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81 | 182 | 183 | 18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토기를 만든 민족은 많지만 ‘자기 ‘를만들었던 민족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시유(施釉) 후 섭씨1,200~1,300도 정도의 고온에서 본벌 구이를 하는 자기를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했다. - P272

청자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만 발달한 특이한 자기이고 유럽에서는 18세기 중국의 영향으로 겨우 자기가 등장한다"는 설명에 이어 "도자기는 흙과 불의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므로, 도자기를 이해할 때는 기술과 미(美)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설명도 이어졌는데, ‘기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아, 어렵겠다"
는 생각이 엄습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마이센 같은 어여쁜 찻잔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어떤 왕과 귀족들이 아끼고 사용했느냐 같은 것이었는데, 수업은서양이 아닌 동양 도자에 관한 것이고 유물로서의 도자기에 대한 것이었으니 내 생각과는 왜 거리가 있었다. - P272

그 잔을 선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릇 사치는 돈 아까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식기는 최대한 좋은 걸 쓰려고한다. 그건 스스로를 대접하는 마음 같은 것. 최근에 읽은여행작가 김남희 에세이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에도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자 먹더라도 예쁜 그릇을 꺼내제대로 차려 먹는 것이 최소한의 디그니티(dignity)를 지켜준다는 그 이야기에, 아마도 혼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백퍼센트 공감!
이건 혼자 살지 않아도 식구들이없는 시간 홀로 밥을 먹을 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딸아이든 아들이든 예쁜 그릇에 반찬, 국, 밥을 담아 먹게 했다. 취직하여 서울에서 혼자 있는 딸아이에게도 혼자 예쁘게 담아 먹으라고 어여쁜 백자세트 그릇을 사서 보내고 열심히 모아 두었던 앤티크 찻잔들도 여럿 보내주었다. 가끔 퇴근 후 저녁 상 차림 사진을 보내오는데 짬짬이 예쁘게 담아 먹는 모습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안심이 되곤한다.
이 문장들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보니 우리딸도 공감하는 모양이다.
딸램이 읽고 나에게빌려준 책이기 때문에 안다! 한 권의 책을 딸과 돌려 읽으며 감정의 공유도 경험한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느낌이 들어 좋다. - P279

화려하고 섬세한 그릇과 마찬가지로 잘 깨지지 않는만만한 그릇 역시 참으로 귀한 존재. 사람 사귐도 그렇지않나, 나는 생각해 본다. 다루기 조심스럽고 까다로워서 쉽게 다가서기 힘든 사람들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항상 곁에있는 튼튼하고 듬직한 사람들의 중요함을 종종 잊어버리지만, 결국 오래 남아 곁을 지켜주는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 P280

청춘이란 그렇게 서슬 푸른 것이다. 지금은 부드럽고푸근한 정요 백자 같은 사람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모난 성미에 정 맞아 보기도 하고, 싸늘한 성정 때문에 미움받기도 해보아서 이제는 그만 동글고 눅진하게 살고 싶은, 40대란 뭐, 그런 시기인 것이다. - P281

약을 먹어야만 잠들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생길때도 있고, 걱정 많고 항상 신경이 칼끝 같은 성격이 원망스러울 때도 물론 있다. 그럴 때는 또 다른 의사의 말을 떠올린다. "당신이 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건, 당신 인생에서 그 성격이 가진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기 때문이에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의 성취는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성격 덕이라는걸. - P291

알고 보니 나는 이미 라틴어 단어를 꽤 많이 접했었다. 학교의 문장(紋에는 ‘veritas lux mea(리타스 룩스 메아)‘ (진리는 나의 빛)라고 적혀 있었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외치는 ‘carpediem (카르페 디엠)‘(순간을 즐겨라)‘이라는말도 익숙했으며, 미술사 수업 시간엔 서양 옛 그림의 주요 주제인 ‘memento mori(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vanitas(와니타스)‘(허무)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고전 라틴어에서 v는 영어와 w와 비슷하게 발음된다.) 그리고 『장미의 이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마지막 문장,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덧없는 이름뿐.) - P302

매시간 학생들이 제출한 퀴즈 답안과 과제를 꼼꼼하게 고쳐서 돌려주곤 했던 선생님은, ‘Angelus‘ (천사)의 격 변화를 설명하던 날 라틴어와 한국어 가사가 함께 적힌 악보를나눠주며 [파니스앙젤리쿠스]를 가르쳐주었다. 가사를 한줄 한 줄 번역해 주며 학생들에게 합창하게 했던 그는, 짖궂은 학생들의 요청에 큰망설임 없이 강단에 서서 직접 그노래를 불렀다.

Panis angelicus 천사의 양식
fit panis hominum; 인간의 양식 되고
Dat panis coelicus 천상의 양식
figuris terminum: 주님의 형상을 완성하네Ores mirabilis! 오! 묘한 신비여!
Manducat Dominum 주님을 먹는다네
pauper, servus et humilis.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 - P304

다소 떨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러나 진지하게 그는노래했다. 신(神)의 언어인 라틴어로 그가 주님의 양식을 노래할 때 나는 정신의 고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어떤 감각, 조물주의 커다란 손이 하늘로 들어올려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교수 자리가 날지 불확실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서양 고전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심한 시간강사와, 졸업 후에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쓸데도 없어 보이는 라틴어 가의를 듣겠다 마음 먹은 학생들...... 그 낡고 허름한 지상의 강의실에서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고, 그 언어는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 삶의 잉여였지만 분명 ‘위안‘이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쓸모‘를 요구하지만 유용한 것만이 반드시 의미 있지는 않으며 실용만이 답은 아니라는 그런, 위로. - P305

교양이란 학식과는 다르다. 교양은 비정한 현실 속에서, 더 비정하거나 덜 비정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틈입할 여지를 준다. 그러한 자유라도 있기에, 우리는 지치지 않고 생(生)의 수레바퀴를 유연하게 굴릴 수 있는 것이다. - P308

Sapiens nihil facit invitus nihil iratus
현명한 이는 어떤 것도 마지못해 하거나 분노한 채로하지 않는다. - P308

아무리 낡고 지루하다 해도,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기본은 긴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 묵직하게 앉아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부의 기본은 언제나 아날로그다. 대학에서의 마지막수업이 그걸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 덕분에 시간만 충분히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되었다. - P324

책을 장악한다는 것은 날뛰는 야수의 목덜미를 낚아채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틀어쥐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나를, 책이라는 맹수를 길들일 수있도록 정교하게 훈련시켰다. - P3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학생이었을 때, 늦은 밤 전철을 기다리며 여자친구와 벤치에앉아 있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을 때도 그랬다. 아주 짧았으니까줄곧 우리를 주시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텐데 어느 틈엔가 곁에 온 노인이 지팡이로 내 다리를 세게쳤다. 노인은 잔뜩 화가 나서 더러운 년들이라고 욕을 했다. 당연히 누구보다도 화가 난 것은 우리였는데 한편으론 무서웠다. 왜그렇게까지 악의를 갖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더 그랬다. 우리가 할아버지한테 뭐 했어요? 했냐고! 여자친구가 악에 받쳐 소리칠 때 나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노인과 멀찍이 떨어져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는 승객들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 P17

우리는 수영은 못하고 해변을 걷기만 하다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무리 여름이래도 밤의 바다는 추울 테고 일 년 사이 더 늙어있을 우리에게 호기나 오기 같은 건, 충동적인 농담 같은 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는 함께 해변을 걷다가 쓸모없는 것들을 잔뜩 주울지도 모른다. 예쁜 소라껍데기를 하나 주워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워온 소라 껍데기를 서랍 속 상자에 잘 넣어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꺼내 귀에 갖다대고 파도 소리를 듣고 또 서로에게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 P37

우리의 긴 드라이브가 끝난 다음에도 반장은 침묵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말 있어?"
내가 묻자 반장이 장난스럽게 운전대를 흔들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진짜 용서 안 해줄 거야?"
이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구하지 않을 용서 아니었냐고 내가 용서를 해준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느냐고. 나는 그런 것들을 묻지 않았다. 반장이 어떤 대답을 내놓는다고 해도 그렇게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보니 원하는 답을 해주기가 싫어졌다. 어릴때에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미움만 받았던 기억은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았다. 상처가 됐다. 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안 해줄래. 그러니까 그냥 계속 싫어해."
반장의 표정은 빠르게 일그러졌다. 어쩌면 나도 그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친, 진짜."
반장은 짜증난다는 듯이 거칠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서는 있는 힘껏 문을 쾅 닫고 떠났다.
<굴 드라이브> - P69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등골을 타고 땀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느껴졌다.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나는 충동적으로 지하철역까지 곧게 뻗은 차도 대신 샛길처럼 나 있는 주택가 골목을 택했다. 백 미터 남짓 되는 그 골목은 적갈색의 벽돌로 된 연립주택이 대부분으로 내가 사는 동네와 분위기가 아주 비슷했다. 모퉁이를 돌면 우리집이 나올 것만 같았다.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날인지 집 앞에쓰레기봉투를 내놓은 곳이 많았다. 골목 가득 희미하게 지린내가났다. 나는 냄새에 질색하며 도망치듯 빠르게 달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 골목 입구 쪽에 있는 헌옷 수거함앞으로 갔다. 손바닥에 눅진하게 배어난 땀을 닦은 후 그녀가 준카디건을 그 안에 넣었다. 수거함이 꽉 차 있어서 힘으로 욱여넣어야 했다.<결로> - P93

하지만 유코의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모두 조금씩취해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중에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유코도남자도 나의 여정을 죽은 친구를 대신해 떠나온 것으로 오해하고있었다.
나는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바로잡았어야 했을까? 그것은 어떤 빌미가 되었을까. 누군가 원진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원진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미신적이고 원진에게도 옳지 못하다. 그런데도 그런 자책감이 들 때가 있다. - P111

"원진이가 죽었어요."
유코는 내 손을 잡았다.
"그렇게 죽으면 안되는 거였는데."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죽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내가 대착없이 우는 동안 유코는 아무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 P1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락의 밑바닥을 혼자보다는 둘이서 걷는 게 더 나을것입니다. 하지만 시체를 끌어안고 남편이 중얼거렸던말이 내내 마음에 걸립니다.
약속에 늦어서 미안해….
두 사람이 어떤 약속을 했는지 저는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이미 예감했던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새마 <여름의 시간> 중에서 - P36

윤복은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그 생소한 단어를 찾아보았다.

크레마스티스토필리아(Chremastistophilia) 증후군: 도난을 당하는 데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증후군.

주희는 자신과 섹스를 했던 남성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르가슴을 느껴왔던 것이다.
김재희, <웨딩 증훈군> 중에서... - P65

윤복은 고민 중이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주어야 한다. 만에 하나 성주희의 괴벽에 비위를 맞추다 도저히 못 참고 헤어지면, 자신은 나이 든 이혼남 딱지가 붙어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난생처음 겪는 이상한 감정에 그는 난감했다. 그에게는 고난이도 문제다.
윤복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김재희, <웨딩 증후군> 중에서... - P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월의 더께가 앉아 책장이 누렇게 변해 버린 그 희랍극선은 내게 오만(傲慢)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神)이 부여한 운명을 거역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만(휘브리스)은 큰 죄로 여겨져 엄벌에 처해졌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운명을 거스르고자 시도하고 또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비극(劇)이 탄생하였다는 것을 비극은우매한 인간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이지만 그 통렬함을 통해 인간은 성장해 왔다는 것을. - P172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지만 훌륭한 사람만이 잘못을인정하고 고친다. 유일한 죄는 ‘자만이다." 얼마 전 로버트케네디 평전 라스트 캠페인』을 읽었을 때, 나는 로버트케네디가 아꼈다는 소포클레스의 이말에 밑줄을 그었다.
『오이디푸스왕』을 통해 인간의 오만을 경고한 소포클레스가 할 법한 말이라 생각하면서. - P177

명료한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라, 그런 식의 감지(感知)를 통한 자연스러운 깨침이 대학이라는 공간의 파장 안에있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특권 중 하나였다. 지금도 궁금하다. 그날 선생님은 어쩌면 그렇게 초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있었을까? 그도 우리 못지않게 지루했을 텐데, 배우자와자식이 있는 직장인이 황금 같은 휴일을 업무를 위해 헌납하는 일이 보통 열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 P180

별빛을 따라 무작정 걸어 아기 예수가 탄생한 구유로인도된 동방박사처럼, 나 역시 코레조의 빛에 이끌려 무작정 책장을 넘기다 진리를 빛으로 여기는 대학이라는 ‘마구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마구간에서 뻗어 나온 길은 결코 곧고 평탄하지 않았다. 장애물과 막다른 골목, 시행착오투성이였다. 힘들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재미도 보람도 그래서 생겼다. - P197

나를 울게 두어라! 밤에 에워싸여
끝없는 사막에서낙타들이 쉬고, 몰이꾼도 쉬는데,
돈 셈하며 고요히 아르메니아인 깨어 있다.
그러나 나, 그 곁에서 먼먼 길을 헤아리네나를 줄라이카로부터 갈라놓는 길, 되풀이하네
길을 늘이는 미운 굽이굽이들.
나를 울게 두어라! 우는 건 수치가 아니다.
우는 남자들은 선한 사람.
아킬레스도 그의 브리세이스 때문에 울었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무적의 대군을 두고도 울었고,
스스로 죽인 사랑하는 젊은이를 두고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울었다.
나를 울게 두어라! 눈물은 먼지에 생명을 준다.
벌써 푸르러지누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전영애 옮김, <서 · 동시집>(도서출판 길)에서 - P228

인간은 자주 착각하고, 착각을 진실로 믿어 가끔씩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착각에서 깨어나 슬퍼지고, 그럼에도불구하고 다시 착각한다. 착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인문학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독일 명작의 이해‘를 통해 인간은 지향하는 바가 있는 한 방황한다고 배웠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라는 것도 함께 배웠다.
- P229

실망하게 될지라도,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세계를현실에서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다.
앎은 그런 과정을 통해 구체화된다. 실재하는 금각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에 나는 금각 꼭대기의 봉황이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봉황이 서쪽을 꿈꾸는것은 금각을 지은 이가 죽은 후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서방정토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염원했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해보는데, 이는 ‘일본미술사‘ 수업을 들은 덕이다. 그 수업 시간에 뵤도인(平等院)을 비롯, 헤이안 시대 귀족들이 극락정토를 형상화해 지은 건축에 대해 배웠기 때문이다. 후대의인간이 명명한 한 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그 전 시대의 유행이 무 자르듯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 역사라는것은 산술적인 것보다는 훨씬 복잡한 인간의 마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때 사학도였던 영향이 클 것이다. - P2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사전이란 부동의 질서와 조화를 담고 있는 총체적인 체계이고 의심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에 담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권위를 신뢰해야만 사전은 참고 서적으로서 기능할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기술은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에, 사전의 무오류성은 환상일뿐이다. 사전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지만, 그 거울은 현실을 왜곡해서 복제한다. 그렇지만 틀뢴의 백과사전은 다른 거울을 비추는 거울일뿐이라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에 의해 침해되지 않은 완벽한 질서를 이룬다. - P126

지금 인터넷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침투하고 현실을 장악하며 인터넷이 곧 현실이 되고있다. 영화 <인셉션>에서 맺은 완벽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꿈속의 세상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지금 우리도 맬처럼 그 자체로 완벽하고 자족적인 웹의 세계를 떠나기 어려워 혼란을 겪는다. - P127

사투리는 사전에서 배제되는 단어군 가운데에서 아마도 가장 아깝고 가장 억울한(수도권에서 쓰이는 말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되다니!) 부류가 아닐까싶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엄마와 이야기를할 때는 어설프게 전라도 말을 섞는다. 엄마가 쓰는전라도 말씨를 자연스레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라도 사투리에 표준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어감을 담은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P142

한편 나에게 ‘빼다지‘라는 말은 아버지의 잡동사니 물건이 가득 들어 있던 서랍을 떠올리게 하고,
‘덕석‘이라는 말은 어릴 때 겨울이면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운 집에 살 때 엄마가 손뜨개로 떠준 연초록색 조끼를 소환한다. 감정적 기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정의가가득 쓰인 사전, 요즘 쓰는 말과 알고는 있지만 이제는 쓰지 않는 말, 나만 아는 것 같은 말, 좋아하는 말과 싫어하는 말이 담긴 사전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있는 셈이다. - P149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나는 집 안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화장실에 휴지 채워 넣기, 다떨어진 생필품 사놓기, 쓰레기 버리기, 구석구석에 앉은 먼지 닦기 등)을 드높이는 장려한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또 내 마음속에 늘 어지러이 떠다니는 감정을 딱 집어 고정해놓을 단어도 있었으면 좋겠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돕지 못하고 마음에 남은 짐, 누군가를 현실에서 만났을 때보다 꿈에서 만났을때 더 반갑고 애틋한 현상, 예전에 내가 저지른 어떤 실수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늘 지금의 일처럼 떠오르는것 등. 그런 마음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있다면, 다른사람들도 쓴다면,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 생각하고안심이 되기도 할 것이다.  - P1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81 | 182 | 183 | 18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