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질은 부드러워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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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지구상에서 동물이 사라진 이후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몇몇 정부는 제한적인 인육 소비를 허가했습니다. 수의사의 꿈을 접고 지금은 인육 가공 공장의 2인자가 되어 인육의 도축과 유통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지만 마르코스 테호는 인육을 절대 먹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릴 적 아버지와 자주 갔던, 하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빈 동물원에 가서 견디기 힘든 비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으려 애쓰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고기용 인간을 사육하는 업자가 최상급 암컷 한 마리를 선물합니다. 기르든 도살하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지만 마르코스는 그 암컷을 헛간에 두고 보살핍니다. 갓 태어난 아들이 숨진 뒤 아내와 별거 중이던 마르코스는 어느 날 암컷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특수설정 미스터리로 유명한 시라이 도모유키의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역시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동물이 사라진 뒤 인육을 소비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작품에서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인육은 오직 자신의 체세포로 생산된 식용 클론뿐입니다. 하지만 육질은 부드러워에는 끔찍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도축되는 진짜 인육이 등장합니다. 고기용 암컷과 수컷 간의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난 뒤 사육업자에게 길러지는 최상급 인육부터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 도축형을 선고받은 자들, 사고나 병으로 사망한 자들, 외국에서 수입된 고기용 인간 등 진짜 인간의 몸이 동물성 단백질의 원천으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개체, 고기, 제품, 암컷, 수컷으로 불리는 그들은 우리에 갇힌 채 물과 사료로 키워지며 때론 신속한 대량생산을 위해 성장 촉진제를 투여받기도 합니다. 그들 중엔 돈 많은 사냥꾼들의 수렵장에 끌려가 인간 사냥감이 되거나 생체실험 연구소에 팔려가 갖가지 실험에 이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건 도축 대상이 되는 건데, 도축된 그들의 몸은 무엇 하나 버려지는 부위 없이 완벽하게 소비됩니다.

작가는 식인이 합법화된 세상에서 인육이 어떻게 길러지고 소비되는지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 한편, 사육업자, 육류가공업자, 가죽가공업자, 인간사냥꾼, 생체실험 연구소, 성매매 업소 등 이른바 고기용 인간들을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에 이용하는 다양한 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잔인한 장르물을 어지간히 읽은 편이지만 사육-도축-가공-소비로 이어지는 식인의 일련의 과정에 관한 상세한 묘사에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나름 큰 각오를 하고 읽어야 할 작품입니다.

다만 흥미 위주의 식인 이야기를 기대해선 안 됩니다. 또 채식주의자인 작가가 육류 소비를 비난하기 위해 쓴 작품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먹어 치우며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와 끝을 알 수 없는 인류의 탐욕을 그린 작품에 가깝습니다.

주인공 마르코스 테호는 인육을 권장하는 TV광고가 난무하는 미친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인데, 작가는 그와 그 주변사람들 - 과거 도축업자였지만 동물이 사라지고 인육이 등장하자 치매에 걸려버린 아버지, 아이가 돌연사한 뒤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친정으로 돌아가버린 아내, 어느 날 갑자기 마르코스의 집안에 머물게 된 최상급 고기용 암컷’,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도 마르코스가 매일 같이 만나야만 하는 비인간적인 인육 관련업자 등 - 을 통해 헤어날 수 없는 디스토피아의 비극을 절절하게 그려냅니다.

 

내용과 장르를 불문하고 디스토피아 스토리의 엔딩은 언제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작은 희망을 남긴 채 마무리될지,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에게 한없이 무겁고 암담한 여운만 남겨 놓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인데, ‘육질은 부드러워의 경우 설정 자체가 작은 희망조차 남길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엔딩 때문에 여운의 무게와 암담함은 더욱 무겁고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동물은 절멸시키되 인간만 살려놓는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에 하나 육질은 부드러워의 세상이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마지막 장을 덮고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며 그런 의문을 떠올려보니 책을 읽을 때보다 더더욱 착잡해지고 암울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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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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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 미국의 지성이자 존경받는 문학교수이며 국민작가로 칭송받는 해리 쿼버트의 자택 정원에서 33년 전 15살의 나이에 실종된 소녀 놀라 켈러건의 유해가 발견됩니다. 유해 옆엔 해리의 대표작인 악의 기원의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고 그는 즉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구치소에 수감됩니다. 33년 전 30대 중반이던 자신과 15살이던 놀라 켈러건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악의 기원은 두 사람의 사랑을 모티브로 한 책이라는 해리의 자백에 문학계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전역이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한편 데뷔작으로 정상에 오른 젊은 소설가이자 해리의 특별한 제자인 마커스 골드먼은 그가 결코 놀라 켈러건을 죽였을 리 없다는 확신을 갖고 직접 진상 조사에 나섭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2013년에 처음 출간됐을 때부터 관심을 가진 작품이지만 개정판이 나온 11년 뒤에야 읽게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엄청난 분량(개정판 기준 1~2권 합계 1,100)에 대한 부담감이었고, 또 하나는 2019년에 출간된 스테파니 메일러 실종사건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탓에 조엘 디케르는 나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작가라고 예단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밝은세상의 서평단 제안이 아니었다면 영영 읽지 못할 뻔한 작품인데, 이 매력적인 이야기와 가까스로 인연이 닿은 건 정말 행운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간단합니다. 국민작가인 해리 쿼버트가 33년 전 뉴햄프셔주의 소도시 오로라에서 15살 소녀 놀라 켈러건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의 진실을 그의 제자이자 미국 문학계의 신성인 마커스 골드먼이 강력계 형사 페리 게할로우드의 도움을 받아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선 이 작품을 프랑스 문학으로 분류해놓았지만 미스터리 스릴러의 서사가 바탕에 깔려 있어서 프랑스 문학에 거부감을 가진 독자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1,100쪽이라는 분량이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범죄 청정지역으로 불려온 소도시 오로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탐문을 벌이는 마커스의 행보를 쫓아가다 보면 엄청난 디테일의 힘과 마력에 여러 차례 놀라게 되면서 왜 이토록 방대한 분량이 필요했는지를 쉽게 수긍하게 됩니다.

또한 단순히 범인은 누구?’라는 미스터리 외에도 다양한 서사가 포진돼있어서 조금의 지루함도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습니다. 오로라 주민들에게서 감지되는 비밀과 거짓말, 시기와 질투, 탐욕과 이기심은 33년 전 사건의 이면에 더럽고 추악한 진상이 숨어있음을 예감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그 누구라도 놀라 켈러건 살해범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또한 각별한 사제관계인 해리와 마커스를 통해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소설가의 세계를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데, 사건 자체와는 무관해 보이던 이 소설가에 관한 심층적 고찰은 막판에 이르러 미스터리 서사와 결합되면서 큰 놀라움과 함께 그 존재의 이유를 드러냅니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의 가장 큰 매력은 시종 쉴 새 없이 터지는 반전입니다. 놀라 켈러건 살해용의자가 수차례 뒤바뀌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33년 전부터 지금까지 오로라 주민들이 품어온 숱한 비밀과 거짓말이 폭로되는가 하면, 15살의 나이에 30대 중반인 해리와 사랑에 빠졌던 놀라 켈러건의 충격적인 과거가 드러나기도 하고, 마커스의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자 사건의 핵심인물인 해리마저 여러 차례 마커스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일으키곤 합니다. 그야말로 반전의 불꽃놀이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많고 관계도 복잡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진 못했지만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홍보 카피의 헤드라인 정도만 참고한 상태에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도 꽤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책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만 하루 안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을 정도로 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이니 저처럼 분량에 부담을 느끼는 독자라도 일단 100페이지만 읽어보자”,라는 마음으로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미 한국에도 출간된 조엘 디케르의 볼티모어의 서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이 이 작품과 함께 3부작으로 통한다고 합니다. 내용은 독립적이지만 마커스 골드만이 화자로 등장하는 등 일부 인물들이 겹쳐서 연작소설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역시 분량이 만만찮은 작품들이지만 언젠가는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론 중도 포기했던 스테파니 메일러 실종사건도 재도전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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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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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데프 보이스로 처음 만났던 마루야마 마사키의 신작입니다. ‘데프 보이스는 농인(聾人)과 청인(聽人), 즉 들리지 않는 사람과 들리는 사람이 등장하는 미스터리로 주인공 아라이 나오토는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본인만 청인인 가혹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고, 경찰 사무직을 거쳐 수화 통역사가 되어 살인사건 수사에 합류하는 인물입니다. 이후 마루야마 마사키는 용의 귀를 너에게’,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로 이어진 시리즈를 통해 장애를 테마로 한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영역으로 독자의 관심과 호응을 받아왔는데, ‘원더풀 라이프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좀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차원의 장애를 다루는 것은 물론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 찬 현실을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한 작품입니다.

 

무력의 왕’, ‘한낮의 달’, ‘불초의 자식’, ‘가면의 사랑등 네 가지 이야기가 수록돼있는데, 경수 손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 아내와 그녀를 8년째 간병해왔지만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남편의 이야기, 입양아를 직접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사람의 이야기, 무슨 이유에선지 장애가 있는 가족들을 죽이거나 동반자살을 선택한 자들의 기사를 스크랩하는 여자의 이야기, 선천성 뇌성마비로 오른발밖에 쓸 수 없지만 깊고 다양한 지식과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 등 현실에서 부딪힐 수 있는 장애에 관한 다양한 상황과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미스터리로 분류돼있긴 하지만 살인은 물론 특별히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것들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작가는 교묘하게 설치해놓은 트릭을 통해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네 가지 이야기를 조금씩 수렴시키는 구성을 사용했는데, 적잖은 힌트를 제공하고 있어서 웬만한 독자라면 중반부쯤이면 트릭의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는 있지만 결정적 퍼즐은 막판에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트릭과 퍼즐은 독자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오락적 장치가 아니라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무게감과 강도를 최대치로 증폭시키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심어놓았다는 인상을 진하게 풍깁니다. 장애와 비정상은 절대 같은 뜻이 아니고, 장애는 지원하고 도와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같은 시공간에서 공존하면서 익숙해져야 하는 대상이며, 장애는 누구나 꿈꾸는 멋진 인생에 조금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작가는 트릭으로 얽힌 네 가지 이야기를 통해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더풀 라이프의 가장 큰 매력은 뻔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장애의 현실을 피부에 와 닿게 그렸다는 점입니다. 특히 네 가지 이야기 모두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재미를 놓치지 않고 있어서 무겁고 어려운 소재의 부담감을 조금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이야기 속 현실의 무게감과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가치가 양립하는 작품이라는 일본 독자의 평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네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수렴되는 장면에선 먹먹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동정심도 측은지심도 아닌 그 먹먹함은 어쩌면 마지막 한 줄까지 냉정한 입장을 잃지 않은 작가의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하나 멋지지 않은 인생이란 없다!”라는 의미에서 원더풀 라이프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해피엔딩이나 막연한 희망을 제시하는 오픈된 결말을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작가가 지극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마무리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실제로 경수 손상 장애를 가진 아내와 30년 동안 살아오면서 그가 겪었던 숱한 희로애락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경험들이 아니었다면 독자들은 원더풀 라이프의 지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리얼리티와 쉽게 잊히지 않을 여운을 결코 만나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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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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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어린 딸과 함께 도쿄로 도망친 다카요는 코앞으로 다가온 연립주택 강제 퇴거 때문에 전전긍긍합니다. 밀린 임대료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결국 퇴거 직전 개인 사채업자 미나미를 통해 급전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미나미라는 사채업자는 연체에도 관대하고 다카요의 갖가지 고충에 대해 상담도 해주는 등 사채업자의 포악함이나 잔인함 따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 새 미나미에게 많은 걸 의지하며 야금야금 돈을 빌리다가 대출금이 위험수위를 넘어버린 다카요는 끝내 성매매까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낸 남편이 연락을 해오자 다카요는 사색이 되고 맙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채업자는 뉴스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고객들을 모으고 관리합니다. 이른바 소프트 사채업이라 불리는데, 여윳돈이 있는 개인이 SNS를 통해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액의 돈을 빌려주곤 나름 적절한 - 그래도 연 100%에 가깝지만 - 수준의 이자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협박조의 추심은커녕 위험도가 낮은 연체는 관대하게 눈감아주기도 하고, 고객의 고민에 공감하며 카운슬링도 해주는 등 말랑말랑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다 보면 고객은 사채업자가 내 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물론 언제라도 마음 편히 돈을 빌릴 수 있는 상대라고 여기곤 부담 없이 소액을 빌리다가 어느 새 큰돈을 빚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사채업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러니한 건 이들의 고객들은 냄비 속 개구리처럼 자기도 모르게 파멸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는 바로 이 아이러니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전반부 소제목이 속는 사람’, 후반부 소제목이 속이는 사람으로 구성돼있는데, 전반부가 사채를 쓰다가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드는 다카요의 사정을, 후반부가 다카요를 비롯하여 여러 고객들을 상대하는 개인 사채업자의 술수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도 다양하고, 업자가 고객을 관리하는 전략도 제각각이라 경각심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지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결정적인 이유는 이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는 피해자의 고백업자의 수법을 나열해놓은 장문의 기사 혹은 정직한 르포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다카요가 점차 늪으로 빠져드는 과정이나 업자가 고객들을 상대로 장난치는 일 모두 너무나도 익숙한 이야기라서 작가의 전작인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와 같은 궁금증과 긴장감을 전혀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소프트 사채업이라는 신종 사채의 특이함 외에는 딱히 눈길이 끌리는 대목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반전은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조차 애매해서 맥이 풀렸고(이미 앞에서 다 공개된 정보들인데 막판에 마치 반전인 양 서술됐기 때문입니다), 교훈도 여운도 어중간했던 엔딩 역시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재미를 기대하고 읽었다가 전작의 후광만 바란 티를 역력하게 느꼈던 후속작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소재를 너무 안이하게 활용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5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시가 아키라의 작품이라 꽤 기대를 했지만 아쉬움만 잔뜩 느끼게 돼서 그저 유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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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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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의 주인공은 유령과 대화할 수 있는 소년 제이미 콘클린입니다. 죽은 직후부터 그 혼이 사라지기까지 며칠간만 대화가 가능하며 유령들은 제이미의 질문에 진실만을 답한다는 특별한 설정이 있긴 하지만,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라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론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러의 대가 스티븐 킹은 독자의 예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이미의 능력을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하곤 연이은 반전을 선사하여 마지막 장까지 흥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만듭니다.

 

6살 소년 제이미의 능력을 아는 건 싱글맘이자 작가 에이전트인 티아뿐이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눈으로 제이미의 능력을 확인하기 전까진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거나 아들의 정신 상태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이미가 죽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자 티아는 충격과 함께 아들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편 티아의 동성 연인이자 뉴욕 경찰인 리즈 역시 그 자리에서 제이미의 능력을 목격했는데, 이후 리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이미를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이야기의 뼈대만 추리면 짧은 중편으로도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스티븐 킹은 금융위기, 마약, 테러, 동성애, 근친상간, 폰지 사기 등 현대 미국 사회가 안은 민감한 소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호러물 이상의 풍성한 이야기를 완성시켰습니다. 제이미가 목격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유령들도 이웃의 노부인에서부터 엄마가 관리하던 베스트셀러 작가, 또래들의 가혹행위로 목숨을 잃은 소년, 10년 넘게 폭탄테러를 자행해온 흉악범, 마약 중개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서 서사 자체를 튼실하고 볼륨감 넘치게 만듭니다.

가장 큰 사건이자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인 제이미 납치극은 막판에 짧고 빠르게 전개될 뿐이지만 그 전까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호러의 조각들이 하이라이트 못잖게 매력적이라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매번 스티븐 킹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낀 점이긴 하지만 나중에가 좀더 특별하게 읽힌 이유는 책을 읽는다기보다도 맞은편에 앉은 스티븐 킹이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친밀감이 여느 작품보다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인칭 화자인 제이미가 수시로 독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장면이 많은데, 그때마다 스티븐 킹과 마주 앉은 듯한 친밀감이 고조되곤 합니다. 그래선지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인 제이미의 캐릭터 역시 조금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나 리얼해서 세상 어딘가에 이런 인물이 하나쯤 있을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게 됩니다. 진정한 이야기꾼인 스티븐 킹의 재능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스포일러까진 아니어도 책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킬 만한 내용이 많아서 줄거리가 거의 없는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그만큼 사전 정보 없이 읽어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스티븐 킹의 팬이 아니더라도 소름 돋게 하면서도 유쾌하고 재미있는 뜻밖의 호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나중에를 꼭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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