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쓰는 일기
허은실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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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소설에서 볼 수 없는 작가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고민하고, 어떤 삶을 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묘한 감정선의 이유를 에세이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작가들의 존재를 형성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에 참 좋습니다.


시인이 쓴 에세이는 어떠한가요? 단어 하나하나가 허투루 쓰이지 않음을 느낍니다. 분명 구구절절 풀어놓은 긴 문장임에도 문장들이 얽히고설켜 시로 읽힙니다. 작가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고, 그 이면의 상황과 사건들을 알게 되니 문장들은 더욱 견고하면서도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의 작가 허은실은 이 책 『내일 쓰는 일기』를 통해 여덟 살 딸과 보낸 제주도에서의 1년을 그려냅니다. 슬픔을 간직한 땅, 몸살을 앓고 있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곳. 시인은 사람과 풍경, 일상의 아름다움을 담아냅니다.


신기하게도 아름다움에는 눈물이 뒤따르네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합니다. 삭막하고 냉정하게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겹고 따뜻한 곳입니다. 멀찌감치 뒤처진 사람을 배려하여 함께 가자고 손 내미는 곳입니다. 이곳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겠네요.


작가는 딸과의 일상을 써 내려가면서도 제주의 아픔을 잊지 않습니다. 여전히 지속되는 그 슬픔은 제주만의 것이 아닙니다. 더하여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제주의 모습을 슬퍼하며 한탄합니다. 자연과 바람, 숲이 주는 평안함과 경이로움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저자가 들려주는 문장들에 제주만의 언어와 풍경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책을 읽으며 잠깐 제주를 느낍니다. 땅과 숲의 향내를 맡습니다. 새의 지저귐을 듣습니다. 찬란한 빛이 반짝이는 바다를 보게 됩니다. 따스함을 간직한 당신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 살아갑니다. 아무도 뒤쫓아 오지 않는데 허겁지겁 달려갑니다. 일상을 시인처럼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유 있게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가 봅시다. 빼곡한 삶보다는 듬성듬성 비어있는 일상도 괜찮다 생각 듭니다.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 정도는 마련해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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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
사뮈엘오귀스트 티소 지음, 성귀수 옮김 / 유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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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시작하고부터 두통과 불면증으로 힘들었습니다. 2009년부터이니 꽤 오랫동안 시달렸네요. 2015년쯤에는 몸 전체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여, 약과 치료를 병행해야 했습니다. 떨림과 마비, 염증 등으로 매우 고생을 했었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병의 원인은 무엇보다 스트레스겠죠. 아무래도 사람들을 많이 대하다 보니 거기서 오는 부담과 책임감으로 그랬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몸에 비해 정신을 과도하게 사용하면서 생기는 문제도 한몫했습니다. 읽고, 쓰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숙명과도 같았습니다.


루소의 주치의로 당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던 사뮈엘오귀스트 티소(Samuel-Auguste Tissot). 그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경험에 근거한 혁신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환자의 내밀한 심리 상태를 적극 반영하는 의료 행위로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이 책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은 저자가 로잔 아카데미의 의학 강좌 개설을 기념하기 위해 라틴어로 발표한 논문을 2년 뒤에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다시 증보하여 책으로 출간한 것입니다. 저자는 지식인의 건강 문제와 삶의 방식을 병리적 차원에서 면밀하게 고찰하고 있습니다.


의사에게 있어 지식인만큼 까다로운 환자가 어디 있을까요? 지식인들은 몸보다 정신을 과도하게 사용하기에 잠재적으로 환자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의견과 신념이 워낙 확고하여 의사의 조언에도 쉽게 자신의 습관이나 행동을 수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발병도 문제지만, 지식인이기에 경험할 수 있는 위험을 예리하게 경고합니다. 특히 오랜 시간 앉아서 과도하게 집중을 해야 하기에 뇌에 과부하가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움직임이 거의 없는 자세는 혈액순환이나 소화 작용 등에 어려움을 줍니다.


읽고 쓰는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조언은 온몸을 아우릅니다. 특히 눈과 뇌의 과한 사용에 대한 주의를 반복합니다. 저자는 당장 시도할 수 있는 식이요법도 세세하게 말해줍니다. 현대의학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여전히 유용한 지침들이 많이 있습니다.


몸에 계속 문제가 발생하며, 읽고 쓰는 일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읽고 쓰지 않는다면 오히려 온몸과 정신이 말썽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저자의 메시지도 그러합니다. 읽고 쓰는 일을 그만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의 조화를 통해 더 오래도록 건강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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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위일체 공동체
레오나르도 보프 지음, 김영선.김옥주 옮김 / 크리스천헤럴드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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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정과 교회에서조차 진정한 연합을 보기 힘듭니다. 세상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오히려 차별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럴듯한 말은 많지만, 그것을 구현한 공동체를 만나기는 힘듭니다. 각자가 존중되면서도 진정한 하나 됨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 말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힘이 분산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와 사회를 향한 가치를 우선하기보다 권력과 자본을 쫓아가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야 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 분투하는 공동체여야만 합니다. 이기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고, 세상의 가치로 지배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주인은 철저하게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이 책 『성삼위일체 공동체』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 『삼위일체와 사회』를 이 책에서 조금 더 쉬운 언어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삼위일체에 대한 급진적 이해가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교회에 만연한 성직주의와 권위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은 교회에 있어 치명적인 문제를 낳습니다. 삼위일체 공동체는 지금의 교회 구조에 대해 건강하고도 적실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더불어 삼위일체 공동체는 그 교회 안의 하나 됨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보다 참여적이고 대중적이며 가족적인 사회로의 발전에 이바지합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열린 공동체,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도 연합적인 모델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홀로 존재하는 분이 아닌 연합이심을 강조합니다. '셋'이 먼저이며, 세 위격들 간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 삼위의 통일성을 표현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존재하고 살아있는 근간에 서로를 향한 움직임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는 분투와 대립이 아니라 화합과 연합입니다. 신적인 삼위의 상호 침투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는 복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이는 끊임없는 충만과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한 계시를 성부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조화로움과 관계성 가운데 제시합니다. 명확한 용어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많은 본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과 생명의 신비가 역사 안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표현된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교회로서 열정적인 믿음과 좌절이 없는 소망, 헌신된 사랑이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몸으로 보여줘야 하는 책무를 지닙니다.


더하여 삼위일체의 본질인 연합은 모든 종류의 배제와 차별을 비판합니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합니다. 참된 사랑과 섬김, 배려와 환대를 통해 이 사회에 만연한 죄악과 우상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복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과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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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한 제도로서의 교회는 소수의 몇 명에게만 권력이 집중된 서구문화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교회는 공동체와 사회지향적인 가치보다 권위와 재산을 근본으로 삼는 군주권이 우위를 차지하는 환경에 근본적으로 토착화되었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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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경계를 걷는 공동체 - 한 인문주의자의 성경 읽기
최종원 지음 / 비아토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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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답지 못한 교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사랑과 정의를 외치지만, 그 누구보다도 사람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유익에 더 신경 씁니다. 절망 가운데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의 상태보다도 자신의 미래와 안위에 온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전달하기 위해 '말'하지만, 교회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한 '말', 정제된 '말'로 상대방을 억압합니다.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통해 한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정답 안으로 욱여넣으려 합니다.


역사학자인 최종원 교수는 이 책 『교회, 경계를 걷는 공동체』를 통해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예리하게 진단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교회를 살리기 위한 가슴 아픈 애정의 도구입니다. 진심으로 현 상태를 바라보아야만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성직주의와 교권주의입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여러 잡음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교권주의와 성직주의를 극복해야만 교회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주장합니다. 여전히 교회의 경계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교회 공동체를 나그네의 공동체라 명명합니다. 이는 힘을 가진 제국 안에 살아가지만 그에 속하지 않는 이중성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제국의 힘을 따라가기보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선한 영향력은 아주 자연스레 주위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가 강조하지 못했던 방편들에 저자는 집중합니다. 그러한 소중한 은혜의 도구들을 재조명합니다. 침묵, 복종, 성찬, 거룩 등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현 상황을 반영합니다. 듣지 않고, 멈추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며, 배타적인 교회의 모습 말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더불어'의 정신을 구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그네이지만, 우리보다 더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타자를 향한 환대와 나눔은 교회 공동체가 다른 집단과 구별될 수 있는 가장 큰 시금석입니다. '나'를 위한 신앙에서 '이웃'을 향한 신앙으로의 전환입니다.


세상은 힘을 추구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라고 합니다. 더 올라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의 삶의 방식과 그분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다움입니다. 힘을 찬양하고 그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힘을 향해 연약한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망은 있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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