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쉬운 역사 첫걸음 - 인물열전 편
이영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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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책들은 대게 그들의 굵직한 업적(과오 포함)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업적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A~Z까지 설명한다. 거기에 더해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조미료처럼 들어간다. 빛나는 업적은 잘했다는 해석과 과오는 못했다는 해석이. 그래서 대다수는 역사적 인물의 굵직한 업적은 눈 감고도 술술 외울정도로 잘 알고 있다. 예컨데 이런식이다. ‘세종대왕=훈민정음/겨레의 스승!’, ‘정조=초계문신제, 장용영설치/ 조선의 르네상스!’ 같은.

그러다보니 이 책도 그런 류의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열었다. 그런데...웬걸?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역사책들은 한 인물에 대해 평면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함과 동시에, 인물에 대한 편향적인 해석도 최대한 지양했다. 문득 저자가 머릿말에 쓴 문장이 떠올랐다.

“나만의 해석을 내리고 또 타인과 그 해석을 공유해 보는 것도 좋은 역사공부가 될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있을 때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

이 역사책은 타인의 역사적 해석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역사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소양을 길러주기 위한 일종의 역사 지침서였다.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것도 맘에 들었지만,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이 책의 구성이다. 뭐랄까, 구성방식이 국사책스럽달까? 물론 요즘 국사책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왠지 국사책스러운 느낌이다. 내 개인적으로도 학창시절 국사책을 제일 좋아했어서 그런가, 괜시리 더 손이간다.


책 구성도 그렇고 내용도 읽기 쉽다보니, 청소년 역사책 추천도서로도 이만한 책이 없지않나 싶다. 우리 딸이 응애 애기만 아니었어도, 같이 읽는 건데. 아쉬울 따름!

보수의 방패와 개혁의 칼을 동시에, 정조


조선 제 22대왕 정조. 우리나라에서 정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극 드라마/영화 주인공(또는 조연)으로도 자주 나왔던 왕이고, 학교 국사시간에서도 무조건(!) 배우는 왕이니까. 어떻게? 영조와 함께 탕평책을 실시하고,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일으켰으며, 지금의 수원을 핫하게(!) 만들어준 수원화성을 조성한 사람이니까.

TMI이긴 한데, 나에게 정조는 아직까지도 이서진인데ㅋㅋㅋㅋㅋㅋ 흐흐흐흐. 요즘 친구들에게 정조는 이준호라며! 아 물론 나도 그 드라마를 잘 보긴 했지만(개인적으로 덕화쌤의 영조 정말 와 진ㅉㅏ 와!!!), 그래도 나에게 정조는 이서진bb.

세손은 자신의 외척인 홍봉한-홍인한 형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의 외할아버지도 모두 노론 사람이었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손은 정순왕후를 자주 찾았고 정순왕후도 차기 국왕이 될 세손과 척을 질 필요가 없었기에 두 사람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홍봉한은 그런 세손을 어느정도 이해했으나 홍인한은 노골적으로 외가를 멀리하는 세손을 탐탁지 않아 했다. 혼자서는 세손을 막을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홍인한은 정후겸과 손을 잡았다. 정후겸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양아들이었다. p 115

정조는 홍인한의 형 홍봉한만은 지켜주었는데,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홍봉한마저 압박했다. 이에 대한 정조의 대응이 충격적이었다. 정조는 김귀주를 파직한 뒤 유배를 보내 버렸다. 김귀주는 평생 복귀하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이런 처분에 큰 배심감을 느꼈다. 정순왕후 쪽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지만 척신정치 청산을 원했던 정조에게는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김귀주 또한 외척 출신으로 척신정치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토사구팽이었다. p 116

1777년(정조 1년) 7월 28일 정조의 집무실이었던 경희궁 존현각에 자객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책을 읽느라 자지 않고 있던 정조는 다행히 지붕 뜯기는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국문결과 이들을 사주핸 배후는 홍상범으로, 바로 홍봉한-홍인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이 일로 정조는 홍봉한을 제외한 홍씨 집안 전체를 풍비박산 냈고,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었지만 은전군에게도 사약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778년 정조가 끝까지 지켜 주었던 외조부 홍봉한까지 눈을 감으면서 마침내 영조 대의 척신들이 모두 사라졌다. p 117

정조의 세손시절 일생이야 많이 알려져있고, 등극 이후의 일생도 잘 알려져있지만, 대중들이 잘 모르는 점이 있으니 바로 정조가 인력활용에 있어서 종종 사용한 ‘토사구팽’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뒤를 이어 까면 안되는 왕 중 하나인 정조다보니, 역사교육이건 대충매체건 정조의 안좋은 면은 왠만하면 부각을 시키지 않는 편이다. 무엇보다 정조가 잘한 업적들만 이야기해도 몇 시간은 훌쩍 지나가니, 굳이 안좋은 면을 부각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정조 업적: 규장각/초계문신제도,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수령권한 강화(및 암행어사 파견빈도 多), 수원화성 조성(인부들에게 임금 지급) 등등. 겁나 많음.

하지만 이 책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조금이긴 하지만 정조의 토사구팽 사례를 포함하여, 정조 후반대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신해박해), 문체반정, 세도정치 시발점까지도 이야기한다.

* 신해박해

1791년(정조 15년) 보수적인 유교적 가치를 지향하던 정조에게 시험대 같은 사건이 터졌다. 오늘날의 충남 금산 진산군에서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며 천주교식으로 신주를 불태워버렸다(진산사건). 진산사건은 조정에도 논의의 대상으로 보고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서양에서 전래된 학문, 즉 ‘서학’이라고 불렀다.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을 처형했고,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를 포함 관련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삭탈관직 되거나 유배령을 받았다. p 124

* 문체반정

정조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지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기 중국에서 대중문학이 크게 유행하고 조선으로까지 넘어왔는데 정조는 대중문학이 성리학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다며 패관잡기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신해박해 사건이 있고 1년 후였던 1792년(정도 16년) 정조는 당시 노론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패관문학의 풍조를 맹비난하고 고전의 문체를 부활시키라며 특명을 내린 ‘문체반정’을 일으켰다. p 125

* 세도정치의 길을 엶

정조는 본인이 없어도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들을 보필할 정치적 동반자를 키우기로 한다. 자신의 정책에 따르는 시파이면서 충분히 아들을 보필할 수 있는 명문가 출신의 인물을 물색한 결과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을 선택했다. 김조순은 정조의 사돈이자 곧 왕이 될 세자의 장인어른이 되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척결한 외척을 자기 손으로 다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해에 정조는 사망했다. 11살의 어린 아들이 외조부인 김조순의 보호 속에 23대 왕 순조로 즉위했다. p 131

물론 이 책이 정조가 시행한 신해박해, 문체반정과 손수 없었던 외척등용 등 어두운 업적을 자세하게 서술한 건 아니다. 예컨데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사상통제 및 학문이 억압되었고, 실학자들이 청에서 배워온 개혁안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웠다거나 이런 내용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정조의 과오도 설명한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내리고 싶다.

동양 평화를 위해 ‘이것’ 해야 한다, 안중근

누군가 당신에게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가 누구인가요? 하고 물어본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떠올리는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안중근’이다. 익히 알려진 그의 행적은 이렇다. 하얼빈에서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동양평화론’을 주장하였으며,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수많은 글을 남겼다는 것. 여기서 조금 더 보태면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이 예정된 아들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 정도가 있겠다. 이러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행적은 공교육에서도 아주 당연하게 배우고, 여러 대중매체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이 책에서도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행적이 실려있다.

여기까지라면 이 책 역시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이야기하는 수 많은 역사책(또는 교과서)와 다를바 없었을 거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책은 거기에 더해 잘 알려지지 않은 안중근의 이야기 및 안중근의 가족 이야기를 포함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바라보려한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특히 안중근 사후 남은 가족이야기들을 읽어보면 말이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에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

북풍은 차가워도 내 피는 끓는구나

강개한 뜻으로 한번 가면 기필코

쥐새끼 같은 도적을 죽이고 말리라

우리 동포여, 우리들이 힘들인 임무를 잊지 마소서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안중근 <장부가>

독립운동 당시 안중근 의사 행적은 워낙 잘 알려져있고, 유명하기도 하니 생략하고. 안중근 의사 사후 남겨진 가족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안중근의 가족들은 모친과 형제, 아내와 아들 딸로 나뉠 수 있다.

* 안중근 모친 조 마리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두 아들 안정근과 안공근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조마리아 여사도 거처를 상하이로 옮겼고 이곳에서 김구의 모친이었던 곽낙원 여사와도 침하게 지냈다.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여러가지 이유로 무너지고 있을 때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조마리아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의 임원이 되어 물질적 후원을 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인 1927년 위암으로 별세하셨다.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 여사의 장례를 치러 주었지만 상하기 교민회 쪽 사람들의 실수로 묘소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현재는 묘소를 찾을 수가 없다. p 147

* 안중근 여동생 안성려

(안중근의)첫째 여동생 안성녀는 오빠의 죽음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구체적인 기록 없이 증언으로만 전해질 뿐인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편과 함께 독립군에게 피복을 제공해주었고, 남편 사후엔 만주로 넘어가 문서 정리 및 자금 조달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어 묘소도 부산에 있다. p 147

* 안중근 남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안중근의 남동생들인 안정근과 안공근은 안중근의 사형집행 후 둘다 러시아군으로 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했다. 첫째 동생 안정근은 김구와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의원이기도 했다. 그는 상하이와 북간도를 오가며 독립전쟁을 격려하고 주도했으며 형 안중근이 존경했던 안창호를 따르기도 했다. (…) 해방 후에도 몸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다가 1949년 상해에서 영면했다. 현재 그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 p 148

둘째 남동생 안공근의 초반 독립운동은 형 안정근과 비슷했따. 한때 김구의 참모라고도 불렸지만 후반기에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에 김구는 안공근을 멀리했다. 무엇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와중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보호해주고 있었지만 상하이 여의치 못하자 안공근에게 안중근의 가족을 부탁했는데, 안공근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으면서 김구와 더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했을 때였던 1939년 안공근은 실종되었고 아직까지도 죽음의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p 148

안중근의 모친과 동생들도 독립운동을 했다. 특히 안정근은 안창호를, 안공근은 김구를 따랐다. 그들의 결말은 아니나 다를까,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비슷하다. 다만 둘째 남동생 안공근의 행보는 조금 미심쩍다. 특히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의혹과 안중근의 아내와 자녀를 챙기지 못한 일들이. 아래에서 서술하겠으나, 안공근이 안중근의 아내와 자려를 챙기지 못한 일은 엄청난 후폭풍으로 돌아온다.

* 안중근 아내 김아려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 여사는 남편의 의거 후 일제의 지난한 취조와 심문을 받았으며 남편 사후에는 헤이룽장성 무링에 숨어 살다가 시댁이 임시정부 활동을 위해 상하이로 갔다는 소식에 그곳으로 갔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안중근의 둘째 동생 안공근이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의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아서 김구와 멀어졌을 때, 그 가족이 바로 김아려 여사와 그녀의 아들들이었다. 이 때문에 김아려 여사는 일본군에게 잡혀가 협박과 감시에 시달려야만 했다. (…)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 여사도 두 자식의 박문사 참배로 인해 위신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중국 상하이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중 두 남매의 귀국 직전인 1946년 사망했다. 김아려 여사의 무덤도 소재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p 148~149

* 안중근 큰 아들 안문생

안중근과 김아려 여사 슬하에는 2남 1녀의 자식이 있었다. 장남 안문생은 아버지 사형 이후 가족이 다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가 얼마 안 있어 1911년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누군가 건네준 과자를 먹고 즉사했으며 그의 나이 겨우 7살이었다. p 148

* 안중근 둘째 아들 안준생과 딸 안현생

안중근의 딸 안현생은 아버지의 의거 후 명동성당에 숨어 살다가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족들과 합류한 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독립운동가 황일청과 혼인했다. (…) 1939년 식민지 조선의 7대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가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을 강제로 귀국시켰다. 그리고 서울 남산에 있던 박문사로 데리고 갔다. 안준생을 협박하여 아버지 대신 사죄하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참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년 후에는 누나 안현생과 남편 황일청도 강제로 귀국하여 역시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참배했다. 안준생과 안현생의 이토 히로부미 참배는 대서특필되었고 김구를 포함해 수많은 조선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배신자라며 두 사람을 맹비난했다. 친일파 낙인이 찍혀버린 안현생의 남편 황일청도 독립운동가들에게 살해됐다. 안준생과 안현생 남매도 독립운동가들의 표적이 되어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숨어 살아야만 헀다. 안준생은 1951년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누나 안현생은 그나마 천주교회의 도움으로 교편을 잡으며 생활하던 중 1959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p 149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아내와 자녀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보호아래 있었다. 하지만 최재형 역시 일본에 의해 죽었고, 최재형 가족들 역시 누군가를 온전히 챙길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실제로 최재형 사후 최재형 가족들 역시 힘들게 살았으니). 뿐만 아니라 당시 어렸던 큰아들 안문생이 독살을 당한 사실도 거처를 옮기는데 힘을 보탰을 것이다. 그렇게 안중근 아내 김아려 여사는 자식들을 대리고 상하이로 넘어갔다. 당시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고, 임시정부 안에는 시댁식구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자신과 어린 자식들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임정 및 안중근의 시댁식구(안중근 둘째 동생 안공근)들은 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든.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박문사를 참배할 수 밖에 없었던 안준생과 안현생. 그런 그들을 맹비난하고, 심지어 친일파라 낙인하며 죽이려 했던 독립운동가들. 나는 당시 독립운동과들과 달리 안준생과 안현생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들을 친일파로 낙인하고, 죽이려 했던(실제로 죽였던) 독립운동가들은 잘못이 없는가 되묻고 싶다. 물론 그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단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안중근의 자녀를 친일파라고 비난하고 죽일 자격이 있는가? 적어도 난 그들에게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안중근의 자녀들을 보호할 책무를 저버린건 다름아닌 당대의 독립운동가였으니.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당시 환경은 살벌하고 엄혹했다. 다시금 말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안중근의 가족들을 보호하지 못한 제일 큰 원인은 다름아닌 안중근의 남동생 안공근이었다. 그래서 김구가 안공근을 멀리했었고.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안공근이 안중근의 자녀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로인해 안공근을 멀리했다면! 김구를 포함하여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나서서 직접 안중근 자녀들을 보호했다면 어땠을까. 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거룩한 희생이라고 찬양하며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키워내면서, 정작 남겨진 안중근 자녀들은 등한시했을까. 아쉬운 대목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역사는 평면적으로 보고 해석하면 안된다. 뿐만아니라 누군가의 해석을 답습해서도 안된다. 역사란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해석하고자 해야, 제대로 된 역사공부라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과정이 있어야 역사공부로 인해, 내 삶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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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별맘의 쉬운 요리 -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집밥 레시피
최상희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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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요리책이다. 정확히는 어른용 요리책?! 뿡뿡이를 낳고 나서 몇 개월간 이유식 만드는 요리책만 보다보니, 이렇게 내가 먹을 수 있는 요리책을 보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진짜 이유식 요리책을 보면서 따라할 땐, 하. 그저 재료 본연의 맛(?)을 위한 손질과 찌고 익히고 삶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내가 먹고 싶은 마음이 아주 1도 없었다. 짭쪼름하고 달달한 어른 요리만 먹던 사람이, 갑자기 재료 본연의 맛을 위한 이유식을 만들고 있으니 그게 먹고싶을 턱이 있나T_T.


그래서 그런가 정말 진짜 이렇게 제대로 된 요리책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무엇보다..우리 뿡뿡이...지난한 이유식 기간을 지나,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있으니까! 요즘말로는 유아식이라고 해야하나. 다만 간은 좀 덜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이 음식이라도 무염, 무당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ㅋㅋㅋ 아이들도 맛있어야 밥을 먹을테니까. 맛없는데 누가 먹겠어!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있는 뿡뿡이를 위해서라도, 매 끼니마다 식단 걱정을 안할 수가 없다. 매일 같은 것만 먹이자니, 매너리즘 올 것 같은. 지금이 딱 그런 시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요리책이 눈 앞에 강림하다니 흑흑흑. 매일 하나 씩은 솔직히 힘들고, 주말에 한, 두개 정도는 이 요리책에 있는 메뉴를 만들어어서 뿡뿡이에게 줘봐야겠다. 뭐, 간은 ... 어른보다 적게 하면 되는거니까!

이 요리책 『금별맘의 쉬운 요리』는 집밥 레시피를 표방한 요리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요즘 말하는 ‘집밥’은 예전 ‘집밥’과는 다르다. 예전에 말하던 집밥은 소위 국과 밥, 반찬 몇가지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 말하는 집밥은 예전 집밥에 더해서 카페에서 먹는 브런치, 특별한 날에 먹는 일품요리, 아이에게 해주는 간식 등! 이 모든 요리가 다 집밥에 포함된다. 왜? 이제는 모든 요리들을 집에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 요리책에 키포인트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책이 말하는 집밥 레시피는 요즘 말하는 집밥 레시피다. 그러니까, 일반 국, 밥 요리를 포함해서 브런치나 간식 등 레시피가 포함되어있다는 것! 우리 뿡뿡이 간식까지 쌉 가능이라는 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일 마음에 듦)

요거 말고도 이 요리책의 장점이 더 있다.


일단 식재료! 고가의 식재료나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냉장고(또는 펜트리)에 있을 법한 아주 친근한 식재료를 사용한다. 간혹 집에 없는 식재료가 나올 때가 있는데(예컨데 장기간 보관이 어려운 제철 채소), 이런건 그냥 집 앞 마트가서 사면 된다.

그리고, 이 요리책은 레시피다 쉽다. 정말 쉽다. 요리과정이 복잡하면, 따라하기도 어렵지않은가. 하지만 이 요리책은 ‘간단한’ 집밥을 표방하는 지라, 레시피 사진 최소 4컷 ~ 최대 8컷이다. 사진 밑에는 요리방법 몇 줄 포함. 세상 간편한 방식으로 일품요리가 완성된다.

요리책에서 제일 중요한 계량법도 쉽다. 스푼은 밥숟가락 및 티스푼 기준으로 하되, 정량(!)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 중량까지 표시했다. 사진포함은 당연한 일. 물이나 간장같은 액체류 계량은 종이컵 및 쌀 컵 기준이다. 역시 중량 표시도 철저하다. 이 외에도 주방에서 주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후라이팬(냄비) 등 길들이는 방법은 덤!

개인적으로 스테인리스 제품을 많이 사용하다보니(특히 아기 식기류), 이런 건 정말 꿀팁인듯!

본격적인 레시피에 들어가기 전에, 집밥만들기에서 중요한 ‘육수’ 만들기나, 재료손질법, 냄비로 찜요리 하는 법도 있으니 확인은 필수!



이 요리책의 레시피 구성방식은 아래와 같다. 브런치 달걀토스트 레시피(p.44) 다. 레시피 사진 6컷, 요리법 5줄 ㅋㅋㅋㅋㅋ 세상 간단하다.


  1. 빵 한면에 버터를 각각 바른다.

  2. 버터 바른 면에 슈가 파우더(또는 설탕)을 골고루 뿌린다.

  3. 빵 가장자리에 마요네즈를 2겹으로 올린다(마요네즈를 꼼꼼히 발라야 달걀이 옆으로 새지 않아요!).

  4. 모차렐라 치즈를 올리고 달걀 1개를 올린 뒤 노른자를 터트린다(노른자를 터트리지 않으면 노른자 윗부분만 익어 딱딱해질 수 있습니다).

  5.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180℃에서 11~12분간 돌린다.

*포인트: 버터는 미리 실온게 꺼내 말랑한 상태에서 바릅니다. 만약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딱딱한 상태라면 전자레인지에 10~20초 정도 돌려요. 반숙 상태로 익히고 싶을 땐 180℃로 8~9분 정도가 적당해요.

예전엔 에어프라이어 있는 집이 많지 않았는데, 요즘은 집집마다 에어프라이어는 물론 오픈까지 보유한 집이 많으니 뭐. 이제 집에서 손쉽게 브런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시대라는게 새삼 놀랍다. 우리집만 해도 광파오븐(에어프라이어/찜기 겸용) 사용중이고..하하하.

어떤 음식을 만들어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다가, 브런치 카테고리에서 예전에 한 예능에서 보았던 ‘클라우드 에그’ 레시피가 있어서 조금 반가웠다. 뢰스티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구름모양(?)같은 흰자 먹어보고 싶었기도 했고 ㅋㅋㅋ 물론 만드는데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레시피를 보니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요리도 아니었다.

클라우드 에그, 주말에..한번 시도해봐야지 ㅋㅋㅋㅋ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요리는 손질이 귀찮아서 섣불리 손이 안가긴 하지만, 요즘은 뿡뿡이 때문에 이것저것 많은 식자재를 사고 손질하고 있다(신랑이ㅋㅋㅋ). 이왕 요리하는 우리 신랑이니, 스키야키 해달라고 졸라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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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예능에서 우리나라 4대 종교 지도자들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놀라웠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했다. 스님, 신부, 목사… 그들이 믿는 신은 다르지만, 그들이 향하는 길은 그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길일 것이라고. 근데 이게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오늘 읽은 #시집 『빛섬에 꽃비 내리거든』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시집은 원경 스님과 김인중 신부님의 합작품이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두 종교인이다. 부처를 믿는 스님이 시를 쓰고, 예수를 믿는 신부님이 그림을 그렸다. 이 둘의 시와 그림은 원래부터 한 세트인것 마냥 조화롭다.




시와 그림 무지렁이인 나인데도, 원경 스님의 시편과 김인중 신부님의 회화(스테인드 클라스)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 한 구석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스님이 쓰신 시에서 ‘감사함’이, 신부님이 그린 회화에서 ‘포근함’이 느껴진다. 이는 이분들이 단순히 종교인이라서가 아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종교인이 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울림을 주는 종교인들은 생각보다 드문편이기도 하고.



조금 진부한 표현이지만, 원경스님과 김인중 신부님이야말로 요즘같이 살기 힘든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이 아닐까? 비록 지금 세상은 정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타인은 커녕 지인마저도 조심해야할 정도로 무서운 세상이 되었지만. 이런 분들이 계시는 한,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빛섬과 달빛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빛섬이 되었다

어둠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도시도시마다의 빛섬


가없이 빛사래 치는 하늘별들을 닮아

스스로 빛을 지녀야 한다며

어둠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빛섬


모정처럼,

늘 마음 놓지 않고 빛섬 위를 맴도는 달빛

어둠 바다의 등대인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절집의 꽃문살이 달빛에 어리듯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는 햇살의 신비를 안는다


섬김이 미덕의 옷이기에

절집 공양의 정성처럼

봉헌 속에 빛난다


동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처소 없이 해와 달과 함께 꽃이 피거늘

서로 비추고 거울처럼 마주하노라면

저마다의 빛으로 향기 오간다


화장세계이기에




달과 모닥불


무지의 빛 검은 어둠이 있기에

달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냉정한 차가움이 있기에

모닥불 같은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의 길을 나섰기에

빛이고 불꽃이고 싶습니다




혼빛

그대는

빛의 혼을 그리는데


그리움 그리움 그리다 그리다

화룡점정에 이르러

쓰러져 잠드시리


잠 못 드는 한밤의 꿈을 꾸다가

새벽에 드는 비울음처럼

그리 쓰러져 울다 잠들면


바람도 쓰다듬듯 달래며

새날을 맞으리



시와 그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시집이다. 마음 속 여유가 사라져, 각박해진 요즘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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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화는 밤새도록 끝이 없지 - 두 젊은 창작가의 삶과 예술적 영감에 관하여
허휘수.서솔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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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21세기. 내 우편함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봉투 형식의 우편들이 다수 꽂혀있다. 하지만 그 우편 속에 오롯이 나를 향한 사적인 글, 예컨데 ‘편지’는 이미 사라졌다. 대체로 ㅇㅇ은행, ㅇㅇ카드, ㅇㅇ공단 등에서 보낸, 아주 대놓고 공적인 서류들이 우편봉투에 고이 담겨있을 뿐이다. 나를 향한 ‘편지’를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잘 생각해보면, 난 편지를 자주 쓰던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멀리 이사 간 친한 언니에게 편지를 쓰고,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내면 시차는 있었지만, 언제나 그들에게 ‘편지’가 왔다. 그 편지들은 지금도 친정 서랍 한켠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지금은? 편지는 무슨! 흔한 깨톡 한 줄도 보내기 귀찮다. 지금 내 모토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어제까지만해도 그랬던 나다. 

에세이 『우리 대화는 밤새도록 끝이 없지』를 읽었다. 문득 그때가 그리워졌다. 편지를 주고 받던 순수해던 그 시절이. 그들에게 편지를 쓰며, 편지 받을 그들을 생각하던 내 모습이. 편지쓰기를 즐겨하던 과거의 나는 어디가고, 왜 감성따윈 쌈싸먹은 세상 무감각한 어른여자가 되어있는지! 



이 에세이는 책이기 이전에, 저자 허휘수X서솔의 ‘대화’다. 그리고 그들의 ‘편지’다. 물론 난 이들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유명한 유튜버이자, 예술가라지만, 난 유튜브도 안보고 예술과도 거리가 엄청 먼- 사람이기에. 그럼에도 이들의 대화는 나에게 자그마한 울림을 주었다. 왜? 누군가와 끊임없는 ‘대화’라는게 보통 그렇지않나.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친근감이 느껴지고, 동질감이 느껴지고 막 그런거. 이들이 쓴 에세이가 나한테 딱 그랬다.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내 생각이 어디서부터 생겨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지, 궁금함에 고통스럽던 밤이 있었다. ‘어린이’에서 ‘학생’으로 넘어갈 무렵, 호기심은 내 생각의 근원이었다. 그 시절 나는 생각의 꼬리를 찾기 위해 한쪽으로 빙글빙글 몸을 돌려 일부러 어지러움을 느끼곤 했다. 어지러움을 못 이기고 이불에 풀썩 주저앉으면 이내 생각은 멈추고 몽롱한 상태만이 의식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생각의 방황, 이것이 나의 사춘기였다. p 047, 서솔

처음은 한 번뿐이기에 고귀하고, 다시없을 순간이라서 기념한다. 처음의 기준이 뭔데? 기준을 세우는 것은 만족스러운 처음을 만들려는 시도다. 처음은 그냥 처음이다. 정의와 기준은 개인적이다. 과도한 의미부여는 사이비를 낳는다. 그럴듯한 처음이란 건 없다. 처음은 처음이다. p 048, 허휘수

어렸을 적 ‘처음’이라는 단어에 매달렸던 적이 있었다. 아마 저자 휘수처럼 딱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시기였으리라. 무엇보다 당시에는 ‘편지’쓰기를즐겨하던 감성많은 소녀였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 사춘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감성’많은 시절도 짧았다. ‘처음’에 의미부여를 하던 시절은 짧게 지나갔고, 그저 처음이고 나발이고. 복잡한 생각들을 놔버렸다. 그저 단순히 살자!

보통 갑작스런 변화는 어떠한 사건에서 기인한다. 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 사건이 잘 떠오르진 않는다. 확실한건 그 때부터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거라 확신이 들면, 빠르게 머리속에서 지워나갔다. 사람도 포함해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처음’이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할 만큼 감성이 있지는 않은듯! 

뭐 요즘은 육아를 하면서 감성이 조금 필요하지 않나 싶긴 하다. 누군가는 아기가 처음 하는 모든 행동을 저장하고 기록하는데, 나는 뭐. “했네? 대단해!” 이 정도니까. 아기의 ‘처음’은 의미를 부여하고, 기록해줘야하나 싶기도 하고. 요즘은 그렇다.


이름이 두 개인 사람

나는 예술가인가 아닌가? 나는 창작가인가 아닌가?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과 모양새에 따라 무엇으로 반드시 분류된다. 태어난 날에 따라 신생아에서 어린이로 바뀌며 교복을 입는 순간 학생이 된 뒤 직업에 따라 적당히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바뀐다. 마땅이 취업해야 하는 나이대가 될 때 사람은 세 가지의 이름으로 다시 분류된다. 취업 준비생, ㅇㅇ사원, 그리고 백수. 그것도 아니면 구직 포기자 등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 나를 설명하고 집어넣는 단어가 있다. 현재를 살아간다는 건 반드시 무엇인가로 분류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서솔이라는 표본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무엇일까? p 080, 서솔

내 이름은 뭘까? 좋은 세상 덕에 엔잡러.

그게 아니었으면 그냥 이곳저곳 떠도는 보부상.

돈 되는건 일단 떼어다 파는 도매상.

나도 팔고 춤도 팔고 영상도 팔고 글도 파는 잡상인.

예술가이고 싶었는데, 열심히 살 수록 예술과 멀어지는 듯 하다.

어쩐지 떠나온 육지도 안 보이고,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의 선장. p 080, 허휘수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과 모양새에 따라 무엇으로 반드시 분류된다.’ 저자 서솔의 말이다. 정말 십분 공감한다. 지난 3n년 간을 살아오면서, 내 이름은 두 개 이상이었다. 지금 날 부르는 이름은? 등본에 씌여진 내 이름과 뿡뿡이엄마, 피로님, 그리고 회사를 다니는 ㅇㅇ매니저. 이름이 몇개야? 여기서 진정한 나를 부르는 이름은 뭐지? 조금 슬픈 사실은, 앞으로도 난 사는 동안 내 진정한 이름을 찾지 못할 것 같달까. 정확하게 말하면 앞으로도 등본에 씌여진 내 이름은 계속 불릴 일이 없을 것 같달까. 애기 엄마의 비애인가....



가끔은 나도 이 에세이를 쓴 허휘수x서솔 님처럼 하루종일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는데! 친구와 대화를 할 여유? 아니 그전에 속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 아닌가. 과거에는 이런 친구가 바로 내 옆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고. 수다삼매경을 하고 싶은 또 다른 친구22는 바다 건너 저편에 살아서, 일 년에 한 번 만나기가 어렵고. 나보다 날 더 생각해준 또 다른 친구333는 서로 일하는 환경이 달라서 만나는 시간 잡기가 어렵고. 하, 인생 3n년을 살았는데 역시 삶은 녹록치 않구나. 

그래도 나에겐 평생지기가 있으니까! 오늘은 빠른 육퇴(!)를 하고 내 평생을 함께할 신랑이랑 신나게 수다를 떨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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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9-06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3n살이시니까 신랑이랑 수다 좋지요~~~

전 5n이라 그런가 남편이랑 수다가 안돼요. 신랑이 아니라서 그럴지도요..
신랑님이랑 정다운 수다 넘치는 좋은 밤 되시길~~~
 
발밑의 세계사 - 페르시아전쟁부터 프랑스혁명까지,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지리의 순간들
이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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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진 않았는데, 요즘 세계사책을 자주 읽는다. 그것도 통사 위주로! 내가 주로 읽는 책이 역사책이긴 하지만, 대체로 한국사 위주였는데. 이거참. 이러다 세계사책 편식하게 되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하하하하..하하하. TMI 각설하고!



요근래 읽은 세계사책마다 주제(또는 지향점)가 달라서 그런지, 같은 장르여도 읽을 때마다 새로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역사책 『발밑의 세계사』도 그렇다. 통사이긴 하지만 서술하는 관점이 ‘지리(또는 지정학)’ 기준이다. 아직까지 세계사는 ‘정치사’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 나라서 그런가, 진부한 표현이지만 역시나 나와 다른 관점은 새롭다. 역사는 어떠한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그 재미가 배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이 역사책 『발밑의 세계사』는 초보자용 입문서는 아니다. 그렇기에 세계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다. 세계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일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사를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컨데 중/고등학교에서 세계사 수업을 받았고, 어느정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르다. 한마디로 세계사 초급교육(?)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다면, 이 책만큼 세계 역사를 정리하는데 수월한 역사책은 또 없다.




『발밑의 세계사』는 시대순으로 동양과 서양이 골고루 배치하여 서술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다. 동양과 서양이 따로 국밥이 아니라는 점. 한마디로 동, 서양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이 알고보면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라, 지리(또는 지정학)적인 맥락으로 보면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부분에서 유독 마음에 들었던 챕터가 있었으니 바로 동, 서로마 제국의 분열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다.



1n년 전 학교 정규 교과시간에도 배웠던 내용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라고는 ‘훈족의 남하로 인해 어쩌고저쩌고~’ 정도가 끝이다. 동, 서 로마가 왜 분열했는지는 아예 기억도 안나고. 아무래도 학교 교과과정 목적 자체가 ‘시험 고득점’ 이기에, 방대한 세계사 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여력도 안될 뿐더러, 굳이 시험에 안나오는 내용을 가르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내 머리속에는 동, 서로마의 분열과 ‘훈족이 왜 이동했는지’ 가 연결되지 않고, 연결되지 않으니 머리속에서 그려지지 않아서, 아무리 세계사책을 봐도 머리속에 남지가 않았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공백으로 남았던 동, 서로마 분열과 서로마 제국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 덕분에 제대로! 정립되었다. 심지어 이 챕터는 두 세번 정독했다. 이제서야 한 켠에 남아있던 역사공백이 채워진 느낌이랄까?




그래서..ㅋㅋㅋㅋㅋ 내 역사공백을 채워준 그 챕터 내용을 아래에 옮겨왔다.




동, 서로마 제국의 분열의 숨겨진 이유? 기후변화! (그리고 훈족의 탄생)


3세기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로마. 영토가 넓다는 것은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넓은 영토를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로마는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동로마, 서로마로 분할 통치를 시작했다. 시작은 동방은 황제, 서방은 부황제였다. 무엇이든 새로운 제도는 부침이 따르는 법. 어찌저찌 동, 서로마 분할 통치가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3세기 들어 로마는 곳곳에서 발생한 피지배 민족의 반란과 국경을 혼란하게 한 이민족의 침입, 군대의 황제 폐립 등으로 휘청거렸다. 아예 이 시기를 정의하는 ‘3세기의 위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258년 제국의 동방은 황제가, 서방은 부황제가 다스리는 체제가 도입되었다. 너무 거대해진 제국을 황제 일인이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에는 제국 서방의 부황제가 황제로 승격되며 황제 두 명이 다스리는 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았다. 293년부터는 두 명의 황제를 두 명의 부황제가 보좌하는 4제 통치가 시작되며 3세기의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 p 108



때마침 중앙아시아에 살던 훈족이 선진하고, 이에 밀린 게르만족이 파도처럼 밀려들자, 로마의 지배하에 안정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유럽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남하로 군사력을 대거 소진한 로마는 결국 395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쪼개졌다. 특히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을 정규군으로 흡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100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476년 멸망했다. p 109 



동, 서로마 분할통치가 자리잡힌 게 무색하게, 1세기 만에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게르만족 침입에 의해서. 이후로 유럽 일대는 우리가 사는 21세기, 현재까지 통일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게르만족은 갑자기 왜! 서로마를 침입한걸까? 그 이유는 예상외로 우리가 다 알고 있다.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던 훈족이 게르만족이 살던 지역까지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영토를 빼앗긴 게르만족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서로마 제국 밖에 없었다.





질문을 바꿔보자.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훈족은 왜! 게르만족 영토를 침범했을까? 놀랍게도 그 배후에는 훈족의 전신인 흉노족과, 몽골 일대까지 휩쓸었던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를 알아야만 한다. 



우선 훈족의 전신인 흉노족은 누구인가. 고대부터 중국 왕조를 수시로 침략했던 유목/기마민족이다. 중국 최초 통일국가 진나라는 흉노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심지어 한나라는 흉노족과 2백여년간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한 무제가 흉노정벌에 성공하면서, 흉노족은 터전을 버리고 중앙아시아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로 몽골 일대가 척박해져 목축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한나라 무제마저 대규모로 공격해오니, 이를 버티지 못하고 살기 좋은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기후변화는 고대에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흉노족이 고향을 떠나고 수 세기가 흐른 뒤에는 로마가 기후변화로 고난을 겪었다. 고향을 떠나 유라시아를 유량하며 독기를 품을 대로 품은 훈족과 거대하지만 이미 무력해진 로마가 만나 큰 파도를 일르켰다. 유럽의 분열은 바로 이 동서양 충돌의 결과였다. p 109



흉노족은 도망치듯 서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앙아시아 북부와 캅카스 일대에서 살아가던 여러 민족 집단과 통혼했다. 그 결과 흉노족의 외모는 금발벽안, 적발녹안 등으로 묘사될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 그렇게 여러 세대가 지나자 흉노족의 후예, 또는 흉노족과 관계를 맺은 중앙아시아의 민족 집단들을 통틀어 훈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p 113



기백년간 중국 왕조를 유린했던 흉노족이 갑자기 한나라에 정벌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기후변화다. 흉노가 살던 몽골 일대는 유목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100년 무렵부터 급격하게 한랭기후가 시작되며, 생계가 어려워졌는데 타이밍 좋게 한무제가 흉노정벌을 단행한 것이다. 특히나 당시 한나라는 몽골일대와 달리, 온난한 기후로 국력까지 높아진 상태였다.



중앙아시아 일대로 터전을 옮긴 흉노. 흉노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있던 여러 종족들과 혈연을 맺었다. 이들이 우리가 말하는 ‘훈족’이다. 훈족은 그렇게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는 또다시 찾아왔다. 훈족이 살던 4세기 중앙아시아로. 



4세기다 되어 중앙아시아의 기후는 또다시 급변했다. 강력한 엘니뇨-남방진동으로 338년부터 377년까지 중앙아시아는 사상 최악의 가뭄을 겪었다. 남동태평양과 서태평양 사이의 기압은 서로 역상관관계로, 마치 시소처럼 한쪽이 높아지면 다른 한쪽은 낮아진다. 이를 남방진동이라고 한다. 엘니뇨는 남아메리카의 페루와 에콰도르에 면한 열대 해상 수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엘니뇨가 발생하면 남동태평양의 기압이 낮아지므로, 남방진동에 따라 서태평양의 기압은 높아진다. 경우에 따라 서태평양 너머 인도양까지 영향받기도 한다. 그러면 중앙아시아에 가뭄이 들 수 있다. p p114



훈족은 살기 좋은 땅을 찾기위해 계속 서진했고, 그렇게 그들은 게르만족이 살던 영토를 차지했다. 당시 게르만족은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에, 국가적 대처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영역을 잃은 게르만족도 역시나 서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곳이 바로 서로마 제국이었다. 그것도 전성기가 끝나고, 대내외적으로도 혼란했던 서로마 제국. 그렇게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 




결과적으로 아시아 일대의 기후변화가 로마의 운명, 아니 유럽 일대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특히 3세기 급격한 한랭화는 유럽 일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유럽은 엎친데 덮친격으로 수차례 화산폭발까지 발생하였다. 기본값인 한랭기후에 화산재까지 덮여서 로마 국력은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퇴했다. 내부 권력다툼은 덤이다. 그런 상황에서 게르만족이 쳐들어왔으니, 서로마제국이 이를 방어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서로마 제국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서로마 제국이라는 주인이 사라진 빈 땅에 여러 게르만계 국가가 생겨났으니, 이는 사실상 오늘날 유럽 지도의 근간이 된다.




놀랍지아니한가. 그저 학교에서 배웠던 동, 서로마 제국의 분열과 서로마 제국 멸망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있을 줄은. 정말 이런 맛에 내가 역사책을 읽는다. 물음표로 남겨뒀던 역사 공백이 이 책 덕분에 하나, 둘 채울 수 있었다.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이 역사책은 지리, 지정학적 관점으로 서술된 세계사책이다. 따라서 ‘정치사’에 대한 설명은 빈약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에서 세계사 기본교육을 받았다면, 이 책만큼 세계사를 정리하는 데 효과적인 책은 또 없다고 자부한다. 정말 세계사 역사책으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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