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인문 기행 - 동해 바닷가 길에서 만난 우리 역사 이야기
신정일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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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육아때문에 여행을 못하고 있지만, 난 본투비 여행러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국내일주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돌아다닌 면도 있다. 지금까지 돌아다닌 지역을 지도에 체크하면 우리나라(정확히는 남한)의 약 80%정도는 다 찍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이런 성향이 어디서 왔는고 하면,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나를 차에 타우고 전 지역을 쏘다닌 부친의 영향이 오백프로라고 할 수 있다.



평생을 운전을 하신 내 아버지는 휴가철이 되면 우리가족을 태우고 여행을 다녔다. 정확히는 업무로 인해 지방을 내려갈때, 우리 가족 모두 같이 가는 거라고 해야하나? 아버지 일이 끝나면 그때부터 여행 시작이었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되면, 도착지는 대부분 동해였다. 아버지 차로 동해 해안길을 달리며 차에서 먹고자고 하면서 말이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캠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튼, 그렇게 해안길 여행을 자주 하면서, 동해안을 제집 드나들듯이 다녔다.



그래서 그런가? 다 커서는 신랑과 둘이서 소소한 짐만 꾸려서 해안 여행을 자주 했다. 둘다 직장인이라 장거리 여행은 불가능하기에, 해안길 여행을 할 때는 지역 몇 개씩을 묶어서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여행은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이런식으로 여행을 다녔다. 예컨데 동해로 치면 이번 여행 때는 부산부터 경주까지, 다음 여행은 (강원)고성에서 속초까지 뭐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해안길 여행을 하다보니 어느새 서해안, 동해안 길은 완전히 섭렵했다. 아, 물론 트레킹이 아니라 자동차 여행이었지만.



요즘은 서해안은 서파랑길, 동해안은 동파랑길이라고 해안 트레킹 코스가 개발되었는데, 내가 여행을 한창 다닐때만해도 이런 제대로 된 트레킹 코스가 없었다. 그저 ‘무슨무슨 해안산책로’ 이런 형식이었을뿐. 그래서 조금 아쉬운면도 있다. 왜 해파랑길 트레킹코스는 내가 한창 여행다닐 때는 없었나!!!! 근데 이게 또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파랑길(동파랑길, 서파랑길) 트레킹코스가 생겨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책의 저자 덕분이었다는 것. 허허허허. 내가 여행을 조금 더 늦게다녔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하하...ㅋㅋ






이렇게 TMI가 길었던 이유는 『해파랑길 인문기행』 이라는 여행에세이를 리뷰하기 위함이다. 여름휴가책으로도 손색이 없는 이 책은 말그대로 파란바다가 넘실대는 동해안! 해파랑길 트레킹코스를 완주하는 여행에세이다. 거기다가! 그냥 여행에세이도 아니고 무려 ‘인문기행’ 여행책이다. 동해안 해파랑길을 그냥 무작정 걷는게 아니라, 발길이 닿는 그 곳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어우러져있는 것이다. 완전 내 여행취향이랑 딱 맞는 여행에세이가 아닌가!



난 동해안 지역은 단 한 군데도 빼먹지 않고 다 섭렵을 하고 왔던 경험이 있고, 지금은 해파랑길로 명명된, 당시에는 그저 해안산책로였던 트레킹코스를 꽤 여러구간 걷고 오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기대되었으며, 실제로 이 책은 내 기대에 오백프로 부응했다. 분명 내가 다녀왔던 지역이고, 내가 두 발로 걸었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르는 역사적 지식들이 저렇게나 많다니! 역사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나도 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물론 일반인에 비해서만), 역시나 나는 풋내기였다. 이 책을 들고 다시 동해안 여행을 다녀야 할 판. 하하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동해안은 정말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원)고성이나 삼척, 영덕, 부산 앞 바다는 똑같이 ‘동해’라 불리우는 같은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맛과 멋을 가지고 있기에 어디를 가든 특색있는 동해여행을 할 수가 있다. 이번 여름휴가 여행지로 동해안에 인접한 그 어떤 지역을 가든지간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을 들고가야 그 재미가 보장된다!




 




이 여행에세이 속 저자의 동해안 해파랑길 트레킹은 부산에서 시작해서, 휴전선이 있는 강원도 고성에서 끝난다. 물론 어떠한 한 시점에 이 기나긴 해안길을 정복한 건 아니다. 내 여행방식이 그랬던 것 처럼, 저자 역시도 일정기간동안 일정구간을 걸었다. 그렇게 동해안 해파랑길 트레킹을 완주한 것이다.



아래는 저자의 첫번째 트레킹 부산에서 시작해서 울진에서 끝나는 9일간의 첫번째 여정 중 일부다.



부산부터 울진까지



 


이곳 연화리 일대에서 나는 미역이 명물이다. 기장 미역은 다른 어느 바다에서 채취한 것에 비해 잎이 두텁고 넓으며 파릇한 빛깔과 윤기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지역 돌미역이 『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과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임금의 밥상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이곳에 곽전이라고 불리던 유명한 미역밭을 두어 직접 관리했다. (…) 당나라 사람인 서견은 자신의 저서 『초학기』에 “고구려인들은 고래가 몸을 풀고 미역을 뜯어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따라 미역국을 해산 식품으로 먹는다”라고 고구려 사람들의 독특한 해산 풍습을 기록했다. p 025~026



죽성리에는 죽성리 왜성이 있다. 마을 이름을 따서 ‘두모포 왜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후퇴한 왜군이 장기전 태세를 갖추기 위해 쌓은 성 중 하나다. 당시 동원된 인부 수만 해도 약 3만 3천명 정도이다. 이 왜성에 올라서면 두모포만 전체를 아우르는 해안 절경을 조망할 수 있다. 이 성에 머물렀던 왜군들은 임진왜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특히 기장과 경남 일대 도공들이 이 왜성으로 꿀려와 결국 왜군들과 함께 일본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p 027



기장미역이 부산에 특산품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기장미역이 무려 고구려 때 부터(!!!) 유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이정도면 지자체의 특산품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특산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건 뭐. 천 년을 훌쩍 넘는 미역 사랑이 아닌가?!




 


 


동방섬, 새뜸섬, 고래 아구리섬, 질무섬 등 크고 작은 섬들에 시선을 두고 걷다 보니 울산시 구류동이다.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떤 하곡 사람 박윤웅에 얽힌 일화가 많은 지역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박윤웅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후손으로, 신라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왕건의 고려 창건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한 공을 높이 평가한 왕건은 박윤웅의 고향을 부로 승격시키고, 구류동 앞바다의 소출이 좋은 몇 개의 바위에서 채취하는 미역 일부를 박윤웅에게 세금처럼 바치도록 했다. 지금도 그곳 바위에는 ‘윤웅’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p 047



우리의 발길은 울산광역시의 마지막 마을인 북구 신명동에 이른다. 이 지역에는 신라시대 박제상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 그의 아내와 딸들은율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산마루 치술령에 올라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으나, 박제상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내린 그들은 전설의 새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내는 치조라는 새가 되도 딸은 술조라는 새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매일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렸다는 산마루가 경북 경주시 외동읍 내동면과 경상남도의 경계지점에 있는 치술령이다. 그리고 모녀가 서서 기다렸다고 알려져 있는 망부석이 있다. 뒷날 사람들은 박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라고 부르며 치술령 기슭에 신모사라는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냈는데…. p 049



부산에서 시작한 미역이야기는 울산에서도 ing!!



신라시대 박제상 이야기는 워낙에 유명한지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여신 중 하나인 치술신모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엮어볼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지? 물론 현재는 신모사도 사라지고, 제사도 사라졌다지만.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와 치술신모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을 두고 보았을때, 대체로 박제상만 알고 그의 부인인 치술신모에 대한 내용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게 조금은 씁쓸하다.






 


읍천리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천연기념물이자 명승이 발견된 것은 2011년이었다. 내가 2007년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19일 동안 걸을 때는 근처 군부대에서 ‘민간인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표지판을 세워놓아 들어가지 못하고, 7번 국도로 돌아갔다. 그 뒤 『동해 바닷가 길을 걷다』라는 책을 펴낸 후에 문화체육관광부에 나라 안에서 제일 긴 도보 답사길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 길이 이후에 ‘해파랑길’로 명명되면서 나라 안에 아름다운 길로 자리잡았다. 그 길을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다시 걷게 된 2011년 봄, 경주시 양남면 읍천항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초소에 군인들이 없어서 들어갔는데, 유레카!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p 054



그 뒤 읍천리의 주상절리는 국가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했다. 전국의 수많은 사진작가의 사진 속에 담겼으며, 지금은 그 일대가 대처가 되어서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중국 귀주성의 만봉림이나 장가계가 뒤늦게야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과 같이 해파랑길을 제안한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때문에 알려진 명승이다. p 055



봉길리 하봉 부근 소나무 우거진 숲길로 들어서 한참을 걸으니 수제마을이다. 봉길리 북쪽 수제마을은 예부터 가뭄이 들면 경주부윤이 마을 북쪽 해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마을 동쪽으로 약 100m거리 바다에 대왕암이라고 부르는 문무왕 수증릉이 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릉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p 057



경주시 감포읍 이견대 아래 위치한 대본리, 그 남쪽으로 큰 나루가 있었고, 동북쪽 독촌산에는 봉우재가 있는데 그 재 밑에 ‘용의 돌’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동해를 바라보다가 그 바위에서 용이 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 조’에 이견대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다. p 061



읍천리 주상절리!!! 진짜 저 주상절리는 너무나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꽤 오랫동안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얼마나 많은 천연기념물이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라는 제한으로 인해 숨겨져있을까? 정부 차원에서도 몰랐고, 이 책의 저자가 발견하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서 천연기념물로 지정까지 할 정도이니.



경주 문무왕릉과 이견대, 감은사지는 더 이상 모르는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왠걸. 그럼에도 모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 진짜 경주 역사 이야기는 정말 까도 까도 끝이 없구나!




 


뇌성산 뒤쪽에 있는 성동리 하성마을은 영천 황보씨 마을이다. 1454년 단종 2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당시 영의정이던 황보인의 삼대, 곧 그 자신과 그의 후손 다섯 명이 수양대군의 칼날에 희생된다. 그때 황보인 집안의 늙은 여종이 황보인의 젖먹이 손자를 물동이 안에 감춰서 도망친 뒤 이 땅 동쪽 끝, 구룡포에 들어와 살며 황보 씨의 맥을 잇고 마을도 일군 것이다. 마을 남쪽으로 광남서원은 황보인과 그의 아들 석, 흠 형제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순조 31년에 사액을 받았고, 광무 4년인 1900년에 복원한 뒤 1941년에 복설했다. p 073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상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피살된 그의 시신은 청나라 정부를 통해 국내로 이송되어 양화진에서 육시처참형을 당한다. 그의 왼쪽 팔이 장기곶(호미곶) 앞바다에 내던져졌는데, 그때가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었던 1894년 갑오년 5월이었다. 이곳을 투기 장소로 정한 이유는 동해로 돌출되어 있는 이곳 지형에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p 083



포항의 향토연구가 박일천 씨는 연오랑과 세오녀로 상징되는 이 집단을 신라 초기 ‘근기국’으로 불리던 부족국가라고 설명했다. 진나라 멸망 뒤에 동쪽으로 이주해 온 세력 중의 하나로, 이들 부족에서 베 짜는 기술을 신라에 전해주었으나 신라가 강성해지자 무리를 지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지금도 영일 지방에는 줄줄이 이어 수평선 위를 지나가는 행렬을 지칭해서 “왜배 가는 것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아득한 옛날 이 부족들이 가축과 가재도구를 싣고 수평선 저쪽으로 왜 나라를 향해 줄줄이 사라져 가던 모습에서 유래된 표현이라고 한다. p 088



현재 포스코가 자리 잡은 곳에 대송정으로 유명한 조선시대의 역, 대송역이 있었다. 대송정은 동쪽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소나무를 많이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그 숲 앞에 흰 모래밭이 있으니 경관 좋은 해수욕장을 이루었으리라. 하지만 공업단지 조성으로 그 풍광은 사라졌고, 동촌 남쪽으로 부련사 라는 절집도 사라진 지 오래다. 포스코가 들어서 있는 포항시 남구 송내동 주진리에 조선시대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주진원이 있었으나, 그 역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p 091



난 분명 포항 호미곶에 가서 상생의 손 동상을 보고 왔다. 그때는 약간 흉물(?)이라는 느낌 말고는 딱히 별 생각이 없었더랬다. 그런데.. 포항 호미곶에 김옥균의 왼쪽 팔이 버려졌다니? 이 사실을 알고 나니, 호미곶 상생의 손 동상이 좀 다르게 보이는 건 나만 그런가. 왜.....왜 하필 호미곶에 버려진게 김옥균의 팔인가;;;;; 다리도 아니고 목도 아니고, 이거 참 묘한 우연이네?




 


영덕 지방에서 가장 큰 항구인 강구항은 경치가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영덕 대게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4-5월까지 이어지는 대게 철에는 수많은 대게잡이 배들이 항구로 집결하고 위판장이 운영되며, 일명 ‘대게 거리’로도 불리는 식당가도 3km나 이어져 있다. p 112



동해 바닷가 어촌인 영덕읍 노물리에서는 지금 미역, 조개, 새우 등이 주로 잡히지만, 조선시대에는 물개를 잡아 나라에 진상했다고 한다. 방어가 많이 잡혔다는 방아짬, 돌매라는 사람이 미역을 따던 돌매방우, 상어 비슷한 물고기인 지투가 많이 잡히던 지투짬 등 노물리의 아름다운 옛 지명을 통해 이 지역에 해산물 종류가 다양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풍무한 어종 때문이었는지, 궁벽진 이곳까지 광대들이 자주 찾아들어서 광대에 얽힌 지명도 많이 남아있다. 광대가 줄을 타고 재주를 부렸다는 강대 줄탄모기 고개, 광대들이 가무를 즐기며 놀았다는 깨뭇개도 있다. p 115



지명의 유래로 그 지역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걸 좋아라하는 편인데, 이야. 영덕 노물리의 지명은 정말 놀랍다. 바닷가니까 해산물 종류가 다양하고, 그에 따른 지명이 생성된건 이해가 되는데.......광대라니! 전혀 생각치 못한 지명 유래라서 그런가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광대로 인한 지명 유래가 생길정도면, 영덕 해안가 지역이 꽤나 상업적으로(?) 발달했고, 시장도 발달했었다라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고. 



이래서 사람은 어딜 가서 뭘 보든, 조금이라도 더 알고 봐야해!





 


대진항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진 해수욕장이다. 이곳은 해안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특히 관어대 일출이 빼어나다. 관어대는 영해면 괴시리에 위치한 조망대다. 그려 말 문신 목은 이색이 외가인 호지마을에 왔다가 바닷가 상대산에 올랐는데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바닷물이 아주 맑아서 물고기가 뛰노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고한다. 그 모습에 이색은 이 산을 관어대라 이름 붙이고 글을 남겼다. (…) 이색이 살았던 괴시리는 원래 호지마 또는 호지촌이라고 부르던 곳이었으나,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온 이색이 이곳 지형이 중국 괴시와 흡사하다며 붙인 지명이라 한다. p 127



대진항에서 덕천, 고래불로 이어지는 해수욕장. 바다에서 바다로 이어진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어보자. (…) 한국의 포경지, 고래불 해수욕장. 고래불은 병곡면 병곡리에서 휘리리까지 동해 바다를 따라 약 4km에 이르는 긴 모래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예전에 고래를 잡았다고 한다. p 128



금곡 북쪽으로 서낭당이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칠보산 토지지신 골매기님’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소원 성취에 매우 영검하다고 한다. 유금남서쪽으로 선덕여왕 시절 창건된 유금사라는 사찰이 있고, 유금 남쪽 도리봉 위로 마고할미 집터도 있다. 경상북도와 강원도 사이에 도계를 이루는 지경 마을을 지나 울진군 후포면에 이른다. 드디어 첫 번째 일정긴 1구간 여정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온 몸이 아프다. p 130



목은 이색의 흔적을 울진에서 찾게 될 줄은 또 몰랐다. 대체 난 울진에서 뭘 보고 온건지..ㅋㅋㅋ 울진 대게만 먹고 왔나. 허허 이거 참. 나도 나름 울진에서 여러곳 답사도 하고 그랬는데^_T. 더군다나 다른 지역이긴하지만 목은 이색의 흔적이 있는 곳도 찾아 다니긴 했었는데. 정작 울진은 생각도 못했다. 심지어 목은 이색이 지명까지 바꾼 곳인데..허허허..



내가 가봤던 부산에서 울진까지, 저자가 걸었던 부산에서 울진까지의 갭이..너..너무 크니까 ㅋㅋㅋ 이거 뭐 정말 내가 가봤던 곳이라고는 생각치 못하겠는데? 어휴, 안되겠다. 이번 여름은 글렀지만, 내년 여름휴가는 뿡뿡이와 함께 이 책을 들고 동해 여행을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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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제국 멸망 후 르네상스가 도래하기까지의 천 년. 그 기간을 우리는 중세시대라고 배웠다. 그리고 대표적인 폭력과 억압의 시대, 모든 문명이 죽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아마 중세를 관통하는 두 가지의 키워드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때문일 것이다. 오롯이 이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 우리는 중세 천년에 ‘암흑기’라는 굴레를 씌워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이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만을 놓고 보았을 땐, 중세는 분명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죽음만 있는 어두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중세의 천 년을 고작 저 두 가지의 키워드만으로 재단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의도적으로 중세를 폄하하기 위해 한 일은 아닐까? 



시작과 끝은 제멋대로이다. 시작과 끝은 화자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틀이다. 그동안 중세 세계는 그림자에 가려진 채 어렴풋하게만 이해되었고, 고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대상으로, 결국에는 우리가 바라는 현대 세계의 대립항으로 여겨졌다. 이 책에서 우리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중세가 “암흑시대”였다는 수 세기에 걸친 신화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 410년에 일어난 로마 약탈, 476년에 벌어진 서쪽의 “마지막”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 사건 같은, 고대와 중세 사이의 전통적인 전환점들은 일단 잊자. 만약 중세가 존재했고 그 시작과 끝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굳이 쇠락이나 암흑, 사멸을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이 빛나고 거룩하고 고요한 공간에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p 011



분명한 사실은 당대의 추악한 정치적 혼돈과 전쟁에 낙담한 14-15세기의 이탈리아인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 닿는 향수 어린 연결고리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1,000년에 이르는 지난 역사와의 연관성을 끊기 위해서 로마와 그리스라는 먼 과거를 활용했다. 이후 18세기와 19세기 내내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지식인들은 백인성이라는 관념이 유럽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한 역사를 찾아나섰다. 그들은 중세와 그리스 로마의 연관성, 그리고 중세 정치체들의 독립성과 독특한 전통에 주목하면서 중세의 원형 국가들이 유럽 열강의 근대적 기원에 해당하는 유용한 과거라는 점을 발견했다. p 015



우리가 알고있는 ‘암흑기’ 중세라는 이미지는, 근대 유럽 열강에 의해 만들어졌다. 근대를 살던 유럽 제국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빛나는 현재를 “서양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정립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양문명 우월주의로 인해 유럽 열강들은 자신과는 다른 나머지 세력들을 ‘야만인’으로 보았고, 중세적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화해야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세는 더더욱 야만적인 시대, 어둠의 시대, 문명이 없는 시대로 여겨졌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유럽의 ‘중세’는 암흑기라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 되었다. 오죽하면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매체들마저도, 중세를 암흑기로 그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이미 세계에 만연하게 뿌리내린, 암흑기 중세라는 이미지를 탈피시키기 위해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왠만큼 해서는 암흑기 중세라는 뿌리깊은 인식을 뒤집긴 어렵다. 그래서 저자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탈리아에 위치한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였다.



‘갈라 플라키디아’.


진짜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름인지라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왜 수많은 유명인물들을 놔두고, 하필 역사적으로 이름의 가치(?)가 조금 뒤떨어진 사람이 중세의 시작으로 선택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벗뜨, 이 책을 읽고 나니 이해가 갔다.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한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중세 천 년간의 사회상을 짧게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녀의 삶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암흑기가 아닌 “빛의 시대” 중세를 말하기 위해,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라벤나에 있는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의 예배당으로 되돌아가자. 기원후 5세기에 지어진 이 예배당은 황후의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는데도 오늘냘 영묘로 알려져있다. 최근들어 학계의 동향이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는 아들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잡았을 때와 관련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 관한 역사서의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다. 중심이 되는 것은 남자, 피, 전투이다. 그러나 이 여성과 이 공간을 중심으로 관점을 재구성하면, 우리는 중세 유럽의 매우 색다른 “출발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p 023



그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에 이탈리아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향했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이탈리아에서 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결국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이탈리아의 도시 라벤나에 머물던 그녀는 423년에 어린 아들의 섭정이 되어 서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렸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남녀를 불문하고 지난 500년간 누구 못지않은 로마 통치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45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제국은 위기와 과도기를 겪고 있었지만, 그 위기가 종류와 정도의 측면에서 이전에 로마를 엄습했던 위기와 꼭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로마에는 예전부터 늘 파벌싸움이 있었고 외부의 위협도 언제나 존재했다. p 024



갈라의 인생에는 여전히 왕성하게 살아 숨쉬지만 확실히 과도기를 겪던 로마 제국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은 새로운 종교와 민족들이 기존의 관념, 풍습과 통합될 시대의 무대를 마련하는 복잡한 이야기이다. 새로운 형태의 황제권을 배경으로 온갖 부류의 통치자들이 다양한 기독교인 집단이나 종교 지도자들과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통해서 정통성을 주장했고, 그런 식의 황제권은 지중해 세계 전역과 갈리아 지방의 대부분에서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새로 출현한 이민족들은 로마의 통치 세력인 최상류층 가문들과 동맹을 맺는 데에 열중했고, 로마의 전통을 받아들였다. p 038



“제국”으로서의 로마는 변했지만, 로마는 예전부터 늘 변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변화는 처음부터 로마 이야기의 일부분이었다. 권력의 중심지는 바뀌었다.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분열했고 연합했고 다시 분열했다. 반면에 로마가 “멸망했다”는 관념은 동질성 개념, 즉 역사적인 평형 상태 개념에 기댄다. 아주 오래된 이 관념은 중앙집권화된 근대 국민국가의 원형을 가정하는데, 그 이상적인 국민국가는 고대의 실제 현실보다는 에드워드 기번이 살던 18세기 대영제국과 훨씬 더 비슷하다. p 039



암흑기라고 배웠던 중세 천 년은, 그 이후 우월하다 자부하던 근대 서구 열강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여러 인종이 교류하고 있었고, 수많은 종교 문화가 발달했으며, 그에 따른 멋드러진 종교 건축물들이 곳곳에서 지어졌고, 어느 왕조든 근대 서구열강과 견주었을 때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은 권력투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중세의 시계바늘은 어느 한 곳에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았다면, 그 누구도 중세가 암흑기였다고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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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8-0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중세의 교회는 오직 유일신인 하느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율법으로 인간들(서민)의 삶을 지나치게 통제함으로써 핍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에 인본주의 입장에서는 그 때를 암흑기라고 평가한 것 같아요.
 
베트남 셀프 트래블 - 2023-2024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25
정승원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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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이 끝났다. 막혀있던 하늘길이 열렸고, 전 세계적으로 해외여행이 폭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하루가 멀다하고 해외로 떠나고, 들어오는 비행기들이 이/착륙 하고 있다. 심지어 곧 있으면 여름휴가 시즌! 이미 진즉에 여름휴가 시즌에 맞춰서 항공권을 발매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만약 이번 여름휴가로 베트남 여행을 계획했다면! 베트남 여행책 『셀프트래블 베트남』을 추천한다. 진짜, 정말, 베트남 여행에 꼭 필요한 모든 정보가 다 있다. 베트남 전 지역에 대한 지도는 기본이고, 관광지(휴양지), 맛집, 호텔, 쇼핑몰 기타 등등등. 정말 없는 정보가 없다.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베트남의 최신 정보를 닮은 정말 따끈따끈한 베트남 여행책이라는 것.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해외 주요 관광지 및 맛집들 중 폐업(?)하거나 혹은 서비스 질이 똑 떨어지는 등 많은 게 변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역시 다를 바가 없기에, 부디 여름휴가로 베트남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최신 개정판인 『셀프트래블 베트남』을 읽어보시길!



베트남, 어디까지 가봤니?


베트남은 북부에 위치한 수도 하노이에서 경제, 문화의 수도 호찌민 시티까지 비행기로 2시간, 기차나 버스로 2일이 걸릴 만큼 큰 나라다. 하지만 ‘베트남’ 하면 생각나는 곳은 ‘하노이, 하롱베이, 호찌민 시티, 다낭’ 정도. 최근 나트랑도 가족 휴양지로 입소문이 나고 모 항공사의 적극적인 광고 공세가 시작되면서 베트남 전역의 숨은 진주 같은 관광지들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이 주목해야 할 베트남 관광지는 어디가 있을까? p 024




01. 하노이: 베트남의 수도. 베트남의 역사가 살아 있는 관광지와 베트남 최고의 박물관이 모두 모여 있다.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디자인의 제품들로 쇼핑마저 즐거운 곳.

02. 사파: 베트남 북단에 위치한 고산지대 소수민족 거주지. 복잡한 도심을 떠나 푸른 자연으로 떠나는 하이킹족들에게 각광을 받는 곳.

03. 하이퐁: 베트남에서 3번째로 큰 도시. 하롱베이와 깟바섬을 오갈 때 방문한다.

04. 하롱베이: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바다 위 크루즈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

05. 깟바섬: 하롱베이의 상위호환! 호핑투어를 통해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다는 것은 물론이오, 깟바국립공원에서 트레킹까지 가능하다.

06. 닌빈: 육지의 하롱베이. 강 위를 배를 타고 다니며 기암괴석을 구경할 수 있다.

07. 퐁냐케방: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퐁냐케방 국립공원은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카르스트 지형이다. 스릴만점인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는 곳!

08. 후에: 한국의 ‘경주’와 같은 세계문화유산 도시이자, ‘파주/철원’처럼 DMZ 투어를 할 수 있는 곳.

09. 다낭: 요즘 핫하게 떠오르는 동남아의 휴양지. 장장 30km의 해변을 따라 고급리조트들이 늘어서 있다.

10. 호이안: 19세기 가옥들이 보존되어있는 구 시가지. 역사/문화/예술/먹거리/쇼핑을 한번에 즐길 수 있다.

11. 나트랑: 동양의 나폴리! 해안가를 따라 수많은 레스토랑과 클럽들이 들어서 있다.

12. 달랏: 베트남 국내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는 곳.

13. 무이네: 사막과 리틀 크랜드 캐니언을 갖춘 곳.

14. 호찌민 시티: 베트남 문화와 쇼핑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곳. 한켠은 프랑스식 건물이 즐비하지만, 메콩강 유역에서는 원주민들의 삶을 느낄 수 있다.

15. 푸꾸옥: 요즘 떠오르는 베트남 휴양지의 신흥 강자! 베트남의 ‘진주섬’이라고 불리고 있다.




곧 있으면 여름휴가 시즌이 시작되다보니, 베트남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에 처음(!!) 가는 여행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처음 베트남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베트남 여행을 계획 할 때 주로 궁금해하는 내용이 있다.


Q: 베트남은 언제 가야 좋아요?

Q: 여행 비용은 얼마나 필요할까요?

Q: 환전은 어떻게 하나요?

Q: 비자를 받아야 하나요?

Q: 치안이나 위생 등에서 주의할 점이 있나요?



답변은? 『셀프트래블 베트남』 QnA를 확인해보시라! 첫 베트남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베트남에서 꼭 해봐야 할 모든 것


베트남여행을 시작했다면 꼭 해봐야하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CNN이 주목한 베트남의 주요 관광지 중 일부라도 보고 오는 것!


두 번째는 당연히 베트남의 대표적인 음식들을 먹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의 유명 음식들 말고도, 베트남 지역별로 유명한 먹거리가 각각 다르니, 어떤 지역을 방문하게 될지는 몰라도 그 지역의 먹거리를 꼭 먹어볼 것! 물론 베트남 음식의 스테디셀러인 쌀국수와 커피는 기본이고^^!


세 번째는 바로 쇼핑이다. 베트남의 슈퍼마켓, 약국, 쇼핑몰 등! 각각의 장소마다 잇아이템이 다르니, 가능하면 전부 다 돌면서 가성비 쇼핑하면 개이득! 『셀프트래블 베트남』에서 알려준 꿀팁 하나가 바로 약국 쇼핑이다. 베트남은 의약분업이 철저하지 않아서 처방전 없이도 항생제같은 전문의약품 구매가 가능하다고?! 뭐 일반적인 건강식품인 발포 비타민이나 의약외품인 샤론파스등은 기본이고! 확실한건 한국에서 구매하는 것 보다 훠얼씬 저렴하다는 것! 아, 그리고 베트남에서만 판매한다는 농모자 쓴 테디베어도 꼭꼭 사올 것!!!!


네 번째는 동남아 여행 필수코스라는 마사지! 어떤 나라든, 어떤 숍이든 마사지는 가격과 시설이 천차만별이다보니, 그 퀄리티도 역시 천차만별이다. 기안84가 인도여행에서 마사지 호갱된 것을 보셨다면, 정말 마사지숍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을 것이다. 자, 호갱되고싶지 않은 사람! 정말 퀄리티 좋은 마사지를 받고 싶은 사람!! 『셀프트래블 베트남』에서 그 꿀팁을 찾아보시라!


다섯 번째는 다름아닌 숙소다. 베트남 여행 경비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바로 항공권과 숙소인 만큼, 숙소 선택은 정말로 중요하다. 비용은 저렴한데,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는 숙소. 어떤 여행이든 숙소만 잘 골라도 반은 성공한거니까!


역사와 문화의 관광 1번지, 하노이


하노이는 2천 년에 이르는 도시 역사 중 약 1천 년간 베트남의 수도 역할을 담당해오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베트남 제1의 도시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하노이 관광의 핵심은 호찌민 단지다.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이자 북베트남의 대통령을 지낸 호찌민의 묘와 그가 거주했던 저택들, 호찌민 박물관 등 단순한 볼거리 이상으로 베트남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하노이에는 300여 개의 호수가 있어 일명 ‘호수의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호수 서호와 관광객들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호안끼엠 호수는 밤낮 가릴 것 없이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하노이의 서민 생활이 궁금하다면 구시가를 방문해보도록 한다. 저렴한 숙소와 식당, 바, 기념품숍, 환전소 등은 물론 현지인들의 생활용품 가게들이 골목마다 빼곡히 들어서 있다. (…) 카페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시원한 쌀국수 퍼와 분짜에 베트남식 커피를 맛보고 저녁에는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멋진 파인다이닝을 즐기는 미식탐험 또한 하노이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즐거움이다. p 045


내가 베트남 여행을 가게 된다면 꼭 일정에 넣을 곳이 바로 ‘하노이’다. 내 여행에서 ‘역사’를 빼면 섭섭하니까. 베트남 근/현대 역사의 주인공인 '호찌민'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하노이에 있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중세 베트남 통치 왕조였던 리왕조의 유적이 하노이에 있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호찌민이야 베트남의 영웅으로 대/외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니 이해한다고 쳐도, 뜬금없이 베트남 중세 통치 왕조인 ‘리 왕조’는 대체 왜?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흐흐. 알아도 쓸데없는 지식이긴 한데, 베트남의 ‘리 왕조’는 우리나라와도 자그마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1174년, 베트남 리 왕조의 수도 탕롱성. 리 왕조 6대왕 영종의 아들 이용상은 피난길에 나선다. 나라에 쿠테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용상이 도착한 곳은 바다 건너 어느 해안 마을. 그 곳은 바로 ‘고려’였다. 이용상은 고려에 정착했고, 당시 왕이었던 고종(고려 23대왕)에게 ‘화산군’이라는 작위를 받고, 그렇게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렇게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간 ‘화산 이씨’ 후손들. 시간은 흘러흘러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가 베트남을 방문했었는데, 베트남 정부는 화산 이씨 종친들을 환대함은 물론이고, 자국에 있었던 리 왕조의 후손이자 왕손으로 인정했다. 심지어 베트남 정부는 매년 리 왕조의 태조 탄신일마다, 화산 이씨 종친들을 초대하고 있다. 심지어 베트남에선 화산 이씨 후손들을 하루 빨리 본국으로 귀환시키고자 한다며. 뭐 이건 정치적인 면도 어느정도 깔려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아주 당연하게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



우리나라의 한 ‘성 씨’의 시조가 베트남 리 왕조의 왕자였고, 시간이 흘러 왕자의 후손들이 베트남과 한국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고로 나는 정말 진짜로 완전 !! 하노이에 가서 리 왕조의 유적을 보고 싶다는 것!! 심지어 리 왕조의 탕롱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다만 『셀프트래블 베트남』 저자 기준으로는 탕롱성은 완전 추천은 아니고, 어느 정도 추천(ㅋㅋ)인 관광지인 듯. 뭐 근데 그건 인정. 역사 더쿠들이나 볼게 많지 뭐, 일반 관광객들에겐 크게 관심 없는 장소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베트남에서 하노이 여행을 계획했다면 알아야 할 게 바로, 근교(?) 투어!! 바로 ‘하롱베이’나 ‘사파’, ‘땀꼭’ 같은 지역도 하노이에서 투어상품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파는.....《신서유기》에서 촬영지로 나왔던 곳이라,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인데. 그...판시판? 아 가고싶다, 베트남!!!!! 물론 아기가 조금 더 커야 가능하겠지만^_T. 이렇게 오늘도 난...  책으로 세계여행을 한다...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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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잔혹동화 『환상소설』. 정말 오랜만에 읽는 소설책이다. 근데 이 소설책이 완전 초면은 아니다. 왜? 난 이미 2021년에 오디오 드라마 형태로 발간된 『환상서점』의 오디오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꽤 오랜기간 성우덕질을 하던 이력을 지닌 피로ㅋㅋㅋ). 이쯤에서 당시 텀블벅 펀딩에 참가했던 날 매우 칭찬한다♡ 잘했다, 장하다 내 자신♥♥




자자, 그렇다면 오디오북 『환상서점』과 일반적인 소설책 『환상서점』의 내용이 같은가? 아니, 절대로. 네버! 



『환상서점』 오디오북은 서점주인 서주가 독자(그러니가 듣는 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서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트랙당 1편의 이야기며, 그 이야기들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먼저 들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반면에 『환상서점』 소설책은 오디오북에 담겨 있던 일부 에피소드와, 오디오북 대본집(!!!)에 있는 서점주인 서주의 배경을 그대로 가져와서, 바로 그 ‘서주’의 이야기가 하나의 장편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근데 난 소설책 쪽이 훨씬 더 좋네....?!


오디오북 대본집에서만 보았던 서주의 배경이 이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된 것도 좋은데, 심지어 오디오북 『환상서점』 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서주의 뒷 이야기까지 그려진다는게! 거기다 저승차사님 까망의 뒷이야기도 읽을 수 있게되어서 얼마나 좋은지(구색록편). 옥토도 그저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아니라 소설책의 등장인물로 나온 것도 너무 좋고. 이건 정말로 작가님께 절하고 싶음. 흑흑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개인적으로...소설책 『환상서점』 2편으로 옥토의 현재 이야기도 출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작가님? 네 흐흐흐흐. 옥토와 귀신남자의 만남도 그려줘요T_T. 



기본적으로 『환상서점』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신비하고 기묘한 판타지 소설이다. 거기에 기괴하면서도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도 한 스푼 들어가있다. 신비로운 판타지 소설책 『환상서점』의 이야기를 한 줄 요약하면 이렇다.


‘망령을 보고 들으며, 이승과 저승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남자. 그 남자는 오랜시간을 한 여자만을 기다리며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모으고 또 모았다. 오로지 그 여자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그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비하면서도 기묘하고, 때로는 가슴이 아려오며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누군가의 과거 이야기기도 하며, 혹은 누군가의 전생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과거이면서 현재이야기이기도 하다. 


너무......요약했나 ㅋㅋㅋ 뭐, 아무래도 소설책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스포할 수 도 있으니까. 뭐, 그럼. 조금 더 길게! 소설책 『환상서점』의 서장을 일부 발췌볼까? 



먼 옛날, 산과 강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호기심 많은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소녀는 양반가에서 태어난 귀한 신분이었지만, 예절교육을 받기보다 들판을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천방지축이었지요. 하루는 소녀가 저잣거리를 뛰어다니던 중에 바닥에 떨어진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주인 잃은 책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신선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은 한 사내가 보이지 않겠어요? 소녀는 이 책이 저 사내의 물건이라는 걸 집착했습니다. (…) 


그때, 소녀의 작은 머리통 속에서 전기가 튀듯 어떤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나는 이 하얀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것 같아. 내가 셀 수 있는 숫자보다 더 오래, 쌀 한가마니에서 쏟아지는 곡식의 낱알보다 더 오래. 한참을 지나 깨달은 것이지만 소녀는 사내를 본 첫눈에 사랑을 느끼고 말았던 거죠. (…)


헌데 이상한 건 분명 죽었어야 할 사내가 그 이후로도 자꾸 모습을 보이더란 겁니다. 둘이 뛰어내린 절벽 근처에서, 사람이 많은 시가지에서, 속세와 동떨어진 어느 한적한 사찰에서. 그를 보았다는 장소도 다양했어요. 진짜 해괴한 대목은 지금부터 입니다. 그에 관한 목격담은 몇백 년이 지나도록 이어졌습니다.         - 소설책 『환상서점, 서장- 절벽 아래 남은 이야기』 中



소설책 『환상서점』의 서장은 오디오북 『환상서점』의 대본집에 있는 서주에 대한 이야기 중, 그 어느 시간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때부터 진정한, 기약이 있는듯 없는듯 한 ‘서주’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해야하나? 



둘의 과거를 이야기 한 건 마지막 욕심이었다. 한번쯤은 그녀에게 지난 일을 오롯이 고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용서받는다면,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여태 몰랐지만 그런 희미한 기대도 섞여있었다. 지금 연서의 눈에 차오른 원망을 보다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다음 생에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땐 우리 가까워지지 마요.”


“지금의 나는요?”


“미안하다고 해두죠. 어차피 전부 잊겠지만.”


그는 마지막 무대를 앞둔 마술사처럼 꽃을 고쳐쥐었다. 푸른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광채가 일렁였다. 홉사 저승의 기운 같았다. 서주는 그 빛을 뒤집어쓴 채로 말했다. 예의 그림같은 미소와 함께.


“이전엔 너무 가까워져서 당신이 죽었거든”      - 소설책 『환상서점, 영원의 매듭』 中



와! 근데 정말로 오디오북만 따로 들어도 좋고, 소설책만 읽어도 좋지만. 그냥 둘다 듣고 읽었으면 좋겠는게 내 바람!



무엇보다 오디오북을 먼저 듣고, 소설책을 읽으면 더욱 최고랄까? 흐흐. 오디오북으로 등장인물들의 멋진 목소리를 듣고(이게 중요!), 서점주인 서주가 들려주는 ‘잠 못 이루는 신비한 이야기’도 좀 듣고(진짜 최고bb), 그다음 소설책을 읽으면 와. 진짜 이건 진짜 분명 나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귓가에 서주의 목소리가 들린달까. 흐흐흐. 진짜로 이거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네^_T. 



근데 .. .종이책버전 『환상서점』도 오디오북으로 내어주시면 안될까요? 작가님, 엉엉. 영원의매듭 편... 구자형님 목소리로 듣고싶어요 엉엉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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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넥타이
이정남 지음 / 북 야부사메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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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를 하면서 TV와 멀어진 나지만, 아기가 태어나기 전 까지만해도 TV를 넘나리 사랑했었다. 특히 교양/역사/시사/다큐 프로그램을 참 좋아해서, 채널 돌려가며 보곤했었다. 공중파야 프로그램 방영시간이 정해져있으니 언제든 보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케이블은 좀 타이밍이(?) 맞아야만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타이밍 재가면서 봤던 방송 중 하나가 바로 《사무라이 로망스》 라는 프로그램이다. 뭐,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사무라이 로망스》는 사실 유튜브 채널이었다며....ㅋㅋ

각설하고! 꽤나 즐겨 보았던 《사무라이 로망스》가 책으로 발간된다고 해서 당시에 바로 구입을 했었다. 책 제목은 『사무라이의 넥타이』. 어째서 제목이 ‘넥타이?’ 인가 싶었지만, 《사무라이 로망스》를 생각해보면 왠지 사무라이의 ‘넥타이’라는 제목이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뭔가 이해되는 느낌적인 느낌?! ...............그 후 출산과 육아라는 기나긴 터널을 지나, 책을 구입한지 1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읽은건 안 비밀^^!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일본 역사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 그럼 일본 어느 시대, 또는 어떤 구분에 의한 역사책인가!

일본 역사책 및 역사공부를 할라치면, 고대사는 겁나 길디 긴 신들 이름이 나오고, 막부시대는 또 통치하는 장군의 가문에 따라 계속 나뉘고, 심지어 전국시대까지 오면 이른바 ‘군웅할거’라 할 만한 온갖 장수들이 떼지어 나오니, 어떤 시대든 익숙하지 않은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인해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렇다고 수많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무시하기엔, 유력가문(?)의 이름들은 알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일본 역사를 이해하는데(정확히는 정치사) 매우 수월해진다. 결국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일본역사는 한국 역사와 겹쳐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정유재란)’, ‘메이지유신 이후(일제강점기)’ 정도랄까?

하지만! 이 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정말 1도 어렵지 않다. 진짜로 이 책 안에는 어려운 일본 역사는 1도 없다. 어려운 전국시대 장수들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간혹 내용에 따라 샘플로 몇몇 가문들이나 장수의 이름이 나오긴 함), 그렇다고 일본의 정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이 책은 대체 무슨 내용이 있는 역사책이냐!!!! 대체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거고, 대체 어떤 역사를 알려주려고 하는 거냐!!!!

자자자. 결론부터 말하면 역사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에도시대’의 사회상(생활상)을 이야기한다고 보면 된다. 당시의 사회상(?)이라고 하면 좀 거창한 표현인 것 같기도 한데, 여튼 에도시대를 살던 일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마디로 지배계급(정치권력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피지배계급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적은 일본 역사책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들의 삶과, 당시 사회의 풍속이 이 책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근데, 이게 진짜 생각보다 엄청 재미있다.



예컨데,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 중 일부를 보면 이렇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 까지 육식을 하지 않았다’ 라는 내용의 사실은 원래 이거다! 라던가, 지금도 유명한 일본의 ‘노포‘ 의 비하인드 같은! 주제만 봐도 궁금하기 그지 없는 내용들이지 않은까? 이렇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인식을 까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미로운데, 이 책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예컨데 ‘에도시대는 신분에 따라 똥값(?)이 차등으로 매겼다’라던가, 에도에 첫 발을 디진 촌놈 사무라이는 어떤 사고(?)를 치고 다녔는지라던가,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나오던 ‘도장깨기’의 본 모습은 이렇다! 같은! 정말로 이 책은 재미와 흥미와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잡은 일본 역사책이다.

물론 역사 하면 제일 중요하다고 치부되는건 정치사이긴 하다. 하지만 역사를 뒷받침하는 건 잔잔하게 살아온 피지배계급의 삶이니까. 그렇기에 난 이 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를 일본 역사책으로 강력 추천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이 분의 유튜브도 추...천...하고 ㅋㅋㅋㅋ

에도시대 분뇨 가치는 신분에 따라 다르게 매겨졌다?

100만 명의 인구가 밀집한 에도. 인구가 많은 만큼 분뇨의 양 역시 분명 많았을 것이다. 에도시대보다 이삼백년의 시간이 흐른 개화기 시절, 조선의 경성만 해도 길가에 오물이 넘쳐났고, 가는 길마다 오물의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보다도 과거인 에도였으니, 상황이 비슷하지 않았겠나? 싶었는데 왠걸? 에도의 분뇨처리 방법은 생각보다 친환경적이고(?) 과학적이었다.

근세 일본의 수도인 거대 도시 에도는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100만에 달하는 거대 인구가 먹고 배출하는 분뇨량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1인 당 연간 분뇨 배출량을  500kg정도로 가정하면 에도 전체에서 배출되는 분뇨량을 대략 연간 50만 톤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p 074

100만 명의 대도시 에도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 수급을 위해 에도 외곽지역은 농경지가 발달하게 됩니다. 에도에서 연간 50만 톤 정도씩 쏟아져 나오는 분뇨는 에도 외곽 지역 농경지에서 퇴비로 활용되었고 농경지에서 생산된 각종 곡물과 채소는 다시 에도로 공급되는 자원의 리사이클링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p 075

요즘 전 세계에서 대두되고 있는 친환경!!! 에도의 분뇨처리 과정이 바로 이 친환경에 걸맞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에도에서 나온 분뇨들을 모아서 외곽의 농경지로 보내고, 거기서 퇴비로 사용하고, 농경지에서 나온 생산물은 다시 에도로 들어와서 에도에 사는 일본인 입으로 냠냠냠. 

여기서 밑줄 쫙! 해야할 포인트가 있으니, 분뇨의 처리 가격이다. 현대인들은 분뇨, 그러니까 정화조를 깨끗히 해주는 대신 그에 대한 비용을 업체에 지불한다. 하지만 에도는 그 반대! 자신의 분뇨를 농민에게 파는(?) 개념이었다. 아무리 똥,오줌이라도 내가 만든거니(..) 내꺼니까, 내꺼 주는 대신 돈을 받는다고나 할까. 크흡.

다이묘 또는 사무라이들의 저택에서 일반 서민들의 공동주택에 이르기까지 분뇨통이 설치되어 있는 대부분의 장소는 에도 외곽 지역 농가와 직간접적으로 분뇨 처리권에 대한 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 에도에서는 정화조를 청소해주는 것이 아니라 농사에 필수적인 퇴비를 구입해가는 개념으로 분뇨 처리 과정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뇨 구입 비용을 돈으로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분뇨 구매 당사자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밭에서 생산되는 무 또는 가지 등의 농산물을 물물교환 형태로 지불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p 076

근데 또 그 분뇨 가격이 신분마다 차등으로 결정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부자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비싸고, 가난한 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저렴하고. 똥까지 등급을 매겨야하나 싶기도 하겠지만, 이게 은근 과학적인 분류란다. 부자집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기에, 분뇨가 퇴비로써도 제격인 반면, 가난한 집은 먹는게 거기서 거기니까. 슬프면서도 웃긴 이야기^_T.

다이묘 저택, 막부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 저택 또는 거상 집에서 나온 분뇨가 상급에 속해 있었고 일반 사무라이 저택 또는 서민 집에서 나온 분뇨가 중급, 빈민들이 많이 사는 공통주택 「나가야」에서 나온 분뇨가 하급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 신분과 경제력이 높을수록 분뇨 등급을 높게 쳐 준 품질 분류 방식은 과학적인 분석이라기보다는 농민들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정확한 해석이었습니다. 곡물과 채소 외에도 닭고기 어패류 등 높은 영양가를 가진 음식을 먹은 후 배출한 분변에는 질소가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퇴비로써 효율이 높았던 반면 곡물과 채식 위주의 음식 밖에 먹지 못했던 서민들의 분변은 영양소가 낮았기 때문에 퇴비로써의 가치 또한 낮게 책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p 077

일본은 1,200년간 육식 금지? 육식을 대하는 이중 태도

일본이 오랜기간 육식을 금지했다는 건 학교에서도 배웠던 내용이다.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의 ‘서양’을 표방하며 서양인 따라잡기를 위해 육식 섭취를 적극 권장했다나 뭐라나.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육고기를 못먹어서 그렇게 왜소한거라나 뭐라나. 그런데 왠걸? 이것도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이야기였다. 음 아니지, 전부 틀린 이야기라고 해야하나?

[모몬지야]는 에도시대 당시 에도 근교 농촌에서 농민들이 수렵 활동을 통해 사냥한 멧돼지 또는 사슴 등의 고기를 받아 에도 시내에서 고기를 판매하던 정육점을 지칭합니다. 육식을 기피하던 사회 풍조 때문에 고기 섭취를 「보약 먹는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 역시 에도시대 일본 사회의 「타테마에」와 「혼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p 122

일단 기본적으로 에도시대에는 정육점이 있었다.

일본 불교와 신도의 영향으로 인해 육고기 섭취를 기피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육고기를 섭취했다. 심지어 ‘보양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서기 675년 「테누 텐노」에 의해서 일본에서 처음으로 육식 금지령이 발령됩니다.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소와 말을 죽여 식용으로 사용하거나 판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시 엄벌에 처한다.’라는 표고령을 내렸고, 에도시대가 시작된 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역시 ‘소와 말을 죽이면 안되며 자연사한 소와 말이라고 할지라도 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살생 금지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바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정책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츠나요시는 1682년경 「쇼오루이 아와레미노 레이」라는 규정을 포고하는데 이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가엽게 여겨야 한다는 「살생 금지령」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규정에 의해서 개, 고양이, 새, 어패류, 곤충 등이 「살생 금지령」 범위 안에 포함되다보니 채소와 과일을 제외하고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p 125

1709년 1월 10일 5대 쇼군 츠나요시가 세상을 떠났고 츠나요시 사망 후 불과 열흘이 지난 1월 20일 약 30년 가까지 지속되어오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에 몰아 넣었던 살생금지령 「쇼오루이 아와레미노 레이」는 결국 해지됩니다. p 127

실제로는 다양한 야생 동물 고기가 에도 시내에 유통되고 있었으며,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소, 말 등의 가축보다는 사냥을 통해 획득한 야생 동물 고기 위주로 버젓이 고기가 팔리고 있었습니다. (…) 사슴고기는 「모미지(단풍)」이라고 불렀습니다. 화투를 보면 단풍나무에 사슴이 그려져 있는 패가 있는데, 사슴 고기를 「단풍」으로 부르게 된 것은 화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닭고기는 「카시와(떡갈나무)」라고 불렀는데, 떡갈나무 잎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홍색 또는 갈색으로 변색되면서 닭고기 색과 비슷해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고기는 「사쿠라(벚꽃)」이라는 은어를 사용했는데, 신선한 말고기 색깔이 벚꽃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탄(모란)」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되었던 멧돼지 고기는 모란 색깔과 비슷한 붉은 빛을 띄고 있었습니다. p 129 ~ 130

물론 일본의 역사 속에서 몇 번의 육식 금지령이 있긴 했으나, 최초의 육식 금지령은 당시에도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그 이후의 육식 금지령 때도 육식을 하면서 쉬쉬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만! 에도 막부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 때의 육식 금지령은 아주 살벌했기에, 한 번만 걸려도 거의 사형!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츠나요시 때만 아주 강력하게 육식금지령이 시행되다가, 츠나요시 사후 아주 스피드하게 사라진 법이 되었다.

물론 그 때도 불교와 신도의 영향 아래 육식기피 분위기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대놓고 먹는 것을 기피하는 것이고. 뒤로는 왕왕 먹었다며. 하지만 대놓고 육고기 이름을 부르긴 뭐하니까, 은어로 부르면서 말이다. 진짜 사슴고기를 단풍이라고 부르는 것에 빵 터졌네.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육식 금지문화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근거를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육식 금지가 최초로 발령된 서기 675년부터 공식적으로 육식 금지가 폐지된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년의 기간동안 일본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가 육식을 한 경우 당사자들을 엄벌에 처했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두 내용에 대한 명확한 시대적, 문화적 구분이 없다보니 『1,200여 년의 육식 금지 기간 동안 육식을 하다가 적발될 경우 엄벌에 처해졌다.』라는 형태의 사실 관계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p 127

확실히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배울 때는 저자의 말 처럼 ‘일본에 대한 당위성과 명분’을 기본적인 틀로 잡고 배우다보니, 그 속에 어떤 삶이 있는지, 정말 우리가 배운 일본이 제대로 배운게 맞는지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위 ‘일본인은 오랫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처럼. 거기다 일본 역사를 알거나 공부함에 있어서, 위와 같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틀로 인해 제대로 된 공부가 어려운 것도 있고.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잠시 뒤로하고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근세 일본을 살았던 소시민들 삶이나, 우리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고, 우리가 알고 있던 일본인의 이미지는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일어난 ‘왜곡’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일본 역사책으로 강력 추천. 다시금 말하지만 역사를 뒷받침하는건 우리 같은 소시민의 소소한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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