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
필리프 클로델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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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위치한 개의 형상을 닮은 군도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는 한 화산섬. 외부와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그 섬에 세 구의 흑인의 시신이 파도에 떠밀려오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시장, 의사, 신부 등 섬의 지도층은 성사가 코앞인 온천사업을 지키기 위해 시신들을 화산 구덩이에 은폐합니다. 단 한 명뿐인 섬의 교사는 엄연한 범죄행위에 반대하지만 유일한 외지인인 그가 토박이들의 뜻을 꺾진 못합니다. 하지만 육지에서 온 경찰이 페리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섬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의 태도와 말투에서 마치 시장 일행이 저지른 시신 은폐를 모두 알고 온 듯한 명백한 비난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섬은 불온한 광기에 잠식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문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은 외형적으로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자리 한 가상의 화산섬을 배경 삼아 심연 속에 파묻힌 진실을 폭로하는 미스터리지만 동시에 난민 문제를 소재로 한 사회성 짙은 고발물 혹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비꼰 우화이기도 합니다. 또한 섬의 이름은 그저 개의 군도’(이 작품의 원제이기도 합니다)일뿐이고, 등장인물 모두 직업 또는 그 특징으로만 명명될 뿐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으며 화산섬이라는 공간 역시 고정세트 같은 무대처럼 보여서 다분히 연극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어둡고 이기적인 심리는 몇 백 페이지의 장편만큼이나 묵직하고 심도 깊게 그려집니다.

 

화산섬의 비극은 해변에서 세 구의 흑인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극소수의 반발 속에 은폐가 진행되지만 육지에서 온 경찰 한 명 때문에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이어 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비열한 음모가 전개되고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폭주합니다. 하지만 섬의 운명은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파국으로 치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파국에 동조하듯 화산은 점차 빈번하게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2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무척 다양한 코드를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일부 인용하면 난민 위기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척, 목적을 이루기 위한 권력자들의 권모술수, 매 순간 모든 곳에서 감시당하는 사생활, 대중을 선동하는 가짜 뉴스, ‘아니면 말고식의 마녀사냥, 가정 폭력에 노출된 아동등 인간이 일으키는 현대사회의 갖가지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들의 세상을 파괴한다.”(p238)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자체가 딱딱한 다큐멘터리 같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직설적인 화법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대목도 있지만 대부분은 프랑스 문학 특유의 지독한 풍자와 비유로 채워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장과 경찰(공권력), 의사(과학), 신부(종교), 교사(지식), 노파(방관자) 등 고유한 이름도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하는 대신 객관적인 시선으로 화산섬의 비극을 바라보게 하는 우화적인 설정이라 초반부터 눈길을 끌었습니다. 말하자면 특정인물에게 공감하거나 반감을 갖게 하지도 않고, 선과 정의가 승리하기를 혹은 악과 부패가 응징되기를, 이라는 바람조차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탐욕과 방관과 무지에 휩싸인 화산섬의 인간들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똑바로 바라보게 만든다고 할까요?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간혹 목격되곤 하는 프랑스 문학 특유의 난해함 또는 모호함입니다. 불편할 정도로 심한 건 아니지만 앞뒤 맥락을 살펴봐야 하거나 같은 문장을 두어 번 되읽어야만 하는 수고를 간간이 반복해야 되곤 합니다. 매번 프랑스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긴장하게 되는 게 사실인데,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은 평균보다는 쉽게 읽히는 작품이니 미리 편견을 갖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난 작가라 이름이 생소했지만 검색해보니 이전까지 한국에 소개된 필리프 클로델의 작품이 무려 다섯 편이나 됐습니다. 모두 순문학이나 에세이 등으로 아마 장르물이 아니라서 그동안 제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섬으로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전작들을 찾아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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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 화장 시리즈 2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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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녁싸리 정사회귀천 정사와 함께 화장(花葬) 시리즈로 불리는 단편집입니다. 화장(花葬)꽃으로 장사 지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두 작품 제목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정사(情死)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연인들이 내세에서의 인연을 기약하며 죽음을 선택하는 일을 뜻합니다. 시리즈 명과 제목만 보면 무척이나 애틋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하게 되지만 실은 두 작품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겉으로 드러난 애틋함이나 슬픔과는 거리가 먼, 무척이나 잔혹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발표된 회귀천 정사에 다섯 편이 실렸고, ‘저녁싸리 정사에는 나머지 세 편과 함께 전혀 결이 다른 유머 미스터리 한 편이 수록돼있습니다.

 

회귀천 정사의 서평에 살인이나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들의 향연이 주는 묘한 위화감과 끈적거림, 그리고 밝혀진 진실 속에 담긴 어이없음, 망연함,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들 때문에 이야미스(イヤミス)’와는 다른 성격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맛봤다.”라고 쓴 적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편함과 불쾌함이 다시 그리워질 때까지 저녁싸리 정사를 읽는 걸 미뤄두겠다는 다짐도 남겼는데, 그게 꼭 3년 반 전의 일입니다. 올해 초, 책장에 방치한 책들 가운데 일부라도 소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자마자 저녁싸리 정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제는 그 불편함과 불쾌함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수록작인 유머 미스터리 양지바른과() 사건부는 제외하고) 세 편의 단편 모두 다이쇼 시대(1921~1926)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일본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을 겪었던 것으로 기록돼있는데, 그런 분위기는 각 수록작에서 다루는 처연하고 비극적인 죽음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5년 만에 재회한 여동생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은 나머지 그녀를 희롱하려는 절친한 친구에게 증오심을 품는 오빠('붉은 꽃 글자‘), 유력한 권력자의 아내지만 버림받은 처지가 된 여자와 여덟 살 연하 대학생의 비극적인 정사('저녁싸리 정사‘),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한 왕실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자결을 선택한 전직 군인과 그 아내의 이야기('국화의 먼지‘) 등 세 단편 속의 죽음은 적어도 언론을 통해 또는 경찰 조사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자살 혹은 자결입니다. 하지만 화자의 고백 또는 제3자의 조사를 통해 드러난 죽음 이면의 진실은 전혀 다릅니다. 거기엔 지독한 시기심과 질투심, 타인의 마음을 철저히 기만하고 이용하는 이기심,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 어떤 지독한 업보도 감내하겠다는 집착 등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갖가지 악의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화장 시리즈가 여느 미스터리와 차별되는 건 바로 이런 인간의 악의를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낸 점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막론하고 심금을 울릴 정도로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는가 하면, 그들 주변에선 색과 향을 뿜어내는 갖가지 꽃들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혼란과 어둠에 잠식된 시대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행복과 미래를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악마파 화가가 그린 순수하고 맑은 풍경화처럼 묘한 이질감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게 되는 농밀한 아름다움이 뒤섞인 느낌이라고 할까요? “비정한 범죄 트릭과 서정적인 사랑의 드라마. 언뜻 보면 섞일 수 없어 보이는 양자가 함께 하면서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라는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의 평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간혹 트릭 자체가 과유불급으로 보인 이야기도 있고, 서사의 심도와 무게를 위해 지나치게 시대성을 강조한 경우도 있으며, 내용보다는 형식만 눈에 띄는 작품도 있습니다. 첫 수록작인 '붉은 꽃 글자화장 시리즈라는 타이틀에 잘 어울려 보인 반면 나머지 두 작품은 발단은 매력적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다소 억지스럽거나 결과론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회귀천 정사의 수록작들에 비해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화장 시리즈는 절대 급하게 페이지를 넘겨선 안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읽었을 때는 그 맛의 깊이와 농도가 전혀 달라지는 작품입니다. 렌조 미키히코의 독특하고 개성 강한 미스터리에 호감을 가진 독자라면 언젠가 화장 시리즈에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양지바른과() 사건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렌조 미키히코의 유머 미스터리인데, 재미있긴 하지만 앞선 세 편의 화장 시리즈와 너무 결이 달라서 한 번에 이어 읽으면 좀처럼 빠져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 편의 단편의 여운이 다 가시고 난 후에 따로 읽어야 그 재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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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상회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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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도쿄. 법의학 분야의 권위자인 무라야마 고도 박사가 자택 정원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사체의 상태와 사건 현장은 범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흉기 역시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정황에서 발견된 탓에 경찰은 당황합니다. 한편 고도 박사의 먼 친척이자 유일한 유족인 미나카미 도시코는 3년 전 저택에 침입하여 큰돈을 훔쳐갔던 도둑 하스노라는 남자를 찾아가 탐정이 되어 고도 박사의 죽음을 조사해줄 것을 의뢰합니다. 하스노 본인은 물론 그의 절친인 화가 이구치는 도시코의 의뢰를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하스노는 탐정 역할을 맡습니다. 얼마 후 하스노는 저택에서 발견한 몇몇 편지를 통해 국제적인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 교수상회가 고도 박사의 죽음에 연관됐음을 알아냅니다.

 

2023방주를 통해 한국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린 유키 하루오의 데뷔작이자 제60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입니다. 워낙 인상 깊게 방주를 읽은 덕분에 그의 데뷔작이 무척 궁금하기도 했고, 1920년의 도쿄를 배경으로 한 본격 미스터리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 대목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비롯하여 20세기 초중반이 배경인 미스터리를 좋아하다 보니 시대물의 향기를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거라 기대됐기 때문입니다.

 

絞首商會라는 원작 제목을 보곤 교수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집단의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었는데, 실은 교수상회는 국제적인 무정부주의자 비밀 결사로, 일본 정부와 경찰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위험한 단체입니다. 살인사건 직후 저택에서 발견된 몇 통의 편지에 따르면 교수상회는 자신들을 고발하려는 고도 박사를 대리인을 통해 살해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대리인은 고도 박사 주위의 인물이 분명해보였고, 그로 인해 순식간에 몇몇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탐정 역할을 맡은 하스노는 무척 특이한 인물입니다. 명문대 졸업 후 은행원이 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금세 사표를 내버렸고, 그 후로 기행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3년 전엔 도둑으로 체포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스노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건 화가 이구치입니다. 하스노가 두뇌라면 이구치는 팔과 다리 역할인 셈인데, 홈즈&왓슨 콤비와는 또 다른 이색적인 버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독자의 궁금증을 일으키는 점 중 하나는 왜 유일한 유족인 도시코가 하필 3년 전 저택에 침입했던 도둑인 하스노에게 탐정 역할을 의뢰했는가?”입니다. 그가 분명 뛰어난 인재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어떻게든 경찰이나 하스노보다 먼저 진범을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쓴다는 점입니다. 정의감도 아니고 교수상회에 대한 적개심이나 단순한 호기심도 아닌 그들의 진범 체포에 대한 열의는 오히려 하스노와 이구치의 의심을 살 뿐이고 조사가 거듭될수록 수상한 점만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범인의 정체 못잖게 이 두 가지 미스터리가 독자의 촉각을 자극하는데, 유키 하루오는 막판에 이르러 뜻밖의 해답을 내놓음으로써 독자는 물론 등장인물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물론 범인의 정체와 살해의도 역시 유키 하루오다운 반전을 선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미스터리 규모에 맞지 않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500페이지가 훌쩍 넘지만 개인적으론 길어야 400페이지에 어울리는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옮긴이의 말“‘방주가 초고속열차라면 교수상회는 시대성이 가득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여유롭게 나아가는 관광열차라는 설명이 있긴 하지만, 굳이 지적하자면 볼거리여유를 너무 많이 제공한 탓에 속도가 과하게 느려진 느낌입니다. 기대했던 시대물의 향기는 원 없이 만끽했지만 방주의 전광석화 같은 서사가 수시로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불어 간혹 현학적인 냄새가 풍긴 무정부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든가, 지나친 비약적 추리 때문에 명탐정 하스노의 천재성이 현실감을 잃은 점 등이 별 1개를 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일본에선 하스노가 이번 사건 이전에 맡았던 사건들을 다룬 단편집 시계 도둑과 악인들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교수상회와 비슷한 스타일이라면 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선지 방주처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십계의 출간소식이 더 기다려집니다. 유키 하루오 특유의 속도감과 반전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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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클레이머
르네 나이트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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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15년 같은 출판사와 번역가를 통해 누군가는 알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습니다. 서평을 쓴 시점까지도 인터넷 서점에 개정판이라는 정보가 설명돼있지 않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캐서린의 평온했던 일상은 누군가가 자비로 출판한 낯선 사람이라는 소설을 읽은 뒤로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소설을 쓴 누군가가 샬롯이라는 여주인공을 앞세워 20년 전 캐서린이 스페인의 휴양지에서 겪은 일을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20년 동안 비밀로 삼아왔던 그 일이 폭로된다면 직장은 물론 소중한 가족까지 붕괴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소설을 쓴 자가 누군지는 금세 알아냈지만 캐서린으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자가 남편 로버트와 아들 니콜라스에게도 그 소설을 전달하며 캐서린을 완전히 망가뜨리기로 작정했다는 점입니다.

 

작품마다 편차가 크기도 하고 엇비슷한 설정과 캐릭터의 식상함 때문에 기피하게 된 장르가 심리스릴러인데, ‘디스클레이머를 선택한 건 소설의 끔찍한 이야기가 내 과거라면? 나의 비밀이 책이 되어 나타났다.”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에 눈길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세세한 내용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날 오후에 그녀가 입었던 옷의 디자인과 색상, 머리모양까지 정확했다. 그것은 그녀가 기를 쓰고 감추어왔던 삶의 한 토막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비밀이었다.” (p9)

 

20년 동안 비밀로 삼아온 일이 누군가가 쓴 소설 속에 적나라하게 그려졌다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설이 우연이 아니라 명백한 의도를 갖고 쓰인 것이라면, 더구나 소설 속에서 자신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그려졌다면, 또 소설을 쓴 자가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일부러 책을 배포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황의 차원을 넘어 공포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캐서린은 20년 전 그 일을 겪은 직후 남편 로버트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않은 걸 후회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소설을 쓴 자의 의도를 파악한 뒤엔 수습책이란 게 전혀 없음을 깨닫곤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무엇보다 당시 5살이었던 아들 니콜라스까지 연루된 일이라 캐서린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니콜라스가 20년 전의 일을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캐서린과 함께 화자를 맡은 건 소설을 쓴 70대 노인 스티븐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아내 낸시가 자신 몰래 간직해온 노트와 사진을 발견한 뒤 큰 충격에 빠졌고, 결국 그것들을 자료삼아 캐서린의 삶, 가족, 직장을 모조리 부숴버리기 위해 소설을 썼습니다. 성치 않은 몸과 굳어버린 학습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캐서린을 궁지에 몰아붙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심리스릴러 서사대로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캐서린과 스티븐,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지인 등 주요 인물들의 요동치는 심리 묘사에 할애됩니다. 후회와 분노, 의심과 갈등, 배신감, 증오심 등 소설 한 편으로 인해 폭발된 여러 인물들의 격한 감정들이 섬세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묘사를 통해 독자의 마음을 쉴 새 없이 흔들어댑니다. 적잖은 심리스릴러 작품들이 동어반복의 지루함을 피하지 못하지만 디스클레이머는 크고 작은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감과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분량 자체도 그리 길지 않고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화자를 맡은 챕터들은 짧게 구성돼있으며 문장들은 적확한 단어와 비유로 이뤄져있어서 지루함을 느낄 새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년 간 감춰온 캐서린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마지막까지 강력한 페이지 터너로 작동합니다. 예상하기 어렵거나 강력한 반전은 아니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소설 한 편 때문에 삶의 뿌리까지 뒤흔들렸던 여러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대혼란에 빠뜨립니다.

 

독자에 따라 두 주인공 캐서린과 스티븐의 행동과 태도에 ?”라는 의문점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파국까지 몰고 간 이유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문과 불만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극복해내느냐야말로 심리스릴러로서의 가치와 미덕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생각입니다. 때론 눙치듯 넘어간 대목도 분명 있고, 작가에게 따져 묻고 싶은 장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0,5개를 뺀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론 독자의 의문과 불만을 충분히 잠식시킬 만큼 완성도 높은 심리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심리스릴러에 지친 독자라도 디스클레이머는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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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 개정판
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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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제153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불꽃은 작가가 개그맨 - 유명한 콤비 개그 피스의 멤버인 마타요시 나오키 - 이란 점 때문에 당시 장안에 화제를 몰고 왔다고 합니다. 오랜 무명 시절을 견디는 동안 책에 파묻혔던 그의 독특한 이력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는데, 그래선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 20대의 10년을 지난하게 살아낸 이야기를 그린 불꽃은 여느 성장 스토리보다 사실적이고 절절하게 읽혔습니다. (본문에는 코미디언과 개그맨이 혼용되고 있는데, 서평에서는 개그맨으로 통일하겠습니다.)

 

20살의 무명 개그맨 도쿠나가는 한 불꽃축제장에서 만난 네 살 위의 선배 개그맨 가미야에게 사제지간이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각자 콤비 개그 파트너가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은 가끔씩 만나 개그에 대해, 인생에 대해, 미래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도쿠나가는 가미야에게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외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개그에 대한 열정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지만 10년이란 시간은 결국 두 사람에게 크고 작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콤비 개그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만담’, 즉 스탠드마이크 앞에 선 두 개그맨이 각각 바보 역할과 똑똑이 역할을 맡아 속사포 같은 개그로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장르입니다. 웃음에 대한 센스는 물론 엄청난 순발력과 임기응변이 필요하며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좀처럼 관객에게 호응을 얻기 쉽지 않습니다.

청소년기부터 이미 개그맨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도쿠나가는 재능 자체가 여러 모로 부족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한 불꽃축제장에서 자신과는 차원이 달라 보이는 개그맨 가미야에게 한눈에 반한 나머지 사제지간을 부탁한 건 그만큼 정열적이라는 뜻이기도, 또한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미야는 도쿠나가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입니다. 타인의 평가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만의 개그에 대한 신념에 투철한 가미야는 쉽게 말하면 주류 개그를 거부하는 4차원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개그맨이라는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목표를 가진 도쿠나가와는 전혀 상반된 가치관을 지닌 셈입니다. 마치 물과 기름과도 같은, 섞이기 어려운 차이라고 할까요?

도쿠나가가 가미야와 함께 보낸 10년은 바로 그 차이 때문에 고민하고, 그 차이를 따라잡으려 애쓰다가 결국 그 차이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개그맨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훌쩍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통 리스크뿐인 무대에 서서 상식을 뒤엎는 것에 전력을 다해 도전하는 자만이 코미디언이 될 수 있다. 긴 세월을 들인 이 무모한 도전으로 나는 내 인생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p204)

 

개그맨이 쓴, 개그맨에 관한 소설이라고 해서 다소 가벼운 서사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힐링 코드가 담긴 이야기가 아닐까, 지레 편견 섞인 짐작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마치 개그맨은 삶 자체도 개그 같을 것이라는, 지독한 폄하와 다를 바 없는 부끄러운 짐작이었습니다. ‘불꽃은 남들을 웃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습과 좌절이 필요한지, 가난이라는 현실과 손에 닿지 않는 이상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절망을 숱하게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관객들의 덧없는 반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도 허무한 일인지를 진지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부족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놓치지 않는 도쿠나가와 주류 개그에 어울리지 않는 고독한 천재 가미야는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개그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가미야의 난해한 궤변(?)과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다소 어려운 문장들 때문에 간혹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되읽을 때도 있지만 불꽃은 한나절이면 충분히 완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스토리가 아니라 사람을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그저 한 번의 독서로는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두 사람의 10년이 워낙 지난하고 굴곡이 많은 탓에 어쩌면 읽을 때마다 그 맛이 조금씩 달라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두 사람의 개그가 생각날 때면 한나절 정도 그들의 10년을 다시 한 번 맛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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