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의 섬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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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 내해에 자리 잡은 기이한 모양의 비탈섬.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인 어느 날, 유명 출판사 사이다이지 대표의 유언장 공개를 위해 가족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모여듭니다. 그중에는 유언장 공개를 맡은 변호사 야노 사야카, 20여 년간 연락이 끊겼던 고인의 조카를 찾아내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도 포함돼있습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유언장 공개가 마무리된 그날 밤, 저택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태풍으로 인해 밀실이 돼버린데다 새벽에 빨간 도깨비 얼굴을 한 남자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는 한 목격자의 진술까지 더해지자 섬에 갇힌 가족과 방문객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진실 찾기에 나선 변호사 사야카와 탐정 다카오는 뭔가를 감추는 듯한 사이다이지 가문 사람들의 태도에 더 큰 의혹을 품습니다.

 

지금까지 19편이나 되는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히가시가와 도쿠야지만 속임수의 섬으로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읽진 않았어도 일부 작품은 제목을 외울 정도로 낯익은 작가지만 유머 미스터리 소설의 1인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제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보여 읽을 생각조차 안 했던 탓입니다. 하지만 속임수의 섬은 유머보다는 밀실 트릭과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가 더 강하게 느껴져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에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비탈섬은 표지에서 한눈에 느낄 수 있듯이 모양새 자체만으로 불길함을 내뿜는 절해고도입니다. 날씨가 좋을 때도 쉽게 접안하기 어렵게 만드는 암초들로 둘러 쌓여있고, 섬 꼭대기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단애절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기이한 섬에 지어진 자 모양의 저택은 구조나 설계가 워낙 특이해서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놀라움 이상의 감정을 품게 만듭니다. 굳이 이 섬의 저택에서 자신의 유언장을 공개하라는 고인의 뜻도, 또 직계도 아닌데다 20년 넘게 소식을 끊었던 조카를 탐정을 통해 찾아내 섬에 데려오라고 한 고인의 속셈도 이 섬과 저택의 생김새처럼 불길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때맞춰 섬을 덮친 두 개의 태풍이 요동치는 밤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仕掛島’(사괘도)입니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仕掛특수하게 고안된 장치또는 속임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속임수의 섬이라는 번역제목은 언뜻 타인을 속이겠다는 인간의 의지나 속셈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읽은 뒤 원제의 의미를 되짚어보면 실은 이 섬 곳곳에 갖가지 특수하게 고안된 장치가 존재한다는 점을 예고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변호사 사야카와 탐정 다카오는 지난한 추리와 탐색 끝에 비탈섬과 저택에 감춰진 의외의 장치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속임수의 섬2022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와 시마다 소지가 맹활약했던 80년대의 신본격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기발한 트릭과 추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유머 미스터리는 역시나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몇 번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억지 유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밀실이 돼버린 섬을 배경으로 한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만큼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신본격의 작품들에서 느끼곤 했던 위화감 가득한 작위적인 트릭이 종종 목격되기도 했지만, “도대체 이런 설계를 하려면 얼마나 특이한 뇌구조를 지녀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거기다가 몇 겹의 포장을 덧댄 트릭과 미스터리가 빈틈없이 전개돼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두 주인공 사야카와 다카오의 조사는 현재 벌어진 사건뿐 아니라 23년 전 비탈섬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에까지 다다르는데 두 사건의 연관성은 물론 그동안 은폐됐던 진실들까지 파헤치는 과정에서 히가시가와 도쿠야가 완성한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설계도가 거듭 빛을 발하곤 합니다. 덕분에 작위적인 트릭의 위화감 같은 건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미스터리 자체와 비극적인 서사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속임수의 섬은 한국에서 2011년에 출간된 저택섬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정 다카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경찰과 탐정으로 저택섬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유머 미스터리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속임수의 섬에서 만끽한 매력 때문에 언젠가 저택섬에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혹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의 유머 미스터리 대표작인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시리즈에도 눈길이 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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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주술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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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포틀랜드의 숲에서 여자들의 시신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죽기 직전 거대한 공포와 직면한 듯 온몸을 오그린 채 비명을 지르는 표정으로 굳어있는 시신의 상태도 놀라웠지만 거미줄로 보이는 하얀 고치에 시신이 싸여있는 점, 또 피와 내장이 몽땅 비워진 점 때문에 수사관계자들은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한때 프틀랜드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사립탐정이 된 조슈아 브롤린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뉴욕에서 날아온 형사 애너벨 오도넬과 함께 포틀랜드 경찰을 도와 수사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 어떤 연쇄살인마와도 다른 패턴을 보이는 범행수법 탓에 좀처럼 수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더구나 범인이 남긴 거짓증거 때문에 거듭 혼란에 빠지던 브롤린과 애너벨은 급기야 범인으로부터 끔찍한 공격을 받기에 이릅니다.

 

악의 영혼악의 심연에 이은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혹은 조슈아 브롤린 시리즈’)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막심 샤탕은 인간의 이 어디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어느 정도까지 그 파괴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주인공 브롤린을 통해 스스로 살인자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그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하고 해결하는 프로파일러의 진면목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악의 영혼에서 최악의 상처를 입은 브롤린은 이후 경찰을 그만두고 실종사건 전문 사립탐정이 되어 많은 사건을 해결해왔지만,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최대한 거부한 채 고독과 절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의 감정을 처음으로 건드린 건 악의 심연에서 만난 뉴욕경찰청의 형사 애너벨이었습니다. 사건 해결 후 5개월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포틀랜드에서 벌어진 거미와 독소를 이용한 끔찍한 연쇄살인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 번 심연과도 같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전작들의 범인들도 그 엽기성과 잔혹함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악의 주술속 범인은 거미와 독소라는 독특한 범행도구는 물론 미라를 연상시키는 끔찍한 시신 처리방식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행태를 보여줍니다. 또 여느 연쇄살인마와 달리 일관성 없는 패턴을 보여 브롤린과 애너벨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데, 피해자가 단지 여자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살인 외에도 독거미를 이용하여 도시 전체를 공포에 빠지게 만드는 등 도무지 그 동기와 목적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유독 이 작품에서 브롤린과 애너벨은 여러 번 헛발질을 합니다. 범인이 거미 전문가이며 독소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점 외에 거의 모든 프로파일링이 번번이 빗나가고, 유력한 용의자는 어이없는 방식으로 수사망을 빠져나갑니다. 누구보다 브롤린의 프로파일링을 신뢰하던 애너벨마저 혼란에 빠진 가운데, 범인은 대담하게도 두 사람을 향한 공격에 나섭니다. 그리고 브롤린은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최악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평범한 스릴러가 아니라 인간의 에 대한 탐구까지 중요한 서사로 다루고 있다 보니 가끔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난해한 대목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틈날 때마다 살인자의 내면에 침잠하곤 하는 브롤린은 말할 것도 없고 상식 밖의 악의와 동기를 엽기적인 살해방식으로 구현하는 연쇄살인마들은 수시로 자신만의 세계관과 철학을 토해내곤 하는데, 때론 100% 공감할 때도 있지만 때론 억지로 갖다 붙인 것처럼 혹은 결과론적으로 읽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도가 지나칠 때면 과연 사람의 내면과 심리가 저토록 복잡할까?” “심오하고 철학적인 악의를 품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를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점이 악의 3부작의 진짜 매력이자 미덕일 수도 있습니다.

 

워낙 이야기가 복잡하고 등장인물도 많아서 구체적인 줄거리를 거의 언급하지 못했는데,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어쩔 수 없었던 탓도 있고 스포일러가 될 대목이 너무 많은 탓도 있습니다. 읽기 전에 조금이라도 정보가 필요한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막심 샤탕의 작품은 이후 그림자의 제국’, ‘가이아 이론’, ‘약탈자등이 한국에 소개됐는데, ‘그림자의 제국을 제외하곤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名品再讀이라는 계획에 악의 3부작그림자의 제국만 포함시킨 건 그런 이유 때문인데, 개인적으론 조슈아 브롤린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단 세 편으로 끝난 게 무척 아쉬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다시 읽을 그림자의 제국이 그 아쉬움을 달래주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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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심연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한밤중, 머리 가죽이 벗겨진 여자가 벌거벗은 채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다가 가까스로 구출됩니다. 뉴욕 경찰청의 애너벨 오도넬은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 추가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이 사건이 피해자가 67명에 이르는 대규모 실종사건과 연관됐음을 알아냅니다. 범인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단서는 최소 두 명 이상의 공범이 있음을 암시하지만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집니다. 한편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포틀랜드에서 뉴욕으로 날아온 사립탐정 조슈아 브롤린은 애너벨과의 거래를 통해 비공식적인 협업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공범 중 한 명의 정체를 파악해냄으로써 애너벨을 크게 놀라게 만듭니다. 하지만 공범 체포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두 사람의 협업은 위기에 처하고 맙니다.

 

악의 영혼에 이은 악의 3부작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주인공이며 악의 영혼에서는 FBI 프로파일러 출신의 포틀랜드 경찰서 수사관이던 조슈아 브롤린은 이제 사립탐정으로 변신하여 뉴욕에서 벌어진 희대의 실종사건에 참여합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2008년에 읽긴 했지만 인생 스릴러로 여기면서도 서평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워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악의 3부작의 가장 큰 특징은 역대급으로 잔혹한 범죄 묘사입니다. ‘악의 심연의 범인들은 전작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고문하고 난도질하며 살해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지는 궁극의 범행 동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을 품고 있어서 어지간히 비위가 강한 독자도 한두 번쯤은 속이 불편해지는 경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시리즈가 단지 잔혹한 묘사에만 기대어 독자를 유인하는 건 아닙니다. 카리스마와 트라우마를 겸비하고 있는 매력적인 주인공, 복잡하지만 정교하고 빈틈없이 설계된 스릴러 서사, 그리고 방대한 자료조사의 흔적이 배어있는 꼼꼼한 디테일 등 연쇄살인 스릴러의 필수 미덕들을 골고루 갖췄기에 출간 당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었습니다.

 

악의 영혼이 조슈아 브롤린의 원맨쇼였다면 악의 심연은 뉴욕 경찰청의 혼혈 여형사 애너벨 오도넬과 사립탐정 조슈아 브롤린의 버디 스릴러입니다. 브롤린은 포틀랜드 출신의 실종 여성 레이첼을 찾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왔고, 애너벨이 수사하는 실종사건 피해자 67명 중 한 명이 레이첼임을 확인하곤 과감하게 애너벨에게 협업을 제안합니다. 경찰이라면 사립탐정의 협업 제안 따윈 받아들일 리 없지만 애너벨은 브롤린이 포틀랜드 유령 사건을 해결한 유명한 전직 수사관이며 무엇보다 실종사건 전문 탐정이란 점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공범의 정체까지 파악해내는 브롤린의 뛰어난 수사능력에 크게 놀랍니다. 다만 브롤린의 존재는 뉴욕 경찰청의 동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브롤린과 애너벨의 수사가 이뤄지는 와중에 간간이 범인들에게 납치된 피해자들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감금된 상황들이 묘사됩니다. 말하자면 범인들이 모든 피해자를 살해한 것은 아니라는 뜻인데 그 때문에 독자는 범인들의 동기와 의도를 좀처럼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브롤린과 애너벨 역시 첫 번째 범인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사진들 때문에 피해자들이 실종 이후 길게는 몇 달 가까이 생존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독자와 마찬가지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해할 따름입니다.

 

악의 3부작의 특징 중 하나는 프랑스 작가가 이야기의 무대를 미국의 대도시로 삼은 점입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스릴러 가운데 범인의 의도와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다소 난해하거나 철학적인 배경, 심지어 신화까지 끌어들이는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사실 그런 서사는 (이해력이 딸리거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만) 한눈에 쏙 들어오지도 않고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게 사실입니다. 차라리 단순하더라도 확실하고 명료한 범행 동기가 더 설득력도 있고 개연성도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작가 막심 샤탕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스릴러 서사를 구사함으로써 이런 거리감을 어느 정도는불식시킵니다.

다만 악의 심연은 전작에 비해 조금은 현학적이고 난해한 범행 동기를 설정했습니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브롤린의 입을 통해 장황하게 설명되는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은 앞서 잘 쌓여온 스릴러 서사를 갑자기 모호하게 만들어 오히려 역효과를 냈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들의 동기와 의도 역시 뭔가 있어 보이게작위적으로 포장된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 스릴러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별 1개를 뺄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악의 심연의 뒤를 잇는 작품은 악의 주술입니다. 마지막 페이지쯤에 후속작에 대한 약간의 떡밥이 남겨져있는데, 읽은 지 너무 오래 돼서 그 떡밥을 보고도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 기억도 없어서 난생 처음 읽는 새 이야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조슈아 브롤린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게 너무 아쉽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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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영혼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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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포틀랜드 경찰서 강력반의 조슈아 브롤린은 FBI에서 훈련받은 프로파일러 능력을 발휘하여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한 덕분에 30대 초반에 수사 지휘권을 거머쥔 인물입니다. 포틀랜드 일대에서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지만 수사는 답보상태이고 언론은 범인에게 포틀랜드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을 붙여가며 경찰을 압박합니다. 그러던 중 브롤린은 과학수사팀의 도움을 받아 살해 현장을 특정할 수 있었고, 범인의 네 번째 범행을 가까스로 저지하며 감금돼있던 줄리에트 라파예트를 구해내는데 성공합니다. 줄리에트는 심각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삶을 되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1년 후 포틀랜드 인간 백정의 모방범이 나타나자 브롤린과 줄리에트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악의 영혼200226세의 막심 샤탕이 내놓은 악의 3부작가운데 첫 편입니다. 처음 읽은 건 대략 2007년 전후로 기억하는데, 인생 스릴러라고 생각하면서도 서평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워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젊은 여성을 납치 살해한 뒤 끔찍한 형태로 시신을 훼손하는 포틀랜드 인간 백정은 그 어느 잔혹한 스릴러 속 연쇄살인마와도 비교되지 않는 엽기적인 악마입니다. 하지만 그를 저지한 브롤린과 그에게 목숨을 잃을 뻔 한 줄리에트의 진정한 악몽은 사건 1년 후 포틀랜드 인간 백정을 완벽하게 모방한 또 다른 악마가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더구나 이번 범인은 경찰에게 보낸 은유로 가득 찬 편지를 통해 자신의 범행 또는 피해자의 위치를 알려주는데, 그 때문에 브롤린을 비롯한 포틀랜드 경찰은 범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더욱 애를 먹습니다. 그런 와중에 피해자는 연이어 발생하고 브롤린과 줄리에트의 공포는 더욱 깊어집니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사건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물론 브롤린과 경찰을 대혼란에 빠뜨리는 모방범의 범행 수법과 동기라든가 1년 만에 다시금 연쇄살인마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줄리에트의 공포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브롤린의 분투 등 다양한 서사들이 이 방대한 분량을 지루할 틈 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잖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조슈아 브롤린이 설파하는 프로파일링 기법과 살인자를 잡기 위해 살인자가 된다.”는 프로파일러의 특별한 수사법에 대한 묘사입니다. 살인 현장을 꼼꼼히 살펴본 브롤린이 범인의 특징과 윤곽에 대해 한 페이지 넘게 프로파일링을 하는가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스스로 범인이 되어 살해 상황을 상세히 재현해보다가 생각지도 못한 단서를 포착하기도 합니다. 프로파일러라는 개념이 더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보니 이 작품을 최근에 읽게 된 독자라면 이 대목들이 다소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데, 제가 이 작품을 읽은 2000년대 중반만 해도 무척 파격적이고 신기하게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대략의 줄거리조차 잊고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던 건 이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듭됐던 잔혹한 묘사들입니다. ‘인간 백정과 모방범의 범행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차가운 해부대 위에서 진행되는 부검 장면 역시 마치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 생생하고 상세하게 그려져서 어지간히 무딘 저조차도 수시로 불편함을 느낀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란 점 때문인지 디테일에 대한 찬사 못잖게 선정성에 기댄 서사라는 비난 어린 서평이 적잖았던 것도 기억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제가 손에 꼽을 수 있는 역대급 잔혹 작품임에는 분명하니 이런 스타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20년도 넘은 작품이지만 지금쯤 개정판이 나와도 괜찮을 정도로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도 높고 프로파일링에 대한 해박한 묘사도 수준급인 작품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워낙 많아서 초반부 정도의 줄거리만 소개했는데, 좀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에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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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초 후에 죽는다
사카키바야시 메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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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예 미스터리 작가들의 기발하고 독특한 작품들이 한국 독자들을 찾는 일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통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편이라 기성 베테랑 작가들의 작품에 더 관심을 갖기는 하지만, 간혹 특별한 간식처럼 신예들의 개성 넘치고 독창적인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도 있습니다.

사카키바야시 메이의 ‘15초 후에 죽는다는 일단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는데, 고백하자면 “‘피해자가 죽기 직전의 15라는 상황 속에서 피해자와 범인의 독특한 공방을 그린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고 우선은 살짝 고개가 갸웃거려진 게 사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초라는, 다소 한계가 명백해 보이는 설정을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냈을지 한 번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든 수록작이 피해자와 범인의 공방을 다룬 건 아닙니다. 또한 ‘15가 죽음까지 남은 시간을 의미하는 건 맞지만 각 수록작마다 서로 맛과 느낌이 다르게 설정돼서 대체로 엇비슷한 흐름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라는 근거 없던 기우를 보기 좋게 날려버리기도 했습니다.

 

15

죽기 전 15초 동안 어떻게든 범인에게 복수하려는 주인공과 완전범죄를 이루기 위해 15초 동안 사력을 다하는 범인의 대결을 그린 작품으로, ‘옮긴이의 말의 표현대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특이한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다음 충격적인 결말이

시청자 참여형 추리드라마의 마지막 회 엔딩 15초 사이에 여주인공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필 그 장면을 놓친 는 누나와 함께 드라마 첫 편부터 복기하며 여주인공의 죽음의 진상을 추리합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형식으로, 연이은 반전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불면증

심인성 난청을 앓고 있으며 매일 비슷한 꿈(15초 후에 교통사고가 일어나는)을 반복해서 꾸는 13세 소녀 마쓰리와 어딘가 비밀스럽고 애틋한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한 그녀의 어머니 요우가 이끌어가는 슬프고 애잔한 호러풍 이야기입니다.

 

머리가 잘려도 죽지 않는 우리의 머리 없는 살인 사건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더라도 15초 이내에 붙이기만 하면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는 수탈(首脫)이라는 기괴한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 축제날 밤에 벌어진 의문의 습격사건을 추리하는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죽음 직전의 15는 무척이나 다루기 힘든 설정이지만 사카키바야시 메이는 판타지, 액자소설, 본격 미스터리 등 다채로운 장르와 이야기 속에 그 설정들을 맛깔나게 잘 녹여 넣었습니다. 그야말로 신인의 패기가 아니라면 도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인데, 그 과감함에 정교한 설계까지 가미돼서 흥미진진하게 읽힌 작품입니다. 만점까지 주진 못했지만 색다른 미스터리를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2021년에 출간됐으니 사카키바야시 메이의 두 번째 작품이 나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 일본에서도 출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어쩌면 난산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데뷔작에 버금가는 두 번째 작품으로 독자들을 찾아와주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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