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
신아연 지음 / 책과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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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고난주간, 우연히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책은 제목처럼, 안락사가 법으로 허용되어 있는 스위스에 다녀온 작가가 그 경험과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은 에세이다.


스위스에 가게 된 동기가 독특하다. 오래 전부터 작가의 글을 읽고 알고 있었던 한 독자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고, 기대수명이 얼마 남지 않으 상태로 큰 고통을 겪고 있던 그는 안락사 신청이 받아들여졌으며 작가가 자신의 그 마지막 여행에 동행해 주었으면 한다는 의사를 표해왔다. 그는 일찍이 호주로 이민을 간 한국인으로, 이 여행에는 아내와 다른 지인들도 초대해 놓은 상황이었다.


처음 만나는 상대와 함께 안락사를 위한 스위스 여행에 동행이라니... 책 초반에는 이 초대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서도 계속해서 고민에 빠지는 작가의 모습이 실려 있다. 사실 누구라고 해도 이런 초대에 응하고 싶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특별히 자신을 지명해 초대했다는 점과 작가로서의 모험심, 즉 이 여행을 통해 뭔가 글을 남길 수 있겠다는(그건 “그”의 요청이기도 했다) 생각이 어울려서 따라나섰던 것 같다.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무겁다. 한없이 늘어지는 준비 과정과, 막상 스위스에 도착해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길들, 그 와중에 지인들을 무심히 배려하는 “그”의 모습. 마침내 당일 일이 진행되고, 돌아온 후에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과 지난 일을 복기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까지 모든 작업이 느릿하게 진행된다.


온라인서점인 알라딘에 이 책에 관한 100자평이 좀 우습다. 하나같이 1점이라는 괴상한 점수를 부여하고 있는데, 물론 이 책이 명작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1점이 부여될 정도의 형편없는 글은 아니다.


주된 이유는 작가의 기독교 신앙을 지나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스위스로 갈 때까지만 해도 종교를 갖지 않았던 작가가, 귀국 몇 개월 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 책을 쓸 때 자신의 신앙을 바탕으로 그날을 해석(자살은 옳지 않다)했던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물론 이런 식의 비난은 별 가치도, 의미도 없는 공감과잉의 결과일 뿐이다.


애초에 돌아가신 분의 삶과 품성에 대해서 작가는 어떤 비난도 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선택 자체가 가지는 종교적 의미에 대해 설명하려 했을 뿐이다. 물론 작가가 선택한 해석이 기독교 전체의 유일한 해석은 아니고, 또 굳이 그 이야기를 여기에 덧붙임으로써 “그”의 죽음에 어떤 평가를 내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게 최선이었나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글쓰기 방식으로 썩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스스로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죽음에 대해 뭐라도 덧붙여야 할(그래서 다른 사람은 가능하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의무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정도 말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못하게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과도한 PC주의나, 죽음에 대해서는 무조건 특정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일방적인 사고에 빠져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돌아가신 분이 굳이 작가를 초청했고, 그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면, 그 방향까지는 뭐라고 쓰던 별 상관은 하지 않았을 것 같긴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괴로운 여행을 결정하고, 그 모든 과정을 지인들과 함께 나누려고 했던 “그”의 생각과 심정에 더 큰 관심이 갔다. 자신이 죽을 날짜를 정하고, 그걸 알면서도 그 길을 향해 나서는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마치 이번 주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그분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걸어가면서 들었던 생각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물론 두 죽음의 의미나 효력이 비슷하다는 건 아니다.)


기독교인들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 아들의 결연하고 당당한 행보 정도로만 여길 때가 있다. 하지만 겟세마네에서의 처절한 기도에서도 알 수 있듯, 그분도 여느 사람들처럼 두려움과 불안, 초조함을 느끼셨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라도 함부로 가볍게 대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오히려 그분이 맞이하신 죽음을 좀 더 생생하게 상상할 때, 우리가 일으킨 죄의 결과의 파괴력에 대해서도 더 실감나게 인식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역시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꽤 아쉽다. 안락사(조력사)의 신학적 문제를 지적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꽤 담담한 시선으로 조력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심리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읽을 만한 내용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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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들과 지평들 -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공공철학
리처드 마우.산더 흐리피운 지음, 신국원 옮김 / IVP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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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특징짓는 사상 가운데 하나가 다원주의다. 근대 이전 사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권위가 주장되던 시대였다. 왕과 황제들의 통치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들도 만들어졌다.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여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고, 동양 각국에서는 유학(교)과 불교가 그 주된 도구였다.


하지만 군주제가 무너지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변형되었던 사상적 기초들의 절대성 주장도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정치제도만이 아니라 사상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고, 이는 언뜻 모두가 공평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민주적인 사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큰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기독교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던 종교가 아니던가. 중세 기간 이 유일성의 독점성을 왕과 황제들에게 빌려준 결과였다. 뭐든 절대성을 주장하는 걸 혐오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는 독선과 오만한 주장을 펼치는 종교, 사상으로 보일 지경이 되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기독교는 이런 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수용한다면 어느 정도, 어떤 모습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두 명의 저자들은 다원주의가 무엇인지부터,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다원주의를 분류/분석하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다원주의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제안한다.


저자들이 지적하는 다원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는 한 마디로 말해 “빈 성소는 비워둔 채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소란 최종적인 권위를 가리키는 비유인데, 다원주의는 그 정의상 성소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체계이지만, 바로 이 주장, 그러니까 어떤 것도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타당성(권위)는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그뿐 아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도 다원주의는 홀로 설 수 없다. 모두가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는 사회를 어떻게 하나로 묶어 서로 협력하고 도울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때문에 기독교를 제거하려고 했던 루소 같은 인물조차 “공동체 축제”라는, 마치 예배와도 비슷한 의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책을 읽으며 얻은 특별한 통찰 중 하나는 다원주의에 대한 분류이다. 저자들은 서술적 다원주의(어떤 현상이 있다)와 규범적 다원주의(어떤 방식을 따라야 한다)를 구분한 뒤, 다시 세 종류의 다원주의(방향적, 연합적, 맥락적)를 나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결합하면 모두 여섯 가지의 다원주의 항목이 나온다.


저자들은 이 중에서 규범적인 방향적 다원주의를 가장 경계한다. 정의상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규범적인), 바람직한 전망으로서의(방향성) 다원주의다. 이런 종류의 다원주의는 우리를 궁극적인 상대주의로 몰아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고, 그건 기독교에 대한 헌신을 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류의 다원주의를 반대해야 할까? 저자들은 맥락적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좀 더 유화적인, 아니 좀 더 적극적인 수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창조 상태의 본래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 연합적 다원성 역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기독교는 하나의 몸이 많은 지체로 구성되어 있다는(물론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교회를 가리킨다) 독특한 연합성에 대한 가치를 일찍부터 인정해 온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공적 영역에서 독선적이고 독단적일 필요가 없다. 물론 결국 어느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하라는 압박에 대항해 자신의 믿음을 고수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영역에서 우리는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감사와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철학과 신학이 교차하면서 꽤나 깊이 주제를 연구해 나가는 책이어서, 읽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다양한 종류의 다원주의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들을 정교하게 분리해 이해하는 것이 문제를 제대로 접근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점이 깊이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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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처럼 하나님은
도널드 밀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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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는 과정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기억이 나지 않을 때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해, 무난하게 성장하기도 한다. 이들의 친구는 대개 교회 안에서 만난 이들이고, 이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삶은 안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교회와 관련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갑자기 하나님을 만난다. 그들의 삶은 소위 “기독교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이 하는 일들도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을 넘나들곤 한다. 이들의 삶은 모험적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 옳거나, 더 좋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그리스도인의 삶이 다양하다는 말이다. 어느 한 가지 모양으로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만들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 저마다의 상황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왔을 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만드는 이미지라는 게 얼마나 빈곤한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이 책의 작가이자 주인공인 도널드 밀러는 두 번째 모델에 가깝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오랜 방황의 시기를 거쳤으며, 히피와 무신론자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그 과정에서도 계속 기독교 신앙 언저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세상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 원인이 자기(그리고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분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열쇠라는 것도 결국 인정했다.


작가에게는 행운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만날 수 있었다. 재정을 교회 자신보다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공동체와 조금은 평범하지 않는 주인공의 신앙 여정을 이해해 주는 친구인 목회자를 만났다.


작가는 차례차례 계단을 올라가는 신앙 성장의 길을 따라 걷지 않는다. 책 제목에도 적혀 있는 “재즈처럼”, 그의 신앙 여정은 연주자 본인만 다음에 어떤 멜로디와 리듬이 나올지 아는, 아니 때로는 그 자신도 정확히 그 끝이 어떨지를 모르는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여기에 나온 신앙여정은 다른 사람에게 본이나 안내로 제시해 줄 무엇은 아니다. 이런 것도 있다는 것일 뿐.


하지만 그런 조금은 다른 모습의 신앙 여정이 또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스테레오타입을 깨뜨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책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는, 공화당(과 그들이 일으킨 전쟁)을 지지하고, 자유주의자들과 게이를 적대시하는 게 기독교의 유일한 모습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신앙전통 안에 있는 내가 보기에) 약간 우려스러운 부분은, 역시 작가에게서 보이는 정통 교리를 조금은 가볍게 여기는 태도다. 그런 것 없이도 얼마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오히려 그게 없을 때 뭔가 더 유익하다는 뉘앙스.


물론 우리는 교리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교리는 일종의 난간으로, 우리가 계단을 오를 때 위험하게 떨어지는 걸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저층에서 오르내릴 때에야 난간이 굳이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면 난간을 무시하는 건 만용이다.



총 스무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게 논리적 구성을 따라 차곡차곡 쌓아올려지는 형식은 아니다. 마치 즉흥재즈 연주처럼, 읽으면서도 다음 장은 어떤 내용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흥미로운 부분.


아무 데나 들고 펴도 읽을 만한 내용이고, 또 그와 다른 신앙 전통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평소 놓치고 있던 부분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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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3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돈은 중요하다 - 거룩하게, 가치 있게, 슬기롭게
폴 스티븐스.클라이브 림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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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본격적으로 돈이라는 주제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책이다. 물론 이런 내용이 처음 담긴 책은 아니지만, 단행본 한 권 전체를 이 주제에 온전히 쏟아서, 성경의 언급만이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학 차원에서 분석하는 책은 생각만큼 흔하지 않다(대개는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성경구절을 쭉 뽑아놓고 개인적 해석을 덧붙이는 정도다).



책의 첫 두 장은 공저자 두 명이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싱가포르의 가난한 가정 출신의 플라이브 림과 캐나다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폴 스티븐스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자랐지만, 공통적으로 돈이 가진 위험한 성격을 인식하게 되었다. 돈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모두 ‘문제’다.


3장은 돈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인데, 우리는 흔히 물물교환 단계의 경제가 서서히 발전해서 돈이 만들어졌고, 그 결과 효율적인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식의 설명을 경제학 교과서에서 만난다. 이 설명에서 돈이란 ‘가치중립적인 교환의 매개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저자들은 돈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신전이었다고 말한다. 돈은 고대 근동의 신전에서 기록하던 장부의 단위로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은행은 신전이었고, 신전의 서기들은 신전에 들어오고 나가는 다양한 물품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그 물품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표준 척도를 만들었고, 이것이 돈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돈의 유래에 대한 이 설명이 중요한 이유는, 이 설명이 옳다면 돈이란 처음부터 그 속성상 영적인 것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돈에는 영혼이 있다고, 고대 제사장들이 돈에 부여한 마술적 성질은 사라진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돈은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4장에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해석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것과 세속의 것을 구분하고 각각의 영역을 나누어 바치라는 식의 이원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가진 돈의 10%를 헌금하고, 30%를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내 뜻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 교회는 모든 시간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믿었다.


5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이 실려 있다. 그것은 놀라운 생산력 향상을 이끌어냈지만, 사회 전체를 돈의 노예가 되게 만드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열쇠라고 지적한다.


6장에서는 청지기 비유를 놓고 씨름한다. 주인에게서 쫓겨날 지경에 처했던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그 일부를 탕감해줌으로써 인심을 얻어 후사를 도모했다는 에피소드다. 저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이웃을 금전적으로 사랑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끌어 낸다. 그건 돈으로 친구를 사라는 뜻이 아니라, 이웃을 돌보는 데 돈을 사용하라는 명령이다.


이와 관련해서 7장에서는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새겨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8장에서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예가 제시된다.


9장에서는 이른바 ‘번영복음’을 다룬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길 원하신다”로 상징되는 이 사이비성 짙은 유사 기독교가 어디서 왔는지 그 사상적 기원을 밝히고, 이에 대한 반대논의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핀다. 그리고 마지막 10장에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하늘에 쌓기 위해 할 수 있는 네 가지 실천을 제안한다.





돈은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로 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사람들이 돈에 얼마나 빠져있는지, 그것을 얻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돈에는 확실히 뭔가 강력한 힘이 있는 것 같다. 마치 마약이 단순한 화학물질이 아닌 것처럼.


기독교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돈은 단순한 복의 증거 정도로 인식될 수 없다. 애초에 그것이 하나의 숭배 대상으로 시작되었음을 인식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신앙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차원에서 소위 번영복음은 기독교를 해치는 독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생각해 볼만한 지점을 여럿 제시해 주긴 했으나, 공저자가 쓴 책들이 흔히 그렇듯 각 장마다 긴밀하게 흐름이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도 살짝 준다. 어쨌든 책이라는 건 두 사람이 동시에 문장을 써 내려갈 수는 없는 거니까, 각자 다른 장을 맡아 쓰거나 했을 텐데, 그게 한 사람이 전체적 맥락을 잡고 쓰는 것만큼의 통일성을 갖추기엔 어렵다.


또 돈의 본질에 관한 분석이 꽤 흥미진진했던 데 반해, 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오늘날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는 전통적인 교훈들(자선이나 선하고 신앙에 유익한 일에 사용하는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새롭지 않다는 게 문제인 건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훌륭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니까.


분석과 적용이라는 두 영역을 놓고 볼 때, 이 책은 분석이라는 차원에서 읽을 만하다. 특히 책 후반의 번영복음에 관한 간략한 분석은 꽤 도움이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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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6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가방 2023-03-18 14:30   좋아요 0 | URL
아, 가능하면 참석하겠습니다!

stella.K 2023-03-18 14:35   좋아요 0 | URL
그래요. 아직 시간 있으니까 상황봐서 참석 여부
알려 주세요. 가급적 참석하시는 걸로~ㅋㅋ
 
루미나리스 - 그리스도교를 밝게 비춘 스무 개의 등불, 바울부터 로메로까지
로완 윌리엄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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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전, 혹은 위대한 인물들에 생애를 요약한 책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1세기 살았던 고대 로마시대의 그리스 출신 저술가인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은 유명하고, 그보다 한 세대 후의 작가였던 수에토니우스는 로마 제정 초기 황제들의 일화를 담은 황제전을 써냈다.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이쪽은 성경 속 인물이라든지,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거나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그 주요 저술 대상이 되었다. 일부 초기 저작들는 외경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자주 낭독되기도 했고, 성인열전과 비슷한 식으로 여러 명의 인물들을 묶어서 담기도 했다.


이 책은 잘 알려진 성공회 신학자인 로완 윌리엄스가 쓴 일종의 성인열전, 또는 신앙인 열전이다. 가장 먼저 소개되는 건 바울이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나 켄테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에크하르트, 틴들처럼 교회사에서 주목받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기도 한다. 또, 19~20세기 활동했던 기독교인들도 적잖이 등장하는데, 윌버포스나 찰스 디킨스 같은 인물은 좀 유명하지만, 세르게이 불가코프나 에디트 슈타인, 에티 힐레숨 같은 인물들은 조금 낯설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이런 인물들의 일생을 요약하고, 그들의 사상과 글과 말 등을 정리하는 식의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전제한 채로, 그들의 삶에서 저자인 윌리엄스가 생각하기에 특별했던 요소들을 골라서 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각각의 인물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정리되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들을 모았다고도 볼 수 있다. 다분히 윌리엄스의 신학적 사고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더듬어 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에 실린 내용 중 일부는 저자가 각각 다른 자리에서 했던 강연이나 글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켄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글은 BBC 라디오에서 했던 강연에서 가져온 것이고, 에크하르트나 크랜머에 관한 내용은 서로 다른 교회에서 했던 강연, 틴들에 관한 글은 저자가 앞서 출판했던 책 속 한 부분이다.


물론 잘 편집되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잡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또 그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다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도 현대 인물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부족하다보니 살짝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고.


흥미로운 건 이 책의 바로 앞에 읽었던 수학에 관한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시몬 베유라는 이름의 여성 철학자가 이 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이렇게 연속으로, 그것도 전혀 다른 장르의 책에서 동일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 경험은 매우 드문데, 내친 김에 좀 더 파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깊은 신학적 사고와 유려한 문체, 그리고 훌륭한 번역자의 작업이 더해져서 미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 잔뜩 담겨있다. 이런 게 전 세계 성공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저자의 품격이다 싶다.


다만 조금은 현학적이라는 느낌도 동시에 들기도 하는데, 이건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우리가 매일 뉴스에서 접하고 있는 그것들과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뉴스라는 게 언제나 자극적인 것들만 모아서 가공하는 나쁜 버릇이 있긴 하지만, 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지금’을 보여주는 중요한 매체이니 무시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물론 이 책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하는 책은 아니다. 교회의 과거와 가까운 어제를 살피면서 우리가 오랫동안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안내서에 가깝다. 언제나 이런 목표를 확인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 많은 돌발현상들이 일어나겠지만, 목표를 잃지 않으면 결국 도착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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