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셀프 트래블 - 2024-2025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4
박정은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믿고보는 #여행책, #셀프트래블 시리즈 신간이 나왔다. 이번 편은 프랑스 여행, 정확히는 프랑스 수도 #파리여행책 이다. 아무래도 프랑스 여행하면 베르사유궁이나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성당 같은 랜드마크가 수두룩한 파리로 떠나는게 기본중의 기본일테니. 나만해도 프랑스, 파리 여행에 대해선 1도 모르지만, 적어도 역사를 품고있는 건축물이나 랜드마크 등은 거의 다 알고있는 편이기도 하고.





자 이쯤에서 『파리 셀프트래블』 을 펼쳐보자!


목차만봐도 알 수 있듯, 『파리 셀프트래블』은 파리 여행에 대한 모든것을 꽉꽉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목차 별 세부내용을 읽다보면, 노련한 여행가도 놓치기 쉬운, 파리여행 사소한 팁들까지도 꽉꽉 담겨있다.

그야말로 초보 파리여행러에게 『파리 셀프트래블』은 파리여행의 바이블이라고나 할까?

 



 




파리 여행 시 주의사항 ( 『파리 셀프트래블』 p 024~ )


1. 파리 여행을 피해야할 시기는? 파업시기다. 프랑스 파업은 한국과 달리 공항, 철도, 지하철이 완전히 멈춘다. 특히 11월과 12월은 파업이 자주 있으니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파리 파업 소식에 귀를 기울일 것! 숙소를 예약할 때는 도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중심가로 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2. 파리는 안전한가? 파리는 익히 알려진 대로 소매치기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특히 주의해야할 장소는 샹젤리제, 오페라역, 동역, 북역, 생우앙 벼룩시장,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트다. 길에서 조직적으로 소매치기를 벌이기도 하니 주의해야 한다. 가방은 대각선으로 앞쪽을 향해 메는 습관을 들이자. 휴대폰도 필요할 때만 꺼내서 보고, 꺼낼 때는 스프링고리나 릴 홀더를 이용할 것!

3. 파리 물가는? 일회용 교통권은 한국의 2배, 커피는 한국과 비슷, 물/바게트/과일/채소는 한국보다 저렴하다. 하지만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땐 한국의 2배 정도를 생각해야 한다.


책을 읽다보면 파리 여행 시 주의사항에 대한 내용이 꽤나 알차게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었던게, 파리 여행을 ‘피해야하는’ 시기다. 보통 여행책은 여행하기 좋은 시기를 알려주는데, 이 책은 여행하기 좋은 시기 뿐만 아니라 피해야하는 시기까지 알려준다. 더 놀라운건 피해야하는 사유가 ‘파업’이라는 거. 이야! 파리 교통 파업은 말 그대로 파업이구나. 모든 교통이 멈춘다니.

여기서 놀라면 섭섭하다. 보통 여행책에는 여행일자별 추천일정이 있다. 『파리 셀프트래블』에도 당연히 추천일정이 있는데, 어머나 세상에? 놀랍게도 ‘당일치기’ 및 ‘1박 2일’ 일정이 있다. 보통 유럽권 여행은 일주일이 기본인데, 당일치기 및 1박 여행일정이라니. 이런 일정이 있다는 건, 저자가 업무 출장 차 짧게 파리를 방문한 회사원들까지 고려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어쩜 이렇게 섬세할 수가!!! 




파리 중요 관광지(『파리 셀프트래블』 p 038~)


파리가 프랑스 대표 여행지인 이유! 바로 수많은 문화유산과 랜드마크에 있지 않을까? 유명한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노트르담 성당과 오페라도 그렇고, 왕실과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이나 루브르 박물관도 그렇고. 파리에 있는 모든 관광지를 열거라하면 입아프기에, 아래에 내가 가보고 싶은 관광지 몇 곳만 적어봤다. 이 외에도 책에서 더 많은 파리 관광지, 여행지를 소개하고 있다는 건 안비밀!



1. 센 강변: 센 강변 주변으로 파리 역사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건축물이 산재해있다.
2. 베르사유 궁전: 루이 14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부터 루이 16세까지 프랑스 왕족이 살았던 궁전이다.
3. 에펠탑: 1889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철탑이다.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으로, 여행 1~2개월 전에 미리 예약하는게 좋다.
4. 개선문: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렐리츠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5. 노트르담 대성당: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의 배경 성당으로 중세시대에 건축된 성당이다.
6. 오르세 미술관: 폐기차역을 활용한 미술관이다.
7. 루브르 박물관: 과거 왕의 궁전이었으나, 지금은 세계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8. 오페라: 『오페라의 유령』 배경지이자, 1875년에 만들어진 극장. 오페라 앞 계단은 만남의 장소로 쓰인다고.





파리 식당에서 음식 주문하기 (『파리 셀프트래블』 p 058~)


미식의 나라 프랑스. 고로 프랑스에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먹방러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전에 알아야 할 것! 프랑스 식문화는 한국과 다르다는 점이다. 

파리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음식이다. 파리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길거리 제과제빵의 수준 높은 맛에 파리가 사랑스러워진다. 빵집과는 달리 오랜 시간 머물게 되는 식당은 좀 더 나아간다. 프랑스의 점심이나 저녁 식당은 보통 전식, 본식, 후식으로 구성되는데 전식 또는 본식만 선택해 먹을 수도 있고 세 가지 코스로 즐길 수 있다. p 058



- 전식요리: 달팽이 요리, 푸아그라, 타타르 데 뵈프, 양파 수프, 샐러드
- 본식요리: 뵈프 부르기뇽, 꼬꼬뱅, 키쉬, 오리 콩피, 오리 가슴살 구이 등
-  후식: 디저트



자세한 음식 이름, 사진 및 설명은 책에 실려있으니, 생략!

근데 뭐 음식 이름, 사진을 백날 본들 메뉴판을 읽지 못해서 주문하지 못하면 말짱 꽝! 이 책은 그런 먹방러들을 위해 프랑스 식당 및 카페 이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거기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바로 메뉴판 읽기! 일부 식당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식당은 오로지 프랑스어로 된 메뉴판만 비치한다고 하니, 이 책에서 알려주는 메뉴판 읽기를 꼭 확인해보자.



파리 여행 도보 추천 경로(『파리 셀프트래블』 p 083 ~ p166 )


나는 여행을 가면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 보다는 도보 여행을 즐겨했다(국내외 모두). 그런 나에게 도보로 여행할 수 있는 파리는 정말 최고의 여행지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저자가 친절하게, 파리 권역별로 도보 루트를 추천해주니, 구글지도를 보며 어렵게 루트를 짜낼 필요도 없고.


▶ 파리 랜드마크 구경! 에펠탑에서 개선문까지
1. 사요 궁에서 출발해 몽테뉴 길과 샹젤리제를 거쳐 개선문까지 거리는 총 3.2km
2. 에펠탑을 가까이에서 보고 인도교인 드빌리교를 건너 몽테뉴길로 가는 거리 4km. 근처에 바토 무슈와 바토 파리지앵 선착장이 있으니 센 강을 유람해보는 것도 좋다.
3.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다면 에펠탑에서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앵발리드로 간 후 그곳에서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를 지나 샹젤리제를 걷는 방법도 있다. 이때 도보 거리는 6km.
4. 시간이 없다면 사요 궁의 Trocadero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곧바로 개선문으로 갈 수 있다.



▶ 파리의 탄생과 프랑스의 지성! 시테 섬과 라탱 지구
1. 시테 섬과 생 루이 섬을 돌아보고 생 제르맹의 활기찬 분위기를 느껴보는 루트로 총 거리는 4.2km다. 조금 많이 걷긴 하지만 아기자기한 예쁜 골목과 먹을거리, 볼거리가 많아서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20세기 프랑스 문학과 예술의 생산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카페를 지나 예술의 다리가 그 종착지다.


▶ 프랑스 고대부터 현대까지, 루브르 박물관 주변 (루브르 박물관 구경 후 오페라까지 가는 길)
1. 체력이 바닥이라면 가장 빠른 1.3km
2. 루브르에서 튈르리 정원을 돌아보고 초콜릿과 전통 있는 식료품점이 모여 있는 마들렌 사원을 거쳐 오페라로 향하는 2km.
3. 오르세 미술관에서 튈르리 정원을 거쳐 마들렌 사원, 오페라로 가는 2.5km
4. 튈르리 정원에서 방돔 광장을 거쳐 오페라로 가는 2km

그리고 핸드북! 짐을 최소한으로 들고다니는 여행러들을 위한 핸드북은, 그야말로 세심함의 끝판왕이 아닐런지?!

프랑스 파리여행을 계획하는 여행러들에게 여행책 『파리 셀프트래블』을 강력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서 우리는 의정부에 올라간다 - 의정부시에 대한 인문학적이고 여행학적인 보고서
박종인 외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종인 기자님 신간이 나왔다. 인터넷 서점에서 기자님 신간 알람이 떴길래, 냉큼 봤더니 왠걸? 상상출판에서 출간 중인 시리즈물 역사 순한맛 『땅의 역사』 시리즈도 아니고, 와이즈맵 출판사에서 종종 나오는 매운맛 역사책도 아니었다. 뭐랄까, 책 제목만 봤을 때는 지자체에서 기념도서로 출간되거나, 해당 지자체에 있는 관공서 책장에 꽂혀있을 법한 제목이었다. 그게 그말인것같기는 한데. 하하하. 거기다 저자도 박종인 기자님 단독이 아닌 공동집필이었다. 뭐랄까, 약간 동공지진.....이 왔지만! 기자님 신간이니까 바로바로 겟겟!!



책 제목은 『그래서 우리는 의정부에 올라간다』.



제목만 봤을 땐, 단순히 ‘의정부’라는 도시를 기념하기 위한 책인것 같기는 한데. 대체 왜 ‘의정부’? 다른 도시도 많은데? 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면서 책을 딱 피고! 서문을 딱 읽었는데! 어머 세상에. 올해가 의정부 도시 승격 60년이 된 해란다. 그를 기념하여 책이 출간된거긴 한데, 이게 약간 다른 지자체들 기념 도서와 느낌이 조금 다르다. 쉽게 말하자면 이 책은 의정부를 인문학적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여행책이자, 인문학책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



‘의정부 60년 시사’ 같은 기록물을 만들 수도 있었다. 시사 편찬은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런데 대게 시사는 어마어마한 작업이 필요한 몇 권자리 대작인데다 의정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만 보면 어떡하나 싶은 알량한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 모두에게 줄 책을 만들기로 했다. 이 책은 의정부 60년 생일잔치에 독자 여러분을 부를 초대장이다. p 007



현직 의정부 시장은 의정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의정부는 옛것을 부여잡고 있는 쇠락한 종같집 같다”고. 의정부를 떠올리면 함흥차사나 군사도시, 또는 주말산행의 핫플레이스, 그리고 부대찌개 정도밖에 없다는 거다. 근데 내가 생각한 의정부도 이와 동일하다. 거기에 조금 더하면 의정부 천보산에 있는 족두리묘 정도? 그나마 족두리묘는 내가 실제 답사를 갔던 곳이기에 알고 있는거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조차도 모른다는게 함정이다.



그런데....놀랍게도 과거 의정부는 경기 북부에서 으뜸가는 형님도시였단다. 경기 북부 지역 사람들은 의정부에 갈때마다, ‘의정부에 올라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말이다. 그랬던 의정부였다. 하지만 지금 의정부 위세는 바로 옆, 일산신도시가 있는 고양시에도 못미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다. 그래서 이 책이 나왔다.


아래는 박종인 기자님이 쓴 첫번째 챕터 「의정부에 대한 인문학적이고 여행학적인 보고서」 내용 일부다.



함흥차사: 이성계와 이방원

‘의정부’ 하면 제일 유명한 이야기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부자간 갈등을 담은 ‘함흥차사’ 이야기다. 의정부와 함흥차사를 연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대체로 함흥차사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고 심지어 역사적 사실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함흥차사는 완전한 사실도, 그렇다고 완전한 거짓도 아니다. 



실제로 ‘함흥차사 전설’이 처음 등장한 건 1615년에 죽은 ‘차천로’가 쓴 저서 《오산설림초고》’다. 조선이 건국되고도 160년이나 지났고, 심지어 임진왜란까지 겪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허구의 산물이다. 이후 1806년 이긍익이 쓴 저서 《연려실기술》에서 차천로의 글이 재인용된다. 이후 ‘의정부’라는 지명에 대한 상상과, 실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갈등을 해소하는 흔적들로 인해 함흥차사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조사의의 난이 평정되고, 이성계는 수도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성계는 한성을 도읍지로 정했지만 1402년 당시 수도는 아들 정동에 의해 개경으로 재천도된 상태였다. ‘조운이 통하고 백성도 편리할 땅’이라며 이성계가 고심 끝에 선택한 땅이었지만 아들은 개경 복귀를 선택했다. (…) 정종을 내쫓고 왕이 된 이방원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한성 재천도만이 아버지에게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새 왕조 국왕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었다. p 057



1406년 11월 5일 마침대 황해도에서 마음을 다스린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왔다. 아들 태종이 옛 앙주 남교에 미리 가서 대기하는 사이 이성계는 양주 객사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양주 객사는 지금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에 있었다. 아들과 아비는 양주 한가운데 너른 녹양들판을 바라보며 위대한 화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윽고 태종이 무리를 이끌고 녹양들판을 북상해 객사에 당도했다. 아들이 올린 술을 아비가 즐겁게 받아 마셨다. 아들은 해가 저문 다음에야 들판에 설치한 장막으로 돌아왔다. p 058



여기가 역사 현실 속에서 벌어진 길고 긴 함흥차가 서사시의 종점이다. 건국 과정에 벌어졌던 피비린내나는 갈등이 녹양벌에서 해소됐다. 그 해소된 갈등을 딛고 태종 이방원이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전 과정을 놓여 놓은 이야기가 의정부에 전해오는 함흥차사 전설이 가진 의미다. p 061




족두리 묘: 의순공주

의정부 천보산에 금림군 가족 묘소가 있다. 그 안에 비석 없는 묘소가 1기 있는데, 옛부터 ‘족두리 묘’라고 불렸다. 족두리 묘 주인은 다름아닌 의순공주다. 이 곳은 2021년 내가 의정부를 찾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의순공주가 누구인가? 병자호란 이후 제 딸들 지키기기 급급했던 효종이나, 권세가들은 힘없는 집안의 여자를 골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는데, 그 희생양이 바로 의순공주였다. 그녀는 조금 한미한 전주 이씨 가문에 태어났을 뿐인데, 나랏님의 결정으로 갑자기 공주가 되고,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런데 못난 조선 남자들, 막상 의순공주를 오랑캐인 청나라에 보내려니, 조선의 여인을 오랑캐와 결혼시킨다는게 끝내 용납이 안됐나보다. 그들은 의순공주가 청나라 가는 길에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어’ 바다에 몸을 던저 자결하고, 족두리만 물 위에 떠올랐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족두리로 묘소를 만드니, 그게 바로 의정부 천보산에 있는 족두리묘다.



의순공주의 삶은 정묘/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살아돌아온 조선의 여성들과 맞닿아있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지켜주지 못했고, 힘 없는 나라로 인해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던 그녀들 말이다. 조선에 돌아온 그녀들이 마주했던건 ‘환향녀’라는 삿대질과 돌팔매질, 왜 그자리에서 죽지 않았냐는 폭언과 가족들에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뿐만 아니라 의순공주처럼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있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실제로 가족의 손에 죽어나간 여자들도 있었다.



의정부 천보산에 있는 족두리묘는, 못난 조선 남자들로 인해 희생된 조선의 여성들의 한이 담겨있다.



떠나기 전 공주를 호종할 사신들에게 왕이 일렀다. “명심하라. 금림군은 내 5촌이고 의순공주는 내 6촌이며 양녀다. 금림의 자식이 아니다.” 효종과 10촌 형제인 금림군은 5촌 아저씨로 둔갑헀다. 11촌 조카딸은 6촌 누이며 동시에 양녀가 됐다. (…) 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이미 모든 게 결정됐는데 이런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그 자리에서 8~12세에 해당하는 사대부 자녀의 혼인금지령을 내렸다.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살 된 공주를 혼인시키겠으니 적령기 남녀 혼인을 금지하라는 것이었다. ‘두 살 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p 071



숱한 여자가 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매우 적은 수가 돌아왔다. 이들을 환향녀라고 한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1638년 신풍부원군 장유의 며느리가 청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장유는 인조에게 “함께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이혼을 허가해달라” 하고 요청했다. 장유는 훗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 장인이다. 그러자 좌의정 최명길이 “몸을 더렵혔다는 증거가 없다”며 이혼 불가를 주장했다. 그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환향녀와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인조실록》 사관은 이혼 불가를 주장한 최명길을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평했다. p 072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 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이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건져 모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의정부 사람들은 의순공주 넋을 위로하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무덤은 최근까지 초라하게 방치됐다가 정비됐다. p 073




그 외 의정부에 흔적을 남기다: 흥선대원군, 박태보, 김구, 위안스카이

숙종은 환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이용된 도구가 장희빈과 인현왕후라는 두 여자다. 장희빈을 이용해 남인을 움직였고, 인현왕후를 이용해 서인을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박태보다. 하룻밤에 곤장을 맞고, 주리를 틀고, 불에 달군 인두에 짖어지고, 사금파리더미 위에 꿇어않힌 뒤 무릎을 바위로 짓이기는 고문을 받았다. 장희빈과 그녀가 낳은 아들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 고문을 하룻밤에 다 받고 죽었다. 서인은 물론 장희빈를 지지하던 남인까지도 박태보의 기개와 죽음을 기렸다. 그의 무덤이 의정부에 있다. 



고종 즉위 후 정권을 잡고 개혁을 해나가던 흥선대원군이 순식간에 몰락해버렸다.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것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진행하던 개혁들을 전부 뒤엎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격노하여 경기도 양주에 있는 산장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산장이 현 의정부시 가능동 곧은골에 있었던 ‘직곡산장’이다. 아마 흥선대원군은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과정을 생각했으리라. 이방원은 이성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고종은 이방원이 아니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복귀를 바라는 유생들을 참수하라며 강경대응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산장에서 나와 아들 고종에게 머리를 숙였다. 직곡산장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의정부는 흥선대원군 이름을 딴 지명들이 여럿 생겼다.



백범 김구 선생도 의정부를 스쳐갔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의회가 성립된 후 제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를 주장하던 김구는 당연히 배제되었다. 이후 김구는 사패산 석굴암을 찾았다. 석굴암에는 김구 친필 암각이 남아 있다. 



조선 말 외교고문으로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청나라 군인 위안 스카이도 의정부를 스쳐지나갔다. 그의 흔적은 도봉산 망월사에 남아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도 패악질을 하고, 본국인 청나라로 돌아가서도 황제노릇해보려 했던 권력만 쫓던 탐욕가였다.




근대도시 의정부

근대 의정부는 두 가지 큰 역사적 사건을 통해 만들어졌다. 한번은 일제강점기 당시 경원선 의정부역 개통이고, 다른 하나는 6.25전쟁 이후 미군 주둔이다. 



경원선 개통으로 외지 사람과 각종 문물이 의정부로 몰려들었다. 경원선 부설은 일제가 조선 물자 침탈을 위해 진행한 것이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로 인해 의정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외지인과 온갖 문물이 의정부로 몰려들었고, 결과적으로 의정부에 인구가 들면서 각종 공장이 들어서고, 학교가 들어서고, 영화산업까지 들어서며 실질적인 경기 북부 으뜸 도시로 거듭났다.


6.25 전쟁 이후 의정부는 쑥대밭이 되었다. 남한에 있던 다른 도시들고 그러했겠지만, 북한과 가까운 의정부는 전쟁기간 내 점령군이 여섯 차례나 바뀔 정도로 혼란의 정점에 있던 도시였다. 그랬던 도시이기에, 전쟁이 끝날 무렵 미8군사령부는 제1군단사령부를 의정부에 설치했다. 이어 미군과 작전을 함께하는 유엔군 소속 각국 부대도 의정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주한 미군이 의정부에 자리를 잡으면서, 쑥대밭이 되었던 의정부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미군을 상대하며 의정부 경제가 살아났다. 경제가 살아나자 인구도 들어났다. 의정부가 시로 승격한 근본적인 원인은 주한미군이 가져온 나비효과였다.




산, 예술문화 그리고 음식: 여행지로서 의정부는 매력만점 도시다


‘왜 의정부에 가는가?’ 토박이 의정부 시장 김동근이 던진 질문에 대략 답이 나왔다. 의정부 시민에게 찰나에서 영원으로 전승돼온 함흥차사, 실제로는 그 유장하고 격정적인 역사를 즐기기 위해 우리는 의정부로 가야한다. 녹양벌 너른 들판을 에워싼 명산 품에 안기기 위해 우리는 의정부로 가야한다. 그 벌판과 산에 발자국을 찍어놓은 근대 거인들 흔적을 찾기 위해 의정부로 가야한다. p 104



‘놀러가기 위해’ 찾아가는 도서관 봤나? 그게 의정부에 두 군데나 있다. 2장에서 소개한 미술도서관과 함께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음악도서관이다. 음악도서관은 미술도서관과 함께 어쩌면 의정부가 미래로 나아갈 비상구이면서 맏형으로서 누렸던 영화를 회복할 수 있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의정부를 찾는 바깥사람에게는 자칫 지루한 역사 이야기를 벗어나 상큼하고 맑은 의정부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p 107


도봉산, 천보산, 용암산, 부용산, 수락산, 사패산., 흥복산. 전부 의정부를 둘러 싸고 있는 명산들이다. 지금까지도 의정부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산들이다. 특히 의정부 자존심인 도봉산에는, 산악인 대장 엄홍길이 살았더랬다. 지금은 생가터만 표지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암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수락산, 의순공주가 잠들어 있는 천보산, 임도가 잘 돼 있어서 산악 자전거를 즐기는 이가 많이 찾는 흥복산, 이성계와 무학대사 그리고 김구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패산, 바위가 꿈틀대는 용처럼 늘어서 있어서 용암산까지. 의정부는 산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 산 뿐이던가? 의정부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미술도서관과 음악도서관이 있다. 문화 볼모지 의정부로 전근한, 한 공무원이 끈질기게 매달려 만들어낸 성과다. 삶의 질을 높이는 건 다름아닌 문화생활이다. 미술도서관과 음악도서관 덕택에 현재 의정부시민들은 다양한 예술,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 도서관을 방문한 외지인들이 “이 도서관이 있는 의정부에 살고 싶다”라고 말하고, “시민 세금을 가장 모범적으로 사용한 사례”라고 말하겠는가. 새삼 부럽다. 내가 사는 시흥 공무원들은 대체 어디서 뭐하나 몰라. 청렴도도 매년 전국 하위권에 머무르는 그들이 좀 본받았으면 싶다. 에휴.



(통닭)다들 가난했던 시절, 예전처럼 닭 한 마리를 백숙처럼 통째로 내던 서울에 반해, 의정부를 위시한 미군 주둔 도시에서는 미국식으로 부위별로 토막을 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은 전국 어디서건 의정부에서처럼 먹기 좋게 토막치킨을 내니, 의정부는 신문화를 좀 더 일찍 수용한 셈이다. 그 신식 음식 가운데 한국적인 요리 문화와 미국적인 식재료가 융합해 탄생한 메뉴가 바로 부대찌게다. 다시 말해서 ‘가난’과 ‘미군 식재료’와 ‘한국 특유의 찌개 문화’가 버무려져서 우리의 의정부 부대찌개가 탄생했다. p 111



1998년에 조성된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에는 ‘오뎅식당’이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부대찌개 원조 식당이다. 오뎅식당 또한 시작은 볶음이었고 지금은 찌개가 주 메뉴다. 시작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재료다보니 상호에는 그 서럽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부대찌개’의 ‘부’자도 보이지 않는다. (…) PX가 됐든 부대 식당이 됐든 불법 유통된 식재료를 썼노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던 아픔, 그리고 연유야 어찌 됐건 남의 나라 군인들이 먹는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고 하기 거북했던 가난한 자존심이 ‘오뎅식당’이라는 상호에 담겨있다. p 113


용광로 같은 의정부 이주민 문화는 뜻밖에도 의정부를 평양냉면의 성지로 만들었다. 전국 맛집이 몰려 있는 서울에서 가장 활황인 평양냉면집이 있는데,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이다. 이 두 음식점의 친정이 의정부 평양냉면이다. (…) 원조 가운데 원조인 평양은 통일이 된 다음에나 맛볼 수 있겠고, 휴전선 남쪽 대한민국 평양냉면 4대 문파 가운데 셋은 서울에, 하나는 의정부에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다른 3대 문파와 치열하게 쟁패중인 을지면옥과 필동면옥 주인은 의정부 평양면옥집 딸들이니 과연 의정부는 대한민국 평양냉면계를 주름잡고 있는 성지다. 서울 잠원동에 있는 ‘본가평양면옥’도 셋째 딸이 분가해 낸 집이다. p 114


역시 이북 음식인 초계탕은 북경기와 강원도 전역에 퍼져 있다. 초계탕은 식초와 겨자를 넣은 차가운 닭 육수에 메밀면과 닭고기를 가늘게 찢어 넣어 먹는 음식이다.초계탕의 ‘초’는 식초요, ‘계’는 함경도 사투리로 ‘겨자’의 ‘계’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이 차가운 초계탕을 추운 겨울에 별미로 먹었다. 의정부 식당 ‘평양초계탕막국수’도 전국 초계탕 원조 가운데 하나다. p 116 



의정부는 먹방여행으로도 제격인 도시다. 첫번째 음식은 부대찌개다. 모두가 다 알고 있듯, 의정부는 부대찌개가 탄생한 도시다. 그래서 당연히 의정부가면 부대찌개를 먹으면 되겠지! 싶었다. 근데 아니었다. 놀랍게도 의정부는 평양냉면 성지였다. 평양냉면 더쿠들이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서도, 나같은 머글들은 처음듣는 이야기니까. 



6.25 전쟁 이후 이북 출신들이 의정부에 많이 자리를 잡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의정부 평양면옥집 사장이란다. 평양출신으로 의정부에 냉면집을 차렸는데, 의정부에 살던 피란민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더니 어느새 평양냉면 성지가 되었다. 그 평양면옥집 딸들이 서울에 분가를 냈는데, 부모의 손 맛을 그대로 이었는지 서울 분가도 줄줄이 평양냉면 성지가 되었다고.




쇠락한 도시라 생각한 의정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과거와 달리 많은 게 변했다. 지금 의정부는 산의 도시, 군사도시 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등산이나 역사는 당연하고, 트랜드를 선두할 예술문화와 음식이 매력적인 여행도시로 바뀌어 있었다. 특히 내가 혹했던 점은 의정부 경전철과 역사다. 의정부 경전철이 땅이 아닌 고가 선로를 달린다는 점에서 혹했고, 경전철만 타면 의정부의 역사적 장소를 대부분 들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또 혹했다. 그것도 모르고 난 의순공주 묘소 하나만 보고 집으로 컴백했고.. 하..


 


거기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미술도서관과 음악도서관이 의정부에 있다. 흔히들 떠올리는 고리타분한 미술관이 아니다. 일단 그 속은 둘째 치고 건물 사진만 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장소다. 거기에 만인이 향유할 수 있는 전시장까지. 음악도서관은 또 어떠한가. 미군의 음악문화 덕택에 의정부 시민들은 노인들까지도 재즈와 록 음악에 익숙했다고 한다. 이에 착안하여 생겨난게 음악도서관이다. 음악도서관은 매년 의정부음악극축제와 블랙뮤직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여기서 말하는 블랙뮤직은 과거 미군 음악문화로 인해 의정부 시민들이 듣고 자랐던 재즈, 블루스, 가스펠, 솔, R&B, 힙합 등을 이야기한다.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음악들이 아닌가.



산과 역사 하나만 봐도 나에게 의정부는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오는데, 여기에 예술문화와 음식까지 더해지다니! 이쯤되면 다시한번 의정부를 찾아가봐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 역사도 몰랐던 조선 왕실 가족사
이순자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장을 둘러보다가 과거에 읽었던 역사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 제목은 『조선의 숨겨진 궁가 이야기』. 어려서부터 답사여행을 좋아했었던터라, 답사에 도움이 되는 역사책을 자주 사곤 했었다. 이 역사책을 구입한 이유도 답사였다. 특히 이 책을 구입할 즈음엔 조선 궁궐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 바로 그 시기이기도 했다.




분명 조선의 궁궐은 5개(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인데, 왜 일반적으로 경희궁을 제외한 4대 궁으로 이야기하는지


종로에는 운현궁이, 강화도에는 용흥궁이 있는데 이 저택들도 내가 생각하는 ‘궁궐’이 맞는건지


역대 조선 왕들은 자신의 아들, 딸이 결혼하면 궁 밖에 저택을 하사했는데, 그럼 그 많던 저택은 다 어디로 갔는지 


예컨데 구로 궁동은 선조의 딸인 정선옹주가 살았던 곳이며, 그 저택이 궁궐과 같다하여 지명도 ‘궁동’으로 남았는데, 그럼 수많은 왕자군과 공주, 옹주 집들은 전부 궁궐같은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는지


기타 등등등!!



조선의 궁궐과 조선 왕실 가족들이 살던 곳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하던 때였다.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읽었던 책이었다. 물론 책을 읽은지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기에^_T. 겸사겸사 이번에 다시 읽어보았다.



 





주의사항 ! 이 책은 조선 역대 왕들이 거주했던 5대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왕으로 즉위한 후 거주했던 5대 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보통 조선에서 왕이 되는 방법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 세자 시절을 거쳐, 부왕이 죽으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세자시절을 비롯해 왕위에 즉위해서도 경복궁 내지는 창덕궁에 거주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사를 통틀어서 정상적인 방식으로 왕위에 오른 왕들이 몇 없었다. 대다수의 조선 왕들은 세자가 아니었지만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거나, 선왕이 후사가 없어서 지명되어 왕이되거나, 세자였던 형님이 나가리(?) 되면서 왕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고로 왕이 되기 전까지는 세자가 아닌, 그저 왕의 아들로 궁 밖에 나가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궁 밖에 나가서 살던 왕자들이 갑자기 왕이 되었다. 자연스레 왕자시절에 살던 저택은 ‘왕이 살던 곳’이 되었고, 그렇게 ‘궁’이라는 글자가 붙게된다. 하지만 즉위한 왕이 사는 궁궐은 아니다. 대신 궁에 준하는 집, 집 가(家)라는 자를 붙여서 ‘궁가’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함정은 궁가가 왕이 살던 곳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왕이 대군 및 왕자군, 공주 및 옹주들에게 하사하는 저택들 역시 궁가라 불리었다. 뿐만아니라 왕을 낳은 후궁이라던가, 대원군 등의 신주를 모신 사당도 ‘궁’이다. 



고로 이 역사책은 ‘궁’이라 붙여진 저택에 살았던 조선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다. 왕이 되기 전이었던 대군들이나 왕자군 이야기도 당연히 포함이다. 예컨데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조선 왕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이후 왕실 가족들이 떠난 궁가들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현재는 어떤 모습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조선의 궁가들은 한성, 지금의 ‘서울’에 포진되어 있으므로 서울 답사 여행 역사책으로 추천한다. 다만 이 책이 발간된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현재 내가 소장한 책은 절판되었다. 대신 2013년에 동일한 내용으로 개정판이 나온듯 하다.




어의궁은 한성부 서부 인달방에 있던 궁가로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상어의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가로 효종이 태어난 곳이고, 하어의궁은 한성부 동부 숭교방에 있던 궁가로 인조와 효종이 살았던 곳이다. 상어의궁은 ‘잠룡지’ 라고도 부르고, 하어의궁은 ‘어의동궁’, ‘용흥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어의궁이라고 하면 하어의궁을 말하는데, 이곳에서 인조 이후 14명의 왕비와 왕세자빈의 가례를 올렸다. p 048



하어의궁은 1638년(인조 16)부터 효종, 현종, 숙종 대를 거쳐 영조, 순조, 현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실의 가례소로 중요시 되었다. 특히 숙종의 세 왕비는 모두 이곳에서 가례를 올렸고, 1757년 6월 영조는 15세의 정순왕후를 이곳에서 맞아들였다. 영조의 두 아들과 손자 정조 가례식도 이곳에서 올렸다. 조선 후기 왕비와 세자빈들의 가례소인 이곳에 오늘날 웨딩프라자가 들어섰으니 확실히 땅의 기운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p 053



창의궁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던 궁가로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딸 숙휘공주와 부마 정제현이 살았는데, 숙종이 연잉군에게 하사했다. 경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로 즉위했다. 그후 효장세자가 죽자 이곳에 효장묘를 세우고, 의소세손이 죽자 의소묘를 세웠다. 순조 때는 효명세자의 사당인 문효묘를 세우기도 했다. 1900년에는 의소묘와 문희묘(문효세자 묘)를 영회전으로 옮기면서 창의궁은 폐궁되었다. p 063



영조 즉위 4년 후인 1728년, 효장세자가 10세로 요절하자, 영조는 다음 해 11월 5일 “창의궁은 곧 사저로 동궁에 속한 것이니, 만일 지금 그 궁에다 사당을 세운다면 어찌 사세가 둘 다 편리하지 않겠는가?” 하며 세자가 어린 시절에 살던 창의궁에 사당인 ‘효장묘’를 세웠다. p 068



일제강점기에 비어 있던 창의궁은 1908년 동양척식회사가 소유하면서 2층 건물의 직원 사택이 들어섰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1필지였는데 이후 최창학의 소유가 되었다. 광복 후 필지가 분할, 매각되어 2011년 현재 108개의 필지로 나뉘었다. 종로구 통의동 35번비 15호에는 ‘통의동 백송’이 있어 이곳에 고택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p 073




영조의 후손들이 줄줄이 요절했다. 정확히는 후계를 이을 후손들이. 아들 효장세자를 시작으로 손자 의소세손, 증손자 문효세자, 고손자 효명세자 까지. 왕위에 즉위하기 전까지 영조가 살았던 그 저택이, 요절한 영조의 후손을 모시는 사당이 되어버린 운명의 장난인걸까?




운현궁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궁가다. 이곳은 구름재, 즉 운현에 있어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한양 내의 궁가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있고, 소규모 궁궐과 같이 4대문을 갖춘 곳으로 궁가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p 077



흥선군이 부친의 묘를 이장하느라 살고 있던 안동별궁을 정리했기 때문에, 남연군의 아들들은 운현 근처로 이사를 했다. 이때 흥완군 이정응은 계동에, 흥선군은 운현 아래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묘를 옮기고 나서 7년 후인 1852년(철종 3년) 드디어 운현 집에서 둘째 아들 명복이 태어났다. 풍수지리에서는 묘를 쓰고 얻은 자식이 그 묘의 발복을 얻는다고 하는데, 명복은 조상의 음덕으로 태어나 운현 언덕에서 뛰어놀며 큰 소나무를 타고 놀던 12세의 소년이 되었다. p 080



고종은 왕위에 오른 후 대원군 궁가의 면세 전결 1,000결에 대한 토지 값으로 은 2,000냥을 실어보내고, 궁장이 갖춰지기 전에는 국가에서 콩 100석과 선혜청에서 쌀 100석을 5년 동안만 실어보내라고 했다. 또한 호조에서 집을 수축하는 비용으로 1만 7,830냥을 보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살던 집을 수리하면서 신축을 하는데, 전국 일류의 목수들과 최상급의 자재들을 동원했다. 운현궁의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약 3만 3,058제곱미터(1만 평)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규모와 화려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p 085



일제강점기에 운현궁은 구황실 재산으로 압류되었으나 그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었다. 1948년에는 미 군정청이 운현궁은 왕실 재산이 아닌 개인 재산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개인 소유로 등기되었다. 이때부터 개인 재정으로 운현궁을 유지했는데,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예식장도 운영하고, 땅을 분할해서 팔기도 하며, 도로변으로 상가를 지어 운영하기도 했다. p 092



종로구 운니동 114번지 7호는 덕성여자대학교 종로 캠퍼스다. 운현궁이 팔려나갈 때 이 터와 양관 건물은 덕성학원의 소유가 되었고, 현재 양관은 덕성학원 법인사무국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로구 운니동 114번지 8호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헌병초소가 있던 자리로 운현궁의 움직임을 감시했던 곳이다. 1968년 운현궁의 뒤뜰 약 3,074제곱미터를 일본대사관에 매각하려 했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취소한적이 있었다. 1975년 일본문화관이 입주하여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종로구 운니동 114번지 9호와 114번지 31호는 김승현의 소유로 9호는 서울빌딩이고, 31호는 운현궁의 별당인 영로당이다. 1948년 9월 4일 박찬주는 운현궁의 소유권을 이청에게 이전하고, 9월 7일 영로당 권혁을 김승현에게 팔았다. 현재는 김승현의 셋째 아들 김영무가 소유하고 있는데 그는 법무법인 김앤장의 대표 변호사다. p 094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궁가는 몇 개 없다. 운현궁, 용흥궁, 칠궁 정도다. 그 중에서도 운현궁에선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운현궁은 흥선군 이하응의 저택이다. 흥선군은 뛰어난 정치능력으로 자신의 차남을 왕으로 만들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다. 이미 망국 열차를 탔던 나라였고, 왕이된 고종마저도 백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뭐 고종에 대해선 할말이 많으나, 워낙 관련 포스팅을 많이 했으니 각설하고. 



운현궁의 역사만 봤을 때,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운현궁에서 산 건 아니었다. 부친인 남연군 묘를 예산에 이장하는 과정에서 돈이 부족하여, 자신이 살던 곳들을 정리하고 이사 온곳이 바로 운현궁이다. 운현궁 역사의 시작점이 남연군 묘 이장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알았다. 약간 좀 새로운 느낌이랄까? 이 외에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이 되는 과정에서 운현궁이 지금 모습이 되기까지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운현궁 역사의 끝에 김앤장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누동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가로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이 살았고, 철종이 태어난 곳이다. 철종은 왕위에 오르고나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형 영평군을 이곳에 살게 했다. 1869년에는 안동별궁에 있던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기며 ‘누동궁’이라고 했다.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혼례가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p 115



1752년 사도세자의 승은을 입어 승휘에 오른 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은 후 양제가 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 임씨도 폐서인되어 두 아들과 함께 궁궐을 나와서 전동에 살게 되는데, ‘양제궁’이라 불렸다. 영조가 은언군의 행방을 탐지할 때 ‘전동의 집’을 언급했던 적이 있다. 영조는 죄책감에서인지 사조세자의 서자들에게 관대했다. 그러나 은언군과 은신군은 젊은 나이에 늙은 재상이 타는 남여를 타고 다니고, 시전 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는 등 방자한 행동을 하여 1771년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그해 은신군이 제주에서 사망하자, 이에 놀란 영조는 즉시 은언군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고, 은언군이 살 두어 칸의 집을 사서 지급하도록 하고 생모 임씨와 노복의 왕래를 허락했다. p 116



은언군은 정도 등극 후 홍록대부에까지 올라 세 아들 이담(상계군), 이당(풍계군), 이광(전계군)과 편안히 살았다. 그러나 1786년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이자 정조의 후궁인 원빈이 죽자, 은언군의 장자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상계군을 가동궁이라 하며 왕위를 잇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홍국영이 쫓겨나 병사한 뒤로도 그 일당들은 계속 역모를 꾸몄고, 상계군은 자신이 역모에 연루되자 자살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연루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향년 48세로 강화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송씨와 신씨는 신유박해 때 유일한 왕실의 순교자가 되었다. p 117



은언군이 사약을 받아 죽고 난 후 풍계군과 전계군은 강화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1822년(순조 22년) 순조는 사촌동생들이 살고 있는 강화도 집의 가시울타리를 철거하여 일반 백성처럼 살게끔 했다. 그리고 혼사 비용을 챙겨주고 종친부가 주관하여 혼사를 거행하게 했다. 전계군은 이 때 세 아들 원경, 경응(영평군), 원범(철종)을 낳았다. 이 때는 순조의 배려로 전계군이 누동궁과 강화도를 오갈 때인데, 철종은 누동궁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1844년(헌종10년) 안동 김씨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하급 무사인 민진용 등이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되었고, 이 일로 원경이 사사되었다. 따라서 경응과 원범은 또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p 119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9세의 강화도령 원범이 입궁하여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라 철종이 되었다. 따라서 원범이 살던 곳은 왕이 살던 잠저라 하여 ‘용흥궁’이라 불렸다. 본래 용흥궁은 ‘철종조잠저구기’라고 쓴 비석과 비각이 있는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이것을 1853년(철종 4년)에 강화도 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1903년 전계대원군의 사손 청안군 이재순이 보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규모의 ‘용흥궁’이 된 것이다. p 120




철종의 잠저는 누구나 다 알듯 강화도에 있는 용흥궁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 즉위 전,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으로써 강화도 유배시절 살았전 잠저다. 철종은 즉위하기 전까지 한양에도 거주했다. 바로 철종의 부친, 전계대원군의 저택인 누동궁이다. 철종은 누동궁에서 태어났다.



개인적으로는 운현궁의 역사도 흥미로웠지만, 누동궁의 역사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뭐랄까? 은언군이 사도세자의 서자라는 것도 알고있고, 정조 때 상계군 역모 사건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들들이 강화도로 유배간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다 왕실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어서 은언군의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했다라는 내용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만으로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강화도에서만 살았던 이원범이 진짜로 왕이 될 수 있는건가? 글자는 알고 있는건가? 뭐 이런 의문들 말이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그 의문이 풀렸다. 애초에 철종의 부친인 전계군은 순조의 배려아래 한양과 강화도를 자유로이 오갈수 있었다. 그 덕분에 원범이 한양 누동궁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다. 이복형 원경의 역모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복형 원경의 역모사건으로 인해 강화도로 유배간 것일 뿐, 원범은 한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순진무구한 강화도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담이긴 하지만, 왕위를 이어야할 영조의 후손들은 줄줄이 요절하고, 영조가 직접 죽인 아들 사조세자의 후손들은(정확히는 방계지만) 줄줄이 역모죄에 휩쓸려 죽어나갔다는게 참 아이러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3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린 ‘끝나지 않은 한국인 시리즈’ 세번째 권 『바이칼 호에 비친 내 얼굴』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고 이어령 선생이 작고하기 전 집필했던 원고를, ‘끝나지 않은 한국인 시리즈‘로 엮은 인문학책이다. 이 시리즈야말로 진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며, 인문학책으로도 단연 돋보적이다. 개인적으로 한창 타올라야할 젊은 지성들, 20대 30대에게 추천하고 싶은 인문학책이기도 하다.


이 인문학책  『바이칼 호에 비친 내 얼굴』은 ‘사람’이 주제다. ‘한국인’을 찾는 여정이 담긴 책이다. 정확히는 한국인의 ‘얼굴’을 찾기 위한 여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우리가 배워온 역사, 우리 몸 속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 등 한국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를 아울러 한국인의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같은 유인원들을 포함한 영장류가 점차 진화 발전하여 현생의 인류에 이르렀다는 것이 우리가 가장 광범위하게 인류의 기원으로 믹도 있는 진화론이죠. 이 중에서 인류의 조상이 된 유인원은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정글과 숲의 나무에서 내려와 너른 평지에서 삶의 터전을 잡게 된 유인원들입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케냐는 사막지대도, 정글도 아닌 사바나 지역이에요. 즉 숲에서 나와 초원에서 생활하게 된 유인원들이 인류의 조상입니다. p 026



다시 말해 북방계를 대표하는 고대 악마문 동굴인과 현대 베트남 및 대만에 고립돼 살고 있는 원주민의 게놈(유전체)을 슈퍼컴퓨팅을 통해서 융합했더니 현대 한국인의 게놈과 아주 유사하더라는 겁니다. 또 남방계와 북방계 두 계열의 혼합 중에서도 실제 한국인은 남방계 아시아인과 유전적 구성이 가까웠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의 한족은 유전자의 동일성이 매우 높게 나타났습니다. p 054



인류 아프리카 기원설을 전제로 인간 진화생물학자들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 경로가 두 개의 길로 나뉘었을거라고 추정한다. 하나는 유럽, 또 하나는 인도를 거쳐 아시아 남하하는 경로다. 이렇게 나뉜 인종을 코카소이드(백인), 몽골로이드(황인), 니그로이드(흑인)라 부른다. 이 중에서 코카소이드 및 몽골로이드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택한 인종이다. 조금 아쉬운 점은 단어 자체에 피부색으로 구분한다는 차별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캅카스 산맥을 넘은, 코카소이드(서양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대놓고 차별적인 단어라는 점에서 요즘은 이 단어들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인종은 ‘몽골로이드’로, 코카소이드보다 더 먼 길을 택한 인종이다. 몽골로이드는 한국인 조상이기도 히며, 세부적으로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뉜다. 북방계는 시베리아로 북상하여 바이칼호까지 다다랐는데, 때마침 신빙하기가 도래하여 바이칼호에 갇혔다. 바이칼호 근처에서 영하 70도라는 극한의 추위를 견딘 그들이 바로 한국인의 직접적 조상이다. 남방계는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골라낼 수 있는 얼굴을 지닌(!) 인종으로 대체로 중국을 거쳐 동남아, 일본(오키나와 등), 호주로 흘러간 인종이다.



세계인의 용모에 대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이 획득하고 있는 용모적인 특성이 있다고 해요. 해부학에 근거해 전 세계인의 표본을 대상으로 방대한 자료의 조사는 물론 엄격한 분석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통계인데, 한국인 만의 네 가지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p 057



눈이 세계 1등으로 작다. 

털이 없기로 세계 1등이다(털이 많은 서양인과 비교해 털이 적은 한국인이 더 진화했다는 이야기).

귀에서 머리까지 길이가 1등이다. 즉 두상이 크다(즉 뇌도 크다?).

한국인의 치아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우리의 발음 체계와, 식문화도 깊은 연관이 있다).



바이칼호에서 시작된 우리 조상들의 1만 km가 넘는 대장정이 지금의 우리 얼굴 모양과 무관하지 않아요. 신몽골로이드만이 바이칼호에서 영하70도의 추위를 견뎌낸 사람들입니다. 얼굴 중에서 추위에 가장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부위가 코와 눈이에요. 혹독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코는 더 낮아지고, 눈두덩은 두꺼워지게 됩니다. 또 얼굴 광대뼈는 튀어나오게 되었어요. 쌍커풀 없이 두툼해진 눈, 튀어나온 광대뼈, 납작한 코,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겪어보지 못한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남아 한 발 한 발 내디뎌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그래서 결국 한반도에까지 이른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얼굴입니다. 혹한이 만들어낸, 바이칼호가 만들어낸 조각이고 예술품이고 상징인 셈이지요. p 059



실제로 문무왕릉비에 보면 ‘투후제천지윤’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투후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를 말합니다. 정말 신라 왕족의 직계 조상이 흉노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왜 이런 글을 남겼을까를 추론하면 이렇습니다. 고구려, 백제는 부여 계통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북방계 사람들이었죠.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 역시 그에 못지않은 북방계 혈통과 용맹을 내세우기 위해 다른 북방계 흉노의 후손임을 내세운 것은 아닐까 싶어요. p 065



본 책 내용에는 실려있지 않지만, 위 문무왕릉비에 적혀있는 ‘투후제천지윤’이라는 문구와 신라와 북방계 연관성에 대해 보충해보려 한다. 신라는 한반도계 고대국가 중 유일하게 문화가 다른 나라다. 한마디로 부여를 뿌리로 하는 고구려, 백제와 다르다는 이야기다. 



예컨데 신라는 다른 고대국가와는 달리 황금 문화 및 (나뭇가지 또는 사슴뿔 형태)금관 문화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난생설화가 주류인 다른 고대 국가와 달리, 금궤짝 설화(김알지)가 있다. 물론 신라도 박혁거세의 난생설화가 있지만, 고대 신라부터 최정점에 이르고, 쇠락할 때까지 권력을 잡았던 것은 금궤짝 설화를 지닌 김알지의 후손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은 자작나무로 생필품, 공예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대표적인 유물이 천마총 말다래다. 



놀랍게도 이런 황금 문화, 금관 문화, 자작나무 생필품 등은 북방계 유목민족들에게서(흉노나 훈족 등) 보이는 대표적인 전통이다. 특히 신라에선 자작나무가 자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작나무 생필품이 널리 애용되었다는 것은 자작나무 공급처가 있다는 말이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대표적인 수목이다. 한반도에서는 강원도, 그것도 인제 같은 북쪽 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신라는 북방계 유목민과 동일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며, 북방에서 주기적으로 자작나무를 공급받고 있었고, 문무대왕릉비에 ‘투후제천지윤’이라는 문구를 새길 정도로 북방계와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이다. 친밀한 관계라고 애둘러 말했지만, 사실상 북방 유목민계 후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신라가 한반도 남부를 통일하면서, 신라의 문화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이후에 후삼국 시대를 지나, 고려가 다시 한반도를 통일했다고는 하나, 고려는 친신라 노선을 지향했다. 애초에 고려는 신라 호족들의 연합에서 시작한 나라였으니까. 결과적으로 한국인 조상 찾기 중 제일 가까운 조상을 고르라고 치면 신라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부여를 뿌리로 하는 고구려 및 백제 역시 북방계이긴 하나, 신라를 필두로 하는 시베리아쪽 북방계와 문화나 그 결이 달랐을 뿐이다.



동북아시아에 있어 북방민족일 수록 얼굴이 수직팽창하고, 남방민족일수록 수평팽창한다는 설이 있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를 읽다 보니 이런 문장이 나오더군요. 수직팽창은 얼굴이 길쭉하거나 달걀모양이란 뜻이고, 수평팽창은 넓적하거나 넙대대한 얼굴을 말합니다. 한국인은, 북한을 빼고 남한에 사는 한국인은 남하 종족(북방계)과 북상 종족(남방계)이 절충된 얼굴로 보는게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과거만해도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6~7세기 경 백제 귀족 부부의 머리뼈를 복원해 점토로 얼굴을 재생한 것을 보면 수직팽창한 북방계임을 알 수가 있어요. 곧 고구려의 유민이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합니다. p 108



서양 사람들은 대체로 어릴 때부터 소프트한 유동식을 먹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딱딱한 걸 주로 먹죠. 딱딱한 걸 먹기 때문에 세계에서 치아가 가장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씹기보다는 갑니다. ‘그라인딩’입니다. 서양의 ‘츄잉’과 구분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추위를 견뎌온 것 때문만이 아니라 이렇게 맷돌처럼 그라인딩하는 식문화 때문에도 턱이 발달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게 된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의 설 입니다. p 109




위에서 한국인 얼굴을 찾기 위해 인류의 ‘시작점’을 찾아보았다면 이번엔 한국인의 ‘미소’다. TV를 키면 나오는, 요즘 한국인들의 미소가 아닌 천년, 이천년을 내려온 한국인의 미소다.



이번에는 한국인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아볼까 합니다. 미소야말로 한국 문화의 얼굴입니다. 멋쩍에 웃는 웃음을 ‘오리엔탈 스마일’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닙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두루봉 동굴에서 출토된 ‘뼛조각 인물상’을 본 적이 있나요? 코는 없지만 눈과 입은 뚜렷합니다. 입을 벌려 아이가 밝게 웃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p 113


삼국시대 대표적인 작품인 국보 78호 미륵보살반가상을 떠올려 봅니다.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볼을 짚고 사유에 잠긴 미륵보살의 눈웃음에는 중후한 기상이 서려있어요. 이런 미소를 염화미소라고 하지요. (…) 국보 80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집상은 상투 모양의 머리에 콧날은 날카롭지만 분명 입가에 미소가 번져 있습니다. 무건가 넉넉하게 품에 안는 듯한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느껴지면서도 왠지 장난기가 묻어나는 미소라는 생각도 들어요. p 116


 

사람 크기와 맞먹는 등신대로 제작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은 미륵보살반가상(국보 78호)와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cm나 됩니다. 얼굴의 눈두덩과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풍기고 있어요. 알듯 모를 듯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같습니다. 해탈의 웃음일지도 모릅니다. (…) 국보 24호인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재롸상의 미소도 빼놓을 수 없지요. 모든 얼굴의 부분들이 단 한 순간의 어긋남도 없이 원만한 완벽의 조화를 이루며 지극히 인자하고 고요한 웃음을 짓습니다. p 117



신라시대 유물인 얼굴무늬 수막새 또는 인면문 수막새에는 가장 한국적인 얼굴의 미소가 담겨 있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 영묘사지에서 출토된 미소 막새는 ‘신라의 미소’ 혹은 ‘천년의 미소’로 불릴 만큼 신라를 상징하는 유물로 자리잡았습니다. 당대 신라인의 미소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신라인들은 나쁜 기운을 몰고 올 험상궂은 귀신이 미소 막새를 만나면 힘을 잃길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p 121



본 책을 포함하여 이어령 선생은 ‘천, 지, 인’ 3부작을 완성했다. 헌데, 이 시리즈는 총 6권까지 예정되어 있다. 가제로 붙여진 제목만 봤을 때 다음 3부작은 ‘의, 식, 주’로 추정된다. 한국인의 ‘의, 식, 주’, 다름 그 누구도 아닌 이어령 선생의 글인 만큼, 어떻게 풀어나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AKEOUT 유럽역사문명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앞서 『테이크아웃 유럽예술문화』라는 인문학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음악, 미술, 건축 등 모든 카테고리를 총 망라한, 유럽 예술 문화에 대한 모든 내용이 정리된 인문교양 에세이였다. 내용이 쉽게 쓰여있었기에, 읽기도 편했다. 거기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예술 작품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아서 질적인 면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예컨데 19세기 화가들이 수많은 르네상스 화가 중 굳이 ‘라파엘로’를 선택하여, ‘라파엘전파’라는 작품활동을 했는지등 말이다. 정말 인문학적으로 유럽 예술 문화를 알려주는데 있어서 이토록 추천할만한 책이 또 있을까 싶었다.






세상에나! 저자가 후속편을 썼다. 제목은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역사’가 주제다. 그러다보니 리뷰를 쓰면서 키워드를 역사책이나 세계사책으로 해야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접고, 이 책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키워드를 전작처럼 인문학책으로 결정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인문학적 학습과 경험을 토대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말마따나, 이 책은 역사전공자 시각이 아닌, 호기심 많은 광고인의 시각으로 쓰여졌다. 그래서 그런가? 확실히 쉽게 읽힌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책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이 역사를 주제로 하고 있음에도 인문학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구성에 있다. 일반적인 역사책과는 구성이 확연히 다르다. 내용면에서도 일반 역사책에서 잘 알려주지 않는 내용들이 많다. 예컨데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을 보자. 나는 살면서 내가 보고 있는 달력이 그레고리력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나서야 알았다. 달력은 음력, 양력만 있는줄 알았지? 여기서 조금 덧붙이자면 우리나라 세시풍속, 24절기가 양력기준이다라는 정도? 그런데 ...뭐, 그레고리력? 거기다 그 전에는 율리우스력을 썼다고? 심지어 러시아는 크리스마스가 1월이라고?! 이야 진짜. 나름 이것저것 많이 보고 읽었던 터라 남들보다는 잡학다식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다.




확실히 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사 이야기는 색다르다. 거기다 재밌어!! 원래도 역사는 재미있지만, 더 재밌어!!!!!





1.율리우스력과 동방정교회

위에서 살짝쿵 이야기한 달력 이야기다. 내 표정을 @.@ 로 만든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은 무엇이고 율리우스력은 대체 무엇인가? 이 차이가 무엇이길래, 우리 기준으로는 11월에 일어났던 러시아 혁명을 왜 10월 혁명이라 부르는걸까? 대체 왜 러시아에서 크라스마스는 1월 7일인 걸까??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수많은 명언을 남긴 기원전 로마 공화정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 까지 올라간다. 아니 대체 어째서?!


율리우스력은 말 그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달력입니다. 로마 정권을 잡은 카이사르는 많은 개혁을 하는데 달력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 율리우스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과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아니 월력, 일력으론 똑같습니다. 그러니 러시아인이 불편함이 없기에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학성도 놀랍지만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가위질을 엿장수 마음대로 하듯 로마인 마음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2월은 동네북입니다. 새로운 7월과 8월은 본래의 6월과 7월 사이에 새치기해 들어갔습니다. 7월 줄라이와 8월 어거스트는 영어로는 쥴리어스 시이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어거스트인 아우구수투스가 태어난 달입니다. 샘 많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전임자인 카이사르에 뒤질세라 그가 한 것이라면 본인도 똑같이 따라서 했습니다. 달의 순서와 날의 길이까지도 바꾸면서 말입니다. p 040




율리우스력은 말그대로 정권을 잡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달력이었다. 달력을 손대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넣고 쳐내고, 심지어 자기가 태어난 7월에 자기 이름을 넣었어!!! 7월 영어명 줄라이가 율리우스의 영어명이라니. 더 충격적인건 그 뒤에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따라서, 자기가 태어난 8월에 자기 이름을 넣었다는거. 이 외에도 여러 달을 줄이고, 늘리고. 이야 정말 대단한 로마인들. 이렇게 제정된 율리우스력은 16세기까지 사용되다가, 그레고리력으로 교체된다. 왜?



로마 카톨릭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또 한번 달력을 수정을 제안했으니까. 전반적으로는 율리우스력과 비슷하지만, 율리우스력보다는 훨씬 오차가 적고 더 정확한 달력을 사용하자고! 그렇게 탄생한게 그레고리력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기도 하고. 아니, 그러면 그레고리력이 훨씬 더 디테일한 달력인데,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고집하지? 놀랍게도 여기엔 11세기에 있었던 동서교회 대 분열이라는 아주 커다란 원인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표준 달력은 그레고리력입니다. 1582년 그간 사용해오고 있던 율리우스력의 오차를 수정하여 만들어진 캘린더로 당시 이것을 제안한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구조와 표기되는 내용, 달력으로만 치면 율리우스력과 같습니다. 초력 계산에서 미세한 차이가 납니다. 한마디로 율리우스력이 128년마다 하루의 오차가 있다면 그레고리력은 3000년마다 하루의 오차로 정확해졌다는 것입니다. p 041




그런데 러시아와 동방정교회는 왜 다소 부정확한 율리우스력을 고집하고 있을까요?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국가로서의 러시아는 혁명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레고리력으로 전환했으니까요. 하지만 러시아의 동방정교회는 여전히 교회력으로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정론이든 추론을 해봅니다. 하나는 교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름에도 들어가 있듯 정통성을 굉장히 중시합니다. 그래서 과거 로마 시대부터 2천 년 넘게 교회력으로 채택되고 기록되어온 정통한 달력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레고리력이 서방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발의해서 만들어진 교황의 달력이라는 점입니다. p 043




1054년에 교리 차이로 빚어진 동서교회가 분열되었다. 동쪽은 동로마 정교회, 서쪽은 서로마 카톨릭으로. 동로마 정교회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와 서로마 카톨릭 수장인 바티칸 교황이 서로를 파문하며(!!!) 완전히 결별했다고. 그래서 동방정교회를 믿는 러시아는(러시아정교회) 서방 교회 수장인 교황이 발의해서 만든, 교황의 달력은 거부(!)했다는 뭐 그런 초딩들 싸움같은 이야기랄까?




하지만 20~21세기에 들어서 동방정교회와 서방 카톨릭 수장들이 연이어 만나 서로 화해하며 파문을 철회했다. 아이러니한건 이 둘의 만남을 주선한 주선자가, 그 유명한 쿠바 독재자 카스트로. 수많은 사람을 억압하고 탄압한 독재자가 기독교의 두 수장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들에게 축복을 받았으니 그가 저지른 죄악은 사라진건가? 죽었으니 진짜 천당갔으려나. 흡사 21세기 면죄부 느낌이다. 아무리 죄악이 많아도 돈 많거나 권력이 있으면 장땡같은 느낌이라 별로다.




1965년 바티칸의 교황 바오르 6세와 이스탄불의 총대주교인 아티나고라스는 예루살렘에서 만나 천 년의 화해를 하였습니다. 1054년 동서 교회 대 분열 시 서로를 파문했던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동시에 그 파문을 철회한 것입니다. 이어서 지난 2016년 2월엔 프란체스코 교황과 정교회의 실세인 러시아의 키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만나 또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화해를 주선한 인물은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였습니다. 이렇게 큰 일을 주선하고 카스트로는 그 해 11월 사망했는데 이 일로 그는 확실하게 천당을 갔을 것입니다. 지구상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두 분을 천 년 만에 만나게 했고, 서방카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수장인 그들에게 동시에 축복도 받았을 테니까요. p 060






2. ‘하느님’과 ‘하나님’, ‘여호와’와 ‘야훼’ 그리고 알라


위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에서 나온 기독교 동서교회 대분열. 자연스레 기독교가 궁금해진다. 이 책 저자는 참 똑똑하다! 이 책 속 여러 챕터 중에는 역사적으로 바라본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물론 유럽 종교!). 난 무교지만, 개인적으로 종교의 역사를 흥미롭게 보는 사람이다.




예컨데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를 떠올려보자. 불교는 윤회사상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부처는 윤회는 없다고 말했었다. 애초에 윤회사상을 이야기하며 계급사회를 중시했던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종교였으니까. 거기다 부처는 죽기전에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라고 했었고. 하지만 부처 사후 오랜시간이 지나며, 일부 권력자들이 국가 통치를 위해 불교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윤회사상이 덧입혀지고, 부처가 신격화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가 재탄생했다. 신학이 아닌, 역사적 관점으로 보는 종교는 꽤나 재미있다. 




불교를 역사적 시각으로 아주 간략하게만 봐도 이렇게 흥미진진한대,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기독교는 어떨까. 아!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하면 일반적으로 개신교를 떠올린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독교는 서방 카톨릭(천주교), 동방 정교회, 개신교(프로테스탄트교) 3대 종파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거기다 오리지널 ‘기독교’를 이야기하자면, 어디까지나 카톨릭이 먼저다.




원래 기독교는 카톨릭(천주교) 하나 였다. 그러다 11세기에 교리 차이로 동,서 교회가 분열되면서 서방 카톨릭(천주교)와 동방 정교회로 나뉘어졌다. 그렇게 오백여년이 흘렀다. 16세기에 로마 카톨릭에서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하자, 마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다. 이게 기폭제가 되어 종교개혁이 이루어졌고, 그때 카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교가 떨어져 나왔다. 바로 개신교다. 이렇게 기독교가 3대 종파로 나뉘어졌다.




기독교의 카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모두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유일신으로 받들고 예수 그리수도를 그의 독생자로 믿는 종교입니다. 경전인 공히 성경입니다. 이 성경의 다른 해석으로 기독교가 크게 3개로도 나뉘었지만, 그 안에서 또 많은 종파나 교파로 분파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각각의 종교마다 교리와 예식에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성직자의 결혼 유무만 보더라도 카톨릭은 주지하다시피 신부는 미혼만 가능하여 사제서품을 받고서도 평생 미혼으로 살아야합니다. p 077




카톨릭, 동방정교회, 개신교는 서로 신을 섬기는 방법이나 교리 해석 등 많은 편에서 차이가 있다. 카톨릭은 교황이라는 종파를 아우르는 수장이 있는 반면,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는 그런 수장이 없다. 다만 동방 정교회는 지역별 총대주교가 있어서, 각 국가의 종교대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비교적 뒤늦게 파생된 개신교는 지역별 수장조차 없다. 처음부터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시작된 종교가 아니고,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종파다보나 단일 조직 체계를 갖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개신교 내에서도 이후에도 여러 차이로 인해 교파가 생겨났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는 카톨릭 신부들은 사유재산이 없고 미혼만 가능하지만, 개신교는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결혼도 자유다. 역시나 뒤늦게 만들어진 종교이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면이 있는 듯 하다. 정교회는 서품을 받기 전에는 결혼이 자유지만, 서품 받은 이후에는 거기서 고정된다. 결혼한 상태에서 서품을 받았으면 평생 결혼을 유지해야하고, 미혼한 상태에서 서품을 받았으면 평생 미혼으로 살아야한다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유일신을 향한 믿음 외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각 종파. 근데 왜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닐까? 유대교도 유일신을 믿고, 거기다 예수 그리수도는 유대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데 카톨릭, 정교회, 개신교 이외에 왠지 기독교일 것만 같은 종교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유대교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인 유대지역은 기독교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이고, 그도 유대인이기에 그렇게 생각되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이슬람교가 기독교가 아닌 것처럼 유대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입니다. 일단 유대교는 기독교를 규정하는 중요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p 082




놀랍게도 유대교는 다른 기독교 종파들과 달리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근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슬람교는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한다는 것. 뭐지? 여기서 다시한번 동공지진!!!! 이슬람교는 대체 어떤 종교인가 당최 가늠이 안된다. 근데 또 이슬람교의 탄생을 보면, 얼추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타고 올라가면 그 꼭대기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 족보 중간쯤엔 유대 왕국을 통일한 다윗과 지혜의 왕 솔로몬도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뒤늦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으로 인하여 이렇게 화려한 유대인의 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그는 무슬림에겐 이브라힘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이슬람의 족보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으로 안내려가고 그의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 쪽으로 내려갑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이집트 출신 이방인인 여종 하갈을 통해 먼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p 087




책에선 정말 많은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쓰여있지만! 여기서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의 선조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추앙받는 인물이라 한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한명은 적자인 이삭, 또 한명은 서자인 이스마엘. 아브라함은 적자에게 승계하기 위해 서자를 쫓아냈다. 아브라함은 적자인 이삭을 통해서 유대교가 이어나가는 반면, 쫓겨난 서자 이스마엘은 하늘에 계신 유일신이 굽어살피사(!) 그를 통해 이슬람교가 이어졌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스마엘을 선조로 생각하는 이슬람교와 아브라함을 섬기는 기독교가 서로 배척하는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도 한 몫 한다고나 할까.




여기까지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배척하는 역사적 배경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유대교가 서로 배척하는 이유도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과거 로마제국이 영토를 넓힐 때 유대인들은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쫓겨나 기독교를 믿는 유럽 곳곳에 정착했다. 유럽인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외지인이 자신들의 영토에 굴러들어와서 맘에 안드는데, 거기다 그 외지인이 자신들이 믿는 예수를 핍박한 유대인들이다? 누가봐도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반대로 유대인 입장에서는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상대로 텃세를 부린다고 생각할테고. 그렇게 서로가 배척하는 상황이 생겨난거다. 




위의 구약 창세기 내용은(창세기 21장 17~20절)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3대 종교가 모두 공유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광야에서 생사를 오가던 이스마엘과 하갈을 살려주고 축복한 신은 기독교의 카톨릭과 정교회에선 우리말로 하느님으로 불리지만 개신교에선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위의 인용한 창세기는 개신교 성경이기에 하나님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하느님은 히브리 원어로는 여호화, 또는 야훼가 됩니다. 사실 여호화나 야훼든 이것이 불분명한 것은 하느님이 직접 내가 누구라고 밝힌 것을 들은 사람은 그로부터 십계명을 전달받은 모세가 유일하므로 모세만이 정확한 그분의 이름을 알 것입니다.p 090




또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야훼 하느님은 이살람교에서는 알라가 됩니다. 영어 성서에선 가드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위의 창세기에 이스마엘 모자를 살린 같은 사건에 등장한 그 신은 다 다르게 불리지만 다 같은 신일 것입니다. 세상에 딱 한 분밖에 한계시는 유일신인데다가 사는 곳도 같고, 하는 일도 같은 그분이 종교마다 다르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일 것입니다. p 091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서로 배척하는 뿌리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는 것! 내 개인적으로는 딱히 믿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가? 역시 종교는 신학적인 관점보다 역사, 인문학적 관점으로 보는게 더 재미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