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사와 교사 되기 - 우리의 교사와 학생들이 세계의 BTS(The best teacher and student)가 되기를 꿈꾸며
이혁규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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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잇따라 교사들이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교직사회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언론에서 이러쿵저러쿵 기사를 쓰기는 하지만, 요새 언론들이야 클릭장사가 가장 중요한 사업인지라 선정적인 내용만 각색해 보도하는 게 일반적이다. 문제의 배후에 있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듣기에는 신문은 적절한 매체가 아니다.


그래서 손에 든 것이 이 책이다. 사실 근래의 문제는 학부모들의 교사에 대한 갑질, 괴롭힘이지만, 이 책은 그런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한국 교육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들, 한국 교사들을 얽어매고 있는 내적, 외적 요인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하지만 문제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저 깊숙한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곤 한다.




책에서 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건 교사 교육 과정의 부족함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교사를 지망하는 특이한 나라다. 하지만 정작 그런 학생들들 좋은 교사로 길러내기 위한 교육제도는 모자람이 많은 상황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교대의 수업 구성인데, 중등 교사를 길러내기 위한 사범대학의 경우 실제 교과가 아니라 일반적인 학문 구성에 따른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면 사회 교과 교사를 키우기 위한 강의가 아니라 그 안의 다양한 과목들, 즉 지리나 역사, 경제, 정치 같은 분야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사회과 교사이지만 정치를 잘 모르고, 역사를 어려워하는 교사가 탄생한다. 이런 엉뚱한 교육현실의 배경에는 기득권과 밥그릇이 연관되어 있고.


교사의 승진과 관련된 문제도 생각보다 심각하다. 현행 제도에서 교사들은 크게 세 가지 진로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교장이 되려고 애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에게 집중하는 길, 그리고 나머지는 이도 저도 관심 없고 혼자 유유자적하는 길. 세 부류 중 어느 쪽이 비중이 높은 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현행 제도에서 교장이 될 수 있는 교사의 수는 매우 적다는 걸 생각해 보면 세 번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짐작은 된다.


교사들 자신의 문제도 분명 존재한다.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기를 꺼리고, 다른 교사들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주체들과의 연계를 위한 노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건, 다른 방식을 선택할 유인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사명감으로 무슨 행동을 유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교원 양성 계획의 실패로 인한 임용대기자 문제다. 쉽게 말해 교육은 다 받았는데 정작 교사로 임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정부의 정책실패에 있는데, 여전히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예비 교사들의 희생만 늘어가고 있는 상황.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되면 결국 교사들은 의욕을 잃고, 보신주의에 빠져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집단이 된다. 어떻게든 문제가 되는 상황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승진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길만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이 학부모들에게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서 나오는 비극적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교권 보호를 위한 법을 하나 만든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없는 것 보다야 나을지 모르지만, 교사 개개인의 자기 효능감이 떨어져서 의욕을 상실한 상황에서 무슨 일이 제대로 될까?


책을 읽고 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교사의 정체성 부분이다. 우리는 교사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 걸까? 최근 우후죽순 출몰하는 갑질 부모들의 경우 내 자식을 떠받들어야 하는 시종쯤으로 여기는 것 같지만, 이건 애초에 논외로 해도 상관이 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러면 교사는 교육을 담당하는 공무원일까? 또는 (십수 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다는) 일종의 성직으로 봐야 하는 걸까? 양쪽 다 지나친 면이 있다.


저자는 교사를 교육 전문가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이건 교사를 바라보는 외부의 인식만이 아니라 교사들 스스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 그래야 교사 양성 과정에서 내실을 기할 수 있고, 교사들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도 자연스럽게 요구될 것이다. 당연히 다양한 제도들(예컨대 승진 제도)도 여기에 맞춰 재설정되어야 하고.




어느 영역이든 개혁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일은 여기저기서 조금씩 손을 대는 식으로는 오히려 덧나기 쉽다. 워낙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혁은 모두의 반발을 사곤 하니까. 특히 교육 영역은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교육과정을 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정확히 이런 방식의 개혁을 시도해 왔었다.


물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다간 더 큰 카타스트로프를 맞이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피해를 받을지 모른다. 우리는 과연 개혁을 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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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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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지만 오히려 영국을 비롯한 서양에서 좀 더 유명한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신작이다. 제목이 독특한데, 경제학 하면 온갖 통계와 그래프, 수치들이 잔뜩 등장해 보기만 해도 어렵게 느껴지는 영역이라는 선입관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나 역시 그 중 하나다) 좀 더 편안하게 설명하기 위한 방법이다.


저자는 각각의 장을 하나의 식재료 소개로 시작한다. 머리말에서는 ‘마늘’을, 그 외에 멸치, 소고기, 바나나, 고추, 딸기 같은 익숙한 재료부터 오크라, 호밀, 향신료와 라임 등 조금은 이색적인 재료들까지 등장한다. 각 재료들과 관련된 자신의 요리법이나 추억, 그리고 역사가 간략하게 언급된 뒤, 그와 관련된 경제학 원리를 소개하는 식. 덕분에 전체 이야기가 좀 부드러워진 느낌이랄까.




책의 내용은 저자의 앞선 저작들과 유사하게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에 대한 비판 내지는 보완적 주장을 담고 있다. 자유 시장과 경쟁이 경제 번영을 이끈다는 신화가 역사적으로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제시한다.(물론 앞서도 언급했듯 이 내용이 너무 어려워지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입만 열면 ‘자유’, ‘시장’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그들이 말하는 자유라는 건 매우 좁은 개념으로 “기업이 가장 높은 이윤을 낼 수 있는 것을 만들고 팔 수 있는 자유, 노동자가 직업을 고를 수 있는 자유,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자유 등에 한정”(74)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자유가 너무나 중요하다고 여긴 나머지, 그런 자유만 보장해 준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독재자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보다 경제적 번영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심지어 그렇게 해서 정말 경제가 발전되는지도 확실치 않지만) 확신범들이다.


그들은 역사 왜곡도 마다치 않는다. 세계의 경제 발전이 자유시장경제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선전하지만, 실은 역사적으로 경제발전을 크게 이룬 나라들은 보호무역 정책을 통해(170), 그리고 많은 경우 제국주의 정책으로 식민지를 착취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경제발전을 이뤘다(66).


나아가 기본적으로 돈이 가장 중요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원칙과 모순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민영화 논리다. 저자는 이 논리를 ‘1인 1표’라는 민주 사회의 원칙을 축소하고 ‘1원 1표’라는 시장논리를 확장하다는 주장이라고 말한다(35).


저자는 경제발전에는 산업화, 그 중에서도 탄탄한 제조업 분야가 필수적이라고 여긴다(107). 그런데 이 일을 위해서는 단순히 “자유 무역”과 “시장”, “경쟁”만 주입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한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2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기간 동안 정책적인 육성과 보호가 필요하다(118). 또, 국가의 적절한 경제정책의 영향은 다른 요인에 비해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59).




전반적으로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내용이다. 하지만 경제학의 영역에서도 합리성과 사실에 대한 적절한 분석 보다는 일종의 신앙과 비슷한 로직이 작동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유로운 시장을 위해 독재자를 지지하거나, 경제정책이 자신과 다르다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는 식의 만행을 저지르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의 모습을 보면 꼭 사이비 종교에 빠진 이들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최근 전 세계적으로 경제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다만 우리나라의 현 정부가 과연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능력을 갖고 있는지 미심쩍다. 1년 넘게 정권을 잡고 국가경제를 운영해 오고 있지만, 고작 해 놓은 일이라고는 대기업의 법인세를 줄이고, 국가의 재정지출을 규모를 축소하는 식의 고전적 시장주의자들이나 할 법한 작은 정부를 추구하고 있을 뿐이니까.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경제학적 분석은 신화(잘못된 믿음) 또는 기술적으로는 맞지만 왜곡된 방법으로 취합된 ‘사실’ 또는 의문의 여지가 있거나 노골적으로 옳지 않는데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가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질 낮은 ‘재료’를 사용한 분석이라면 그 결과 나오는 경제학 ‘요리’는 잘해야 영양가 없는 음식이고, 잘못하면 몸에 해로운 음식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상한 재료를 가지고 좋은 음식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에 실력 자체도 서툰 요리사가 재료를 다룬다면 음식을 망칠 가능성이 더 높아질 테고. 우리 경제는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아주 전문적인 내용은 아니다. 경제 전반에 관한 기초 상식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읽어볼 만한 책이다. 다만 저자가 애써 소개하고 있는 식재료와 그 장에서 설명하는 경제이론이 늘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좀 무리하게 이어붙인 듯한 느낌이랄까. 뭐 이 정도야 그냥 이야기의 재미있는 도입 정도로 여기고 넘어가도 그만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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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9
막스 베버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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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분야의 고전이다.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볼 때면 이런저런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데, 옛날식 사고의 한계로 인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려 하거나, 오늘날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철 지난 내용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 책을 손에 들기 전에, 이미 이 책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담은 책을 먼저 읽었던 지라, 처음부터 좀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문장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하나 오류가 있으면 단번에 잡아내면서 ‘그럼 그렇지’, ‘역시’ 같은 말을 할 준비를 한 채로. 그런데 저자는 앞서의 내 선입관을 상당부분 흔들어버리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우선 가장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쉽게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은 번역의 이슈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이 주장이 어떤 한계 안에서 주장되는 것인지, 또 자신의 주장과 상충되는 것 같은 다른 의견들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폭넓게 인정한다. 사실 이렇게 써 내려가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우선은 공격적인 태도도 좀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


또, 많은 고전들이 오늘날의 글쓰기 방식과는 좀 달라서 읽어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만드는데 반해, 이 책의 경우 (물론 확실히 예스러운 글쓰기 방식이 묻어나오긴 한다) 의외로 핵심 주제를 파악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건 글의 구성이 괜찮았다는 의미다.




책의 내용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저자는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에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노동관)가 큰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프로테스탄트가 나오기 이전에도 자본주의가 이미 존재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전의 자본주의와 이후의 자본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 기준은 탐욕의 무제한적인 허용을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인 것 같다.


무제한적인 탐욕은 분명 자본주의 발전의 한 동인일 수도 있으나, 필연적으로 전체 시스템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신교의 노동관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금욕주의’는 이런 문제를 제어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꼽는 개신교 노동 윤리는 주로 칼뱅주의와 그 영향을 짙게 밭은 청교도 쪽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 윤리는 애초의 칼뱅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어떤 주장이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특정한 요소가 강조되거나 약화되면서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칼뱅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저자가 말하는 개신교 노동윤리의 핵심 중 하나는 예정론인데, 정작 칼뱅 자신은 이 예정론을 자신의 신학의 말미의 ‘송영’으로 사용하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칼뱅주의자들은 이 주장을 핵심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다.


예정론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지 그렇지 않을 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각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기로 예정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여기에서 일종의 예정 판별법이 생겼다. 내가 어떤 일을 열심히 했을 때 그것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다면(즉 많은 돈을 벌게 된다면) 그건 (구원으로) 예정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사실 칼뱅이 들었다면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반문했을 만한 이야기지만(cf. 60), 아무튼 그런 식으로 칼뱅의 주장은 사용되었고, 이 또한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동인이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다만 이 모든 주장을 하는데 있어서 과학적인 통계나 분석 작업이 부족했다는 점은 지적될 수밖에 없다. 책 전체에 걸쳐서 통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건 처음의 몇 개의 장뿐이었고, 그 중 하나는 헝가리의 개신교인과 가톨릭교인들 사이의 각급 학교 진학률과 관련되어 있는 내용이었는데, 물론 종교에 따라 어떤 분야에 관심을 더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통계이긴 하나, 헝가리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은 아니다.


또, 저자 자신도 언급하듯이, 어떤 지역에서 소수파는 상대적으로 정치보다는 경제 쪽으로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49),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발달한 지역들은 애초부터 어느 정도의 자본이 축적되어 있는 지역이라 자본주의 발달에 유리한 정황을 가지고 있었고, 그 후에 개신교를 받아들인 것(독일의 경우)라는 주장(43)도 무엇보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강한 반론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또 하나,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생각해 볼만 한 부분은, 어떤 지역이 특정한 종류의 개신교가 지배적인 상황이 되었다는 것과, 그 지역에 속한 사람들이 그 신앙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주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에를 들면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가 주류였던 시대 영국의 시민들이 정말로 일상생활에서도 국교회 신앙에 충실하게 살았을까?


오히려 남아 있는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 시민들의 교회 출석률부터가 매우 낮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학적인 내용에 무지하거나, 오히려 교회를 조롱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어떤 지역의 주류 신앙에 따라 그 지역의 자본주의 발전이 달라졌다는 저자의 주장의 타당성은 상당 수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책 후반으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면은, 이 책이 사회학 분야의 고전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역사신학 쪽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개신교 각 분파들의 주장에 관한 세밀한 비교와 대조, 그 차이점들에 대한 높은 수준의 고찰 같은 면들은 훌륭하다. 사실 이 책이 근대의 다양한 개신교 분파들의 노동윤리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면 오히려 신학 쪽에서는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물론 “사회학 분야의 고전” 쪽이 좀 더 유명해 지는 데 유리했겠지만)


이 책의 주장과 관련해 많은 종류의 오해들이 양산되는 경향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개신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경제가 발전했다는, 책의 결론을 아주 살짝 비튼 주장이다. 이 주장은 다양한 차원에서 저자와는 상관이 없는데, 우선 저자가 책에서 꼽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전체 개신교회중 매우 일부(후기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적 신앙)에 한하며, 다른 종류의 금욕주의적 개신교 분파들은 비슷한 노동윤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 개신교 윤리를 만들어낸 신앙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변화를 겪었기에, 오늘날 그 신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신앙이 그 나라의 경제발전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책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저자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여는 특정한 시기, 특정한 지역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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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나애리.조성애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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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유행을 잘 따라가는 인싸는 아니지만, 요새 유행하고 있는 페미니즘에서 나오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신이 어질어질 때가 있다. 그 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용어는 “시선강간”이라는 표현이었다. 무려 강간이라는 무시무시한 범죄명이 붙어 있는 이 용어의 의미는, 그저 어떤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다는 뜻에 불과하다.


가끔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중고등학생들이 자신을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고 동급생들 폭행하거나 학대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걸 자랑스럽게 법적으로 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적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불쾌감을 표하는 것은 자유다. 그리고 그런 불쾌감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걸 ‘강간’과 같은 행동과 동일시하는 건, 그래서 법적인 처벌까지 강제하는 건 우선은 용어의 혼란을 일으킨다. 강간의 정의를 시선에 둔다면, 욕설을 살인이라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를 테러행위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아, 오래 전에 대학교 캠퍼스에서 담배를 피며 여성을 바라보는 행위를 성범죄라고 우겨댔던 어떤 여성들이 있긴 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우리가 하는 말에는 아무런 의미가 담기지 않는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저명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도 같은 부분을 지적한다. 저자는 “불쾌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몇 마디를 강간이라는 단어와 같이 취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36)라고 묻는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에 대한 통계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문맥이 존재한다. “정신적인 압박”을 “육체적 침해”와 동일시하는 조사에 대해 그는 “황당하다”고 말한다. 여성폭력에 관한 높은 긍정응답률은 애초에 잘못된 사고에 기초한 설문내용에 기인한 것이었다는 것.


다시 이야기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페미니스트, 그것도 저명한 운동가이다. 그가 이렇게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에 관해 강한 비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서양 기준으로) 6, 70년대 시작된 평등주의적 페미니즘 운동과 1990년대에 시작한 급진주의 페미니즘 운동 사이의 투쟁 노선의 차이가 그 배경에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잘못된 길”은 급진주의적 페미니즘의 난동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이 두 종류의 페미니즘의 차이는 간단히 말하면, 남녀평등이냐 여성의 특별함이냐의 문제인 듯하다. 이전의 페미니즘 운동이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며,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의 성격을 지녔다면, 최근의, 그리고 현재 주류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은 태생적으로 피해자이며 그런 피해자를 위한 특별대우가 필요하다는 말로 요약된다. 최근의 PC주의의 유행과 함께 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주장은 별다른 비판을 받지 않은 채, 아니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공격하면서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저자가 래디컬 페미니즘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제시된다. 먼저 이 운동은 진짜 희생자와 가짜 희생자를 혼동함으로써 좀 더 급한 투쟁을 간과하게 만든다. 몸에 쫙 달라붙는 짧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의) 남성들을 시선강간범으로 고발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중요한 행동이 되는 동안, 정말로 심각한 차별을 받는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데 들어가야 할 힘과 시간이 낭비된다는 말이다.


또, 래디컬 페미니즘은 결국 언론과 각종 문화 매체에 대한 검열과 삭제라는 형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건 성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감시하는 일종의 전제주의적 행태다. 누군가 불쾌하다고, 상처를 받았다고 말한다면 이제 곧 그것은 금지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최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익히 잘 아는 고전 문학 속 일부 표현이 PC주의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삭제되거나 원래의 단어가 “교정된 채” 새롭게 출판되는 경우도 실제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극단적인 사람들끼리는 확실히 언동이 비슷해 지는 것 같다. 문제는 검열과 삭제를 초래하는 원인이 매우 모호한 어떤 사람들의 기분을 기준으로 하게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가끔은 헷깔리는 바로 그 기분 말이다.


여성의 태생적 피해자됨을 강조하는 건 자연스럽게 남성에 대한 공격으로 운동의 초점이 모아지도록 만든다. 이제는 남성의 폭력을 고발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의무이자 명예가 되어버리는 수준이다. 저자는 “지금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다. 남성적 힘의 남용에 대한 투쟁이 아닌 남성 자체에 대한 투쟁이 될 때, 결국 두 성은 격렬한 대립만 하게 될 뿐이다. 또, 모든 여성이 피해자라는 서사 역시 사실이 아니다.


또, 남성에 의한 폭력에 비해 그 수치가 낮긴 하지만, 여성에 의한 폭력 또한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일부러 눈을 감고 있으며, 자신들의 피해자 서사의 틀에 맞지 않는 일부 여성들(예를 들면 매춘부들)의 주장은 거짓이나 조작된 것으로 매도된다. 그러는 한편 여성의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모성본능에 대한 과도한 추앙을 초래하기도 하고, 남녀 사이의 강한 분리주의는 오히려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라는 비판도 보인다.




저자가 보기에 래디컬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끝까지 어떻게 될지 사고하지 않은 채, 눈앞의 불쾌함을 해소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인 듯하다. 특히 남성을 그저 잠재적 성범죄자로 매도하고, 여성들만의 둥지모임으로써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한,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지적에는 공감이 간다.


끝까지 생각하지 못하니 논리적 모순이 난무한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피해자”라는 주장은 여성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들의 또 다른 구호와 배치된다. 또 여성의 “태생적”인 특징을 강조하려다 보니 임신과 출산과 관련된 모성애적 측면과 여성적인 성격(부드럽고, 꼼꼼하고, 포용적이고 하는 식의)을 부각시키는데, 생각해 보면 이건 임신중절의 권리(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태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뺏는 일)를 주장하는 또 다른 흐름과도 배치되지 않는가.


저자는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두 조류 사이에 끼어서 길을 잃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여성들이 좀 더 이른 시기에 나온, 좀 덜 급진적인 대신 남녀평등을 기초로 한 페미니즘 투쟁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자기비판적인 내용들이 그다지 담겨 있지는 않아서, 또 어떤 한계와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성별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측면에서, 남성에 대한 고발과 여성의 우월함, 혹은 고립된 여성들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한 주류 페미니즘보다는 좀 더 공감의 여지가 많아 보이긴 하다.


페미니즘 안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고, 각각의 주장과 강조점이 꽤나 다르다는 것, 이름에 여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해서 모두 여성을 위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 등 생각해 볼 만한 꺼리를 던져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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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 젤렌스키 대통령 항전 연설문집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지음, 박누리.박상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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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푸틴이 이웃나라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한 지도 벌써 1년이 훨씬 지났다. 많은 사람들은 설마 푸틴이 그런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고 예측했었고, 또 우크라이나에는 세계 2위 군사대국인 러시아의 공격을 막을 힘이 없을 거라고도 예상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 모든 예측과 예상은 틀렸다.


러시아는 끝내 명분 없는 전쟁을 시작했고, 도살자 푸틴 패거리는 마치 6.25 때처럼 개전 후 48시간 이내에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으나 전쟁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은 (물론 일부 부유층은 진작 해외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고, 서방 세계의 지원을 힘입어 최근에는 역공을 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상황 가운데서 주목 받고 있는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다. 아마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새로 알게 된 인물이 아닐까. 카키색 티셔츠를 입고 포격이 한창인 수도 키이우 어딘가에서 국민들을 향해 항전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연설을 끊임없이 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6.25 당시 자기는 제주도로 도망을 가 놓고 국민들에게는 서울에서 뭉쳐 항전하라고 했던 어떤 분과는 사뭇 다르다)






젤렌스키의 연설은 단지 자국민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후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그는 세계 각지의 우호국 인사들 앞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줄 것을 계속해서 호소해 왔다. 물론 단지 그의 연설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서방세계가 군사적 지원을 해준 것은 아니겠지만, 또 그의 연설이 그 우호국의 수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젤렌스키의 연설문 열아홉 편을 모아 놓은 책이다.


연설문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 의미에 대한 통찰이다. 개전 초 일각에서는 코미디언 출신의 대통령이 무능해서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헛소리가 떠돌기도 했다. 모름지기 대통령쯤 되려면 명문대를 나와 일찌감치 정치에서 세력을 형성하거나, 법조계 경력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식의 후진적 정치관에서 나오는 꼰대의식이다.


물론 어떤 사람의 경력은 그 사람의 현재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지표다. 하지만 화려한 경력이 그 사람의 진짜 능력을 가리는 가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수많은 실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가 코미디언이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저 일차원적인 슬랩스틱이나 선정적인 내용으로 눈길을 끄는 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직접 제작과 각본에도 참여하고 꾸준히 사회참여적 메시지도 담아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쭙잖게 법전만 달달 외워 처세술로 높은 자리에 올라 정계에 입문하는 수많은 정치법조인들보다 백배는 나아 보인다.






여기 실린 연설은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청중들을 배경으로 한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기억 속 역사의 한 장면을 자연스럽게 꺼내고, 그걸 오늘의 현실에 오버랩 시킨다. 히틀러의 유대인 인종학살은 유대계인 젤렌스키 본인과 푸틴의 잔악한 민간인 학살과 겹쳐지고, 그런 히틀러를 자극할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렸던 영국과 프랑스의 실책은 정확히 푸틴을 자극할까 두려워하며 무기제공을 주저하는 서방세계의 모습에 덧씌워진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에게 했다는 “벽을 허물라”는 말은, 다시 그대로 적극적인 지원을 주저하는 독일 총리 숄츠에게 하는 말로 바뀐다.


그의 연설은 품위가 있고, 절제되어 있다. 무의미한 어구의 반복이나, 자기도 모르는 용어의 남발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모름지기 국가 지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 정도의 품격은 있어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노골적이지 않다. 그의 연설문에 도움을 주는 비서들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단지 누가 써준 걸 대신 읽는 식으로는 이 정도의 호소력을 갖추기 힘들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선전하고 있지만, 전쟁의 결말이 어떤 식으로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절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덕성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또, 이 큰 위기의 상황에서 젤렌스키 같은 좋은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 또한 분명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부디 학살자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그리고 우크라이나에게는 영광이 있기를(Slava Ukra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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