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장 선거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5월
구판절판


왕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접을 받는 만큼, 몸과 마음도 그에 걸맞은 보상을 치러내고 있다. 사명감이 없다면 견뎌낼 수 없는 일이다.-45. 쪽

매사를 흑과 백으로밖에 못 본다. 넓은 도량이 뭔지는 짐작도 못하는 것이다.-56.쪽

국민들은 풍요로워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으로 치장했다. 평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되새기는 마음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굳이 다른 사람을 들먹일 필요 없이 우선 자기 자신부터가 그랬다. 전쟁의 기억은 남아 있지만, 평온한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65. 쪽

"다나베 씨, 당신은 나를 싫어했습니다.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나 역시 당신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다나베 미쓰오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지금 찾아오는 이 쓸쓸함은 대체 무엇일까요.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닐 겁니다. 사회 전체가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마치 일본 열도에서 화산 하나가 사라져버린 듯한, 커다란 상실감 속에 빠져 있습니다. 걸출한 인물이란 이렇듯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레 정착해버리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70~71.쪽

인생은 알 수 없다. 5년 전만 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172.쪽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야심가라면 사회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196.쪽

인간이 룰을 지키는 것은 자기에게 해가 미치지 않을 때뿐이다.-217.쪽

"우린 모두 섬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는 거야."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하나로 합쳐졌다.-283.쪽

이 세상에 분쟁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수많은 비극을 일으키면서도, 인류는 왠지 즐거운 듯 싸우는 면이 있다.-295.쪽

"이봐 미야자키. 도쿄에 돌아가거든 사람들에게 센주시마 얘기를 해줘.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민주주의가 통용되지 않는 섬이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우린 이게 좋아. 팽팽한 긴장감이 있잖아."

더 이상 도쿄의 잣대로 이들을 잴 생각은 없었다. 이 섬은 이 섬 나름대로 잘해나가고 있었다. 센주시마는 시소와 같다. 양쪽에 올라탄 두 편이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298.쪽

어느 쪽이 이기든 이 섬은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해는 서로 대립될 지 모르겠지만, 섬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았다.-304.쪽

이라부는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인간이다. 이 섬에 온 지 불과 2주만에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아니,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건 너무 치켜세우는 걸까. 어쨌거나 이 섬에 희귀한 생물이 찾아온 것이다.-30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답은 필요 없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답은 필요 없어.

지난 주, 도서관에서 빌려 밑줄 긋기 등록을 마친 책이다. 신간코너에서 발견했을 때(이미 오래전), 살까 말까 퍽 갈팡질팡했던 기억이 남았다. 깔끔하고 속도가 빠른 문장에 와우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고, 그 당시엔 머릿속 리스트에 담아두고 조만간 사야지, 생각했었다. 그러다, 은근슬쩍 묻히고 말았다. 더 급하게 필요하고, 더욱 끌려서 읽고 싶은 책들이 줄을 서게 되었다고 하면, 단순히 핑계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우연히 동생의 학교 도서관에 따라갔는데, 여기저기 기웃기웃 휘둘러보다가, 이것저것 빼서 들추고, 팔락팔락 넘기고, 서서히 읽고 싶은 책 목록이 늘어가고 있었다. 빌린 5권의 책 중 가장 먼저 마지막 커버를 덮었던 책이라, 제일 처음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다. 다른 책은 좀 더 여유를 두고, 좀 더 생각을 거치고 싶다.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단편 2가지를 거쳤다는 점에서, 리뷰는 좀 늦은 감이 있다. 많이 머뭇거렸고(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루 담아내지 못할까 봐), 연방 따져보다가 미적거리고 말았다. 지금도 여전히 조심스럽고, 이리저리 특징을 꼬아보고, 연관을 지으려 한다.


나의 지난 독서 일기를 살피면, [본격적으로 읽은,(미야베 미유키란 작가는 진작 알았지만)
첫 단편집. 잘 읽혀지는 글은, 자신의 문장 호흡과 가까워서 그런 거라고 한다. 그 공통분모에 근접한 부분을 찾을 수 있는 여러 작가 중 한 사람 리스트에 오른 미야베 미유키. 그녀의 다음 작품으로 '누군가'를 읽을 계획을 세운다.]라고 적은 바가 있다. 리뷰를 통해 더욱 바짝 접근해보고자, 독서 일기에는 요점만 나열했던 것인데, 정작 리뷰를 올리려고 정한 이 시점에서는 그렇게까지 심도 있게 다가설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담담하게 차근차근, 스토리보다는 내가 받았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도록 풀어가고 싶다.


무엇보다도 환호했던 점은, 간편한 사이즈의 책 안에, 나름 진솔하고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가득했다는 점이다. 스토리 위주로, 영상이 쉬이 그려지는 단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인물의 내면에 관해서는 바투 다가서지 않았던 것 같다. 단어 쓰임새가 특이한 편은 아니었고, 정곡을 찌른다고 할까, 일상적 단어들을 잘 버무려놓은 편이었다. 말뿐인 허울 좋게, 구질구질 끌어가는 건 달갑지 않지만, 그렇다고 치밀한 서술을 살짝 내팽개치고 멀리 던져놓았다는 것에는 약간이나마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리 묘사 면에서는 [들리세요]라는 단편이, 어느 정도 인상에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을 때면, 각자 그 소설을 해석하는 방식이 있을 텐데, 나의 경우에는 좀 많이 파헤친다고나 할까. 문장에 관해서, 표현에 관해서. 스스로가 판단하기에, 군데군데 진기하고 날카로움이 묻어나는 표현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기억의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두고, 언제든 꺼내보고, 시시때때로 배우고 싶은.

“저 같으면 친구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뒤가 켕기는 신세를 지기는 무서우니까요.”(125)

이렇듯, 대사 하나가 그 단편의 묘미를 살리는 장면을 드문드문 찾아낼 수 있어서 은근슬쩍 빙그레 웃음 짓기까지 했다.

츠토무는 인간들 중에는 어떻게 해도 공존할 수 없는 타입이 있다는 것을 열두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것은 죄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나나와 밤은 같은 정원에 심을 수가 없으니까.(137)

인생에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핵심적으로 보여준 문장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원했던 바가 아니라는 것과, 그 결론이 이르기까지 잘은 몰라도 누구나 힘겨운 과정을 거쳤을 거라는 생각까지. 의식적으로 끄덕거리며 맞아, 라고 중얼거리며, [들리세요]라는 단편을 징검다리를 밟듯, 몇 번이고 곱씹으며 파악 단계를 거쳤던 것 같다.

그래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같은 정원에 심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쓸쓸해한다는 것을.(170)

이 부분은 [들리세요]라는 단편의 마지막에 드러났던, 이 단편의 핵심을 찔렀다는 생각이 든다. 소통에 대한 버거움, 어쩔 수 없는 거리감, 거기서 오는 허망함, 그리고 안타까움. 어쩐지 저릿한 자극(약간의 반성이라고나 할까)을 주었던 부분이다.

“‘둘시네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가게가 아니야. 오히려 당신 같은 사람이 가끔 기분 전환하러 와서 즐기는 가게야. 나는 그럴 마음으로 해 왔어. 가게가 손님을 고르다니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야. 난 어떻게 해서든 마음대로 생겨버린 그 벽을 부수고 싶었어.“(242)

주인공의 내면에, 그리고 우리들의 내면에 자리한 편견을 쓱쓱 지울 수 있다. 이 단편의 초반에 ‘둘시네아’에 대해 묘사할 때, 약간 찌푸리며 읽어나갔는데, 내게 있어서 반전이 되었던 저 대사,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했다는 생각이었다. 흡족한 웃음을 흘릴 수 있었던 사항이었고. 여운이 남기도 했고, 스토리가 좀 더 이어지지 않을까 몇 번이고 뒤적거리게 만들기도 했다.

찌릿찌릿한 전율까지 느끼면서_ 전체적으로 만족에 가까웠던 결말이었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았고, 뒤에 한없이 어느 지점까지고 이야기가 이어질 법하게(마치 평행선처럼)그려냈던 장면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식이기도 하겠지만) 표제 ‘대답은 필요 없어’라는 구절이, 어느 한 단편이 지닌 독자적인 의미로도, 전체를 아우르는 암호로도(몇몇 단편에서 구체적인 구실을 가졌던 건 아니었지만)작용했다는 판단을 내린다.   


[화차]라는 장편소설의 원형이 된 단편이 포함되어 있다고 언급했는데, 아쉽게도 [화차]는 읽은 경험이 없어서, 어떤 부분이 그 소설의 계기가 되었는지 파악할 수 없어,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다는 생각이다. 전작과 비교하는 방식은 그리 즐기지 않는데, 그저 궁금함을 해소하고 싶어 언젠가 [화차] 빌려봐야지 싶었다.


나는 솔직히, 다른 분들이 지적한 바 있는, 어떤 요소가 미야베 미유키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처음 접하는 소설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이겠지. 한 가지 분명하게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건, 마지막 커버를 덮는다는 사실에 허전함이 컸던 만큼, 그녀의 단편을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전에, 읽고 싶은 장편소설들을 차례차례 거쳐 갈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 조선 지식인 시리즈
고전연구회 사암.한정주.엄윤숙 지음 / 포럼 / 2007년 5월
구판절판


많은 사람들과 말을 할 때,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자신이 한 말처럼 꾸며서는 안 된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을 가로채서도 안 된다.
*말 잘하는 기술은 없습니다.
말은 기술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31쪽.쪽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배운다는 것은 곧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럼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이 잘못인지를 깨우치는 것이다.
이미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 뉘우치고, 다시 그 잘못을 고쳤을 때 비로소 배운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이란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한 번도 그냥 넘긴 적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36~37쪽.쪽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떠들어대는 말은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해도 거스르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내가 한 말이 옳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쉽고, 또한 내가 한 말이 옳으면 입을 함부로 놀린다고 더욱 심한 미움을 사기 때문이다.-43쪽.쪽

마치 피리의 소리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기운에서 생겨나지만 소리의 맑고 탁함, 강약은 쌓인 기운에서 비롯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길고 짧음, 크고 작음, 느리고 빠름은 피리의 구멍과 사람이 부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과 같다.
*말은 나의 이력서입니다.
어떤 책을 읽었는지 말해주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말해주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 줍니다.
말은 곧 나입니다.-44~45쪽.쪽

"역사를 기록하는 붓을 쥔 사람에게 그대의 일을 기록하게 한다면, 단지 아무개가 어떤 일을 이러이러하게 했다고 적을 뿐이네. 방금 그대가 변명하고 둘러댄 이러저러한 말까지 잡다하게 기록에 남기지는 않네. 옛 기록 가운데 남아 있는 졸렬하며 실패하고 잘못된 수많은 자취에 대해 당사자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면, 어찌 지금 자네처럼 힘써 스스로를 변명하고 둘러대지 않겠는가?…"-48~49쪽.쪽

세상의 이치가 끝이 없듯이 사람이 깨우쳐야 할 것도 끝이 없는 법이다.
- 홍길주, 「수여연필」-52쪽.쪽

학문을 하거나 설명을 듣거나 책을 읽어 얻는 것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모두 마음속에 희미하게 숨어 있는 것을 북돋워 일으키기 때문이다.
- 최한기, 「기측체의」-55쪽.쪽

이미 내가 내다버린 나를
사람들이 밝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67쪽.쪽

혀 밑에 도끼가 있어 사람이 자신을 해치는 데 사용한다.
(말이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 정약용, 「이담속찬」‘우리나라 속담’-79쪽.쪽

"…좌중에 자네 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물으면 저 사람이 대답하고 저 사람이 물으면 이 사람이 대답하고 해야지, 왜 자네 입으로만 모든 말에 대답하려고 하는가?"-100쪽.쪽

내일 여러 문신들 가운데 현재 삼사의 벼슬을 맡고 있는 신하들은 임금의 덕행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일까지 모두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 각자 열 가지씩 말하되 절대로 대충대충 상황만 모면하고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 정조대왕.-130쪽.쪽

이미 말해놓고 다른 사람에게 새나갈까 경계하는 일은 상대방을 의심하는 것이고, 상대방을 의심하면서도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 박지원 「연암집」
*편을 가르면
내 편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적이 생기는 것입니다.
편을 들면
내 편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만큼 조각조각 나는 것입니다.-202쪽.쪽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용맹한 듯하나 상투적인 습관일 뿐이고, 구태여 60만 군사를 달라고 청한 것은 겉으로는 겁쟁이인 듯하나 실제로는 지혜로운 사람의 계책이라고 할 수 있다.-205쪽.쪽

사람은 일을 하다가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면,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런저런 말로 변명을 한다. 심지어 주공이나 공자 같은 성인이나 관중이나 제갈량 같은 책사라고 할지라도, 같은 상황을 만났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변명을 듣고 있다 보면 나는 화가 3천 장이나 솟구쳐 오른다. -208~209쪽.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절판


잠시 후면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뺏길 터이지만 나는 그보다는 책 속에 씌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싶었다. 마치 책 속에 있는 사고와 문장, 방정식들 사이에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내 모든 과거가 있는 것 같았다.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기도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읽으면서 모든 글을 머리에 새기고 싶었다. 그들이 와서 내게 가할 고문이 아니라, 즐거워하며 외웠던 책의 단어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내 과거의 색깔을 기억하고 싶었다.-19쪽.쪽

자정이 가까워지자 그는 별과 행성이 가장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열린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왔다. 달과 지구 사이에 있는 그 별의 존재 혹은 부재에 관한 정확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하루를 보낸 후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우리 둘이 유사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호자는 이제 ‘가르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연구해야 하며, 함께 찾아야 하며, 함께 걸어가야 했다.-47~48쪽.쪽

이스탄불에 돌아가면 자신의 계획을 더욱더 발전시킬 것이며, 모형 하나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 체계 이론과 새 시계로 파샤를 감동시킬 거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자신의 호기심을 모두에게 전염시킬 ‘부활’의 씨를 심을 거라고 했다. 우리 둘 다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52쪽.쪽

그가 일상적인 것에 대해 묻는 것처럼 "왜 나는 나일까?" 라고 말했을 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호자에게 왜 그가 그인지 모른다고 말한 후, 그 문제는, 그곳에서, 내가 살던 나라 사람들이 많이 질문하고,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질문하던 것이라고 덧붙였다.-86쪽.쪽

우리는 몰락이라는 말을, 제국의 손에 있는 나라를 하나하나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이해했던가? - 그렇지 않다면, 몰락이라는 말은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이 변하고 믿음이 변한다는 의미였던가? 우리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 따스한 침대에서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들은 옷을 어떻게 입을 것이지 모르고, 사원 첨탑이 왜 필요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166쪽.쪽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얀 성처럼, 갈수록 어두워지는 바위투성이의 비탈과 잠잠하고 어두운 숲의 모습처럼 완벽했다. 몇 년 동안 우연하게 경험했던 많은 것이 지금은 필연이라는 것을, 우리 군대가 성의 하얀 탑에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호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219쪽.쪽

처음에 나를 불안하게 했던 내 정체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이제는 노련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이지요" 라고. 파디샤는 이 문을 통해 내 머리 내부의 서랍으로 들어온 것 같다.-229쪽.쪽

나는 '그'를 사랑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속수무책에 슬퍼 보이는 내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모습의 수치스러움, 분노, 죄책감 그리고 슬픔으로 숨이 막히는 것처럼, 슬퍼하며 죽어가는 야생동물을 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것처럼, 내 아들의 버릇없는 행동에 화를 내는 것처럼, 바보 같은 혐오감과 바보 같은 기쁨을 통해 내 자신을 아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내가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내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내 생각을 아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오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 못 생긴 입, 연필을 쥐고 있는 내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238쪽.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답은 필요 없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장바구니담기


누나는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며 피해자인 척한 적은 결코 없으니까.
"기모노 차림의 여자 분은 친구십니까?"
"질문은 하나만 한다고 했지?"
나는 훗 하고 웃어버렸다. "그렇군요.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 도움을 주고 죄를 무릅쓸 정도로 사이가 좋은 사람인가 해서요."
"친구인걸. 친구란 그런 거잖아?"
"저 같으면 친구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뒤가 켕기는 신세를 지기는 무서우니까요."-125쪽.쪽

‘오리아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서로 양보하여 매듭짓는 일. 타협."
그리고 ‘타협’은 "쌍방이 서로 양보하여 일치점을 찾아 일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알듯 모를 듯한 이 설명 속의 진실은 하나. 어쨌든 어느 쪽도 ‘양보할’줄 모르는 관계라면 ‘타협’은 일절 존재하지 않으며, ‘오리아이’는 나빠질 뿐이다.
…만일 자신이 꺾인다면, 그 순간에 자신이 받치고 있던 세계가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두 사람 다 교각이다.
큰 다리는 바싹 붙여서 세우는 법이 아니다. 하지만 위쪽 어딘가에서 인간을 인간계로 내려 보내는 역할을 하는 누군가 씨는 때때로 실수를 범한다. 그 실수가 일으킨 대소동을 츠토무는 철이 들면서부터 죽, 속속들이 관찰해 왔다.
…그 전투의 진창에서 튀는 ‘흙탕’은 거의 어김없이 츠토무 쪽으로 날아왔다.
…충돌이 일어날 대마다 츠토무는 무력한 유엔군 마냥, 두 독재자 사이에서,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화가 나는 것을 느끼며 작은 백기를 흔들고 퇴각했다.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들고 있는 ‘비단 깃발’이 언제나 모조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가짜이기 때문에 더 요란하게 빛이 난다.-134~135쪽.쪽

츠토무는 인간들 중에는 어떻게 해도 공존할 수 없는 타입이 있다는 것을 열두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것은 죄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나나와 밤은 같은 정원에 심을 수가 없으니까.-137쪽.쪽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기계가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크기도 모양도 딱 성냥갑 2개를 나란히 가로로 늘어놓은 정도의 검은 상자였다. 재질은 플라스틱. 장방형 한쪽 끝에 코드가 두 개 뻗어 있고 그 끝에 악어입 집게가 하나씩 붙어 있다. 그 악어입 집게가 전화기 본체 안에 있는 빨간 코드와 하얀 코드를 각각 물고 있다. 다른 부분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즉, 이 작고 검은 상자는 악어입 집게 두 개만으로 전화기의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악어입 집게가 무리하게 들어가서 빨간 코드와 하얀 코드를 집고 있는 모양이 왠지 음험하다고 할까―.-147쪽.쪽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이야기한다. 그래도 정말로 알고 싶은 건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 수가 없다. 전화를 끊은 후, 상대방이 전화가 놓여 있는 곳에서 옆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진실이 있으니까. 본심이 있으니까. 자칫하면 잔인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이, 괜찮아. 상관없어. 바나나와 밤을 같은 정원에 심을 수 없으니까. 떨어져 있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조합도 있는 거야.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은 있어.
태어났을 때부터 따라붙어 다니는 읽기 힘든 희귀한 성처럼.
아무리 연습해도 극복할 수 없는 서투름과 같이.

그래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같은 정원에 심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쓸쓸해한다는 것을.-169~170쪽.쪽

"현금 서비스인가, 카드 한 장으로 간단히 돈을 인출할 수 있는 시대야. 소액 무담보 신용 대출도 그래. 카드로 간단히 빌릴 수 있지. 머리를 숙일 필요도 없고 수치스러운 기분을 맛보지 않아도 돼. 아, 이렇게 편하게 자기 것이 되는 돈이라면, 처음부터 자기 돈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착각하는 젊은이가 나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194쪽.쪽

"아까 당신은 오우라 미치에 씨의 짧은 커트머리를 지금 파리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녀가 머리를 자른 것은 어젯밤 오후 아홉 시경의 일입니다. 그전까지는 신문에 나온 사진처럼 긴 머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헤어스타일을 바꾼 후 아파트에는 돌아오지 않았죠. 끝내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건 알겠습니다.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육교 위에서 살인자와 만나, 그에게 떠밀려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녀의 짧은 머리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을까요?"
-204~205쪽.쪽

"…이 여자는 오늘밤 이 시각에 조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남자가 있으면, 그것은 경찰이라고 예측했던 게 아닌가―하고 말이야."

208~210쪽.
과연 도쿄라는 곳은 실재하는 걸까. 그런 것은 이런 종류의 잡지나 텔레비전에서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젊은이들이 ‘그곳에 가면 누구든 행복해질 수 있다’고 꿈꾸는,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도시가 아닐까.
…‘도쿄’는 환상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환상이다.
…어차피 허상이다.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움켜잡을 수 없는 도시.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는 도시.-208쪽.쪽

요시코가 말한 대로 속기 따위는 이미 구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녹음기 성능은 무서울 만큼 좋아졌고 워드프로세서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음성을 자동적으로 문장으로 변환시켜주는 기계는 실용화되어 있지 않고, 되었다고 해도 그것 하나로 온갖 경우에 대응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의심스럽다. 사람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분명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신지는 생각한다. 시대가 어떻게 발전해 갈지 모르지만, 지금은 분명히 속기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전문가가 아니면 안 되는 일도 있다.-230~231쪽.쪽

"‘둘시네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가게가 아니야. 오히려 당신 같은 사람이 가끔 기분 전환하러 와서 즐기는 가게야. 나는 그럴 마음으로 해 왔어. 가게가 손님을 고르다니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야. 난 어떻게 해서든 마음대로 생겨버린 그 벽을 부수고 싶었어."-242쪽.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5-23 09:55   좋아요 0 | URL
하하하핫.... '츠토무'
내가 잘 아는 누군가의 이름과 같아서 잠시 너털웃음이...
이 '츠토무'라는 성은 그다지 흔하지 않아서요. (긁적)

302moon 2007-05-23 21:48   좋아요 0 | URL
그렇더라고요- 헷갈리기 쉬운 한자에, 그 발음도 오묘하고 -_-

비로그인 2007-05-24 13:10   좋아요 0 | URL
발음은....촌스럽다고 그 친구에게 대놓고 말한 적도 있는데......(긁적) 하핫...;;;
그러고보니, 저는 그 사람의 예명으로만 불렀지, 실명을 제대로 불러준 적이 없네요.
그러나...이제 와서 실명으로 불러주면 오히려 서운해할 것 같고. 이거 참..(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