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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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인상 깊은 하나의 장면이 있다.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제임스 본드가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였다. 테메레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조국을 구하고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영웅이었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 007 스카이폴 (SKYFALL), 2012 ]​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 The Fighting Temeraire, J. M. William Turner, 1838 ]

 

본 도서의 저자 서명숙이 <영초언니>를 출판하게 된 계기도 뉴스에서 본 하나의 충격적 장면 때문이었다. 최순실은 특검에 출두하면서 "여기는 더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법과 제도를 비롯해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것들을 유린한 국정논단 주범의 이 모순적 외침은 저자에게 영초언니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40여년전 영초언니도 법정에 출두하면서 "독재정권 물러가라. 민주주의 쟁취하자."고 외쳤었기 때문이다. 40여년의 세월을 넘어 똑같이 수의를 입은, 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온 천영초와 최순실이 동시에 외친 "민주주의"라는 단어에는 얼마나 큰 간극 (間隙)이 존재하는 것일까?

 

 

 

 

[ 국정논단 피의자 최순실, 2017/01/25 ] 

 

 

저자 서명숙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박정희 키드였음을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타고 국민교육헌장 암기왕 출신의 소녀는 중학교때 라디오에서 박정희 당선확정이 발표되자 "박정희 대통령 각하, 축하드립니다."라고 일기에 쓰고 잠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생들이 쓸데없이 데모를 해서 입시를 방해한다고 불평하던 소녀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시대의 수상한 공기를 감지하기 시작한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는 여러 문화매체를 통해 다뤄진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하고 있다. (5월 18일은 본 도서 영초언니의 출간일이기도 하다.) 익숙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1,000만이 넘는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의 구도와 그를 기반으로 한 전개과정이 신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시민을 상징하는 택시운전사가 광주시민이 아니 외지인의 관점에서 80년 광주의 부조리를 겪으며 뜨겁게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많은 관객들이 공감했을 것이다.


 

 [ 영초언니, 서명숙 著, 문학동네, 2017/05/18 ]

 


영초언니를 읽으면서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도 출신의 박정희 키드가 민주화의 봄을 꿈꾸는 대학생이 되기까지, 그리고 세월이 흘러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 시절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는 내게 흡인력 있게 다가왔다. 20여년의 세월의 간격을 두고 저자 그리고 영초언니와 한 공간을 공유했다는 점도 이 책에 흥미를 느낀 결정적 요소 중 하나였다는 것도 밝혀야겠다. 내가 <영초언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여러 저명인사들의 추천사가 아닌 내게 너무도 익숙한 장소에 서 있는 한 여자를 그린 이 책의 표지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9.14 고려대 시위의 동선, 저자가 엄주웅과 진심을 확인한 경양식집 하얀집 등 추억의 장소를 떠올리며 책에 대한 몰입도를 높일 수 있었다.

 

 [ 영초언니, 서명숙 著, 문학동네, 2017/05/18 ]

 

통제와 검열을 거친 관제뉴스에 길들여진 제주도 비바리(처녀)가 대학에 진학해 조금씩 세상에 눈을 떠가는 과정은 시작부터 운명적이었다. 고대극회와 고대신문사 중 운명에 맡긴 선택을 통해 시작된 저자의 대학시절 그 과정에 영초언니가 있었다. 영초언니는 저자에게 사회적 스승이었고 지식인의 모델이었다. 저자는 영초언니를 통해 스스로 존중하는 법을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여자들끼리의 수다도 얼마든지 진지한 토론이 될 수 있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p. 63) 야학교사를 하던 저자가 신분상승을 위한 검정고시 공부와 모순된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 중에서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자 영초언니는 너무 욕심내지 말라고, 네가 그들을 하루아침에 구할 수는 없다고, 시간이 흐르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구하는 방법을 알게 될거라고 조언하고 다독인다. (P. 70)

 

영초언니는 본인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지만 후배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선배였고 역사의식과 대의명분을 앞세워 후배들에게 선택을 강제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선배가 아니었다. (p. 182) 저자가 그토록 가슴 아파했던 노동자들의 삶 보다 한치도 더 나을게 없는 부모의 신산한 삶을 떠올리며 비겁해지리라 결심했을 때도 영초언니는 배신감이 아닌 이해와 포용 그리고 미안함을 내보였다. 영초언니의 법정 최후진술은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노리는 철저한 1인 독재정권이고 유신헌법은 그런 목적을 위해 꼼수로 만들어진 초법적인 법이기 때문에 그런 법에 의거하여 우리를 가둔 것이야말로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P. 206)

 


윌리엄 터너와 그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를 대신하여 2020년부터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새로운 모델이 될 예정이다. <전함 테메레르> BBC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꼽히기도 했다. 터너와 그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가 영국인들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 "굿바이 스미스, 하이 터너" 英 20파운드 지폐 새 모델 발표, 2016/04/23 ]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다.

 

 

[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Trafalgar Square, London ] 

 

 

 [ 포츠머스 해군기지의 빅토리호, HMS Victory, Portsmouth ]



"이 책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한 여성에게 바치는 사랑노래입니다."

 

저자 서명숙은 프롤로그를 통해 이 책은 엄혹한 시절을 함께 견뎌낸 영초언니, 천영초에게 보내는 헌사임을 밝히며 이 노래를 통해 사고로 잃어버린 그녀의 기억이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한다고 하였다. 이 책에는 국회의원, 장관, 시민운동가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실존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영초언니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알만한 인물이 되었다. 역사는 영초언니를 어떻게 기억할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녀의 몫도 있을까?

 

 

트라팔가에서 테메레르는 넬슨 제독의 생명을 구하진 못했지만 조국 영국을 구했다. 테메레르의 빅토리호 구원이 없었다면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닌 저물어가는 일몰이었을지도 모른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영초언니>는 서명숙이 그린 <전함 테메레르>. 저자 서명숙은 천영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영초언니 천영초를 기억해야 한다. 영초언니는 혼자서 행복해지는 것 자체가 마음의 죄가 되는 시절,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천영초가 목놓아 외친 민주주의와 박근혜, 최순실이 외친 민주주의의 간극을 좁히는 길이며,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모독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초언니, #서명숙, #천영초, #문학동네, #윌리엄터너, #테메레르, #택시운전사, #민주주의, #007스카이폴, #트라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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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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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완전공략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몇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크리스티라는 추리소설 거장의 모든 작품을 읽고 평을 정리했다는 점

 

두번째, 크리스티의 작품을 고전으로서 아닌 현시대의 관점에서 평가했다는 점

 

세번째, 스토리를 소개하면서 추리소설 핵심트릭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다는 점

 

 

 

 

첫번째, 크리스티라는 추리소설 거장의 모든 작품을 읽고 평을 정리했다는 점

 

저자인 시모쓰키 아오이는 미스터리 전문 평론가로서 애거사 크리스티가 발표한 장단편 소설 전작을 읽고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공략>이라는 제목의 한권의 책으로 정리하였다. 사실 애거사 크리스티는 명실상부한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그녀의 소설은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추리소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같은 그녀의 대표작은 한번쯤은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뿐만 아니라 추리소설 전문 평론가들조차 그녀의 전 작품을 집대성하려는 시도는 현재까지 없었다. 한발 더 나아가 저자는 발표순서대로 작품을 읽어나가며 크리스티 작품의 변화의 지점들을 포착하고 그녀가 작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까지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크리스티 작품에 대한 완전공략집이자 작가에 대한 작가론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본 도서를 통해 그녀가 우리에게 선물한 트릭과 수수께끼뿐만 아니라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작가에 대해 알게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크리스티의 작품을 고전으로서 아닌 현시대의 관점에서 평가했다는 점

 

본 도서의 가장 특징 중 하나는 크리스티 작품을 고전으로서가 아닌 현시대에 출판된 신작 추리소설과 동일선상에서 읽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 추리소설을 읽어온 미스터리 전문 평론가로서 중립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평가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현대의 독자들이 고전 추리소설을 읽고 즐거움을 느낄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고민의 결과물이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작가로서 데뷔한지도 거의 100년 가까이 지난 만큼 저자는 우리가 그렇게도 추앙하며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은 소설상의 트릭과 미스 디렉션, 구성이 발전된 현대 추리소설에 비해 부족해보일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점을 염려한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언급한바와 같이 크리스티의 작품은 트릭에만 의존하여 작품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트릭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드라마속에 구성함으로서 소설 전체가 트릭을 위해 유기적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서평을 읽다보면 추리소설이 있기 이전에 추리소설이란 장르 자체를 규정한 크리스티의 저력에 대해 느낄 수 있다. 또한 저자는 활발히 활동하는 추리소설 평론가답게 크리스티의 각각의 작품의 연관선상에 있는 현대의 작품을 독자들에게 제시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세번째, 스토리를 소개하면서 추리소설 핵심트릭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다는 점

 

 

 

 

알다시피 트릭은 추리소설의 핵심인만큼 지금까지 나온 추리소설에 대한 서평은 독자들이 해당 작품을 읽었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여 작품의 스토리와 트릭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책은 크리스티 전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면서도 본문상에서 스포일러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처 작품을 읽지 못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앗아가지 않는다. 이 보다는 오히려 작품에 대한 소개와 가이드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따라서, 본 도서의 독자들은 아직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한 평도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의 작품에 대한 평가 중 신선하다고 느꼈던 점이 한가지가 있다. 저자는 크리스티의 각각의 작품마다 한줄평을 남기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3-4페이지로 녹여내고 있는데, 이 한줄평이 독특하면서 재미있었다. 본격적으로 서평을 읽기전에 작품의 분위기와 작품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시사/교양 예능을 표방하는 '썰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사안을 종합하는 패널들의 품평을 듣는 느낌이랄까?

 

 

 

 

결론적으로 본 도서는 갓 추리소설에 입문한 초심자부터 웬만한 추리소설계의 명작들을 섭렵한 매니아층에 이르기까지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크리스티와 그의 작품들에 대한 친절한 가이드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주관적인 평가가 들어간 면도 있지만 크리스티의 모든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면서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그녀와 그녀의 작품들이 위치하는 지점을 설명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시도해보지 못한 영역이고 높이 평가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애거사크리스티, #한겨레출판, #시모쓰키아오이, #오리엔트특급살인, #애크로이드살인사건, #백주의악마, #그리고아무도없었다, #ABC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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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보이 2017-08-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세한 리뷰 감사합니다. 완전공략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책이네요. 책 내용이 기대가 됩니다^^

2017-08-19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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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신중하고 정직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김지영 씨에게 정당한 보상과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간다. 김지영씨에게 더 다양한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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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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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전설이자 거장인 애거사 크리스티를 현대적 관점에서 돌아본 흥미로운 책입니다. 작품마다 남긴 한줄평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3-4페이지로 녹여낸 것이 꽤 설득력도 있고 재미있네요. 다 읽고 본격적으로 서평을 남겨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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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8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9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8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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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무덥고 습한 올해 여름이다.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자 집 앞 카페에서 김애란 작가의 신작을 펼쳐보았다. 책 표지를 보면서 화사함과 함께 시원한 청량감을 느낄수 있었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이 소설집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소설은 '입동'이다. 바깥은 찬란한 여름인데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가슴으로 겨울을 겪어내고 있는 것일까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상실의 경험을 겪거나 현실에서 결핍을 느끼고 있다. 소중한 아이를 잃은 '입동'의 부부가 그렇고, 유일한 벗인 강아지와 이별한 '노찬성과 에반'의 찬성이 그렇다. 또한 특정 시공간을 같이 겪어낸 연인과 이별을 하는 '건너편'과 남편과의 사별을 다룬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도 같은 주제를 다룬다. '풍경의 쓸모'에서는 소설집의 제목이 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하기도 한다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입동'의 부부처럼 욕실 유리컵에 꽂힌 세 개의 칫솔과 빨래 건조대에 널린 각기 다른 크기의 양말, 앙증맞은 유아용 변기커버를 보며 그렇게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하루가 모여 한해가 되고, 그런 한해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하루 하루가 존재하였기에 쓸모와 필요만으로 이루어진 '기능적 생활'을 벗어나 여유를 풍경으로 두는 ''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실' '결핍'의 경험은 그들의 삶의 온도를 변화시킨다. 이러한 온도 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시킨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와 같이 내 앞의 '청명'이 남의 집에서 뗀다 붙인 커튼처럼 느껴지고, 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기도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현재의 내 것 같지는 않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소설들을 관통하고 있는 '상실' '결핍'이라는 주제도 그렇지만 이들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사건 이후 남겨진 이들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더 어둡게 다가온다. 김애란 작가의 전작 '두근두근 내인생'에서 선천적 조로증에 걸린 아름이는 삶의 시련에 대해 성숙하면서도 생기발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삶에 대한 긍정성은 세상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있는 스스로를 위한 다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겨질 부모에게 전하는 위로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바깥은 여름'의 인물들은 세상에 남겨진 이들이기 때문에 긍정적 태도 보다는 현실을 바라보는 냉혹한 시선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남겨진 이들은 결코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들을 품에 안은채 고통속에서 삶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상실과 결핍을 대면하게 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은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가리는 손'의 재이 엄마의 말처럼 인간이란 각자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잘잘못 때문이 아닌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헤어짐을 겪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복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이해'이다. 이해는 자신이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될 수도 있고, 이미 사건을 겪었거나 체험중인 타인에 대한 이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재이 엄마의 말처럼 '이해'란 자리에 누울 때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되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는 몰이해의 꽃매의 형태로, 잘 포장된 예쁜 합리성의 형태로 변질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스마트폰의 음성인식 프로그램도 갖추고 있는 예의를 생략하거나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다기오기도 한다. ‘이해란 타인과의 온도를 맞춰가는 과정이며 이는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찬성과 에반'에서 찬성이가 에반의 얼굴 군데군데를 공들여 바라보며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아픔의 크기를 가늠해본 것처럼 이 여름 제철의 싱그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겨울의 냉혹함만을 느끼고 있을 그 누군가의 고통을 생각해보았다.

 

 

책을 덮고 다시 표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화사하게만 느껴졌던 표지에서 벽지의 푸른색과 여인이 입고 있는 원피스의 노란색이 대비되어 눈에 들어온다. 괴테는 세계적인 대문호이지만 빛과 색채를 연구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저술한 '색채론'에서 색의 근원을 노랑과 파랑 두가지로 규정한다. 노랑은 빛에 가장 가까운 색이고 파랑은 어둠을 대표하는 색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색의 조화는 빛과 그림자, 힘과 나약함, 포용과 분리를 상징하며 두가지 색의 공존은 역동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괴테가 쓴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노란색 조끼와 푸른 연미복을 입고 있다.

 

 

나는 푸른색 벽지와 노란색 원피스에서 '겨울' '여름'으로 대표되는 것들을 떠올렸다. 어두운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여인에게서 다른 이들과 다른 온도를 지닌채 세상을 다른 시공간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군가를 떠올렸다. 베르테르의 열정적 사랑이 금빛 물결이 되어 흘러가다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여 저 푸른 심연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우리는 삶 속에서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삶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은 무엇일까?

 

 

그 희망적인 해답의 실마리는 소설집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소설에서 명지의 남편이 목숨을 걸고 구하고자 했던 아이의 누나에게서 온 편지는 명지가 두 손으로 식탁 모서리를 잡고 어딘가에 기대서라도 앞으로의 삶을 지속해나가야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상실과 결핍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수 있는 것은 사람의 온기였다.

 

 

", 내가 아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으니, 유일하게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 마음 뿐이라네."

 

 

샤롯데를 향한 마음의 열정과 진심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베르테르의 진정성, 그것이 상실과 결핍의 고통을 딛고 하나의 삶이 또 다른 삶에게 닿을 수 있는, 삶의 온도와 시차를 좁힐 수 있는 이해의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름의 열기를 흡수해 공기중으로 기화한 수증기가 주문한 더치 커피잔의 표면에서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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