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초 후에 죽는다
사카키바야시 메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의 신예 미스터리 작가들의 기발하고 독특한 작품들이 한국 독자들을 찾는 일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통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편이라 기성 베테랑 작가들의 작품에 더 관심을 갖기는 하지만, 간혹 특별한 간식처럼 신예들의 개성 넘치고 독창적인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도 있습니다.

사카키바야시 메이의 ‘15초 후에 죽는다는 일단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는데, 고백하자면 “‘피해자가 죽기 직전의 15라는 상황 속에서 피해자와 범인의 독특한 공방을 그린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고 우선은 살짝 고개가 갸웃거려진 게 사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초라는, 다소 한계가 명백해 보이는 설정을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냈을지 한 번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든 수록작이 피해자와 범인의 공방을 다룬 건 아닙니다. 또한 ‘15가 죽음까지 남은 시간을 의미하는 건 맞지만 각 수록작마다 서로 맛과 느낌이 다르게 설정돼서 대체로 엇비슷한 흐름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라는 근거 없던 기우를 보기 좋게 날려버리기도 했습니다.

 

15

죽기 전 15초 동안 어떻게든 범인에게 복수하려는 주인공과 완전범죄를 이루기 위해 15초 동안 사력을 다하는 범인의 대결을 그린 작품으로, ‘옮긴이의 말의 표현대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특이한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다음 충격적인 결말이

시청자 참여형 추리드라마의 마지막 회 엔딩 15초 사이에 여주인공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필 그 장면을 놓친 는 누나와 함께 드라마 첫 편부터 복기하며 여주인공의 죽음의 진상을 추리합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형식으로, 연이은 반전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불면증

심인성 난청을 앓고 있으며 매일 비슷한 꿈(15초 후에 교통사고가 일어나는)을 반복해서 꾸는 13세 소녀 마쓰리와 어딘가 비밀스럽고 애틋한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한 그녀의 어머니 요우가 이끌어가는 슬프고 애잔한 호러풍 이야기입니다.

 

머리가 잘려도 죽지 않는 우리의 머리 없는 살인 사건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더라도 15초 이내에 붙이기만 하면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는 수탈(首脫)이라는 기괴한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 축제날 밤에 벌어진 의문의 습격사건을 추리하는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죽음 직전의 15는 무척이나 다루기 힘든 설정이지만 사카키바야시 메이는 판타지, 액자소설, 본격 미스터리 등 다채로운 장르와 이야기 속에 그 설정들을 맛깔나게 잘 녹여 넣었습니다. 그야말로 신인의 패기가 아니라면 도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인데, 그 과감함에 정교한 설계까지 가미돼서 흥미진진하게 읽힌 작품입니다. 만점까지 주진 못했지만 색다른 미스터리를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2021년에 출간됐으니 사카키바야시 메이의 두 번째 작품이 나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 일본에서도 출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어쩌면 난산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데뷔작에 버금가는 두 번째 작품으로 독자들을 찾아와주기를 기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찰무녀전 조선의 여탐정들
김이삭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찰궁녀였지만 절친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궁을 나와 무당골에 은신한 뒤 탐관오리에게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신기 없는 무녀무산, 서자라는 처지에 신내림까지 받아 남들이 듣거나 보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는 능력을 갖게 된 설랑, 앞 못 보는 무당이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손에 넣는 돌멩 등 범상치 않은 세 사람이 이끌어가는 역사추리소설입니다. 도성과 경기 일대에서 발생한 괴력난신, 즉 복수와 저주를 대신해준다는 두박신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밀명을 받은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진실에 다가갈 기회를 잡지만 그때부터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나가는 등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합니다.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우선 이 작품의 미덕부터 소개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인물들의 캐릭터입니다. 신기 없는 무녀, 신내림 받은 서자, 앞 못 보는 무당 등 세 명의 주인공은 과거의 이력은 물론 현재의 처지나 성격, 그리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재능 등 모든 면에서 매력적으로 설정된 인물들입니다. 특히 감찰궁녀였다가 자진해서 궁을 나온 뒤 사이비 무녀가 된 무산은 시리즈물 주인공에 어울리는 매력과 카리스마로 중무장하고 하고 있어서 반강제로 떠맡게 된 두박신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들을 돕는 조연들 역시 다양한 계층과 신분을 갖고 있는데다 개성도 강해서 흥미를 유발하는데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여러 번 놀랄 만큼 꼼꼼하고 세세했던 고증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무당 혹은 무격에 관한 폭넓고 깊은 자료조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고, 방대한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조선시대 초기 여러 공간에 대한 묘사 역시 감탄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디테일한 고증 등 화려한 재료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그 재료들의 맛을 살려내지 못할 만큼 산만하고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47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 속에서 무산 일행은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조사를 벌이고, 때론 살인사건과 마주치기도 하고, 심지어 살해될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우여곡절 중 선명하게 읽힌 대목은 별로 없습니다. 두박신 조사가 살인사건 수사로 비화하더니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맥이 툭 끊어지고 맙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무산과 그 일행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애초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었던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활인원 한증소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활인원은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데, 저는 활인원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의 인물들은 너무 단편적으로만 소개됐고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퇴장하거나 죽어버리곤 합니다. 사건 역시 뜬금없이 벌어졌다가 흐지부지됐고 범행동기도 방법도 불분명하게 마무리됩니다. 그 와중에 무산 일행은 그저 이리저리 휩쓸려만 다닐 뿐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뭘 얻어낸 건지, 뭘 해결한 건지도 알 수 없으니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무산 일행이 품은 짙은 회한과 분노에 공감하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평을 보니 대체로 호평 일색이었는데, 그렇다면 제가 오독의 우를 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서평을 쓴 뒤 별도로 대략의 줄거리를 정리해놓곤 하는 제가 무산의 행보만이라도 정리해보려다가 포기한 걸 보면 100% 오독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독의 우를 확인하기 위해 감찰무녀전을 다시 읽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저의 야박한 평점보다는 다른 분들의 호평에 귀를 기울여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둘기피리 꽃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6년에 제목이 바뀐 개정판(‘비둘기피리꽃’)이 나온 걸 보고 예전에 중고로 구매했던 게 기억나서 , 읽어야겠구나.”라고 생각한 게 벌써 8년 전의 일입니다. 2024년에는 책장에 오래 방치해놓은 책들을 일부라도 소화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미야베 미유키의 구적초입니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 시리즈 미야베 월드 2을 두 번씩 읽을 정도로 미미 여사의 광팬이긴 하지만 실은 현대물 중에는 안 읽은 작품이 훨씬 더 많기도 하고 심지어 읽다가 포기한 경우도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구적초라는 어딘가 고색창연한 제목에 끌려서 현대물이란 것도 모르고 구매했고, 읽기 전에도 앞뒤 표지의 소개글을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예상치도 못한 초능력 이야기가 펼쳐져서 잠시 당황한 게 사실입니다. 다 읽고 앞뒤 표지를 보니 초능력을 지닌 세 명의 여성을 둘러싼 세 가지 이야기라는 소개글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 이 소개글을 먼저 봤다면 구매는 물론이거니와 읽는 것도 꺼려했을 게 분명합니다. 아무리 미미 여사라도 초능력이나 SF물은 사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록된 세 개의 단편은 무지한 상태에서 이 작품을 구매하고 읽은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애틋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능력이라도 편리함이나 즐거움 뒷면에는 반드시 혹독함이며 괴로움을 감추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이 책이 태어났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예지몽을 꿀 수 있는 도모코, 불을 일으키고 조종할 수 있는 염화(念火) 능력을 가진 준코, 타인의 몸이나 소지품에 손을 대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다카코 등 세 편의 주인공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제대로 통제하고 조절하려면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능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자랑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 절대 들켜서도 안 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선지 흔히들 초능력 서사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과는 전혀 결이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스러질 때까지

21살 도모코는 함께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집을 정리하다가 뜻밖의 유품을 발견합니다. 그건 8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부모가 남긴 비디오테이프들입니다. 당시 사고로 그 전의 기억들을 모두 잃어버렸던 도모코는 비디오테이프들을 보다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번제(燔祭)

여동생 유키에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를 포착하고도 경찰이 증거와 단서 부족으로 머뭇거리자 가즈키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범인을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때 가즈키를 돕겠다는 한 여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즈키의 눈앞에서 직접 염화 능력을 선보입니다.

 

구적초(개정판에선 비둘기피리꽃’)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경찰이 됐고 이제 형사과의 어엿한 일원까지 된 다카코는 최근 들어 자신의 능력이 점차 소멸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크게 당황합니다. 능력 없이도 자신이 과연 형사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과 함께 말입니다.

 

앞선 두 편의 주인공 도모코와 준코가 자신의 능력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또는 그 능력을 저주하는 캐릭터라면, 표제작의 주인공 다카코는 그 능력의 소멸 가능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물입니다. 미미 여사는 서로 처지는 달라도 결국 특별한 능력이란 것이 마냥 편리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특히 그것을 신기하고 부러운 눈으로만 지켜보는 제3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특유의 애틋하고 안쓰러운 문장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의 깊이와 절실함에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SF나 판타지 쪽은 꺼려지는 게 사실이지만, 이 작품을 읽고 보니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 정도는 파악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설정이라면 힘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의외의 재미와 여운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수 속의 여인
로라 립먼 지음, 박유진 옮김, 안수정 북디자이너 / arte(아르테)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66년 미국 볼티모어. 매디 슈워츠는 37살 생일을 앞두고 그동안의 안락한 삶에 작별을 고합니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집을 나간 매디는 열악한 생활을 견디는 와중에 흑인 경찰 페디와 인연을 맺는가 하면 11세 소녀 실종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을 계기로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겨우 볼티모어 신문사 스타에 들어갔지만 기사 작성과는 거리가 먼 잡무만 떠맡으며 혹독한 수습생활을 견디던 매디는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흑인여성 클레오의 사건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내 특종을 따내기로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경찰과 사건 관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타의 기자들까지 냉소만 보낼 뿐입니다. 더욱 분발하던 매디는 유력한 단서를 손에 넣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1997년 데뷔 이래 세계 유수의 범죄문학상을 석권했다는 로라 립먼의 프로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호수 속의 여인을 통해 그 이름을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한국에는 (앤솔로지 작품인 라인업을 제외하면) 단 두 작품만 소개됐다는 점도 그녀의 명성에 비하면 다소 의외로 보였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주인공이 기자인 살인사건 미스터리로 예단할 수 있는데, ‘호수 속의 여인은 미스터리 외에도 다양한 면을 지닌 작품입니다. 큰 뼈대는 기자 지망생매디 슈워츠가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흑인여성 클레오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지만, 그 외에도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온갖 종류의 차별 - 여성, 흑인, 종교 에 대한 사실감 넘치는 서사와 함께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살아온 매디 슈워츠라는 한 여성의 굴곡진 연대기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사회 고발물, 여성소설이라는 최소한 세 개의 얼굴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까요?

 

10대 때부터 엄청난 카리스마와 외모로 상대방을 장악했던 매디는 원하는 것은 모조리 손에 넣는 능력자였지만 17살에 악몽과도 같은 일을 겪은 탓에 18살이 되자마자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와 부랴부랴 약혼을 했고, 이후 겉으로는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처럼 지냈지만 실은 자신의 처지가 시녀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에 빠진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녀가 집을 뛰쳐나온 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칼럼니스트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군분투하는, 특히 백인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언론의 마초들에게 수시로 당하는 지독한 차별을 이겨내는 모습은 1960년대에 태동한 페미니즘 이슈를 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눈길을 끈 대목입니다. 스티븐 킹이 당시 여성에게 기대되는 것과 여성이 열망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찬사를 보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입니다.

 

매디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건 새 연인인 흑인경찰 페디입니다. 당시 흑백인종간의 연애가 불법이었던 탓에 데이트는커녕 함께 외출하는 것조차 꿈도 꾸지 못하던 매디와 페디는 늘 좁은 방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불행한 연인입니다. 경찰인 페디는 매디의 취재와 조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존재감은 미스터리보다는 당시의 부당했던 사회상을 폭로하는 장면들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클레오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는 매디의 행보는 거침없습니다. 정식 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지독할 정도로 쫓아다니며 작은 단서라도 얻기 위해 분투합니다. 페디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매디를 방해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발생합니다. 하지만 매디의 롤러코스터 같은 과거사와 온갖 차별에 대한 서사가 워낙 묵직하게 읽혀서 그런지 미스터리 자체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갔던 게 사실입니다.

또한 보기 드문 독특한 구성 역시 미스터리에의 몰입을 방해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즉 매디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탐문하는 챕터가 끝나자마자 바로 그 누군가1인칭 주인공인 챕터가 이어집니다. 중요한 조연뿐 아니라 매디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 누군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사건이나 매디에 관해 말하기도 하지만 때론 자신만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 역시 희한하게도 무척 재미있어서 역설적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미스터리 서사를 망각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키곤 합니다.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했다가 차별이 만연했던 1960년대를 살아간 한 여성의 버라이어티한 이야기를 읽게 된 셈이지만 개인적으론 의외로 재미있는 책읽기가 됐습니다. 미스터리 서사가 좀더 강렬했더라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텐데 그 아쉬움은 한국에 출간된 로라 립먼의 두 작품들(‘죽은 자는 알고 있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로 달래볼까, 생각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
미야지마 미나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과 표지에서 단박에 느껴지는, 어딘가 4차원스러운 10대 소녀가 주인공인 청춘물은 실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먼 장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 연작단편집의 첫 수록작 고마웠어! 오쓰 세이부백화점!’이 제20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대상 수상작이기 때문입니다.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구보 미스미)화소도중’(미야기 아야코)장르물 일본소설 가운데 베스트로 꼽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들인데 이 두 작품 모두 ‘R-18 문학상수상작이라 같은 상을 수상한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를 조금의 고민도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던 것입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주인공 나루세 아카리는 각 수록작을 통해 중학교 2학년부터 고교 3학년까지의 성장과정을 보여줍니다. 주위의 시선이나 평가 따윈 신경 쓰지도 않으며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바라는 꿈만을 위해 돌직구처럼 살아가는 나루세의 삶은 그저 괴짜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4차원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루세가 민폐녀 혹은 반골녀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누구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44년의 역사를 지닌 백화점이 문을 닫게 되자 그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올여름을 세이부에 바칠까 한다.”라는 말과 함께 여름방학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을 찾는다든가, “나는 개그의 정점을 찍을까 한다.”라는 뜬금없는 목표를 세우곤 전국적인 만담 대회에 출전하는가 하면, 지금껏 누구도 이루지 못한 200살의 수명에 도달하기 위해 규칙적인 운동과 올바른 생활습관을 견지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문득 뭔가 하고 싶어지면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직진하는 순도 100%의 노력파라고 할까요?

그런 나루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거의 대부분 다나까로 처리된 어미입니다. 애어른이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전국시대의 무장이나 미래의 로봇의 말투 같기도 한 나루세의 화법은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와 절묘하게 조합이 돼서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냅니다.

 

평범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또래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나루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딘가 감각 하나가 망가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향한 비난이나 공격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화이트 사이코패스처럼 보일 때도 있는데, 그런 나루세도 성장과 함께 특별한 경험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는다든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마음의 상처와 후회에 사로잡힌다든가, 누군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든가 - 을 하나둘 겪으면서 조금씩 자신 외의 존재들과 소통하며 그 또래에 어울리는 삶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결코 부정적인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루세가 좀더 크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게 만드는 통과의례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소망대로 200살까지 살더라도 나루세는 여전히 나루세로 살아갈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수록작 중엔 나루세가 완전 조연으로만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런 작품들은 나루세의 친구들이나 소도시(나루세의 고향이자 이 작품의 주 무대인 시가현오쓰시)의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박한 일상과 인간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간혹 울컥하게 만들기도 하는 그들의 이야기엔 일본소설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따뜻한 행복감이 잘 배어있어서 나루세의 성장담과 함께 깊은 여운을 맛보게 해줍니다.

 

작가는 책머리의 서문을 통해 나루세처럼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주변에 많습니다. 그런 소망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이라는 바람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기대했던 ‘R-18 문학상수상작의 특별한 맛을 즐기진 못했지만(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19금인데다 이야기가 무척 세고 독합니다), 심각한 장르물 편식 와중에 나루세 덕분에 잠시나마 웃음과 휴식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후속편인 나루세는 믿었던 길을 간다20241월에 출간됐다고 하는데, 좀더 큰 세상으로 나와 대학생 혹은 사회 초년생이 됐을 나루세가 어떻게 자신의 고집과 꿈을 더 단단하게 키워나가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나루세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읽을 기회가 꼭 찾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