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인 배드민턴 - 개정판
이종인 지음 / 맑은샘(김양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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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에 관련된 책을 알라딘에서 뒤져 봤다.

생각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다.

우리나라 배드민턴 동호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책은 몇종류가 되지 않는다.

'하긴 운동은 몸으로 하는건데 직접 실기로 배워야지 누가 책으로 배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필요하다.

동호인 클럽에서 매주 4번하고 레슨도 일주일에 2~3번을 하고 있는데도 생각보다 실력이 늘지 않는다.

배드민턴 신이 존재한다면 너무 박한것 아닌가 싶다.

내딴에 이렇게라도 노력 하는데 실력 좀 팍팍 올려 주면 안되나?

 

어쨓든 책값이 레슨하는 비용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이니 레슨 하는셈 이라 치고 골라봤다.

모두 각각 다른 종류의 책3권을 알라딘을 통해 구매를 했다.

<동호인 배드민턴>, <시작해! 배드민턴> 그리고 <배드민턴 전술 교과서> 이다.

이 중에 가장 먼저 본 책은 <동호인 배드민턴> 이다.

이 책은 나같은 동호인들을 위한 책이다.

우리나라에 배드민턴 동호인이 약 400만명이란다.

책은 글쓴이가 직접 동호인 배드민턴을 치면서 체득한 노하우를 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글쓴이는 50이 넘은 나이에 늦게 배드민턴을 시작했고 자신이 10여년을 넘게 동호회에서 운동하면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것들을 담았다.

늦깍이로 시작한 저자는 '어떻하면 시행착오를 줄이고 빠르게 기량 향상을 할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작가 나름의 핵심 포인트를 요약했다.

책에는 교본이라고 할수있는 기본 자세나 기술 방법 같은것은 전혀 없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처음 배드민턴을 시작하는 초보가 보기에는 별 도움이 안될것 같다.

그런데 구력이 2~3년 정도 되는 동호인이면 쉽게 이해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상대방이 스매싱을 리턴 하는데 그냥 붕붕 올려 주는 것 보다는 공을 살짝 죽여 네트 가까이 떨어뜨리거나 되치기로 양 사이드로 제치는 방법을 말한다. p.32>

<의지력과 상상력의 대결에서는 언제나 상상력이 이긴다.  p.80>

<상대가 칠때 상대의 몸을 보지 말고 라켓 면을 주시하라.  p.128>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도 45세가 넘어 배드민턴을 시작했기 때문에 동병상련(同病相憐), 격하게 공감이 갔다.

특히 대회 전략 편에는 '평상심이 도' 라고 시합에서도 평상심을 가지고 편하게 치라고 조언한다.

수행자들이 수행을 해야 하는 최종 목표가 평상심에 이르기인데 배드민턴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운동이 수행하고 뭐가 다르랴?

동호인들 끼리 하는 말이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60세에는 다 같은  A 조에서 만난다고.

두번째 <시작해 배드민턴!>은 배드민턴 이론책이다.

동작과 기술이 사진과 함께 설명이 되어 있어있다.

그래서 앞의 책<동호인 배드민턴> 과 상호 호환식으로 보면 좋을것 같다.

이 책은 기초부터 고난도 기술까지 기본적으로 구성이 잘 짜여있다.

이 책의 장점은 큐알 코드가 민턴 기술 별로 따로 있어서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을 볼수가 있다는데 있다.

개인이 필요로 한 부분을 동영상을 통해 여러번 반복해서 보고 이해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책이다.

독학으로 배드민턴을 배우려면 필독 할만 하다.

<배드민턴 전술 교과서>는 '후지모토 호세마리' 라고 하는 일본인 코치가 낸 책이다.

나에게는 3권의 책중 가장 끝판왕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책은 단식, 복식 시합시에 사용되는 전술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 앞의 두권을 완전히 마스터해야 적용해 볼수 있을것 같다.

옆에 두고 자주 봐야 하겠지만 배드민턴은 이론만 알아서는 절대 실력을 향상 시킬수가 없는 운동이다.

내 딴엔 아주 잘하고 있다고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반복되는 실수에 좌절에 빠지기도 하고, 운 좋게 이기는 날엔 자만감이 하늘을 찌르기도 하고, 배드민턴은 아주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논다.

그래서 중요한게 부동심의 마음인데 정말 아직도 멀고도 먼 경지이다.

하지만 나의 인생 중반이후 어쩌다 시작한 운동인데 포기 하지 말고 가는데 까지 가본다 는 심정으로 오늘도 배드민턴 라켓을 든다.

다음주말에 동호인 클럽들간의 연합대회가 열린다.

지난번  c 조로 승급한 이후 첫 대회인데 이번에는 마음 편하게 쳐보려 한다.

평상심이 도,  평상심이 도.. 주문 처럼 외운다.

그래도 어쨓든 목표는 A 조.

끝까지 간다.

1. 항상 라켓들고 준비
2. 공을 몸앞에서 빨리
3. 스매싱, 드롭은 중간
4. 푸시는 잡아서 짧게
5. 짧은공, 되면 앞으로
6. 언더 보다는 헤어핀
7. 라켓면 보고 좌우 판단
8. 서브 리턴도 낮은 자세
9. 스매싱 리턴시 전진
10. 허를 찌르는 플레이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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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3-10-3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1승 2패, 첫 게임때 영혼이 탈탈 털려버렸다. 성장을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하자. 목표는 명확하게... 멘탈 부터 잡자.
 
유리알 유희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3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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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 <싯다르타>를 읽고 난후 느꼈던 감동으로 인해 선택한 책<유리알 유희>.

앞의 두 작품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젊은 시절때 나는 읽지 못했었다.

인생의 중반이 넘어서야 알게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통해 '내가 만약20대나 30대에 읽었다면 어쩌면 지금같은 감동을 못 느낄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서를 하면 할수록 '삶의 경험치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유리알 유희는 헤르만 헤세의 앞의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다.

처음 서문에서 부터 적잖이 당황했다.

책의 서문은 '유리알 유희의 역사를 일반인들을 위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글'이라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읽으면 이해가 안간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바흐, 모자르트, 대위법, 라이프니츠, 스콜라 철학, 베네딕스 수도회, 성 이그나티우스, 여씨 춘추, 우파니샤드 등, 철학과 종교, 인문학에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언급과 여러 학문의 내용들이 서문에 인용된다.

게다가 작가가 창작을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도 섞여있어 인물들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따지면서 읽으면 헷갈린다.

또한 유리알 유희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속에 유리알 유희의 구체적인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서문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난독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종종 들었다.

그런데 다시 찬찬히 맥락만 살펴 보면 기실은 단순한 내용이었다.

 

결론은 유리알 유희는 '고도의 정신적인 유희라는 것' 이다.

유희(遊戱), 중국어로는 유희를 (游戏 youxi) '요우시' 라고 읽는데 뜻은 '게임','놀이' 로 해석된다.

즉 유리알로 하는 게임, 우리 말로는 '유리알 놀이' 라고 풀이 할수 있겠다.

그리고 '유리알'이란 말에서 나는 어릴때 '유리 구슬'로 놀이를 했었던 것이 생각 났는데, 아마도 그런 연상 때문인지 머리속에서 '구슬 놀이' 의 이미지로 이해 되어져 버렸다.

실제로 작품속에 등장하는 유리알 유희에 해당 하는 게임, 놀이는 우리 현시대 시점에서는 존재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점은 2400년경 미래의 시점에서 그보다 200년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을 전기(傳記) 형식으로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는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물(異世界物) 스러운 요소가 있다.)

 

전기의 인물은 당대 전설적인 '유리알 유희 명인' 에 관한 것이다.

즉 서문은 미래의 세계관에 존재하는 유리알 유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부터, 기독교 철학, 고전 음악과 인문학, 수학을 동원해 가며 설명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리알 유희는 미래에 존재 하는 게임이며 현재 우리의 세계관에서 알고 있는 게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게임이나 놀이인것이다.

현대에 게임이라 일컫는 것은 컴퓨터 오락이나 가상 현실 게임과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동양의 장기, 바둑, 서양의 체스나 보드 게임, 각종 카드 놀이가 있을것이다.

그런데 유리알 유희는 우리시대에 존재하는 게임의 틀로는 인식을 하면 안된다. 아니 인식 할수도 없다.

 

21세기 이후 미래의 인류가 내놓은 정신문명의 최상 단계의 게임인것이다.

형식은 음악, 사용 도구는 유리알, 내용은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학문. 즉 수학, 철학, 언어학, 천문학, 종교학 과 최종적으로 명상으로 집대성한, 모든 인류의 지혜를 통섭화된 형태로 이루어진것이다.

한명, 둘, 셋이 할수도 있고 나중엔 대중이 함께 할수 있는 게임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게임이라고 해서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니다.

유리알 유희는 일반인이 접근하기엔 너무도 쉽지 않은 놀이이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학문을 깊이 있게 체득해야 하고 명상의 경지까지 갖춰야 한다.

즉, 작품속 세계관에서 최고의 천재들을 모아 더불어 명상의 경지까지 오른 정신적으로 최고의 수준이 된 사람만 참여 할수 있는것이다.

 

대략 이렇게만 맥락을 이해하고 서문읽기를 끝내면 책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가 시작된다.

소설 유리알 유희는 유리알 명인(名人)이라 불렸던 <요제프 크네히트> 의 전기문이다.

작가가 미래의 시대, 2200년경에 존재했던 전설적인 유리알 명인의 전기를 2400년에 쓴것이라 읽는 시점이나 보는 관점에서 글을 보는 독자는 혼동이 올수도 있겠다.

더구나 중세 유럽의 귀족스러운 분위기의 학교, 고풍의 수도원, 속세를 벗어난 죽림등의 배경으로 인해 작품속에 이세계물의 요소가 녹아있어 과연 미래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소설의 줄거리는 의외로 정말 단순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주인공의 성장기이며 또 다른 관점에서는 구도기(求道記)와 같다.

처음 서두에서 유리알 유희가 뭔지 장황한 설명에 읽는이의 진을 다 빼놓는다.

그리고 정작 작품이야기는 쉽게 읽힌다. 작가가 독자를 쥐고 흔들고 있다.

(달리 거장이 아니다. 작가가 명인이다.)

 

전기 형식을 띈 소설은 정말 담담하게 서술된다.

크네히트의 성장기로 보면 카스텔리엔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과, 카스텔리엔에서 어떻게 정신적으로 성장하는지, 그리고 성장중에 만나는 인물들에 대해 시간순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구도기적인 측면으로 보면 주인공이 대가나 명인들로 불리는 선지식들을 만나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보통 소설에서 느끼는 엄청 스릴이 넘치거나 흥미진진하진 않다.

어찌보면 밋밋하게 진행된다. 그러면서도 여러 복선이 계속 깔리며 진행된다.

그러다가 전기의 마지막 부분, 소설의 마지막에 최고의 강렬함과 충격을 남겨놓는다.

그리고 곧 바로 크네히트가 남겼던 <유작들>로 이어진다.

여러 편의 시와 산문들, 요제프 크네히트가 마치 정말로 존재했던 인물인양 명인이 남긴 글들이 첨부되어 있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 크네히트가 연구 시절에 작성한 이력서 3편은 따로 별도의 단편 소설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력서라고 해서 우리가 취업할때 내는 그런 이력서가 아니다.)

이 이력서 세편을 읽으면서 현시대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떠올랐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이 책의 이력서의 3편과 결이 상당히 닮았다.)

 

작품을 읽고 난후에야 헤르만 헤세가 전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느낄수 있었다.

작가의 메세지는 작품속에 크게 세부분에서 언급한것 같다.

먼저 크네히트가 번역한 서문의 첫 문단, <알베르 투스 2세, 정신형성에 관한 논고> 에 나온다.

두번째는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을 떠나기전 교육청에 제출한 장문의 편지글에 있다.

마지막 세번째로 3편의 이력서, <기우사, 고해사, 인도사> 를 통해 작가의 메세지를 확인해 볼수 있었다.

 '서문, 장문의 글, 이력서' 만 따로 다시 보면 전체 맥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정작 '유리알 유희'는 복잡해 보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메세지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인것이다.

 

헤세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과연 무엇이었나?

후에 보니 변증법적 구도로 정리가 되어졌다.

먼저, 정()은 잡문의 시대를 논함, 반()은 정신으로의 극복, 합()은 세상속으로 , 이렇게 변증법적인 헤세의 사유체계를 엿볼수 있었다.

 

먼저 잡문(雜文)의 시대를 논하다.()

잡문의 시대란 무엇인가?

<그날그날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급하게 성의 없이 쓴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이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서 가려내고 기사화하는 일은 급속도로 무책임하게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완전히 같은 길을 밝고 있었다. 1권 p.26>

<한편 강연 또한 성행했는데....중략... 당시 강연가나 정신의 도둑들은 너 나 할것 없이 논문을 쓰는것 말고도 엄청난 수의 강연을 했다.... 중략... 맹렬한 경쟁을 벌이면서 상상할수 없을 만큼 행해졌다. 1권 p.28>

<조각나고 의미를 상실해 버린 교양 가치나 단편적 지식의 홍수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이미 언어의 가공할 만한 가치 상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1권p.29>

<우리가 보기엔 때로 '전쟁 시대' 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잡문 시대' 라고 부르는 정신적 침체와 권력 투쟁의 주요 특징입니다. 2권 p.50>

 

이거 완전히 지금 우리 시대가 아닌가?

유투브의 수많은 동영상, 인터넷 매체의 헤아릴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 더구나 자극적이고 진실치 못한 정보의 오류들 까지. 현시대가 곧 잡문의 시대인것이다.

작품속의 시점으로 보면 과거의 시대, 잡문의 시대를 말한것인데 실제 소설이 쓰여진 1940년대로 보면 미래를 예측 한것이나 다름 없는것이 된다.

헤세는 정확히 예측했다.

인류 역사상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라 부르며 이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인간 중심, 이성 중심'인 세상이 되었다.

그동안 '신 중심, 종교 중심' 의 시대로부터 자유를 얻은 인류는 '인간 중심'은 산업화와 더불어 이기주의로 변질되고 '이성 중심'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물질 만능주의 폐단을 야기하게 되었다.

그러한 문제점은 개인, 집단 이기주의로 세계 곳곳의 정치와 종교, 사회 계층에서 양극화 현상을 심화 시키고 결국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두번째로 이러한 잡문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가는 방안을 정신 세계에서 찾고자 했다.()

소설에서는 유리알 유희로 설명하고있다.

그렇다면 왜 유리알 유희여야만 하는가?

 

<그 시대의 정신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처에 그들의 새로운 사고 내용의 표현수단을 구하려는 뜨거운 열망이 살아있었다. 사람들은 철학을 동경 했고, 종합을 동경 했으며, 자신의 분과에만 틀어 박히는 종래의 행복을 불충분한 것으로 여겼다. 전문 분과의 한계를 깨고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학자들이 있었다...중략... 많은 유서 깊은 아카데미와 비밀결사가, 특히 아주 유서 깊은 동방 순례자들의 결사가 유희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권 p.45~47>

 

<유희는 유희자에게 완전한 것을 찾아가는 어떤 상징적인 형식을, 숭고한 연금술을,모든 형상이나 다양성을 넘어서 내면의 고유한 정신 세계로, 즉 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 했던것이다. 1권 p.50>

 

<‘비상시’에 사람들은 종종 지식인들이 정치적이 되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후기 잡문시대에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정신의 정치화 또는 군사화에 대한 요구도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중략….

2곱하기 2가 무엇인지 권력자가 결정하도록 내버려 주는 자는 그 이상으로 비겁자이며 배신자입니다. 진리에 대한 지조, 지적 성실성, 정신의 법칙과 방법에 대한 충실성을 다른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는 일은, 설혹 그것이 조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해도 배신 입니다.  2권 P. 60~61>

 

작금(昨今)의 시대, 즉 잡문의 시대엔 지식인들이 이미 정치화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현재 매체에 나오는 소위 지식인들은 이미 정치화를 넘어서 권력이 되어 버렸다.

더 나아가 군사화까지 된다면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에 대해 작가는 그러한 지식인들에 대하여 진리에 대한 비겁자, 배신자라고 유리알 명인의 입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진리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잡문의 시대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정신 문명을 추구 하게 되는것이었다.

우리의 지금 현시대는 과도기가 아닌가 싶다.

물질 문명의 폐단에 대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지 않는가?

그런한 바램이 소설에서는 유리알 유희로 완성되게 된다.

카스탈리엔이란 수도원과도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인류는 영재중의 영재를 선별하여 교육을 시킨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순수 학문들, 지혜들을 연구하고 통섭한후 다시 또 명상을 통해 완성되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어찌보면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언급했던 철인이 다스리는 국가, 혹은 플라톤이 세웠던 아카데미와 같은 역할을 하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듯하다.

유리알 유희는 단순히 학문 지식 연구만을 강조 하지 않는다. 지식 보다 한단계 위, 지고한 정신의 결정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희를 신성과도 같은 개념으로 까지 발전 시켰다.

 

유리알은 한마디로 구슬이다.

옛부터 동양에서는 불로장생이라 하여 신선이 되길 갈망 했었다.

그때 빚어지는 영단(靈丹)은 구슬과 같은 환()이라고 한다. 지금도 한약재중에 구슬처럼 빚어서 환으로 만든 약들이 있다.  한약재를 농축 집적하여 구슬 처럼 둥글게 만든것이다.

그래서 둥근것은 또한 진리를 함축것이 되며 세상의 모든 학문을 응축한 결정체를 뜻한다.

게다가 유리의 영롱한 모습은 명상이라는 신비스러운 정신 세계한다.

그래서 유리알은 정신세계의 최고의 경지를 응축한 결정체의 상징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유리는 쉽게 깨질수 있다. 정신세계의 총화도 쉽게 깨질수도 있는 단점이 있는것이다.

작가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메세지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는 단계까지 제시하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잡문의 시대를 거쳐 유리알 유희로 완성되는 정신의 시대를 거친후 반드시 다음 단계가 오리라 예견했다. ()

잡문의 시대를 극복한 정신의 시대도 영원할수 없는것이다.

정신의 시대에서 유리알 유희도 영원히 지속 될수 없으며 카스탈리엔이란 수도원도 결국엔 끝이 오리라고 내다 봤다.

그 시대의 마지막에는 잡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군사적 혁명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현상은 고정되지 않는다. 항상 변한다. 그게 곧 진리다.

 

<카스텔리안의 존속의 문제가 될때는 유리알 유희가 가장 먼저 없어지게 될것 입니다…중략…유리알 유희는 우리가 지은 건축물의 최첨단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위태로운 부위입니다. 2P.63>

 

<아무리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역사가 되고 지상의 한 현상이 되는 즉시 무상한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2권 P.64>

 

<우리는 저 속세에 있는 학교에 겸손하면서도 막중한 책임을 지고 봉사하는일을 우리의 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명예로운 부분으로 인식하고 그 일을 완수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권 P. 65>

 

결국 크네히트는 유리알 명인이란 최고의 직책과 자신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카스텔리안을 떠나고자 한다.

지고한 정신의 수준도 결국 깨지기 쉬운것이고 모든것은 변하고 영원하지 않는 진리를 생각한다면 그 또한 덧없다는 것이다.

정신 세계의 최고의 경지라고 해도 역사가 있고 현실이 있는한 세상과 동떨어진 소수인들만 누릴수 있는 카스텔리안이란 곳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현실의 세계로,  대중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헤세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것이 아닐까?

 

선불교에서는 십우도(十牛圖) 로 깨달음의 단계를 소를 찾는 비유를 통해 묘사한 그림이 있다.

소는 마음의 본성품, 불성을 말하고, 그것을 찾는 목동(동자승)은 수행자를 상징한다.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심우(尋牛)로 시작하여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견적(見跡), 마침내 소를 보는 견우, 그리고 소를 얻게 되는 득우, 소를 기르는 목우, 소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잊고 사람만 남는 망우존인(忘牛存人), 소와 사람 둘다 잊는 인우구망(人牛俱忘), 본래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반본환원(返本還源), 시중에 들어가 중생을 돕는 입전수수(入廛垂手) 단계로 총 10개의 그림으로 묘사를  했다.

선불교의 관점으로 본다면 크네히트가 유리알 유희의 명인으로 깨달음을 얻은후 카스탈리안을 떠나 세속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의 입전수수의 경지에 해당된다고 비교 할수 있겠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불교의 대의와도 부합되는것이다.

결론적으로 헤세의 이러한 메세지는 크네히트의 3편의 이력서를 보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소위 말하는 이력서로, 원하는 과거의 어느 시대로 자신을 옮겨 놓는 가상의 자선전이다. 1권  p.148>

 

3편의 이력서에서 특히 마지막 인도사는 우리의 삼국시대 설화 '조신의 꿈'을 연상케하고 중국의 설화인 '한단지몽'(邯鄲之夢)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우리가 현실에서 진짜라고 철썩 같이 믿는게 사실은 '다 공()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

 

작품속에서 작가는 현시대에 무차별적 드러나는 서양 문명의 폐단을 예측했다.

그래서 그에 따른 대안으로 정신 문명의 승화, 동서양의 모든 정신세계의 조화라고 보았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깨달음은 세상과 동떨어진 일부의 전유물이 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정신적인 경지는 모든 인류에게로 전파가 되어야 하고 인류 전체가 영적으로 한단계 올라서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다시 한번 서문의 첫장을 보면 헤세의 뜻을 보다 분명히 읽을수 있다.

 

<즉 있음을 증명할 수도 없고, 있을것 같지도 않은 어떤 것을 경건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실제하는 것 처럼 다룸으로써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들 만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도 없지만 또 그만큼 절실히 사람들 눈 앞에 그려 보여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없다. 1권 p.12  알베르트 2세의 서문 구절.>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할수 없고,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의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가?

있긴 있지만 증명할수 없고 이름 지어질수 없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그것, 그것을 도라고 할수도 뭐라 할수도 없는 그것, 헤세는 절실히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것이 불교의 공()이요, 도가의 도(), 기독교의 복음(福音)과 다르지 않는것이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작가가 현대와 미래의 인류에게 전하는21세기의 간절한 메세지라 생각된다.

 

독서를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을 둘러싼 알 껍질에 금이 간다.

독서는 알 껍데기를 깨고 나와서 세상 밖을 비상(飛翔)하기 위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참고로 작품속의 서문을 쓴 '알베르 투스 2세'는 가상인물이며, 역사적 실제 인물 알베르 투스는 '신학대전'을 완성한 스콜라 철학의 대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 알베르 투스에게서 '철학자의 돌' 이라고 불리는 연금술사가 사용하는 돌을 물려 받았다고 한다. '철학자의 돌'은 파울로 코엘류 '연금술사'에 언급된다.

 

동방 순례자들에게 바친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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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 예의 바른 무관심의 시대, 연결이 가져다주는 확실한 이점들
조 코헤인 지음, 김영선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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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읽다, 이제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것에 관한 책'까지 읽게 될줄이야...

'아이구, 참나. 나 살기도 바쁜데 웬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말을 걸어야 한다니... 누군줄도 모르는데... 왜 그래야 하는데? 그리고 이런걸 또 책으로 내는 사람도 있다니...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책으로까지 나왔을까?' 제목에서 부터 호기심을 자극했다.

책의 제목은 쉽고 가벼운 주제 같은데 막상 읽어보니 생각보다 쉬운 주제가 아니었다.

이 책은 소통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상의 화두가 들어 있다.

작가의 경험에서 책은 시작한다.

대서양 어느섬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의 교류행사가 있었다.

행사와 파티를 치르고 저녁에 동료 작가들과 택시를 탔었다.

그때 그 택시에서 작가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마주하게 된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이에게서 한평생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완벽하게 요약한 타인의 인생담을 듣게 될줄 몰랐단것이다.

그후 작가는 낯선이에 대한 생각과 왜 우리는 낯선이에게 쉽게 말을 걸지 못할까? 낯선이에게 말을 걸어 대화를 나누면 어떤일이 생길까? 등의 의문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사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외로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사는 도시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매일 수많은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만 서로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서로다 모른다.

이제는 모두가 모두에게 낯선이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우리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낯선이에게 말을 거는 능력' 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이는 위험하다는 말과 달리, 낯선 이와 대화할때가 오히려 대화 하지 않을때 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한다. 낯선 이와의 대화는 단순히 살아가는 방편이 아니라 살아 남는 전략이다. P.21>

책은 크게 두가지 구조로 짜여진것 같다.

첫째는 작가가 직접 배우고 참여하는 실험정신 가득한 체험들.

작가는 낯선이에게 말을 거는 방법에 대한 수업을 듣거나 그러한 모임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조언을 구한다.

즉 작가가 현장감 있게 몸소 체험하면서 낯선이에 말을 걸면 어떤 잇점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구성이다.

둘째는 학구적인 방법으로 낯선 이에 대한 인류학적, 종교학적, 심리학적, 정치학적인 면까지 다양한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원시시대부터 인류 문화의 낯선이에 대한 규정, 이방인에 대한 성서속의 규정들, 세계 곳곳  문화속의 환대에 대한 인식들, 현대사회에서 낯선이에 대한 두려움의 이유, 점점 심해가는 정치적인 양극성에 대한 해결책 제시등.

낯선이에 대한 규정이 단순하게 내 주위의 '모르는 사람'만을 지칭하는게 아니다.

좀더 나아가 '나와 다른 사고를 가진 사회적인 계층'과 '정치적인 양극단'의 소통에 대한 문제까지 다루어 진다.

그래서 이 책엔 비교적 방대한 연구와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그냥그냥 쉽게 읽혀지는 내용은 아닌것 같다.

결국 이 모든 구성은 서로 교차해서 이어지며 이 책의 주제, 낯선이에게 말걸기로 완성 되어진다.

그런데 책에서 작가가 배우고 쌓아온 학습의 결과, 낯선이에 말거는 방법은 막상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 (말을 걸어야 하는) 먼저 상대의 눈을 바라본다. 친절한 마음을 담아서...

둘째, 상대를 향한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셋째, 그후 반응을 보고 다가가 자신이 상대에 대한 호의가 있음을 밝힌다. 이때의 호의는 작업을 거는것과 다르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드려도 되는지~?' 혹은 '제가 이런 자리에서 얘기를 하면 안된다는것은 알지만~', 등의 대화전에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닌란것으로 안심시킨다.

넷째, 인사를 하거나, 질문을 하거나, 같이 보고 있는 관심사에 대한 얘기로 연결을 시도한다.

다섯째, 반응을 보고 상대가 불편해 하면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

여섯째, 계속 대화가 시작 되면 경청하기.

자. 이게 낯선 이에게 말걸기 요약 내용이다..

그런데 이게 쉬운것인가?

실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낯선 이에게 다가가 쉽게 말걸기 위해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예상된다.

작가는 이런 방법을 시간과 돈을 써가며 배웠다는게 어찌보면 이해가 안가는 면도 있지만 그만큼 작가는 진심으로 '낯선이에 대한 말걸기 화두'에 매달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낯선이에게 말걸기 훈련이 쌓이자 나중에는 본인이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자신한테 말을 걸기 시작했단다.

내 경험담이다. 약 25년전 쯤, 군대 제대한후 곧 바로 나는 중국 배낭 여행을 떠났었다.

대학에서 중문과를 전공중이었지만 당시에 나의 중국어는 무척 서툴렀다.

그래서 복학전에 중국어라도 단련하자는 의미에서 무협지속의 중국천하를 주유하는 나를 상상하며 여행길을 떠났다.

내 생에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가는 경험이라 중국에 대한 기대는 정말 컸다.

그런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맡게된 중국 특유의 이상한 냄새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의 차림새, 한창 짓고 있는 고층건물들의 외벽을 감싼 굵은 대나무 플렌트 구조물, 도로에 굴러가는 똥차 같은 차들. 모든게 낙후된 세계로만 보여졌다.

내가 어릴때 부터 막연히 동경하던 중국하고는 달랐다.

기차를 타면 더욱 황당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기겁을 했는데 기차 창문을 통해 사람들이 영화 '부산행'의 좀비처럼 올라탔다.

정상적인 문으로 출입을 할수 없을정도로 사람과 짐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기차안 통로도 꽉 막혀있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정좌석은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개념자체가 아예 없었고 자리가 나면 아무나 앉아버렸다.

겨우 끄집고 들어가 내 자리를 찾아서 앉아있던 사람 쫓아내고 앉으면 자리 밑에 뭔가 물컹한다.

그래서 내려다보면 좌석 밑바닥까지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심지어 화장실안에 까지 사람이 짐과 함께 꽉~차있어 14시간동안 오줌을 정말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었다.

나의 중국에 대한 모든 환상은 기차여행을 통해 전부 무너져 내렸다.

지금와서 돌아보건데 당시 중국은 지금의 중국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상식이 전부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때 중국 여행에서는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였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에서 언급했던 노바디(NOBODY) 였던것이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특별한 존재(SOMEBODY) 가 되는게 아니라 개별성을 잃어버린다. 결국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 일 뿐이다.>

-<여행의 이유> 일부 중에-

그런데 신기한것은 여행을 다니면서 그 낯선 세계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웬지 모를 즐거움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그 즐거움이 앞의 나의 모든 실망을 전부 덮어버렸다.

낯선 세계, 낯선 사람들, 낯선 문화속에서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지만 그들은 내게 크고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말도 잘 못하는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내가 혼자 여행하는것을 걱정해주고 심지어는 어떤 목적지까지 같이 동행하거나 차를 태워주기도 했었다.

물론 바가지를 노골적으로 씌우는 일부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건 세상 어느곳이나 있으니 스스로 조심하면 됐다.

그때엔 호기심 가득한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들도 내게 많은 호기심어린 걱정과 호의를 베풀었다.

이때 나는 내가 사는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많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경험을 했던것이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거의 몇달을 여행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계속 생각이 났다. 만났던 사람들, 가봤던 곳들, 또 다시 보고 싶은 사람들.

정말이지 또 한번 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난생 처음으로 마음에서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 그리움이 되어 버렸다.

결국, 그 바람이 지금은 실현되어 벌써 20년이 넘게 이곳에 살게 되어 버렸다.

(그때 바람이 너무 컸었나 보다.)

작가가 배우고 체험한 경험과 나의 경험을 종합해서,

지금 돌이켜 보면 낯선이에게 말을 건다는 행위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열어야 가능한것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우선 여는것이 상대의 마음과 겉모습을 고려하는것 보다 중요한것이다.

우리는 보통 자기 마음에서 우선적으로 걸려버린다.

'상대가 어떻게 날 생각할까? 날 이상한 놈으로 보지 않을까? 괜히 말걸지 말자.'

그렇게 상대방의 알지도 못하는 마음을 핑계로 내 마음부터 닫아버린다.

상대가 아니라 내 마음부터 봐야 했던 것이다.

여행지에서 철저히 나는 나만 볼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철저하게 낯선 이로 '노바디'에서 시작할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여행지에서는 마음을 열수밖에 없는 환경인것이다.

그러니 상대가 누구든 먼저 재고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 말을 걸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들의 대부분은 내가 열어둔 마음 상태로 그쪽 마음도 함께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야 상대와 내가 서로 마음이 열린상태에서 대화가 될수 있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그렇기에 당시에 중국어가 서툰 나는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을 상대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수 있었다.

결국 내 자신의 마음을 연다는것이 가장 중요한것이다.

이것은 불교식으로 표현 한다면, '나'를 내려 놓는것이 되는것이다.

결국 수행도 '나' 라는 관념 부터 내려 놓아야 시작 하는셈이 아닌가?

나를 내려 놓을수 있어야 스승의 가르침도 받아 들일수 있고, 만물 만생의 뜻도 받아들일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니 노바디가 되는 '나'가 없는 경험을 하는데는 여행의 환경이 최적이였던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이 열리며 상대와 내가 둘이 아님을 경험했던것 이었다.

그래서 그때 여행의 경험을 잊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여행은 구도가 되는 것이었다.

책의 작가 존코헤인은 지금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서부 출신의 저널리스트이다.

작가가 주창하는 낯선 이와 말을 걸어야 하는 것만으로는 지금의 현대 사회에 발생하는 문제점들 (고독, 계층간 분열, 정치적인 양극성 등) 을 해결 할수있는 열쇠가 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와 실험정신은 진심으로 느껴진다.

작가의 그 진심은 현시대에 던지는 조그만 돌과 같다. 그 돌은 곧 화두이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나와 타인, 즉 낯선 이에 대한 소통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게 하는 화두를 던진것이다.

작가가 던진 그 돌이 물위에 동심원처럼 점점 커져가는 파장이 되길 바란다.

1994년 6월 르완다의 후투족이 난데 없이 들고 일어나 투치족 이웃과 동료를 살해했다.

살해된 이는 50만에서 10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다. 현재까지 전쟁중이며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이 전쟁으로 희생을 당하고 있다. 양쪽의 희생자가 앞으로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른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 단체인 하마스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규모가 어떻게 될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은 지금 이순간에도 발생하고 있다.

남의 일이 아니다. 무슨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가?

이웃 나라에서 행해지는 전쟁과 살인에 대해 우리는 전혀 무관한것인가?

우리나라 상황은 이미 남과 북이 분단상태이고 대한민국 내에서도 정치의 양극화와 계층간, 부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개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국가간의 이기주의가 팽창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고 사회는 복잡다양 해졌지만 정작 현실의 우리는 갈수록 고립화가 되고 우울해지며 점점 생각의 폭은 좁아지고있다.

기술 발달로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온 세계의 소식은 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우리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마음은 전혀 모른다.

이제는 나 조차도 정확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다가올 곧 미래엔 우리가 선택하고 소통해야될 문제를 AI가 대체하는 시대로 변해버릴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통하는 '주체적인 나' 는 없어진다. 그 '나'는 관념의 울타리에 더욱 더 갇히게 될것이다.

각자가 스스로 주인이 되고 '고정된 나' 라는 관념을 벗어나, '나'와 '너'가 '우리'로 서로 소통하는길은 마음 밖에 없는것 아닌가?

지금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있다. 관념에 갇혀있는것이다. 고정 관념은 점점 심해진다.

소통은 점점 힘들어진다.

나만 옳다는 관념. 남들은 틀렸다는 관념.

그렇게 둘로 보는 생각이 세상에 만연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낯선 이와 소통할수 없을것이다.

먼저 나부터 돌이켜 봐야한다.

내가 과연 열린 마음으로 있는 상태인지.

나의 마음을 지켜보지 않으면 영원히 상대를 볼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위해, 인류를 위해, 평화로운 마음으로 내 자신 부터 돌아봐야겠다.

그리고 나서 나와 다르지 않은 낯선 이를 바라봐야겠다.

이것이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낯선이도 나의 형제요 자매요, 부모란 마음으로 생각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는것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
군자는 두루 사귀어 편벽하지 않다.소인은 편벽해 두루 통하지 못한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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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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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류' 는 어느 책에서 소설에 대해 이렇게 얘기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소설은 크게 4가지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두사람간의 사랑 이야기, 둘째, 세사람간의 사랑 이야기, 셋째, 권력투쟁 이야기, 넷째, 여행 이야기. "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여행이야기이다.

그런데 내가 볼땐 화자인 '나'가 '조르바'란 선지식(善知識)을 길위에서 만나 깨달음을 얻는 구도기(求道記) 라고 생각된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화자 '나' 는 작가 자신을 말한다.

작중에서 '나'는 작가이자, 사업가 이기도 하다. 동시에 마음속엔 붓다를 염원하고 머리속엔 그리스 민중을 위해 고뇌하는 지식인이기도 하다.

갈탄광 채굴 사업을 위해 크레타섬으로 가기전, '나'는 비 내리는 바닷가카페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운명처럼 만난다.

꺽다리65세 노인이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여느 청년들 보다도 강렬한 기운을 지닌 조르바.

카페에서 만난 자리에서 '나' 의 마음속으로 단숨에 들어와 버리는 조르바의 일침.

<왜요! 왜요!,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왜요?' 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됩니까?>

 

 

그렇게 주인공들의 크레타섬으로 향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마치 서유기에서 불법을 구하러 천축으로 향하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여정처럼 '나와 조르바' 의 구도기가 시작이 된다.

또한 이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53선지식을 찾아 도를 구하는 '선재동자'의 구도기와도 같은 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 여지없는 새로운 구도기로 읽히게 된다.

'나'는 서유기의 시점으로 보면 삼장의 역할을 맡은셈이고 화엄경의 시각으로 보면 선재동자가 된다. 또 다른 주인공 조르바는 서유기로 치면 '손오공'의 역할이지만 화엄경으로 치면 문수보살과 관세음 보살, 뱃사람, 창녀등 53 선지식의 역할을 하는셈이다.

 

 

소설에서 '나'는 30대 중반의 젊은 사장(두목) 이지만, 조르바는 60대 중반의 노인이며 '나'에게 고용된 직원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조르바는 현실의 갑을관계를 훌쩍 벗어나버린다.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이런문제에서 만큼은,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이봐요, 두목, 제발 좀 끼어들지 마시오. 내가 아무리 애써 놓아도 당신이 몽땅 무너뜨리고 말아요. 오늘 인부들에게 한 이야기, 그게 뭐요? 사회주의라고? 개코 같은 소리! 당신은 목자요? 자본주의요? 결단을 내리쇼! ">

 

'나'의 가슴은 끓어 오르지만 행동에는 서툰 지식인, 조르바는 학교근처엔 가본적도 없지만 누구보다도 자비롭고 걸림없는 사람이었다.

<"부끄러운줄 아세요. 두목, 그건 예의가 아니랍니다. 이런 말씀드려서 미안하지만 남자는 그러면 안돼요. 그 여자는 어쨓든 여자 아닌가요? 연약하고 토라지길 잘하는 물건이예요.">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눈을 띄워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자기들 비참한 처지밖에 더 봐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나'는 이성적으로 기독교와 붓다를 공존시키고 통섭하려 했지만 늘 답답했고, 조르바는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면서도 그에 묶여있지 않았다.

<"두목, 당신은 말이오....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먹는 걸로 신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는것 같소.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으니까 괴로워하는 거고, 까마귀에게 일어났던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두목,... 당신 책을 몽땅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은 바보가 아니고 착한사람이니까, 뭔가 괜찮은 사람이 될수 있지도 몰라요">

<"두목, 당신.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게 바로 삶이오!">

 

 

'나' 는 붓다를 추구하고 자유를 갈망했지만 조르바는 자유 그 자체 였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라는 신비는 ?">

<"춤으로 이야기하다니 그게 어디 될법이나 한일인가. 내 맹세코 말하거니와 신과 악마는 이런식으로 이야기 했을겁니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줄 보다 좀 길거예요. 그것 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조르바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았고, 또한 구속하지도 않고 오롯히 '조르바'로만 일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두목, 나 지금 농담하고 있는게 아니외다. 나는 하느님이 꼭 나 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단지 나보다 좀 더 크고, 좀더 힘이 세고, 좀 더 돌았겠지요. 그리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있겠네... 중략...

아시겠지만 하느님은 굉장한 임금이십니다. 굉장한 임금이란게 뭡니까? 용서해 버리는 거지요!">

 

 

소설에서는 '나'와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서 벌이는 메탄광 채굴 사업은 표면적인 사건이다.

그 안에는 크레타 섬에서 만나 조르바와 사랑에 빠진 퇴물 카바레 가수 오르탕스 부인, 팜 파탈의 마성을 지닌 과부여인과 '나' 와의 썸, 겉으론 고고한 금욕주의자 집단의 온갖 추잡한 실태를 보여주는 수도원의 내막, 그리고 크레타 섬사람들의 이해가 되는 민낯이 그려져 있다.

게다가 중간중간 '나'의 죽마고우인 친구 이야기까지 모두가 톱니바뀌 처럼 맞추어져 돌아간다.

모든 소설엔 클라이막스가 있듯이 결국엔 이 모든 사건과 갈등으로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절정으로 향해간다.

과부여인의 충격적인 죽음, 오르탕스의 죽음, 수도승의 죽음등 죽음의 3종 세트로 읽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당겼다가 마지막에 피날레를 장식하는 매탄광 사업의 폭망!

모든게 철저히 실패한 상황에서 그자리를 피해 도망간 크레타섬 사람들만 제외하고 오직 주인공들만 해탈한 모습을 보여준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야호! 이리오쇼!", "조르바, 시작해봐요! 내 인생이 바뀌었어요! 자, 한번 달려 봅시다!">

비극적인 절정에서 돌연히 유쾌한 결말로 화()버린다.

부처를 가슴에 안고 번뇌했던 '나'는 없어지고 결국 조르바와 같은 무애자재(自在)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후 둘은 각자의 삶을 찾아 크레타섬을 떠나게 된다.

 

 

소설에서 조르바는 마치 우리 구한말의 파격적인 선승(禪僧) 경허대사가 연상이 된다.

조르바는 자신이 연약하다고 여기는 여자나 과부들과 숫한 사랑에 빠졌지만 오히려 색정(色情)의 집착을 벗어난 무애행의 경지를 보여준다.

오로지 대상을 대할때 자신을 잊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보인것이다.

소설에서는 시종일관 자유를 언급하며 표현했지만 결국 조르바의 자유는 어느것에도 메이지 않는 무애자재(無碍自在)를 표현 한게 아니겠는가?

만약 조르바가 여자의 몸이였다면 화엄경의 53선지식중 하나인 탐욕의 굴레를 벗어난 '바수밀다 여인(창녀 선지식)' 이 아니였을까?

경허대사 또한 자신은 전생에 기생이었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조르바를 통해 모든 선지식이 도달했던 보살행, 고정됨이 없는 경지를 드러낸것이다.

 

 

선가(禪家)에는 <불립문자, 이심전심(不立文字,以心傳心) 문자에 메이지 않고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한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인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處皆眞) 가는곳 마다 주인이되고, 서는곳 마다 진리가 된다.> 구절이 있다.

소설은 자유인 조르바를 통해 서양식으로 선가에서 전해지는 선지식의 면모를 곳곳에 그려낸것이라 생각 되어진다.

 

 

소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이며 일생을 배가본드(VAGABOND: 방랑자)로 살았다.

길위에서 평생을 돌아다니다가 죽어서도 아테네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문 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후에 유해만 <그리스인 조르바>의 무대인 크레타섬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즉, 소설 속의 '나'는 작가자신 <니코스 카잔차키스> 였던것이다. 실제 자신이 겪은일을 그대로 소설로 끄집어 낸 자전적 소설인 셈이다. 그러니 조르바 또한 실존 인물이었다.

카잔차키스가 존경했다던 4명의 인물, 일리아드 오딧세이의 저자 호메로스, 프랑스 생()의 철학자 베르그 송, 니힐리즘의 니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인 조르바. 

카잔차키스의 생에서 4명의 인물을 변증법적인 구조로 차례차례 만나게 되는것 같다.

그리스 태생인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문명을 누구 보다도 이해했을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무대.

그 신들과 일리아드 오딧세이의 모험을 통해 어린시절 부터 신화의 신들과 서양의 기독교 세계의 유일신을 비교 했을것이라 짐작된다.

카잔차키스는 태어날때 부터 계시로 인해 자신은 주교가 되리라고 생각하며 커왔다고 한다.

그러한 원인으로 수도원에서도 잠시 있었지만 당시 수도승들의 편협된 금욕주의수행에 실망하고 오히려 붓다를 깊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불교 사이에 통섭을 자연스레 시도하지 않았나 싶다.

이후 알게된 생의 철학자 베르그 송의 엘랑비탈(ELAN VITAL) :(생명의 약동)을 통해 그의 철학이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과 다르지 않음을 느꼈지 않았나 한다.

더 나아가 니체를 통해 알게된 위버맨쉬(UBERMENSCH): (초인)로 인해 허무적인 니힐리즘이 아닌 더욱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생의 의지를 굳건히 다졌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 조르바를 통해 지금까지의 동.서양의 모든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체화(體化)할수 있는 인물을 현실에서 만난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이처럼 작가 자신이 소설속의 '나'로 현실에서도 그대로 똑같이 투영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결국 카잔차키스에 대해 좀더 깊게 이해할려면 일리아드 오딧세이나 엘랑비탈, 니힐리즘을 이해하면 좋을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사상과 철학을 잠시 접어두고 선불교를 알고있다면 오히려 곧 바로 카잔차키스의 마음을 엿볼수도 있을듯하다.

베르그송이 주장한 '창조적 진화'나 니체가 주장한 '신은 죽었다'는 개념은 모두 '활발발한 자신의 본성(本性)을 자각하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라' 는 메세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건 불교의 불성(佛性)과 다르지 않은것이다.

즉 소설속의 주제 '자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굴레를 벗어난 자유를 말한다.

서양의 이분법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속에 갇혀버리지 말고 동양이 추구했던 만물의 조화와 자기 완성을 말하고자 했던것이 아니였는가 싶다.

그것이 곧 자유요, 깨달음이란것.

너와 나의 분별이 없고, 세상 모든것은 변화하며 진리는 고정되지 않았다고 하는것.

그럼으로 걸림없는 대자유인이 되자는 메세지를 보여주는것이 아닐까?

그래서 길에서 와서 길로 가는것, '길없는 길의 경지' 를 보여준것이라 생각된다.

길(), 카잔차키스는 길위에서 도를 구한것이었다.

곧 자신의 삶이 바로 구도기 였던것이다.

우리도 역시 각자의 길에서 구도기를 쓰는셈이지 않을까?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 키스 묘비에 새겨진 글귀.

 

<"한동안 나는,조르바의 추억을 모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주저했다. 애들 같은 공포가 나를 사로 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 일을 한다면 조르바가 정말로 죽음의 위기에 빠진게 되어 버리고 만다....나는 이틀, 사흘 , 일주일을 버티었다..... 갑자기 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려 나는 종이를 집어들고.... 나는 미친듯이 써내려갔다... 몇주일 만에 조르바의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갓 나온 아기를 안은 여자 같은 기분이었다... 술라는 편지한장을 내밀고 달아났다...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원고를 무릎위에 올리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정확한 그 순간에 이 편지를 받으리라는것을 알고 있었다.">

<"이게 그분의 유언입니다.... 고인은 자주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자기 사후에는 산투르를 선생님께 드리어 정표를 삼겠다는 분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시면 손님으로 그날 밤을 쉬시고 아침에 떠나실때는 산투르를 가지고 가시라는 겁니다.">

 

 

조르바는 20살때 결혼비용을 모두 털어 '산투르'(기타 악기 일종)를  샀다.

그리고는 터키인 스승을 찾아 1년을 배웠다.

산투르를 배운후 그때 부터 조르바는 딴사람이 되었다.

조르바에게 산투르는 곧 자신이고 자신이 곧 산투르였다.

조르바는 자신을 '나'에게 다시 준것이다. 아니 나는 다시 조르바와 함께 있게 된것이다.

 

지금 나의 조르바는 내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대여 , 그대의 조르바는 그대 안에 있는가?

 

그는 남자나, 꽃핀나무, 냉수 한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의문을 갖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 - P77

나도 사람입니다. 당연히 아프지요. 하지만 이게 자꾸 거치적거리며 신경을 돋우었어요. 그래서 잘라 버렸지요.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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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를 읽는 힘
메르 지음 / 토네이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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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작가는 똑똑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세상의 정보를 연결해서 기회를 포착하는 생각의 혁신>이란 소제목과 <1%를 읽는 힘>이란 큰제목인 책의 작가, '미르' 는 필명이다.

책의 소개를 보면 국내 최고의 자본시장 분석가이자, 경제.주식 분야 파워 인플루언서이자 삼성이나 GE 등의 글로벌 기업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던 사람이며 금융사 4곳에서 임원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이책을 읽으면 나도 경제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확장할수 있을것 같은 충동이 막 솟았다.

나에게 경제, 주식 분야는 늘 관심밖의 분야였었다. 금리 인상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어떻게 주는지, 왜 주식을 하는건지, 그런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어릴때 부터 도통 관심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신문을 보면 경제란은 통채로 그냥 넘겨버리는 섹션이다.

경제 수치나 도표, 금리 같은 용어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의 용어였다. 관심이 없으니 도표나 수치에 대해 볼 줄도 모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몰랐으니...

하지만 더 이상 늙기전에 이런 분야도 모르면 안된다는 강박증이 생겼다.

몇년뒤에 한국에 들어가서 생활하다 머리좋은 사기들꾼에게 사기라도 당하지 않을려면 조금이라도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책한권 읽었다고 당장 뭔가 바꿔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일단 읽어라도 봐야 쉽게 당하진 않겠지'.라는 일종의 보험을 드는셈치고 책을 들었다.

이책은 내 관심밖의 분야라 읽기가 어렵지 않을까 약간의 망설임도 있었지만 막상 읽어 보니 재미가 있다.

신기한게 소설도 아닌데 중국, 미국, 일본, 유럽, 호주, 사우디, 러시아, 폴란드, 베네수엘라, 그린란드와 우리나라 까지의 나라가 각각의 챕터에서 주인공이 되어 독자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는 묘한 흡인력이 있다.

어떤 허구도 없는 단순한 사실과 통계,  % 만 등장시켜도 국가와 국가간의 갈등이 마치 소설속의 인물들간의 갈등대립 구조처럼 변모해 긴장을 줄수 있다는걸 알았다.

삼성전자와 대만 그룹 TSMC와의 반도체 경쟁, 중국과 일본의 희토류 분쟁, 중국과 호주와의 무역 마찰,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한국, 중국, 미국의 개발 추세, 미국이 이기주의적으로 변하는 이유, 석유 파동 시점부터 현재까지 석유로 인한 각 국가간의 입장, 과거 IMF 가 일어난 배경, 금리로 인한 경제 문제, 폴란드로 K방산품 수출 등등 그동안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접했던 사안들에 대한 자세한 배경에 대한 설명이 무척 흥미진지하게 읽혀진다.

아, 그렇구나. 이제 좀 이해가 간다. 내가 나이를 헛 먹은게 아닌것 같았다.

경제는 나에게는 관심 없는 분야라고 했지만 막상 살면서 나도 모르게 시사와 경제의 많은 분야를 접했었던것이다. 그러니 그다지 생소하지 않았던것이다. 사실 경제 용어도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였었다는걸 알았다.

내 삶의 경험치가 독서를 하는데 자양분이 됐었던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필력이 상당한 공도 있었을 것이다. 읽으면서 내심 작가의 필력이 부러웠다.

원래대로 라면 아무 재미 없는 내용인데, 이렇게 쉽게 읽혀진다니...하고 말이다.

작가는 한달에 14권의 책을 도서관을 통해 빌려 읽는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의 블로그에다 0시 10분에 글을 올린다고 한다. (0시 10분에 글을 올리는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평소 경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재테크에 열심인 독자들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이책은 신문기사 경제면과 국제 정세와 시사부분을 짜집기 한것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 같은 경제 문외한에게 경제와 시사를 이해하는데 정말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작가는 '세상은 연결 되어있다. 단순히 일어나는 현상만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을 해서는 안된다' 고 한다. '<나비효과> 처럼 뒤에 벌어질 여러가지 상황과 변수들을 고려하여 생각을 확장하라' 고 한다.

어쩌면 되게 단순한 조언이지만.

국가간의 대립과 갈등 사이, 특히 자원으로 얽힌 갈등, 희토류나 석유, 광물질의 정보를 통해 투자 기회를 포착하는것이 1%를 읽는 힘이라고 하는것 같다. 이게 단순히 투자에 관한것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현상을 통해 그 뒤에 숨겨진 맥락을 파악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읽고난후 드는 아쉬운점 몇가지도 언급해야 겠다.

먼저 책값이 너무 비싸게 책정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맛있는 음식 잘 먹어 놓고 '맛은 있는데 이거 너무 비싸요.' 하는것과 같은셈이다.

책의 지식면에서 분명 나에겐 도움이 됐지만, 그외 책값에 버금가는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는것은 아닌것 같다.

작가의 글은 평소 블로그 활동을 통해 책에 나오는 글들을 이미 올린바가 있다고 한다. 출간된 책은 자신의 블로그 글들을 잘 다듬어서 출판한셈인데 그런셈 치고는 너무 비싼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아주 잘짜집기한 내용에 지나지 않는데 이렇게 비싸게 팔면 될까? (그런데, 된다. 경제분야 1등이란다.)

책 가운데 줄이 있는 무슨 양장판 책도 아니고 그냥 일반책 표지와 디자인에 불과 한데....

이건 작가보다 출판사가 '물들어 올때 노젓는' 셈으로 이번에 가격을 '확' 올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중 여러 책을 봐도 이만큼 비싼게 없었다.)

두번째는 책 내용상 분명히 작가의 입장에서 여러번 검증을 하고 쓴 내용이겠지만 확실히 틀린곳이 있었다.

< 반면 전기차는 추첨없이 구매 할수있고, 등록 수수료까지 면제해주는 예외를 두어 전기차를 구매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P. 222

중국의 신재생에너지 장려를 위해 중국의 대도시 북경과 상해등의 정책에 대해 설명한것인데, 상해 같은 경우는 책의 내용이 맞다.

하지만 북경의 전기차 구매시 수수료 면제는 맞지만 2021년 1월 1일부터 추첨을 해야한다.

또한 상해에서 구매시 세부조건을 보면 구매자는 구매전에 6개월 기간동안 사회 보험과 소득세를 납부해야하는 사항이 있어야지만 추첨없이 구매 할수가 있다. 즉,조건부라는 것이다.

아마도 좀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옥의 티' 수준이 보였다.

셋째, '임진왜란을 통해 보는 정보의 중요성' 이란 부분을 보면,

일본이 조선침략을 한후 농민의병 활동이 시작된 이유가 좀 어이가 없는 부분으로 생각되었다. 작가의 글에서는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후 농민들에게 일본보다 싼 세율을 제시(30~40%) 했지만 원래 조선은 당시 일본보다 훨씬 적은 세율(25%) 로 냈었기 때문에 농민의 입장에서 세금이 가중된것이다. 그래서 세금 문제가 되어서 농민 의병이 일어난 이유이다' 라고 설명 했다.

결론은 히데요시가 조선 세율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정보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히데요시가 세율을 15% 정도로 낮췄다면 의병 활동이 안일어 났다는 말인가?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다. 왜 작가는 굳이 이런 내용을 끼워 넣었을까?

책 전체 구성된 4장의 부분은 작가가 직접 쓴게 맞나 싶은, 작가의 논조가 다른 부분들이 몇개 있는거 같다. (물론 내 생각이다.)

이 모두 '옥의 티'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 볼만 책은 맞다.

 

정리를 해보면 이책은 아주 훌륭히 짜집기한 경제와 시사, 지하자원과 얽힌 국가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고 동시에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에 대해 생각해 볼수 있는 충분히 볼만하다.

하지만 전체 내용은 참고만 하고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의 공부가 필요한것 같다.

(그중, 책에 나오는 퍼센트 '%' 맞는지 여부는 각자가 검증해야 한다. 그외 출처도 각자가 알아서 맞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우리에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작가를 믿을수 밖에... )

, 1% 읽는 힘은 적어도 120% 배경 지식을 쌓아야만 작가가 의도하는 '세상 모든 것은 연결 되어 있다' 핵심에 가까이 다가갈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배경지식없이 단순히 깊게 생각만으로 현상을 통해 사고를 연결시킬수는 없다고 본다.

작가는 똑똑해서 가능 할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문외한은 불가능할것 같다.

대안으로 여러개의 시각을 지닌 신문들을 매일 꾸준히 읽으면 좋은데... 그럴수가 없으니... 책을 통해 볼수 밖에...

그렇게 따지면 출판사는 이런 류의 책을 계속 내야한다. 다만 다음번엔 가격은 너무 높게 책정하진 말라고 충고 하고싶다.

(물론 출판사도 먹고 살아야지만...같은류의 다른 출판사의 , <세이노의 가르침> 비교하면 쉽게 납득이 것이다. 역시 먹고 사는게 우선 이겠지만....)

반값 할인 성형수술과 제값 내는 성형수술에 차이가 있나요?
의사 선생님의 수술방법, 수술에 들어가는 장비,약품 등은 할인을 하나 정상으로 오나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바늘 땀이 달라요.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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