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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 우리의 두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외 지음, 신상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요즘의 화제는 두뇌인 것 같다.
쏟아져 나오는 심리학 책들도 결론적으로는 인간의 의식 상태를 인문학적으로 탐구한 것이고 신경학이나 뇌과학에 관한 책도 많이 나온다.
21세기의 화두가 아닐까 싶다.
오스트리아 출신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에릭 켄델의 자서전에서 라마찬드란이 언급된 걸 보고 이 책을 고르게 됐다.
기억이라는 이 놀라운 정신 활동이 추상적인 연역이 아닌, 세포 수준에서 완벽하게 설명되어짐을 보고 무척 흥분했고 인간의 두뇌로 그 관심이 확장되어 관련 서적을 읽어 보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저자는 임상의인 만큼 올리버 색스처럼 특별한 사례를 들어 전체를 설명하려고 하지, 켄델처럼 환원주의적으로 전체를 일관하는 일반론을 제시하지 못한다.
아마 두뇌 연구는 타 분야에 비하면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 켄델의 기억 연구처럼 모든 기능을 섬세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사례들로부터 일반론을 조심스럽게 추론하는 수준이라 가설이 많고 이 책 역시 사유실험이 많으며 저자 개인의 의견이 많이 담겨져 있다.
켄델의 책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학구적이고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객관적인 서술 위주였던 데 비해 이 책은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나 현재까지의 성과에 대해 저자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지루한 부분도 있었고 의문스러운 부분도 많지만 뇌과학이 좀 더 발달한다면 내가 70대 노인이 될 때 쯤이면 두뇌의 여러 작용들, 특히 의식마저도 세포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정말 그 때에도 여전히 우리는 육체와 분리된 인간만의 특별한 비물질적 실체 영혼을 믿으며 죽고 나면 그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 영원한 삶을 산다는 허구적인 교리를 믿고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종교적 심성은 측두엽에 배선된 일종의 본능이기 때문에 종교가 없어질 날은 아마 오지 않겠으나 두뇌 과학이 지금보다 더 많이 진보한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절대자와 피조물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까?
과학에 대해 알면 알수록, 특히 이런 신경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기독교적인 설명 체계는 너무나 편협하고 지엽적이며 진부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 능력과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힘을 얻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반발 때문에 더더욱 과학과 배치되는 교리에 대해 거부감을 깊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지만.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를 읽고 나서 대뇌에 표상된 신체 이미지가 영원 불변하지 않고 변화가 생기면 48시간 내에 급격하게 수정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므로 요즘에는 부러진 다리를 즉시 수술하고 최대한 빨리 운동을 시킨다고 한다.
고정된 상태로 시간이 오래 되면 대뇌는 금방 다리에 대한 생각을 잊어 버리고 없는 걸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다리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다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환상 사지통이라는 게 있다.
워낙 신기한 현상이라 다른 책에서도 많이 언급이 됐었다.
솔직히 내 주변에서 접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실재적인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분명히 사지가 절단됐는데도 여전히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저자는 이것을 단순히 절단 부위 근처에 신경종 등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환상사지통을 없애기 위해서 계속 그 위로 절단을 해 가야 할 것이다) 뇌의 배선 시스템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아다시피 뇌에는 신체의 여러 부분이 배선되어 있다.
입과 손, 특히 엄지는 크게, 발과 몸통 등은 작게 할당된 우스꽝스러운 머리 지도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팔이 잘리면 팔을 담당하던 영역은 기능을 못하니까 주변에 있던 얼굴 영역이 침범한다.
그래서 얼굴을 자극하면 팔이 아프게 된다는 이론이다.
저자는 실제 환자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얼굴의 특정 부위에 환자의 잘려진 손가락들이 배선되어 턱을 만지면 둘째 손가락이 아프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재밌는 것은 이들의 팔다리가 멀쩡한 상태에서 갑자기 잘려 나가는 게 아니라 서서히 고통을 겪다가 마지막에 절단을 하기 때문에 절단 직전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고 한다.
저자는 가짜 손을 이용해 환자의 환지통을 없애 줬는데 일반적인 치료법은 아닌 것 같고 여전히 설명을 요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애착의 감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내 머리에서 저 사람이 나와 같다고 인지를 하면 즉 머리의 배선 시스템이 바뀌면 그의 고통이 실제로 내 고통처럼 느껴질만큼 신체가 반응한다.
허수아비 인형을 찌르는데 내가 통증을 느끼는 것도 다 이런 애착, 사랑 등의 감정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고대의 이런 저주들은 무슨 신령한 기운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그 인형이 나와 같다는 것을 내가 눈으로 봐고 인지를 해야 바늘이 인형을 찌르면 내가 통증을 느낄 것이다.
만약 내가 저주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즉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장희빈처럼 몰래 한다면 당사자에게 아무 영향도 못 미치지 않겠는가.
내가 눈으로 보고 저 대상물이 나라고 머리에서 인식을 해야 감정도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저주는 뇌 시스템과는 좀 다른 맥락이다.
심신 치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고전적 조건화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카린과 cyclophosphamide를 동시에 먹은 쥐는 부작용으로 구토를 한다.
쥐는 둘을 연관시켜 다음에는 사카린만 줘도 구토할까 봐 거부한다.
그런데 이 cyclophosphamide는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감염을 잘 일으킨다.
사카린만 먹어도 이미 머리 속 회로에 입력이 되어 있는 쥐의 면역 시스템은 기능이 저하되어 쉽게 감염된다.
사카린은 전혀 신체에 무해한데도 단지 기존의 경험 때문에 면역 시스템이 스스로 손상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설명하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신에 의지한다거나 하면 즉 심리치료를 하면 면역력이 상승되어 병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논리대로 한다면 환자는 기존에 심리적 의존물과 면역 체계에 대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조건화가 일어날 것이다.
또 무엇보다 단지 마음을 편하게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악성 종양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정말 이것이 그 효과를 인정받으려면 수많은 다른 환자들에게서도 똑같은 치유력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저자도 강조한 바지만 근본적으로는 심신치료가 약리작용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도나 민간요법, 무슨 기 치료니 이런 것들이 보편성을 획득하려면 지금처럼 개인적인 체험담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엄격한 실험을 거쳐 그 객관성을 증명해야 할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섬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체계가 정립되야 할 것이다.
역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의식이었다.
나는 늘 죽음이 두렵고 죽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가 큰 고민거리였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그렇다면 잠자는 것은?
잘 때도 생각을 못하지 않는가.
혼수 상태에 빠진 사람은?
의식이 없는데 즉 나를 스스로 인지할 수 없는데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죽은 후처럼 존재하지 않았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죽음도 전생처럼 그저 의식이 사라지고 나면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그런 無의 상태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의식은 두뇌의 고급스런 작용 중 하나이고 생명이 다하면 즉 내 몸의 생명 활동이 멈추게 되면 마찬가지로 뇌의 기능도 정지되므로 의식 작용도 사라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워낙 근본적인 문제이므로 앞으로 더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하여튼 지금까지는 내가 나라는 인식을 가지려면 (그것이 곧 의식인데) 저자의 말대로 세 가지 조선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입력의 비가역성.
저자는 이 책에서 누누히 두뇌의 인지 기능이 절대적이고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매우 가변적이고 수많은 정보를 통합해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고 설명했다.
즉 내가 책을 보는 것도 단지 글씨가 내 머릿속에 투영되어 카메라처럼 인식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감각 정보들을 수용해 무려 30여 가지의 시각 영역들을 통과한 후 하나의 글씨로 인식하고 보게 된다.
이 때 한 번 인식이 되면 글씨가 될 수도 있고 지렁이가 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계속 글씨로 확실하게 인식을 하여 개체의 삶에 안정성을 기한다.
둘째 출력의 유연성.
이것은 일종의 자유의지와도 같은데 나는 자동 기계가 아니라 정보를 입수하여 판단한 후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저자는 그 반증으로 벌의 8자춤을 든다.
벌은 먹이 있는 곳을 알려 주기 위해 8자 춤을 추면서 이동하는데 벌에게 다른 선택을 할 능력이 없다.
오직 벌은 단 한가지 행동, 8자 춤만 출 수 있다.
벌의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을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역시 무언가가 몸에 닿으면 일단 잎을 닫아 버린다.
끈끈기주걱은 닫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생존 본능에 의한 여러 생명체들의 행위는 의식 활동이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단기 기억이 가능해야 한다.
어쩌면 기억이야 말로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일텐데 기억이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 정체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신경병 환자들의 예는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인격의 황폐화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의식이란 혹은 자아란 수많은 정보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된 통합체를 만들려는 고도의 두뇌 기능이라 정의하겠고 육체가 죽는다면 마찬가지로 의식 기능도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아직까지는 창조주나 절대자에 대해 단정을 내릴 수 없으나 적어도 인간이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이고 육체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기능을 갖는 비물질적인 영혼이 있으며 그것이 구원을 얻어 영생을 산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변적인 얘기들이 많아 지루할 때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재밌게 읽었고 두뇌 과학이 좀 더 발전해 이 신비스러운 영역이 많이 알려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