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왜 바흐를 좋아할까?
차윤정 지음 / 지오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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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방향의 책은 아니었다.
먼저 읽은 <식물의 역사>와는 전문성 면에서 상당히 떨어지고 식물을 주제로 한 일종의 인문 에세이 같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많이 들었다.
저자의 어설픈 사회 비판이나 감수성에 동조하기가 힘들었다.
식물의 생활사에 인간상을 대입하는 것은, 흥미를 유발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관점으로 자연을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거부감이 들었던 문장은, 출산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통분만 등을 시도하는 것을 두고 엄마로서 자격이 있네 없네 따지는 부분이었다.
아마도 저자는 본인이 두 명의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에 더 당당하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역시 임산부인 나로서는 극한의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여성이 겪는 출산의 신비로움과 가치가 훼손되는 것도 아니고, 무통분만이라는 시술이 말처럼  통증을 완전히 없애 주는 것도 아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에이즈가 동성애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일부 보수주의자의 주장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하여튼 저자의 감수성과 생각에 쉽게 젖어들지가 않아 처음에는 읽는데 힘들었으나 뒤로 갈수록 예쁜 꽃 사진과 식물의 다양한 생활상을 읽으면서 그런대로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식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특별히 예쁘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장미 정도나 이름을 알까, 구분할 수 있는 식물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안면도에서 열린 꽃박람회를 다녀온 후 식물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온갖 자태를 뽐내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원예작물들을 보면서,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완전히 빠져 들었다.
그 뒤로 식물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됐고 기회가 되면 직접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화분을 가꾸고 수목원에 가고 식물도감을 보는지 알 것 같다.
그저 들꽃이라고만 불리는 야생화들도 정말 아름답다.
이런 꽃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수분시켜 줄 새와 곤충들을 유혹하기 위해 존재한다.
새는 그렇다 쳐도 곤충이 시각적 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보통 새는 붉은색에 민감하기 때문에 조매화는 붉은 계열의 꽃을 피우고, 곤충은 푸른색에 반응하므로 충매화는 푸른 계열의 꽃을 피운다.
향기로운 냄새도 다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서인데, 파리가 매개하는 일부 꽃은 역한 냄새가 난다고 한다.
열매도 종자를 퍼뜨려 번식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다.
특히 새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게 탐스럽고 맛있는 과육을 만들어 내는 덕에 인간이 달고 맛좋은 과일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나무의 생활사 중 가장 신기하는 것은 수십 미터의 높이까지 지하의 물을 펌핑해 올라가는 시스템이다.
햇빛을 독차지 하기 위해 나무는 끝없이 몸을 위로 뻗는데 이 엄청난 몸통을 유지하려면 뿌리도 그만큼 지표면에 넓고 안정적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동력도 없이 어떻게 중력을 거스르고 그 엄청난 높이까지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랍다.
식물에는 동물에 없는 세포벽이라는 게 있는데, 세포가 죽고 나면 세포막과 벽 사이가 목질 섬유로 채워져 나무의 줄기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키 큰 나무들의 대부분은 실은 죽은 세포인 셈이다.
실제 세포분열을 하는 층은 매우 얇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바나나 나무나 야자 나무 같은 경우는 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풀에 가까운데, 그 까닭은 이들의 줄기가 목질섬유로 채워지지 않고 잎자루로 몸통을 감싸는 풀과 같다는 것이다.
억새풀 같은 경우 잎자루로 줄기를 감싸기 때문에 바람에 잘 흔들리고 안은 텅 비어있다. 

식물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니 무척 재밌다.
식물도감을 한 번 볼 생각이다.
이제 밖에 나가면 한 번쯤은 저 식물의 이름이 뭘까 생각해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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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식물의 자연사
로빈 C. 모란 지음, 김태영 옮김, 이상태 감수 / 지오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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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디서 봤을까?
서점 신간 코너에서 봤나, 아니면 신문의 북섹션에서 봤나?
식물 쪽은 별 관심이 없고 더군다나 예쁜 꽃이 피는 종자식물도 아니고 볼품없는 양치식물이라니, 어떻게 해서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모르겠다.
책 디자인은 무척 예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이 정말 쉽다!
서문에 밝힌대로 생물학 수업을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정말 평이하고 흥미롭게 쓰여졌다.
나물로 무쳐 먹는 고사리가 이렇게 매혹적인 생명체였는지 누가 알았겠는가.
예전에 읽었던 고생대의 귀여운 지배자 삼엽충에 대해 매력을 느낀 것처럼 독서를 통해 주변에 있는 생명체에 또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
책이야 말로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천이다. 

양치식물은 종자식물과는 달리 씨앗이 없고 대신 포자로 번식한다.
암술과 수술이 만나 배아를 이루는 종자식물은, 이들을 매개하는 곤충 같은 생명체가 필요하므로 번식 조건이 까다롭지만, 양치식물은 잎 뒷면에서 만들어진 포자가 바람만 있으면 멀리 이동해 발아할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 각지에, 특히 섬처럼 고립된 곳에 많이 퍼져 있다.
오히려 고립된 지역에서는 다양한 종이 살기 어렵기 때문에 키 큰 식물들이 햇빛을 막지 않아 고사리류처럼 땅에 붙어 자라는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된다.
포자가 자라나 종자식물의 암술과 수술 같은 경란기와 장정기의 배우자체 세대가 된다.
이들이 수정을 하면 뿌리와 줄기와 잎이 있는 접합자로 자라나게 되고 성체가 되는 과정이 바로 포자체 세대다.
다시 이들은 포자를 만들어 번식한다.
포자에서 배우자체로 자라는 것은 유성세대, 포자로 발아하는 것은 무성세대니 두 세대가 번갈아 가면서 번식하는 특이한 생활양식을 보인다.
무성생식은 일종의 영양생식인데 마치 접붙이기를 하는 것처럼 줄기나 뿌리에서 싹이 자라나 커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클론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집을 이루는 지의류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염색체가 1N이면 상동 염색체가 없어 열성 유전자도 다 발현이 된다.
이렇게 되면 자연 돌연변이 과정에서 생긴 나쁜 유전자가 계속 다음 세대에 축적하게 된다.
반면 2N의 염색체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대립인자가 있기 때문에 열성은 발현을 안 한다.
그러므로 2N의 염색체 구조가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재밌는 게 염색체 수가 서로 다른 것끼리 교배가 되는 잡종의 경우, 딸세포에게 똑같이 분배가 안 되므로 불임이 되기 마련인데 감수분열을 하는 대신 이 불임잡종들끼리 염색체 배가가 이루어져 두 배의 염색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감수분열 때 둘로 똑같이 나눠질 수 있기 때문에 생식이 가능해진다.
대신 염색체 수는 두 배로 커질 것이다.
식물에서 보이는 독특한 생식 방법 같다. 

석탄의 원료가 되는 인목의 존재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됐다.
고생대의 석탄기는 양치식물의 천국이라 인목이라는 종류가 수 십 미터까지 자랄 수 있었는데, 페름기로 넘어 오면서 기후가 건조해져 이들이 멸종하게 되고 이 유해가 바로 오늘날 연료로 이용되는 석탄이라고 한다.
영국 박물관에 가 보면 인목 문양으로 장식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 외에 식물양, 즉 식물에서 양이 자란다고 알려진 중세의 전설이 사실은 목화를 착각했다는 것, 나무고사리로 조각품을 만든다는 것, 열대 지방에 종이 다양한 이유, 티아민 분해효소 때문에 희석시키지 않으면 각기병에 걸려 죽게 되는 날두라는 호주 원주민들의 먹거리, 그늘에서 살아남기 위해 채광성을 띄는 고사리, 천적이 없어 순식간에 호수를 뒤덮어 버린 생이가래 등등 흥미로운 주제들이 정말 많았다.
중생대의 백악기 하면 공룡이 멸종한 시기로만 생각하지만, 소행성의 충돌 이후 햇빛이 차단되면서 사실은 70%에 달하는 엄청난 생물들이 멸종했고 이 시기를 견뎌낸 후 신생대 3기 때 폭발적으로 증가한 종류가 바로 고사리라고 한다.
바람을 이용해 포자로 번식하고 햇빛이 적어도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전략을 가졌기 때문에 제일 먼저 번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를 고사리류 스파이크라 부른다고 한다.
고사리는 어디서나 식용으로 사용되는 줄 알았는데 한국이나 일본, 중국 등지에서만 먹는다고 한다.
약간 쌉싸름한 이유도 타닌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고 천적인 곤충류를 막기 위해 독성분이 있어서인데 끓이면 대부분 없어지지만 발암 물질로도 연구되고 있다고 하니 주의가 필요하긴 하다. 

전혀 관심이 없던 분야인데 책을 읽으면서 식물에도 많은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책의 날개에 소개된 여러 식물 관련 책들을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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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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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 전에도 비슷한 논조의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나는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명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기 때문에 환경을 빌미로 3세계의 공업화를 막는 것은 절대 반대다.
어쩌면 저자의 말대로 일정 수준의 경제력에 도달해야 비로소 환경 보호를 시작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 기아 문제는 좀 더 많은 기부를 하고 NGO 들이 노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서 해방되는 분명한 가시적 성과가 있기 때문에 지지하지만, 내가 지구 온난화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이 책에 나온대로 정말로 화석연료의 사용이 기후 변동을 일으켜 해안선을 상승시키고 빙하를 녹게 하며 야생 동물을 멸종시키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논쟁할 만한 근거를 완벽하게 갖추진 못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환경 보호라는 명분 때문에 3세계의 산업 발전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거야 말로 정말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닐까 싶다.
유기농법을 쓰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줄어들고 60억이나 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더 많은 개간지가 필요하다.
개간지의 확충은 야생 동물의 터전을 뺏고 삼림을 계속 줄인다.
살충제와 화학비료, 관개농법, 심지어 유전자 변형 작물들이 전 세계의 기아를 해결해 왔음은 너무 당연한 일인데 특정 명분을 위해 명백한 이득을 별 거 아닌 것으로, 혹은 잃어버린 것을 지나치게 확대시켜 과장하는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농약 안 친 유기농이 훨씬 비싸고 (정말 유기농인지 어디까지를 유기농법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호하지만) 부자들만 사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 봐도 일부 환경보호론자들의 극단적인 주장은 회의적인 눈으로 봐야 한다. 

저자의 주장은 간단하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이산화탄소의 배출은 기후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현재의 지구 온난화는 대략 1500년의 주기를 가지고 변하는 자연적인 기온 상승이며, 더 중요한 것은 지구가 따뜻해지면 한랭기 보다 생물이 번성하기가 더 낫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얼어 죽는 사람이 더워 죽는 사람보다 많다는 얘기다.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식물들의 광합성도 훨씬 쉬워지고 농작물의 생육 가능 위도도 올라간다.
생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의 범위도 커진다.
가뭄은 비단 온난기에만 오는 게 아니라 한랭기 때도 잦으며 오히려 소빙하기 때 날씨가 추워지면서 강수량이 부족해 가뭄으로 대흉년이 왔고 추워서 집단으로 모여 있다 보면 페스트 같은 전염병도 창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로마나 고대 중국의 번영은 1500년 전의 온난화 덕택이고, 중세 온난화 이후 소빙하기 때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고 마야인들도 도시를 버리고 정글로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미국이 교토 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온실효과 이론의 헛점 때문임을 이해하겠다.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기후 변화는 태양의 흑점 변화 등에 좌우된다.
많이 비치면 기온이 올라가고 적게 비치면 우주 광선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막이 줄어들기 때문에 구름층 형성이 많아져 기온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날씨 변화를 아직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 걸 보면, 미래의 기후가 어떻게 바뀔지를 너무 앞서서 내다보는 것도 크게 신뢰가 안 가기는 한다.
저자는 기후 변화 모델 자체가 엄청난 변수들을 다 수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환경론자들은 이산화탄소 배출 때문에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자고 하지만 정작 이산화탄소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또 반대한다.
풍력이나 태양력 같은 대체 에너지는 효율성이 너무 떨어지고 엄청난 돈이 들 뿐더러 현대의 편리한 생활을 유지할 만큼 충분한 에너지를 생산해 내지도 못한다.
저자의 직접적인 표현대로 지구 보호를 위해 이틀에 한 번씩만 차를 타자고 하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참할 수 있을 것인가?
과소비를 줄이는 것과 기술 발전으로 인한 편리한 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
또 환경 보호를 위해 유해한 배기가스 등을 줄이는 것과 화석연료 사용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저자는 온실가스 이론 때문에 기후학자들이 엄청난 연구 기금을 타내고 있고 해양학자들은 반대로 온난화로 인해 해류 변동이 생기면 급격한 한랭화가 올 것이니 대비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고 지적한다.
환경단체와 언론 역시 이 명분을 위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발언권을 높이고 많은 자금을 운영한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에서 읽은 바대로 자선단체들은 성과를 명백하게 보여 줘야 한다.
환경단체 역시 가시적인 성과를 시민들 앞에 보여 줘야 하고 제약을 가했을 경우 반대로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볼 수 있는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막연한 공포를 조장해서는 안 되고 정말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토론을 거쳐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냉정하게 따져서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100% 다 좋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환경단체들은 전문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좀 더 귀기울여야 하고, 확실치 않은 미래의 일에 지나치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야 한다.
정말 지구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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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 그 위대한 도전의 역사 - 노벨 생리.의학상으로 보는 질병과 의학의 투쟁사 메디컬 사이언스 4
예병일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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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내용이 너무 평이하다.
약간의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이런 과학 서적은 국내 필자의 책보다 번역책의 수준이 훨씬 높다.
당장 의학의 역사만 해도 캐나다 사람이 집필한 <의학의 역사>가 훨씬 낫다.
검증된 책만 번역이 되기 때문일까?
무시무시한 표지나 위압감을 주는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무척 평이하고, 의학적인 사실 외에 저자가 문제제기를 하거나 논평한 부분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볍게 화두를 던지는 정도지 책으로 엮기에는 수준이 너무 낮다.
국내에서는 드물게 의학사를 연구하는 분이라고 하는데 전문적인 필력을 갖기에는 아직은 내공이 더 많이 쌓여야 할 것 같다. 

부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 책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노벨상의 교양을 읽는다>라는 책에서 보면 부적절하게 수여되서 상의 권위를 깍아먹는 경우가 많이 등장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적어도 생리의학상 부분에서는 의학 발전에 공헌한 이들에게 적절하게 수여되어 훌륭한 촉매제가 됐던 것 같다.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볼 생각이다.
어떤 업적이 몇 년도에 노벨상을 받았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서 현대 의학에 획을 그은 훌륭한 발견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런 과학적 발견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세계적인 과학자들은 범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머리를 가진 천재들이자 놀랄 만큼 창의적이고 성실한 사람들 같다.
교과서에 나올 정도의,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정립한 왓슨이나 크릭 등의 업적을 접할 때면 그저 감탄하는 수 밖에 없다.
이들이 발견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있는 나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그들이 밝히고자 했던 진리보다도 누가 스승보다 먼저 상읕 탔다더라, 누구는 운이 좋아서 발견을 했다더라 같은 가쉽거리가 흥미로우니, 약간의 자괴감마저 든다.
정말 세상은 평범한 이들이 그럭저럭 꾸려 가고 있지만 혁신과 창조, 진보는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 이끌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교과서에서 무조건 암기하던 다양한 질병과 근본원리들이 일화들과 더불어 쉽게 설명돼서 신선하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이를테면 말라리아가 이탈리아어로 나쁜 공기라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되면 병에 대해 더 친근감을 갖고 접할 수 있다.
과거에는 공기에 의해 감염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미생물의 발견은 19세기 파스퇴르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니 당연한 발상이다.
지금도 완치는 어렵고 열대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인 만큼 약이 발견되기 전에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학질로 알려졌다는 걸 보면 과거에도 풍토병처럼 있었던 모양이다.
뉴스후 같은 프로그램에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모기장이 없어 말라리아에 걸리고 또 치료제가 없어서 죽어간다는 슬픈 소식을 자주 접하는데 이렇게 질환의 생활사와 치료약이 나왔는데도 돈이 없어 죽어 간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깝다.
천연두나 홍역 같은 바이러스 질환들은 예방접종으로 유아기 사망률을 극적으로 낮출 수 있게 됐다.
결핵 예방접종을 왜 BCG 라고 하는 줄도 알게 됐다. 
발견자 두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같은 예로 나병도 환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 위해 균을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 부른다고 한다.
교과서가 아닌 인문학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잔잔한 재미들이다. 

뒷부분은 생명 복제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이미 인간 유전자를 박테리아 등에 삽입하여 인슐린을 만들어 내는 만큼 실제 환자들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는데도 무조건 윤리적인 측면에서 거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시험관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신에 대한 도전 운운하면서 시끄러웠지만 지금은 불임 부부에게 희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아직은 생명복제 기술이 완벽한 개체를 만들어 낼 만큼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고 당연히 윤리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유전병이나 불치병에 걸린 불행한 환자들을 생각한다면 배아 세포나 줄기 세포에 대한 연구는 더 개방적인 쪽으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팔이 잘라지면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내서 팔만 이식하는 식의 공상과학적인 얘기는 현재 기술로는 황당무계한 일이니 지나친 경계는 기술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하여튼 유전 기술은 과거에 비하면 깜짝 놀랄 만큼 극적인 발전을 계속 하고 있어서 생명에 대한 이 놀라운 신비가 과연 얼마나 밝혀지게 될지 흥미진진 하다.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 차이가 겨우 1.3% 에 불과하다던가, 인간 유전자 일부를 선충 유전자에 삽입하여 세포 분열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등의 이야기를 보면 결국 생명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는 동일하고 인간이 모든 자연계의 최고 지배자가 아니라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 자체가 하나의 형제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도킨스의 말대로 우리가 선충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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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 우리의 두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외 지음, 신상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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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요즘의 화제는 두뇌인 것 같다.
쏟아져 나오는 심리학 책들도 결론적으로는 인간의 의식 상태를 인문학적으로 탐구한 것이고 신경학이나 뇌과학에 관한 책도 많이 나온다.
21세기의 화두가 아닐까 싶다.
오스트리아 출신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에릭 켄델의 자서전에서 라마찬드란이 언급된 걸 보고 이 책을 고르게 됐다.
기억이라는 이 놀라운 정신 활동이 추상적인 연역이 아닌, 세포 수준에서 완벽하게 설명되어짐을 보고 무척 흥분했고 인간의 두뇌로 그 관심이 확장되어 관련 서적을 읽어 보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저자는 임상의인 만큼 올리버 색스처럼 특별한 사례를 들어 전체를 설명하려고 하지, 켄델처럼 환원주의적으로 전체를 일관하는 일반론을 제시하지 못한다.
아마 두뇌 연구는 타 분야에 비하면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 켄델의 기억 연구처럼 모든 기능을 섬세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사례들로부터 일반론을 조심스럽게 추론하는 수준이라 가설이 많고 이 책 역시 사유실험이 많으며 저자 개인의 의견이 많이 담겨져 있다.
켄델의 책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학구적이고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객관적인 서술 위주였던 데 비해 이 책은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나 현재까지의 성과에 대해 저자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지루한 부분도 있었고 의문스러운 부분도 많지만 뇌과학이 좀 더 발달한다면 내가 70대 노인이 될 때 쯤이면 두뇌의 여러 작용들, 특히 의식마저도 세포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정말 그 때에도 여전히 우리는 육체와 분리된 인간만의 특별한 비물질적 실체 영혼을 믿으며 죽고 나면 그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 영원한 삶을 산다는 허구적인 교리를 믿고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종교적 심성은 측두엽에 배선된 일종의 본능이기 때문에 종교가 없어질 날은 아마 오지 않겠으나 두뇌 과학이 지금보다 더 많이 진보한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절대자와 피조물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까?
과학에 대해 알면 알수록, 특히 이런 신경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기독교적인 설명 체계는 너무나 편협하고 지엽적이며 진부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 능력과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힘을 얻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반발 때문에 더더욱 과학과 배치되는 교리에 대해 거부감을 깊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지만.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를 읽고 나서 대뇌에 표상된 신체 이미지가 영원 불변하지 않고 변화가 생기면 48시간 내에 급격하게 수정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므로 요즘에는 부러진 다리를 즉시 수술하고 최대한 빨리 운동을 시킨다고 한다.
고정된 상태로 시간이 오래 되면 대뇌는 금방 다리에 대한 생각을 잊어 버리고 없는 걸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다리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다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환상 사지통이라는 게 있다.
워낙 신기한 현상이라 다른 책에서도 많이 언급이 됐었다.
솔직히 내 주변에서 접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실재적인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분명히 사지가 절단됐는데도 여전히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저자는 이것을 단순히 절단 부위 근처에 신경종 등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환상사지통을 없애기 위해서 계속 그 위로 절단을 해 가야 할 것이다) 뇌의 배선 시스템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아다시피 뇌에는 신체의 여러 부분이 배선되어 있다.
입과 손, 특히 엄지는 크게, 발과 몸통 등은 작게 할당된 우스꽝스러운 머리 지도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팔이 잘리면 팔을 담당하던 영역은 기능을 못하니까 주변에 있던 얼굴 영역이 침범한다.
그래서 얼굴을 자극하면 팔이 아프게 된다는 이론이다.
저자는 실제 환자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얼굴의 특정 부위에 환자의 잘려진 손가락들이 배선되어 턱을 만지면 둘째 손가락이 아프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재밌는 것은 이들의 팔다리가 멀쩡한 상태에서 갑자기 잘려 나가는 게 아니라 서서히 고통을 겪다가 마지막에 절단을 하기 때문에 절단 직전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고 한다.
저자는 가짜 손을 이용해 환자의 환지통을 없애 줬는데 일반적인 치료법은 아닌 것 같고 여전히 설명을 요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애착의 감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내 머리에서 저 사람이 나와 같다고 인지를 하면 즉 머리의 배선 시스템이 바뀌면 그의 고통이 실제로 내 고통처럼 느껴질만큼 신체가 반응한다.
허수아비 인형을 찌르는데 내가 통증을 느끼는 것도 다 이런 애착, 사랑 등의 감정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고대의 이런 저주들은 무슨 신령한 기운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그 인형이 나와 같다는 것을 내가 눈으로 봐고 인지를 해야 바늘이 인형을 찌르면 내가 통증을 느낄 것이다.
만약 내가 저주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즉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장희빈처럼 몰래 한다면 당사자에게 아무 영향도 못 미치지 않겠는가.
내가 눈으로 보고 저 대상물이 나라고 머리에서 인식을 해야 감정도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저주는 뇌 시스템과는 좀 다른 맥락이다.
심신 치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고전적 조건화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카린과 cyclophosphamide를 동시에 먹은 쥐는 부작용으로 구토를 한다.
쥐는 둘을 연관시켜 다음에는 사카린만 줘도 구토할까 봐 거부한다.
그런데 이 cyclophosphamide는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감염을 잘 일으킨다.
사카린만 먹어도 이미 머리 속 회로에 입력이 되어 있는 쥐의 면역 시스템은 기능이 저하되어 쉽게 감염된다.
사카린은 전혀 신체에 무해한데도 단지 기존의 경험 때문에 면역 시스템이 스스로 손상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설명하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신에 의지한다거나 하면 즉 심리치료를 하면 면역력이 상승되어 병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논리대로 한다면 환자는 기존에 심리적 의존물과 면역 체계에 대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조건화가 일어날 것이다.
또 무엇보다 단지 마음을 편하게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악성 종양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정말 이것이 그 효과를 인정받으려면 수많은 다른 환자들에게서도 똑같은 치유력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저자도 강조한 바지만 근본적으로는 심신치료가 약리작용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도나 민간요법, 무슨 기 치료니 이런 것들이 보편성을 획득하려면 지금처럼 개인적인 체험담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엄격한 실험을 거쳐 그 객관성을 증명해야 할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섬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체계가 정립되야 할 것이다. 

역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의식이었다.
나는 늘 죽음이 두렵고 죽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가 큰 고민거리였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그렇다면 잠자는 것은?
잘 때도 생각을 못하지 않는가.
혼수 상태에 빠진 사람은?
의식이 없는데 즉 나를 스스로 인지할 수 없는데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죽은 후처럼 존재하지 않았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죽음도 전생처럼 그저 의식이 사라지고 나면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그런 無의 상태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의식은 두뇌의 고급스런 작용 중 하나이고 생명이 다하면 즉 내 몸의 생명 활동이 멈추게 되면 마찬가지로 뇌의 기능도 정지되므로 의식 작용도 사라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워낙 근본적인 문제이므로 앞으로 더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하여튼 지금까지는 내가 나라는 인식을 가지려면 (그것이 곧 의식인데) 저자의 말대로 세 가지 조선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입력의 비가역성.
저자는 이 책에서 누누히 두뇌의 인지 기능이 절대적이고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매우 가변적이고 수많은 정보를 통합해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고 설명했다.
즉 내가 책을 보는 것도 단지 글씨가 내 머릿속에 투영되어 카메라처럼 인식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감각 정보들을 수용해 무려 30여 가지의 시각 영역들을 통과한 후 하나의 글씨로 인식하고 보게 된다.
이 때 한 번 인식이 되면 글씨가 될 수도 있고 지렁이가 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계속 글씨로 확실하게 인식을 하여 개체의 삶에 안정성을 기한다.
둘째 출력의 유연성.
이것은 일종의 자유의지와도 같은데 나는 자동 기계가 아니라 정보를 입수하여 판단한 후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저자는 그 반증으로 벌의 8자춤을 든다.
벌은 먹이 있는 곳을 알려 주기 위해 8자 춤을 추면서 이동하는데 벌에게 다른 선택을 할 능력이 없다.
오직 벌은 단 한가지 행동, 8자 춤만 출 수 있다.
벌의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을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역시 무언가가 몸에 닿으면 일단 잎을 닫아 버린다.
끈끈기주걱은 닫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생존 본능에 의한 여러 생명체들의 행위는 의식 활동이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단기 기억이 가능해야 한다.
어쩌면 기억이야 말로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일텐데 기억이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 정체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신경병 환자들의 예는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인격의 황폐화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의식이란 혹은 자아란 수많은 정보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된 통합체를 만들려는 고도의 두뇌 기능이라 정의하겠고 육체가 죽는다면 마찬가지로 의식 기능도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아직까지는 창조주나 절대자에 대해 단정을 내릴 수 없으나 적어도 인간이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이고 육체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기능을 갖는 비물질적인 영혼이 있으며 그것이 구원을 얻어 영생을 산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변적인 얘기들이 많아 지루할 때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재밌게 읽었고 두뇌 과학이 좀 더 발전해 이 신비스러운 영역이 많이 알려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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