대판 마키아벨리라는 칭호로 소개되기도 한다.

로버트 그린의 책들에는 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만의 스토리 텔링으로 역사속의 주인공과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의도하는 주제의식과 그 의미를 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것 같다.

<인간 본성의 법칙>에 등장하는 '안톤 체호프' 에 관한 챕터를 보면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보다 깊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860(쇼펜하우어가 사망한 해), 러시아 남부,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위치한 항구도시 '타간로그' 태생인 체홉은 집안 대대로 농노 신분이 였다고 한다.

체홉은 위로 형이 2, 아래로 남동생 2, 여동생 2명중 세째로 자랐다.

농노라는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할아버지때 부터 조금씩 돈을 모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때에는 잡화점을 운영하다 빚만 잔뜩 졌버렸다.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언제나 체홉을 비롯한 형과 동생들에게 체벌을 가했다. 심지어는 아이들 엄마까지 학대를 했다.

그러다 체홉의 위에 형 2명 모두가 모스크바 대학으로 진학을 하게 된다.

반면에 아버지는 빚에 더욱더 쪼들리게 되자 모스크바로 혼자 도망을 쳐버린다.

체홉을 비롯한 나머지 가족, 어머니와 동생들은 타간로그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이 살던 집은 남에게 홀라당 넘어가 버리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체홉만 남겨둔체 형들과 아버지가 있는 모스크바로 떠나버린다.

체홉은 당시 16살로 가족 모두 떠난 타간로그에 홀로 남아 자신의 학업과 생계를 위해 고학을 하게 되었다.

 

 

 

타간로그에 홀로 남은 체홉의 이시기는 체홉의 인생에서 마주한 시련의 시기였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자신의 미래를 바꾸는 토대가 되는 시기가 되었다.

이 시기 체홉은 철저한 고독의 시간속에서 삶에 대한 각성을 이룬것 같다.

홀로 남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떠나버린 가족들, 그 가운데서 이 모든 상황을 객관화 시켜 다시 내면의 눈으로 돌아보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것만 같았던 아버지를 마음으로 용서했고 또한 자신에 주어줬던 운명의 굴레를 체홉은 스스로 벗어 던져버렸다.

 

이시기 체홉은 타간로그에서 홀로 서기를 통해 운명을 바꿔 버렸다.

체홉은 그 이후 모스크바 의과 대학으로 진학을 하게 되면서 가족과 다시 상봉을 했다.

 

 

 

하지만 체홉의 가족은 모스크바의 빈민촌에서 오히려 타간로그 시기 보다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대학을 다녔던 형들은 노름빚과 술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고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찌들어 있었다.

여전히 폭력에 시달리는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에게는 하루 하루가 희망없는 삶이였다.

 

 

 

체홉은 이런 비참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가 가장의 역할을 떠맡았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학업과 더불어 자신이 할 수 있는일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단편소설과 희곡을 쓰는 작업은 본격적으로 이 시기 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적은 원고료를 받으며 여러 잡지사에 열성적으로 글들을 투고 하게 된다.

이 글들이 오늘날 남아 있게된 체홉 초기의 작품들이 되었다고 한다.

 

 

 

체홉은 빈민촌에 살며 절망과 우울에 빠져 있는 집안 분위기를 점차 바꾸기 시작했고, 마침내 체홉 가족 모두를 물질과 정신적인 면에서 '구원(救援)' 하게 된다.

체홉 자신은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졌지만 작가로서 명성이 더 높아지자 의사 보다는 작가라는 직업에 더 매진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 속에 나오는 의사는 체홉의 또 다른 분신 일 정도로 생생한 묘사를 살렸다.)

 

 

 

체홉에게 글쓰기는 자신을 향한 '구원' 이지 않았을까?

체홉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간 군상들, 특히 사회적 신분이 낮은 서민 계층이나 빈민층의 생활을 체홉은 누구보다 여실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본인은 그들이 우울한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을 누구 보다도 더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체홉이 세상을 떠나기 몇해전, 작가적 명성과 더불어 문학계에서는 체홉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일쌈았다.

이때 환멸을 느낀 체홉은 당시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사할린을 여행하기로 결정한다.

그 이전 부터 폐결핵을 앓고 있던 체홉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지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결국  당시에 지옥이라 불리던 사할린으로 떠나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사할린은 극동에 속하며 중간에 혹독한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야만 한다.)

 

 

체홉은 사할린에서 교도소 죄인들, 특히 살인으로 수감중은 범죄자들과 그의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또 사할린 섬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그의 이런 현장 체험은 훗날 <사할린 섬>이란 책으로 나오게 된다.

체홉의 <사할린 섬> 책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이후 사할린 섬의 여건이 상당부분 개선 되었다고 한다.

(안톤 체호프 책<사할린 섬>은 우리나라에도 출판 된적이 있지만 , 현재는 아쉽게도 절판된 상태이다. 중고거래 가격이 엄청나다.)

 

그 이후 체홉의 폐결핵은 더욱 심해졌다.

1904년 겨울, 시골에서 썰매가 타고 싶었던 체홉은 자신의 의지대로 썰매를 타고나서 결국 46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안톤에게 글쓰기는 곧 '구원(救援)' 과 같은 의미로 생각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글쓰기의 원동력은 밑 바닥 계층의 암담한 현실에서 시작 되었다.

불교에서 '연꽃은 진흙속에서 핀다' 고 전한다.

안톤에게 진흙은 우울하고 비참한 현실, 즉 다양한 중생들이 사는 현실이 아니였을까?

 

 

 

농노라는 신분이지만 나름의 음악적 재능을 가졌던 아버지, 하지만 농노라는 신분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체념속에서 아버지가 할 수 있는것은 술 먹고 화내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를 안톤이 어린 나이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벗어나지 못했던 이런 업의 굴레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안톤에게는 용서하지 못할 아버지나 바꿀수 없는 환경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소설속에 나오는 수많은 캐릭터 처럼 아버지와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인간 군상들의 운명은 고정 되지 않다는것을 이미 꿰뚫어 보았던 것은 아니였을까?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연민은 그의 글에서는 위트와 유모로 승화 되었다.

 

 

 

이처럼 안톤의 글을 통한 구원은 그 자신과 가족, 세상을 향한것이었다.

이것이 안톤의 단편 소설과 희극속 작품에 깔려있는 안톤만의 구원의 방식이 아니였을까 싶다.

안톤식의 구원, 그의 작품속에 그만의 '구원의 힘' 이 담겨 있다.

이제는 안톤 체호프가 남긴 작품들을 시간이 되고 기회가 된다면 틈틈히 읽어볼 예정이다.

나 또한 안톤이 그랬던 처럼, 책을 통해, 글을 통해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求原)하는 힘이 생기길 바란다.

 

<救援이 求原이 되길 바라며>

 

 

" 이 젊은이가 자기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모두 짜내서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 더이상 자신의 혈관을 흐르는 피가 노예의 피가 아닌 진짜 인간의 피라는 것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글로 쓰려고"

(안톤 체호프가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 글에서)<인간 본성의 법칙 P.336>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200만 루블을 거부하겠다.
<내기 중에서> - P147

이 무시무시한 뜻밖의 소식은 클리모프의 의식 속으로 온전하게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아무리 무섭고 강력한 것일지라도 회복기의 중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물적인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티푸스 중에서> - P160

"제가 침을 튀겼습니다. 각하..... 용서하십시오. 전 그저...... 다만......."
<관리의 죽음 중에서>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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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 관노트                                                     

2024년3 월28

제목: 지켜본다

 

 

지켜보는걸 놓치지만 않는다면

뭔가 힘이 생길것만 같다.

해결이 되는 힘.

 

 

어제 유투브를 통해본 혜자스님 법회.

어느 처사님이 하루동안 마음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지켜봤다는 일화를 듣고

나도 따라 해본다.

 

 

얼마나 지켜 볼수 있을까?

금방 딴 생각, 정신을 한곳에 모을수가 없다.

의식들의 본성은 원래 흩어지는게 아닐까?

쉽지 않다.

 

 

몸속의 의식들이 알아서 이끌어 주는게 아니라

내가 마음을 잘 내야 알아듣고 움직여 준다는

큰스님 법문 구절.

 

 

돌려 놓고, 지켜보고

오직 그거 하나만 하는건데도

아직도 힘들다.

번번이 무너져 버리는 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보는것 하나만 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용을 쓰면 용을 쓴 만큼

어제까지 우울한 기분과 주위의 상황이

밝아져 보인다.

 

 

과연...

 

지켜보는 것은

돗보기 렌즈로 종이 한곳에 태양빛을 모으면

종이위 한점에서 서서히 불꽃이 생겨 태워 버리는것 처럼

내면의 쓰레기들을 태워버리기 시작한다.

 

 

지켜보기는 초집중이다.

 

 

 

                                                    <어제 혜자스님 유튜브 법문을 듣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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