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청소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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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집이나 시신이 발견된 집 등 사건 사고가 발생한 집을 청소하는 일을 가리키는 특수청소는 소설이나 영상물의 소재로 여러 차례 활용될 정도로 독특하고 사연 많은 직업입니다. 특히 살인사건이나 고독사 등 죽음이 남긴 흔적들을 청소해야 할 경우 단순히 쓰레기를 버리고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을 닦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이 남긴 체액과 시취는 물론이거니와 죽은 자의 마지막 감정들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표 이오키베 와타루와 두 직원 시라이 히로시, 아키히로 가스미 등 세 명뿐이지만 특수청소업체 엔드 클리너는 나름 빠른 성장세를 달리는 중입니다. 그만큼 특수청소가 필요한 케이스들이 급증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전직 경시청 수사1과 형사인 대표 이오키베는 의뢰인은 물론 망자에게도 예의를 갖추는 배려심 깊은 태도로 일하면서도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현장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예리하게 포착해곤 합니다. 구직난에 시달리다가 어쩔 수 없이 엔드 클리너에 들어왔지만 1년 넘게 일하며 믿음직한 청소부가 된 히로시와 역시 비슷한 사정으로 입사한 신참 직원 가스미는 높은 기본급과 보너스 때문에 고된 일을 겨우 참아내긴 하지만 현장에 출동했을 때는 사명감 이상의 자세로 특수청소를 수행하는 인물들입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각각 가스미, 이오키베, 히로시가 돌아가며 한 챕터씩 주인공을 맡고 있습니다. 네 편 모두 고독사 혹은 사망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발견된 시신을 다루고 있는데,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답게 네 편 모두 크고 작은 미스터리를 품고 있어서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엔드 클리너의 멤버들은 고인이 남긴 유품이나 흔적을 통해 죽음 이면의 일들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거나 위화감을 느끼곤 합니다. 바닥에 적힌 저주 섞인 문구,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유품, 기구한 사연이 담긴 데모 음원, 비밀금고에 보관된 두 통의 유언장 등이 그것인데, 그것들을 접한 멤버들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진지한 태도로 미스터리를 풀고자 노력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고인을 애도하고 그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길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무당이 악령을 퇴치하고 승려가 망자의 넋을 달랜다면, 멤버들은 악취와 함께 고인의 갖가지 감정이 서린 집을 정화한다고 할까요?

 

수록작에 따라 사건성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고 미스터리가 더 강조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사연 많은 죽음을 수습하는 특수청소의 특별함과 멤버들의 사명감입니다. 더불어 마지막 장면에서 반전과 함께 맛볼 수 있는 애틋한 여운 역시 이 작품의 장점이자 미덕입니다.

나카야마 시치리가 엔드 클리너의 다음 이야기를 계속 집필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두어 편 정도 시리즈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직 경시청 수사1과 형사인 대표 이오키베의 과거도 궁금하고, 신참인 가스미가 성장하는 모습도 더 지켜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특수청소 이면의 특별하고 애틋한 사연들을 좀더 읽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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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의 살인
모모노 자파 지음, 김영주 옮김 / 모모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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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우주항공사가 기획한 1인당 3,000만 엔의 초저가 우주여행에 여섯 명의 고객이 참가합니다. 나이도, 직업도, 성별도 제각각인 그들은 높은 경쟁률을 뚫고 행운을 차지했는데 그중엔 무료초대권에 당첨된 여고생도 포함돼있습니다. 베테랑 기장인 이토의 지휘 하에 부기장 겸 가이드를 맡은 하세 호마레는 우주로의 첫 비행에 마음이 들뜹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무사히 도착한 우주호텔 스타더스트에서 그는 최악의 악몽과 마주합니다. 무중력상태인 창고에서 목을 맨 채 숨진 사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자살, 살인, 사고 등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가운데 여행을 계속 할 것인지 지구로 돌아갈 것인지를 놓고 격론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스타더스트에선 우연이나 사고로 볼 수 없는 일들이 잇따라 벌어집니다.

 

우주라는 공간이나 SF물과 친하진 않지만 밀실상태의 우주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미스터리라는 출판사 소개글에는 눈길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폭설에 갇힌 산장이나 태풍으로 고립된 섬과 달리 우주는 그 자체가 특별한 밀실이라 더 흥미로웠고, 특히 무중력 상태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목을 맨 사체라는 설정도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창고에서 발견된 기이한 사체 외에도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드는 불길한 일들이 잇따라 벌어집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그 일들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우주라는 공간에서 겪을 법한 온갖 극한상황을 떠올려보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일들이 자연재해나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고의적으로 벌인 일이란 점입니다. 또한 창고에서 발견된 사체 외에도 명백히 인명을 노리는 범인의 행각은 스타더스트에 머무는 사람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나 독자 서평에는 스타더스트에서 벌어진 일들이 꽤 상세하게 공개돼있는데 가급적이면 소개글 첫 머리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합니다.)

 

미스터리를 푸는 역할은 부기장인 하세가 맡고, 당찬 돌직구 여고생 사나다가 하세의 조수 혹은 조력자로 활약합니다. 하세는 초반부터 난감한 벽에 부딪힙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게 범인의 목적이라면 지구가 훨씬 편했을 텐데 왜 하필 우주에서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인지, 또 이 우주여행이 1만 명의 지원자 가운데 단 5명만 추첨을 통해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범인이 사전에 희생자를 정하고 범행을 계획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 등 범인의 의도와 계획 자체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중반부 정도까지는 누가?’보다 ?’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미스터리 못잖게 작가가 힘을 준 부분은 스타더스트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과 사연들입니다. 지구평면론을 주장하는 괴짜부터 우주장()을 치른 가족들의 기일에 우주에 오고 싶었다는 사연남, 소식이 끊긴 친구에게 우주에서의 라이브공연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소녀, 갑자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다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는 사람 등 적잖은 돈을 내고라도 우주에 꼭 오고 싶었던 다양한 사연들이 그려집니다. 때론 그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닌 상황에서도 개개인의 사연이 소개되곤 해서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이 대목은 작가의 절대 포기 못할 고집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주에 관한 방대한 지식과 자료조사 덕분에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영상물을 보듯 마지막 장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독자에 따라 반응이 제각각일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의도 역시 우주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에 잘 어울리게 설정됐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작가가 나름 쉽고 친절하게 묘사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문과생이라서 이과 미스터리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보니 일부 과학적 장치에 관한 묘사에서는 역시나 장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한 작가의 데뷔작 노호잔몽’(중국 송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무술 고수가 밀실살인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이야기)이 무척 궁금해졌는데 별에서의 살인이 호응을 얻는다면 이 작품 역시 머잖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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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번째 밀실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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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의 신진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밀실 미스터리의 거장 마카베 세이치가 매년 자신의 별장에서 개최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동갑 친구인 범죄사회학 교수 히무라 히데오를 데려갑니다. 추리소설가, 편집자, 가족 등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 열린 파티는 사소한 충돌과 뜻밖의 발표 등 몇몇 해프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별일 없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아침, 마카베 세이치는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밀실 트릭의 희생자가 돼버립니다.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완벽한 밀실에서 벽난로에 상반신을 집어넣은 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현경까지 출동한 상황에서 히무라와 아리스는 밀실 트릭을 깨고 진범을 특정하려 하지만 예상외의 난관들이 등장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지고 맙니다.

 

2020년에 읽은 자물쇠 잠긴 남자이후 4년 만에 다시 만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입니다. ‘자물쇠 잠긴 남자는 일본에서 2015년에 발표된 이 시리즈의 27(자선단편집을 제외하면 24)인데, ‘46번째 밀실은 그로부터 무려 23년 전인 1992년에 발표된 시리즈 첫 편입니다.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한 책들을 구하는 게 올해 독서목표 중 하나인데, ‘46번째 밀실4년 만에 읽게 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인데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첫 편이라 나름 의미 있는 구하기가 될 것으로 기대됐습니다.

 

다소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범죄사회학 교수 히무라 히데오가 셜록 홈즈를 닮았다면, 아직 신진 작가의 티를 못 벗은 털털한 성격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왓슨의 캐릭터와 닮은 인물입니다. 히무라의 경우 이미 경찰의 사건 수사에 여러 번 협력했을 정도로 현장에 익숙하지만 아리스는 이번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실제살인사건과 마주칩니다. 히무라가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독자에게 절대 공개하지 않는 불친절한 명탐정 스타일이라면, 아리스는 자신이 알아내고 추리한 것을 일일이 독자와 히무라에게 설파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재미있는 건 아리스의 이런 역할이 실은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란 점입니다. 즉 아리스의 말만 듣고 따라가다가는 작가의 의도대로 엉뚱한 곳에 헤매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래도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두 주인공에 대한 소개가 여러 번 언급되는데, 꽤 흥미로운 조합이라 그런 대목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밀실 미스터리의 대가가 더 이상 밀실 미스터리를 쓰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직후 완벽한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 굳이 밀실이 필요하지 않았는데도 범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간과 공을 들여 애써 밀실을 만든 이유, 일반인에게는 쉽지 않은 밀실 트릭을 구사할 수 있기에 용의선상에 오른 여러 명의 추리소설가와 편집자 등 초반부터 독자의 눈길을 끄는 설정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거기에다 별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미묘하게 갈등을 벌이거나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등 예상치 못한 관계를 보여주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그런 관계들이 살인사건과 어떻게 이어질지 무척 궁금하게 만듭니다.

 

다만 이야기의 규모나 미스터리의 심도로 볼 때 중편 정도에 어울린다는 인상이 강해서인지 마지막에 히무라와 아리스가 진실을 밝히는 대목에서 큰 반전이나 충격을 맛보기 어려운 점이 아쉬웠습니다. 페이지는 금세 휙휙 넘어가지만 거듭 뒤바뀌는 용의자라든가 별장의 사람들을 더욱 큰 공포로 몰아넣는 사건이라든가 소소하더라도 연이어 일어나는 반전 등 독자를 유인하는 장치들이 부족해보인 게 사실입니다. 범행수법은 밀실 트릭의 맛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줬지만 히무라와 아리스가 범인을 특정하게 된 결정적인 단서는 너무 단순해보였고 범인의 동기 역시 기대했던 것보다는 약했습니다. 좀더 세고 독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탓에 아쉬움이 더 컸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4년 전 자물쇠 잠긴 남자에게 야박한 평점을 주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라고 단언했던 걸 보면 이 아쉬움은 이미 예정됐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직 제 책장에 방치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으로 작가 아리스 시리즈’ 8편인 주홍색 연구학생 아리스 시리즈’ 3편인 쌍두의 악마가 있습니다. 저와 잘 안 맞긴 해도 언젠가는 두 편 모두 꼭 읽을 생각입니다. 바람이라면 한 편이라도 제 취향을 만족시켜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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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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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아일랜드 시골의 어린 소녀인 는 여름방학을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미 여러 자식을 둔 엄마가 또 다른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좀더 편히 지내도록 맡겨진것이지만, 실은 이리저리 손이 가는데다 없는 살림에 밥만 축내는 는 부모에 의해 떠맡겨진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지만 킨셀라 부부와 함께 보낸 짧은 여름은 에게는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줬습니다.

 

자극적인 장르물 편식이 지독한 제가 순수문학, 그것도 아일랜드의 한 소녀가 겪은 특별한 여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터넷서점과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출판사의 뛰어난 마케팅과 여러 매체 및 작가들의 찬사이고, 또 하나는 본 내용이 100페이지도 채 안 되기에 그 수많은 찬사의 정체가 뭔지 금세 알 수 있겠다는, 또 여차하면 바로 접을 수 있겠다는 그리 건전치 못한 호기심입니다.

 

10살도 채 안 된 소녀의 인생은 킨셀라 부부의 집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을 기준으로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됩니다. 이전의 인생이 가난과 무관심과 냉대의 잿빛이었다면 이후의 인생은 아주 천천히 밝고 따뜻한 색으로 충만해집니다. 처음엔 낯설고 두려운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소녀는 날이 바뀔 때마다 자기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가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한지 천천히,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삶의 지혜를 하나둘씩 체득하는 것은 물론 타인의 상처와 상실에 공감하는 법도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표지 뒷면에 실린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이라는 문구는 킨셀라 부부 집에 살게 된 소녀의 첫 불안감과 함께 소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압축한 카피입니다. 킨셀라 부부와 함께 한 짧은 여름 동안 훌쩍 성장한 소녀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이제 그녀 앞에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새로운 전율’, ‘완벽한 정수’, ‘순수한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문장등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에 모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진짜 보석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저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소 과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든 한번쯤 읽어보라고 자신 있게 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건 딱히 뭐라고 정의하긴 힘들지만 이 작품이 발산하는 특별한 에너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정, 힐링, 계몽 같은 건 아니고, 뭐랄까... 소녀의 여름은 두 번째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를 것 같고, 세 번째 읽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은, 그런 특별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간결한 이야기지만 암시와 여백과 행간을 중요하게 여긴 작가의 의도 덕분인지 늘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고 싶다고 할까요?

 

소녀의 여름을 지켜본 모든 독자의 바람은 비슷할 것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소녀가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그래서 킨셀라 부부처럼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배려를 전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듯 킨셀라 부부와 함께 보낸 그 여름이 소녀의 삶에 행이 될지 불행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그런 근거 없는 불안감이 불쑥 솟아났는데, 어쩌면 이런 해석조차도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려고 합니다. 담담함 그 자체인 원작에 충실했으면 좋겠다는, 그러니까 너무 영화적인 감동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는 소문이 맞다면 나름 기대를 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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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살인사건
애슐리 칼라지언 블런트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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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때 메신저로 알게 된 남자에게 지독한 스토킹을 당했던 탓에 26살이 된 지금도 스마트폰 없이 살고 있는 레이건 카슨은 어렵게 꾸려가고 있는 꽃집에서 은둔자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두 동강이 난 여자의 시신을 발견한 그날 아침 이후로 레이건의 삶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레이건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건 살해당한 여자가 자신과 쌍둥이마냥 닮았다는 점.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비밀스런 사연 때문에 시신을 발견하고도 경찰에 알리지 못한 레이건은 5년 전부터 종적을 감춘 스토커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며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실제로 그날부터 스토커가 과거에 했던 짓과 똑같은 흔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자신을 꼭 닮은 두 번째 시신까지 나타나자 레이건은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도플갱어 살인사건2017년의 호주 시드니를 무대로 SNS, 다크웹, 스토킹, 여성혐오, 연쇄 토막살인 등 다양한 소재를 흥미롭게 버무린 살인미스터리이자 심리스릴러입니다. 심리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 상 중간에 살짝 동어반복의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사건 자체도 특이한데다 누가 범인인지, 목적이나 동기가 무엇인지 좀처럼 가늠하기 쉽지 않아 심리스릴러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10대 시절 불장난처럼 시작한 메신저 때문에 스토킹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던 레이건은 지금도 늘 주변을 경계하며 사람 만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인물입니다. 한국계 호주인이자 범죄전문기자인 민 외에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런 레이건이 한꺼번에 두 개의 사건 하나는 과거 스토커가 했던 짓과 똑같은 일들이 5년 만에 다시 반복되기 시작한 일이고, 또 하나는 자신과 꼭 닮은, 그것도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을 하필이면 자신이 발견한 일 - 에 휘말리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경찰에 알리는 것이 상식이지만 레이건은 과거의 악몽 때문에 경찰과 엮이기를 결단코 거부합니다. 하지만 동일범에게 살해당한 자신과 꼭 닮은 시신들이 연이어 발견되고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이메일까지 받게 되자 레이건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레이건의 입장에서는 등장인물 중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수상해 보입니다. 스토커와 살인범이 동일인 같기도 하고, 두 명의 범인이 함께 모의하여 레이건을 공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연관 없는 두 명의 범인이 우연히도 동시에 레이건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경찰에게마저 선을 그어버린 탓에 레이건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맥없이 공포를 견디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대목이 심리스릴러의 몫인데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긴 해도 레이건의 공포가 워낙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경찰도 등장하고 범죄전문기자인 민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긴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단서를 붙잡는 건 레이건 본인입니다. 문제는 그 단서 자체가 스토킹이나 살인사건의 진실로 바로 이끌어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장면 뒤로 100여 페이지의 긴 분량이 남아있다는 점, 그래서 레이건의 혼란과 공포가 더욱 극심해진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엽기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살해하며 레이건을 위협하는 범인이 70년 전에 벌어진(하지만 지금도 미제상태로 남아있는) ‘블랙 달리아 사건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947년 미국 L.A에서 벌어진 엘리자베스 쇼트 살인사건은 영화와 소설로 제작될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범인은 허리를 경계로 피해자를 두 동강 낸 것은 물론 가슴까지 끔찍하게 훼손했으면서도 현장에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아 경찰의 수사를 막다른 벽에 부딪히게 만들었습니다. 레이건은 현재 호주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물론 70년 전 블랙 달리아 사건의 피해자마저 자신과 꼭 닮았다는 사실에 더욱 극렬한 공포를 느끼는데, 그 때문에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미스터리에 대한 궁금증을 놓을 수 없게 됩니다.

 

처음 만나 작가인데다 살짝 고전의 냄새도 풍겼고 심리스릴러에 대한 선입관까지 가세한 탓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작품인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미스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일부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여러 개의 사건이 긴장감을 적절하게 유지시켰고 소소한 반전들도 매력적으로 읽힌 작품입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다른 미스터리나 스릴러 작품은 없는 듯 한데 나중에라도 신작 소식이 들리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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