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심리학자, 메타버스를 생각하다 - 사람이 모이는 가상공간은 무엇이 다른가
김지헌 지음 / 갈매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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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사를 오가면서 실제 입주에 앞서 가구회사의 도움으로 가상의 공간에서 가구를 배치해볼 수 있었다. 물론 수백만 원어치 새 가구를 구매하는 고객에 대한 서비스이기도 했다. 담당 직원이 직접 집을 방문하여 필요한 곳을 실측하고 수치를 DB화한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이사 당일의 수고로움과 혼잡을 피하고 최적의 공간을 활용하였다. 덕분에 모든 가구가 한 번에 깔끔하게 배치되었고, 일상에서 가상공간의 영향력을 처음으로 직접 겪어볼 수 있었다.

 

오늘날 메타버스 논의는 주로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 분야의 기술 발전, 그리고 가상현실을 비즈니스 모델에 적용해 돈을 버는 방법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와 달리 나는 소비자 심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인간이 가상세계의 여러 자극을 감각기관(, , , , 피부)을 통해 어떻게 받아들이며, 또 어떻게 처리하여 반응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인간은 이러한 정보 처리 과정과 반응을 거쳐 가상세계에서의 경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9)

 

요즘 한참 떠오르는 용어 메타버스는 현실에서의 상호작용을 가상공간에 구현한 여러 가지 형태나 콘텐츠들을 통칭하는 신조어이다. 초월(beyond), 가상을 의미하는 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universe의 합성어로, 1992년 출간된 소설 '스노우 크래시' 속 가상 세계 명칭인 '메타버스'에서 유래한다. 컴퓨터와 콘솔게임으로 모니터를 보며 즐기던 2차원 게임 방식에서 3차원 체험형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 확장현실로 형태가 급속도로 진화 중이다.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일선 기업과 산업 현장에도 적용되어 메타버스를 이용해 설계와 공정 작업 등 현장에서 더 입체적이고 정밀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심리학의 관점으로 메타버스 가상현실을 바라본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대부분의 과학적 연구는 실험으로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개념을 가상세계에 접목하면, 심리학 관점의 가상세계 연구는 가상세계에서 인간이 보이는 생각과 행동의 이유와 방향을 실험을 통해 밝혀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36)

 

마케팅의 한 분야로서 브랜드 심리학자인 저자는 서문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이 될 수 있는지, 거대한 고래에 비유한 메타버스를 보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가상공간이 과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등을 물으며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메타버스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우선, 다양한 가상공간의 종류와 개념부터 훑어보자.

첫째,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은 현실세계와 이와 관련된 디지털 정보를 통합한 것으로, 카메라를 통해 화면에 나타난 현실 모습에 가상의 물체를 실시간으로 표현하는 기술이다.

둘째,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은 현실세계 또는 그 현실세계 안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3D 가상 이미지로 완벽하게 구현한 것으로 현실을 왜곡하거나 사용자를 완전히 다른 가상의 환경으로 데려온다.

셋째, 혼합현실(MR, Mixed Reality)은 가상과 현실의 결합 측면에서 AR과 비슷하지만 현실과 가상이 실시간 상호작용을 한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섞어서 VR 헤드셋을 통해 보여주는 것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VR 헤드셋의 카메라를 통해 현실 세계를 볼 때 가상 ​​객체가 시야에 매끄럽게 혼합되는 것처럼 가상 객체를 현실 세계에 혼합하는 방법이 있고, 다음으로 가상 세계에서 플레이하는 VR 게이머를 보는 이용자의 카메라 뷰처럼 실제 객체를 가상 세계에 혼합하는 방법이 있다.

넷째, 확장현실(XR, Extended Reality)MR의 확장된 개념으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접속하여 그들 간에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이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을 포함한 몰입형 기술을 총칭하는 용어다.

 

기업은 다양한 레이아웃의 가상스토어를 구축한 후 소비자의 구매 동기와 패턴에 적합한 유형의 매장을 제시하는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빠른 시간에 원하는 제품을 구매하려는 실용적 소비 성향(utilitarian motivation)을 가진 소비자에겐 매장 이동의 편의성이 쇼핑의 즐거움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아방가르드 매장과 실용적 매정에서 쇼핑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 유리하다.(82)

 

이 책은 전체 410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서는 가상 세계에서도 심리학이 필요한 이유를 다룬다. ‘대성당 효과와 같이 천장의 높낮이와 형태를 바꿔 창의성 발현을 유도하고, 가상 공간의 회의실 좌석을 업무 특성에 맞도록 배치하는 등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공간의 재배치를 논한다.

2장은 사람을 모으는 메타버스 브랜딩이다. 본래 소의 소유권을 표시하던 용도의 낙인(브랜딩)21세기에 와서는 그 자체로 제품의 상표가 되었다. 실물 제품을 매장에서 직접 보거나 만지지 않아도 구매를 유도할 수 있는 기술적 방법을 논한다.

3아바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에서는 매장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상황별로 사람의 감정이 실린 아바타에게 외모와 성향을 부여함으로써 소비자의 구매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살펴본다.

4메타버스, 가치를 설계합니다에서는 시각과 촉각, 음성 등 실제에 가까운 감각을 제공하여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이며, 매장의 온도와 색상을 적절히 활용하여 구매심리까지 미치는 영향을 돌아본다.

 

가상현실에서 시각 정보만이 아니라 촉각의 피드백을 함께 제공할 경우 신체 소유감과 실재감이 증가했으며 완벽한 촉각이 아닌 유사 자극, 즉 초음파 피드백만으로도 유의미한 효과가 나타났다. 이는 신체 소유감이 심리적 소유감을 높이고 제품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도록 만든다는 기존 연구를 참조해볼 때, 촉각 피드백의 중요성과 의미를 잘 보여준다.(175)

 

이 책의 근간은 실제와 마찬가지로 가상공간 역시 소비자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환경을 갖추어야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된다는 발상으로, 이를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특성을 깊고 상세하게 파악할 것이 요구된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될수록 인간다움이 더욱 중요해지고 인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는 기업이 메타버스 가상현실에서 소비자에게 노출하는 사전 시각 정보를 신중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미국의 메타버스 플랫폼 개발 업체인 스페이셜(spatial)과 같은 기업들이 가상건물의 로비와 매장 입구에 NFT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러한 NFT 작품들은 기업이 의도하지 않게 시각적 점화를 유발함으로써 소비자의 평가 기준을 바꿀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224)

 

저자는 우리가 메타버스 가상공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과학적으로 준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세 가지에 유의할 것을 당부한다. 첫째, 인간은 다중 감각 정보에 노출되면 이를 통합 관점에서 인식하는 존재이므로 가상공간에서의 인간 행동을 예측하려면 여러 감각 정보 조합에 따른 인간 반응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이들 정보는 대개 무의식적 반응의 결과이므로 소비자를 기만하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셋째,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가상공간 기술력에 지나친 기대는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인터넷 버전 소비자 마케팅으로 부를만한 이 책을 인터넷 쇼핑몰이나 가상공간에서의 마케팅과 소비자 심리 분석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한 길라잡이로 추천해 드린다. (20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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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를 알면 보이는 것들 - 공간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가
정은혜 지음 / 보누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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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에 관한 기억 한 조각

나에게 지리 과목은 1987년 대입 학력고사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받았던 암기과목의 대명사였다. 유명 코미디언의 형님이셨던 암기 9지리 선생님 덕분에 지리는 암기 능력과 더불어 2미터 거리에서 날아오는 침을 피하는 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위생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는 길거리 리어카에서 해삼 멍게를 팔았고, 동해안에서 가장 많이 잡혀 가출 청소년도 부담 없이 사 먹을 정도로 흔했던 꽁치는 연탄불에 바짝 구워 팔던 인기 술안주였다. 대학 졸업 후 기술 영업사원으로 취직하였을 때는 아직 GPS가 상용화되기 전이라 두툼하고 커다란 축소판 전국지도책을 펴들고 도로망을 공부하였고, 처음 가는 업체에 약도를 팩스로 넣어달라고 말하는 게 방문순서의 정석이었다. 고등학교 때 달달 외웠던 전국의 지명 덕분에 도로표지판만 읽으면 동서남북을 헤매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 지리를 알면 길이 보였다.

 

장소는 우리 삶의 양식과 정체성을 규정짓는 틀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장소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러한 장소의 의미를 연구하는 지리학은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31)




# 책의 구성

이 책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은 지리와 연관된 각각 장소(지리상식), 세계(세계화), 경관(국가 정체성 및 상징성), 경제(돈이 모이고 퍼지는 곳), 도시 및 도시화(자연발생 및 계획도시), 도시구조와 디자인(역사의 격동성)을 다룬다. 1, 3, 4장의 끝에 제공된 지리학 특강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딱딱하고 지루하기 마련인 지리학 관련 용어를 요점 나열식으로 술술 풀어내어 부담스럽지 않으며, 시각 자료가 모두 총천연색에 설명이 잘 곁들여져 있어 이것만 들여다보아도 좋을만큼 매우 알차고 유익하다. 전체 분량은 300쪽이 안 되지만 두꺼운 재질의 종이다 보니 400쪽 분량과 맞먹는 두께다. 한 손에 쥐고 앞뒤로 넘기며 읽기에는 조금 불편한 감이 있다.

 

정확히는 제퍼슨 동상의 눈이 백악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요. 이는 미국의 법을 제창한 사람으로서 현재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항상 견제하고 있겠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165)

 

# 지리만 다루지 않는 지리책

지리 과목을 선택한 학생이 아니더라도 교양서로 고를 법한 제목이지만 사실 이 책이 다루는 분야는 지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지리를 앎으로써 무엇을 얻느냐고? 사실 지리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 전혀 없다 할 정도로 세상 모든 일이 다 지리적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take place발생하다란 의미의 영 단어인데, 직역하면 장소를 차지하다 또는 가져가다가 된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뜻은 공간을 차지했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리와 연계하여 발생하는 일이란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종교, 사회 등 인류가 지나온 거의 모든 기록의 영역을 아우른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다수의 영화이다. 영국의 한 탄광 빈민촌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키운 <빌리 엘리어트>, 래퍼 에미넴이 주연하여 한때 자동차 산업의 성지였으나 쇠락한 도시의 사회적 인종적 갈등을 그려낸 <8마일>, 대항해시대에 외부 세계와의 충돌로 멸망해간 멕시코 문명의 비극을 그린 <미션><1492 컬럼버스>, 쌍둥이 같은 운명의 두 도시 홍콩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신흥 공업도시의 성장과 동성애자 삶의 애환을 그린 <해피투게더><엄마 찾아 삼만리>가 등장한다. 이외에도 <마루타>, <엘도라도>, <천국의 아이들>, <시티 오브 갓> 등 다수의 영화가 인용되며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지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도심재활성화(gentrification)라는 개념도 최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되고, 이들이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으로, 원래 그곳에 살던 많은 주민이 쫓겨나듯 이주하는 등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2009년 용산 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일명 용산 사태)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예입니다.(252)

 

# 맺는말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모든 지역은 도시화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과거의 문명 발상지가 오늘날 폐허가 되듯 도시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어떻게 기능을 하게 될지, 인간은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지, 생활 양식(genre de vie)은 어떻게 변화할지 등 자못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지리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인간이 가져온 공간의 개념을 새로이 받아들인다. 인간과 공간이 서로를 변화시키며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단순한 암기과목에서 벗어나 공간을 연구하는 하나의 과학으로 접근하는 시각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재미난 지리 교양 서적으로 읽어둘 만하다. (2023-05-21)

 


#인문 #지리를알면보이는것들 #보누스 #리뷰어스 #책추천 #정은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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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를 알면 보이는 것들 - 공간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가
정은혜 지음 / 보누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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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한 컬러판 시각자료, 알찬 내용, 알기 쉬운 설명. 지리만 알려주는 게 아닌 지리는 지리 책이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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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어휘력 (양장) - 말에 품격을 더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힘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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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왜관에서 김천으로 시집오셨던 나의 외할머니는 당시 여성의 평균 신장을 넘는 훤칠한 키의 멋쟁이셨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사진으로만 보고 가늠할 뿐이지만 나이 드시고 구부정해도 역시 할머니는 자태가 고우셨다. 그러나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니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할머니의 찐한 사투리에 영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빼다지(서랍), 짐치(김치), 정구지(부추), 가시개(가위), 지름(기름), 통시(화장실), 연희 때(여느 때), 영 파이라(아무래도 엉망이다), 걸구치다(거추장스럽다), 마카(모두), 널찌다(떨어지다) 같은 말은 신기하기도 하고 듣고도 몰라 두세 번 되물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실제로 로 발음하는 방식 때문에 고종사촌 승열이가 언제나 성열이로 불리는 등 동네 친구들과 일가친척 모두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이 누 해요?’라는 글자마다 높낮이가 따로 있는 질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누구의 것이냐?’를 묻는 말이었다. 가히 가가 가가가’(그 아이가 가 씨 성이냐)에 대적할 만했다. 당최 억양 자체가 서울 말씨와 너무 달라 대화가 힘들었던 할머니는 늘 소통에 목말라 하셨다. 혹시 그때 할머니는 어른의 어휘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표준어를 모르셨던 것일까.

 

최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참신한 연기와 대사로 큰 화젯거리가 되면서 너도나도 해방을 추앙하는 유행이 일었다. 자신을 가두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니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떨쳐낸다는 줄거리가 볼만했다. 배우들의 찰진 연기보다도 더 크게 다가온 매력은 힘 빼고 거품 걷어낸 알토란 같은 대사였다. 저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대사를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어쨌든 드라마에서 영감을 얻어 해방을 추앙 한다던 개인들이 진정 자신에게서 해방되었는지는 아직 얘기들을 안 하니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자는 말은 일찍이 90년대 그룹 듀스의 노랫말에도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도 말이 필요한 일이고, 그 굴레를 벗어나야 허물 벗는 뱀처럼 성장하는 것 역시 말이 필요한 일이다. 언어는 존재를 담는 틀이라고 했던가, 성인이 어른으로 거듭나려면 자신을 규정하는 언어의 허물을 벗어내야 성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말은 참 쉬워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게 큰 함정이다.



 

어쩔 수 없다. 말은 인격이다. 고사성어나 전문용어, 어휘를 많이 안다고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 할 수 없다. 그건 그냥 유식하고 교양 있는 거다. 인격은 기본적인 어휘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상대에게 어떠한 의도로 쓰는지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말의 힘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으로 획득된다.(99)

 

독자들은 첫째, 책에 언급되는 순우리말 등의 어휘를 다른 사람에게 써봐야 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저자는 어휘력을 늘려야 하는 이유는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누려보기 위함이라 답한다. 둘째, 그렇다면 어휘력을 늘리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먼저 어휘력이 필요한 이유와 중요성을 깨달아 보자고 한다. 저자의 궁극적인 바램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서 해방되기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의 틀을 규정하는 언어부터 점검하는 것인데, 이는 해방감을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이 책은 전체 4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서는 일상에서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어휘력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짚는다. 2장에서는 어휘력을 키우는 기술을 습득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하는 마음 자세에 관해 쓴다. 3장은 어휘력을 키우는 방법을, 4장은 한 개의 낱말에 대해 궁금해하고 음미하는 일이 어떻게 어휘력을 늘리고 사고력을 확장할 수 있는지 사례를 들어 쓴다.

 

공감 능력을 갖춘 이들은 어휘 선택과 태도에 신중하다. 남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어휘따위는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주효한 거름이 될 수 있다.(130)

 



이 책 제목이 어른의 어휘력이지만 기실 어휘력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는다. 구수한 남도의 사투리가 섞인 에세이 형식으로,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최근의 일까지 고루 섞어 짧은 글의 제목에 어울리는 글감을 제시한다. 조금 낯설거나 어려운 어휘를 비롯하여 시사 상식까지 본문 아래 따로 주석을 달아 설명하고 있어 읽는 재미가 제법이다. 찰진 9예시문을 통해 문맥 속의 단어를 배우는 과정이 마치 영어 원서 독해 능력 향상을 위한 문해력 교과서의 느낌이 드는데, 이런 구성 방법은 꽤 효율적이다. 본래 어휘는 따로 백반이 아니라 문맥 속에서 배우는 게 최고다.

 

사람은 머리로 안다 해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하지 않는다. 내용인즉 아무리 옳아도 가슴을 울리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표현이 아름다워야 하고 가슴을 흔들 수 있어야 한다.(307)

 

지난 26년 동안 라디오 방송일을 해온 베테랑 작가인 저자는 서두에서 이 책의 저술 의도를 어른에게도 어휘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다고 밝힌다. 짐작건대 저자가 말하는 어른의 어휘력이란 마땅히 어른의 수준으로 인정할만한, 또는 어른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최소한의 문해력을 뒷받침할만한 어른스러운 어휘력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몸은 이미 성장을 지나 노화를 향해 달려가는데 어째서 이놈의 정신머리는 여전히 고등학생에 머물고 있냐며 모자라는 언어 감수성과 어휘력에 가슴을 치고 싶은 필자 같은 중년의 남성 독자에게 절대 필요한 책이다. (202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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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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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어휘력 (양장) - 말에 품격을 더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힘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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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력은 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부숴준, 어른들을 위한 어휘 교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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