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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심연 ㅣ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한밤중, 머리 가죽이 벗겨진 여자가 벌거벗은 채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다가 가까스로 구출됩니다. 뉴욕 경찰청의 애너벨 오도넬은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 추가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이 사건이 피해자가 67명에 이르는 대규모 실종사건과 연관됐음을 알아냅니다. 범인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단서는 최소 두 명 이상의 공범이 있음을 암시하지만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집니다. 한편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포틀랜드에서 뉴욕으로 날아온 사립탐정 조슈아 브롤린은 애너벨과의 ‘거래’를 통해 비공식적인 협업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공범 중 한 명의 정체를 파악해냄으로써 애너벨을 크게 놀라게 만듭니다. 하지만 공범 체포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두 사람의 협업은 위기에 처하고 맙니다.
‘악의 영혼’에 이은 ‘악의 3부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주인공이며 ‘악의 영혼’에서는 FBI 프로파일러 출신의 포틀랜드 경찰서 수사관이던 조슈아 브롤린은 이제 사립탐정으로 변신하여 뉴욕에서 벌어진 희대의 실종사건에 참여합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2008년에 읽긴 했지만 인생 스릴러로 여기면서도 서평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워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악의 3부작’의 가장 큰 특징은 역대급으로 잔혹한 범죄 묘사입니다. ‘악의 심연’의 범인들은 전작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고문하고 난도질하며 살해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지는 궁극의 범행 동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을 품고 있어서 어지간히 비위가 강한 독자도 한두 번쯤은 속이 불편해지는 경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시리즈가 단지 잔혹한 묘사에만 기대어 독자를 유인하는 건 아닙니다. 카리스마와 트라우마를 겸비하고 있는 매력적인 주인공, 복잡하지만 정교하고 빈틈없이 설계된 스릴러 서사, 그리고 방대한 자료조사의 흔적이 배어있는 꼼꼼한 디테일 등 연쇄살인 스릴러의 필수 미덕들을 골고루 갖췄기에 출간 당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었습니다.
‘악의 영혼’이 조슈아 브롤린의 원맨쇼였다면 ‘악의 심연’은 뉴욕 경찰청의 혼혈 여형사 애너벨 오도넬과 사립탐정 조슈아 브롤린의 버디 스릴러입니다. 브롤린은 포틀랜드 출신의 실종 여성 레이첼을 찾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왔고, 애너벨이 수사하는 실종사건 피해자 67명 중 한 명이 레이첼임을 확인하곤 과감하게 애너벨에게 협업을 제안합니다. 경찰이라면 사립탐정의 협업 제안 따윈 받아들일 리 없지만 애너벨은 브롤린이 ‘포틀랜드 유령 사건’을 해결한 유명한 전직 수사관이며 무엇보다 실종사건 전문 탐정이란 점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공범의 정체까지 파악해내는 브롤린의 뛰어난 수사능력에 크게 놀랍니다. 다만 브롤린의 존재는 뉴욕 경찰청의 동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브롤린과 애너벨의 수사가 이뤄지는 와중에 간간이 범인들에게 납치된 피해자들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감금된 상황들이 묘사됩니다. 말하자면 범인들이 모든 피해자를 살해한 것은 아니라는 뜻인데 그 때문에 독자는 범인들의 동기와 의도를 좀처럼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브롤린과 애너벨 역시 첫 번째 범인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사진들 때문에 피해자들이 실종 이후 길게는 몇 달 가까이 생존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독자와 마찬가지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해할 따름입니다.
‘악의 3부작’의 특징 중 하나는 프랑스 작가가 이야기의 무대를 미국의 대도시로 삼은 점입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스릴러 가운데 범인의 의도와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다소 난해하거나 철학적인 배경, 심지어 신화까지 끌어들이는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사실 그런 서사는 (이해력이 딸리거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만) 한눈에 쏙 들어오지도 않고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게 사실입니다. 차라리 단순하더라도 확실하고 명료한 범행 동기가 더 설득력도 있고 개연성도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작가 막심 샤탕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스릴러 서사를 구사함으로써 이런 거리감을 ‘어느 정도는’ 불식시킵니다.
다만 ‘악의 심연’은 전작에 비해 조금은 현학적이고 난해한 범행 동기를 설정했습니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브롤린의 입을 통해 장황하게 설명되는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은 앞서 잘 쌓여온 스릴러 서사를 갑자기 모호하게 만들어 오히려 역효과를 냈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들의 동기와 의도 역시 ‘뭔가 있어 보이게’ 작위적으로 포장된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 스릴러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별 1개를 뺄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악의 심연’의 뒤를 잇는 작품은 ‘악의 주술’입니다. 마지막 페이지쯤에 후속작에 대한 약간의 떡밥이 남겨져있는데, 읽은 지 너무 오래 돼서 그 떡밥을 보고도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 기억도 없어서 난생 처음 읽는 새 이야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조슈아 브롤린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게 너무 아쉽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