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초월한 공동체 믿음의 글들 353
최종원 지음 / 홍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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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눈에 띄는 저자인 최종원 교수의 책이다. 나온 지는 좀 됐는데 이제야 손에 들렸다. 좀 더 최근에 나온 두 권의 책(“공의회, 역사를 걷다”, “수도회, 길을 묻다”)을 통해서,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던 저자인데, 이번에는 좀 더 “일반적인 주제”를 다룬다. 앞서 언급한 책들에서는 교회사 가운데서 공의회나 수도회 같은 특정한 주제를 정해서 접근을 했다면, 이 책은 하나의 시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초대 교회사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 식은 아니다. 보통 이런 경우 교리의 발전 과정을 초반에는 성경 형성사와, 중반에는 이단대처사와, 그리고 종반에는 공의회사와 연결 지어서 설명하는 게 보통. 물론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집중하는 지점이 여느 책과는 좀 다르다. 이 책의 제목에 “다시 읽기”라는 어구가 붙어있는 이유다.





책에서 저자가 힘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 중 하나는 이 시대의 교회사를 읽는 독자의 시야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1장부터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데, 교회의 시작에 관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그리고 세속 사회학자들의 서로 다른 기준점을 보여주면서, 이 문제가 지극히 당연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저자의 전공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제대로 살피게 되었는데, 아, 저자는 신학을 공부한 게 아니라 역사학자였다. 저자의 책에서 느껴지는 신선한 관점의 이유는 아마도 그가 신학자들이 서술한 교회사보다는 기독교적 관점을 지닌 역사학자로서 서술하기 때문이었나 보다.


2장부터 4장까지는 초대 교회의 빠른 성장에 관한 분석을 담고 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고립주의, 폐쇄주의를 넘어 보편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던 당시 로마제국에, 대안적이고 안정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정교회)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 후,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으로서 초기 이단들을 살핀다. 이 부분은 이단에 관한 기존의 설명보다 좀 더 “우호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런 느낌은 저자의 책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초대 교회 시기 이단들이 모두 뭔가 악독한 집단이라기보다는 당시 상황에서 나름의 합리적 해결책을 내려고 했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비슷한 내용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글에서도 본 적이 있다.


책의 후반부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나타난 변화에 할애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제국의 체제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간다. 저자는 이 사건이 가진 공헌 못지않게 부작용도 심했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교회와 권력이 밀착하면서 부패가 시작되었고, 이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나온 것이 수도회 전통이라는 설명.





초대 교회사에 관한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아서(종종 주제를 따라 중세나 그 이후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전체적인 윤곽을 한 눈에 그려보기에는 어렵지만, 신대원이나 교회에서 전형적인 설명만 들어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생각의 깊이를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확실히 조금은 다른 관점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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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와의 연애를 후회한다
허유선 지음 / 믹스커피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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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연애 에세이 같은 걸 읽는 게 살짝 어색하긴 하지만, 제목이 재미있어서 골라봤다. 오래 전 읽었던 비슷한 제목이 살짝 기억이 난다. 미디어에도 자주 보였던 심리학자 김정운이 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책이었는데, 지금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지만 제목은 10년 넘도록 기억나는 걸 보면 잘 지은 것 같긴 하다.


아무튼 이 책 역시 제목을 보고 손에 들었다. 어느 정도 예상이 되듯, 연애에 관한 에세이인데, 결국 연애라는 것도 단순히 남녀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좀 더 크게 보면 사람과 사람이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니 만큼, 나는 이미 그 시기를 지났다거나 연애에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소구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도 그랬고.





책은 연애라는 관계를 어떻게 시작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다양한 조언이 중심이 된다. 구체적인 팁에 해당하는 내용도 있지만, 좀 더 큰 그림에 관해서도 자주 말해준다. 여기에는 작가가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무려 칸트 전공이라고) 배경이 강하게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참고로 책의 부제가 “나를 철학하게 만드는 사랑에 대하여”다.


예컨대 작가는 에리히 프롬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정신을 놓거나 얼이 빠져버리는 건 상대가 천생연분이거나 유일한 사랑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금까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일 분이라고 말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상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도 곱씹어 볼 만하고, 지나치게 다른 사람, 혹은 상대방을 인식하면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기보다, 중심을 잘 잡고 자신을 잘 살펴야 한다는 말에서는 살짝 칸트의 흔적이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어려운 이야기만 나오는 건 아니니, 그리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손에 들어도 괜찮을 만한 책이다. 기독교적 배경 위에 쓰인 것 같지는 않으나, 교회 안에서도 청년들과 함께 읽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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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라는 세계
이종태 지음 / 복있는사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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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말 나타난 계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전의 무지몽매했던 시대를 끝낸,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으로 가득했었다. 그들을 “계몽주의자”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여전히 이런 과잉 자의식에 기초한 평가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시대를 계몽시킨 선구자들이었다, 뭐 이런.


그들이 이전과 좀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중세 기간 안에도 그와 비슷한, 혹은 그 선구적 탐구가 존재했었다. 물론 그 시대 등장했던 여러 지식인들이 가져온 공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과학적 사고의 발달로 이전 시대의 각종 주술적(혹은 미신적) 행태를 몰아내는 계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명이 있으면 암도 있는 법. 이 책의 저자는 계몽주의 시대가 낳은 가장 큰 문제로 이 세계에서 “경이”를 함께 몰아내버린 것을 꼽는다. 사실 이건 앞서의 공헌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계몽주의자들은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일들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연을 감싸고 있던 신비의 영역,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경험하는 경이의 순간이 사라져 버렸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과정이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면 무지개를 여전히 신의 활 정도로 믿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그건 단지 빛의 굴절일 뿐 아니냐.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을 애써 무시하라는 뜻이냐 하고. 당연히 그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과정에서 세상의 의미,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 시대 사람은 자연을 어떤 의미가 있는 곳으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텔로스(목적)를 찾아 철학을 시작했고, 동양에서는 도(道)를 찾는 이들이 비슷한 시기 나타났다. 신의 섭리나 로고스와 같은 원리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에게 우주는 어떤 의미도 없는 말 그대로 그냥 있는 것(자연), 나아가 어떤 필연적인 의미도 없는 텅빈 공간(the Space)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세계에서 인간은 살 수 없다(물론 그런 어려운 것은 생각 안 하고 내키는 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은 늘 존재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심지어 대표적인 신(新)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조차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책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우리가 다시 한 번 세상을 경이로운 곳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을 반복해서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 핵심적인 변호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C. S. 루이스다(사실 저자는 루이스의 가장 유명한 책 “순전한 기독교”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저자는 루이스의 다양한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루이스가 간절히 찾았던 경이를(루이스의 표현으로는 joy) 살펴본다.(물론 그 이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언급된다.)


경이가 사라진 세상은 “노래가 불리지 않는 세상”이 될 거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노래라는 것이 애초에 대상의 경이로움에 대한 찬탄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말이다. 모든 것을 물질로, 재물로 환산하는 환금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오늘날 더더욱 부각되고 있는 다양한 인간성 상실을 떠올릴 만한 사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그 전조가 있었던 것. 시와 노래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메마르고 답답할까.


저자는 왜 우리가 경이감을 회복해야 하는지, 세상을 단지 기계론적으로만 보는 것이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다양한 방향에서 조망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세계관을 여기에 접목시킨다. 다만 이 지점에서 조금 아쉬웠던 것은, 그렇게 경이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으나, 세상을 경이로운 곳으로 인식하게 될 때 나타나는 변화가 단지 우리의 심리적인 부분에 한정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 또한 그런 다분히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도움인 것처럼(물론 저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보지만) 볼 여지가 있다는 점도. 물론 이 책이 기본적으로 EBS라는 공영방송에서 한 강의를 모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긴 하다.



우리는 경이를 회복할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시인도 있고, 가수도 있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미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감정과 경이, 신앙을 모두 2층 다락방 구석으로 몰아넣은 시대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날마다 더 알아간다고 생각하면서, 날마다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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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2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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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카이사르는 장발의 갈리아에 있다. 갈리아인들과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반발은 잠잠해질 것 같지가 않은 상황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정돈이 되어 가는 느낌이지만, 콜린 매컬로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전쟁이 과연 끝나기는 할까 하는 회의감이 좀 더 짙게 든다. 두 작가 모두 카이사르라는 인물에게 푹 빠져 있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이 시기를 보는 관점이 퍽 다른 게 재미있다.


갈리아 전쟁 후반부에서 카이사르를 가장 괴롭혔던 인물은 베르킹게토릭스(보통은 베르킨게토릭스라고 쓰는데 이 책에선 이렇게 표기한다)였다. 갈리아인이라고 통상 부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 협력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갈리아 하면 오늘날 중부 유럽의 대부분을 가리키는 넓은 땅이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갈리아 전역이 일치단결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땅과 인구는 많지만 갈리아인들이 로마군에게 연전연패했던 것은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던 베르킹게토릭스는 이 불가능한 작업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 그의 출신 부족이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좀 더 큰 부족을 이끄는 이들은 그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고, 형식적으로는 머리를 숙였으나 내심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가 아이두이족 같은 유력한 부족의 대표였다면 갈리아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까.


이야기를 읽어 나가면서 오늘날의 EU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2천 년 전 베르킹케도릭스가 꿈꿨던 갈리아의 통일(물론 EU는 당시 갈리아인에게 큰 위협이었던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의 땅도 포함되어 있긴 하다)이 마침내 실현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EU 내부의 알력과 각 국가별로 다른 정치적, 경제적 상황 때문에 다들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으니 여전히 EU가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지는 미심쩍다.





그래도 전쟁에서 수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모든 갈리아인들이 다 함께 들고일어난 것은 아니라도, 당장 모인 수만 해도 족히 수십 만 명이었으니, 제한된 수의 군대만 이끌고 갈리아 전역에서 싸워야 했던 카이사르로서는 가볍게 볼 수 없는 적이었다. 만약 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로마군과 대규모 회전을 벌이겠다는 생각만 안 했더라면...


갈리아 전쟁의 대미는 알레시아 공방전이 장식한다. 알레시아 요새를 둘러싼 로마군의 압도적 포위망, 외부에서 적의 지원군이 올 것까지 대비해 성을 둘러싼 방향만이 아니라 그 바깥에도 대비가 되어 있는, 어떻게 보면 도넛 모양으로 안과 밖에서 적과 맞서야 하는 일종의 배수진 비슷한 전술이었지만,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그 어려운 걸 해 냈고, 마침내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난다.


전체의 윤곽을 그리고 시간대 별로 변해가는 상황을 서술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시오노 나나미와 일종의 극으로서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콜린 매컬로의 방식은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차이를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로마인 이야기의 방식을 더 선호하는데, 어느 정도 선이해가 없이 보면 그냥 ‘치열하게 싸웠다’ 수준을 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사실 말이야 쉽지 포위망의 안팎에서 공격해 오는 적과 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배수진은 퇴로를 차단해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도록 아군을 몰아가는, 마지막 전술 같은 건데 이런 전술이 늘 유효하지 않다는 건 임진왜란 초기 조선 기마군을 사실상 전멸시킨 신립의 탄금대 전투가 잘 보여준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했던 건, 역시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카이사르의 능력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실제 작품 속에서도 그런 언급이 자주 보인다). 전적인 신뢰, 그리고 존경 어린 시선을 받는 장군은 그의 부대가 갖고 있는 힘 이상을 끌어낼 수 있다. 물론 그런 존경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능력”을 여러 차례 보여주어야 했을 거고. 탁월한 리더는 단순히 말빨이나 심리조종이 아니라 확실한 능력 위에 공정함과 너그러움, 정치적인 감각 또한 갖춰야 했다.





한편 로마 본국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막장 행보가 계속 이어진다. “보니”라고 불리는 원로원 내 보수파들은 어떻게든 카이사르를 실각시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가 저지르지 않은 온갖 범죄혐의를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그의 적법한 요구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를 반역자로 몰아 일찌감치 포섭해 둔 폼페이우스를 동원해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시도까지... 결국 아마도 다음 편에 나올, 루비콘 도하는 보니파가 작정하고 카이사르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는 보니파도 뭐 대단한 것 하나 없었다. 그들 모두가 태생적인 귀족 혈통이었던 것도 아니었고(오히려 카이사르가 속한 율리우스 씨족이 대표적인 파트리키였다), 대표적인 반 카이사르파였던 카토는 평민귀족 출신으로 같은 보니파 내에서도 과하다고 여길 정도로 자기 고집에 빠져있는 유아독존적 인물로 묘사된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의 평정이 깨진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그러면서도 또 그녀를 잊지 못해 새 남편이 죽자 다시 그녀와 재혼을 하는 뭣도 아닌 그런 인간.


사실 곧 이어질 내전을 앞두고, 카이사르의 반대편에 서게 될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깎아내리고 있는 콜린 매컬로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갈리아 전쟁 내내 카이사르의 오른팔 같은 인물로 묘사되던 라비에누스는 야만적 성향이 강한 촌뜨기로(그는 내전이 시작되면서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가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그가 폴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카이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던(그리고 카토의 조카였던) 부르투스는 겁쟁이라 전쟁터는 늘 피해 다니면서 고리대로 돈벌이를 하는 데만 빠져있는 쫌생이로 묘사하는 식이다.


그리고 내전까지는 카이사르의 편에 서 있었지만, 훗날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던 안토니우스도 어느 정도 군사적 재능은 있었지만 허영심이 좀 과한 인물로 등장한다. 훗날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들이 보면 살짝 미소가 띄워지는 부분. 카이사르를 당장 제거해야 할 무슨 심각한 범죄자로 몰아가던 이들이, 정작 일상에서는 철저하게 비틀린 인물들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건 뭐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이야기가 점점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도 아직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그날까지는 책이 여러 권 남아 있으니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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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의 성경
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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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관해 믿고 보는 저자 후스토 곤잘레스의 새 책이다. 서문에 팬데믹 상황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정말로 최근에 쓴 책인가 보다. 제목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성경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는지, 초기 기독교 시기를 배경으로 탐색해 보는 쪽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성경이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1부가 가장 재미있었다. 구약은 대체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일부 아람어 포함),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 신약시대까지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아람어였다. 신약은 처음부터 번역의 과정을 거쳐 쓰였던 것.


구약의 경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거룩한 글로 사용해 온 책들과 대부분 겹친다. 하지만 여기에 외경이라고 불리는 주로 포로기 이후 쓰인 책들의 성격을 두고 이견이 생겼다. 70인 역에서는 이 외경도 중요하게 여겼기에, 전통을 따라 가톨릭교회에서는 외경도 제2의 경전으로 여긴다. 하지만 원문에 대한 연구를 중요시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유대인들의 인정해 온 히브리 성경에 실려 있는 책들의 권위만을 인정하려 했다. 결국 구약의 목록에 차이가 생긴 이유다.


처음 성경은 가죽 위에 써서 두루마리 형태로 말아 보관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코덱스’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책과 같은 형태를 일찌감치 널리 사용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 성경과 같은 책을 쉽게 찾기 위해서는 코덱스 형태가 훨씬 편하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성경을 장과 절로 구분하는 관행이 어떻게 나왔는지, 성경의 필사본들이 어떤 식으로 전달되면서 오류 생겼고, 그것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인쇄술이 발명이 교회의 신앙생활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등이 이어진다.


2부에서는 성경이 다양한 정황 가운데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3부에서는 성경의 내용에 대한 초기 교회의 해석법으로 시작해, 당대 중요하게 여겼던 성경 속 주제들 몇 가지를 검토한다.





책이 얇기도 하고, 자연히 내용도 개론에 가까운 쉬운 수준인지라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위에서 얘기했듯 흥미로운 내용들이 적잖이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큰 부담 없이 즐거웠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말씀”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각각의 시기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여기는 태도로 말씀을 귀하게 여겼지만, 또 지금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을 띨 때가 있었다.


우선 인쇄기의 발명과 그로 인한 성경의 대략 출간이, 그 이전 시기 필사라는 방식을 통해 성경을 제작해온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새로운 발명품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성경의 필사 자체를 영적 훈련의 하나로 여겨왔던 이전 시대의 관념을 반복하며 큰 문제가 생겼다고 우려를 표한다.


본질과 부수적 유익을 혼동하거나,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세대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누구나 성경을 값싸게 손에 들 수 있는 오늘날, 그렇다고 사람들이 성경에 더 익숙해졌는지를 자문해 보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말씀을 읽고 쓰고 하는 행위 속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훈련하고 익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몸으로도 예배를 해야 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또 하나는 말씀예전과 성찬예전의 긴장관계에 관한 서술이다. 이방인들이 대거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시기에는 성경의 내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라도 말씀을 굉장히 강조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와 함께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는 논리로 말씀이 오히려 약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개혁자들이 가톨릭의 성찬 교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가했던 데에는 어쩌면 이런 이유도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초기 교회 시기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되지만, 자연스럽게 그와 연결된 이후 시기에 관한 내용도 언급되니 더욱 좋다. 저자의 간명한 문장이 복잡할 수도 있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개론서에 가까운 책인지라 좀 더 자세한 세부사항을 알고 싶으면 다른 책을 펴야겠지만, 또 그렇다고 아주 단편적인 정보만 실려 있는 건 아니다. 성경에 대한 상식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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