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읽은 책은 절대 잊지 않는다 -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어른의 독서
허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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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한번 읽은 책은 절대 잊지 않는다.

지은이: 허필우

   : 독서가 미래의 나를 구원 한다면?

 

 

 

이 책<한번 읽은 책은 절대 잊지 않는다> 의 제목에 끌렸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어른의 독서" 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래, 어떻게 읽으면 한번 읽고 나서 책의 내용을 까먹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뒤늦은 나이에 독서를 시작하면서 느꼈던 문제가 독서후에 무엇을 읽은건지 잘 떠오르지 않은 점이었다.

 

 

다 보고 나서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면 내 머리속엔 남아있는게 별로 없는것 같았다.

그리고 책 한권을 매번 다 읽을때 마다 내면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서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줄 기대 했는데 막상 그것도 아니었다.

마치 내가 배드민턴 레슨 한 두달 계속 받았다고 실력이 늘지 않는 것처럼 독서도 그런것 같았다.

그냥 무작정 읽는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자 이러한 문제의 해결법으로 독후감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한권 읽으면 바로 꼭 독후감을 써서 정리를 하자.

 

그런데 막상 독후감 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읽는것은 비록 난이도에 영향을 받지만 어쨓든 읽어낼 수만 있다면 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독서한 내용을 글로 표현 하는것은 읽기와는 또 다른 문제 인것 같다.

둘 다 독서에 관련 된 행위지만 나에게는 분명 서로 다른 영역이었다.

이 책은 이런 두가지 다른 능력인 독서 능력과 글쓰기 능력을 모두 향상 시키는데 참고가 될 만한 책이다.

책에서 저자는 독서와 독후 활동을 합쳐서 독서력이란 표현을 썼다.

책을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과 독서후 활동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요약해서 써내는 능력을 합치면 독서력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읽은 책을 절대 잊지 않는 비법으로 자신이 특허를 낸 'G.C 카드 쓰기' 를 하라고 한다.

G.C ( GAIN + CHANGE) , '획득' '변화' 의 알파벳 약자를 내세운 독서 카드 작성법을 말한다.

저자 허필우는 현재 4급 공무원이자 대학원에서 강의 까지 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30대 중반에 독서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천권이 넘는 책을 읽으며 성취한 자신의 독서 경험과 성과, 그리고 G.C카드 작성과 활용에 대해 노하우를 소개 한다.

 

 

 

독서를 한 후 내용을 정리하고 글로 남겨 두는 독후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면은 작년에 읽었던  손승욱의< 10억짜리 독서법> 하고 일치한다.

10억짜리 독서법에서는 '자료화 독서법' 을 소개 했었다.

'자료화 독서법' 이란 책을 읽는 과정중에 본인이 생각하는 중요한 알맹이들을 따로 모으고 수집하여 자료화 시켜 놓는다.  그리고 나서 그 자료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정리 하는 독서후 활동을 말한다.

책의 핵심을 정리한다는 면에서는 둘 다 일치하고 둘의 차이점은 하작가는 '카드' 로 정리 한다는 것이고 손작가는 '노트' 에 정리 시킨다는 것 이다.

 

저자가 경험 했던 독서법의 조언들, 초보 독서는 자기 계발서 부터 시작하라, 독서는 읽기를 편집하는 과정이다. 최적의 독서량은 일주일에 한권 이다.  자녀에게 남겨주는 최고의 유산은 독서력이다등등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이처럼 독서의 효용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가 없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점은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독서든 독후 활동이든 중간에 포기 하거나 흐지부지 되지 않고 언제 까지고 지속 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책을 낸 작가 본인들이야 독서의 매력을 충분히 체험했겠지만 나같은 초보 독서가들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꾸준히 독서 활동을 지속 시킬 수 있을까에 있다.

 

 

좋은책 한 두권 읽었다고 인생은 당장 바뀌지 않는다.

독서가 나의 잠재력을 일깨워 주고 내 인생의 변화를 일으켜 주리라는 환상을 심어주는것은 아닐까?

어쩌면 독서도 하나의 믿음이 되는것이 아닌가 싶다.

책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는 믿음.

 

 

조선시대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 라 불렸던 사내가 있었다.

이름은 이덕무. 책 보는것을 너무나 좋아해서 마치 책에 빠진 바보와 같다고 스스로가 정한 별명이란다.

그렇다고 책만 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앞뒤가 꽉 막힌 선비는 아니였다.

무척 가난 했던 어느날은 너무 배가 고파 친구 유득공과 함께 자신이 가진 가장 비싼책 <맹자>를 팔아 밥을 짓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책만 소중히 여겼다면 어찌 비싼 책을 팔 수 있으랴?

순수한 책 바보 였지만 또한 낭만도 함께 가졌던 선비 였던것 같다.

이덕무는 정조 시대 박제가, 정약용등 과 함께 정조의 신임을 받을 정도로 규장각의 실학자 가운데 에서도 가장 박식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도 말년에 문체반정 이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좋아하는 책을 팔아 자신의 배고픔을 구제했던 이덕무.

 

 

책 바보 간서치는 책을 통해 자신을 구원 했었을까?

과거, 비록 가난하지만 순수하게 책을 좋아 하는 것과 오늘날, 성공을 위해 책을 보는것 중 어느것이 나에게 맞는 독서일까?

 

물론 과거에도 입신출세를 위해 책을 봐야 했던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이 있었을 테지만, 결국 오늘날 자기 계발, 성장, 성공을 위해 독서를 하는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지금의 나는 어떠한 독서를 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독서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정말 독서 활동이 미래의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지금의 독서 활동이 미래의 나를 구원 하리라는 새로운 믿음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 하고 '독서가 나를 구원하리라' '글쓰기가 나를 구원하리라' 믿음은 어쩌면 독서의 효용보다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

독서를 하는 현재의 나를 믿는것, 결국 구원은 나를 믿는데서 시작하는것 일지도 ....

 

 

 

 

 

 

 

독후감은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매번 책을 읽고 나서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15년 김정운 교수의 <에디톨로지>를 읽고 난 후, 독후감 대신 독서카드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의 독서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 P7

책이란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사고의 중심을 잡고, 전혀 다른 분야의 지식과 지혜를 연결해 독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 P51

내 방식대로 책을 해체하고 단 한줄이라도 책을 정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내게 큰 힘을 줬다. - P73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 P104

책은 활자로 인쇄되어 구체적으로 우리손에 잡히지만 고정된 것이 아니다.
책은 저자의 정신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에 자유를 줘야 한다. - P113

글을 쓰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없고, 자신과 대화하지 못한다. - P148

위대한 유산은 지갑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부모의 독서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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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 관노트                                                     

2024년428

제목: 1+1= ?  왜 나는 아직도 틀리지?

1+1=2 이다. 당연한것 아닌가? 이게 본래 수학법칙이니....

그런데 1+1=3이 될 수가 없을까? 그렇게 되면 좋을텐데....

아침부터 1+1=3이 되라고 관 했었다. 정말 그렇게 관 했다.

이게 관 한다고 될 일이랴 싶겠지만 적어도 수학법칙 대로 2가 되어도 좋지만1+1=1은 되고 싶지가 않았다.

솔직히 내심은 불안했다. 또 다시 1+1=1가 되는 일이 발생 되지 말아야 했는데...

어제 북경에 사는 한인들 연합 배드민턴 대회가 열렸었다.

이번이 7회 째 대회인데 나는 그동안 1회때 부터 계속 참가를 했었다.

이번 대회는 설이랑 한조가 되어 참가하는 종목이 있어서 특별히 나에게는 중요한 대회라 생각했다.

C조 남복으로 설이랑 한조가 되어 우승하면 B조 승급이 될 수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원래 나와 설이는 각각의 파트너가 따로 있는데 사정이 생겨 이번엔 아빠와 아들이 함께 조를 이루게 되었다.

설이가 젊고 요즘 기량이 많이 올라와 나와 파트너가 되어 경기를 한다면 충분히 B조 승급이 가능하다고 완산은 적극적으로 가족끼리 한팀이 되라고 권유를 했었다.

나 역시도 레슨을 매주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고 클럽내 경기에서도 어느정도 실력이 올라 왔다는 평가를 받아서 충분히 우승에 도전해 볼만하다고 생각 했다.

나와 설이의 개인적인 하나 하나의 실력은 다른 경쟁자와 비교해도 충분히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결과는 예선 4게임중 3패를 해버렸다.

둘다 실망감에 젖어 설이가 마지막 경기 마저 또 져버리면 우리 둘 다 민턴은 이제 그만 두자고 했다.

결국 아침부터 관했던 1+1=3이 아닌 2도 아니고 1이 되버리는 순간이 되어버렸다.

3이 되는것은 각자 힘을 합치면 시너지가 발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1이 되는것은 서로에게 마이너스가 되어 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뜻한다.

아침에 불안했던 예감은 결국은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놈의 실수만 안했어도, 평상시 대로만 했어도, 이상하게 말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아빠가 너무 못 받쳐 줘서 졌다는 생각이 설이와 나를 지배했다.

잘 하면 내 탓, 지면 내 파트너 탓을 하기 쉬운 운동이 배드민턴이다.

내가 잘못해서 벌인 실점보다 내 파트너의 실수 때문에 졌다고 여기지는게 배드민턴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설이 탓을 하지 못한다.

50이 다된 아빠랑 18살 아들이 함께 뛴 시합에서 당연히 나이 많고 민첩하지 못한 아빠 때문에 지게 된것은 당연한것 아닌가?

아, 모든게 내 탓이 되어버리니 인생의 회의가 또 밀려온다.

왜 나는 항상 1+1=은 2가 아니고 1밖에 안 되는건지?

이제는 3도 바라지 않는다. 2만 되어도 좋겠다. 3은 욕심이었다.

탓하지 말고 관하자. 바라지 말고 관하자. 내 탓이다.

주인공, 너만이 1+1이 2가 됨을 증명할 수 있어.  이제 산수부터 다시 계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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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 - 대반열반경, 초기불전 시리즈 003
각묵 엮음 / 초기불전연구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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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대반열반경)

옮김: 각묵스님

   :  부처님 무량겁을 함께 하소서

 

 

이제 곧 부처님 오신날이다.

올해 '부처님 오신날' '스승의 날' 과 함께 겹쳐 있다.

어제 독후감을 남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책에서는 스승은 '스님'을 뜻한다고 했었다.

스님이 부처가 되는것이 스승의 최고의 단계라고 했다.

즉 부처님은 '최고의 스승' 이신것이라 불러도 되는것이다.

 

 

본래 이 말은 불교 용어로 '삼계도사사생자부 (三界導師四生慈父) ' 라 일컫는다.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쉽게 말해 존재 하는 모든 차원 즉, 온 우주를 뜻한다.

도사는 이끌어 주는 스승,

사생은 난생: 알로 낳고, 태생:어미 태에서 낳고, 습생: 습한곳에서 낳고, 화생: 화하여 낳는 4가지 형태로 태어 나는걸 말한다.

자부는 자비로운 어버이.

우리나라 사찰의 예불문에는 이렇게 독송한다.

삼계도사사생자부 석가모니불.

즉 온 우주간에 스승과 사생의 어버이 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란 뜻이 되는것 이다.

 

 

불교에서는 목표를 서원, 발원이라고도 하는데 원을 세운다는 뜻이다.

불교도들은 법회때 항상 사홍서원,  네가지 큰 서원을 말한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녹이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이것은 우리가 비록 중생으로 태어 났지만 번뇌를 녹이고 법문을 익혀 결국엔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부처를 이루겠다는 서원, 즉 목표를 정한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탄생한 날이다. 그 의미는 인류를 구원 하는데 있다고 본다.

예수님의 탄생은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대신 하여 죄를 갚고 다시 부활 하여 인류를 구원함으로 구약과 신약의 믿음을 완성 하신것이다.

기독교에서 죄를 사하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목표 라면 불교는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의미는 중생이라 불리는 우리 자신이 곧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알려 주려 오셨다고 한다.

아니 우리 중생인 우리가 곧 부처라고 선언하셨다.

닦지 않으면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은 우리에게 간곡히 수행을 하라고 권 하신것 이다.

 

 

이 책<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 는 부처님이 열반 즉 이 사바세계를 떠나기전 역사적인 시간으로 열반 2년전의 상황과 열반후 행적을 기록한 경전이다.

불교의 방대한 경전중의 일부인 <대반열반경> 이라고 불리는데 부처님의 마지막 행적이 시간순으로 서술 되어 있다.

 

 

 

아마도 20년전 쯤 한마음선원 본원에서 열린 법회였다.

그때 진주에서 올라오신 보살님 한분이 법회중에 질문을 드린적이 있다.

그분 질문 내용이 대반열반경의 한 장면 이었다.(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부처님은 본래 무량겁, 즉 영원토록 육신을 가지고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라 즉, 마왕 파순이 와서 부처님에게 이미 이룰것을 다 이뤘고 제자들도 많이 키웠으니 이제 그만 열반에 드시는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부처님은 알아서 결정 하겠다며 파순의 제안을 고려해 보신다.

 

 

그 당시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는 항상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며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기억하는 총명함을 지녔었다.

하지만 당시 아난은 총명함과는 별개로 깨달음을 얻지 못해 아라한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만약 당시에 아난이 깨달음을 얻은 상태였다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지 말고 영원토록 현 세상에 남아 법을 설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요청이란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보면 어떤 경지에 이르신 분들은 자기가 나서서 일부러 알려 주지 않는것 같다.

논어 술이편에도 보면 '불분불계(: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알려 주지 않는다)' 란 구절이 있다.

결국 깨달으신 스승들은 스스로 나서서 알려 주지 않는 것이다.

물어야 답해 주신다. 찾아야 구해 주신다. 두드려야 열어 주신다.

그렇지만 아난은 그러질 못했다.

 

 

부처님은 여러 차례 아난에게 당신이 남아 있기를 요청하라고 힌트를 내줬지만 아난은 미처 깨닫지 못해 요청을 하지 못하고야 만다.

결국 부처님은 남은 수명을 놓아버리고 열반에 드시기로 작정 하신다.

(이때 아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아난은 부처님 열반후 모인 집회에 초청을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

 

 

그렇게 부처님께서 남은 수명을 스스로 놓아 버리자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

이때 놀란 아난이 무슨 연고로 하늘과 땅이 진동하느냐 묻고 부처님이 이에 대한 설명을 하자 그제서야 부처님께서 열반에 곧 들게 됨을 알게 된다.

 

 

 

당시 질문하신 보살님께서는 2600년전 부처님 당시의 이와 같은 열반 상황을 설명하면서 현세의 우리들, 즉 큰스님 직계 제자, 재가 제자 모든 분들이 열심히 수행하여 아난의 그러한 과오를 되풀이 하지 말자고 떨리는 음성이지만 결의에 찬 말씀을 드렸었다.

그 당시 그분의 말씀에 법회에 함께 했던 모든 사부 대중은 진심으로 탄복했었다.

 

2600년전 부처님 당시의 상황과 현재가 오버랩 되면서 모든 사부대중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 당시 법회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주었다.

책에는 부처님 열반 전후로 좀 더 상세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것을 알 게 해준다.

 

불경의 모든 경은 아난의 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여시아문)' 로 시작한다.

마가다 국왕이 왓지라는 나라를 멸망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처님께 자문을 구하는 일을 비롯하여 부처님은 수행과 관련된 법문을 하시며 많은곳을 이동을 하신다.

부처님은 가는곳 마다 법문을 설하고 사람들의 친견과 공양을 받으신다.

그러는 도중 파왕 마순의 열반에 대한 종용과 아난에게 열반에 대한 암시를 하시지만 아난의 혼미함으로 미처 알아 채질 못한다.

하지만 결국 남은 목숨을 포기 하시고 본격적으로 열반에 드실 준비를 하게 된다.

 

 

열반에 들기 몇 일전 대장장이 아들 쭌다의 공양을 받고 아프기 시작하셨고, 그로 인해 쭌다가 혹시 자책할 까봐 미리 대중들에게 쭌다의 공양을 찬양하면서 마음의 짐을 덜어 주신다.

이 처럼 경에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배려해 주는 장면이 인상 깊게 등장 한다.

 

 

쭌다의 공양으로 인한 당신의 아픔이 쭌다 탓이 아니라는 법문과 비록 열반에 이르게 한 책임이 있는 아난을 향해서도 대중들 앞에서 질책이 아닌 격려하시는 장면에서는 진정 스승의 자비를 느낄수 있다.

또한 열반에 이르기 바로전에 수밧다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 주시는 장면 도 놓쳐서는 안 될 장면 중 하나이다.

 

이후 알려진 대로 마지막 제자들을 위해 방일 (放逸: 나태, 게으름) 하지 말고 정진 할 것을 유훈으로 남기시고 , 당신이 입적하면 자신의 유체를 어떻게 화장을 하고 화장후에는 어떻게 수습을 해서 처리 하라는 지시까지 정말 꼼꼼히 챙기신다.

 

 

그렇게 부처님 입멸 후 유훈대로 화장식 장작에 불을 붙이려고 하나 불이 붙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불이 붙지 않는 가운데 결국 뒤늦게 대제자 마하가섭이 도착하자 마자 비로소 불이 붙는 장면은 삼처전심(三處傳心: 세곳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전해 받았다) 의 주인공 다운 등장이 되겠다.

 

 

만약 어떤 능력있는 글 작가나 영화 감독이 있어서 부처님 열반전 상황 몇 일의 과정을 담담히 소설이나 영화로 담아 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모습이 아닌 정말로 인간의 몸으로 와서 인간으로 떠나간 여정을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을 표현 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 입멸하셨다.

남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번역자 각묵 스님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남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게.... 어떻게 해야 하나?

 

 

생의 찬란함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다시 죽음의 찬란함은 또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부처님의 탄생은 우리도 부처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리러 온 것이고 부처님의 열반은 우리에게 윤회에서 벗어 나는 길을 보여 주셨다.

 

 

처음과 마지막, 탄생과 열반.

그 바탕은 한 몸이라고 큰스님은 설 하셨다.

 

 

2600년 전과 지금, 수억년 전 과거와 수억년 뒤 미래도 다 내 한마음에 있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으로 돌아가 귀의 합니다.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마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마라. - P67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 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 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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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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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지은이: 김지수

   :  시름겹지만 찬란했던

 

 

 

 

 

존재가 가장 정점인 시기인 한낮, 정오에는 그림자 마저 사라져 없다.

분수는 하늘로 올라가 꿈틀거리다가 정상에서 쏟아져 내린다.

하루 중에 상승이자 하락인 그 꼭지점, 그 절정이 정오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절정은 슬픈거란다.

정오가 지나서야 모든 사물에 비로소 그림자가 생긴다고 한다.

이상의 <날개> 마지막 장면에서 정오의 사이렌이 울릴때, 그 순간 '날개야 돋아라, 날자꾸나' 라고 속삭인다.

이렇게 정오가 하루의 절정이듯이 생의 절정은 바로 '죽음' 이라고 말한이는 바로 '이어령' 이다.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은 깍이는데)

풍표만점,정수인(風標滿点,: 바람 불면 만점으로 떨어지니 참으로 시름겹다)

 

 

봄 기운이 최절정에 이르고 난 후에 꽃잎 하나 떨어지자 문득 봄이 서서히 저무는 것에 상심했다는 두보의 당시(唐詩: 曲江 2)가 떠오른다.

남들은 한창 꽃을 감상하며 봄빛을 만끽할 때 스며든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름과 현대의 이어령이 정오의 절정에서 느낀 슬픔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교감되는 듯 하다.

모든 존재는 가장 화려하고 찬란할 때 가장 절정에 이른것이고 그 순간, 머물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곧바로 쇠락하면서 시름에 겨워지기 시작한다.

그 쇠락의 정점은 죽음이지만 또한 동시에 탄생의 의미도 담겨져 있으리라.

그렇게 삶과 죽음은 영겁의 시간속에서 무한 루프의 주인공이 아닌가?

 

 

이 책은 기자출신의 저자인 김지수와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했던 이어령 교수의 말년 인터뷰를 담은것이다.

제자이기를 자처한 김지수와 생의 마지막을 앞둔 스승 이어령과의 '죽음'이라는 큰 주제속에 철학과 기독교적 담론이 폭 넓게 다뤄지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감탄 했던것은 말년 이어령의 통찰들이다.

이어령은 말했다.

젊을때는 관심이 중요하고, 사오십때는 관찰이, 말년은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는 빛이 되지 못한 물질의 찌꺼기, 그 몸을 가지고 사는 거다.

배꼽은 내가 타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다.

 

컵에 손잡이가 생긴다는것은 관계가 생긴다는 것이다.

손잡이가 달린 인간으로사는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날아다니는 사람은 걷질 못한다. 예술가들은 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먼저 길 잃은 양이 되어야 한다.

길을 일탈해서 길 잃을 자유가 있어야 한다.

(나는) 길을 잃어도 영영 미아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상처와 활을 동시에 가질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은 인터페이스 이다. 즉 머리와 몸을 분리하면서도 이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사잇꾼이 되어야 한다. 사기꾼이 아닌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 줄 수있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인간을 이해 한다는 것은 인간이 흘린 눈물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등등

 

제자 김지수가 스승 이어령에게 이어지는 질문속에 뜻 깊은 어록들의 성찬을 즐길 수 가 있었다.

이는 이어령 교수의 88년 일생의 통찰이 담긴 보석같은 어록들  구구(句句) 마다  절절(切切)함이 베어들어 있다.

처음 읽을때는 이런 형식의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떠 올랐지만 그 보다 훨씬 내용이 깊고 넓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것은 이어령 교수의 자기 성찰이다.

"지식은 울림을 주지 못해, 생명이 부딪혔을때 나는 파동을 남기고 싶은데 쉽지 않아."

"내 딸 민아 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믿으면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머무는데, 나는 미끄러져서 계속 땅에 떨어져. 그래서 영성이 아니라 땅 지() 자 지성이 되는 거야."

 

이어령교수 당신은 지성을 대표했지만 자기는 영성을 얻지 못했다는 자기 고백을 한다.

마태복음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구절 처럼 이어령 교수의 딸이 결국 먼저 영성의 세계로 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어령교수가 무신론자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계기도 딸의 실명 위기를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고 한다.

당시에 기도 덕인지 딸은 실명 하지 않았지만 훗날에 암으로 먼저 아버지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된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갔다는 것은 꼭 죽음만을 의미하진 않는것 같다.

이어령 자신은 지성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에 속하지만 결국 그런 그도 영성의 세계에서는 자신은 나중 된 자에 지나지 않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이어령 입장에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지성에서 영성의 세계로 이끌었던 딸 이민아 목사가 진정한 스승이라고 여길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김지수 기자가 스승이라 부르는 자신에 대해 한사코 자신은 스승이 아니라고 부인하는것 같다.

어쩌면 겸손의 표현이지만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곁에 두고 아무때나 펼쳐 읽어 볼 만 하다.

지성의 거두를 상대로 깊이 있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작가의 솜씨도 볼 만 하지만 다만 아쉽다면 이어령에 대한 존경이 숭배가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책에서 이성복 시인의 "나의 죽음을 건네 주는 스승을 최고의 스승" 이란 표현이 나온다.

죽음을 건네 준다는것은 나를 살린다는 뜻이다.

나를 살린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결국 스승은 나를 새로이 거듭날 수 있게 이끄시는 분이다.

스승에 대한 진정한 존경은 숭배가 되어서는 안된다.

제자는 스승의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나를 죽이고 다시 진정한 나로서 거듭나야만 한다.

결국 스스로가 거듭 나야 하는것 그것이 바로 스승의 바램이자 그렇게 해내는것 만이 제자가 스승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번 생엔 다 못 갚을 것 같다.

그저 스승이 계셨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 것인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다 선물이었다. - P5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은폐가 곧 거짓이야. - P72

먹는 것에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게 구약과 신약의 하이라이트야. 우리 삶도 그래. 사는게 먹는 거지. - P74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 P108

우리가 말하는 스승은 스님이라는 뜻이야. 스님이 커지면 부처가 돼. 제일 아래 단계가 스승이야. 이승에 스승이 없으니 죽고 하늘에 올라가 저승에서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건데.그게 쉬운일이 아니라네. - P235

이어령의 행동이 백남준이고 백남준의 내면이 이어령이 되는 거야....
내 안에 그가 있고 그 안에 내가 있었어.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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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러닝, 세계 0.1%가 지식을 얻는 비밀 - 짧은 시간에 가장 완벽한 지식을 얻는 9단계 초학습법
스콧 영 지음, 이한이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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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울트라러닝(세계 0.1%가 지식을 얻는 비밀)


지은이: 스콧 영 / 옮김이: 이한이


제목: 자기 계발, 결국 독해야 성공하는 것인가? 


 
 
 


스승없이,홀로 깨칠수 있는가?

독각(獨覺)이 존재하긴 한다 해도, 깨침은 혼자만의 경험의 영역이지만 그곳에 도달하기 전 까지는 이끌어 줄 스승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 독학(獨學)은 어떠 한가?

 


 
<울트라러닝>은 독학에 관한 단연 손꼽히는 안내서라고 들었다.

이 책 <울트라러닝>에 대해서는 이미 유튜브에서 호평이 자자했다.

지금도 찾아보면 기적의 학습법, 초학습법, 상위 0.1% 학습법 등의 썸네일을 내세우고 있다.

나 역시도 유튜브에서 박문호 박사의 추천을 본 후 이 책을 주문하여 읽게 되었다.

 


 
'울트라러닝' 은 저자 '스콧 영' 이 MIT 대학을 다니지 않고 4년 짜리 전공 수업을 1년만에 독학으로 이수했던 방식을 구체적으로 체계화 시킨것 이다.

저자는 대학 수업뿐만 아니라 4개 국어를 1년만에 마스터 하기, 다빈치급 그림 그리기 같은 프로젝트를 실제 자신의 배움에 적용함으로써 울트라 러닝 학습법을 완성 시켰다.

이외에도 책에는 성공 시킨 프로젝트들의 경탄할 만큼 성과들이 많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아니 '이 책은 나에게 맞나?' 하고 다시 되 물어 보면 이 책을 소개한 많은 유튜버들 처럼 자신있게 최고의 학습법이란 소리는 못할 것 같다.

솔직히 이 책을 톺아 가며 읽어 봤지만 내가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점이 든다.

저자의 자신감과 성공에 대한 확신이 나에게 까지 전파가 되진 않을것 같다.

 
 


우선 저자의 학습에 대한 노하우는 생각보다 대단히 특별한 노하우는 없었다. 

저자가 소개한 9가지 법칙 (메타 학습, 집중하기, 직접하기, 특화 학습, 인출, 피드백, 유지, 직관, 실험) 으로 이어지는 각 단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특별하고 새로운 개념들은 없어 보인다.

굳이 '법칙' 이라고 이름을 붙힌것도 일반 자기계발서에 매번 등장하는 용어라 저자 또는 출판사 편집자가 의도적으로 뭔가 좀 있어 보이게 만든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첫번째 법칙, '메타 학습법' 하면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메타는 '그 너머' 라는 그리스어에서 따온것 이라는데 어떤 프로젝트를 이루고자 할 때 '초월해서 행하는 학습법' 이라고 소개를 한다.

이걸 '메타 지도 그리기' 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건 사실은 '계획 세우기' 를 뜻한다.

책에서는 학습을 위한 학습이라는 점에서 '사전 계획을 세울때 좀더 심사숙고 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메타' 란 말이 들어가니 순간에 계획 세우기가  '평범' 에서 '비법' 으로 바뀌어 버린다.

 
 


더구나 책 제목 자체도 '울트라 (ULTRA)' 가 들어가니 전체적으로 거창해 보인다.

이게 요즘 책 제목에 '초(超)' 자를 많이 붙이는 것 처럼, 일반 평범한 것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추세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 책에서 언급된 법칙들은 사실은 다른 자기 계발서에도 다 나오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박문호 박사가 유튜브에서 소개한 '인출' 개념은 눈여겨 볼 만하다. 

책에는 반복해서 학습하는 실험군과 백지에다 자신이 학습한것을 기억으로 인출, 즉 끄집어 내는 실험군의 학습 결과를 비교한 실험에 대해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학습 효과는 인출하는 실험군이 훨씬 좋다는 근거를 대고 있다.


인출은 학습한 기억을 의식적으로 끄집어 내는 과정을 중요시 한다.

뭔가 억지로 하는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안되는걸 되게 하려면 당연히 고통이 따른다.


그게 육체적인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래서 유튜브 채널에서 박문호 박사가 기억은 감정과 연결 된다고 한 부분이 이해가 된다.

 
 


어쨓든 이 책에 나오는 법칙이란 이름으로 규정한 9가지 단계들은 어떻게 다시 재배치하고 조합 하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즉 평범해 보이는 법칙들을 이용하여 새롭게 조합, 편집해서 나에게 맞출것 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결국 나에게 맞게 재구성하는것이 평범을 비법으로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독학을 하려면 독(毒)해야 한다' 고 생각이 든다.

 
 


사실 시간적으로 4년 짜리 대학 교육을 1년만에 이수할 정도라면 얼마나 독하게 해야 하겠는가? 

단기간에 성공 시키려면 집중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거다.

저자는 시간 단축을 위해 효율을 강조했고 이 부분이 모든 학습법에서 가장 핵심일 것이다.

결국 효율이라는것은 선택과 집중을 잘 해야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독해야  무엇이든 성공할 수 있다. 至毒:지독(독함에 이르다)


저자의 성공은 법칙을 잘 지켜서 이루어진게 아니라 지독해져서 된 것이 아닐까?

 


물론 저자 또한 계획 했던 모든 프로젝트를 전부 다 성공한것은 아니라고 한다. 

4개 국어(스페인어, 브라질어, 중국어, 한국어) 마스터 하기에서 앞에 두 언어는 어느정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어 는 그저 그런대로, 한국어는 참 어려웠다고 실토를 한다.

3개월만에 한 가지 언어를 마스터 할 수 있다는 발상은 대견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것은 불가능 한것이다.

설마 이 책을 읽었다고 단번에 뭔가를 이루어 낸다는걸 순진하게 믿는건 아니겠지?

 
 


우리는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받는다.

그래서 그들이 제시 하는 소위 법칙이나 비법 같은 방법에 매료 되기도 한다.

그런데 반면에 의심과 부정의 감정도 함께 존재한다.

 


누군가는 내게 '시중에 나오는 모든 자기 계발서는 작가가 지 잘났다는 얘기가 처음부터 끝 까지야. 그래서 안 읽어 ' 라고 했던 적이 있다. 

맞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계발서는 작가 자신의 미화된 자랑으로 밖에 안보인다.

그러니 어쩌면 이런류의 책에서 나오는 성공담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책을 읽고 생각하고 자기자신을 계발 하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 원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분명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이다.

결국 마음먹기.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것. 그게 가장 중요한것 아닐까?

타인의 지시나 권유, 억지로 하는게 아닌 내 스스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배움이라면 해볼만 하지 않을까?

 
 


결국 울트라 러닝에 나오는 9단계 중 한단계 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책의 값어치는 충분히 하는게 아닌가 싶다.

 
 


나는 9단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첫단계 '메타 지도그리기' 라도 제대로 그려봐야 겠다.

그래서 난 이걸 '배드민턴 승급하기'에 적용해 보기로  했다.

구력 5년차 배드민턴 경력이지만 아직도 실력이 정말로 늘질 않는다.

수많은 좌절과 실망을 안겨준 운동지만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그래, 포기 하지 않는것도 독한 마음의 일종이다.

그러니 갈때 까지 가보자. 울트라 러닝이다.

LEARING 이
RUNNING 이 되고 다시 또
JUMPING 으로 될 때 까지.

 





 
 
 



울트라러너들은 극단적이고 자발적인 학습 프로젝트를 추구했다는 공통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 P51

울트라러닝에 틀이나 규범이 있다면 아마도 강도가 높고 구조화된 형태의 교육이라는 점일 것이다. - P85

자신감과 능력이 울트라러닝의 궁극적인 목표다. - P112

직접하기를 가장 쉽게 하는 방법은 그저 잘하고 싶은 그 일을 행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 P141

사물을 분명히 설명하고 바보 같은 질문들을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막을 수 있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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