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라기에는 과학 얘기는 아직 별로 없고 독립운동가들의 흥미로운 뒷얘기.
책에 언급된 하와이 이민과 인하대의 관계는 몇 년 전 월미도 여행시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알게 됨.

1902년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와 하와이

1902년 10월, 유학을 떠난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하와이를 보고 감격해 자신의 호를 ‘도산‘으로 지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상투 를 붙잡고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일단 싸움부터 말리고 사연을 물었더니, 인삼을 팔던 한국 상인들 사이의 구역 다툼이 었다. 안창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공부가 아니라 즉각적인 의식 개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학을 포 l기하고 대대적인 계몽 활동과 한인촌 건설에 앞장서고 신문 을 발행하며 교포들의 단합을 이끌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 한인 공동체가 구성되기 시작한다. - P34

행복하게 지내던 서재필에게 충격을 준 사건 역시 3•1운동이었다. 그는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실패 모두 한국 민중이 덜 깨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1 운동에서 한국인들이 보여준 의지에 감동했다. 서재필은 이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30년 전에 내가 인천항을 떠날 때에 한인들이 내 뒤를 받드려주지 않는 것을 보니까 한인들이 다 죽은 백성으로 알았었 습니다. 그러나 1919년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한인이 죽지 않고 산 백성으로 꼭 믿었습니다. 언제든지 그런 백성이 자유 독립하고야 말 줄로 참말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연설도 하며 선전 사업에 활동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 P43

서재필은 사재를 털어 필라델피아에 교포들을 모아 독립 행사를 열고, 다시 한국 문제에 앞장선다. 서재필의 미국인 부인은 일제의 압박과 학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특히 둘째 딸 뮤리엘은 서재필의 비서 역할을 하며 적극 도왔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결과, 한때 부유한 사업가였던 그는 결국 60세가 되던 1924년에 파산한다. 이런 와중에 서재필은 62세에 다시 의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심지어 64세 때는 집을 저당 잡혀가며 의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조선에 전염병이 자주 일어남을 걱 정한 그는 세균학, 면역학, 병리학 등을 연구하며 학술지에 몇 편의 논문도 출판했다.
192년, 미국에서 서재필과 동업하던 유일한 박사가 귀국한다. 그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미술을 전공한 뮤리엘은 유일 한의 성 버들 유를 상징하는 버드나무를 조각해 선물했다. 유일한 박사는 이 조각에 새겨진 모양을 상표로 한국에서 의약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가 유한양행이다. - P44

1919년 응우옌은 파리에 미리 도착해 활동 중인 한국 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다. 프랑스 당국은 응우옌이 한국 대표단과 매우 가깝게 지낸다며 심지어 응우옌과 한국인들의 대화 내용도 기록해두었다. 응우옌은 한국 대표단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 언론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임시정부(Provisional Goremment of Republic of Korea)‘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응우옌 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3.1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국제 무대에 처음 등장하고 베트남 독립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18년, 호치민의 파리강화회의 활동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프랑스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호치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 l거로 삼는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당시 프랑스 경찰은 기록했다.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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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결정론의 편향
생산적 노동의 협소한 개념화
약탈적인 사냥꾼/전사의 사회적 패러다임

2장 성별노동분업의 사회적 기원

관계의사회적 기원에 대한 연구는 여성해방을 위한 정치 전략의 일부이다(Reiter, 1977). 남녀의 불균형한 관계의 기원과 기능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 - P119

양성 사이의 억압적 관계의 기원을 묻기 시작하면서, 지난 한 세기동안 사회과학자들이 내놓은 오래된 설명들 중 어느 하나도 마뜩한것이 없음을 곧 알게 되었다. 진화론자든, 실증주의기능주의자든, 심지어 맑스주의적 접근법이든 간에 결국은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변화의 영역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따라서 불균형한 성별노동분업의 기원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논쟁에서 흔히 사용하는 몇몇 개념에 내재한 생물학적 편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 P120

생물학적으로 오염된 자연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신비화된 것은지배와 착취, (남성)인류의 (여성)자연에 대한 지배관계이다. 이런 지배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여성에게 적용된 다른 개념들에도 내재해 있다.
노동 개념을 보자.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생물학적 규정 때문에,
여성의 출산과 육아, 그리고 다른 가사노동들은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노동 개념은 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의 생산적 노동,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 P121

이런 구분이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남성의 성차별주의 때문이라고할 수는 없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수단으로 직접 사용될 수 있고, 혹은 기계와 곧 연결될 수 있는 인체의 부분에만 관심이 있다. - P122

마찬가지로 애매한 생물학적 논의가 지배적 힘을 발하는 곳은 한족 개념과 관련한 부분이다. 이 개념이 유럽중심적이고 비역사적 방식으로 일반화되어 사용되면서 핵가족이 남녀관계들을 전체적으로 제도화하는 기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구조로 제시되었다. 또한 이 개념은 이 제도의 구조가 서열이 있고 불평등한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있기도 하다. ‘가족 내의 동반자의식 혹은 민주주의‘라는 말은 이 제도의 본색을 가리는 역할을 할 뿐이다. - P123

생명 생산은 자본축적의 조건아래 이루어지는 생산 노동을 비롯해 다른 모든 역사적 형태의 생산노동의 영원한 전제조건이다. 생명 생산은 무의식적인 ‘자연적‘ 활동이 아니라 일로 규정되어야 한다. - P125

나는 생산적 노동에 대한 이협소하고 자본주의적인 개념이 자본주의 아래의, 그리고 실재 존재했던 사회주의 아래의 여성 노동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가장 막강한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 P126

남/녀의 인간적 본성은 생물학적으로 일련의 과정을 따라 전개되어 온 것이 아니다. 이는 남/녀가 자연과, 그리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역사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인류는 동물이연명하는 것처럼, 그저 사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자신들의 삶을 생산한다. 이 생산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 P129

이후로, 맑스는 넓은 의미에서 ‘일‘을 개념화할 때, ‘자연물을 전유‘
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전유하는 것이 일이라는 의미이다. - P129

인류의 생산 혹은 출산과 관련된 것을 ‘자연적(즉, 역사와 관련 없는 과정으로, 생산수단과 노동의 발전과 관련된 것을 역사적 과정으로 구분하는 것은 맑스 이론 내에서 여성과 여성의 노동에 대한 사적유물론적 개념화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132

여성이 출산을 하고 젖을 만들면서 자체의 자연성을 전유하는 것은남성이 자신의 몸이라는 자연을 전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의손과머리 등이 도구를 만들고 다루는 일과 성찰을 통해 기술을 습득한다는 의미에서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출산과 육아 활동은 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런 활동을 단순한 생리 작용으로, 다른 포유류의 활동과 비슷한 것으로, 의식적인 인간의 영향력 밖에 놓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여성의 해방, 여성의 인간화에 여전히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여성 몸의 생산성을 동물의 번식과 동일시하는 이런 관점은 지금도 인구학자와 인구 계획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선전하면서널리 보급되고 있다. 이런 관점은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노동분업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 P138

구세대와 신세대 사회적 진화론자들의 설교와는 대조적으로,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남성 사냥꾼‘보다 ‘여성 채집자 덕분이라는 결론이, 특히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비판적 연구를 통해 입증되어왔다. 현존하는 사냥꾼과 채집자 내에서도 여성이 양식의 80%를 제공하는 반면에 남성은 사냥으로 극히 일부만 제공한다(Lee and deVore, 1976, Fisher, 1979:48에서 재인용). - P147

우리는 남성-사냥꾼 가설의 신비를 벗길 수 있고, 위대한 사냥꾼이라고 하더라도 여성이 매일 생산해내는 식량이 없었다면 생존이 불가능했을 것임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여성이 채집자와초기 경작자로서의 우월한 경제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서열이 있고 착취적인 남녀관계가 수립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는지의 문제에 여전히직면해 있다.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묻는다면, 우리는 정치권력이 경제력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났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의 논의를 통해보면 그런 가정은 견지될 수가 없다. 남성 지배가 남성이 우월하게 경제적 기여를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52

그러나 이 생산양식은 남성의 무기에 대한 독점과 동물의 재생산행위를 관찰한 것, 이 두 가지를 통해 가능해졌다. 남성이 동물의 재생산 행위를 조종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재생산 기능들을 발견했다. 이는 성별노동분업에서의 변화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관계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사냥꾼과 달리, 목축유목민에게 여성은식량의 채집자나 생산자로서는 더 이상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 - P156

은 자녀를, 특히 아들을 출산하는 의미에서 필요했다. 여성의 생산성은 이제 ‘출산‘으로 축소되었고, 이는 남성에 의해 전유되고 조정되었다(Fisher, 1979:248ff 참조).
주로 전유적인 수렵과 채집 경제와는 달리, 목축유목민의 경제는
‘생산적 경제‘이다(Sohn-Rethel). 그러나 이런 생산양식은 동물과 인간을 조종하고 영토를 확정하기 위해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 P157

그러므로 노예제는 무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남성이 무기를독점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노예가 매매될 수 있으려면, 무기를 휘두르는 주인에게 잡혀서 전유되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이렇게 약탈적으로 노동력을 취득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적 계략을 위해서든 판매를 위해서든 간에, 이 전사-사냥꾼에게는 가장 생산적인‘ 활동으로 여겨졌다. 이 전사-사냥꾼은 여성의 생산적인 농업노동에 기초한 경제체제에서 먹고 살고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수렵 채취자가 아니라는 점은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여성 경작자들의 ‘남편들이었다. - P158

‘식민지 시대 이전의 아프리카 사례들을 통해 보면 무기 독점에 기초한 남성의 약탈적인 생산양식은 주로 여성으로 이루어진 다른 생산경제들이 존재하고, 이들을 공격할 수 있을 때에만 생산적‘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는 비생산적 생산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약탈, 노획, 강도질 등과 교역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보여주기도 한다. 돈(카우리 조개껍질)과 교환 혹은 거래되었던 것은공동체의 필요품 이상으로 생산된 여분의 잉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기를이용해 훔치고 전유된 것, ‘잉여‘로 규정된 것이었다. - P160

따라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생산 능력에 대한 이전의 ‘야만적 통제형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강화하고 일반화시킨 것이다. 교환가치 생산을 위한 대규모 노예제 혹은 강제노동은 분명한 자본주의 제도이다. 이 제도는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전근대적 단계와연동되어 있다‘(Wallerstein, 1974:88). - P165

요약하자면, 다양한 형태의 불균형하고 서열적인 노동분업은 역사를 거쳐 오늘날 전 세계가 자본축적의 엄명아래 불평등한 하나의 노동분업 시스템으로 구조화된 단계까지 와 있다. 이 불평등한 노동분업은 약탈적인 사냥꾼/전사의 사회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이다. 사냥꾼/전사는 자신은 생산하지 않으면서, 무기를 이용해 다른 생산자의 - P171

생산력과 생산품을 전유하고 종속시킬 수 있는 이들이다.
이런 착취적이고, 쥐어짜내는, 전혀 상호적이지 않은 자연에 대한대상관계는 가장 먼저 남성과 여성, 남성과 자연 사이에서 수립되었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다른 모든 가부장적 생산양식의 모델로 남았다. 자본주의는 이를 가장 정교하고 가장 보편화된 형태로 발전시켰다. 11 이 모델의 특성은 생산과정과 생산품을 통제하는 이들 자신이 생산자가 아니라, 전유자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른바 생산성은 타자-결국은 여성 생산자의 존재와 종속을 전제로 한다. 월러스틴이말한 것처럼, •잔혹하게도, 노동력을 낳는 이들이 식량을 기르는이들을 부양하고, 이들은 다른 원료를 생산하는 이들을 부양하고, 또이들은 공업 생산에 관련된 이들을 부양한다‘(Wallerstein, 1974:86). 여기서 월러스틴이 빼놓은 것은 이들 모두가, 이 과정 전체를 결국은무기를 통해 통제하고 있는 비생산자들을 부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패러다임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비생산자가 다른 이들이 생산한 것을 전유하고 소비(혹은 투자)한다는 사실이다. 사냥꾼-남성은 기본적으로 생산자가 아니라, 기생자이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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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칼럼의 필자는 최규남. 1932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문교부 차관이었고, 새롭게 시작한 대한민국의 학제 개편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총장을 거쳐 문교부 장관이 되어 대한민국의 초기 이공계 교육에 이바지했다. 그의 기록을 찾다가 놀랍게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주요 국가에서 주목받던 1920년대 바로 그 시점에, 우리나라에도 상대성이론이 전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소개된 정도가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순회강연이 열렸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주요 일간지와 잡지 들은 연이어 새로운 과학의 탄생을 지면에 올렸다. 심지어 당시로는 최신 이론이었던 양자역학도 다루었다. 놀랍게도 이미 100년 전의 일이다. - P11

1895년 서울. 서재필의 귀국
한편, 서재필은 조선인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890년대 미국과 유럽은 자전거 대유행의 시대였다. 그는 조선으로 귀국할 때 자신이 타던 자전거를 가져왔다. 서재필이 서울 도심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놀랐고, 윤치호는 그에게 자전거를 배운 뒤 미국에 주문을 했다. 두 사람은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자전거를 탔는데, 나중에 보부상 무리와 대립할 때 그들이 몰고 다니던 자전거가 상대편에게 큰 위협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이 만난 서양 과학 문명은 이렇게 자전거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로 자동차를 최초로 운전한 조선인은 동학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다. - P15

그리고 의대에 진학했다. 1890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은 1892년 컬럼비안대학(현 조지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2등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서양식 의사가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유교 경전을 외던 선비는 이처럼 10년도 지나지 않아 미국에서 서양 과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었다. 1894년 6월 그는 워싱턴 명망가 집안의 딸 뮤리엘과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사촌으로, 철 도우편국장이던 워싱턴의 거물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당시 《워싱턴포스트》에 실릴 만큼 미국에서도 화젯거리였다.
이처럼 갖은 시련 끝에 겨우 미국에 정착한 그가 다시 조선으로 온 것이다. 임신 중이던 뮤리엘은 오직 남편 서재필만 믿고서 대륙을 횡단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지의 땅에 도착했다. - P18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의 주도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다. 서재필이 배재학당 학생이던 주시경을 채용한 덕분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 사설에 한글 사용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드러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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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젠더의 이분법적 접근
몸의 정치
폭력과 강제
일인칭 정치
해방
마리아 로사 달라 코스타
로자 룩셈부르크
과개발과 저개발
독립성

1장 페미니즘이란?

4. 운동에 참여한 각각의 여성은 가부장제 아래서 여성이 기본적으로공유하는 실존적 경험과 다른 여성과는 다른 고유의 실존적 경험을 자신 속에서 통합시켜야 한다. 그래서 특히 여성운동은 어느 곳에서나 긴장도가 높다. 이 긴장은 다른 여성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여성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들인 감정적 에너지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제1세계나 제3세계나 마찬가지이다. 여성운동이 어느 한 당파의 지도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슈, 캠페인, 프로젝트 등을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스스로 조직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 P56

사회과학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비역사적 경향에 따라 인종 차별은 성 차별과 동급에 놓인다. 두 차별은 성과 피부색이라고 하는 태생적 조건에 묶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페미니스트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거부하면서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는 사회적 역사적 뿌리가 있음을 강조했던 것처럼, 인종관계에서도 식민주의와 백인 남성이 흑인 세계에 대해 저지른 자본주의적 악행과 착취의 역사는 거의 망각되고 있다. 대신 서구와 비서구 여성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크게 강조된다. 오늘날 이런 식민 관계는 국제노동분업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이 관계는 백인 페미니스트의 의식에서도 종종 사라지곤 한다. 이 백인 여성의 삶 수준은 상당 부분 온존하고 있는 식민지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백인 세계‘에 사는 흑인 여성도 이를 종종 망각한다. 이들이 ‘흑인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고 해서 이들이 자동적으로 흑인 세계에 사는 이들과 한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Amos &Parmar, 1984 참조). 흑인 여성 역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따라, 식민지와 계급을 따라 구분되기 때문이다. 특히 계급 구분은 성과 인종을 논할 때 자주 망각된다. - P58

필요한 것은 여성의 억압과 착취가 민중에 대한 다른 범주들에서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자연에 대한억압과 착취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새롭게 역사적·이론적으로분석하는 것이다. - P61

신페미니스트운동이 발견한 주요한 것 중 하나는 여성사에 대한 재발견과 재평가이다. ‘여성 문제‘에 대한 분석에서 이 새로운 역사적 접근은 방법론상으로 여성해방의 정치적 목적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모른다면, 이것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 P71

1793년국민공회에서 인간의 권리선언이 낭독되고 있던 때에, 드 구주Olympede Gouges라는 한 여성이 소리를 내어 그녀의 유명한 ‘여성의 권리‘에 대한 17개 조항을 읽었다. 그녀는 여성이 단두대에서 죽을 권리가 있다면, 단상에서 말할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드 구즈는 그 해에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았다. 여성은 혁명의 선봉을 지켰지만, 이후 정치 무대에서는 배제되었다.
또한 1792년에 발행된 울스턴크래프트 Mary Wollstonecraft의 『여성의권리옹호』는 여성을 배제하는 정책을 바꾸지 못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공공 영역과 정치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일어난 19세기의 여성운동은 부르주아 혁명에서 제시된 자유·평등·우애의 보편적 원리와 이런 권리에서 의도적으로 여성을 배제한 것 사이의 모순에서 발화되었다. 따라서 구여성운동의 투쟁은 여성이 이런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 부르주아 남성이독점하고 있는 영역에 접근하도록 하는 것에 주로 관심을 두었다.
19세기 말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을 시작하고 이끌었던 제트킨 Clara Zetkin은 이렇게 ‘여성의 권리‘에 집착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부르주아 페미니즘‘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여성해방전략도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 P73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인간의 성과 섹슈얼리티가 순전히 자연적이고 생물학적 문제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여성의 혹은 남성의 몸이 순전히 생물학적 문제였던 적도 없었다(2장 참조).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역사적이었다. 인간 생리는 모든 역사를 통해 다른 인류와, 그리고 외부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성도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범주이다. - P81

전략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몸의 정치‘는 우리 사회에서 남녀관계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억압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정한 이슈에 대해 서구 사회의 여성 대중이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성장해 나온 것이다. 그 이슈들은 무엇이었는가? - P83

폭력과 강제는 몸의 정치가 유지되는 영역에서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주된 메커니즘으로 보인다. 여성은 자신의 몸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타자의 대상이 되고, ‘점령지‘가 되는 것을 더욱 분명히 보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남성 지배, 혹은 이제부터 많이 사용하게된 용어인 가부장제가 공공정치 영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여성 몸에 대한 통제에, 특히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생식능력에 대한 통제에 기원을 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Millet, 1970). - P85

이 사회에서 자주 찬미되는 ‘평화‘가 사실은 여성에대한 일상적이고 직간접적인 공격에 기초한 것임을 점점 더 많은 여성깨닫기 시작했다. 독일 평화운동에서 페미니스트는 이런 슬로건을 만들었다. ‘가부장제의 평화가 여성에게는 전쟁이다." - P87

페미니스트운동이 정통 좌파의 전통뿐 아니라 구여성운동과도 결별하는 또 다른 지점은 여성의 노동과 관련해서이다. 구여성운동과정통 좌파는 사적인 가사노동 혹은 맑스주의 용어로, 재생산 노동과공공의 생산노동, 혹은 임금노동 사이를 가르는 자본주의적 구분을수용한다. 이들에 따르면, 임금노동 영역만이 여성의 해방, 나아가 혁명까지도 기대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는 이런 노동 구분에 도전할 뿐 아니라, ‘노동‘과 ‘노동이 아닌 것‘에 대한 규정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접근방식은 다른 이분법적 구분처럼, 정치와 경제를 구분하는 통념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이상, ‘사적‘ 영역에서 수행하는 일, 즉 가사노동을 재평가하고 재규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페미니즘이 시작했던 논쟁 중 가장 풍성한 결실을 거둔 것 중 하나는 가사노동에 관한 것이다. - P96

달라 코스타는 자본이 만들어낸 임금노동자와 임금노동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인위적 구분과 서열화를 거부한다.

자본이 사람을 임금노동자로 만들어 복속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은임금노동자와 임금노동자가 아닌 다른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틈을만든다. 임금노동자가 아닌 이들은 사회적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저항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간주된다(Dalla Costa, 1973:33). - P98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에 대한 분석을 위해 맑스의 자본의 확대재생산과정 혹은 자본축적과정에 대한 분석(Marx,
Capital, Vol. II)을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룩셈부르크는 맑스의 자본축적모델은 자본주의가 임금노동자와 자본가만이 존재하는 폐쇄된 체제라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그런 체제는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자본주의는 룩셈부르크의 표현을 빌면, ‘비자본주의적 환경과 조건‘을 항상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노동력과 자원의 확충,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의 확장을 위해서다. 이런 비자본주의적 환경과 조건은 초기에는 자신들의 ‘자연 경제‘를 갖고 있는 농민과 장인이었고, 나중에는 식민지였다. 룩셈부르크에게 식민주의는 단지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Lenin, 1917)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필수조건이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가 없다면자본축적 혹은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멈추게 될 것이다(Luxemburg,
1923:254-367). - P102

우리가 남녀관계를 말할 때 착취를 말하지 않는다면, 억압과 종속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공중에 붕 뜬 것이 될 것이다. 얻는 것이 없다면 왜 남성이 여성에 대해 억압적이겠는가? 착취와 관계되지 않는억압 혹은 종속은, 그렇다면 순전히 문화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된다. 어느 정도는 타고난 남성의 공격적이고 새디스트적 경향 등을 언급하지 않고는, 그 근원을 알아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착취는생물학적 혹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범주이면, 그 기초에 남녀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가부장적 부족과 사회에 의해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달라 코스타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성의 착취에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여성은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서도) 남성에게 착취당한다. 그리고 자본에 의해 가정주부로 착취를 당한다. 만약 여성이 임금노동자라면 [자본에 의해 임금노동자로서도 착취를 당한다. 그러나 이 착취조차도 다른 두 가지의 연결되어 있는 착취 형태에 의해 규정되고, 강화된다. - P107

자칭 페미니스트인 여성 대부분은 이런 전망에 별 관심도다. 평등에 대한 요구가 이 체제 내에서 실현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남성이 걱정하는 것처럼, 페미니스트가 원하는 것은 남성 지배를 여성 지배로 대치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대다수 페미니스트에게 ‘평등‘은 특권의 평등을 의미할뿐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운동은 (남성) 권력 엘리트를 다른 (여성)권력 엘리트로 대체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엘리트도 다른이들을 착취하고 지배하며 살아가지 않는, 서열이 없고, 중앙이 없는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기본적으로 무정부주의운동이다. - P108

‘과개발과 저개발‘은 따라서 본질적으로 착취적인 세계질서의 양 극단이며, 지구적 차원의 자본축적 혹은 세계 시장을 통해 구분되면서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 P113

페미니스트는 독립성 개념을 통해 인간 본성 깊숙이에 있는 주체성을 여성들 속에서 주장하고, 강화하고 재창조하고 싶다. 그런 페미니스트의 열망은 지금도 계속 견지되고 있다. 한편, 자본주의가 마케 - P114

팅 전략들을 통해 원자화된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서, 독립성 개념에내재한 인간적 열망을 곡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 자본주의 상품시장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모든 욕망과 필요를 충족시킬 자유가 있다는 환상이 만들어지면서, 개인의 자유는 이것인지저것인지를 고르는 상품 선택과 같은 것이 되었다. 인간의 자기 활동성과 주체성은 개인적 소비주의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서구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는, 페미니스트의 단결과, 페미니스트의 목적을 성취하는 길에서 중요한 장벽이 되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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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of a Wimpy Kid #1 (Paperback, 미국판) Diary of a Wimpy Kid (윔피키드) 1
제프 키니 지음 / Amulet Books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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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소심하고 비겁한 즉, 평범한 Greg의 속내를 볼 수 있는 재밌는 일기. 쉬운 일상 영어 표현이 많아 영어공부 교재로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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