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자유교육 -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송순재.고병헌.카를 K. 에기디우스 엮음 / 민들레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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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 하면 두 가지 방향에서 논의가 된다. 미국식이냐 유럽식이냐. 여기에 몇 가지 요소가 더 섞일 수가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나는 미국식보다는 유럽식, 특히 북유럽식을 좋아하는데,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의 나라 교육제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들 교육에 대해 소개한 글을 읽어보면 부러움과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도 이런 교육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엔 우리나라에서도 대안학교가 많이 생겼고,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따라서 대안학교들도, 또 현재 논의되고,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혁신학교들도 이런 책을 참조해서 우리나라 또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자신만의 학교들을 만들어가면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이책에 나온 관심있는 내용과 내 생각이다. 

자유학교의 공통원리 ... 폴켈리(folkelig)적 요소, 즉 평면적 요소 ... 자기 자신과 타자를 위해 기꺼이 책임지는 자세 ... 평등을 지향하는 책임 (61쪽)   

-> 모든 교육의 기본이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남을 밟고 내가 올라서면 된다는 승자독식주의 교육이 아니라, 함께 모두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교육. 그게 필요하다.  

부모의 권리 ... 법적으로 확정된 교육의 의무가 있지만, 학교교육을 의무사항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63쪽)   

-> 우리나라 대안교육계에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의무교육을 의무 취학으로 판단을 한다. 따라서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부모는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 많은 부모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징계를 면하긴 하지만, 이 과정이 힘들고 복잡하다. 의무교육은 의무 취학이 아니라는 사실, 교육법에 이 조항만 추가한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텐데, 아직도 학교만이 교육을 담당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 원.

학교는 교사가 특정한 종교적, 정치적 신념을 갖도록 요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교사가 학교 근무시간 안팎으로 이러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살도록 요구할 수 있다(69쪽)  

자유증등학교의 해설서 .. 교육과정이나 이데올로기의 자유: 학교가 스스로 교육과정을 정치적 또는 종교적, 교육학적인 이념에 따라 정했다고 해도 국가는 간섭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정부는 어떤 교육과정이나 학교라도 인가한다. 곧 국가전복을 위해 학생들이 저항해야 한다는 교육목표에 따른 커리큘럼, 글자 그대로 성서를 강독하는 듯한 교육과정, 교실에서 배우지 않고 가게나 작업현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학교, 과목이 하나밖에 없어서 교사나 학생이 그때그때 적당하게 학습주제를 정하는 학교도 있을 수 있다. (169쪽) 

-> 우리나라를 보라. 교사가 정당에 가입했다는 확정되지도 않은 혐의로 징계를 받도록 강제당하고 있으며, 시국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그것이 정치적인 중립성을 훼손했다고 징계를 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사는 사랍학교든, 공립학교든 공무원인 교사로서만 지내야 하지,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없다. 이러한 차이를 우리나라의 특수성이라고 생각하고 교사들이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발언할 수 없도록 하는 관습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성과 교사이기 이전에 시민으로서 당연히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게 제도적인 면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전인(全人)을 길러 내는 것을 교육의 과제이자 목표로 삼는다 (79쪽) 

-> 우리나라도 교육 목표는 전인이다. 그러나 사실 학교에서는 전인보다는 단편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너무도 많이 분절된 과목들, 그리고 그 과목들을 통해 인간이 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남보다 앞서 갈 수 있나를 공부하기에 목표와 실천이 따로노는 교육을 지금의 공교육은 하고 있다. 대안교육에서는 공교육보다는 훨씬 낫지만, 대학이라는 장애에 걸려 비틀거리고 있는 대안학교도 있으니 목표와 실천이 어울리게 노력해야 한다. 

함께 협동으로 작업하기를 그리 내켜 하지 않는 학생들, 불안감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학교 안의 분위기는 신임 교사들을 힘들게 하기에 충분하다(95쪽)  

-> 신자유주의를 덴마크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못한다. 이 나라도 지금까지 해왔던 교육에 손질을 하려고 하고, 자유학교들에 대해서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나 보다. 이 구절을 보면서 덴마크 교사들도 우리나라 교사들과 비슷하게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럼에도 이들은 자유학교라는 틈새를 이용해서 아이들을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아이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데...

민주주의의 질은 소수가 어떻게 취급되는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99쪽)  

사회시스템 가운데 10% 정도의 '틈새'를 열어 놓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야말로 교육개혁에서 중요한 포인트... '비주로' 또는 '비주류의 권리'를 표방하는 일이 많은 것(173쪽)  

 이런 교육이 가능한 진짜 배경은 대화를 중시하고 자유로우며 비경쟁적인 사회 분위기인지도 모른다 (151쪽) 

-> 가장 좋은 말이고, 소수가 존중되면 다수는 행복해 진다. 소수를 존중했을 때 왕따라는 말은 존재할 수가 없다. 소수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 가장 좋은 방법이 대화이다. 대화는 상대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할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담 우리 교육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대화이다. 열린 마음으로 하는 대화, 그것이 교육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닫혀 있다. 이 닫힘을 풀 수 있는 길,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라도 확보해내야 한다.

지역 행정당국은 기본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부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일반 사립학교나 자유학교에서 공부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부모들은 학비의 20% 정도를 부담해야 하고, 동시에 학교위원회의 구성원이 될 권리를 갖는다(103쪽) 

-> 이런 점은 우리나라 대안학교에 대한 지원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이렇게 되면 대안학교가 귀족학교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을테니까. 

우리는 7학년까지 숙제를 내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과제를 해내야 할 빚진 자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당연히 집에서 쉴 권리가 있습니다.(210쪽)  

-> 얼마나 부러운가. 이 아이들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나라 아이들을 보라.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숙제에,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학원 숙제에 시달려 도대체 어른들도 주장하는 8시간 노동제를 훌쩍 넘어서 과중한 부담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부모 한 명 한 명의 의지에 맡겨두기엔 이미 너무 힘들어진 이 사회에서,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학원 교습시간 제한이 아니던가. 여기에 한 발 더 나간다면 의무교육에서는 과제를 내주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고, 학교 시험에서는 수업 시간에 다룬 내용으로만, 결코 수업에서 다루지 않은 경시대회 문제라든지,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내지 않도록 강제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제도로 강제해야지만 조금이라도 아이들이 편해지고, 또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고치려는 실천을 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대학에 관한 그룬트비 교육의 의도... 첫째는 참된 자아를 찾는 일로 학교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가르쳐야 한다는 의도. 둘째는 학교는 공동의 선에 답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에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찾아가는 곳 (217쪽)  

-> 이거 참. 지금 우리나라 대학의 현실과 비교를 해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은 교육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대학은 취업기관이지 교육기관이 아니지 않은가? 인간이란 무엇인지, 공동선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학과는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런 교육을 하려고도 하지 않아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나온 지가 꽤 되는데, 아직도 우리는 기업이 원하는 학생을 배출하려고 하지 전인적인 인간을 양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수라는 직업이 파편화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되고,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 집단이 안 된 지가 오래되어서인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만큼 책임을 지려는 자세들을 교수들도 가질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든다. 

교사회의조차 아이들에게 닫혀 있지 않다. 끼어들기를 조장하지는 않지만 나가달라고 말하지도 않는다(251쪽)  

-> 꿈같은 얘기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교무실은 신성한 공간이어서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고, 한 번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열고 경례를 하고 용무를 말한 뒤 허락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학생들과 단절된 공간 그곳이 교무실이었다. 그리고 교사들의 회의시간에는 어디 감히 학생이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어쩌다 우연히 교사들이 회의를 하는데 학생이 교무실에 있으면 대뜸 "야, 너 나가"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즉 본다는 행위가 교육에 매우 필요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교사들의 회의 모습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여기에 학교 운영의 전반적인 일을 결정한다는 학교운영위원회에도 학생들의 참여는 봉쇄되어 있다. 어쩌다 참여해도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할 뿐이다. 최근에 교사회의, 학생회의를 법제화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꼭 필요한 일이다. 학생들이 학교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제도화하면 교장 선의 여부에 의해 학생들의 참여가 결정되는 일은 없어지겠지. 조금 더  학교가 민주화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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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천재 이제석 - 세계를 놀래킨 간판쟁이의 필살 아이디어
이제석 지음 / 학고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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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그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 그러나 그 총구는 그 군인의 머리를 다시 겨누고 있었다. 제목도 뿌린대로 거두리라. 전쟁의 위험, 무기의 위험을 단 한 장의 광고로 그토록 잘 나타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 되어 그가 처음부터 광고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인 줄 알고만 있었다. 서점에서 이 책을 본 순간, 한 번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고 주저없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읽어가는데, 중간 중간 그의 광고가 화보로 나와 있어, 그 광고를 보는 재미도 있고, 그가 이렇게 광고천재로 불리게 되기까지 겪은 일들이 잘 나와 있어 그의 삶을 엿볼 수도 있다는 재미도 있는 책이었다. 

또한 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만들어서, 단지 이제석 대단하다로 끝나지 않고, 그도 해냈는데,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의지를 다지게도 된다. 

처음 부분 읽으면서는 우리나라의 학벌 차별에 대해서 씁쓸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는데, 계명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해서 졸업 때 학점이 4.5점 만점에 4.47점을 받았는데 어느 회사에서도 오라는 데가 없고, 광고 공모에 응모해서도 당선된 적이 없었다는, 그래서 졸업한 뒤에 한 일이 동네 간판을 그려주는 일이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모든 것을 학벌로만 판단하는 우리 사회에 분노도 하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학벌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그가 뉴욕으로 가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신만의 광고를 만들어내게 되기까지, 그리고 세계 광고 공모전에서 많은 상을 받기까지, 그 다음 자신의 광고를 돈이 되는 쪽보다는 공공의 이익 쪽으로 옮기기까지의 과정이 그의 글을 통해 잘 나와 있다.  

우리가 너무도 자주 접하는 광고, 어떨 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접하는, 어떨 때는 기발함에 감탄하기도 하는 광고. 그런 광고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 편의 광고를 위해서도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었다.

그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또한 그의 책을 읽으면서 창의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는 창의성, 창의성 하지만 그 창의성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진정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제석의 경우를 통해서 알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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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사 새옹지마 범우문고 101
리영희 지음 / 범우사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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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님. 그의 죽음은 우리나라 지식인의 죽음이었다. 

진실을 파악하고 전달하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을 지식인이라 이름 짓는데, 요즘은 자신의 지식을 사실을 왜곡하거나, 아니면 왜곡은 하지 않더라도 진실을 감추려는데 쓰는 사람이 많아서 진정한 지식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미국의 하워드 진, 촘스키, 우리나라의 장일순, 리영희 등을 그런 의미에서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분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뜨면서 진실을 이야기해줄 사람이 점점 줄어들지 않나 하는 조바심을 가지게도 된다. 

이 분들이 다 떠났다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라지지는 않을테니 우리도 역시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일면만을 보지 않고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도록 노력한다면 이 분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시고 리영희 선생의 저작집과 평전, 그리고 수필집 등이 발간되었는데, 그렇게 최근에 발간된 책들과는 다르게 이 책은 문고판으로 아주 작은 책이고 1991년에 발간된 책이다. 손에 지니고 다니면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기에 딱 좋은, 크기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다. 리영희 선생의 사회를 바라보는 글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낸 책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리영희 선생의 수필집이 새로 나왔는데,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대부분 실렸으리라고 추측한다. 집에서 소장하고 읽으려면 큰 책도 좋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리영희 선생의 글을 읽고 싶다면 이 책이 더 도움이 되리라. 

수필이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글이니, 인간 리영희의 모습 즉, 본인이 감옥생활을 한 얘기, 자신의 아내 이야기, 교복 문제로 자식들과 한 이야기, 전쟁 때 겪은 이야기, 검사와 논쟁한 이야기 등등 리영희 선생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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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완성을 위한 죽음교육 - 교육과 미래 3 아로리총서 18
정재걸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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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랬다. 사람이란 삶과 앎이 결합된 즉 삶을 아는 존재라고. 

그래서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고, 삶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사람이 된다고. 그것을 우리는 다시 태어남, 또는 거듭남이라고도 하고, 해탈,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대상이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즉 즉자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깨달은 하나, 즉 대자로서의 하나일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진다. 

죽음은 무섭고 두려워서 피하려고 하는 존재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데, 이 죽음은 무섭고 두려워하고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에 우리는 죽음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하지만 현대는 어떤가? 죽음을 한사코 피하고 감추려고만 하지 않나. 온갖 의료기술을 갖추고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려 한다. 과연 생명이 연장되기만 하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이반 일리히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고 했는데, 병원이 발달함으로써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많이 훼손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그는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엄청난 성찰과 노력이 필요했으리라. 

이 책은 요즘 우리 교육을 비판하면서 우리 교육에서 죽음에 대한 교육, 또는 죽음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죽음 교육을 통해 삶을 더욱 잘 알 수 있다는 부수적인 효과 외에도, 죽음 교육을 통해 죽음과 삶이 하나임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토대로 매일매일을 사람(삶앎)답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과거의 교육방법을 설명하고,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죽음 교육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다. 아주 작은 소책자이지만,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결코 작지 않다. 글쓴이의 말대로 이 책에도 온우주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위에 누가 있는지도, 자신이 왜 달려가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 상태. 이 상태에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찾을 수는 없고,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하기에 삶이 무의미하다고 순간순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시간이 느릿느릿 가고, 어른이 되면 시간이 빨리빨리 간다고, 10대에는 시속 10킬로, 20대는 시속 20킬로, 40대는 시속 40킬로, 70대는 시속 70킬로 등등으로나이에 비례해서 시간이 속도를 낸다고 장난삼아 말하곤 하는데, 이는 어쩌면 죽음을 두렵고 피하고 싶은 존재로만 생각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의 의식에 따라서 다르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죽음이란 삶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시간의 속도에 대한 이런 생각도 달라지지 않을까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책, 그러나 꼭 읽고 생각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책을 교육에 관련된 책이라고 해서, 교사, 교수, 아니면 학생, 그것도 대학생 이상만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다.  

죽음이 누구에겐 오고, 누구에겐 오지 않는 것이 아니잖은가. 그렇다면 어짜피 우리 모두에게 올 죽음을 우리 모두가 죽음에 대해서 아주 어려서부터 배우고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죽음이 너무 어렵다면 영성(종교성)을 일깨우는 노력이라도 하자.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겠다는 생각이라도 하자. 그렇게 하려면 알아야 하지 않을까. 무섭다고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도 영성(종교성)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적어도 이런 책을 읽어본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난다면 물질만능에 빠진, 속도감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하나 줄어 가고, 사회는 좀더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겠지 그런 꿈을 꾸어본다.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인데, 다석 류영모는 한 해 한 해를 살지 않고, 한 날 한 날을 살았다고 한다. 내 나이가 몇 살이다가 아니라, 몇일을 살았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태어남과 죽음의 연속이었다는 얘기다. 그런 다석이 어찌 세상을 허투루 살 수 있었겠는가. 이런 다석의 삶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어도 좋다. 

문정희 시인의 시집 "남자를 위하여"에 실려 있는 '처음처럼'이란 시이다. 난 이 시에서 이 책의 내용을 느꼈다. 죽음은 언제나 친구처럼 내 곁에 있다는 내가 아는 척을 하지 않아도 늘 내 곁에 있다는, 그래서 아쉬움을 남기기 전에 내 삶을 충실히 살아야겠다는 그런 의미로 이 시를 읽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 누가 몰랐으랴  /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 끝까지 함께 살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언젠가가 /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 돌릴 틈도 없이 /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 홀연 다가와 /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문정희, 남자를 위하여, 민음사  중 친구처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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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 -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김성동 지음 / 녹색평론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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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논쟁이라고 하기보다는 일방적인 비난이었고, 결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내용이 고쳐지게 되었다. 

진보에 관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교과서에서 다뤄진 내용은 기존 학계에서 이미 논의된 내용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미 통설로 굳어진 내용조차 교과서에서 다루지 못 하게 한다면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과, 완전한 좌익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김성동의 글, 소설 만다라에서 충격을 받고, 좋아하게 되었는데, 요즘은 소설가로보다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잊혀진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통설로 상식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실들을 다시 밝혀내는 사람으로서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녹색평론에 연재하는 글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현대사 아리랑이라는 이 책, 작은제목이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가? 현대사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던 인물을 제법 알고 있다는 나에게도 생소한 이름이 많았으니, 현대사를 고등학교까지만 배운 사람에게는 모르는 인물이 태반이리라. 그만큼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고 해야 한다. 

김성동은 이들을 하나하나 불러낸다. 그들이 누구인지 한 번 살펴보자. 

박헌영, 김단야, 이재유, 이관술, 김삼룡, 이주하, 정태식, 이현상, 박세영, 이승엽, 김재봉, 강달영, 권오설, 이준태, 홍증식, 유영준, 정칠성, 김명시, 김복진, 허하백, 박진홍, 김태준, 여운형, 김원봉, 김두봉, 무  정,  이동휘, 최창익, 백남운, 김성숙, 최익한, 조봉암, 고준석, 홍명희, 조명희, 이기영,한설야, 이태준, 조   운, 박승극, 이동규, 김순남, 임   화, 이용악, 유진오,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박영발, 하준수, 김제술, 정순덕 

한 꼭지씩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격동의 현대사에서 이 정도 인물보다 더 많아야 하겠지만, 작가는 더 쓰려고 하다가 먼저 이들만을 썼다고 한다. 아마도 이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올 거라 생각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도 하고,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도 한다. 이 말들에 의하면 역사란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입장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판단하는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역사적 기록이 앞으로도 역사적 기록의 정설이란 생각을  하면 안 되고,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사실들을 재해석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의미있는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의 기록이 변화하게 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보수의 입장에서 기록되어진 역사를 진보의 입장도 반영하는 역사로 변하게 하려면,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사실들에 대한 기록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버리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역사도 좌나 우, 어느 한 쪽의 역사일 수 없다. 지금껏 오른쪽으로 너무 굽었다면 이제는 왼쪽으로 굽혀서 중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지 않을까 한다.    

덧붙이는 말 : 우리말(토박이말)을 너무도 잘 사용해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우리말(토박이말)에 대해 우리 자신이 너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너무도 천대했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들만큼이나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책의 뒷부분에 꽤 많은 토박이말들에 대한 풀이가 있어서 읽어나가기는 다른 책들보다 조금 힘들지 모르지만 읽고 나면 두 가지를 얻을 수 있으니(잊혀진 인물들에 대한 정보, 다양하고 아름다운 우리말) 한 번쯤 읽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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