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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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을 일곱 편쯤 읽고 나면 이 작가는 이런 스타일이고, 이런 장르가 전공이라고 단정할 만하겠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여덟 번째로 읽은 덧없는 양들의 축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딱히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 작가인지 단정하기 어려웠습니다. 학원 청춘 미스터리인 고전부 시리즈부터 기자의 소명과 보도윤리를 다룬 베루프 시리즈’,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미스터리 흑뢰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스펙트럼 자체가 워낙 넓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근대를 배경으로 서늘한 공포와 맛깔난 기담에 마지막 한 줄의 반전 미스터리까지 맛볼 수 있는 덧없는 양들의 축연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비슷한 톤의 작품을 고르라면 현대물인 야경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시대적 배경입니다. 시중을 드는 고용인이 등장하고, 지역유지가 권세를 누리는 장면 등으로 미뤄보아 대략 20세기 중반 정도로 추정됐는데, 결정적인 단서는 한 주인공이 인용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밤 산책’(1949)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각 수록작마다 배어있는 기담 혹은 괴담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고풍스런 옛이야기의 정취가 초반을 장식하지만 이내 느닷없이 기묘한 사건이 터지면서 이야기는 기담과 괴담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거기에 흥미로운 미스터리 서사가 끼어드는 경우도 있고 순수한 공포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만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깔끔한 해법과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수록작도 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이 작품을 감미롭고도 잔혹한 블랙 미스터리라고 부른 건 아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으로 보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모든 수록작의 공통점은 바벨의 모임이라는 여대생들의 독서모임입니다. 모임의 멤버들은 하나 같이 유수의 명문가의 영애들이며 집에서라면 절대 읽을 수 없는 미스터리를 탐독하고 그 감상을 서로 나누곤 합니다. 다만,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어둡고 음습한 느낌을 주는 이 모임이 직접 묘사되거나 멤버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멤버 한 명 한 명이 각 수록작의 주인공을 맡고 있고, 때론 제3자로서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이 주인공을 맡을 때도 있습니다.

 

“’바벨의 모임이란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덧없는 자들의 성역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혹은 너무나 복잡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모임에 모여들지요.” (p308)

 

명문가의 영애들이지만 기구하거나 불안하거나 불행한 사연을 지닌 탓에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미스터리를 읽으며 현실에서의 도피 혹은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그녀들의 심리는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돼서 간혹 내가 지금 판타지를 읽는 건지, 현실 기반의 이야기를 읽는 건지?” 혼란스럽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줄이 선사하는 반전에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제야 앞서 읽은 내용들을 천천히 복기하고 음미하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명문가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사건과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게 충심 이상의 마음을 품은 몸종의 비밀을 그린 집안에 변고가 있어서’, 동생에게 가문을 내주고 유폐당한 장남과 그를 감시하고 시중드는 역할을 맡게 된 이복여동생의 이야기 북관의 죄인’, 외진 곳의 고급 별장을 홀로 관리하던 여성이 뜻밖의 손님을 맞이한 뒤 벌어지는 서늘한 이야기 산장비문’,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에게 함부로 대해지던 아가씨가 동갑의 몸종과 만난 뒤 벌어지는 비극 다마노 이스즈의 명예’, 그리고 바벨의 모임이 몰락하게 된 사연을 그린 그로테스크한 이야기 덧없는 양들의 만찬등 이야기마다 독특한 색채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장르가 혼합된 선물세트를 읽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마냥 미뤄뒀던 작품인데 14년 만에 개정판이 출간된 덕분에 오래된 밀린 숙제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고, 잠시나마 근대와 현대의 경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만끽할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인사이트 밀’, ‘추상오단장등 아직 못 읽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이 많은데 기회가 닿는대로 그의 팔색조 같은 이야기를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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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제국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27살의 야엘 말랑은 파리의 박제 가게에서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거울에 나타난 의문의 그림자와 그것이 보낸 메시지로 인해 그녀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우연히 알게 된 프리랜서 기자 토마스와 함께 메시지를 해석하며 그 안의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한 야엘은 세계를 조종하고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구성하는 숨은 권력자, 그림자들의 존재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그런 자들이 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수수께끼를 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집니다. 또한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은 물론 자신과 토마스마저 거듭 살해될 위기에 처하자 야엘은 그림자들의 정체와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읽은 지 10년도 훌쩍 넘어 줄거리는 거의 가물가물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이 작품이 처음에(2008) ‘악의 유희라는 제목으로 출간돼서 많은 독자들의 분노를 산 점입니다.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또는 조슈아 브롤린 시리즈’)의 후속작으로 여겼던 독자들은 뒤늦게야 출판사가 원제와 전혀 관련 없는 번역제목을 붙였음을, 악의 3부작의 후광을 이용한 얄팍한 상술을 부렸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3년 후인 2011년에 나온 개정판에는 그림자의 제국이라는 새 제목이 붙었는데, ‘Les Arcanes du Chaos’(직역하면 카오스의 비밀’)라는 원제와 거리가 있긴 해도 그나마 수긍할 만한 번역제목이었습니다.

 

서평에 앞서 결론부터 말하면 그림자의 제국은 제가 갖다 붙인 명품재독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입니다. “인상 깊게 읽었다는 기억 자체가 오류였다는 뜻인데, 아마도 악의 3부작직후에 읽은 작품이라 그런 오류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악의 3부작이 조슈아 브롤린이라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앞세운 잔혹한 연쇄살인 스릴러였던 반면 그림자의 제국은 이른바 음모론을 전면에 내세운 진실 찾기 추격 스릴러입니다. 야엘이라는 평범한 여성이 그림자들이라는 가공할 집단의 희생양이 되어 철저하게 망가지는 가운데 진실을 찾아 위험천만한 여정을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울에 나타난 의문의 그림자, 집 여기저기서 들리는 기괴한 소음들, 누군가 자신의 집에 몰래 침입한 것이 분명한 흔적들... 엉망이 된 자신의 삶을 되돌릴 방법은 난해한 문구와 성경 구절이 뒤섞인 그림자들의 메시지와 수수께끼를 푸는 것밖에 없다고 여긴 야엘은 토마스의 도움을 받아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끊임없이 추격당하자 그림자들의 진의를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집니다.

 

이 작품에 쏟아진 혹평의 대부분은 식상한 음모론에 관한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에 관한 장황한 설명에서부터 1달러 지폐의 상징들, 케네디 암살, 쿠바 공습, 베트남 전쟁, 9.11 테러 등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음모론에 대한 강의식 서사가 독자들을 질리게 한 탓입니다. 또한 주인공 야엘이 가장 궁금하게 여긴 점 왜 하필 나야?” - 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이 충격이나 반전과는 거리가 먼,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허술했던 점도 혹평의 이유 중 하나입니다. “세계를 조종하고 역사를 제 입맛대로 구성하는 자들이 평범한 여성 하나를 놓고 이토록 공을 들여 잔혹한 게임을 벌인 이유가 겨우 이거였어?”라는 한탄이 저절로 튀어나왔는데, 말하자면 5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 전체를 허망하게 만든 엔딩이라고 할까요?

 

애초 막심 샤탕은 기승전결을 갖춘 액션 스릴러 서사가 아니라 음모론에 관한 일장연설, 특히 미국의 권력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조작하고 사익을 위해 공포를 조장했는가를 설명한 한 블로거의 포스트에 온힘을 쏟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음모론에 관한 강의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익숙한 내용들이라 어느 지점부터는 저절로 건너뛰게 할 정도로 지루하기만 했고, 안 그래도 비슷한 상황만 반복하고 있는 추격전의 긴장감마저 훅 떨어뜨리는 부작용까지 자아내고 말았습니다.

 

명품재독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준건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기억의 오류 때문에 주말 하루를 꼬박 소진한 것도 그저 아깝기만 할뿐입니다. 다만, 야엘과 토마스가 그림자를 상대로 벌이는 진실 찾기 이야기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지만 음모론 자체가 낯설거나 궁금한 독자라면 흥미로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구판인 악의 유희로 검색하면 좀더 많은 서평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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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클로버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다인 옮김 / 허밍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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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를 이용하여 여러 사상자를 낸 도요스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과 언론은 12년 전 훗카이도의 하이토 마을에서 벌어졌던 일가족 살인사건과의 연관성에 주목합니다. 두 사건 모두 똑같은 성분의 비소가 범행도구로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체포된 도요스 사건 범인에겐 12년 전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이후 경찰은 그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아 용의선상에 올랐던 장녀 아카이 미쓰바가 현재의 사건에 연관된 게 아닌지 의심합니다. 한편 신문사에서 정년퇴직 후 계열 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가쓰키 쓰요시는 12년 전 하이토 마을에서 취재했던 일을 회상하며 가족들이 살해된 테이블에서 태연히 컵라면을 먹던 미쓰바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도요스 사건과 미쓰바 사이에 접점이 있음을 확신하곤 하이토 마을로 향합니다.

 

마사키 도시카는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등 두 작품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가입니다. 후속작을 기다리게 될 정도로 팬이 됐고 그래서 레드 클로버의 출간소식은 더없이 반가웠습니다. 앞선 두 작품은 각각 자식 때문에 인생의 방향이 크게 뒤틀어진 여러 어머니’, ‘불의의 사고 혹은 사건 때문에 비극을 맞이하게 된 여러 부부를 등장시켜 정교하고 농밀한 미스터리와 서사를 선보인 수작들인데, ‘레드 클로버는 마사키 도시카의 진가가 제대로 배어있어서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입니다.

 

잡지사 기자인 가쓰키가 화자이자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추적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이 작품에는 수많은 화자가 번갈아가며 사건 이면의 지독한 사연들과 일그러진 감정들을 설명합니다. 서로를 혐오하는 작은 마을 내의 두 세력, 누군가를 저주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흉흉한 분위기의 낡은 신사, 가족 혹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자식, 자식이 죽기를 바라는 부모,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이라 여기며 혐오와 살의를 감추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악연과 애증과 분노가 20년도 넘게 층층이 쌓여왔는지를 설명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때론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지거나 더러운 것에 오염된 듯한 불편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누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버린다. 누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인다. 그것이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자 살아남는 길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p320)

 

이 세상은 인간의 추악함으로 만들어져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미워하는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낸 어둡고 더러운 사념이 복잡하게 뒤섞여 이 세상의 공기가 된 것이다.” (p388)

 

가쓰키가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진 미쓰바를 찾기로 결심한 건 단지 두 개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12년 전 오직 자신만이 목격했던 가족이 죽은 현장에서 태연히 컵라면을 먹는 소녀의 모습이 위화감 이상의 특별한 기억으로 뇌리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죽인 게 맞다면 왜? 12년이 지나 도요스 사건의 범인에게 비소를 건넸다면 왜? 어느 날 갑자기 하이토 마을을 떠난 이유는?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쓰키는 기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미쓰바와 마주하고 싶다는 열망에 여전히 미쓰바 가족을 벌레처럼 기억하고 있는 하이토 마을 사람들을 진심을 다해 취재합니다. 동시에 자신 외에 미쓰바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음을 감지하곤 기자로서의 위기감과 함께 어떻게든 한발 앞서 미쓰바를 찾아내야 한다는 초조감에 휩싸입니다.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만큼 관계도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작품 내용을 언급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저주, 분노, 혐오 등 인물들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던 갖가지 감정들이 폭로되고, 엉킨 실타래 같던 과거사와 사건들이 거듭된 반전을 통해 하나둘씩 밝혀지는 등 미스터리 이상의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채 도도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분명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숨 막히는 답답함과 오염된 듯한 불편함을 피할 길은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강력한 페이지터너라는 생각입니다.

 

마사키 도시카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전작을 뛰어넘는 그녀의 진가를 맛볼 수 있을 것이고, 이 작품으로 그녀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전작들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마사키 도시카에 대한 사심 가득한 서평이긴 하지만 비슷한 취향의 독자라면 이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제 서평에 충분히 공감해줄 거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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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레이디가가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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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괴담 시리즈의 광팬이지만 실은 그녀의 현대물에선 아쉬움을 느끼거나 실망한 경우들이 종종 있어서 꽤 특이하고 긴 제목의 신작을 무조건 반길 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이쿠와 소설의 콜라보라는 점 때문에 기대감을 갖게 됐는데, 어딘가 예스러운 이야기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추측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제목과 이야기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인데, “원하건대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그 추운 음력 이월의 보름에”(“はくはにて春死なむそのきさらぎの望月のころ”)라는 하이쿠에서 제목을 따온데다 내용 역시 예스럽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내심 미미 여사의 신작 역시 이런 인상을 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각각 30페이지 내외의 12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각 수록작의 제목은 미미 여사가 활동하는 모임의 멤버들이 지은 하이쿠이며, 미미 여사가 그 하이쿠들을 씨앗 삼아 이야기를 자아낸 것입니다.

기대와 달리 예스러운 이야기들만으로 채워진 건 아니었고, 이제 막 본 내용이 펼쳐지려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돼서 제목인 하이쿠의 의미가 잘 다가오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미 여사 특유의 애틋함과 기괴함, 또는 잔잔하지만 오래 가는 여운을 담은 작품도 여러 편 있어서 다 읽은 뒤엔 에도 괴담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가 등장하는 괴담도 있고, 판타지의 향기가 물씬 배어있는 이야기도 있고, 살아온 인생을 찬찬히 조망하는 듯한 따뜻한 이야기도 있지만 수록작 중 상당수가 고통 받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외도, 폭력, 착취, 스토킹, 집착, 의심 등 쓰레기 같은 빌런들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여성들의 사연을 많이 집필한 것에 대해 미미 여사는 일본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수록작에 따라 그 상처가 치유되는 경우도 있지만 담담하게 관조하거나 문제의식을 제기한 상태에서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제목으로 쓰인 하이쿠의 의미가 남달라 보이기도 합니다.

 

일본 소설 속에서 간간이 접했던 하이쿠는 짧은 문장만으로도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절묘한 시구들이어서 눈길을 끌곤 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의 이면에 과연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라는 궁금증도 자아내곤 했는데, 아마도 미미 여사 역시 이런 점에 착상해서 하이쿠와 소설의 콜라보에 도전한 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아쉬운 건 다소 평범해 보인, 그러니까 소설 내용이 그리 궁금해지지 않는 제목들이 꽤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산산이 지는 것은 여물고자 함이니 복사꽃’,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날선 가위여 꽃밭의 맨드라미 목을 자르리등 이 하이쿠를 어떻게 소설화 했을까 호기심을 자극한 하이쿠들도 많았지만, 너무 직설적이거나 평범했던 제목들은 하이쿠 자체로도 좀 아쉽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편집자인 삼송 김사장 님과 미미 여사가 제안한 이 작품의 독서 가이드를 정리하면 후반에 실린 작가의 말을 먼저 읽고 각 수록작의 제목인 하이쿠를 충분히 음미한 뒤 본문을 (절대 급히 달리지 말고) 아주 천천히 감상하고 다시금 제목인 하이쿠를 읽어달라.”입니다. 실제로 몇몇 작품은 이런 순서로 읽었을 때 남다른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가이드를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수록작마다 세세하게 평점을 매겨보니 별 5개가 4, 4개가 8편이었고, 전체적인 인상도 비슷했습니다. 미미 여사는 하이쿠와 소설의 콜라보후속작들을 여러 편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는데, 후속작에서는 수록작 모두에게 별 5개를 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물론 미미 여사에게 사심으로 가득한 1인이라 이번 작품보다 좀더 세고 독하거나 좀더 따뜻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수록된다면 무조건 별 5개를 줄 게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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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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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앙 산악지대의 한 마을에서 큰 소동이 벌어집니다. 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한 남자가 내연녀와 함께 도주극을 벌이는 와중에 102세 할머니 베르트 가비뇰이 경찰에게 총탄을 퍼부으며 두 남녀의 도주를 도왔기 때문입니다. 베테랑 수사반장인 앙드레 벤투라는 연행된 베르트의 심문을 맡곤 그녀가 불법 소지한 독일제 권총의 출처부터 묻습니다. 2차 대전 중 자신을 강간하려던 나치를 죽이고 손에 넣은 권총이란 말에 벤투라는 깜짝 놀라지만 정작 그를 엄청난 충격과 연민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타게 만든 건 그 직후부터 베르트가 들려준 그녀의 연쇄살인 연대기입니다. 그 연대기는 25살이던 1939년에 저지른 첫 살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죽인 뒤 지하실에 묻은 수많은 남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2021년에 읽은 포커 플레이어 그녀에 반해 곧장 사들였지만 3년이 지나서야 읽게 된 브누아 필리퐁의 루거 총을 든 할머니입니다. 제목만 보면 할머니 탐정이 활약하는 코믹 장르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102세 연쇄살인마 할머니의 평생에 걸친 살인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무겁고 어두운 소재지만 포커 플레이어 그녀에서도 만끽했던 브누아 필리퐁 특유의 지독한 비틀기와 블랙 코미디 코드가 잔혹하면서도 연민을 품을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살인기록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서 그야말로 희비극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프랑스 문예지 리르는 이 작품에 대해 그녀의 인생은 20세기의 역사, 그리고 육체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이 걸어온 단계들과 일치한다.”는 평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수많은 남자들(대부분은 남편들)을 총과 칼로 죽인 뒤 지하실에 묻어버린 비정한 연쇄살인마지만, 베르트는 자신의 행위를 분노와 복수 이상의 정의였다고 믿습니다. 자신을 강간하려던 나치, 여자를 말 잘 듣는 애완동물정도로 여기는 지독한 가부장제의 신봉자들, 아동학대범, 인종차별자 등 그녀의 지하실에 묻힌 남자들은 베르트 입장에서는 법과 사회가 방치한, 그래서 자신의 총과 칼이 아니면 응징할 수 없는 악이자 괴물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과 괴물들의 행위는 여성의 자유와 권리가 함부로 여겨지곤 했던 20세기 남성우월주의의 추악한 단면들과 꼭 닮아있는데 그래선지 베르트의 연쇄살인은 진술이 거듭될수록 사이다 이상의 통쾌함을 안겨주곤 합니다. 물론 살인이 반복될 때마다 베르트에게 찾아오는 심신을 갉아 먹는 고통과 악몽은 그저 안쓰럽고 안타까워 보이지만 말입니다.

 

다른 작가가 베르트의 이야기를 정색하고집필했다면 아마 이 작품은 한없이 무겁고 어두운 비극으로 포장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브누아 필리퐁은 심각한 상황에서마저 웃음을 유발하는 기막힌 단어와 문장으로 독자를 쥐락펴락 사로잡습니다. 얄미울 정도로 절묘하게 단어와 문장을 비틀어대기도 하고, 재치 넘치는 비유와 인용으로 독자는 물론 작중 인물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영국식 블랙 유머와는 또 다른 맛을 풍기는 프랑스 스타일의 블랙 코미디 덕분에 베르트의 무겁고 어두운 비극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공감과 진정성을 획득합니다.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그야말로 희로애락을 쉴 틈 없이 맛보게 되는 진정한 롤러코스터 같은 작품이라고 할까요?

 

사족이지만, ‘루거 총을 든 할머니에는 성()에 관한 꽤 수위 높은 묘사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베르트를 함부로 짓밟는 남자들의 폭력인 경우도 있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베르트의 적극적이고도 자발적인 행위인 경우도 있습니다. 적나라한 묘사 때문에 독자에 따라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장면들은 베르트가 갈망한 자유와 권리가 무엇인지, 그녀가 구현하려던 정의가 무엇인지를 좀더 생생하고 피부에 와 닿게 전해주는 장치들이란 생각입니다.

 

102세 할머니이자 페미니스트이자 연쇄살인범이며 가차 없는 독설가이기도 한 베르트의 일생을 다룬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연쇄살인 스릴러와 20세기를 배경으로 한 여성소설의 미덕을 골고루 갖춘 명품입니다.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끌진 못한 것 같은데 뒤늦게라도 많은 독자들이 이 명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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