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의 오리무중 트리플 23
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테레사의 오리무중》 박지영/기간한정 다정한 결말이라 좋다!

세 개의 단편이 나타내고자 한 주제는 자본의 많고 적음으로 매겨지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이러한 현상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세 단편의 결말은 희망적이고 굳이 말하자면 좀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는 결말이어서 안심이 됐다. 좋은 결말 좀 주면 어때서요! 줘도 되잖아요! 흠흠

자음과 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로 출간된 이 단편집은 세 편의 단편과 작가의 에세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작가의 에세이에서 박지영 작가 본인도 이 결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어 적어본다.

˝그것은 일종의 회피 성향과 관계 있을지도 모른다. 단편 안에서 어떻게든,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와 같은 동화 속 꽉 닫힌 결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조금은 나은 것, 선한 것, 좋은 것을 주고 끝내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 낸, 불편한 것을 불편한 상태 그대로 놓아두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식의 회피. 그것이 대체로 뻔하거나 성급한 결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인물들이 무언가를 깨닫거나 알게 하는 방식의, 어릴 적 칭찬받기 위해 쓰던 독후감처럼 교훈적인 형식을 띄는, 다소 유치해 보이는 서술을 하게 만든다는 걸 아는데 ㅡ그래서 다음에 쓸 단편에서는 그런 류의 소설이나 이야기를 끔찍이 싫어하고 부정하는 인물이 나오기도 하는데ㅡ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들에게 무언가(내가 줄 수 있는 기간한정 다정과 같은) 좋은 것을 건네주기 전에는 단편을 쉽게 끝낼 수가 없다.˝ (211쪽, ‘에세이‘ 중에서 )

결말을 어떤 식으로 끝맺을지 고민한 흔적을 엿볼수 있었다. 그것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흔히 말하는 자본의 혜택을 입지 못한 젊은이들이어서 그랬으리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연작 소설은 아닌데 세 단편에 모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물류센타에서 중간 관리자로 일하는 ‘주경‘이라는 인물이다. 작가가 말하는 선한 것, 좋은 것, 조금은 나은 것을 주는, 평범한 여자 사람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시간이 지나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 사람은 신神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나에게 잠시 이 사람을 보낸게 아닐까!˝ 하는 뜬금 없을지 모를 생각! 그래서 첫 단편 ‘테레사의 오리무중‘에서도 그랬지만 두번째 ‘올드 레이디 버드‘에서, 그리고 마지막 ‘장례세일‘에서도 ‘주경‘이 등장할 때 한줄기 빛이 비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경이라고 해서 딱히 사정이 더 좋은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자본ㅡ인간‘의 이분법적 도식 위에서 어느 한쪽을 점하는 것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는 인간을 오로지 자본적으로만 가치판단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의 희망적 결말이 전혀 억지스럽게 보이지 않은 거라고 말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레사의 오리무중》 박지영 소설 중
‘장례세일‘
공정한 죽음 비용이라는 개념이 마음에 확 와닿았다. 그 전에도 물론 알고는 있었다. 장례를 치루는데도 돈이 들고 그것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화장을 할텐데 굳이 비싼 값을 치르는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그런데 이 단편 ‘장례세일‘을 읽으며 망자에 대해 공정한 죽음 비용이란 것을 결정함에 있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비록 어쩔 수 없음, 합리적 가격 결정 체계, 결국 불공정에 이르는 죽음 비용의 결정이라는 것이 고인이 창출해온 경제적, 비경제적 가치와 효용성에 대한 공정가라기보다 ˝대부분 유족의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순정 씨가 남은 할인 가격표를 마저 붙이며 덧붙였다.
"살면서 있잖니,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가격이란 게 하나도 없더라. 여기 반찬 가게에서 일하면서도, 현서 이모가 있을 때는 내 맘대로 할인 가격 하나제대로 못 붙인 거 너도 알잖아. 너 현서 이모가 전에일하던 급식실 폐암 산재 문제로 단체 소송 중이라 가게 안 나오는 건 알지? 자기 목숨값조차 그렇게 함부로 에누리당하고 자기 손으로 결정 못 하는 게 사람인데, 내가 유일하게 내 맘대로 가격 정할 수 있는 건 고작 내가 내 손으로 만든 반찬 몇 가지뿐인데, 그냥 이것만큼은 내가 생각하는 공정한 방식으로 가격표 붙이면 안되는 거니? 나도 알아. 고작 이런 걸로 세상의 가치들이공정한 가격으로 
거래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만든 건 내가 생각하는 공정한 가격 정도는 지켜주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냥 좀 놔두면 안 될까?" - P160

순정 씨의 기세에 현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뭐 엄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도 미역줄기와잘 팔리는 소시지 부침에 똑같이 30퍼센트 할인율을 적용하는 게 꼭 공정한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았지만, 그래 그게 엄마가 생각하는 공정한 가격이라면, 잘 안 팔리는 미역줄기와 가지무침도 때로 
찾는 사람이있다는 이유로 제외시키지 않고 만들어놓았다가, 떨이로 가격을 후려치지 않고 공정하다 믿는 가격을 붙여주어야만 엄마가 스스로 당당해진다면, 그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 P161

독고 씨의 죽음이 시간이 지나면 쉬어버리고 말
미역줄기무침보다 못할 것은 없었다. 독고 씨의 죽음역시 보다 공정한 가격표가 붙을 자격이 있는 거였다. 그의 삶이 남긴 업적이 대단하거나 대단히 조명할 만한 죽음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의 죽음에는 그에 따른 정당한 애도의 몫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현수는 독고 씨의 죽음에 너무 일찍 ‘그래도 싼‘ 가격표를 붙인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 시작했고, 독고 씨의 죽음에 대한 진짜 공정한 가격은 무엇인지 다시 고심해보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 P163

그러고 보니 그날의 기억에는 이런 장면도 있었다. 현수가 먼저 집에 가려 하자 순정 씨가 민영과 먹으라며 명란계란말이와 잡채를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인기 있는 반찬이어서 늘 가장 일찍 떨어지는 품목들중 하나였다.
"어떻게 이게 여태 남았어?"
현수가 묻자 순정 씨가 말했다.
"남은 게 아니라 남긴 거. 너희들 먹으라고, 따로 빼둔 거."
그러니까 아껴둔 것. 그래서인지 순정 씨가 준
명란계란말이와 잡채에는 정가도, 할인 가격표도 붙어있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런 가격도 있는 거였다. - P1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 크레우사
트로이아의 여인 크레우사 편 -- 트로이아 사람들은 그리스군이 온 이유가 부유한 도시 트로이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다. 헬레네를 찾기 위해 왔다는 것은 명분일 것이라고. 도망쳐 온 여자
하나 때문에 ˝천척의 배˝를 띄워 대양을 건너올 리는 없다고. 스파르타의 왕이 의도적으로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딸려 보냈을 것이라고.
그리스군이 물러난 그 밤, 그들이 머물렀던 해안에는 나무로 만든 거대한 조상彫像 같은 것만 하나 남아 있었다. 그냥 두지 말고 침략군의 유물이니 즉시 불태워 버렸다면 재앙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날, 도시 전체에 물든 축제 분위기에 크레우사도 들떴었다. 10년만에 처음으로 트로이아 성문이 활짝 열렸다. 마지막으로 도시 밖에있는 스카만드로스평원에 나왔을 때 크레우사는 겨우 열두 살짜리어린아이였다. 부모님은 크레우사에게 그리스군은 해적이자 용병이며 쉬운 먹잇감을 찾아 반짝이는 바다 위를 휩쓸고 다닌다고 말했다.
프리기아에 오래 머물지는 않을 거라고, 다들 말했다. 뭐하러 그러겠나? 그들이 내세운 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프리아모스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을 따라 도망 온 여자를 되찾으러 왔다는 말을•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저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배가, "천척에 달하는 배"가 여자 하나 때문에 대양을 건너와서 도시를 포위한다고? - P26

크레우사도 그 여자를,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옷단 가장자리마다 금실 자수를 놓은 붉은 드레스를 입고 목과 팔에 금장식을 두른 "헬레네"라는 여자를 보았지만, 그래도 이 여자를 데리러 대군이 그 먼 길을 왔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스군이 바다로 나선 꿍꿍이는 빤했다. 약탈한 물건으로 금고를 채우고, 잡아 온 노예로 집안을 채우려는 거였다. 그렇지만 트로이아로 온 것은 도를 넘은 행동이었다. 트로이아는 부유할 뿐 아니라 방비가 잘 갖춰진 도시임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늘 그런 식이야, 크레우사의 부모가 말했다. 저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면 다 똑같다고, 다 야만인이라고 생각해. 트로이아가 미케나이, 스파르타, 이타케 등등 자기들이 고향이라 부르는 도시보다 발달한 도시일 수 있다고는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거야. - P27

트로이아는 그리스군에게 성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크레우사는아버지가 어두운 눈빛으로 어머니에게 프리아모스왕의 결정을 전하는 모습을 보았다. 트로이아는 싸울 것이다. 그 여자도, 여자의 황금이나 옷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기회주의자, 아버지는 말했다. 겨울에 비바람이 몰아쳐 배를 강타하기 전에 떠날 거라고. 트로이아는 유복하기로 이름난 도시였다. 프리아모스왕의 쉰명의 아들과 쉰 명의 딸, 무한한 부, 드높은 성벽과 충성스러운 동맹국들. 그리스인들은 그런 도시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무너뜨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게 그들의 본성이다. 트로이아인은 그리스군이 온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헬레네를 되찾아가겠다는 건 명분일뿐이라고. 트로이아 여인들은 물가에 모여 빨래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파르타 왕이 의도적으로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딸려 보냈을 거라고. 원정에 필요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 P27

정찰병들이 그리스군은 한 명도 남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해안에는 사람도 배도 없었다. 제물로 바쳐진 무언가, "나무로 만든 거대한 조상彫像" 같은 것만 하나 남아 있다고 했다. 그리스인들이 그걸 누구에게, 왜 바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까지 무사히 항해하게 해 달라고 포세이돈에게 바쳤겠지, 크레우사는 남편에게 말했다. - 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아... 이 짧은 글들이 대체 뭐라고 이리 눈물이 날까! 담담하게 풀어낸 소설 같은 이야기들, 정말 소설일까 싶은 ‘그녀들의 이야기‘,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라서 더 공감이 된다. 어딘가의 시간 속에서 더 행복하게,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미는 학교를 계속 다니기로 했단다.
"이 놈의 학교 다 싫고 배신감 들고 무섭고 지긋지긋해. 근데 못 그만두겠어. 떠날 수가 없어."
소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많다. 함께 불렀던 노래, 아무렇게나 엉켜서 잠들었던밤들, 만여 명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휴대전화 조명을 켜고 밤의 캠퍼스를 행진했던 일. 선배가 앞서고 후배가 뒤따라 정문부터 중앙도서관, 본관, 대강당을 통해 다시 정문까지 학교를크게 한 바퀴 돌아왔다. 그때 나는 행렬의 거의 끝부분에 있었는데 길게 늘어선 불빛들이 하얗게 반짝여 은하수 같다고 생각했다. - P231

그 여름의 일들이, 성과가 더 많이 언급되면 좋겠다. 인정받으면 좋겠다. 취업의 관문으로 전락한 대학이 여전히 지성과 정의의 장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여성들의 성취가 평가절하되는 관행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작은 승리의 경험이 더 큰 질문과 도전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새로운 문구를 적어넣었다. 
‘나는 강하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더 강하다.‘ - P232

나의 아버지는 능력 있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랬나보다.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하는 모습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보았다. 후배에게 커피 심부름 한 번 시킨 적 없다거나 친한 사이에도 항상 직함을 붙여 부르고 경어를 사용했다거나 부하직원이라도 늘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는 에피소드들을 흘려들으며 저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와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가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 P238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평범한 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첫째인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체벌도 서슴지 않았다. 시험 때마다 성적이 떨어진 만큼 매를 맞았고 종아리가 보라색으로 멍들어 이른 가을부터 까만 스타킹을 신고 다녀야 했다. 쓸모없는 인간이라거나 쓰레기라거나 밥도 아깝다는 말들을 예사로 듣고 자랐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내내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 P239

폭력이 때로 얼마나 은밀한지 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잘 알면서도 나는 그런 기사를 썼다.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다정하고 신기하고 안쓰럽고 눈물겨운 이야기들, 그 뒤에 또 누가 몸을 웅크리고  있을까. 나의 부주의와 무심함이 혐오스럽다.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기사를 쓰지 않고 여전히 그 밤의 택시기사를 찾고 있다. - P239

누구에게나 열린 광장, 스스로 모인 사람들, 같은 생각과 목적, 같은 목소리, 광장에 서니 약간 벅찬 기분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굳이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죄책감"일 것이다. 
살면서 잠시라도 치열했던 적이 있었나. 
고민하고 의심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었나. 
그나마 평화로운 시절이었다고, 경기가 어려워
먹고살기도 바빴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보았지만 J씨는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묵직했다. - P2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