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과 삶에 대한 자율성
페미니스트의 노동개념
부담으로서의 노동과 즐김으로서의 노동의 결합
몸의 정치

7장 새로운 사회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전망에 대하여

이런 사실을 비롯해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면, 중산층 여성 혹은 가정주부가 된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결론을 충분히 내릴 수 있다.2 - P422

2. 이는 맑스가 생산적 노동자, 고전적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쓴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자본론』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생산적인 노동자가 되는 것은, 따라서, 나쁜 일이아니라 좋은 일이다‘(Das Kapital, vol. I:532, 영어번역은 저자). - P423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행복한 여성‘의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직간접적인 만행을 가리는 커다란 허세가 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비주의는 남녀 모두가 비인간적이고, 점점 파괴되는 생활조건을 수용하게 만드는 마약이라는 점을 많은이들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모델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산업계가 창출한 새로운 수요‘는 모두 중독의 형태를 갖고 있다. 이런 중독을 만족시키는 것은 인류의 행복이나 충족에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인간성의 파멸을 앞당길 뿐이다. - P425

남성-사냥꾼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패러다임이 우리 현실을구성하고 있다. 이 패러다임은 모든 수준에서 이중적이고 서열로 구조화된 구분을 제시한다. 이 구분은 전체의 부분들을 착취적으로 양극화하는 것에 기초해 있다.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다양한 계급들, 다양한 국민들 사이에서 만이 아니라, ‘머리‘와 ‘그 나머지‘와 같은 인체의 다양한 부분 사이에서도 이런 구분이 나타난다. 사고의 수준에서보면, 이런 이분법적 구분은 자연과 문화, 마음과 물질, 진보와 퇴보, 여가와 노동 등 개념에 대한 서열적인 평가와 양극화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식민주의적 구분이라고 부른다. 이 패러다임에 따르면, - P429

총체성은 이런 방식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양자사이에서 세워지는 관계는 역동적이고 서열이 있으며 착취적이다. 여기서 한 쪽은 다른 쪽의 희생을 밟고 전진한다. - P430

이런 어느 정도 추상적인 원리들을 역사적이고 일상적인 실천으로옮겨보려고 하면, 일상을 조직하는 중심에 있는 기초 개념이 이런 원칙을 실현하는 데 있어 커다란 장애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다른 무엇보다 삶을 구성해 온 개념은 노동개념이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에서만연한 노동개념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개념 변화에서부터, 노동, 노동조직, 성별노동분업, 생산품, 노동과 비노동 사이의 관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우리 몸들 사이의 관계가 변화할 수 있다.
통상적인 노동개념을 놓고 보면 자본주의 사회들과 사회주의 사회들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다. 양쪽 모두에서, 노동은 필수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며, 생산력 혹은 기술 발전을 통해 가능한 한 축소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 인간의 행복, 창조적 능력의 실현, 다른 인류와의 친근하고 소외되지 않는 관계, 자연의 만끽, 어린이와 즐기는 놀이 등은 모두 노동의 영역에서 배제되며, 비노동, 즉 여가시간의 영역으로만 분류될 뿐이다. - P433

2. 부담으로서의 노동과 인간적 본성의 표현이자 즐김으로서의 노동을 결합시키는 것과 동떨어져서, 페미니스트의 노동 개념이 맑스주의의(혹은 자본가의) 시간의 경제학에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일일 노동시간, 혹은 인생에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방식일 수는 없다. 여성은 상품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줄이는 것이 좀 더 많은 여성의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깨닫게 되었다. 이는 더 많은 가사노동, 더 많은 비임금노동형태의 가내생산, 더 많은 관계와 감정노동, 더 많은 소비 노동으로 이어졌다. 거의 모든 시간이 여가시간이 되고 노동시간은 최소한으로 줄어든 사회에대한 비전은 여성에게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포의 비전이다. 이는 기계를 통해 축소되는 노동에는 가사노동이나 비임금 노동이 포함된 적이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게으른 남성에게 현실과 의미와 삶의감각을 되찾게 해줘야 하는 사람도 여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 - P443

이러한 노동개념은 금전 소득의 계속되는 성장에 기초한 경제, 고도의 기술발전과 관련된 생산력의 팽창이라는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런 패러다임은 일부 국가의 개발과 여성, 자연, 식민지의 저개발로 이어져왔다. 삶의 생산을 향한 노동 개념은 이틀을 뒤바꾸고 뛰어넘어야 한다. - P447

대안 경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별노동분업이 변화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동안 저개발과 과개발 사회의 페미니스트는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계속 견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들은 자연과 다른 국민에 대한 착취를 끝내지 않는다면 여성에 대한 해방도 없을 것이라는점을 계속 주장해야 한다. 또한, 여성의 해방과 자연파괴를 중지하지않고는 진정한 민족해방도 없을 것이며, 성별노동분업과 국제노동분업에서의 변화 없이는 진정한 생태사회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주장해야 한다. - P455

페미니스트 소비자해방운동은 프랑스 조직에서 만든 슬로건, ‘여기서 더 잘 살면, 저기서 더 배고픔과 싸우게 된다‘에 확실히 찬성할 것이다. - P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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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
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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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하고 암울한 시대임에도 동시대의 유명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그의 상대성이론, 이후 양자역학 등 최신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전파하고자 한 조선의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 과학사라기에는 과학이나 과학자 이야기 외에도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다. 언급된 인물들 각각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고, 분열과 모순으로 가득한 우리 근현대사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는 마음이 들게하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민태기 박사의 <판타레이>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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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에게 몸을 팔고 싶어 하는 여성은 없다는 짐바브웨 15세 소녀.
‘이중 경제’에서의 여성 - 소련, 중국, 베트남 사례

6장 민족해방과 여성해방

제3세계여성은, 민족해방투쟁 혹은 그런 투쟁 이후의 국가건설과정에 관여한 경우, 서구페미니스트의 이런 도덕적 딜레마를 사치스럽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은 그런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일부러 현실에 눈감으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문제를 피할 수가 없다. 지난 해 경찰의 반성매매 검거로 잡힌 짐바브웨 여성처럼, 이것이 그녀의 형제들이 죽어가며 만들어낸 국가인가하는 것을 물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Sunday Mail, Harare, 27 November 1983).3

3 이 여성이 구속되었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치비에서 곡물을 키우며 아버지의 가축을 돌보고 있다. 나는 15세이며, 경찰이든 경찰이 아니든, 나에게 명령할 남성이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나의 어린 두 남동생이 숲속에서 사망하고, 오빠가 엉덩이 아래 오른쪽 다리를 모두 잃어가며 성취한 독립이고 자유인가?
왜 성매매가 있냐고 질문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위원회는 필요없다. 우리 모두 이유를 안다. 교육받지 못한 소녀에게는 일자리가 없다. 그러나 가뭄에 가족을 먹이기 위해서는 식량을 살 돈이 필요하다.
공무원에게 더 지불하는 것은 국가의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것이다. 이 소녀들에게 일자리를 주라. 낯선 이에게 몸을 팔고 싶어 하는 여성은 없다(Patricai A. C. Chamisa, Sunday Mail, Harare, 27 November 1983). - P369

여성해방과 민족해방투쟁, 그리고 이어지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건설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전제의 이론적 기초는 맑스, 그리고 좀더 특별하게는 엥겔스가 놓았다. 그는 여성이 가부장적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 ‘재진입‘하는 것이 꼭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사노동은 비생산적이고 사적인 것으로(2장 참조), 상품생산과 수익 발생 영역을 생산적이고 공적인 것으로 규정한 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엥겔스는 여성이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것과 여성의 경제적, 그리고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지위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유‘ 임금노동자를 역사의 주체로 보았던 것처럼, 여성은 임금노동부대로 들어감으로서만 역사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벨, 제트킨, 그리고 이후 레닌까지 모두 여성해방에 대한 이론을 조금씩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러나 크게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지는 않았다. 혁명적 민족해방투쟁의 지도자들이 맑스 엥겔스, 레닌이 발전시킨 과학적 사회주의를 이론적 전략적 틀에 적용하면서, 그들은 여성해방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혁명적 프로젝트에 통합시켰다. - P371

한 여성 의사가 간파한 것처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모든 이론은 남성이 만들었다. 그 남성은 여성의 생을 구성하고 있는 재생산이라는 무시되어온 영역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Croll, 1979:20). - P378

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반식민지전쟁들을 전개하는 동안 여성이 수행한 영웅적활약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과의 전쟁기간 동안, 농업 노동력의 80%, 공업의 경우 48%가 여성이었다. 여성은 행정, 교육 보건 분야에서도활동했으며, 게릴라전에서 전투원으로도 참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대부분의 남성이 전쟁을 하는 동안 경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1975년의 승리 이후, 모든 경제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는 대단했다. 1979년 통계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는 65%에 달했다. 공업 62.3%, 농업 85%, 국가 교역 63%, 보건 61%, 교육 69%였다(Mai Thu Van, 1983:329; Truong Than Dam, 1984:22에서 인용).
그러나 전쟁 이후, 해방투쟁에서 여성이 갖고 있던 지도적 지위를남성이 차지했다. 유명한 여성들은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여성이 관리직으로 승진하는 문제에 여성의 높은 노동참여율이 반영되지 않았다. 협동조합에서 여성이 대표를 맡는 비율은 1966년 3%에서 1981년5.1% 정도만 증가했다. 대표비율이 더 높았던 부문은 여성 노동자가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수공업 협동조합이었다(Eisen, 1984:248), 베트남 남성은 지도적 지위에 있는 여성을 보면 불쾌하게 여기고, 여성이 사회와 경제에 기여해온 것이 객관적으로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시하거나 조롱했던 것으로 보인다(Eisen, 1984:248~254; White, 1980, Truong Than Dam, 1984). - P392

두 국가 모두, 여성의 가사노동을 ‘여가시간‘으로 보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베트남의 신경제정책들, 즉 가족노동, 사유지, 하청과 수공예품의 생산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여성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경제정책은 여성을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노동자라기보다는 의존적인 가정주부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국가가 사회주의적 축적과정을 위해 적어도 네 다섯 개의 생산관계를 통해 여성 노동력을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 1. 무임금 가사노동, 2. 생산물을 통해 지급되는 시장을 위한 노동, 3. 사유지에서 가족 생존을 위해 하는 무임금 노동, 4. 작업량에 따라 지급받는 계약노동, 5. 정식 임금노동, 베트남 여 - P399

성이 자본의 축적과정 아래 포섭된 것은 가정주부적 포섭, 공식적 포섭, 시장의 포섭, 주변적 포섭, 실제적 포섭 등의 형태를 띠었다고 말할수 있다(Bennholdt-Thomsen, 1979:120~124). - P400

사회주의 국가에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때 놀라운 것은 그것이 시장경제에서 여성의 문제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 P401

따라서 여성,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가 아니라 가정주부로 규정된 여성이 자본주의 발전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발전에서도 최상의 노동력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최상의 노동력인 것이 아니다. 해방이후 정부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해방된 국가들이 직면하게 되는 객관적인 국내외적 조건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새로운정부가 근대적 국민경제를 구축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의 결과이기도하다. 대부분의 새로운 정부들이 따랐던 모델은 산업화된 국가들이다. 마오 치하의 중국의 경우처럼 농업에 우선순위를 둔 경우에도 기본적인 발전 모델은 공업화된 사회의 성장모델에 기초하고 있다. 이 모델에 투하된 자본은 외부로부터, 원조를 통해 들여와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사회의 일정 영역을 착취함으로서 자생적으로 만들어내서, 근대 국가산업의 건설을 도모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일반적으로 착취당하는 계층과 그룹은 여성과 농민이다. 이 발전모델에서 노동에 대한 개념은 자본주의와 동일하다. 공공의 ‘생산적인‘ 노동 영역과 사적이고 ‘비생산적인‘ 혹은 재생산적인 노동 사이의 사회적 분리와 성별노동분업은 폐지될 수 없다. 이런 분리를 통해서만 여성과 농민의 생계와 상품 생산이 계속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노동을 통해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진행되고, 이는 근대적 경제와 국가 건설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여성이 ‘밀려나는 주된 이유이다. - P407

이 과정은 강조점이 민족에서 국가로 이동하는 것에도 반영된다.해방투쟁 동안 전체 민족은 심리적 역사적 동일성으로 표현되던 것에비해, 해방 이후 국가와 그 기관들은 공공선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근대경제를 구축하는 것과 강한국가를 세우는 것이 대개 같은 것이된다. 앞서 언급했던 혁명 포스터에서처럼, 민족에 대한 여성적 이미지가, 이 단계에서는 건국의 아버지 이미지로 대치된다. 몇 명만 꼽아 보면 맑스 엥겔스, 레닌, 스탈리, 마오, 호치민, 카스트로, 무가베 등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회주의적 가부장의 갤러리 속에 여성은 없다. 이들은 정말 사회주의 국민이 아니라, 국가의 아버지들이다. 다른 가부장제와 마찬가지로 국가형성의 전체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을 이상화하는 과정에서 은폐되었다. - P410

11. 이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극동노력자대회(Congress of the Toilers of the FarEast) 조선인 대표 중 한명이었던 김초우(Kim Chow)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김초우는 인도, 아일랜드, 한국의 민중이 모두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 아래 압박받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했다. 그는 영국과 일본의 노동대중은 그런 착취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영국의 노동대중은 자신의 조건이 개선될 것이라 - P415

는 말을 계속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개선을 만들어내는 것은 고역에 시달리는 인도 등식민지의 대중이다.. ·일본의 노동대중도, 더하지는 않다고 해도, 대개 마찬가지이다....... 일본 노동계급은 조선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부류 중 하나이다. 그들은 나란히 옆에서 함께 일을 하더라도, 조선 노동자 형제를 경멸하며 바라본다. 또한 일본노동계급은 제국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일본 정부가 조선노동자를 억압하는 것에 협조하기도 한다(1st Congress of the Toilers of the Far East, Reports, Moscow, 1922). - P416

여성은 사회주의적 축적과정에서도 ‘마지막 식민지‘로 남아 있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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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이 당신 속에 있다. - 존 뮤어 -




당신이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이 당신 속에 있다.
-존 뮤어(John Muir)- - P138

옆으로 걷는다
걸으면서 균형이 잡히지 않았을 때는 허리와 고관절, 무릎관절에 부담이 걸린다. 특히 오르막길에는 대퇴사두근, 내리막길에는 대퇴사두근과 햄스트링에 부하가 걸린다.
특히 등산을 할 때 내리막길에서 균형이 쉽게 무너지고 무릎관절 주위에 부하가 많이 걸린다. 산을 오르면서 다리 근력을 많이 사용해 근력이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근육이 많이 피로할 때의 대처 방법으로는 발을 대각선 방향으로 틀어 약간 옆쪽에 두고 걸어서 내전근과 대퇴사두근중에 바깥쪽에 있는 외측광근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특히 - P143

경사가 급하게 진 곳에서는 옆으로 걸을수록 부하가 줄어든다.

보폭을 좁혀서 걷는다.
보폭을 좁혀서 걷는 방법도 있다. 보폭이 좁으면 상반신이 별로 흔들리지 않아서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다. 균형이 잡히면 다리에 가해지는 부담이 적어져 피로를 적게 느낀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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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해방공간의 꿈

9월 7일,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으로 상륙을 준비하던 미군은 삼팔선 이남에 군정이 실시될 것을 선언했다. 급박해진 정세에 여운형은 미군에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이미 해방과 독립 국가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건준 위주의 정부를 구성하겠다며 8일 새벽, 미군에 그 명단을 전했다. 이 리스트에 함흥의전 교수 황진남이 포함된다. 하지만 9월 20일 조선총독부 건물에 미 군정청이 설치되었다. 이에 다시 여운형은 황진남을 대동하고 10월 4일 미 군정청을 방문한다. - P217

1946년 제주. 좌우 대결과 남북 분단

이처럼 해방공간의 분열과 혼란 속에서도 과학자들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여기에 이념이 만든 시대의 비극을 과학으로 극복하려던 이야기도 있다. 어린 제자들과 동굴을 발견한 제주 김녕초등학교 교사 부종휴는 1947년 2월 24일, 학교 운동장에서 이 동굴의 이름을 ‘만장굴‘로 발표하는 행사를 열었다. 하지만 며칠 뒤 제주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만장굴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다. 제주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민이 여러 명 사망한다. 이를 기점으로 소요 사태가 다수 발생하기 시작해 1948년 4월 3일, 제주 전 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제주 4•3사건이라고 한다.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2018년)은 왜 재일 교포들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일본에 남았는지를 말해준다. 그 배경에는 제주 4•3사건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 일본은 한국전쟁과 냉전을 이용해 고도성장을 하지만, 영화는 그속에서 빈민처럼 살아야 했던 재일 교포들을 보여준다. 일본 연극계의 거장이 된 재일 교포 정의신 감독의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2008년)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마찬가지로 재일 교포 출신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년) 역시 제주 4•3사건이 일본 교포 사회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 P234

1947년 보스턴. 여운형, 황진남, 서재필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뒤 인천항으로 귀국하는 남승룡 코치, 서윤복 선수, 손기정 감독. 우승 직후 여러 사정으로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무려 43일간 미국 여러 곳을 돌며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집집마다 30원씩 걷어 시민 환영회를 열었다. 3년 뒤, 1950년 4월 19일에 열린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는 1등에 함기용, 2등에 송길윤, 3등에 최윤칠이 입상하며 세계 마라톤 대회 사상 최초로 한 국가가 금•은•동을 동시에 수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이는 2007년 케냐 선수들이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석권할 때까지 무려 57년간 깨지지 않은 대기록이다. 하지만 이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우리나라는 비극적인 전쟁에 휩싸인다. - P237

1946년 8월 지하련은 소설 《도정>을 발표했다. 황석영은 이 작품을 해방공간을 그려낸 수작으로 높이 평가했다. 일제 말 문인들이 붓을 꺾을 때, 지하련은 오히려 〈결별〉을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쏟아냈다. 끊임없이 젠더 정체성을 고민하고 세심한 사유와 날카로운 성찰을 담았다. 하지만 지인들은 변절했다. - P238

KOC 초대 위원장 여운형은 7월 19일, 올림픽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에서 테러범의 총탄 을 맞았다. 그토록 꿈꾸던 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사망한 것이다. 전날 여운형은 황진남과 함께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대표 브라운 소장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 전역에 벌어지는 테러 행위에 치안 당국이 손을 놓고 있다며 항의했다. 이제 중간 지대는 용인되지 않았고, 어느 한쪽이든 선택만 강요되었다. 함흥에 가족을 두고 온 황진남은 여운형과 함께 필사적으로 좌우합작에 나섰다. 하지만 우파에게는 빨갱이라며 린치당했고, 좌파는 미제 협조자로 몰았다. 결국 여운형이 암살되며, 좌우합작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후 우리 민족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겪는다. - P243

1950년 부산. 우장춘의 귀국

1950년 겨울, 우장춘이 가족을 만나러 일본으로 향했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소 직원들은 우장춘이 전쟁 중인 한국으로 다시 귀국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돌아와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식량 해결을 위해서는 채소, 특히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 종자 확보가 우선이었다. 종자밭 마련을 위해 1951년, 제주를 방문했다. 이곳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대신 귤 재배를 추진했다. 대체지로 선택된 진도에 1952년부터 배추와 무 종자밭을 가꾸었다. 인민군이 물러간 강원도에는 감자를 키웠다. 그에게 전쟁은 핑곗거리조차 안되었다. - P260

1953년 판문점. 한글 타자기와 우장춘

한국전쟁에서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잡혔던 공병우는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부산으로 피난간 그는 우연히 ‘공병우를 찾는다‘는 광고를 전봇대에서 발견했다. 타자기의 효율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해군 제독 손원일의 지시였다. 작전 문서에 공병우 타자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1914년 이원익 타자기와 1929년 송기주 타자기가 있다. 하지만 둘 다 세로쓰기 기반이었고, 공병우 타자기는 이극로의 영향으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또한 서양 타자기와 달리 받침 구조를 위해 독특한 기계장치를 추가하여 자판 입력 속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미적으로도 아름다운 글꼴이 나오도 록 고안했다. 손원일 제독 이후, 공병우 타자기를 공문서에 광범위하게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로쓰기가 보편화되었고, 한자 입력은 되지 않는 타자기 특성상 공문서의 국한문 혼용이 한글 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 - P271

8월 7일, 정부로부터 우장춘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오후 병실을 방문한 농림부 장관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 수상자였다. 병상의 우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일 뒤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열렸다. 아버지 우범선의 묘는 일본에 있지만, 그의 묘지는 수원으로 정해졌다. 약속대로 한국에 뼈를 묻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한국에 왔을 때 전쟁이 벌어졌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왜 이토록 한국의 식량 문제 해결에 몰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수사보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이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 P275

전쟁이 끝나고. 구체제의 종말

황진남 선생은 20년 가까운 세월 내가 쓴 원고를 번역해주시던 분이었다. 아들 같은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셨다. 나를 옆에 앉혀놓고 ‘헤네시‘나 ‘나폴레옹‘ 같은 독한 술을 브랜디 글라스에 듬뿍 마시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취해도 그때까지 프랑스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부인에 관해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분이 어느 날 아침 혼자 사는 숙사 침대 위에 누운 채 숨을 거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_위진록. <고향이 어디십니까)>, 모노폴리, 2013년(298~299쪽 발췌)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을 소개한 황진남의 마지막 모습이다. 함흥에서 태어나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대학에 다니다 3•1 운동에 감격해 대학을 자퇴하고, 안창호를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그리고 베를린 대학과 파리 소르본대학 유학 후 귀국하여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항일운동가 황진남은 한국전쟁 때문에 일본으로 갔고 결국 1970년 오키나와에서 사망했다.
20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황진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하지만 아직 가족이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훈장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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