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안의 세계사 - 세상을 뒤흔든 15가지 약의 결정적 순간
키스 베로니즈 지음, 김숲 옮김, 정재훈 감수 / 동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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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투비 역사더쿠에다가 1n년 째 제약회사를 다니고 있다보니, 의약품 관련 세계사책도 자주 읽었다. 다만 지금까지 읽었던 의약품 세계사책은 내용이 거의 비슷해서 블로그에 리뷰는 안썼다. 예컨대 대다수 책은 ‘페니실린’이나 ‘모르핀’, ‘아스피린’ 같은 대중적인(?) 의약품들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오늘 리뷰하는 『약국 안의 세계사』도 비슷할거라 생각했는데, 왠걸! 알고 있는 의약품 역사도 있었지만, 전혀 의외였던 의약품 이야기가 여럿 있었다. 그래서 간만에 리뷰를 쓰는 거기도하고 ㅋㅋ




▶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


1.페니실린: 휴가를 떠난 플레밍의 실험실에 이상한 곰팡이가 날아왔을 때

2.퀴닌: 고열에 시달린 여행자가 우연히 키나 나무 주변 연못에 도착했을 때

3.리튬: 케이드가 전쟁으로 정신이 피폐해진 아버지를 본 순간

4.질소 머스터드: 전쟁 중 미국 배 한 척이 격침되며 의문의 가스가 살포된 순간

5.와파린: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싫어서 벌인 한 병사의 자살 소동

6.보톡스: 성형외과 의사 클락이 수술 중에 실수로 의료 사고를 낸 순간

7.미녹시딜: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고혈압 환자의 얼굴에 털이 가득 났을 때

8.피나스테리드: 맥긴리가 여자가 남자로 변하는 수상한 마을을 알게 됐을 때



의외였던 의약품 중 몇 개를 고르자면 아마도.. 우리 회사에서 제조 및 판매하는 약품인 ‘미녹시딜’과 ‘피나스테리드’라고나 할까? 정말 진짜 와. 아주 깜짝 놀랐다. 이 두 의약품은 항생제나 마취제 같은 대중적인 의약품이 아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평생 이런 의약품을 접할 일이 없는 의약품이다. 벗뜨 이 의약품이 필요한 환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될(!!!!) 심지어 먹게되면 자의로 끊어서도 안될(!!!!) 의약품이다. 이 두 의약품의 정체는 다름아닌 탈모치료제.



탈모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도 정복하지 못한, 현재까지도 정복하지 못한 아주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그렇기에 치료제가 있는 것만이라도 정말 감지덕지한 상황이다. 대표적인 탈모 치료제가 ‘미녹시딜’과 ‘피나스테리드’. 그렇다면 이 약품들이 처음부터 탈모치료제였는가? 대답은 ‘NO’다. 당장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피나스테테리드’는 탈모치료제보다는 전립성 비대증 치료제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이말은 모다? 피나는 원래 전립성 비대증 치료제였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탈모치료제인 ‘미녹시딜’도 원래 고혈압 치료제다.


#미녹시딜


1971년 콜로라도 대학교 의과대학의 찰스 치지 지도하에 고혈압에 미녹시딜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하는 연구가 진행됐다. 이 시기에 전공의 1년생이었던 폴 그랜트가 이 약물을 복용하던 여성에게서 유난히 독특한 증상을 발견했다. (…) 고혈압이라는 시한폭탄 같은 위험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그 어떤 부작용도 감내할만한 각오가 돼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환자와 의사 둘 다 예상하지 못한 한 가지 부작요잉 있었다. 얼굴 전반에 털이 자라고 머리카락과 다리털이 빠르게 성장하는 부작용 말이다. p 305


머리카락이 다시 날 수 있도록 미녹시딜을 활용하는 첫 단계는 미녹시딜을 국소 부위에 사용할 수 있는 의약품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경구 미녹시딜을 복용했던 그랜트의 환자에게서 목격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제멋대로 털이 자라는 대신 원하는 부위에만 집중적으로 자라길 바랐기 때문이다. 칸은 치지의 연구실에서 미녹시딜 가루를 조금 빼돌렸고, 에탄올과 프로필렌글리콜에 미녹시딜을 섞어 1퍼센트 용액을 만드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p 306


미녹시딜을 국소부위에 사용하는 임상시험은 매우 낮은 농도의 미녹시딜로 시작해 2퍼센트까지 늘려나갔다. 그중 1~2퍼센트 용액을 복용한 환자에게서만 상당량의 모발이 자라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랜트를 포함한 4명의 핵심 인력에게 시험하기 위해 칸이 만든 용액 농도가 1퍼센트였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행운의 여신이 어떻게 이들을 도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p 307


미녹시딜은 머리카락의 모낭에 존재하는 황산 전이효소와 상호작용한다. 이 효소는 미녹시딜을 활성형인 미녹시딜황산염으로 변화시킨다. 이 다음부터 미녹시딜이 어떻게 머리카락 성장을 촉진하는지 그 매커니즘은 알려져 있지 않다. (…) 흥미롭게도 아스피린을 복용하면 존재하는 황산 전이효소와 상호작용해 미녹시딜이 활성형인 미녹시딜황산염으로 변화하지 못하게 만들어 약품의 효과를 떨어뜨렸다. 미녹시딜을 복용하는 사람들이여, 이 지점을 꼭 기억하시라. p 312


어떤 형태든 미녹시딜은 고양잇과 친구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 2004년 보고서에 따르면 국소 부위에 바르는 미녹시딜은 고양이에게 매우 유독할 수 있기에,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바르는 미녹시딜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 사례가 있다. 고양이 두 마리가 국소 부위에 미녹시딜을 바른 피부와 접촉하자 눈에 띄게 무기력해지고 하루 하고 반 나절 정도 숨을 쉬는 데 문제를 보였다. 그리고 미녹시딜 샘플에 몸에 낳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생을 마감했다. p 317


#피나스테리드


탈모 치료제와 발모제로써 피나스테리드가 쓰이게 되기까지 여정은 독특한 장소에서 시작됐다. 그 장소는 바로 카리브해 살리나스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여기서 코넬대학교 의과대학 줄리언 맥긴리는 여성의 특징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신체적으로는 자웅동체 특성을 보이는 아이들을 연구했다. (…) 1974년 맥긴리는 카리브해 어린이들의 유전암호에서 돌연변이를 목격한 사실을 밝혔다. 이 돌연변이는 테스토스테론을 더 강력한 분자인 디히드로테스토스테론으로 전환하는 5-알파-환원요소 억제제라는 효소의 양을 줄이로, 이렇게 5-알파-환원요소 억제제가 부족해지면 사춘기가 시작할 때까지 남성의 특징이 발달하지 못하게 했다. p 326


맥긴리 발표는 파란을 일으켰고 이듬해 거대 제약회사인 머크도 여기에 관심을 보였다. 머크의 기초연구장인 로이 바겔로스는 크기가 작은 전립선과 맥긴리가 언급했던 5-알파-환원요소 억제제의 부족한 활성 사이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 전립선의 크기가 커지는 전립선비대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전립선을 축소시킬 것이라는 기대로 말이다. p 327


이 과정에서 연구진은 피나스테리드의 또 다른 용도인 발모 효과를 발견했다. 과도한 양의 DHT가 모근에 존재하면 DHT가 안드로겐 수용체와 결합하고 그 이후에 모근이 축소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피나스테리드는 테스토스테론이 더 강력한 DHT로 변하는 과정을 막아서 결국 탈모를 멈추는 데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 라는 상품명으로 포장된 피나스테리드는, 1997년 남성형 탈모증 치료제로써 FDA 승인을 받았다. p 328


그러나 탈모와 피나스테리드 사이의 싸움은 쉽지 않다. 피나스테리드 복용을 멈추면 12개월 안에 발모와 정확히 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게다가 피나스테리드도 일련의 부작용을 일으킨다. 대부분은 성적인 부분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성형 유방, 정액량 감소, 고환과 음경의 크기 축소 등 말이다. 성욕을 잃거나 발기부전이 보고된 경우도 있었다. p 329


피나스테리드는 임신 중에 약물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을 담은 FDA 임산부 약물 등급표에서 X등급이라는 흔치 않은 경고를 받았다. 만약 알약을 부러뜨리거나 가루를 내면 현재 임신 중이든 그렇지 않든 여성은 그 가루를 만지면 안된다. 피나스테리드가 임산부 몸속에 흡수되면 남자아이에게 기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FDA는 여성의 피나스테리드 복용을 금지하고 있다. 이글을 쓰는 현재로선 피나스테리드 알약이 부서졌을 때 태아에게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에 국소 부위에 사용하는 형태는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피나스테리드로 국소 부위에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발모제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p 330


두 의약품이 발견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주의사항까지 언급되어있다. 생각해보면 우리회사에서 피나를 생산 및 실험할때 여자한테 위험하다고, 절대 가까이 오지말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피나 실험자는 절대 남자만. 여자는 실험못하게 했고. 그땐 크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와. 피나가 임산부 약물 X등급이었구나. 근데 뭐랄까? 그저 회사에서 제조하는 의약품이라는 생각만 했던 것들을 이렇게 책 속에서 만나니 기분이 묘하다.


이 세계사 책에는 의약품 역사 뿐만 아니라, 짧은 클립 형식인 ‘약국 밖 레시피’가 있는데 이 내용들도 꽤 흥미롭다.



▶ 알약 두 개를 복용하면 왜 두 배만큼 좋아지지 않을까?


여러분이 선택한 진통제의 겉 포장지에는 네 시간마다 알약을 복용하라는 설명이 있다. 네 시간마다 복용하는 수고를 덜고 빠르게 통증을 없애기 위해 한꺼번에 두 알 혹은 세 알을 복용하면 안될까? 그렇다. 그렇게 복용하면 안된다. 어떤 약물이 치료제로 사용되는지 혹은 체내에 유독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한 끗 차이다. 적절한 용량을 판단하기 위해 연구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혈청 속 약물 농도를 측정해 효과적인 용량을 결정한다. 약을 복용할 때 유효량이 어느 지점에 도달한 후에 더 많은 양을 복용하는 것은 종종 부정적 영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더 많은 약물이 몸 속에 흡수되면 환자 상태는 약물의 치료 범주를 넘어 추가적인 부작용이 발생하는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p 129


▶ 영양제는 FDA 승인을 받을까?


영양제는 FDA의 신약승인 신청의 승인 과정 대상자가 아니므로 제조업체가 공언하는 그 어떤 효과도 FDA 관점에서는 영향력이 없다. FDA는 영양제를 음식과 비슷하게 간주한다. 제조업자들은 노골적으로 영양제라고 표기하며 영양제가 시장에 등장한 후 일반 대중에게 안전한지에만 관심이 있다. 놀라운 주장과 함께 판매되는 수많은 영양제 광고에는 어디에서나 본 것 같은 일반적인 비타민, 허브 추출물, 아미노산, 효소 등이 있다. FDA는 이런 주장에 법의 잣대를 들이밀며 FDA의 관점에서 진실을 제단하지 않는다. 다만 실재하는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광고하는 영양제는 불법으로 간주한다. FDA는 영양제를 처방전이 필요한 혹은 필요하지 않은 약물과 함께 복용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언급하고 의료진들은 환자가 복용하는 모든 영양제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p 321


TMI이긴 하지만, 제약회사 다니는 사람으로써, 일단 기본적으로 영양제(건강식품) 광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냥 원료랑 함량보고, 나에게 필요한 요소가 뭔지 그 기준으로 구매할 뿐. 무슨무슨 추출물? 이런거 진짜 하등 필요 없는 것. 심지어 싼 값으로 물량 공세하는 이류, 삼류 회사가 FDA승인을 받았다고 허위광고를 보면 정말 기가막히고 코가 막힌다. 애초에 FDA승인 자체가 안되는 제품인데 말이지. 저렇게 허위광고하는 업체를 보면, 외려 위생적으로 만들기는 하는지 의심이 든다.


우리는 살면서 의약품을 무조건 접할 수 밖에 없다. 하다못해 두통이 발생하면 진통제를 사먹기도 하고, 눈 떨리면 건강기능식품 중에서 마그네슘을 찾아서 먹기도 하니까. 고로 의약품은 인생에서 절대 뗄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는 의약품이 어떤 식으로 세상에 나왔는지 한 번쯤은 알아보면 좋지 않을까? 내가 처방받은 의약품 역사를 찾아보면, 위 탈모치료제처럼 신박한(?) 이야기나 놀라운 이야기도 많아서 은근 재미있는 역사책 읽는 기분도 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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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독서 편식은 꽤 알아주는 편이다. 그렇다고 아예 선호하는 장르만 읽는가? 그건 아니다. 넓은 사고와 문제의식 고취를 위해서, 선호하지 않는 분야의 책을 읽기도 한다. 선호하지 않는 분야로는 자기계발책이나 경제, 심리학책 등이 그렇다. 뭐랄까, 그냥 좀 거리를 두게 되는 책이다. 물론 읽지도 않고 이렇게 독서 편식을 하게 된 건 아니다.



대충 내가 사회 초년생일 때, 지금과는 달리 자기계발책을 꽤 읽었다. 뭉퉁그려서 자기계발책이라고는 하지만, 자기계발서도 세부적으로 ‘대화, 처세, 성공, 시간관리, 자기관리, 취업, 자기개발’ 등 여러 하위 카테고리가 있다. 사회에 발을 처음 내민 초년생인 나로써는, 학교와는 다른 사회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자기계발책을 읽는게 필요했다. 헌데 뭐랄까? 책을 다 읽은 후 머리 속을 정리해보면 항상 같은 생각만 남았다. ‘전에 읽은 책이랑 비슷한 내용이네?’, ‘자전적인 내용이 너무 많은데?’ 뭐 이런 느낌이랄까. 결과적으로 머리속에 남는 알맹이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경험은 나를 자기계발책을 선호하지 않는, 독서편식가로 만들었다.



그럼 자기계발책은 나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는가? 아니, 그건 또 아니다. 그저 내가 자기계발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읽을 타이밍이 안맞았고, 책을 고르는 눈이 나빴을 뿐이었다. 외려 사회에 찌들대로 찌든 지금 나에게 자기계발책(재테크나 대화, 시관관리 등)은 꽤 도움이 된다. 아마 자기계발책을 고르는 안목(?)이 생긴 것도 있고, 어떤 타이밍에 읽으면 되는지 알게되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가 생각한, 자기계발책을 읽는 방법은 이렇다. 자기계발책도 하위 카테고리가 세분화되어있기에, 본인에게 정말 필요한 분야가 어떤건지 정확히 파악한다. 예컨데 자기관리(시간관리)가 안되는 사람이라면, 자기관리에 대한 자기계발서를 선택하면 된다. 이렇게까지 자기계발책에 대한 견해를 밝힌건, 오늘 리뷰하는 책이 자기계발서라서다.




책 제목은 『필연적 편협』. 


이 책을 읽어본 사람으로써, 이 책 하위 카테고리는 ‘자기관리 및 성공’ 에 속하지 않나 싶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개념은 ‘높은 소득’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성공’하려면 경제나 제테크에 관심이 필요하고, 나아가서 그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과 지식이 필요한 상황이다. 아마도 저자는 이에 착안하여, 경제 및 제테크에 대한 내용을 주제로 이 책을 쓴게 아닐까 싶다. 다만 책 내용을 전반적으로 봤을 땐 재테크보다 자기관리 비중이 높아보였다.



책 속 자기관리 내용 중에는 이해를 뒷받침하기 위한 예시가 많았다. 역사 속 사건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문제 등 많은 예시가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저자가 많은 책을 읽었고,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이 책을 썼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다만, 단락과 단락 연결이 매끄럽지 않거나, 내용이 조금 늘어진다는 느낌도 다소 있었다. 



아래에 책 내용을 일부 발췌하였다. 다만 내가 읽기에는 문장 일부가 매끄럽지 않다고 느껴져서, 일부 생략하고 다듬었다.




인생은 우주에 비해 매우 짧으며, 짧은 인생 속에서 사람은 더 간사하게 행동하고 편리함에 빠르게 적응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람은 생각보다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열심히 산다면 계급을 이동할 가능성이 약간 남아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다른나라보다 상대적으로 계급 이동이 용이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 아는 만큼 보이고 이러한 차이가 빈부격차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유로 아직까지 우리나라만큼 살기 좋은 나라는 없다. 즉 무엇이든 하라. p 057 ~ 058



강렬한 뉴스와 진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공포 본능에 따라 세계를 왜곡하여 바라보기도 하는데, 이 왜곡은 현실적이고 균형있는 인식 형성에 방해된다. 주요 뉴스 이면과 진실을 들여다보고, 공포 본능이 세계를 왜곡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기여하는지 인식하여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p 073



사회에서 왼손잡이 비율이 가장 높은 분야가 바로 스포츠계다. 실제로 야구판에서 “좌완 파이어볼러는 지옥에서라도 데리고 온다”라는 말이 이으며, 야구뿐만 아니라 펜싱, 탁구, 테니스처럼 대결적인 요소가 있는 모든 스포츠는 왼손잡이가 유리해 일상 영역과 달리 왼손잡이가 귀족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 경쟁 속에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언제나 다수보다는 소수에게 기회 확율이 많았다. 즉 우리는 소수가 되자. 소수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p 084



우리는 최고의 투자는 스스로의 성장이라는 워렌버핏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워렌버핏 말은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게 ‘경험’이다. 부모님이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라고 조언하지 않고, 공부를 권유하는 이유는 지식과 학습을 통해 스스로 능력과 지혜를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p 110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장벽을 넘은 후에 ‘월급’을 정의해야한다. 월급은 근로소득의 연속이자, 지금까지 해온 공부에 대한 보상이다. 하지만 월급이라는 보상을 받게 되면 그 틀에 갇혀 월급이라는 덫에 빠지게 된다. 월급은 숫자로 나타나는데, 이 숫자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p 064



월급을 평가하지 말고, 더 큰 시야를 가져야 한다. 월급은 그저 근로소득 중 하나라는 시각이 필요하다. 300만 원을 받는 사람보다 5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풍족하며 삶의 질이 높을 수 있다지만, 이는 상대적인 차이이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더 빨리 깨달음을 얻어 근로소득에서 자본소득으로 나아가느냐는 점이다. p 065



투자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투자자본과 위험요소, 투자 회수자본을 오로지 돈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투자자본을 돈으로만 생각하면 안된다. 투자자본은 돈 뿐만 아니라 시간, 건강, 기회비용 등 다양한 자원이 포함된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는 것도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투자의 한 형태이며, 이러한 투자는 미래에 더 큰 가치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다. 공부를 통해 발전된 능력과 지식은 투자회수 자본으로 이어지게 된다. p 111



재테크나 투자는 견고한 본질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분야다. 성공적인 재테크는 상승장에 반짝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도 노력하고 배우는 것이다. 실패를 극복하는 인내심과 노력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재료다. 따라서 실패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자기 관리와 인내심을 기르는 것은 중요하다. p 116



투자는 불확실성이 동반된다. 따라서 기다림과 인내를 배우며 차분하고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저축, 연말정산을 별 것 아닌 걸로 생각하고, 주식투자를 우선하는 것은 잘못됐다. 재테크 기틀을 잡으려면 저축이나 연말정산이 1순위가 되어야 한다. (…) 저축은 습관과 소비패턴을 파악 및 기록이 중요하다. 자신의 재정 상태와 소비 습관을 파악하여, 어떤 지출이 불필요하고 절약이 가능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p 117


 

 



『필연적 편협』은 전체적으로 ‘자기관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거나, ‘제테크’에 관심은 있으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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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허시명의 세계 술 기행 - 양조장과 축제장, 명주의 고향을 찾아 떠나다
허시명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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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술을 못마신다.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지역에서 유명한 술을 사오는 사람.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맥주박물관, 맥주축제, 전통주 양조장을 찾아다니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왜? 술은 마시지 못해도, 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든 그 지역에 유명한 전통주가 있다면 양조장 또는 박물관(전시관)을 꼭 방문한다. 내가 여행하는 타이밍에 그 지역에 맥주(전통주)축제가 있으면 꼭 찾아간다. 나는 거기서 이야기를 즐기고, 동행자인 신랑은 술 자체를 즐기고(ㅋㅋㅋ). 그렇게 술을 못하지만, 난 술을 즐겼고 앞으로도 즐길 예정이다.




간혹 나한테 술에 무슨 이야기가 있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술은 역사라고! 

지금 사람들이 흔히 즐겨마시는 소주만 봐도 그렇다. 지금은 초록병에 담겨있는 그저 그런 증류식 소주지만, 그런 소주가 탄생한 이유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주세령, 즉 가양주 제조 금지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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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우리나라 전통주 특징은 ‘가양주’다. 한마디로 집에서 만드는 술이다. 예로부터 제사를 중시했기 때문에, 집에서 직접 술을 빚어서 제사상에 올렸다. 집집마다 술을 빚는 방식은 물론 술 빚는 비법도 달랐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가양주 문화가 꽃 피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사실상 가양주 제조를 금지하는 주세령이 공포됐다. 곡물로 만든 술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희석식 소주는 아주 낮은 세금을 매겼다. 일본에서 만드는 희석식 소주를 한반도에서 팔기 위함이었다. 간혹 비밀리에 가양주를 지켜온 집안도 있었다. 하지만 해방이후에도 한국의 주세제도는 바뀌지 않았다. 가양주 문화는 그렇게 사라졌다.

물론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증류식 소주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널리 알려져있는 원 간섭기 때 한반도에 소주가 유입되었다는 것도 소주의 또 다른 이야기다. 더 나아가면 원나라 이전에도 중국 대륙에서는 동한이나, 당나라, 북송 등 증류 소주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당대 중국과 교류했던 한반도에 있던 여러 국가에도 소주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데 당나라와 긴밀한 관계였던 신라에, 당나라 소주가 유입되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증류식 ‘소주’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줄줄이 사탕이다. 이게 바로 술을 못마시는 내가 술을 즐기는 방식이다! 

이 책 『허시명의 세계 술 기행』은 나 같처럼 술을 못마시는 사람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술을 500%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술에 대한 인문학 책이며, 술을 따라 여행을 한 여행에세이다. 술 마시는 사람들한테는 술자리에서 교양(?)을 뽐낼 수 있는 인문학책으로 추천! 술 못마시는 사람들한테는 나처럼 여행을 다니며 술을 인문학적으로 즐길 수 있는 여행에세이로 추천한다.

술을 가장 풍성하게 소개하고 있는 우리 문헌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다. 『임원경제지』에는 180여개의 술 이름이 등장하는데, 밎는 방법을 소개한 술이 109가지, 효능을 중심으로 소개한 술이 62가지, 그리고 술을 관리하는 요령이 10여 가지 소개되어 있다. 중국 문헌에서 인용한 술도 있지만, 왜례주, 왜미림주와 같은 일본 술 제조법도 소개하고 있다. p 019

한국 술의 전통을 살피려면 중국과 일본의 술 문화를 살피면서 한국적인 특징을 포착해 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쌀이라는 주식으로 술을 빚는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많다. 백제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술 문화가 건너갔다면, 개항이 이후에는 일본인이 한반도에 건너와 식민 수탈을 하면서 일본의 양조 문화가 한반도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 p 019

현재 주세법에서는 술을 탁주, 약주, 청주, 소주, 일반증류주, 과실주, 리큐르, 맥주, 위스키, 브랜디, 기타주류로 나누고 있다. 술의 특징을 구분하는 큰 이유는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기 위해서였다. 조선 시대에는 리큐르, 위슼, 브랜디가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맥주는 보리술로서 존재했지만 지금 같은 맥주는 아니었고, 과실이 들어간 술도 있었지만 지금의 과실주와 달랐다. 현재 방식의 술 분류는 1909년 일본인 주도로 만들어진 대한제국 주세법에서 세 종류로 구분하면서 시작되었다. p 021

아! 나는 술에 대한 이야기만 즐기는게 아니다. 국/내외 여러 지역에서 술이 주인공인 축제나 맥주공장도 종종 즐기곤 했다. 물론 이 책 『허시명의 세계 술 기행』의 저자처럼 많이는 못가봤지만! 

개인적으로 2017년에 갔었던, 일본 요코하마 독일 맥주축제가 기억에 남는다. 아카렌카 창고를 보러 간거였는데, 운 좋게도 딱 그날 그 곳에서 독일 맥주축제가 개최되었더랬다. 타이밍도 이런 굿 타이밍이! 생애 첫 맥주축제였는데, 정말 술을 못마시는 나였음에도 분위기에 취했다. 안주들도 저렴해서 좋았고. 물론 동행자였던 신랑은 진짜 술을 마시며 즐겼고!

#칭다오맥주 비닐봉지에 맥주를 담아 마실지라도!

칭다오에서 해마다 8월 중순이면 맥주 축제가 열린다. 중국인들은 뜨거운 차를 즐기고, 튀기고 볶은 음식을 즐겨서인지 찬 맥주를 싫어한다. (…) 어쨌든 중국은 이제 세계 최대 맥주 생산국과 최대 소비국가가 되었다. p 130

칭다오 맥주 제조장은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생겨난 식민지 유산이다. 유산이 아니라 잔재인가? 유산이면 지킬 테고 잔재라면 지울텐데, 지키고 있으니 그냥 유산이라고 하자. 독일이 청나라로부터 칭다오를 강압적으로 조차한 것은 1897년 일이고, 독일과 영국이 합작하여 칭다오 맥주 제조장을 세운 것은 1903년 일이다. 양조 설비와 원재료를 독일에서 들여와서 가동했고, 1906년에는 독일 뮌헨 국제 박람회에 출품하여 금상을 받으며 주목받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1916년부터는 일본이 칭다오 맥주를 관리하였다. 1945년 이후에는 중국 정부가 관리하였고, 1993년에는 주식이 상장되어 자본 시장에 나와 국제 기업이 되었다. 1903년의 양조장 건물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곳을 활용하여 100년이 지난 2003년에 맥주 박물관을 만들었다. p 133

박물관을 나오자 온통 맥주거리가 펼쳐졌다. 이곳에서 꼭 맛봐야 할 맥주가 있었으니, 그게 원장 맥주다. 원장 맥주는 양조장에서 살균하지 않고 효모가 살아 있는 상태의 신선한 맥주를 말한다. 원장 맥주는 이곳, 칭다오 맥주 제조장 주변에서만 판다. 유리병이나 캔에 담긴 맥주보다 더 맛이 풍부하고 깊었다. 멀리서 칭다오 맥주 제조장 마을을 찾아오는 이유이자 마을에 맥주집들이 즐비한 이유이기도 했다. 원장 맥주를 포장해서 담아가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맥주를 병에 담지 않고, 비닐봉지에 담아 무게를 달아 팔았다. p 136

요즘 칭다오 맥주가 여러모로 부정적인 화제의 중심이다. 뭐, 중국에서 제조하는 음식 위생상태야 뭐 매년 이슈가 되서 새롭지도 않긴 하지만. 여튼! 난 칭다오 맥주가 온리 메이드 인 차이나 인줄 알았다. 뭐랄까, 칭다오 맥주 탄생은 시작부터 온리 중국이라고 생각했달까? 하지만 아니었다. 놀랍게도 칭다오 맥주는 유럽 제국주의 잔재였다. 우리나라를 점령한 희석식 소주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였듯이.


#뱀술 #미인술 멸망한 유구국의 슬픈 유산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 내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서남쪽 해변에 있는 사사히로 주조 주식회사였다. 마사히로 주조는 1883년 처음 창업할 때는 유구왕국의 궁궐이 있던 수리성 부근에 있었다. 양조장을 창업한 이는 궁중 요리사였고, 중간에 전쟁을 치르면서 단절을 겪고 지금의 제조장은 1965년에 설립되었다. 마사히로는 3대 후손의 이름이고, 지금은 4대 후손이 주조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와모리 증류주와 식초를 만드는데 둘 다 시간이 흐를 수록, 숙성의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와 가격이 올라가는 발효 식품이다. p 191

전시장에 들어와 우리는 뱀술을 보고 놀랐다. 뱀이 술병 속에 똬리를 틀고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서는 동물 술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음성적으로 거래되거나 호사가들이 사사로이 취하는 것이지, 공식 상품으로 유통할 수 없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는 뱀술, 하브주(뱀이 일본어로 ‘헤비)’가 특산주였다. 섬에 뱀이 많아서 그 뱀을 처치하다보니 뱀술을 상품화시켰다고는 하지만 보기에 섬뜩했다. p 193

뱀술을 마시는 법이 특별하다. 뱀술은 빨대로 마셔야 한다. 빨대를 목젖 가까이 대고 잇물에 술이 묻지 않게 마시는 거다. 독이 든 뱀술을 상처난 피부에 바르면 죽을 수도 있지만, 마시면 죽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진지하게 내게 해준 이도 있었다. (…) 이렇든 뱀술에는 믿기 어려운,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가 똬리를 틀고 있다. p 195

조선의 눈으로 유구를 추억할 수 있는 술들이 있다. 유구 사신들이 조선을 찾아왔을 때 가져왔던 술로 미인주와 천축주가 있었다.미인주는 세조 8년 유구 사신이 왔을 때 답한 이야기 속에 일일주(하루 만에 빚은 술)로 등장한다. 유구 사신에게 “주초, 염장의 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깨끗이 씻은 쌀로 밥을 지어 누룩에 섞어서 술을 빚으며, 다만 일일주는 15세 처녀가 입을 깨끗이 씻고 밥을 씹어서 술을 빚는데, 그 맛이 기막히게 달다. 초도 또한 쌀로 빚는다.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다. 장은 밀을 써서 바로 만든다”라고 하였다. 젊은 여자들이 입으로 밥을 씹어서 빚어 미인주라고 물렸다. p 197

사람의 침 속에는 아밀라제라는 효소가 들어 있어서 곡물을 당화시킬 수 있다. 누룩이나 발효제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젊은 여자들이 항아리에 둘러앉아 곡물을 씹어 항아리에 뱉어 담아 두면 천연 효모가 안착하여 알코올 발효를 시킨다. 오래 두면 알코올 도수가 제법 나오겠지만, 술을 빚은 지 하루만에 마셔서 일일주라고 했으니 도수는 아주 낮았으리라. 술 빚어 하루를 두면 당화는 되지만 알코올 발효는 그다지 이뤄지지 않아 독하지 않고 달달한 맛만 띠게 된다. 오키나와에서 지금은 특별한 행사 때만 미인주를 시연하고 있다. p 197

일본에 강제로 흡수되기 전까지만해도 ‘류큐’라는 독립 국가였던 오키나와. 류큐시절 부터 오키나와인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술 중에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미인주 라는 전통주가 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위생적으로 좀(...) 꺼려지는 생산방식이지만, 뭐.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니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오는게 아닐까 싶다. 엄밀히 따지자면 현재의 미인주는 특별한 행사 때만 시연한다고 하니, 일본에서도 위생적으로 꺼려지긴 하는가보다.



#식초 술의 종착역

술의 종착역은 식초다. ‘초醋’의 한자어를 살펴보면 ‘술 주酒’를 뜻하는 변에 ‘저녁 석昔’이 붙어있다. 술의 저녁, 술이 저물면 식초가 된다. 초산균은 알코올을 영양분으로 삼아 초산을 만든다. 그래서 술이 많들어지는 곳에서 좋은 식초도 나온다. 일본 규슈 가고시마는 흑초와 고구마소주로 유명한 동네다. p 231

후쿠야마 마을이 흑초 고장으로 특화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이 고장의 곡물 식초를 흑초라고 부른 것은 1975년 사카모토 양조장에서 처음이라고 하니, 흑초 시대가 열린 건 40년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에도 시대 1800년경부터 이 마을에서 식초를 빚었다고 하니, 그 전통은 200년이 넘었다. 식초를 만들던 전통이 새롭게 해석되어 흑초를 탄생시켰다. p 234

가고시마현은 흑초 붐을 일으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국립대학이나 식품종합연구소와 연계하여 흑초에 관한 과학적 연구 분석 자료를 내놓았다. 홍보관에는 1983년부터 이뤄진 90편의 흑초 연구 논문 목록을 게시해놓고 있었다. 또한 흑초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휴대용에서부터 음료용까지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 놓았다. (…) 가고시마 흑초가 유명해진 데는 활화산에서 분출되는 연기, 밭에 놓인 수만 개의 항아리, 3년 숙성된 깊은 맛, 마을의 전통적인 제조법, 흑초의 성분 분석 자료, 흑초 전문 매장과 레스토랑, 다양한 흑초 요리 세리피 개발, 용량이 다른 흑초 상품들, 음료용으로 개발된 과일 흑초 등 다양한 콘텐츠가 기여하고 있었다. 음식을 맛으로 파는 것이 아니라, 복합 문화로 판다는 것을 가고시마 흑초가 잘 보여주고 있었다. p 237

맛있는 술이 나오는 지역은 맛있는 식초를 만들 수 있다. 생각치도 못했다. 더 놀라운건 이를 지자체 관광 활성화로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오래전부터 식초를 빚었던 가고시마현 후쿠야마 마을. 지역인구가 줄고 경제도 현저히 안좋아지자, 그들이 생각해낸 방법이 바로 지역 특산품인 고구마 소주와, 흑초였다. 후쿠야마 마을 사람들과 지자체, 여러 연구기관이 합심한 결과, 흑초 고장이자 유명한 관광지로 이름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일본은 지자체 관광 활성화를 정말 잘하는 나라 중 하나다. 내가 다녀본 일부 일본 소도시를 보면 몸소 느낀다. 이런 점은 우리도 배워야하는데, 항상 나랏밥 먹는 사람들은 외국에서 나쁜 것만 배워오니 원.


다시금 말하지만 술은 마시지 못해도 즐길 수 있다. 왜? 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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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읽다 보면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시기가 있다. 일본은 전국시대(센고쿠시대)가 바로 그 때다.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막부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된다. 막부 권위가 떨어지니, 기존 다이묘(슈고 다이묘)를 통제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슈고 다이묘에 반하여 각 지역 세력자들이 들고 일어나니, 이른바 센고쿠 다이묘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서로 세력다툼을 하며 영지를 넓혀가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몇몇 유명한 다이묘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전국시대 포문을 열었던, 중심에 있었던, 종지부를 찍었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른바 천하3인이 유명하다. 한국인들은 아무래도 정권 ‘통일’이라는 관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가 아닐까 싶다. 뭐, 조금 더 들어간다면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바라본 경향도 있을거고.




하지만 천하 3인만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바라보기엔 아쉬운점이 너무 많다. 전국시대는 일본 영토 곳곳에서 전투 및 전쟁이 빈번히 발생했던 시기다. 수 많은 전투, 전쟁중에 유명한 일화를 만든 장수들이 한 둘 이 아니다. 심지어 그런 장수들 개개인 서사까지 들어가면 드라마 한, 두 편은 뚝딱일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전국시대를 배경으로한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인물과 굵직한 전쟁 및 전투 등 통사에 해당되지만.



통사를 벗어나서 전쟁사 관점으로 봤을 때도 일본 전국시대는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특히 전국시대 전쟁, 전투 방식 등은 중세 한반도에 있었던 전쟁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많아서 알면 알수록 신기한 부분이 많다.




이 책 「센고쿠 전쟁이야기」는 전쟁사 관점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이야기한다. 이름을 날렸던 장수나 일본사 통사가 아닌, 오롯이 전국시대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전국시대에 운용되었던 전쟁 방식이나, 전법, 전쟁 도구에 대한 건 기본이다. 거기다 매 주제마다 일러스트 활용이 높은데, 이는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전법이나 전쟁 도구들은 일러스트가 없었으면 이해가 조금 어려웠지 않았을까 싶고. 예컨데 방어구, 특히 투구 및 마스크의 변천사랑 개인용 깃발이나 장수용 깃발 같은 전쟁도구 변천사는 정말 일러스트가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그 뿐만인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야비한데?’ 라는 말이 나올만큼 독특한 전쟁 방식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조차 일본 전국시대에서는 전쟁 시 고려되는 수 많은 방식 중 하나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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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과는 별개로 조금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이런 일본의 전쟁 방식이나 당시 일본 정세를 조선의 위정자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랜기간 평화에 찌들어 바다 건너 옆나라가 어떤 상황인지, 첩보가 올라와도 듣는둥 마는둥. 전국시대가 사실상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도, 첩보 진위여부를 가릴 생각조차 안하던 조선 위정자들을 생각하면 열불이 터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배경 중 실질적인 요인으로는 전국시대 온갖 전투로 인해 늘어났던, 전쟁 후에는 잉여가 되버린 남아도는 병력과, 승자 편에 붙어서 가신이 된 장수들에게 줘야할 봉토 문제가 컸으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래에 이 역사책을 읽으면서 새삼 놀랐던(!) 몇몇 내용을 발췌하였다. 일본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역사책이 꽤나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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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군마는 모두 수말이었다는 점을 이용한 기발한 계책도 있다. 하시바 이데요시가 오고성을 공격했을 당시, 허를 찔린 성주 오고 사다노리는 영지 내에서 50마리가 넘는 암말을 모아서 적군을 향해 풀어놓았다. 그러자 하시바 군의 수말이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고, 병사들 사이에서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오고의 군대가 돌격하자 하시바 군은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거세라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었던 기발한 계략이다. p 028



이가 닌자의 종가인 후지바야시 나가토노가미의 자손, 후지바야시 사무지야스타케가 저술한 『반센슈카이』 등의 인술서에는 닌구를 용도에 따라 ‘등기’, ‘수기’, ‘개기’, ‘괴기, ‘화기’로 분류하고 있다. (…) 저택이나 창고의 문을 열기 위한 도구가 바로 개기다. 가느다란 쇠붙이의 끝부분이 둘로 나뉘어 있는 자물쇠 따개나 빗장을 부수는 데 사용하는 강철제 하마가리 등이 있다. p 048


센고쿠 시대에 사용된 무기 중에서 적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은 활, 그 다음은 철포였다고 한다. (…) 사실 칼은 다섯 번째다. 네 번째는 놀랍게도 돌이었다. 전장에서 입게 되는 상처 중에서 약 1할이 돌에 맞은 상처였다고 한다. (…) 단순히 손에 들고 던지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전용도구를 사용한다면 더욱 멀리, 더욱 강하게 공격할 수 있다. 줄팔매는 이를 위한 도구다. p 064



센고쿠 시대로 접어들면서 무장들은 도세이구소쿠에 맞게 거울이나 검, 부채, 동식물이나 새, 병풍, 못이나 톱, 악기 등 다양한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뽐냈다. 다테 마사무네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한 초승달을 본든 거대한 다테모노 역시 좋은 예이다. p 068



도세이쿠소쿠가 아무리 중무장이라해도 공격할 부분은 있다. 전투복인 이상 전투가 벌어졌을 때 착용자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백병전용의 도세이구소쿠는 움지이기 쉽게끔 필연적으로 가동부위가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상대방의 시점에서 본다면 공격하기 좋은 약점이었다. 센고쿠 시대에 탄생한 ‘가이샤 검법’은 이러한 약점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이지만 동시에 구소쿠를 착용한 적을 공략하기 위한 검술이기도 했다. p 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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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대장은 각 우마지루시의 위치로 번선 지휘관의 움직임과 전황의 변화를 확인한 뒤 후속지시를 내렸다. (…) 시대가 지남에 따라 멀리서도 한 눈에 알 수 있게끔 화려하게 디자인된 우마지루시가 많이 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우마지루시는 거꾸로 뒤집힌 금 호리병이었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이나바야마성을 함락시켰을 당시에 창끝에 호리병박을 걸었던 사실에서 유래한다. p 088



대군이 전장에서 격돌하는 센고쿠 시대에는 난전 중에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군을 공격하고 만다. 이를 피하기 위해 각 병사들은 다양한 표식을 달아 적과 아군을 구별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표식이 바로 ‘소데지루시’다. (…) 동시에 이는 적에게 소데지루시를 내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난전 중에 찢겨져 나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암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암호를 잊어버린 탓에 아군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p 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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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금표 - 우리는 무엇을 금지당했나?
김희태 지음 / 휴앤스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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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이신 희태님이 오랜기간 답사 및 연구에 매진하셨던 한국의 금표. 드디어 그 결실이 나왔다. 금표라는 것이 본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인정은 커녕 전문가들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잊혀졌다. 자칭 역사더쿠라고 하는 나조차도 금표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을 뿐더러, 유적지 답사를 가다가 분명히 마주쳤을 금표였음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답사 당시 찍었던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세상에나. 금표 사진이 있었다. 내 손으로 사진까지 찍었음에도 머리속에서 지워진 것 보면, 그만큼 금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단 이야기겠지?



금표란 금할 금(禁), 표할 표(標)에서 보듯 행위의 금지를 표식한 것이다. 주로 표셕의 형태나 바위 등에 글자를 새겼는데, 출입과 이요의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기에 금표의 분류 기준은 어떤 행위의 금지냐에 따라 달라진다. 현재까지 확인된 금표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산림 관련 금표로, 이 중 나무와 관련된 금표의 비중이 다수를 차지한다. p 014



금표는 특성상 소재지가 산이나 비공개 지역, 험지 및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에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인해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잊혀진 것 같고. 잊혀지지니 자연히 사람들도 문화재라 인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느 순간 유실되어도 유실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거고. 이래저래 참 아픈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아픈손가락에 더 관심을 갖고 챙겨준다는 말이 있다. 금표가 딱 아픈손가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아픈손가락에 관심을 갖고 보듬은 이가 이 책 「한국의 금표」 저자인 희태님이 될거고. 추측이긴 한데 희태님 전작인 태실 연구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은?



희태님은 이 책을 쓰면서 금표에 대한 역사성을 살리고자 남아있는 사료들 교차 검증 및 금표가 세워진 배경이나 사건도 같이 조명했다. 역사책이다보니 왜곡, 축소 및 과장을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행히도 희태님은 ‘아는건 아는대로 쓰고 모르는건 모르는대로 남겨둔다’는 모토 아래 책을 집필하는 분이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제일 큰 장점은 사진자료라는 것! 모든 금표 사진 자료는 물론 역사적 배경 및 사건 설명에 대한 사진자료까지 전부 실려있다. 접근하기 쉬운 장소부터 시작해서, 접근하기 어려운 험지까지 모든 사진자료가 다 있다. 이를 보다보면 현장을 답사한 희태님이 금표 연구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오죽하면 역사더쿠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 이도학 교수가 추천사에 이런 말을 썼을까?


한국인 가운데 ‘금표’를 들어 보기라도 한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김희태가 고산준령을 넘고 들판을 누비고, 관련 문헌을 뒤적일 때

문화재 전문가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한국의 금표」 이도학 교수 추천사



책 말머리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국의 금표를 조사, 연구를 진행한 이는 단 한명도 없다고 한다. 물론 개별 금표에 대한 논문등이 나온 적은 있으나, 이는 연산군 시절 금표라던가 산림청에서 발표한 산림금표 같은 특정한 금표에 한해서다. 한마디로 이 역사책 「한국의 금표」는 전문가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아니 어쩌면 방대한 양에 눌려 하지못했던 일에 대한 결실이다. 이 역사책 「한국의 금표」는 한국 금표 연구에 대한 기초자료로써도 손색이 없다.




왕실금표: 왕릉 금표, 태실 금표 및 화소, 왕실 관련 장소 금표


왕실금표는 말 그대로 왕실과 관련된 능원이나 태실, 왕의 거주지 등 왕실과 관련된 장소에 세워진 금표다. 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왕릉 금표는 이 책의 저자인 김희태님이 발견한 화성 외금양계비가 유일하다. 태실 금표도 많이 유실되긴 했지만 보은 순조 태실, 영월 철종 원자 용준 태실, 홍성 순종 태실 등에서 일부가 확인되었다.


현 융릉과 건릉의 규모는 과거와 비교해 많은 차이가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소(火巢)’와 ‘외금양(外禁養)’에 대해 알아야 한다. 화소란 능이나 태실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 지점에 불에 타기 쉬운 나무와 잡풀 등의 발화요인을 제거한 일종의 완충지대다. 『정조실록』과 『일성록』을 보면 현륭원 바깥으로 외금양을 두었는데, 금양 지역으로 설정되면 나무의 벌채와 농지의 개간, 무덤 조성 등이 금지되었다. p 064




단종의 복권은 유배지였던 영월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흔적이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비다. (…) 청령포에 금표비가 세워진 이유는 단종이 왕으로 추복되면서, 청령포는 더 이상 유배지가 아닌 왕이 거처했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p 107



전주성의 남문 이름이 풍남문이며, 객사의 명칭은 풍패지관이다. 풍남문의 풍(豊)과 풍패지관의 풍패(豊沛)는 한 고조 유방의 패현 풍읍 출신인 것과 관련있다. 즉 제왕의 출신지에 붙여진 요엉로, 이는 전주가 조선왕실의 발상지인 것과 관련이 있다. 전주 자만동 금표가 세워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만동 금표는 자만동 벽화마을 내 골목길에 있는데 (…) 이목대가 있는 자만동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를 세운 것으로, 언제 세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경단이 정비되던 고종 때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p 121




왕의 거주지 금표로는 단종이 노산군 시절 거주했던 영월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와, 조선 왕실의 시조인 전주 이씨 조상 묘역을 보호하기 위한 전주 자만동 금표가 있다.



이 두 금표는 여러 의미로 많은 역사적 이야기를 포함한다. 단종은 모두가 알듯, 삼촌인 세조에게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죽은 비운의 왕이다. 즉 죽었을 당시만해도 왕이 아닌 ‘노산군’이었다. 따라서 단종이 죽기전까지 살던 영월 청령포도 그저 죄인이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숙종 때 그 지위가 복권되면서, 청령포도 덩달아 왕이 살던 곳으로 지위가 급상승했다.


전주 자만동 금표는 또 어떠한가. 조선 후기 족보찾기 열풍이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인조 때 부터 찾기 시작한 전주 이씨 시조묘 찾기 열풍은 후대 왕들을 거쳐 고종 때 까지 간다. 하지만 당연히 시조묘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고종은 시조묘(가묘)를 조성하고, 시조를 위한 제단을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전주에 있는 조경단이다. 뿐만 아니다. 전주 이목대는 고종이 이성계의 5대조 이안사의 출생지라고 명한 곳이다. 저자의 말처럼 자만동 금표는 정확하게 언제 조성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 일대가 고종 때 정비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금표 역시 고종 때 세워진 것이 아닐까.


조선 왕실의 권위를 위해 어떻게든 시조묘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던 고종이니 만큼, 조선 왕실을 이끄는 전주 이씨의 탄생지와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흔적이 있는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를 세우지 않았을까.



산림금표: 황장금표, 향탄금표, 삼산봉표, 기타


산림금표는 크게 구분할 때 금강송(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한 황장금표, 향/참나무(향탄목)을 보호하기 위한 향탄금표, 밤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율목봉산, 산삼을 보호하기 위한 산삼봉표 등이 있다. 나무를 보호하는 금표라고 하면, 지금 기준에서는 ‘자연보호’는 당연한 일이라지만 금표까지는 너무했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조선 소나무들의 잔혹사를 모른다면 말이다.


‘금산’은 조선 초기 산림의 보호와 이용을 위해 특별히 사인의 출입과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지정된 산을 뜻한다. 금산의 목적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송금(松禁) 정책인데, 송금은 나라에서 정한 삼금 중 첫번째였다. 그랬기에 소나무를 보호하고, 무단으로 벌채하는 행위를 엄금했으며 이러한 조치들은 금산의 증가로 이어졌다. p 036



산림의 사적 소유가 늘어나면서 그나마 남은 공유지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때문에 공유 자원이 고갈되고 황폐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산림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정책적으로 산림에 대한 보호가 필요했다. 그 결과 송금정책을 시작으로 금산, 봉산 등의 제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산림의 훼손과 황폐화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기에 국가차원에서 나무를 심고 무단으로 베어낼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대첵을 세웠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산림은 백성들에게 생존수단이었기 때문이다. p 046


조선 백성들에게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집을 지을 재료가 되고, 난방을 위한 뗄깜이 되며, 어부들이 타는 어선을 만드는 재료였다. 흉작일 때는 껍질을 달여먹기도 했고, 송화가루는 약재로 사용되었다. 백성 뿐만인가? 조선 정부에서도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궁 및 사찰 건설 재료였고, 해군이 타는 병선 재료였으며, 제사에서 쓰는 향과 숯의 재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조선의 소나무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고 중요한 생활자산이었다. 더군다나 나무가 있는 조선의 산은 공유지였으니, 너도나도 들어가서 벌목을 하기 바빴다. 조선 산림 황폐화는 예견된 수순이었다. 오죽하면 조선 문인들 기록속에서도 ‘민둥산’이라는 표현이 확인될까.


심지어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조선의 산지는 완전 초토화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푸릇푸릇한 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다름아닌 박정희 정부 때 산림법이 제정 및 산림청이 신설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개량 소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그린벨트가 지정했다. 우리가 아는 식목일 지정 및 식목일에 나무심기 행사가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



조선도 정부에서 금표를 지정하고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산림살리기는 성공했다. 이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아닌 생활 자원의 변화였다. 석탄 대중화로 나무 뗄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시멘트 대중화로 주택 건설 재료가 변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울창한 산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함정이라면 내 눈 앞에 있는 산은 울창하지만, 내 눈에서 벗어난 산들은 지금도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에서 불을 사용하는 무개념들로 인해 산불이 나거나, 도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산이 깎여나가는 형태로.



양양문화원에 따르면 사진으로 남은 장리 금표의 명문은 ‘연자산 북계칠십리’로 확인된다. 하지만 지난 2002년 태풍 루사의 내습 당시 유실되었다. 원일전리 금표 역시 2008~2009년 사이 새 농촌건설 하천 정비사업 당시 훼손되었다. 마찬가지로 탁본으로 남은 어성전리 금표의 명문은 ‘금표십리’로, 해당 금표도 1984년 군도 확장공사 과정에서 매몰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또한 사진으로 남은 법수치리 금표의 명문은 ‘금표’로 학인되고 있으며, 지난 1997~1998년 사이 법수치리 용화사 입구 다리 공사과정에서 파괴되었다고 한다. p 132



원주 비로봉 황장금표는 지난 2016년에 발견되었는데, 바위에 ‘황장금표’가 새겨져 있다. 한 장소에서 3곳의 금표가 발견된 사례는 치악산이 유일하며, 과거 치악산 일대가 황장봉산으로 지정되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p 136



그렇게 현대에 들어 야금야금 산림이 훼손되면서, 덩달아 남아있던 산림금표들도 유실되었다. 아주 간혹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산림 금표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사찰금표: 장묘 금지 금표, 왕실 관련 사찰, 사찰 내 행위 금지


유교의 나라 조선, 억불숭유가 기본이었던 조선에서 어떻게 사찰을 보호하는 금표를 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 왕실 사람들은 사찰을 좋아했다. 왕 또는 왕비에 따라 불교를 진흥한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왕릉 및 태실을 만들 때, 왕릉을 수호하는 원당사찰이나 태실을 수호하는 태실수호사찰을 꼭 지정했다. 사찰금표는 그러한 왕실 관련 사찰이나, 해당 사찰 내에서 행위를 금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안동 봉정사 금혈비는 일주문의 좌측 숲속에 있는데, 기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과 『디지털안동문화대전』 등에 봉정사 금혈비의 존재와 위치를 정확히 언급하고 있다. 지난 2019년에 금혈비로 추정되는 현장을 찾았을 때 비신이 뒤집힌 채 방치되고 있었다. (…) 이번에 금표 고나련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는데, 3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석의 명문을 확인하기 위해 뒤집혀 있는 비석을 들자 전면에 새겨진 명문이 눈에 들어왔다. 비석의 명문을 한자씩 확인하다 ‘금혈’ 부분에서 시선이 멈췄다. 봉정사 금혈비인 것이 명확해진 순간이었다. p 201



보은 법주사 일주문을 지나 걷다 보면 속리산사실기비 옆에 두 기의 비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벽암대사비’와 ‘봉교비’다. 이 중 봉교비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시대 법주사 지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 ‘봉교’란 임금이 내린 명령을 받는다는 의미로, ‘금유객제잡역’은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하고 잡역을 면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p 210



왕이 거주했던 곳도 금표를 세우는 나라였으니, 왕실사찰 역시 금표를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사찰 내 행위를 제한하는 금표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역시나 억불숭유가 기본이었던 조선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조선 선비들은(그러니까 유학자들^^) 유람을 자주 떠났다. 가끔 명승지에서 조선 문신들이 글을 세긴 바위를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놀러온 김에 왔다간 흔적을 남긴 경우다. 뭐 여튼, 이렇게 유람하는 선비들은 근처에 사찰이 있으면 찾아가서 행패를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 오죽하면 사찰을 부시고 그 자리에 서원을 만들 정도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운동 서원이다. 최초의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된 그 서원이다. 원래는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러한 사례가 많다보니 왕실 사찰의 안전도 보장하기가 힘들어졌을테고, 사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금표를 세운 것이 아닐까.




종교/신앙금표


종교/신앙금표는 사찰금표를 제외한 종교나 민간신앙관련 지역에 세워진 금표다. 단군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이라던가, 무속에서 제일로 취는 최영장군 사당이라던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수입된 관왕묘(관우사당)에 세워졌다.



제주 추자도 신묘금지비는 최영 장군 사당에서 봉골레산으로 이어진 제주 올레 18-1코스 구간에 있다. 이곳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는 이유는 1323년(공민왕 23년) 제주에서 원 목호인 석질리 등이 난을 일으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 p 247



최영이 반란으로 토벌하러 가는 길에 풍우를 만나 잠시 추자도에 정박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최영은 이곳 주민들에게 어망편법과 고기잡는 방법등을 가르쳤다고 하며, 이에 주민들은 최영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당의 동쪽에는 신묘금지비가 있는데, 이 비석은 최영 장군의 사당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금표의 일종이다. p 248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장군이 제주도로 내려간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야. 제주도로 내려가서 목호들을 토벌하기 전 과정에 이런 일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 개인적으로는 아래 관왕묘를 보호하는 금표보다는, 이렇게 최영사당을 보호하는 금표가 훨씬 가치가 있다고 본다.



숙종시기부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숙종은 관왕묘로 친히 시를 지어 보내고, 심지어 직접 찾아 친제를 행했다. 또한 지방에 있는 안동 관왕묘 정계를 넓히고, 성주 관왕묘를 이건했다. 이후 영조와 정조, 순조, 철종 등을 거치는 동안 관왕묘는 왕이 친제를 행했던 중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관왕묘 위상이 변화했던 건 당대 명분인 대명의리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인식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 관왕묘에도 금표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되는데, 바로 금잡인 표석이다. “잡인의 출입을 금지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p 258



현재까지 확인된 금잡인 표석은 ▶서울 공관왕묘 ▶강화 동관제묘 ▶강화 남관제묘 총 3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p 260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관왕묘는 서울, 강화도, 안동, 남원, 완도에 있다. 우리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관우를 신격시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헌데 왜 관왕묘가 이 땅 곳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선조가 명나라에 구원요청을 하고, 명나라는 원군을 보냈다. 조선에 도착한 원군들은 자신들이 믿는 관우사당을 한반도 곳곳에 만들었다. 심지어 명나라 군은 선조에게 관왕묘 참배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조금 놀라운건 임진왜란의 승리가 명나라 덕분이라고 명을 떠받치던 선조조차도 관왕묘 참배 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선조도 하지 않은 걸 숙종이 했다. 심지어 관왕묘 지위를 한껏 높여주었다. 이 배경에는 중원의 패자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고,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한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망해버린 명나라를 드높이는 이상한 생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야기하면 길어질 뿐더러 분노가 치솟을 것 같으니 각설!!




장소/행위 금지 금표: 사산금표, 사패지금표, 행위금지 금표, 기타


장소 관련 금표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보호를 위해 세운 경우로, 대표적으로 한양도성을 둘러싼 4개의 산(백악산, 목멱산, 낙산, 인왕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사산금표’가 있다. 행위 금지 금표로는 연산군 시대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세운 금표가 대표적이다.



은언군의 묘는 철종의 즉위와 함께 그 위상이 달라졌다. 이유는 은언군의 가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도세자-은언군-전계대원군-철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철종이 즉위한 뒤 은언군과 전계대원군 추숭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은언군 묘에 제각이 만들어지고 석물이 세워졌으며, 철종이 직접 은언군 묘소를 전배했다. p 273



조금 놀랐던 점은 은언군 묘역 사패 금표다. 은언군은 모반죄로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천주교 박해당시 사사된 정조의 이복형제다. 죄인으로 죽었던 은언군 묘를 지키는 금표. 이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죽었다가 복권된 것과 비슷한 케이스다.



은언군의 손자는 강화도령 이원범. 안동 김씨에 의해 왕이 된 자, 철종이다. 왕이 된 손자는 아비와 조부를 추숭했고, 그 과정에서 은원군 묘에 금표가 세워진 것이다.



기타 금표: 한글 금표, 목적을 알 수 없는 금표



지금까지 금표는 금표라는 문구가 한자로 세겨진 금표였다. 보통 조선시대 세워진 비석은 한자를 세기니 당연한 일이다. 헌데! 한글로 세겨진 금표도 남아있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위치는 이윤탁과 고령 신씨의 묘 옆 비각 안에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한글이 새겨진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기에 한글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해당 비석에서 중요한 부분은 옆면으로, 영비 아래 한글로 30자가 새겨져 있는데, 안내문에 기록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신령한 비다. 쓰러트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p 303



포천 인흥군 묘계비는 인흥군 묘로 들어가는 길에 있었다. 인흥군은 선조와 정빈 민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영(瑛)이다. 인흥군 묘계비에서 주목해볼 점은 앞선 이윤탁 한글 영비의 사례처럼 한글로 새겨진 경고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비기 극히 영험하니 생심도 사람이 건드리지 말라.” p 304



영남 남송리 금표는 인곡마을에서 쌍계사지로 가는 길에 있는 감나무밭에 세워져 있다. 길쭉한 형태의 자연석 전면에 ‘금표’ 두 글자만 새겨져 있다. 추가 명문이나 기록들이 확인되지 않기에 해당 금표가 어떤 목적으로 세운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위치상 국사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쌍계사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p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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