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먹기 참 좋은 음식이다. 시래기와 동태의 콜라보. 집에서 거의 해 먹지 않기 때문에 주로 얻어먹는다. 음식 잘하는 옆집에서 겨울이 어울리는 이런 음식을 하면 먹어보라고 준다. 어떻든 이런 음식은 겨울에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에 맞는 음식이 있다. 제철음식이라고 해서 그 철에 나는 식재료는 신선하고 몸에 좋다고 한다. 당연히 제철에 나기 때문에 수확이 많이 되어서 가격도 저렴하다. 그래서 이래저래 제철음식을 먹는 건 이득이다.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사계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정수라의 노래 중에도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라는 가사도 있다. 그리고 사계절이 있어서 우리는 복 받은 곳에 살고 있다는 말을 어른들 또는 뉴스 앵커나 여러 곳에서 늘 들어왔다.


그런데 정말 사계절이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뚜렷하면 살기 좋은 게 맞나? 하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들었지만, 근래에는 더 들었다. 나는 여름이 아주 좋다. 그래서 여름만 있는 나라가 부럽다. 그냥 일 년 열두 달 반바지 하나만으로 보낼 수 있다. 춥다고 난리 떨면서 패딩을 꺼내서 입을 필요도 없다.


여름에는 기온이 30도를 넘어 올라간다. 겨울에는 추운 곳은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진다. 이렇게 기온차가 심하게 나는 곳이 과연 살기가 좋은 곳이냐 한다면 글쎄다. 겨울에 한파만 오면 얼어 죽는 사람이 생겨난다. 세상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얼어서 죽는 사람이 생기다니. 한파가 오니 주의하세요.라는 뉴스가 뜨면 공무원들부터 해서 잠도 자지 못하고 비상근무다.


도시에 눈이 쌓이면 심각한 상황이다. 교통난에, 자동차 사고에, 동파에, 낙상 사고에. 겨울이니까 두꺼운 옷을 꺼내 입어야 한다. 도대체 옷장에 옷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작년까지 잘 입던 그 비싸게 주고 산 롱패딩을 이제 입지 않는다며 숏패딩을 아이들은 사달라고 한다. 난방을 해야 하지만 가스비와 전기세는 계속 오르기만 한다. 옛날처럼 혹독한 추위가 몰아쳐도 으쌰으쌰 하며 그냥저냥 넘어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인구의 노령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장마기간에 늘 흘러넘치는 하수구는 어김없이 그 자리에 또 흘러넘친다. 온열질환자 역시 매년 속출한다. 그렇다고 은행이나 건물이 시원하게 해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전기세 폭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폭우에 시장상인들이 전부 물폭탄을 맞기라도 하면 어디서 어떻게 보내야 할지 깜깜하기만 하다.


마찬가지로 눈에 내리는 폭설에 불이라도 시장에 나서 전부 홀라당 타버리고 나면 어디에서 어떻게 손을 대야 하는지 너무나 깜깜하다. 그 과정에 추운 곳에 그저 내몰리게 된다. 추위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된 상태로 그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 손과 발이 얼마나 시리고 추울까. 여름에도 물 폭탄으로 모든 것이 떠내려가 간 사람들은 에어컨도 없는 곳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잠들어야 한다.


하나의 계절만 있다면 열심히 그 계절에 맞는 피해복구를 하고 경계를 해서 또 영차영차 재발방지는 될지도 모른다. 요즘은 겨울에 살기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초딩 때에는 학교에 가면 재미있고 좋았는데, 학교도 요즘은 전부 힘들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얼마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우울하고 춥다. 게다가 교사와 학생들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들이 더욱 부각되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전부터 여름만 있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었다. 더운 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추운 건 참을 수가 없다. 추운 건 정말 싫다. 지금까지 여름에 더우면 더울수록 밖에서 한 시간 열심히 조깅을 하면서 땀을 있는 대로 뺀다. 그러면서 태양의 빛을 받는다. 그러고 나서 샤워를 하고 나면 어지간한 더위는 더위 같지도 않다. 그러면 에어컨 바람보다 선풍기 바람이 훨씬 시원하고 야들야들해서 선풍기 바람만으로 잠을 잤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번 여름에는 또 모르겠지만 아마 이번 여름에도 그렇겠지. 여름은 옷도 여러 겹 입을 필요도 없고, 겨울보다 마시는 물도 몸속으로 잘 들어가고.


마블리가 나오는 이번 영화 황야에서 이희준 같은 미친 박사가 라면 나는 기후를 바꾸는 연구를 해서 우리나라 사계절을 없애고 여름만 있는 나라로 만들어 버리겠다. 하늘에 여름을 만드는 위성을 띄워서 겨울을 밀어내 버리고 오직 여름만 가득한 나라. 아니, 여름 보다 봄, 가을이 좋잖아요.라고 하는데 나는 봄, 가을도 싫다. 봄은 죽음의 계절이고 가을은 늙은 계절이다. 만고 나의 생각이지만 나는 그렇다. 그냥 해가 쨍 한 더운 여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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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김장하를 봤다. 대단히 충격적이다. 뉴스와 유튜브를 도배하는 어른들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어른이었다.

어른이란 무엇인가, 뭐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보는 중간중간 들판이나 보리밭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여준다. 나비의 날갯짓은 중력을 무시한 비행이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지구의 엄청난 힘에 대항하는 나비는 힘은 없지만 저항을 하며 자신만의 비행을 한다.

그 모습이 어른 김장하의 모습처럼 보여서 울컥했다. 그는 국회의원의 청탁을 받아서 교사채용 부탁을 거절했더니 교육청에서 감사가 내려왔다. 그는 말했다.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 왔다는 것. 그게 가장 큰 힘이었다.”

“옛날에는 약값을 기술료라고 해서 엄청 많이 받았거든. 나는 기술료보다는 수가를 줄이겠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 다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내가 그 돈으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고 호화방탕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서 사회에 다시 환원하기 위해서 이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영화는 초반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김장하의 표정이 점점 변하더니 영화가 끝날때는 밝아져서 끝난다. 감탄보다는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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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벅 카스텔라를 누가 사줬다. 스벅 카스텔라는 맛있다. 이 카스텔라는 십 년 전에 스벅에서 먹었을 때의 맛과 모양에서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맛이라는 건 시간과 장소, 먹는 이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저 카스텔라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맛이겠지만 지금 먹는 나의 입맛에는 그때의 맛보다 훨씬 맛있다고 느끼고 있다. 단맛을 더욱 많이 느껴버리는 신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학창 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녀석이 시간이 훌쩍 지나 나를 찾아와서 그때 내가 너무 했어, 미안하다. 정말 사죄한다. 라며 사과를 받아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잊고 지내고 있었지만 그 녀석을 보면 그때의 일이 또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 가물가물해져서 늦게라도 일부러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한다면 사과를 받아야 할까.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사과를 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게, 사과를 하려면 그때의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녀석이 하는 사과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 이미 시간이 지나 상처가 되고 흉터가 된 나에게 사과를 한다고 해도 그 흉터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기에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래, 이렇게라도 찾아와서 사과를 하니 받아줄게,라고 말을 할지는 몰라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을 수 있다.


그 당시, 그때 괴롭힘을 당해 죽고 싶었던 나를 찾아가서 사과를 해야 한다. 사과도 시기가 있고 방법이 있겠지. 비록 진심이지만 사과를 하는 시기가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과는 진정한 사과가 될까.


우리는 별반 다를 게 없는 비슷하게 생긴 인간이지만 똑같은 인간은 없다. 복잡하게 변한 만큼 그만큼 인간은 단순해졌다. 나와 다르면 항상 경계하고 공격심을 가지게 되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설령 그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나와 다르면 공격을 한다. 그 사람의 약점을 부풀려서, 그 점을 파고들어 공격을 하면 같이 공격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한 명일 때 하는 공격보다 여러 명이 공격을 하면 분명 사실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의심하게 된다. 진실을 알고 싶어요.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나. 하지만 진실이라는 게 반드시 사실이지도 않다. 아니 진실은 사실에서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진지하고 진지해서 너무 진지해도 괜찮아, 심각하지만 않으면 돼. 진지한 건 환영이지만 심각해지면 답이 없어.


여름에 조깅을 하다 보면 하늘에 금을 긋고 사라져 버린 저 선을 보면 김중식의 [이탈한 자가 문득]이 떠오른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삶과 생활의 사이에서 비어 가는 주머니로 하늘을 보았을 때,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곳만 알지라도 안전한 궤도 속에서 수많은 별 들 중에 하나로 살아가도 좋으련만 저 별은 궤도를 이탈해 다시는 궤도 속으로 진입을 하지 못할지라도 자유롭게 하늘에 한 번의 금을 긋는다.


안전한 삶을 거부한,

완전하기보다 불완전한 자유를 선택한,

굳건한 진실보다 흔들림이 많은 가능성을 믿는,

금방 사라질지라도,

짧지만,

저기 저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하찮지만 소중한.


김중식은 말했다.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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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현상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알겠지만 놀라거나 경이로움에 충격을 받기도 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은 주로 자연에서 일어난다. 거대한 낙뢰라든가, 그 낙회 중 번개를 맞는 장면을 본다든가. 주로 해외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태풍의 질이나 규모도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니까.


그다음에 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다. 곰이 물에 빠진 새를 구해준다거나, 개가 고양이를 구한다거나. 육식동물이 작은 동물을 구해주고 가버린다거나. 그런 모습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상식을 거둬내고 마음의 눈으로 보면 받아들이게 된다. 이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초자연적 현상이 인간에게서 나타난다.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초자연적 능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가끔 접하는 장면은 몽유병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은 꼭 초자연적인 모습처럼 보인다.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은 공포에 가깝다. 무서운 모습이다. 인간에게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면 그건 그것대로 낭패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옳은 일에 그 능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처럼 여겨지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인간이란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분노하거나 화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논리적으로 판단을 할 수는 없다. 만약 초자연적인 능력을 내는 사람이 화가 나 있을 때 그 옆에 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려운 존재로 여길지도 모른다.


이런 두려움은 반드시 사람이 아니더라도, 꼭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종종 느낄 수 있다. 늘 곁에 있는 것들, 방안의 불을 밝혀주는 전등이나 변기, 샤워기 같은 물품들.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물건이 오늘 갑자기 안 된다거나 전기 스파크가 튄다거나 가열로 인해 녹아내린다거나 하면 겁이 나고 무섭다. 늘 다니던 골목길의 계단이 내 앞에서 갑자기 무너지거나 도로가 내 앞에서 싱크홀이 생겨 앞에서 가던 사람이 빠진다거나 하면 충격을 받는다. 인간이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며 비행기나 거대한 배도 만들지만 개개인은 지극히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눈에 뾰족한 무엇인가가 들어갈까 봐 불안해서 길거리를 마음껏 다니지 못하지는 않는다. 모험심이 강해서 깊은 바다 밑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며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만큼 무모하고 강력한 존재가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날 때는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식을 가지고 그런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요컨대 물에 빠진 자신의 어린 자식을 구하러 물에 뛰어들어 구해 오는 엄마의 경우다. 엄마는 전혀 헤엄이라고는 칠 줄 모르지만 아이가 물에 빠지는 순간 무의식의 발현으로 이루어진다. 아이가 자동차에 치이려고 할 때 번개만큼 빠른 속도로 아이를 낚아채서 자동차에 부딪히는 걸 막는다. 이런 엄마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영상으로 많이 봤다.


무의식에서는 그럴 리 없는 것들이 가능하다.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가 우리 뇌에 동시에 존재하며 무의식은 아직 뇌과학자들도 몇십 년 동안 연구를 해도 뇌의 몇 퍼센트밖에 파헤치지 못했다.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자연발생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을 한 번 경험했다. 초자연적인 현상. 무의식에 가까워졌을 때 초자연적인 능력을 경험을 했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집에서 보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샤워 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시간은 저녁 10시경이었다. 부모님은 외출을 하시고 나 혼자 집에 있었다.


시원하게 티브이를 보는데 정전이 되었다. 티브이도 꺼지고 돌아가던 냉장고도 멈추고 에어컨도 그대로 스톱되었다. 아파트 방송이 나왔다. 정전인데 방송은 어떻게 나올까. 전력수요가 과다해져서 이 일대가 몽땅 정전이 되었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자체 발전기가 있으니 곧 전기가 들어올 것이다. 어떻든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각자 알아서 있어야 했다. 정전이라는 것도 오랜만이다. 어린 시절에는 정전이 종종 되었던 것 같은데. 어린이들은 정전이 되어도 재미있었다. 모든 곳이 똑같아져 버리니까 아이들은 그 속에서도 재미를 찾았다.


나도 어두운 거실에서 벗어나고파서 분주하게 움직여 초를 찾아서 불을 밝혔다. 촛불은 촛불 그 밑으로는 어둡다. 촛불은 바람도 없는데 공기의 흐름 때문인지 하늘하늘 움직이며 타올랐다. 그런 촛불에 그만 매료가 되었다. 촛불을 자세하게 보기는 처음이었다. 매력적이었다. 촛불의 중간을 그대로 꼼작 않고 보고 있었다. 나는 촛불의 세계로 들어갔다.


김춘수 시인의 [어둠]이 있다. [촛불을 켜면 면경의 유리알, 의롱의 나전, 어린 거들의 눈망울과 입 언저리, 이런 것들이 하나씩 살아난다 차차 촉심이 서고 불에 제자리를 정하게 되면, 불빛은 방 안에 그득히 원을 그리며 윤곽을 선명히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윤곽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다 들여다보면 한바다의 수심과 같다. 고요하다. 너무 고요할 따름이다]


정전이 30분이 넘어가니 덥기 시작했다. 그러나 촛불의 세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세계 안에는 한바다의 깊은 심연이 들어 있다. 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땀으로 등이 다 젖었다. 관자를 타고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러나 나는 미동 없이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얼마동안 들리던 아파트 밑의 소음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아파트는 그야말로 적요한 상태였다. 아무리 고요해도 집 안에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는 늘 도사리고 있었다. 냉장고의 모터는 인간의 심장과 비슷하다. 한 번 태어나서 숨을 쉬기 시작하면 절대 멈추지 않는다. 냉장고가 멈추는 순간 냉장고 안의 음식들이 상하기 때문이다. 쉰 음식은 먹을 수 있지만 상한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 냉장고는 마치 인간의 심장 같은 역할을 한다. 냉장고가 멈추는 일은 없다. 그러나 정전은 그런 냉장고를 숨죽였다. 이토록 적요함 속에서 촛불의 세계는 더욱 확장했다. 발을 바닥에서 전혀 떼지 않았다. 쥐가 났지만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옷은 땀으로 전부 젖었다.


촛불의 세계는 매혹적이며 위험하다. 그 세계에서 나는 날 수 있고 심지어는 파괴력을 지닌 능력자가 될 수도 있다. 촛불의 뒤 거실 벽에 파리가 한 마리 붙었다. 파리는 더위를 타지 않을 것이다. 파리는 더워 보이지 않았다. 파리는 이렇게 높은 아파트 안으로 어떻게 들어왔을까. 파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왔던지, 날개가 있으니 날아서 왔던지 어떻게든 사람이 살고 있는 높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벽에 붙은 파리는 집파리 치고는 컸다.


파리는 정전에 반응을 하는지, 촛불에 반응을 하는지 아니면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벽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파리와 나는 마치 누가 누가 더 꼼짝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를 내기하는 것 같은 형국이 되었다. 파리와 나는 그대로 돌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정적이 공간을 파고들었다. 공간의 모든 곳에 적막이 채워졌다. 소리가 멈추었다는 건 마치 시산이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이다. 시간이란 언제나 흐르고 있다. 멈추거나 잠시 정지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소리가 소거된 공간에서는 시간마저 멈춰 버리는 착각이 든다. 파리의 모습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파리는 벽에 붙어서 다리를 비비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발바닥이 마치 거실바닥에 붙어 버리는 것 같았지만 꼼지락 거리지 않았다. 파리와 나의 다른 점이라면 나는 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땀이 흘러서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촛불의 세계에서는 빛의 굴절이 없었다. 빛은 초를 타올라 형태를 유지했다. 아주 미약한 바람에도 촛불은 흔들린다. 촛불은 나에게 변하지 않는 굳건한 진실보다 불안하지만 흔들림이 많은 가능성을 믿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촛불을 통해 반대편 벽에 붙어 있는 파리를 보고 있었다. 파리와 나와의 거리는 고작 1미터 정도였다.


촛불을 통해 파리를 보는 동안 나는 땀을 많이 흘렸다. 정전으로 인해 그야말로 집 안은 찜통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파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의 존재가 몸에서 분리되어 우주로 떠내려가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미동 없이.


다리에 난 쥐는 발바닥까지 내려갔지만 나는 더 이상 감각을 느끼지 않았다. 몸을 30분 이상 미동 없이 가만히 꼼짝하지 않고 있으면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착각이 든다. 마치 내가 돌이 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심장만 미약하게 뛰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세포는 멈추었다. 나는 눈에 힘도 주지 않고 그렇다고 눈에 힘을 빼지도 않고 무념무상의 상태로 파리를 보았다.


그때 파리에 불이 붙으면서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냄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순간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두 귀를 손으로 막았다. 파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나의 무의식이 발현되어서 나는 직접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켰다. 파리는 냄새까지 내며 깨끗하게 탔다. 나는 경이롭다는 기분보다 무서웠다. 하지만 그 뒤로 그런 능력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지만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이 편해져서 나는 그때 경험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비밀댓글로 누군가가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고 싶다며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지금 그 자리에 나와 있다.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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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마니아로 찾아서 보게 된 중국 영화다. 처음에는 공포영화로 시작하더니 스릴러로 진행이 되고 드라마로 끝난다.

보기 드물게 너무 재미있게 봤다. 영화는 총 네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네 개의 이야기라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네 명이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다. 마치 라쇼몽 같은 구조다.

초반 종이 인형(가위로 갈라서 가지고 노는 그런 종이 인형이 아님)에 눈을 그리면 살아서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가 무섭게 진행되지만 이건 네 명 중 한 사람의 시각이었다.

영화를 보면 슬프다. 영화는 욕심과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박혀있는 무지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저지른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다가 반전을 준다. 공포로 시작하여 스릴러로 내내 진행되다가 슬픈 마무리로 끝내려는 찰나, 마지막 장면에서 돌아서면 그 예전 어린 시절로 둘 다 돌아간다.

꼭 쿵푸 허슬의 마지막 장면 같다. 주성치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첫사랑 황성의에게 다가가서 카메라가 한 바퀴 돌아가니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장면. 아주 좋았다. 행복하게 보였다. 어릴 때는 전쟁터라도 같이 놀 누나, 친구만 있으면 행복하니까.

훅 빠져서 본 공포영화를 표방한 드라마 ‘귀 종이 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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