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사랑이란 나를 변화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배운다'(63쪽)라는 구절이 이번 호, '사소하게 연연하는'이란 꼭지에 있는 '현상 유지를 위한 변화'라는 꼭지에 있다.


  변화. 늘 변화만 추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변하지 않을 수도 없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 변할 수 있어야 한다. 


  [빅이슈]를 읽으면서 지속가능한 잡지이면서도 변화가 있다는 점을 느낀다. 그런 변화가 [빅이슈]를 지속하게 해주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정책도 변해야 한다. 시대에 맞게. 또 요구에 맞게. 특히 청년들 주거 문제에 대해서는 제댈 된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변화를 이룰 때 정책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청년에게'라는 꼭지에 실린 '서울살이 몇 핸가요?'라는 글을 보면 짠하다. 안정적인 주거를 확보하지 못해 이사를 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들.


서울에 집이 넘쳐나도 자신이 살 집이 없는 상황. 서울로 서울로 많이들 올라오지만, 그 서울살이도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 어떤 정책이 과연 지속가능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무더운 여름. [빅이슈]와 함께 해서 지속가능한 삶들이 유지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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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 편집장의 글을 읽으면서 분류라는 말을 생각했다. 편집장의 말과 더불어 이번호에 실린 글들도 이런 '분류'를 생각하게 했고.


  분류. 나누고 모은다. 간단한 말이다. 그런데 '분=나누다'는 말이 앞에 있다. 모으기 위해서는 먼저 나누어야 한다. 나누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까?


  그렇다. 기준,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어떤 기준을 작동시킨다. 그 기준에 부합하면 모으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모으지 않는다. 그래서 끼리끼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기준에 부합하는, 비슷한 존재들이 모이게 되니까.


이 분류에 끼지 못하면 배제된다. 분류는 모으다는 말도 있지만, 배제한다는 말도 포함하고 있다. 이에 속하지 않으면 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분류가 참 무서울 때가 있다. 개인의 특성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분류, 집단의 속성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집단 속에 개인은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리고 개인을 비난하는데, 이 집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또한 집단을 이용해서 비난을 하면 개인이 반박하기 힘들어진다. 편집자의 말에서 어떤 비애를 느꼈는데,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비난하는 글이 실렸을 때, 그 비난은 집단을 향하고, 집단 속에 있는 개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반박하는 글을 실어도 이미 버스 지나간 뒤에 손 흔들기가 된다. 사람들은 비난에는 민감하지만, 비난을 반박하는 글에는 무심하다. 대체로 그렇다. 이렇게 분류 속에 이미 자신의 사고틀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류 기준을 바꾸는 일, 참 힘들지만 살면서 시도해야만 하는 일이다. '당신의 첫 번째 분류 기준은 무엇인가요?'라는 글을 보면 왜 그것이 첫 번째 기준이 되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체로 사람을 판단할 때 학벌, 지역, 성별. 신체조건 등을 첫 번째 기준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과연 그래야 할까? 다양한 기준을 함께 적용할 수는 없을까? 


이런 기준은 사람들 생각과 행동을 규정짓기도 한다. '당신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얼어붙는 거예요'라는 글에서 이 점을 알게 된다.


중년 남성 앞에서 말을 잘 못하던 사람. 왜? 자라오면서 겪은 일들이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 그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서서히 중년 남성 앞에서도 말을 잘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기준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활용, 재사용에 관한 일들도 마찬가지다. '당신 곁의 재사용'이라는 글을 보면 우리가 삶의 기준을 바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나를 이루는 것의 팔 할이 전기다'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생각없이 쓰는 전기에 대해서 기준을 한번 바꾸어 보는 삶. 그런 삶을 상상하고 실천한다면 어떨까?


[빅이슈]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노숙인들 이야기, 또는 집에 관한 아니면 젊은이들 취향의 글들이 실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이 역시 분류의 함정에 빠져 있는 셈이다. [빅이슈]는 이런 잡지야 하고 규정짓고, 그 규정 안에서 [빅이슈]를 만나려고만 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그런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기준을 통한 분류가 모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나누고 배제하는 역할도 하고 있음을. 그래서 때로는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고, 기준을 바꾸는 삶도 살아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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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07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님 덕분에 빅이슈 들어가봤는데 ˝당신곁의 재사용˝ 페이지 컬러감 넘 좋네요^^
일부러 구매해 읽거나 찾아보진 않겠지만 혹시 이 잡지 접하게 되면, kinye님 언급하신 꼭지는 꼼꼼하게 읽게 될 것 같습니다

kinye91 2022-08-07 19:24   좋아요 0 | URL
이 잡지 읽는 것 즐거워요. 직접 찾아서 읽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읽기 바랄게요.
 

  이번 호를 읽으면서 편견에 대해 생각했다. 편견은 곧 가짜뉴스가 판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들을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선택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43쪽)고 가짜 뉴스에 관한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선택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선택을 강화하는 쪽의 글들을 읽는다. 자기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든다. 그래, 그랬지 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강화하면서, 다른 생각은 아예 듣질 않으려고 한다. 듣고, 잘못을 이야기하지 않고, 또는 비판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귀를 닫고 만다. 


  닫힌 귀... 이런 닫힌 귀들이 많은 세상에선 가짜 뉴스가 판치게 된다. '가짜뉴스는 가짜라서 성공하는 게 아니다. 뉴스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을 때만 성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세력에 대한 나쁜 뉴스는 필터링 없이 받아들인다.' (43쪽)


남 이야기 같은가? 아니다. 바로 우리 얘기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맞는 이야기는 잘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필요와 거리가 먼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귀가 두 개인데, 이상하게도 한 쪽 귀만 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니 말과 말이 부딪혀 진실로 향하지 않고, 한쪽 말이 아예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일방적이다. 그러니 가짜뉴스가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진다.


[빅이슈]를 읽는 이유는 어쩌면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평소에 만나지 못했던 세계를 [빅이슈]를 통해서 만나게 되니까.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연예인처럼 화려한 세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빅이슈판매원처럼 결코 화려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을 함께 만날 수 있으니까.


고급스러운 음식에 대한 소개도 만날 수 있고, 하루 한끼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노숙인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또 환경을 생각하며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이렇게 [빅이슈]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서 좋다. 다양한 삶들을 만날 수 있고,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이렇게 [빅이슈]와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들이 많아진다면 가짜뉴스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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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밖에 나가보면 팬데믹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바깥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가 아니니, 이제는 거리에서도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사람이 제법 보인다.


  스포츠 경기장에는 관중들이 들어섰고, 학교는 모두 등교수업을 한다. 또한 시위도 일어나고 있다. 


  소위 먹자골목이라는 곳에 가보면 길거리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 음식을 앞에 두고 도란거리는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과연 팬데믹이 끝났는가? 사람들이 모두 일상으로 돌아왔을까?


빅이슈 이번 호를 읽으면서 팬데믹이 끝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팬데믹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에 처한 위치에 따라서 감염병 시대를 맞이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또 피해도 달라지는데... 아직 팬데믹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번 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이런 다양성, 빅이슈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빅이슈는 사회적 약자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적 강자들을 다루지도 않는다. 그냥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을 나누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건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먼저 본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대한다. 쉽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은 일.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사람보다는 먼저 그가 처해 있는 위치, 또는 그의 특징을 먼저 보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라는 보편성은 그 개별성 속에 숨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빅이슈는 사람이라는 보편성을 먼저 본다. 보편성 속에서 각자 지니고 있는 개별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빅이슈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차이가 없다면 다양성이 없을테니, 다양성이란 우리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요소 아니던가. 그러니 빅이슈에 실린 글들, 또 나오는 사람들이 지닌 다양성은 빅이슈를 만나는 사람들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이번 호에 표지 인물로 나오는 정은혜 작가부터 서점과 인쇄소를 운영하는 사람, 전직 공무원, 아이를 키우는 워킹 맘, 성우, 또 퇴직하고 제주도를 걷기 여행한 사람, 그리고 칸 영화제를 취재한 기자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읽을거리도 다양하고... 이런 다양성, 보편성을 잃지 않은 다양성 때문에 팬데믹 이후에 빅이슈를 판매하는 빅판들도 팬데믹이 종식되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길거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빅이슈를 매개로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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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장이 쓴 글 제목이 '질문'이다. 질문? 좋은 말이다. 질문이 있어야 한다. 이번 호 표지 인물은 배우 김지원이다. 김지원과 인터뷰한 내용을 읽으면서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김지원 배우가 빅이슈에 먼저 연락해서 표지 인물 사진을 찍었다는 점. '질문'이라는 주제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배우는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 그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사람.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만 질문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역할에 대해서도 질문해야 한다. 연기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또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게 호흡을 맞추어야 할지 질문하고, 연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좋은 연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연기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을 할 수 있으려면 주의 깊게 살펴여 한다. 자기 관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할 수 있다.


가령 이번 호에 실린 대학에 가기를 거부한 사람의 글...그는 인터뷰한 글(한연화 씨의 대학 거부 그 후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 '여정은 시작됐다'는 글)에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은 굳이 대학을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대학 거부를 고민하는 분들에게 해주실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일단 첫째, 웬만하면 하지 마세요.(웃음)"(57쪽)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도 좋지만, 이 말 속에는 우리 사회의 대학, 대학 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내게 대학이 꼭 필요한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고 부모가 가라고 하니까, 또 남들이 다 가니까, 그냥 가야 할 것 같아서 등등의 이유로 대학 진학을 한다면 이는 질문이 없는 삶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시류에 휩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웬만하면 대학 거부하지 말라는 말은 질문을 먼저 하라는 말로 들어야 한다. 대학은 내게 무슨 의미인가? 대학을 가지 않고 받을 수 있는 사회적 편견에 대해서 나는 버티거나 이겨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 더 많은 질문들... 그 뒤에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말이 '웬만하면'이란 말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질문을 이번 호에서 몇 가지 더 찾아보면, 장애인들이 자활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질문해야 하고, (강남역 김영덕 빅판의 인터뷰 글, 영화 속에 산다와 발달장애 여성들의 일자리를 만드는 프란치스꼬 빵집을 소개한 글인 빵으로 연결되는 곳을 읽으면 된다), 사회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진냥이 쓴 투자 교육이 아니라 경제 시민 교육을!이라는 글과 오후가 쓴 '가짜' 뉴스가 아닌 가짜 '뉴스'를 읽으면 좋다)도 해야 한다.


어쩌면 질문하는 법을 잊고 또 잃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주어진 대로만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배우가 연기를 할 때 질문을 하듯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사회 속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에 서서 살아가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무대에 서고 싶은지도 질문을 해야 하고.


빅이슈는 그러한 질문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질문을 하게 하는 잡지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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