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New 다이제스트 100 시리즈 5
정토웅 지음 / 가람기획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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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전쟁사 책이다. 세계 전쟁사는 이전에도 책을 수차례 읽어본 적이 있고, 무엇보다 임용한 교수님의 《토크멘터리 전쟁사》 열혈 시청자(!!) 였던 나인지라 전쟁사는 내게 익숙한 분야다. 다만, 여기에 함정이 있으니! 언제봐도 동양 전쟁사는 이해가 잘되고, ‘아?’ 하면 ‘맞아맞아!’ 하고 바로 넘어가는 반면 서양 전쟁사는 매번 처음 보는 기분이랄까T_T. 하. 이건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런건가? 그냥 영어로 이루어진 전쟁 이름이 싫은건가. 후....




정작 아이러니한 사실은 동, 서양 전쟁사를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내용이 풍부하고 자세한건 서양 전쟁사라는 점이다. 예컨데 고대 전쟁사를 보자. ‘트로이 전쟁’, ‘마라톤 전쟁’, ‘살라미스 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 우리에게도 꽤나 유명한 전쟁들이고, 지금도 많은 정보가 아주 디테일하게 남아있는 전쟁이다. 무엇보다 이 전쟁들은 ‘서양’에서 일어난 전쟁들이다. 



반면 우리 고대사 속 전쟁은 어떤가? 이 땅에서 여러 나라가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쟁 또는 전투가 빈번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국가(연맹국가)시절의 기록은 없다고 봐야하고, 그나마 나오는 기록이라고는 삼국시대 기록인데, 이 기록들마저도 ‘A국가가 B국가로 쳐들어갔다’, 내지는 ‘~점령했다’ 혹은 아예 기록 없을 무. 



우리는 세계전쟁사가 대부분 서양 위주로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고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는 데 반해, 동양자료는 빈약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양 자료는 전쟁기록은 많지만 ‘싸움이 있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웠는가에 대하여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 한계다. 더구나 동양문화는 서양문화와 달리 각 나라와의 활발한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각국의 전쟁사는 자국 아닌 다른 국가 사람들의 관심까지 크게 끌지 못했다. 그 결과 충분한 실증과 토론을 거치지 못한 동양 전쟁사는 별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p 038



기원전 4세기 인물인 알렉산드로스 동방원정에서 몇 명의 군인을 동원했고, 어떤 전법을 이용했고, 어떤 루트로 진격을 했는지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과는 확연하게 비교가 된다.



어라? 그래서 그런가? 내가 서양전쟁사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동양 전쟁사와는 달리 전쟁사적으로 너무 디테일한 정보가 많아서?! 아 왠지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하ㅏ하ㅏ...





사담이 길었다..


본격적으로 이 세계사책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100」을 소개해보자면, 이 책은 동/서양을 아울러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또는 전투)를 100개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목차도 어디까지나 동,서양을 합친 시대순! 







목차에서 서양 전쟁(또는 전투가)이 많은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던 정보의 불균형 때문이랄까?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듯. 참고로 이 책에는 부록형식(?)으로 세계 전쟁사 연표가 실려있으니, 전쟁사를 한 눈에 보기에도 좋을 듯. 





아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알게 된 사실이라던가, 디테일한 전쟁정보가 신기하다던가, 동/서양 전쟁 기록이 눈에 띄게 비교가 되어 체크해둔 부분을 옮긴 내용이다.


서양


아마존 전설(BC16~12세기)


그리스 신화와 전설 가운데는 아마조노마키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그리스어는 여전사들로 구성된 아마존 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그리스 남자들로 구성된 전사들과 침략한 아마존 족 간에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싸움 잘하는 아마존 족의 침략을 남자전사들이 나서서 격퇴시킴으로써 그리스를 지켰다는 내용을 주레로 삼고 있다. 말하자면 성 대결적인 전투에서 남자들이 승리하고 남자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그 후 그리스 역사는 남자들이 주역을 담당하여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마존 족의 존재와, 아마조노마키는 역사적 사실이었을까? p 011



1950년대에 우크라이나 남부지방에서는 사르마트 족 전사들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 그 무덤들의 약 20%가 여전사들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젊은 여자 두개골과 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활과 화살, 화살통, 단검, 갑옷 등이 나오고, 두개골이 크게 상처받은 형태나 뼛속에 박혀 있는 청동제 화살촉 등이 발견된 것은 사르마트 족 가운데 여자전사들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아마존 전설에서 여전사들이 활동한 지역 중 하나로 이미 알려진 곳이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사르마트 족은 그리스의 젊은 청년들과 아마존 족의 일시적 결혼에 의해 생긴 후손들이었다. p 012



아마존 전설은 문자기록이 없던 선사시대에 사람들은 모계중심 사회를 구성하고 여존남비의 사상이 지배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또 그 당시 전쟁에서는 여자들이 두드러진 확약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p 014


아마존 전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딱 ‘전설’일 뿐이었다. 헌데 아마존 여전사 이야기가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 심지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까지 있다니!!!!!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책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그 내용은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다름아닌 전 세계 고대 역사에서 발견되는 여성숭배, 이른바 여성숭배에 대한 ‘문화의 보편성’.



동, 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역사(문명)에서 발견되는게 바로 나체 여신상이다. 수렵, 채집을 하는 석기시대는 모계사회 및 여성숭배가 일반적이었다. 여성은 수렵과 채집을 위한 노동력을 생산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문화가 발달하고 잉여재산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노동력이 남아돌았고, 이른바 부족들 간의 땅따먹기가 시작된다. 당연히 무기를 휘두르는 강한 힘을 가진 남자들이 권력을 쥘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이게 딱 아마존 여전사들 이야기와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한마디로 ’아마존 전설(아마존 여자전사)’ 이야기는 당대 그리스 사회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거기에 더해서 부계사회에 대한 정당성도 한 스푼 추가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과 페르시아 정복(BC 4세기)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이룬 업적은 하나의 전설과 같다. 특히 전쟁사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과 업적은 실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군들도 약점을 보이게 마련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군사 분야에 있어서 그야말로 오나벽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의 단순한 계승자 차원을 넘어서 전략 전술에서 페르시아/그리스/마케도니아 세계의 어떤 선구자보다 앞서는 개념과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p 050



왕으로 취암한 2년 후인 기원전 33년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최고의 군대인 보병 32,000명과 기병 5,100명을 거느리고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 알렉산드로스는 단지 180척의 군함밖에 없는 데 비해 페르시아 함대는 400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1차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4년이 소요되었다. p 051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싸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싸움, 기원전 332년 티로스 싸움에서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비록 숫자는 많지만 여러 면에서 뒤떨어져 있던 페르시아 군대를 모두 물리치고 승리했다. 페르시아 군의 가장 큰 약점은 기병과 보병 간 협조체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반면 마케도니아 군은 필리포스가 개발한, 보병과 기병의 협동을 기초로 하는 ‘망치와 모루’ 전법에 숙달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 군은 먼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페르시아 기병을 공격하고, 그 다음에는 기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보병을 공격함으로써 적을 조직적으로 격파했다. p 052


카르타고 군대와 한니발(BC 3세기)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완전한 역전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걸출한 명창 한니발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니발은 도저히 통합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카르타고 군의 이질적 요소들을 오히려 한데 모아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하고,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자기를 따르게 하는 비범한 통솔력을 가졌으며, 적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하는 혜안을 소유한 군사적 천재였다. p 061



이후 로마는 전장에서 한니발을 피하고, 그 대신 로마 지도자 파비우스의 주장에 따라 지연전을 전개하여 한니발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후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용되는 지연전 위주의 전략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불렀다. p 062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 로마에서는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테렌티우스 바로 두 통령이 선출됨으로써 파비우스 전략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공격적이고 자존심 강한 로마인들이 그런 소극적인 전략에 만족할 리 없었다. (…) 다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한니발로서는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p 063



칸나에의 섬멸전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한니발의 창의력과 주도면밀한 양익포위전술, 그리고 탁월한 통솔력 및 추진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한니발과 같은 명장이 나온 것은 바로와 같은 우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전쟁사에서 승리는 패배한 측의 과오와 우둔함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p 066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은 워낙 유명하지만, 굳이 내용을 옮긴 이유는 이들이 활약한 시기와 그들이 남긴 기록때문이다. 이들이 할약한 시기는 기원 전 3~4세. 우리나라로 치면 고구려, 동예, 옥저, 삼한 등 초기 연맹 국가가 있었던 시기다. 기록이 없어도 이상하지 않을 까마득한 옛날인데, 놀랍게도 이들의 전쟁(전투)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다. 몇 명의 군사가 참전했고 어떤 전법을 사용했고, 어떻게 적을 격파했는지 등 빠짐없이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반면 당대 한반도에 있었던 연맹국가 기록들은...음. 국사를 배웠다면 알 것이다. 이렇게 세세한 전투기록은 1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 비교되는거 아닌가..ㅜㅜ



제정로마시대의 군대(BC 27년~)


기원전 27년 카이사르의 조카 손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제1시민’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사실상 그는 황제의 지위를 누리고 제정로마 시대의 테이프를 끊었다. (…) 그는 공화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약 60개의 로마 군단을 28개로 줄이는 개편작업을 벌였다. 과거 장군들이 제멋대로 임시 군대를 모집하는, 비경제적이면서 정치적으로도 위험했던 관행을 중단시켰다. 어떠한 군인도 자신이 아닌 다른 장군에게 충성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직업적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자신이 직접 관장하는 국가재정으로 군인들에게 보수를 지급했다. p 077



아우구스투스 후계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큰 전쟁 없이 국경지역을 성공적으로 방호했다. 제13대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더 이상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기존의 경계선을 영구적으로 요새화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로마군은 대대적인 장성을 쌓고 완전히 요새수비에만 의존하는 군대로 변했다. 이제 군대는 전사들의 전통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경찰처럼 변질되었으며, 활발한 이동보다는 주로 한 곳에 주둔하고, 군사적 업무보다는 엉뚱한 데 관심을 쏟아 점차 무기력해져갔다. p 078




심지어 기원전 1세기 인물인 옥타비아누스는 국방 및 군사제도를 개혁했는데, 이 모습이 현재 군인들 모습과도 흡사해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역사 속 군사제도를 생각해보면 하하.하ㅏㅎ.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길을 잘 닦았다고 해서, 그게 대대손손 이어졌느냐! 그건 또 아니다. 후세들이 평화로운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균열이 시작되는 건 당연지사!



동양


춘추전국시대의 전쟁(BC 770~)


춘추시대 전쟁방법은 거의 같은 시대의 서양에서 유행하던 방법과 유사했다. 주로 제후나 장수들이 전투용 마차를 타고 들판에서 싸웠으며, 전차 1량에 30인의 보병이 붙었지만 그들의 역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로서, 제한된 구리 생산량 때문에 장수들만 장검을 휴대하고 싸웠다. 이때 전투는 일반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끝나고, 결과에 따라 제후국들 간의 합병이 잇따랐다. 전국시대에 7강국(진/초/연/제/한/위/조) 간 전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p 039



철이 생산되었을 때 초기에는 주로 농기구로 이용했으나 차츰 무기로 사용했다. 보병들은 철로 만든 장창과 방패를 휴대하고 철제 화살촉을 이용했다. (…) 동서양은 문화수준에 큰 차이가 나는 만큼 전법에서도 차이가 컸다. 서양에서 주 공격무기는 창이었으나 동양에서는 활이었다. p 040



《손자》의 저자는 춘추시대 제나라 태생의 손무였다. 오나라 제후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밑에서 유명한 장수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나라 사람이었던 손무가 오나라로 국적을 옮기게 된 데는 제나라 정치가 극도로 어지럽고 정변이 자주 발생하자 오나라에 망명을 간 것이라 한다. (…) 그 결과 약소국 오나라는 일약 강국으로 등장하고, 초나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인접국인 제/진/월나라 등에 대해 위협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p 044



동양 전쟁사의 시작! 치열하게 땅따먹기가 진행되었던 춘추전국시대(중국). 정말 많은 전쟁과 전투들이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 기록은 위 알렉산드로스, 한니발과 비교했을 때 정보가 너무 빈약하다. 뭐 어쩌겠는가. 전쟁 기록에 대한 중요도가 서양보다 낮았던 동양을 탓할 뿐. 씁쓸하구만.



진시황제와 만리장성(BC 214년)


현재의 만리장성은 17세기 초 명나라 때에 쌓은 성이며, 이는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 시황제가 쌓은 만리장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축성을 하는 데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진시황제 때의 만리장성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진나라 시대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에서는 자국의 영토를 지키고 적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을 따라 성벽을 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p 067



시황제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옜 장성을 보수, 연결시키고 새 장성을 쌓아서 대장성을 만들었는데, 그 장대함으로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이 성의 실제 길이는 서쪽 감숙지방으로 부터 동쪽 요동지방까지 2,400km에 달했다.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만리장성의 총 길이는 5,000km다. 이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나라 때로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p 068



이건 조금 놀랐다(아마존 전설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의 만리장성이 진시황제 때 만리장성이 아닌, 명나라 때 축성된 장성이라니!! 뭐 중국 입장으로 볼 때, 관광명소 홍보에 있어서, 중세인 명나라보다는 고대인 진나라가 훨씬 홍보효과가 있을테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초 전쟁, 유방과 항우의 대결(BC 206년)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은 기원전 206년 부터 거의 4년에 걸쳐 전쟁을 했다. 전쟁터에서 유방은 자주 패했으나, 진나라 수도였던 함양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달아나오기만 하면 또다시 군대를 일으키곤 했다. 그것은 마치 전국시대 진나라가 본거지를 전략적 요충인 함양에 두고 부대를 잘 운용했던 것과 같다. 주, 진, 한, 당 등 중국 역대의 대왕조가 모두 함양에 도읍을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p 071



유방의 장수 한신은 북방 제국들을 차례로 공략하며 한나라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갔다. 한신은 북방지역을 공략할 때 상식에 벗어나는 이른바 ‘배수진’의 방법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대승을 거둔 바 있는데, 이후 ‘배수진’의 아이디어는 전투상황에 따라 자주 사용되어왔다. p 071



항우에게도 한신 만한 장수로 범증이란 자가 있었지만, 항우가 그를 의심하는 바람에 초나라를 떠나버림으로써 그들의 관계는 유방, 한신의 관계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p 072


적벽대전(AD 208년)


유럽이 하나의 대제국을 형성하고 로마의 통치를 받던 시절, 중국은 천하 통일과 군웅할거가 반복되는 가운데 잦은 왕조 교체를 보이고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중국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유럽에 비하면 너무 조잡하고 트깋 군대의 특성과 전술의 발달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우며, 다만 유명한 장군들의 무용과 지략에 관한 이야기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p 081



동란시절 군웅들이 즐비하게 나타나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두각을 나타낸 자들은 조조, 유비, 손권 등이었다. 중원의 패자가 된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이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부로 진격했다. 이에 유비는 그가 삼고지례를 다하여 맞아들인 제갈공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며 손권과 손을 잡고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게 되었다. (…) 적의 약점을 간파한 연합군은 화공작전을 쓰기로 했다. 화공을 하려면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조조의 군대는 밀집부대를 이루고 있고 바람이 동남풍이 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p 082



연합군은 조조의 남방 재패의 야심을 분쇄했으며, 이 싸움을 계기로 조조의 세력은 위축되고 유비와 손권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결국 3자는 천하를 삼분하여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가 문자 그대로 솥발처럼 정립하는 삼국시대를 열었으며, 다시 그들끼리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다가 280년 위나라의 사마염에 의해 진나라로 통일을 이루었다. p 083



전체적으로 중국(동양) 전쟁사는 전략, 전술보다는 덕장이냐, 용장이냐, 맹장이냐 등 ‘인물’에 중심을 두고 기록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초, 한나라 전쟁을 두고 소설 「초한지(초한연의)」가 탄생했고, 삼국시대를 두고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가 탄생했다. 어디까지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유명 소설 탄생이다(오래도록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얼마나 인물에 중점을 두었는지는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를 보면 알 수 있다. 왜? 소설 「삼국지」 주인공은 다름아닌 유비. 심지어 삼국지 속 전쟁 장면을 보면, 전쟁이 메인이 아니라 전쟁을 지휘하는 등장인물들이 메인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소설 「삼국지」에서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매력적으로 만든 캐릭터들은 작중에서 대부분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이야기. 실제 역사 속 삼국지 최후의 승자는 갑툭튀(!) 사마염이다. 유비나 조조나 죽써서 개준거지, 뭐.



고구려/수나라 전쟁, 살수대첩 (AD 612년)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서부터 흥기하여 한반도뿐만 아니라 북으로 오늘날 중국 땅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쳐나감으로써 자연히 중국과 국경을 이룬 요하 주위 지역에서 전투가 자주 발생했다. 고조선 이후 삼국시대 고구려는 한민족의 대를 이어 강국으로 등장하고, 북방지역의 유목민인 선비족을 몰아내면서 국경지역을 안정시켰다. (…) 그러나 581년 중국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한나라 이래 최대 제국을 건설하고 동방의 강대국 고구려 땅을 넘보게 되었다. p 097



적이 압록강을 건어오기 직전에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은 항복을 가장하고 적진을 방문했다.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을지문덕을 보내고 난 후에야 우중문과 우문술은 고구려의 항복을 의심하게 되었고, 게다가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하며 지휘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을지문덕은 추격해오는 우문술의 군대를 더욱 지치게 하기 위해 접전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패주, 살수 이남으로 깊숙이 유인했다. p 099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소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이제 그만두기 바라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제의를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제 평양성 공략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닫고 총 퇴각을 결심했다. 우문술 부대가 철수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을지문덕 국은 습격을 시작했다. 적 병력이 살수에서 약 절반쯤 도하했을 때 고구려군은 후위부대를 엄습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수나라 군대는 일시에 무너지고 일부 도주병들은 일주일 동안에 압록강까지 약 180km를 내달렸다. 30만 명의 별동대 가운데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온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원정군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거점방어식 청야입보와 같은 훌륭한 전법을 일찍이 개발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수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동북아 강대국의 자리를 확고히 지켰다. p 100



그래도 동양 전쟁사인데, 우리나라 역사가 빠지면 섭하다. 책 읽으면서도 점점 섭섭해질 무렵(!) 우리나라 전쟁사가 첫 등장했으니, 바로 중국과 한판붙어서 대승을 거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심지어 병력 수와 전법까지 있다. 하 감개무량해T_T.



고구려/당나라 전쟁, 안시성 전투(AD 645년)


당 태종은 수 양제와 마찬가지로 평양성 점령을 최종 목표로, 육군은 요동반도를 통과하고 수군은 바다를 건너는 수륙 양면작전 전개를 계획했다. 그러나 양제가 범한 과오를 분석하고 대병력보다는 소수의 정예부대 위주로 육군 6만, 수군 4만 등 총 10만 명의 원정군을 편성했다. p 102



6월 안시성을 공략할 무렵 고구려는 고연수, 고혜진 두 장수가 후방에서부터 15만 구원부대를 이끌고 왔지만 야지에서 격파되고 말았다. 태종은 항복한 고연수를 안시성 아래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성내 고구려군은 성주를 중심으로 굳게 단합하고 결사적 항전을 벌였다. (…) 당 태종은 안시성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기 시작하고, 공성장비로 매일 6~7회씩 공격을 퍼부었다. 고구려군은 적의 토산 건설에 대해 성벽을 더 높이 쌓고, 파괴던 성벽을 보수하면서 적의 성내 진입을 막는 한편, 야간에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적을 기습했다. p 103



당나라 군은 60여 일만에 연 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토산 일부가 무너지며 성벽을 엎친 사고가 발생하자 이 기회를 이용, 고구려군은 도리어 토산을 점령하고 그것을 수비진지로 만들어버렸다. (…) 당 태종이 훌륭한 전략가로서 수 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력헀지만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결과에 이르고 만 것은 고구려의 청야입보 전술과 고구려인의 결사적인 저항을 극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접한 성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지는 판에 안시성을 끝까지 사수한 성주의 용기와 공로는 당나라의 계획을 무력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성주의 이름은 우리나라 정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야사를 통해 양만춘으로 전해지고 있다. p 104



중국을 상대로 두번째 대승을 거둔 안시성 전투. 우리나라에서는 조인성 주연인 영화도 개봉했더랬다. 여기서 함정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시성 전투에는 ‘허’와 ‘실’이 있다. 다름아닌 안시성 전투의 주역, 성주 ‘양만춘’에 대한 것.



실제로 안시성 전투가 기록된 중국 정사와 우리나라 정사 「삼국사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없다. 그렇다면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인가? 안시성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기록이 최초로 쓰여진 건, 안시성 전투 이후 약 1백년이 지난 명나라 때 쓰여진 「당서연의(1553년)」라는 소설이다. 이 영향으로 조선 중, 후기 문신들의 기록에서는 안시성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동양 전쟁사는 서양 전쟁사 대비 기록이 부실하다. 고대는 더더욱. 그래도 중세를 지나갈 쯤엔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디테일이 붙기 시작한다. 점점더 읽을만하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대다수의 전쟁사책이 서양 전쟁사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면, 이 책은 사료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남아있는 동양 전쟁사를 최대한 비중있게 다뤘다. 전쟁사 초기 입문서로도 더할나위 없는 세계사책이니만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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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와 천조의 중국사 - 하늘 아래 세상, 하늘이 내린 왕조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단죠 히로시 지음, 권용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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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중국사책을 읽었다. 요즘 서양사 관련 세계사책만 읽어서 그런가? 중국사책을 읽으니 너무나 익숙한 기분과 함께 분노가 치솟는 건 내가 동양사람이어서 그런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옆나라 중국은 양가적 감정을 들게 하는 나라다(일본과 비슷하달까?). 심지어 우리나라 고대 역사부터 현재사까지 중국은 필수 등장인물이다. 매 역사적 시기마다 중국이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면 참 좋겠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중국은 ‘양가적’ 감정을 들게하는 나라다. 즉, 부정적인 의미로도 엄청 자주 등장했다는 이야기!



‘동북공정’, ‘문화전쟁’, ‘일대일로’ 등 당장 떠오른 키워드만해도 그렇다. 이 키워드들은 중국이 현재 진행하는, 지들만 좋은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 키워드를 한데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바로 ‘중국몽’. 중국몽이란 중국이란 나라의 부강과 민족 진흥, 인민행복을 내세운 중국 공산당의 선전 문구다. 중국몽을 위시한 중국의 프로젝트는 시진핑 정권과 함께 시작되었다. 




-동북공정: 중국의 민족 진흥을 위한 중국사 연구▶ 대한민국의 고대역사(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는 중국에 속한 이민족들의 역사라고 하는 중


-문화전쟁: 중국의 우월한 문화를 뽐내기 위한 원조 경쟁▶ 김치도 지네꺼, 태권도도 지네꺼, 한복도 지네꺼라고 우기는 중(비슷한 상황으로 이탈리아의 피자도^^..)


-일대일로: 중국의 ‘새로운 실크로드 전략’▶ 현실은 대규모 자금을 동원하여, 세계 여러나라에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서 중국의 꼭두각시 만들기






중국의 해양 진출이 이제 와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 방향성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2005년 4월 ‘정화의 서양 진출’ 60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 정부는 7월 11일을 중국의 ‘항해일’로 결정했다. (…) 정화는 방문국에 도착하면 그 국가의 왕에게 많은 증여품을 하사하고, 이것과는 반대로 명으로의 입공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받은 아시아, 아프리카의 30여 개 국가들이 사절단을 파견하여 명과의 사이에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 (…) 무엇보다도 정화는 가는 곳마다 그 국가에 조공을 독촉하고 있었고, 결단코 대등한 국교를 맺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명과 해당 국가와의 사이에는 군신 관계를 설정했고, 이를 통해 안정된 국제 질서를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명의 요청을 거절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가에게는 무력을 사용해서 국왕을 교체하는 것조차 서슴치 않았다. p 012~013



대체 중국은 왜이럴까?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과거의 중국을 알아야 한다. 예컨데 명나라 때 ‘정화의 원정(대항해)’를 기억하는가? 서양의 신항로 개척보다 70여년 빠른, ‘최초’의 대항해로 세계사 시간에 필히 배우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 정화의 원정으로 시작된 건 무엇인지는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7차례 대항해를 하면서, 도착했던 모든 나라에(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대규모 선물을 주었다. 물론 공짜가 아니다. 선물을 준 댓가로 중국에 입공을 독촉했다. 입공을 하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해서 왕을 교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지들보다 약한 나라에 강제로 선물을 안기고, ‘나를 형님으로 모셔라’ 시전했다는 이야기.



이거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현재 시진핑 정권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 동남 아시아 일대에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서 막대한 건설공사를 하고, 그 댓가로 지들의 영향력을 챙겨먹고 있지 않은가! 아, 물론 요즘은 그로 인해 중국경제가 휘청해지는 엄청난 후폭풍을 맞는 것 같긴 하다만. 유럽권도 중국의 일대일로에 손절치는 분위기고.



뭐 여튼! 한마디로 지금 중국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21세기에 들어서 ‘유독’ 유별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와 과거, 중국에서 했던 모든 일들이 묘하게 겹쳐지는 이유! 그 이유를 바로 중국 역사 속에서 찾고자 하는게, 이 세계사책 「천하와 천조의 중국사」의 목적이다. 



현대 중국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통적 중화 제국의 행동 원리를 추적하고 탐구하여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를 ‘천하’와 ‘천조’라고 하는 키워드를 통해 역사적으로 동해해보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p 014



천조라는 것은 글자에서 읽히는 것과 같이 ‘천자의 조정’을 가리킨다.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였던 중국은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높이는 의미를 집어넣어 자국을 그렇게 불렀다. 이 단어 자체는 역사 용어인데, 아마도 기원 전후의 한나라 때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역대 왕조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 시대에 서구 열강의 침략이 활발해진 이후에도 청은 천조대국으로서의 긍지를 완강하게 계속 지켜나갔다. p 18



저자는 중국사를 연구하면서, 중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바로 ‘천자’, ‘천조’, ‘천하’다. 이 세 가지 키워드와 유교의 합치는, 역대 중국 황제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었다. 



천자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자, 천조는 천자의 조정을 말한다. 천조가 통치하는 공간이 천하다. 여기에 유교를 지들의 입맛대로 변형해서 합쳤다. 그렇게 탄생한 명제가 있으니, “중화제국 영역 확장은 천자의 덕이 높다는 증거”. 이러한 논리는 중국 대륙의 주인이 바뀌든 말든 상관없이 지속되었으며, 덩달아 중국 황제의 부도덕한/억압적인/폭력적인 정치도 정당화했다.



<지금의 중국을 규정하는 키워드: 중화제국, 한족>



일반적으로 중국, 중화(중하), 화하, 제화(제하) 혹은 단순히 화(하) 등으로 칭해지는 이러한 용어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하夏와 중국인데, 이들은 모두 서주 시대(기원전 11세기~기원전 8세기)부터 존재했다. 하라고 일컫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하왕조를 가리키는 것인데, 하의 다음 왕조인 은을 지나 주 시대가 되어서도 주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하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p 025



주는 동맹을 맺은 여러 국가와 동족의 여러 국가와의 사이에서 군사적 협력관계를 구축했는데, 이 여러 국가들 속에서 점차 강렬한 일체감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일체감은 자신들을 같은 부류로 보는 의식으로 승화되었고, 그것을 톡별한 용어로 표현했다. 이것이 제하, 제화, 화하 등의 용어였던 것이다. 이전에는 주의 직할지만을 하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춘추시대 이후가 되면 주와 동맹한 여러 국가들을 모두 하라고 부르게 되었다. (…) 하는 하 왕조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화는 ‘화려함’이라는 글자의 뜻이 바뀌어 문화가 우월하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여러 국가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음은 당연한 것이었고, 당시 주 및 주와 동맹한 여러 국가들은 중국의 중심부, 즉 문화적 선진 지역인 황화 중류와 상류유역에 위치했다. 이른바 중원 지역에 존재했던 것이다. p 026



본래 중원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고, 마땅히 중국의 중심부=문화적 선진 지역=중원=화(하)라고 하는 관념이 춘추시대 즈음에 생겨났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과 관련하여 그 땅의 주인만이 훗날에 ‘화하족’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중국 최초의 종족이 되었고, 그들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고 융합하면서 훗날의 한족으로 성장하고 발전해나갔던 것이었다. p 028



중화라고 하는 용어는 중국과 제화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 문화가 가장 발전한 지역을 의미한다. 후한 말기, 삼국시대의 중국에는 이민족인 오호가 대두하고 있기도 했고, 중국의 주변에는 이적의 세계가 넓게 자리하고 있어서 화와 이의 구분이 강력하게 의식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탄생한 것이 중화라고 하는 신조어로, 중국의 국토와 문화의 중심성이 그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p 033



<그리고 유교(유가사상)>



얼마 후 국내의 혼란도 수습하면서 왕조의 기반도 확립되었고 차차 유교는 정통 사상으로 인정되었다. 통설에서는 7대 황제인 (한)무제가 유학자 동중서의 의견을 채용하여 오경박사를 설치했던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유교의 국교화’이다. 다만 국교화의 시기에 대해서는 요즘에는 무제보다 약간 훗날의 일이라고 여겨지고 있고, 왕망의 시대라고 하거나 혹은 후한 시대가 되어서부터라는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고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 왕조에서 유교에 의한 지배의 정당화를 시도했고, 최종적으로 유교가 체제 교학으로서 중국 사회를 규정했다는 점이다. p 052



유가 사상에서는 지상의 주재자는 천자이고, 천자란 천명을 받아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통치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 천자는 어디까지나 하늘의 아들이고, 하늘 그 자체는 아니다. 즉 유일무이한 절대 권력자로서 지상의 하늘에 있는 황제와 유가 사상에서 말하는 하늘의 대리자는 본질적으로 입장이 다른 것이다. 황제와 천자를 어떻게 동일화, 일체화할 것인가? 유가가 황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p 054




대한민국은 많은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는다. 이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이 어퍼컷을 날리면 무방비하게 맞는다. 문제는 그게 매번 반복된다. 이쯤되면 무엇이 문제인지도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럼에도 예방을 못한다. 대체 왜그럴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뭐, 당장 국내 현실문제 이해도도 부족한 나라인지라, 옆나라에 대한 이해도를 말하는게 맞는건가? 싶기는 한데. 



여튼! 지금의 중국의 행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중국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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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최재형
최 올가 페트로브나.최 발렌틴 페트로비치 지음, 정헌 옮김 / 상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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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15일. 광복절이 제78주년을 맞았다. 날이 날이니만큼, 오늘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에 관한 책을 리뷰하려 한다.



러시아 독립운동계의 대부, 러시아 한인들의 페치카, 안중근 의사의 후원자. 모두 독립운동가 최재형 이름 뒤로 붙어다니는 수식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은 기억해도, 그 뒤에 있던 최재형은 잘 모른다. 이 책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사람들이 잘 모르던 최재형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최재형의 자녀들이 기록한 책이다. 



최올가: 독립운동가 최재형 딸

최발렌틴: 독립운동가 최재형 아들





이 책의 전반부는 최올가의 시선으로 본 최재형과 최올가 본인의 삶이 기록되어있고, 후반부는 최발렌틴의 시선으로 본 최재형과 본인의 삶이 기록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최올가는 본인 삶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였고, 최발렌틴은 아버지 최재형의 삶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따라서, 최재형의 삶을 조명함에 있어선, 최 발렌틴의 기록이 더욱 디테일하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한인 1세 최재형

러시아 한인들의 페치카 최재형

러시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안중근 후원자 최재형

그는 대체 누구일까?



페치카 최재형


러시아 한인 1세 최재형은 가난한 노비 최홍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가봐도 조선의 흙수저였던 그는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오고,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먹고 살기 바빴던 친부모와 달리, 러시아에서 만난 선장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최재형의 삶은 달라졌다.



(최올가) 무역선의 선장과 그의 아내는 수습 선원인 소년 최재형을 무척 예뻐하였다. 그 선장 부부는 소년에게 세례를 주고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도 지어주었다. 소년은 6년 동안 배에서 생활하였다. 선장이 더 이상 무역선을 무역선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선장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 친구에게 보냈다. 최재형은 러시아인들과 지내면서 러시아 말과 글을 익히게 되었다. 최재형은 단 하루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총명한 그는 책을 꾸준히 읽었고 점점 지식과 상식이 풍부해졌다. p 014



최재형의 대부, 대모가 되어준 러시아 선장 부부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조선에만 갖혀있던 과거와는 달랐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은 당연했고, 다른 한인들과는 달리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사업수완까지 있었던 최재형은 어느새 자수성가한 거부가 되었다. 


당시 최재형이 소유했던 쿤스트 앤드 알베르스 백화점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최재형이 얼마나 거부였는지를 보여준다.



러시아는 최재형을 인정하고 존경했다. 1894년에는 10월에는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초청까지 받았다. 혼자 잘먹고 잘살아도 누가 뭐라하지 않았을 그 시기에,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독립운동과 한인들을 지키기 위해 바쳤다.



(최발렌틴) 고향 사람들의 권리가 이처럼 정당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젊은 최재형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의 법적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공사장에서 일했던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통역사 최재형은 착하고, 정당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 도로를 건설하던 시기에 한인들은 최재형을 최페치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페치카는 난방을 위해 집 안에 철과 벽돌로 만든 땔감나무를 뜻하는 벽난로를 뜻한다. 대부분의 한인들에게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이름보다 최페치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p 165



(최올가) 도로 건설이 끝나고 통역사로서 일을 마친 후 최재형은 얀치헤의 읍장이 되었다. 읍장이 된 최재형 앞에는 해야할 일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마을이 생겼지만, 대부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최재형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공부도 시켜야했다. 그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 017



(최발렌틴) 최재형이 주도한 애국 계몽 운동에 이종호 등 많은 계몽 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최재형과 계몽 활동가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 청년협회를 조직하였고 한인 민족학교 건립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모은 자금으로 극동지역에 182개의 학교를 설립하여 260명의 교사들이 6,00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졸업시켰다. p 166



최재형은 계몽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의 문화 수준 향상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는 특히 학교와 교육에 큰 관심을 두었다. 마을마다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고, 노보키옙스크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6년제 상급 교육기관도 세웠다. 상급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민족의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p 169



최재형이 죽은지 100여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러시아 한인들에게 최재형은 아직도 ‘페치카’라고 불린다. 그 증거가 바로 우수리스크에 남아있는 최재형 고택이다. (러시아 한인)고려인들이 최재형 고택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 정부와 끊임없이 협상을 하고, 우리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지켜낸 고택이다. 현재는 최재형 고택이며,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관으로 운영중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1908년에 러시아에서 이위종의 주도로 항일 의병단체 ‘동의회’가 창설되었다. 동의회 창단 멤버는 최재형을 비롯하여 안중근, 이범윤, 엄인섭 등이다. 1910년에는 최재형 주도로 ‘권업회’가 창설되었다. 권업회는 대외적으로 러시아 정부의 공식승인을 받은 노동단체다. 실제로는 한인 무장 단체의 조직과 훈련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최올가) 한국의 애국자로서, 최재형은 점령자들인 일본과 싸웠다.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1906년, 항일 독립 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p 028



(최 발렌틴)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 창립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정관이 승인되었고, 지도부가 선정되었다. 최재형, 유인석, 이범윤, 김학만, 홍범도, 이상설, 이종호, 이남기, 김치보, 고상준 등 권업회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모두 적극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항일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이 합법적인 단체를 방패막이로 사용하였다. p 167


안중근: 하얼빈 의거

이위종: 헤이그 특사

엄인섭: 훗날 친일파로 변절(영화 ‘밀정’ 모티브)

유인석: 을미의병

이범윤: 간도관리사

이상설: 헤이그 특사

홍범도: 봉오동 전투







총알을 피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붉은피로 독립기를 크게쓰고

동심동력하여 성명을 동맹하기로

청천백일에 증명하노니 슬프다

동지 제군이여

-동의회 총장 최재형-

( 러시아 해조신문 발췌 )



(최 발렌틴) 연해주에서 의병이라는 첫 유격대는 1906년에 조직되었다. 의병을 조직하고 무장시키는 일에는 최재형, 이범윤, 이상설이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무장한 유격대원들은 주로 연해주의 한인 마을에서 훈련하였고, 한반도 이북 지역에 침략해 있던 일본 군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 1908년 6월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이 실시되었다. 최재형의 지휘 아래 있던 한인 의병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큰 타격을 주었고, 더 나아가 회령시 지역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 부대를 향해서도 기습공격을 감행한 후 연해주로 돌아왔다. p 171



1910년 7월 4일 러시아와 일본 간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에 따르면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강제합병을 러시아는 인정하고,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항일 운동을 사전에 방지하기로 한 것이다. (…) 이러한 상황 변화로 항일 의병 유격대의 일부는 해체되었고, 일부는 중국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p 172



그러나 일본은 이와 같은 결과에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해주에서의 항일 운동을 완전히 진압하려면 항일 운동의 지도자인 최재형부터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최재형이 대한제국의 일본 식민지화에 반대하여 항일 투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연해주 지방 행정부는 그의 추방을 반대했다. 무엇보다 최재형을 보호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우수리스크 철도관리국의 경찰국장 쉐르바코프가 연해주가 군정 총독 스베친 앞으로 보낸 편치였다. p 173



이후 최재형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도 역임한다. 



최재형과 안중근 하얼빈 의거


(최 올가) 우리가 있던 노보키옙스크에 ‘안인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던 안응칠(안중근)이 살았다. 그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고 벽에 세 명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연습을 했다. 어느 날, 나와 소냐 언니는 마당에서 놀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군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 노보옙스크에는 안중근의 아내 두 명과 아이들이 남았다. 그들은 우리 식구들과 친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왔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잘 대접하려고 애썼다. 어머니는 아이들 옷과 각종 물건들이 들어 있는 보자기를 가지고 와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골라 가져갈 수 있게 해주었다. p 028



(최 발렌틴) 나의 아버지 최재형이 이끄는 유격부대에는 안중근이라는 젊고 결단력 있는 소대장이 있었다. 1907년도에 블라디 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은 최재형과 이범윤 등 반일 유격부대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p 175



최재형과 이범윤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고 사격 훈련을 계획하였다. 훈련은 노보키옙스크에서 진행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죽음도, 고문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영웅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순국하였따. 한국에서 안중근의 미망인이 우리 집에 왔다. p 176



우리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그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의 딸과 아들의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의 집에서 주기적으로 사격연습을 하였다. 안의사가 체포되었을 직후에는 최재형의 부인이 안의사의 가족들을 돌봐주었고, 국제변호사를 선임하여 안중근 의사를 변호한 사람도 최재형이었다.



추측이지만,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최재형이 구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에서 총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심지어 실명등록을 해야했다. 거기다 안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당시 기준으로 최신식 총인 브라우닝 권총이었다. 최재형은 러시아에서도 인정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권총을 구해다주었을 것이라는 게 추측이지만, 이 추측 외에는 안의사가 권총을 구할 방법이 없으므로, 이 내용은 정설이 되었다. 



최재형의 마지막 모습


1920년 일본군은 간도일대에서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우리가 배운 ‘간도참변’이다. 간도 일대에 살던 수많은 한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도륙되었고, 최재형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군이 잡아갔다. 이후 이 지역에 살던 한인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설상가상으로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졌다. 최재형 가족들도 그랬다. 그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고려인’ 이다.



1920년 4월 4일 저녁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 모두를 불러 “내가 떠나고 없으면 곧 일본인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을 모두 체포헤 때리고 내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할 거다. 나는 이미 늙었고 충분히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 말에 우리 모두가 울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무렵 아버지가 우리방 덧문을 열었다. 5분 정도 지났을 부렵 방문이 열리고 총을 든 일본군이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무슨 일인지 깨닫고 벌떡 일어나 옷도 입지 못하고 현관 계단으로 내달렸다. 그리로 나가보니 팔이 뒤로 묶인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1920년 4월 5일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p 046



늦은 밤, 불시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나는 집을 떠날 수 없다. 내가 떠나서 집에 없으면 일본군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며 고문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이 60이 되었다. 충분히 오래 살았고 죽어도 된다. 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밤새 내화가 이어지는 내내 어머니는 우셨고, 아이였던 우리들도 울었다. p 191



그날 200명이 넘는 한인이 체호되었다. 심문이 끝나고 저녁 무렵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 카피톤 니콜라예비치를 제외하고 나머지 한인들은 모두 풀려나왔다. 4월 참변, 그 비극의 시기에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러시아인들과 함께 일본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던 수많은 러시아 국적의 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들이 당시 체포한 사람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다고 한다. 최재형과 그의 동료들이 일본군에게 지독한 고문과 학대를 당하고 나서, 체포된 다음 날, 총살되었다고 한다. p 193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일제가 총살 후 그를 언덕배기에 묻어버리고, 그 장소를 함구했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지금도 우수리스크 소베스트카야 언덕 어딘가에 묻혀있다. 하지만 시신을 찾지못했다 한들! 유교의 나라 대한민국에선 문제가 없다. 대한민국은 가묘라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해방 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국립현충원에는 최재형의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실이 들어났다. 당시 최재형의 보훈 혜택을 받았던, 최재형 후손이라고 했던 그들은 ‘가짜’였다. 더 웃긴건 지금부터다. 논란이 두려웠던 국립현충원은 최재형의 가묘를 없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실을 진짜 최재형의 후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최재형은 죽어서조차, 그 영혼마저 안식을 찾지 못했다. 아니, 못했었다.



2023년 8월 14일, 바로 어제 국립현충원에 최재형 묘가 다시 설치되었다. 최재형 부인 최 엘레나와의 합장 묘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택에 법이 바뀌었고, 최재형은 부부 합장묘 방식으로 현충원에 다시 안장될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 슬픈 사실 하나는, 최재형의 부인 최 엘레나의 유해가 어디에 있었는가다. 최 엘레나의 유해는 키르기스스탄의 한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다. 관리의 흔적 하나 없이. 그녀는 최재형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그의 뒤에서 내조를 했고, 최재형 사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후에도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사람이다. 



(옮긴 이) 독립이 되고 난 후에,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에 남겨진 독립투사들의 자손들, 한반도에 남겨진 자손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면 깊은 한숨과 함께 가슴이 미어진다. 당시 조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끊임없는 헌신에 대하여, 정확한 사실에 입각하여 재조명함으로써 제대로 된 한민족의 역사관을 정립하여야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처자식의 안위는 뒤로한 채, 이역만리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을 우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살펴야할 의무가 있다. 조국을 위해서 싸우다 희생된 애국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존경하며 보살피지 않는 나라가 세계 역사를 주도한 예는 역사상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p 309




아직까지도 중앙아시아 곳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무덤이 버려져있다. 그나마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면 다행이다.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들도 많다.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이제는 나라가 그들을(또는 그들의 후손을) 보호하고 지켜줄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위에 짧게 언급했지만,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강제이주 된 한인들은 오로지 몸만 기차에 실렸다. 짐짝처럼 기차에 실린 고려인들. 기차에서 죽어나간 생명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고려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중앙아시아에 버려졌다. 그 어떤 물질적은 지원도 없었다. 그저 맨 몸으로 중앙아시아에 버려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다수 ‘고려인’들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라는 점이다.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그랬지만,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삶이 힘들었던 건 매한가지였다. 나라가 독립을 해도 그랬다. 



강제이주 1세대 고려인들에게 해방 후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의 나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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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08-18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을 <범도>를 읽다가 처음 알게된 분입니다. 일본군에 끌려가는 이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기족의 기억이 먹먹하게 하네요. 많은 독자기 만났으면 하는 책입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방랑하는 철학자
헤르만 폰 카이저링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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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철학자가 쓴 여행에세이 「방랑하는 철학자」. 이 책을 받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게.....벼..벽돌책이잖아? 철학자가 세계여행을 하며 쓴 책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여행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으하하하하. 정말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내가 살면서 읽은 벽돌책이라고는 「코스모스」나 「사피엔스」 정도인데, 이 책은 앞 두 책보다 페이지가 더 많다. 무려 800페이지!! 


‘철학자의 세계여행 기록’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뒤에 있는 단어 ‘세계여행’이 메인이라 생각했는데ㅋㅋㅋㅋ으하하하. 앞 단어 ‘철학자’가 메인이었다. 정말 진짜 와. 철학책은 읽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보니, 와. 순간 당황했지만, 읽었다. 다 읽고야 말았다. 벽돌책에다가 철학책이라서 솔직히 조금 겁났다. 어려울까봐. 웬걸? 의외로 술술 읽혔다. 뭐, 간혹 흐름이 끊겨서 위험한 순간도 있긴 했지만, 완독 성공!  이렇게 내 책장엔 벽돌책이 또 하나가 늘어난건가. 하하하.

나는 오래전부터 혼자 지질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들의 개성을 파고들면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긴 책을 읽어도 보았다. 그러나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지금이야말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더욱 안달이 났다. 분명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나는 ‘볼 만한 재미’가 있다는 곳은 싫다. 절실히 원하는 곳이 아니니까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내 기질에 맞거나 근본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할 만한 특별한 문제도 없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많은 사람이 그랬겠지만 나 자신부터 알고 싶다. p 017

저자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땅인 러시아 제국령 리보니아에서 태어난 독일의 철학자 헤르판 폰 카이저링. 무려 금수저출신이다. 원래 전공은 지질학. 지질학 박사학위를 딴 사람인데, 갑자기 철학자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저자가 왜(!) 바로 철학을 공부안하고, 지질학을 먼저 공부했는지 이해가 안될정도로, 정말 철학계에 딱 맞는 인간상이랄까. 아 물론 내가 철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달까? 


저자의 세계여행 시작은 ‘실론’이다. 실론이 대체 어디지? 내가 아는 실론은 ‘실론티’ 밖에 없는데…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실론티의 그 실론이었다. 실론의 현재 이름은 ‘스리랑카’. 

저자가 세계여행을 시작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시기였다. 당시 실론은 영국 자치령이었고, 저자는 유럽권에 위치한 독일의 철학자였다. 저자 입장에서 동쪽으로 떠나는 첫 세계여행이니, 아예 모르는 나라보다는 유럽 국가 식민지를 가는 것이 쉬웠을테다.


욕망과 성취! 이 둘이 제대로 어울린다고 모든 문제가 풀릴까? 어째서 위인들은 기후가 혹독하지 않은 지역에서 등장했을까? 모든 것이 나타난 곳에서는 더 찾을 것이 없다. 탐구자가 아닌 한 누구도 궁극의 진실을 찾지 않는다. 의지는 모든 것을 갖춰 아쉬울 것 없는 곳에서 솟구치지 않는다. 영웅적 행위는 한가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는 곳에서 어떤 이상적 관념도 살아남지 않는다. p 052

열대의 독특함은 너무 낯설다. 열대에서는 상상력도 다른 것들처럼 식물처럼 움직인다. 사실, 열대에서 경이로운 꽃이 핀다. 마치 신들과 얽힌 민중 신화처럼, 시인의 가슴에서 무르익은 서정처럼, 야성의 환상을 보여주며 향기롭게 타오른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자연계’ 속에서만 벌어지는 창조다. 영적 ‘깊이’라는 독특한 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신으로 재창조되지 않는다. 제아무리 화려해도 저절로 높아지는 영성 같은 것은 없다. 주어진 틀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인간만 거기에 이른다. 하지만 열대 사람은 이렇게 노력할 기회가 없다.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이라 그렇다. 불가능한 것을 탐내는 동기와 추진력이 부족하다. 그 의식은 무척 빈곤할 수밖에 없다. 의식이란 자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모든 것이 자연스레 저절로 벌어지는 곳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열대사람들이 과연 사랑을 알기나 할까? 이들은 서양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에만 기댄다. 욕망이 쾌락보다 우선이고 관념이 현실을 앞지른다. 이런 곳이라 경이로운 생장은 욕망과 성취의 거리도 없어질 만큼 풍성하고 따뜻하며 아름답다. p 052

당시 세계는 서구 우월주의로 만연했다. 그들에게 아시아는 미개한 지역이었다. 이 책의 저자 헤르만 폰 카이저링도 그랬다. 그는 철학자이기 전에 유럽사람이었다. 

스리랑카는 유럽과는 달리 뜨거운 열대 지역이다. 저자는 이런 열대기후와 날씨 등을 토대로 서구와 비교하면서, 열대지역의 문명 발달이나 그들의 가치관을 분석했다. 어찌보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이 책의 저자는 유발 하라리와는 달랐다. 헤르만 폰 카이저링은 세계여행 기록 곳곳에서 서구 우월주의를 내비쳤다. 어쩔수 없는 시대적 한계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땐 이런 한계를 잠시 내려놔야 한다. 그러면 보인다. 

이 책이 서구인의 눈으로 본 동양의 이색적인 풍경이 아니라, 철학자의 눈으로 본 동양의 정신세계를 고찰한 책이란 것을.

붓다의 현상학은 분명한 진리다. 붓다의 연상학은 그 어느 시대의 식물론보다 정확하다. 식물의 삶이 모든 삶을 대표하는 만큼 붓다는 인간에 대해서도 진리를 말했다. 내용도 풍부하다. 모든 기본 문제가 인간의 가장 고상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식물 속에서 완벽하게 벌어지고 풀이된다. 아무튼 식물을 통해 인간을 정의하니 조금 거북하다. 그렇게 하면 인간을 왜곡하지는 않지만 고유의 안간성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원칙적으로 식물과 비슷함을 보여주면서도 어떻게 다른지 따지지 않는다. 붓다의 이론을 들여다보면 그가 인간을 종종 식물로 바꾸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그는 그렇게 했다. 붓다의 이론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점을 속속들이 모방했다. 그 추종자들은 이런 생명 공동체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불교의 수동성은 식물과 비슷하다. p 055

불교 승려들의 수준은 매우 높다. 지성의 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수준이 높다. 인품도 기독교도보다 낫다. 인자하며 지식에 관련된 것에 호방하다. 사람들을 반긴다. 기독교 사제도 그만하다고 주장하기 어려울 만큼 초연하다. 이는 불교가 신도들에게 완전히 무사무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보다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 이론적으로야 훌륭하다. 하지만 실제로 적극적 이웃 사랑은 수준 높은 정신에 이르지는 못했다. 되레 야박해지기나 했다. 타인에게 닦달이나 했지 지배욕을 버린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람들을 향상시키고 싶다는 사람들이 막상 얼마나 요령부득이던가! 선교사들은 얼마나 가리는 것이 많고! 선교사들의 심리는 단순하다. ‘자기 관점을 타인에게 씌운다.’ 사실상 제한된 행동을 한다. 이렇게 계속 직무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어느덧 편협해 진다. p 061

이곳 사찰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든다. 이렇듯 편한 곳을 어디에서 다시 찾을까. 그런데 지금 어느 때보다도 불교는 유럽 사람들에게 쉽게 통할 종교가 아니다. 실론 사람들 틈에서 그들만큼 적극 실천하려면 유럽 사람과 완전히 다른 정신이 필요하다. 유럽 사람들은 ‘현상’을 절대시하면서 개인의 구원만 바라는 생활에만 투자하다 보니 금세 비루한 이기주의에 빠졌다. 온정은 야생동물 보호 조치 비슷하게 싱거워졌다. 유럽 사람들은 열반을 동경하면서 각성은 고사하고 쓸데없이 부실해지기나 했다. p 063

기독교는 원래 빈민의 종교였다. 기본 원리부터 특권층과 대립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편에 선 입장에서 행복한 사람들에게 원한이 많은 사람들 편에 섰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쪽을 지향하든 불화의 씨를 품고 있었다. 평화에 가장 탁월한 종교가 가장 불화를 키웠다는 사실이야말로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정신이 아무리 뛰어났떠라도 그것으로 세속의 문제를 지배하지 못했다. p 066

저자는 동양 불교를 마주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서구 문명의 가치관인 기독교를 떠올린다. 분명 두 종교의 커다란 지향점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기독교가 그렇게 타락했는지를 분석한다. 이게 이 책의 묘미다. 분명 이 책을 읽다보면 서구 우월주의가 자주 나타나는데, 진짜 딱 그만큼 서구문명도 비판한다. 

이런 이유일 것이다. 헤르만 폰 카이저링이 자신이 속한 유럽권에서도 비판받은 이유가.


이렇게 볼 때 낙원에 대한 관념은 진실하다. 만약 우리가 나쁜 의도로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유럽 사람은 어떤 낙원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의 미덕을 확신하면서도 동물적 본능이 너무 강하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의 세계에는 여러 면에서 낙원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동물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금하니까 동물도 사람에게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 동물은 인간을 존중한다.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을 존중하듯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p 102

안내자는 타밀족 출신이라 내가 입장하는 사원마다 들어가지 못했다. 입장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도인 데다가 최하층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첫눈에 그의 신분을 알아본다. 힌두교도는 누구든 얼마나 능란한 거짓말을 하든 위장하든 아니든 사람의 계급을 즉시 알아내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 (…) 서로 다른 계층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누구와 왕래하고 누구와 함께 식사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나쁜 사람과 사귀는 것은 세균만큼 감염의 위험이 크다. 정신도 감염된다. 심리는 놀랄 만큼 쉽게 오염된다. p 138

난처한 일이다. 우선 끝없이 자기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면서 가벼운 병에도 죽어버린다. 인도에서 차별화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계급 제도는 극히 복잡해졌다. 인도 주민들은 늘 걱정하며 살아간다. 매번 편견이 길을 가로막는다.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끝없는 걱정도 낳았다.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만연하던 시대에서나 볼 법한 엄격한 처방과 규제를 항상 염려해야 한다. 

편견을 뿌리 뽑기란 어렵지 않다. 겪어보거나 조금 더 이해하면 금세 사라진다. 유럽에선 천 년 이상 일상에 자리 잡았던 대부분의 편견도 단 한 세기 만에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영혼이 우세한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모든 현실이 상상력에 좌우된다. 인도에서 일상화한 완고한 계급 제도도 편견만 사라진다면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너무 해묵은 편견이라 온실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최근까지 인도를 떠난 모든 브라만 계급은 해외에서 자기 계급을 잃었다. p139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눈으로 본 불교와 힌두교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그저 유토피아로만 봤을까? 그 안에 있는 계급 불평등은 큰 문제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저자 스스로 언급한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모든 현실이 상상력에 좌우’되기 때문에, 그 ‘상상력’으로 인해 생겨난 계급 불평등이니, 이는 그저 서구보다 못한 아시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을까?

생애 첫 철학책(?)이라 그런가, 지금까지 읽어본 최고의 벽돌책(?)이라 그런가 읽는 내내 온갖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책 자체가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이 여행에세이인가 철학책인가, 아니면 두 종류를 짬뽕한 책인가! 이 책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은 덤이다. 뭐, 이 책의 저자는 세계여행을 하기 전부터 에세이스트로도 조금 유명했다고 하니, 여행에세이가 맞...맞겠지? 확실한 건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여행에세이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철학자가 세계여행을 하며 쓴 책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여행을 함에 있어서, 장소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이토록 다양할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플러스로 서구우월주의가 만연한 그 때, 동양과 동양 종교를 이토록 폭넓게 이해한 유럽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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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글쓰기 - 모든 장르에 통하는 강력한 글쓰기 전략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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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기자님 새 책이 나왔다. 음... 새 책인가? 제대로 말하자면 과거에 출판됐던 「기자의 글쓰기」 개정판이다. 이미 구판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개정판은 또 못참지!!!

 


 

「기자의 글쓰기」 초판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 개정판도 어김없이 배울점이 많다. 그리고 반성할 점도 많다T_T. 분명 초판을 읽었을 때도 반성을 했는데?? 이제 고쳐야지, 했는데??? 이게 참. 반성만 하고 개선을 못했다. 사람은 학습하는 동물이라고 대체 누가그런거여. 왜 난 학습이 안되건데?! 그래서 난 여전히 글쓰기 반성중 ^_T (심지어 초판을 읽고, 잊지 않기위해 블로그에 리뷰까지 썼는데, 개선을 못했음.하ㅏㅎ..핳하ㅏㅎ.ㅎ)

 

 

과거 포스팅을 곱씹어보자. 생각해보면 한동안은 「기자의 글쓰기」 에서 박종인기자님이 강조했던 ‘쉽고, 구체적이고, 짧게’를 상기시키며 포스팅을 했었다. 분명 그랬다. 벗뜨... 임신과 함께 나에게 온 그 이름 ‘매너리즘’. 그렇게 나는 매너리즘이라는 친구와 함께(^^) 오랜 기간 함께했다. 최근 몇 년간 도서 리뷰의 70%는 매너리즘과 함께한 포스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 문장도 길고, 쓰잘데기 없는 수식어도 많고. 그 옛날 대학 레포트를 길게 늘려쓰기 위해 아무말을 늘어놓던, 그 때의 내 모습이랄까? 하하하. 다시금 반성...!

 

 

근데 이 매너리즘이 블로그 포스팅에만 온 게 함정. 회사에서는 매너리즘이고 나발이고 ‘쉽고, 구체적이고, 짧게’를 오백프로 지키는중;;

 

 

이 책은 진실한 글에 대한 책도 아니고 도덕적인 글에 대한 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도덕한 글은 절대 아니다. 글을 잘 쓰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진실한 글도 잘 쓰자는 말이고 도덕적인 글도 기왕이면 재미있게 잘 쓰자는 이야기다. 악마를 소환하는 글도 악마를 감동시킬 만큼 재미가 있어야 악마를 부를 수 있다. 악마도 맛있게 읽고 천사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글에 관한 요리책이다. p 011

 

 

복잡한 원칙은 원칙이 아니다. 원칙은 간단해야 한다. 몇 가지 원칙만 익히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 사람들이 글쓰기 자체를 두려워하기에 원칙을 적용하지 못할 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원칙을 깨닫게 해주는 목적으로 썼다. 글쓰기는 어렵지 않다. 몰라서 못쓰지, 원칙을 알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p 013

 

 

박종인 기자님이 말하는 글쓰기 원칙은 한결같다. 글쓰기는 ‘상품’과 같기 때문에, 소비자(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상품(좋은 글)이어야 한다. 모름지기 좋은 상품이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좋은 글도 똑같다. 독자에게 쉬운 글이어야 한다. 쉬운 글은 내용이 구체적이고(이해하기 쉽고), 문장에 리듬이 있어서 읽는 데 끊김이 없다.

 

 

한마디로 좋은 글이란 ‘쉽고, 구체적이고, 짧아야’ 한다. 여기서 조금 더 디테일을 더하면 ‘팩트를 기반으로, 수식어 및 진부한 비유는 빼고,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1. 좋은 글은 쉽다.

2. 쉬운 글은 전문 용어나 현학적인 단어가 아니라 평상시 우리가 쓰는 입말을 사용해 짧은 문장으로 리듬감 있게 쓴 글이다.

3.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감동받기를 원한다.

4. 감동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서 나온다.

5. ‘매우’ ‘아주’ ‘너무’ 같은 수식어는 그 감동을 떨어뜨린다.

6. 독자들은 ‘너무 예쁘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쁜 이유, 즉 구체적인 팩트를 원한다.

7. 불명확한 글, 결론이 없는 글은 독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명확한 팩트로 구성된 명쾌한 글은 독자에게 여운을 준다.

- 「기자의 글쓰기」 ‘좋은 글이 가지는 일곱 가지 특징 中’

 

 

 

 

글을 쓰려면 재료가 필요하다. 재료는 상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일상생활 경험과 남이 던진 이야기, 읽은 책, 검색한 자료에서 나온다. 그렇게 얻은 재료를 물 흘리듯 보내버리면 글을 쓸 재간이 없다. 반드시 기록해 둔다. 그게 글 보따리다. p 045

 

 

축적해 놓은 글 재료들을 되도록 엑셀 파일로 정리해 둔다. 방대한 재료들이 분류와 검색이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진화한다. 키워드를 만들어서 한 칼럼은 그 키워드를, 자료는 파일 이름과 컴퓨터 폴더명, 인터넷 URL을 분류해서 엑셀에 정리해 놓으면 기가 막힌 글보따리가 된다. 글을 쓰기로 작심했다면 꼭 이를 실천해보시라. 한번 쓰고 글짓기 그칠 사람은 이럴 필요 없다. p 047

 

 

2018년 12월, 박종인 기자님 북토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 때 기자님이 했던 말이 있었다. 바로 기자님 본인이 모아온 ‘데이터’에 관한 것.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잘 안나지만, 본인이 취재하며 찍었던 사진들을 찾기 쉽게 정리하고, 갑자기 떠오르는 내용들도 까먹지 않도록 메모해둔다고 하셨던 것 같다. 이른바 ‘데이터 베이스’. 

 

 

박종인 기자님은 이 책에서도 ‘데이터 베이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본인이 관리하는 데이터 요약 화면까지 보여주면서.

 

 

위에서도 언급했듯 좋은 글은 좋은 상품이다.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선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재료를 수급하여 생산계획에 따라 제조한다. 좋은 글쓰기도 똑같다.

 

이제부터 발상을 전환한다. 글은 글이 아니라 ‘상품’이다. 독자에게 팔아먹기 위해 필자가 만드는 상품이다. 제조업이 됐든 금융업이 됐든 한 업종 한 업체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 첫 번째가 생산 계획이다. (…) 왜 글쓰기가 아니고 글 생산이어야 할까. 일기장을 쓴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글은 대게 남에게 읽히기 위해 쓴다. (…) 팔리지 않는 상품은 무가치하다. 읽히지 않는 글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업체들은 저마다 계획을 세우고 상품을 만든다. 글에서는 이 계획을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글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디자인해야 한다. p 072

 

 

 

 

 

 

 

이렇게 좋은 글 쓰는 과정을 배웠다면, 바로 써봐야 하는 법! ....라고 하기엔 나같은 글쓰기 풋내기들에겐 너무 이르니, 책에 실려있는 예문을 보자. 기자님이 쓴 (땅의 역사)원고 뿐만 아니라, 글쓰기 수강생(?)들의 글과 수강생들의 글을 고친 글 등이 실려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에세이와 평론은 ‘사실’에 대한 근거 제시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 에세이가 상황 묘사와 주관적 느낌에 중점을 둔다면 평론은 사실 자체에 더 비중을 둔다. 따라서 평론적인 글쓰기를 위해서는 글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가 창작이 아니라 사실임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이게 학계에서 논문에 첨부하는 각종 인용 출처, 주석이다. 출처가 없는 사실은 독자에게는 사실이 아니라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소설’을 쓰겠다면 출처가 굳이 필요 없겠지만 사실을 담은 글, 논픽션을 쓰려면 출처 게시는 필수다. p 074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신문기사는 철저하게 두괄식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뒤 육하원칙에 따라 그 상세한 상황을 끌까지 서술한다. 이유는 명쾌하다. ‘침략했다’라는 사실이 독자가 읽고 싶고 듣고 싶은 첫 번째 사실이니까. 에세이와 평론은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p 075

 

 

뿐만 아니다. 기자님은 여행 에세이, 역사평론, 인물에세이 쓰는 방법도 알려준다. 기자님이 이 정도로 떠먹여줬으니, 이제 배부르게 소화만 잘 시키면 되는데!! 내가 그게 가능할지는 미지수라는게 함정. 하^_T. 일해라 머리야!!!!! 

 

 

글은 문장으로 주장 또는 팩트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좋은 글은 리듬 있는 문장으로 팩트를 전달한다.

리듬 있는 문장은 입말로 쓴다.

- 기자의 글쓰기 p 111

 

1. 한국말의 외형적인 특성을 100퍼센트 활용한다:

문장 속 단어를 이리저리 순서를 바꾸거나 단어 자체를 바꿔보면 어느 순간 ‘이게 더 읽기 쉽네’하는 구성이 나온다.

 

2. 수식어를 절제한다:

수식은 ‘꾸민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불필요하다는 뜻이다. ‘의’자와 ‘것’자를 절제한다: 의와 것을 남발하면 리듬이 끊어진다. 쓸 때는 모르지만 두 글자를 안 쓴 문장과 쓴 문장을 비교하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3. 입말과 리듬:

글은 무조건 입말이다. 왜? 말을 문자로 옮기면 글이 되니까. 글이란 문자로 기록한 말이니까.

 

4. 단문과 리듬:

리듬 있는 문장을 쓰려면 단문이 좋다. 리듬이 있다면 문장이 길어도 상관이 없다. 비결은 리듬에 있다.

 

5. 상투적인 표현-사비유 금지:

사비유는 죽은 비유를 뜻한다. 처음에 그 표현을 만들었던 사람은 주변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았겠지만 이제는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는 표현을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네 라는 반응이 나올듯한 표현들을 총괄해서 하는 말이다.

- 「기자의 글쓰기」 ‘한국말의 특성: 외형률과 리듬  中’

 

 

우리들이 글에 담아야 할 것은 주장이 아니라 팩트다. 거짓말 가운데 제일 좋은 거짓말은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그럴듯한 거짓말은 왜 그럴듯할까? 구체적일수록 그럴듯하다.

‘옛날옛날’이 아니라 ‘서기 1821년 6월 7일에’라고 쓴다.

‘두 시쯤’이 아니라 ‘2시 11분’이라고 쓴다.

‘강원도 두메산골’이라고 쓰지 말고 ‘1993년에 전기가 들어온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변 비수구미마을’이라고 쓴다.

‘20대 청년’이 아니라 ‘스물다섯 살 먹은 키 큰 대학 졸업생 김수미’라고 쓴다. p 130

 

원래 주장을 하기 위해 사람들은 글을 쓴다. 당연하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글을 쓰더라도 필자가 가지는 주관적인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 소설가도 자기 원하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 수필가가 수필을 쓰는 이유도 똑같다. 기업 직원이 쓰는 보고서에도 목적이 있다. 모든 글, 아니 모든 창작물은 그런 법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러이러한 팩트, 이러이러한 재료를 버무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다. 이 팩트가 제대로 수집되지 않는 상태에서 글을 쓰게 되면 오로지 주장밖에 보이지 않는다. p 131

 

 

잊지말자. 좋은 글은 짧고 쉽고, 팩트를 기반으로 한다. 회사 업무 메일이나 기안문만 이렇게 쓸 게 아니라, 내 공간인 블로그에서도(!!!) 제발 좀 이 원칙들을 잊지말자. 

 

 

 

 

 

 

기자님이 말하길, 이 책은 딱 두 번 읽고 버리라는데, 음. 나...나에겐 어려운 일일지도^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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