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법 - NFT로 만나는 예술과 콘텐츠의 미래
박제정 지음 / 리마인드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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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의 블라인드 이벤트로 골라온 책이다. 책을 포장지에 싸서 표지를 볼 수 없게 하고, 간단한 소개글 한 문장만 보고 대출을 하는 이벤트였는데, 나름 흥미로운 시도였다. 영화 블라인드 시사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참고로 이 책에는 “디지털 예술 혁명 소유를 넘어 가치의 공유로”라는 묵직한 단어들이 잔뜩 나열된 소개글이 달려 있었다.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듯, 이 책은 최근 유행 중인 미술품의 NFT화(化)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NFT란 Non-Fungible Token의 줄임말이라고 하는데, 풀이하면 대체불가능한 토큰이라는 뜻이다. 토큰하면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잠시 본 적도 있을 텐데, 버스 탈 때 가운데 구멍이 뚫린 금속재질의 동전 비슷한 것을 기리 킨다. 일일이 몇백 몇 십원 하는 식으로 돈을 내기 번거로우니 사전에 그 금액에 해당하는 토큰을 구입해 한 개씩 내는 식이다. 토큰이란 화폐 대용으로 사용하는 무엇을 가리킨다.


이 기술은 또 다른 최신 기술인 블록체인을 바탕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이 개념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온라인상에서 어떤 데이터를 나타내고 사용하려면 그것을 저장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소위 서버를 구축해야 한다는 말인데, 기존에는 그 데이터를 관리하는 주체가 직접 서버공간을 만들어서 저장하고 관리를 해야만 했다면, 블록체인은 이 작업을 그 데이터에 연결된 모든 사람에게 분산시켜 저장하고 관리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게 뭐가 좋은가 하면 기존 방식에서는 소위 해킹의 위협이라는 게 늘 존재한다. 그리고 한 번 뚫리면 그 안의 데이터가 유출되어 개인정보라든지 중요한 데이터값의 임의적 수정이라든지 하는 피해가 생긴다. 하지만 블록체인에서는 애초에 이 해킹이 불가능에 가까운데, 어떤 데이터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그 네트워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데이터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불가능한 토큰” 같은 개념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최근에는 예술품도 이런 NFT로 만드는 시도가 있다. 저자는 이런 시도가 가져올 수많은 장점들을 이 작은 책에 가득 채운다. 일단 NFT화된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굳이 무거운 분위기의 미술관 같은 데를 갈 필요가 없으니 개인의 인적 정보를 노출해야 하는 불편함이 없고, 예술가들은 각종 수수료(판매, 경매 과정의)를 떼지 않고 직접 작품을 판매할 수 있으며, 구매자도 작품을 보관하기 위한 환경(온도와 습도 관리 등등)을 애써 구축할 필요 없이 언제나 온라인에만 접속하면 볼 수 있어서(?) 편하다. 여기에 그 토큰을 구입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커뮤니티가 작가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도 있고, 자신이 구입한 작품의 작가를 홍보하는 서포터즈가 될 수도 있다는 내용도 보인다.


아무튼 여러 면에서 좋다는 말인데, 책을 읽으면서 정작 중요한 내용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작품을 NFT로 구입(소유)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 걸까? 물론 책 후반에는 이와 관련된 기술적인 내용이 약간 실려 있지만, 정작 실제적인 묘사가 부족하다. 그건 어떤 작품의 이미지를 다운로드 받아서 모니터로 볼 수 있다는 것일까? 다운로드 쪽은 좀 다르지만, 모니터를 통해(각종 증강현실 기기 등을 포함해) 볼 수 있다는 것은 맞는 내용인 듯하다. 과연 그게 실제로 그 작품 앞에 서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경험일까?


텔레비전 화면이 아무리 발달하고 기술이 좋아진다고 해서 직접 경기장에 가서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과 같은 경험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AI가 어느 정도나 발전할지는 모르지만, 그 냄새와 바람과 옆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강한 아드레날린의 분출, 처음 본 사람들과 같은 것을 바라보며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 같은 것들이 온전히 온라인으로, 디지털 기기로 재생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영양소가 포함된 알약을 삼키는 것으로 우호적인 교제와 함께 이루어지는 식탁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도 단순히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과는 좀 다른 요소가 필요한 건 아닐까?


토큰 구매자들의 커뮤니티는 현재의 연예인 팬클럽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칫 그 안에서 작가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 행사를 하려는 시도나 악플러들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고, 또 저자가 NFT의 장점으로 꼽는 것 중 하나인, 복잡한 공부가 없이도 좀 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폐쇄적인 커뮤니티 안 “똑똑이”들로 인해 또 다른 꼰대문화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현상에 관해 가장 우려 되는 부분은, 역시나 미술품의 NFT화와 그 거래라는 마당에서 벌어질 투기적 위험이다. 저자도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 현재 이 바닥은 미술품의 감상과 공유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마당이 열렸다는 식의 투기적 심리가 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건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코인투기판으로 바꿔버린 앞서의 예를 봐도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저자가 예상하는 “예술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법”은 “예술품으로 한탕 크게 버는 새로운 투기법”으로 전락할 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이를 우려했던 듯, 새로운 좋은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덧붙이지만 여전히 우려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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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한 음악 - 교회음악의 역사, 고대 이스라엘에서 현대 가스펠까지
요한 힌리히 클라우센 지음, 홍은정 옮김 / 좋은씨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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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의 역사에 관한 책은 오랜만이다. 아마 학부 시절에 한 권 본 것 같으니 시간이 꽤 지났다(사실 그 책은 교회음악사만 담겨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구약 시대의 종교음악부터 시작해 현대(20세기 초중반)의 가스펠 음악까지, 말 그대로 찬송이라고 불릴만한 음악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훑어가는 책이다.


그리고 앞서 교회음악이라는 단어로 시작했지만(실제로 책의 대부분은 여기에 할애되어 있지만), 방금 언급했던 것처럼 저자는 이를 단순히 교회 안에서 연주되고 불리는 음악만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찬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 부분은 성경에 언급된 악기나 곡조에 관한 기록 등을 언급하는 정도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 시기의 찬양에 관한 언급을 간단히 한 뒤, 본격적으로 교회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에 관한 내용이 따라온다. 흔히 이 성가들은 대교황이라고 불리는 인물들 중 하나인 그레고리우스 1세 때 교황청이 주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저자는 당시 교황들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었으며 오히려 이 노래들은 (당시 서부와 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크족의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아일랜드 출신의 수도사들이 이 작업에 큰 공헌을 했다고.





그 다음은 종교개혁 시기 개혁자들의 음악이었다. 개혁자들의 성격에 따라 교회 음악에 대한 입장도 달랐는데, 어지간한 건 그대로 남겨두었던 루터와 모든 걸 다 새로 만들기를 원했던 츠빙글리,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칼뱅은 교회음악에 대해서도 꼭 그처럼 차이를 보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를 거치며 청중은 그저 듣기만 했던 교회음악이 청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부르는 식으로 발전한 것은 큰 변화였다.


한편 그레고리안 성가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단선율의 음 위에 성경 속 가사를 얹은 것이었다. 쉽게 말해 하나의 음이 이어지는 노래였다는 것이다. 노래라기보다는 시처럼 들리기도 하는 독특한 형식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많은 음이 함께 어우러지는 다선율 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런 변화의 대표자로 팔레스트리나라는 작곡가를 꼽는다. 참고로 이 장부터는 주요 작곡가들(바흐, 헨델, 모차르트, 멘델스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바흐와 헨델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교회음악은 점차 교회 밖으로 나와 세속화의 길을 걷는다.


책의 마지막 장은 가스펠 음악에 할애되어 있다. 저자는 몇 번이고 “아프로아메리칸”이라는 학술적 용어로 부르는, 그러니까 흑인들의 음악에서 시작된 가스펠은 노예로 끌려온 그들의 역사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특유의 소울과 브루스 리듬, 독특한 창법 등이 더해지면서 곧 가스펠은 교회음악은 물론 세속 음악계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어떤 것의 역사를 공부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고작해야 수십 년을 사는 인간이 절대로 다 경험할 수 없는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훑어가는 건 마치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을 살짝 열고 한 발을 내딛는 느낌을 준다. 내가 역사를 읽을 때마다 설레는 이유다.


이 책은 교회음악에 관한 오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좀 전문적인 음악 이론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책을 읽어갈 땐 그런 부분은 과감히 쓱 훑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사실 이 책의 중심은 그런 세부적인 음악 변화보다는 그런 변화들이 어떤 사회적 양상의 변화와 연결되어있는지를 살피는 것에 있으니 말이다.


다른 모든 제도나 문화, 양식들처럼, 교회도 시대적 상황에 맞춰 다양한 옷을 입어왔다. 교회 음악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단지 이전 시대의 음악을 반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자기 시대에 맞는 음악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음악이 경건하지 못하다고 경계하기도 하지만, 그런 식의 반항은 역사의 큰 파도 앞에서 곧 묻혀버린다(하지만 여전히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주제가 주제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자의 신학적 입장도 묻어나올 수밖에 없다. 독일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고 한때 루터교 목사로도 일했던 저자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계몽주의의 세례를 축복으로 여겼던 초기 자유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으로 보인다. 물론 이 부분이 전체 역사를 훑어가는 데 큰 지장을 주지는 않지만,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거나 모두를 어느 정도 시니컬하게 평론하는 태도가 최선인 것은 아니니까.


교회음악에 관해서 이만큼 정리된 책도 없는 듯하다. 관련 정보를 위해서 한 번 읽어볼 만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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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의 역사 - 천년의 제국,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 세운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 더숲히스토리 2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 / 더숲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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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출판사에서 앞서 나온 “바벨론의 역사”가 꽤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봤다가 결국 지금은 집 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워낙에 오래된 나라이기도 해서 제대로 그 역사를 설명하는 책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괜찮은 책이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같은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이 책 “비잔티움의 역사”도 데려왔다.


기본적으로 이 시리즈는 개론서다. 사실 족히 수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책 한 권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고, 또 그렇게 썼다고 해서 어려워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손에 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런 차원에서 개론서는 분명 필요한 책이다. 특히 역사 분야 같은 건 좀 더 쉽게 접근해서 그 중 흥미를 발견할 수 있는 책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또 개론서라는 데 있었다. 말했지만 개론서란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 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반대로 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선지식이 있다면, 개론서는 좀 시시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장르다. 정확히 내 경우가 그랬다.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만들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 여기저기를 찾아보며 정리한 상황이기에, 적어도 책에서 간략히 서술된 내용보다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물론 이름에서부터 그리스 출신임을 물씬 드러내고 있는 저자가 쓴 이 책이 평범하다거나,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비잔티움 사회사에 대한 다양한 최신 연구 결과가 곳곳에 실려 있고(물론 그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몇몇 포인트에서는 꽤 새로운 관점을 얻기도 했으니까.





책에서 다루고 있는 “비잔티움”이란 동로마제국을 말한다. 한 때 지중해를 둘러싼 세계 전체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부적 문제와 외부적 요인들이 겹치며 점차 힘을 잃어 간다. 결국 제국의 방위를 위해 몇 명의 “황제들이” 동시에 자신이 맡은 구역을 방위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게 되고, 이게 공식화된 것이 동서 로마의 분리다(물론 이 때도 공식적으로는 동등했으나, 상대적으로 동쪽의 황제가 서쪽에 비해 우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이 때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명칭 자체는 16세기에나 사용되기 시작했으니 적절한 이름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서 로마의 분리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그의 두 아들이 나라를 나눠 상속한 395년을 보통 기점으로 보고, 동쪽을 상속받은 아르카디우스를 동로마제국의 첫 황제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이 책의 저자는 비잔티움 제국의 첫 황제를 콘스탄티누스 1세로 설명한다(의외로 학자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분야의 역사의 시작을 한참 과거로 밀어 올리는 데 꽤 많은 공을 들이곤 한다). 역시 그 주된 이유는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수도를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기 때문.


책은 그렇게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의 역사를 쭉 훑어간다. 다만 많은 서술이 단지 황제의 교체와 정치적 투쟁을 중심으로 하지만, 이 책의 경우 당대의 경제적 상황, 제도의 변화가 보여주는 사회적 상황 등에도 나름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사실 이 부분이 이 책이 갖는 고유의 가치다).





전체적으로 복잡한 동로마제국의 역사를 한눈(300페이지를 한 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에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괜찮은 개론서다. 하지만 제국 말기로 들어가면 워낙에 잦은 정변과 복잡한 인척관계, 그리고 긴 이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아예 흥미가 없다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뭐 역사라는 게 그 정도의 문턱은 넘어가야 즐길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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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는

복음이란 우리에 갇힌 사자와 같아서

변호는 필요 없고 해방만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과연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마이클 고힌,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세계관은 이야기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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