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종말 - 탐욕이 부른 국가 이기주의와 불신의 시대
스티븐 D. 킹 지음, 곽동훈 옮김 / 비즈니스맵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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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경제학도로서 책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아담 스미스의 절대우위 무역이론에 이어 리카르도가 그 유명한 비교우위론을 제기한 이래로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인 그리고 정책입안자들이 리카르드의 이론을 금과옥조처럼 신봉하며 자유무역이 모든 국가에서 이익을 줄 뿐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도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제조업 공장이 인건비가 적은 해외로 이전하면서 전통적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등 세계화의 폐해에 대한 문제제기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 불만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는 극우 정치세력이 급부상하였다. 세계화의 아웃사이더가 된 저학력 백인 노동자의 불만이 정치를 뒤흔드는 태풍의 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연구들을 살펴보면 한국과 유럽 등 자유무역으로 직접적 타격을 받은 노동 집약적 산업의 노동자와 농민의 피해는 매우 크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자유무역을 지지했던 경제학자들도 이제는 세계화로 타격을 받는 계층이 바로 노동자이며, 이들의 저항이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일정부분 수긍하고 있다. 나아가 세계화로 피해를 보는 약자를 지원하는 사회안전망과 보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이런 상황하에서 경제학 전공자로서 세계화와 경제와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이 책은 세계화에 대한 흥미로운 명제들을 제시하여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준다. 예를 들면 이런 명제들이다. “세계화는 반드시 경제적 진보를 동반하는가? “, “과학기술은 세계화를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파괴하는가?”, “세계화의 혜택은 다수 대중이 아닌 소수 특권층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세계화에 대한 논란 중 대표적인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세계화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가속화되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생각하면 세계화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지구촌이라는 용어가 거론되던 80년대부터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프랜스포메이션이 언급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왔으며, 이에 따라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이러한 주장에 반박을 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세계화를 촉진시키는 요소는 분명하지만 다른 요소들을 압도하여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요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교한 기술적 인프라와 보급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산업혁명을 이끈 대영제국의 몰락 그리고 두 가지 버전의 세계화를 통해 냉전의 한 축을 구축했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등이 저자가 제시한 역사적 반증이다.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세계화를 결정 짓는 요인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정치를 형성하고 경제를 구성하며 각 지역과 세계의 금융 시스템을 만드는 사상과 제도의 발전과 쇠퇴도 있다는 것이다.

 

 

앞에선 잠깐 언급했지만 저자는 세계화와 국가간의 이해관계의 상충 문제도 제기한다. , 국가적 이익과 세계적 이익의 불일치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다. 이는 경제적 관점에서 세계화는 성장을 가져왔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이는 공정하고 안정적인 성장은 아니었다는 주장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특정국가와 일부 소수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이 절대 다수의 이익을 배반하고 집합적인 미래를 결정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 기반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국가 연합이나 국가 공동체도 등장하고 있으나, 이에 반하는 라이벌 공동체의 등장과 역사와 영토분쟁 등으로의 내부분열 문제 등으로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통화도 국가적 이익과 세계적 이익의 간극을 키우는 주요 요인이다. 통화정책은 언제나 국내외의 승자와 패자를 남기고 소수의 이익과 다수의 피해를 키우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적 이익과 세계적 이익의 상충 문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문제일 수 있다. 국가차원에서 당연한 권리와 의무인 사회복지,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등이 국경의 경계가 사라지는 세계화에서는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토마 피케티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소득 불평등이 감소하다가 1980년대 이후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피케티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원인을 세가지 차원으로 분석하고 있다. 첫째, 세계화와 기술의 변화와 같은 구조적 변화의 차원, 둘째, 정부의 감세 정책과 노동조합의 약화와 같은 행위자 차원, 셋째, 정치 체제와 복지 체제 등 사회정치적 제도적 차원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화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구조, 행위자, 제도 등의 문제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상호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개별 국가들은 그 동안 추진해왔던 세계화에 동참해야 할지, 아니면 보다 이기적 접근을 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고,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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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백년손님 - 벼슬하지 못한 부마와 그 가문의 이야기
신채용 지음 / 역사비평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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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학문의 뛰어나더라도 그것을 쓸 곳이 없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그것을 펼칠 곳이 없다. (학무소용, 재무소전)  



이는 조선왕실의 백년손님이자 왕의 사위인 부마를 표현하는 말이다. 작가는 책의 머리말에서 식민사관으로 인해 광복 이후 7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조선시대와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종식되지 않은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 이 책을 내게 된 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왜 작가는 부마에 주목하였을까? 이는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였다. 부마는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에게 생소한 존재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고, "학부소용, 재무소전"의 한계를 지닌 부마라는 존재를 통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본다는 것인지 의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문물제도가 어느 정도 완미되는 성종 전까지는 부마들도 일반 관료처럼 높은 관직에 올라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장도에 이르러 경국대전이 반포되고 조정 내에 사림 세력이 등장하는 등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정착되어가자 부자의 정치 참여를 제한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 성종 이후부터 부자는 법에 따라 주어진 관직만 받아야 했으며, 일반 관료처럼 조정이 나가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허락됩니다 않았고, 과거 응시 또한 철저하게 제한 받았다. 이 같은 원칙이 세워지고 시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왕조가 성리학을 국가 기념으로 삼아 건국되었다는 이유가 크다. 성리학에서 중요시하는 명분과 의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왕의 가까운 인척인 사위가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은 분명 용납되지 못할 사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마 가운데에는 벼슬하지 못하는 슬픔을 극복하고 탁월한 서예가나 문사로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이 또한 성리학에서 지향하는 궁극적인 인간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속세로부터 벗어나 자연에 은거하셔서 수기의 자세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자를 길러내 향촌 사회에 그 이념을 뿌리내리게 하는 은일지사였다.


부마는 왕의 사위일 뿐만 아니라 왕위를 물려 받을 세자에게는 자형이나 매부이고, 세손에게는 고모부가 되는 존재이다. 이는 부마로 간택되었을 때 부마 당사자는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던 데 반해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은 왕실의 인척으로서 국왕의 근위 세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조선시대 정치 세력에 대한 연구가 전기에는 공신과 훈척, 사림파를 중심으로, 중기와 후기에는 동인, 서인, 노론, 소론 등 각 붕당을 중심으로 연구되었고, 왕실 관련 연구에서는 왕비나 후궁만을 주목했기 때문에 왕의 사위인 부자라는 존재와 그 세력은 간과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의 삶에서는 부마 자신을 비롯하여 그 아버지나 자손들이 정치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부마를 비롯한 그 가문의 정치적 역할과 의상은 조선시대 정치 세력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작가가 밝힌 바와 같이 부자는 왕의 최측근이지만 벼슬할 수 없는 신분이기 때문에 그 개인에 대한 자료는 소수를 제외하고 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의 총 92명의 부마 가운데 정치 문화 부분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12명의 부마를 선택하여 그들을 개인별 열전의 형식으로 정리하고 있다. 저자에게 선택된 12명의 부마는 다음과 같다.


1.
태조 부마 흥안군 이제 : 개국공신의 운명
2.
문종 부마 영양위 정종 : 단종의 보호자
3.
성종 부마 풍원위 임숭재 : 연산군의 채홍사
4.
연산군 부마 능양위 구문경 : 폐지로 인한 이혼
5.
성종 부마 고원위 신항 : 뛰어난 문장가
6.
중종 부마 여성위 송인 : 문집을 남긴 문사
7.
선조 부마 해숭위 윤신지 : 장원급제 실력
8.
선조 부마 동양위 신익성 : 강직한 척화론자
9.
효종 부마 동평위 정재륜 : 숙종의 밀사
10.
현종 부마 해창위 오태주 : 중국에 알려진 명필
11.
영조 부마 금성위 박명원 : 박지원은 함께한 사행
12.
영조 부마 찬성의 황인점 : 정조 특명의 사행




부모는 왕의 사위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간택해준 왕에게 협조하면서 서구적인 자세를 튀하거나 왕의 악행을 부추기는 등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이끌어 나가는 군주의 훌륭한 조력자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선왕조 500년을 회고하고 평가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룬 바와 같이 역사속 헤게모니 다툼으로 정치적 지향점과 운영방식이 변화하였을 때 부마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던 존재를 통해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 느꼈다. 때로는 정치판의 한가운데에서 때로는 속세를 떠난 문인으로서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부마라는 존재가 궁금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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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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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한 순간은 늘 어려운 법이다. 입학 첫날, 첫눈, 첫 크리스마스, 뭐든 첫 번째가 어렵다. 추악했던 기억들, 무기력했던 감정들이 모두 수면 위로 떠오른다. p. 470 -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이 내 기억 속에 각인된 이유는 이 사건이 세상에 미치는 크나큰 여파도 있었지만 이 사건이 나의 중대한 순간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99 4월 나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고통과 인내로 점철된 고3시절을 지나 꿈에 그리던 대학 캠퍼스의 낭만과 여유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의 내게 이 사건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유난히 싱그럽게 느껴졌던 캠퍼스라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살인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그 대조적인 상황적 간극이 내게 무겁게 다가왔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한 2007년에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사건이 일어났다. 33명을 죽이고 29명을 다치게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승희는 자신의 공격을 설명하려고 성명서를 남겼다. 조승희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사람으로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에릭과 딜런을 언급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연구실 문 앞에 놓여진 신문 1면의 조승희의 사진과 사건에 대한 헤드라인을 보고 받은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타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 같은 악의 발현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을 두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총기난사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커져갔다. "도대체 왜?"

 


그후 나는 사건에 대한 기사와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등을 찾아보며 나름대로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이 사건이 세상에 미친 파장에 걸맞게 여러 영화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마이클 무어는 도대체 왜 미국에만 이렇게 많은 총기사고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을 만들었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그것은 범인들에게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된 마를린 맨슨에게 마이클 무어가 던진 질문과 답이었다.


 

사건의 당사자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소?”

말하는 대신 듣겠어요. 듣는 사람도 있어야죠.”

 


사건의 원인과 결과, 일어난 사실들에 대한 정보에만 갈급했던 내게 마를린 맨슨의 대답은 놀라웠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사건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하였다면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는 당사자의 얘기를 듣는 영화에 가까웠다. 마를린 맨슨의 말처럼 사건의 원인은 모두가 궁금해하는데 반해 사건의 당사자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그들의 사정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이 사건에 접근한 나에게 영화 엘리펀트는 사건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사나 영화들만으로 나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책 "콜럼바인 : 비극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보고서"를 만났다. 25천페이지가 넘는 문서와 영상들, 취재부터 집필까지 10년이 걸린 저널리즘의 역작이자 여러 차례 최고의 논픽션상을 수상하고 2010년 에드거상 Best Fact Crime 부문을 수상한 이 책 속에서 나는 대중을 위한 설득논리가 아닌 나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자 데이브 컬런은 책 속에서 사건발생 이전과 이후를 넘나들며 검토 가능한 수많은 자료를 통해 사건의 전개과정과 범인들의 인격과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사건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객관화된 자료를 통해 사건을 돌아보며 사건의 원인에 대한 규명이 왜 그토록 어려웠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콜럼바인 사태를 떠올릴 때면, 트렌치코드 마피아 출신의 부적응자 고스족 두명이 오랫동안 이어져온 반목 때문에 고등학교에 난입하여 운동선수를 공격한 사건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고스족도 부적응자도 갑작스러운 감정의 폭발도 아니었다. 반목도 트렌치코트 마피아도 아니었다. 이런 요소들은 원래 콜럼바인에 있던 것들이다. 그래서 소문이 그토록 빠르게 퍼질수 있었다. 그러나 살인자들과는 전혀 무관했다. 마를린 맨슨, 히틀러 생일, 소수민족,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 p. 252 -

 


이 사건과 얽혀진 이해관계자의 집단은 저마다의 이유로 사건의 원인에 대해 규정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사건의 진실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학살극이 끝나자 범인들의 이름이나 정체가 밝혀지기 전부터 기자들은 이들을 하나의 부류로 단정했다. 사건의 발생장소인 학교라는 공간은 교내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인한 외톨이의 소행이라는 손쉬운 사건의 동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교내 총격자에게 어울리는 가공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그렇게 고스족, 게이, 사회부적응자, 거리의 깡패는 외톨이의 구체화된 이미지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신문은 실제로 그 광경을 보았다는 단 한명의 진술로 가설을 만들어 나갔고, 아예 목격자를 거론하지 않은 신문도 있었다. 로이터는 "많은 목격자들"이 그렇게 주장했다고 했고, USA투데이는 "학생들"이라고 했다. "학생" "목격자"와 동의어였다. 그날 일어났던 모든 일을 다 목격했고 살인자의 모든 것을 다 보았다는 것이다. 비약도 이런 비약이 없었다. – p. 257 –

 


경관들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대형 폭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언론매체에 새로운 충격파를 던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자들은 발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형사들은 목표 대상가설을 즉시 버렸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노리고 저지른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를 완전히 잘못 짚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언론매체는 이를 고수했다. 그들은 콜럼바인에서 일어난 비극이 총격사건이며 살인자들은 운동선수를 노린 부적응자들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그들은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 p. 213 -


 

경관들은 사건 초기부터 보고서에 범행동기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담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우리는 사실을 다룹니다." "이런 저런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노력할 겁니다. 여기 사실이 있습니다. 결론은 보고서를 읽는 여러분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언론의 오보와 책임회피, 사건을 해결해야 할 전문가들의 직무유기로 인해 대중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얼치기 전문가가 되어갔다.


 

조사관들이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밝혀내는데 수개월이 걸렸다. 살인 동기를 밝히는데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형사 팀이 사건을 설명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터였다. 대중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언론매체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추측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 p. 122 -


 

범죄와 재난상황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뭐가 뭔지 혼란스럽다가 점차 명료하게 전모가 밝혀지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다. 사실관계가 파악되고 모호한 면이 걷히면 정확한 그림이 잡힌다. 그리고 대중이 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려진 그림은 진실과 무관할 때도 많다. 1999년 콜럼바인의 살인과 공포는 현실이었지만 당시에는 사건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이해관계자들이 만들어 낸 허상만 존재했다. 심지어 콜럼바인 사건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는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콜럼바인 사건의 첫 희생자 레이첼 조이 스콧을 주인공으로 콜럼바인 사건의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 아임낫어쉐임드는 사건의 범인을 트렌치코트 마피아 출신의 교내 따돌림의 희생양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사건 발생일 420일은 히틀러의 탄생일임을 언급한다.


 

책속에서 에릭이 학교를 범행의 대상으로 정한 것은 언급한 대목도 흥미로웠다. 학교는 에릭에게 있어 사춘기 시절 자신이 학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곳이자 자신 보다 열등하도고 생각하는 타인들 즉, 로봇을 양성하는 공장이었다. 에릭은 사건이 발생하기 2년전부터 학교 총기사건을 주목하고 수업 과제물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총알이 장전된 권총을 학교에 가져가는 것은 계산기를 가져가는 것만틈이나 쉬운 일이다." 영어교사는 과제물을 이렇게 평가했다. "빈틈없고 논리적임. 잘했음" – p. 336 -


 

사회학자 마크 위르겐스마이어는 "테러리즘의 핵심적 특징은 폭력의 상연"이라고 하였다. 에릭이 일지에서 청중이라는 말을 언급하였듯이 에릭에게 있어서 콜럼바인 학살은 공연이었다. 에릭의 의도는 스포츠 경기나 댄스 같은 일회성 사건으로 묻히는 것이 아닌 청중이 평생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극한의 공포를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건 이후 전국의 학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를 두려워한 것과 콜럼바인이 세상에 미친 파장을 생각해볼 때 에릭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에릭이 나름의 이유로 학교에 주목한것처럼 우리는 왜 학교였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은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사건을 보는 시각을 개인의 불행이 아닌, 문제의 발생원인이자 구조적 문제인 사회 시스템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콜럼바인 사건은 사회시스템의 결함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에릭과 같은 사이코패스, 딜런과 같은 우울증 환자를 사회가 잉태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징후를 발견하고 당사자들이 벌인 콜럼바인과 같은 사건을 제도와 시스템으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가 공격 받은 것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결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돈 마르크스하우젠 목사는 사탄 운운하는 말이 영 못마땅했다. 그는 두 아이가 마음속에 증오를 품고 무기를 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일을 어떻게 그리고 왜 했는지 사회가 서둘러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쉽게 빠져나가려는 속셈이었다. 자신들이 책임지고 조사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 p. 204 -

 


책임전가는 사건을 해결된 것처럼 보이기 위한 손쉬운 방편으로 작용한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문제의 영역으로부터 배제시키고 부조리가 관행으로 자리잡고 하나의 삶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전체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변화시킨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을 찾기 위해 탐구해야 한다. 문제를 문제로 두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만 바꾸는 태도로서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고, 악의 연쇄만 되풀이될 뿐이다. 콜럼바인 사건은 사회 구조적 문제였다. 하지만 사회 구조적 문제는 사건을 바라보는 프레임의 변화로 우리 모두의 문제에서 개인의 문제로 종결되어 버렸다볼링 포 콜럼바인의 문제제기는 왜 본질적인 원인을 찾지 않고 핀트가 어긋난 부차적인 문제들만 들쑤시느냐는 것이다.


 

콜럼바인 사건에 접근해갈수록 어쩔 수 없이 세월호가 떠올랐다.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는 대표적인 프레임은 신자유주의이다. 세월호는 우연하게 발생한 단순한 해양사고가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된 예견된 사고라는 것이다. 이윤 극대화를 위한 증축과 개축, 과적과 평형수 부족이 그렇고, 선원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었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안전을 담보하고 관리해야할 국가기관이 구조적 유착으로 탈규제에 이르게 된 정황이 그렇다. 세월호는 국가와 사회의 부재 속에 약육강식의 원초적 본능과 무질서만이 존재하는 정글에서 잉태되었다. 또한 이는 원자화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만 남아있는 2000년대 대한민국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라는 쇠로 만든 새장 (The Iron Cage)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은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시스템의 부속품에서 이탈한 순간, 파편화된 개인은 사회에서 고립되어 무력감 속에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se)’라는 용어가 있다. ‘사덴은 상처를 주는것, ‘프로이데는 환희라는 뜻으로 샤덴프로이데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줌으로서 느끼는 환희를 의미한다. 우리 중 누구도 에릭처럼 세상의 멸망을 꿈꾸거나 딜런처럼 자살충동을 느끼는 등 부정적 파괴욕망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나의 행위로 인해 타인이 처하게 되는 고난적 상황을 기뻐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적 기제는 어떠한 상황하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너무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 나라는 자기정체성이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만이 깃든 상태에서 악은 발현될 수 있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공허하고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악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불평등한 격차가 역전의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회, 개선의 가능성, 그 여지 조차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불안과 허무를 느낀다. 그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 고통과 고뇌의 원인 조차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구조의 거대한 힘을 느끼게 되는 순간, 개인이 세계와 단절되고 사회와 유리되었을 때 악은 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여러 이점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자체에서 악을 잉태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개인을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공허함을 느끼게 하고 고통과 번뇌를 느끼게 함으로서 결국 악을 발현시킨다. 시스템 내부에 이미 내정되어 있어 악은 시스템에 기생하며 악이 연쇄적으로 발현된다.

 


물론 완벽한 이념은 없다. 이데올로기는 적절한 방법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지나친 경쟁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가 저 악마의 맷돌의 수레바퀴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악이 매력적인 이유는 악은 오로지 자기자신과 자신의 방식을 믿는 확고한 신뢰가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만 옳고 나만 믿을 수 있다라는 생각은 나 이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점차 파편화되고 원자화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 속에서 악은 번성한다. 악을 극복하는 방법은 신뢰와 연대를 통해서 가능하다.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공존하며 살아 갈 수 있다.

 


패트릭은 세상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도서관 바닥에 쓰러져 있으면서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해 동안 찬찬히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제가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때 누군가가 잘 잡아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사랑스러운 세상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p. 504 -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계에 절망하며 무릎 꿇지 않고 같이 신뢰, 공감, 연대하며 상호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사소한 변화와 미약한 성공이라고 하더라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생존자들은 걱정을 잊으려고 평범한 일상에 집중했고 이런 승리를 통해 위기를 헤쳐갔다. – p. 170 -

 

 


#콜럼바인, #문학동네, #데이브컬런, #장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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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역사 -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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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비의 역사> 내가 처음 이 책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이 책의 홍보 문구에 대한 약간의 반감(?)이었다.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홍보문구의 의미는 저자가 남긴 서문에 더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일상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소비의 역사'를 다룬다. 한국 인문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소비와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비는 고전경제학과 경제사에서도 도외시되었고, 특히 생산을 중시했던 근대사회에서는 소비를 생산과 대비시키며 그 의미를 폄하해왔다. 예를 들어 '생산적인 관계'라는 말에 비해 소비적인 논쟁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평적 대비를 넘어 소비에 열등성과 부정적 함의를 투사한다. 나아가 소비를 사치나 방탕과 연결시키곤 하는 사회적 통념은 결과적으로 소비를 진지한 연구의 대상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p. 4)

 

 

과연 그럴까? 소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학문적으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경제학도로서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공급은 스스로 자신의 수요를 창출한다(Supply creates its own demand)는 세이의 법칙 (Say’s law)으로 대표되는 고전학파의 주장은 자신들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공황을 맞이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때 등장한 케인즈는 유효수요론 (Theory of effective demand)으로 고전학파의 주장을 반박하며 대공황의 원인을 설명한다. 케인즈의 주장은 공급은 수요에 의해 한정된다는 것이며, 여기서 등장하는 유효수요란 소비를 의미한다. 거시경제를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 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는 경제학사는 물론 경제학의 발전을 이끈 큰 원동력이었고, 이를 촉진시킨 화두는 유효수요 즉, 소비였다. 그런데 소비가 경제학과 경제사에서 도외시되었고 소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니…… 저자의 주장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저자의 주장의 의미가 어떤 거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저자가 바라보는 '소비'는 단순히 물건을 사거나 쓰는 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나 상징 등의 비물질 요소를 포함하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고 폐기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관계형성 및 이데올로기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이런 '소비'라는 개념을 살피기 위해 상품, 마케팅, 유통채널, 소비의 주체 등을 총괄적으로 접근한다. 또한 상품에 대한 평가나 불매운동과 같은 행위를 돌아봄으로서 소비의 장구한 역사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저항과 해방, 연대의식을 끄집어내고 있다.책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상품 (Procuct) : 굿즈 Goods, 욕망하다

 

근대초 유럽에서 유언장은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물건들을 소유했고, 어떤 물건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아내에게 남긴 셰익스피어 일화가 인상 깊었다. 혁명 후 등장한 양복과 기성복의 등장에는 계층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결과였다. 신부의 드레스, 신랑의 턱시도와 관련된 논쟁에서는 최근의 화두인 젠데이슈 및 당시 사회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유럽풍으로 변해가는 중국도자기를 보면서 미지의 세계를 소유하려는 유럽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비누는 서구 중심적인 제국주의로부터 파생된 인종 차별적 최초의 식민주의 상품이었다.

 

 

 

2. 촉진 (Promotion) : 세일즈 Sales, 유혹하다

 

노동 및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여성들은 18~19c 판매자로서 생산의 대열에 합류하게된다. '판매여성 (Saleswoman)과 상품은 하나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은 이러한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18~19c 약장수의 성공을 마케팅 측면으로 분석해 보면 이방인이 가진 신비주의적 요소, 인쇄물을 통한 광고, 정부의 느슨한 규제 등으로 분석한 대목은 참 흥미로웠다. 19c의 재봉틀을 보면 해외판매와 최초의 할부제 도입이 성공요인으로 작용했고, 젠더이슈를 부각시켜 여성적인 물건이라는 광고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이 성공의 큰 요인이었다는게 놀라웠다. 에이본 레이디라 불리는 화장품 방문판매원도 소비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판매원도 소비자도 여성인 면에서 마케팅 포커스가 잘 작용되었고 동시에 방문판매라는 획기적인 채널로 이를 극대화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광고와 홍보 목적에서 유행했던 트레이드 카드가 인쇄기술의 발달로 몰락한 사례를 보면서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느껴지기도 했다.

 

 

 

3. 소비주체 (Consuming subjects) : 컨슈머 Consumer, 소비하다

 

소비평활화를 위한 노동계급의 계모임과 과시적 소비 사례에서는 근대식 금융제도가 등장하기 이전 계모임이란 관행적 제도가 언제 어떻게 등장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수집은 과연 소비 행위인가라는 논점과 관련해서는 수집행위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소비행위라는 경제학자 제이콥 바이너의 발언이 흥미로웠다. 근대초 의학서의 비밀스런 소비라는 테마에서는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을 고찰하는 대목이 재미있었다. 책의 독자는 본질적으로 텍스트의 세계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여행객이며 저항성을 내포한다는 것은 독자들이 자신만이 독특한 내면세계에 비추어 책을 소화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성형소비의 내셔널리티와 관련된 주제에서는 국가별 문화차이에 따른 소비성향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4. 유통 (Place) : 마켓 Market, 확장하다

 

순례지에서 의료 서비스 시장으로 변화한 바스 (Bath) 사례를 보며 유통채널의 진화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거대한 수정궁으로 지어진 영국의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의 성과와 신기한 상품들로 구성되어 소비자들의 이목을 끄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자 유통 채널이었다. 또한 카탈로그와 홈쇼핑의 등장은 소비의 역사에서 욕망을 평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쇼핑몰은 19c 미국의 소비문화를 주도한 백화점에서 시공간을 재구성하고 인구구성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소비공간의 혁명이자 진화였다.

 

 

이 책은 소비라는 하나의 테마를 통해서 본 역사의 발전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E.H. Carr의 말처럼 이 책은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결코 오늘날 직면한 문제들과 동 떨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소비라는 주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조망함으로써 역사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는지 느끼게 해준다. 또한 소비자 운동의 발생이나 바이 아메리칸 캠페인의 역사, 윤리적 소비의 기원 등을 살펴봄으로서 소비의 역사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저항과 해방 연대의 주제도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은 홍보문구에 대한 오해와 반발로부터 시작했지만 소비의 역사에 대한 공감과 설득으로 마무리되었다.역사라는 테마를 새로운 방식으로 살펴보길 원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소비의역사, #설혜심,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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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의 맛! - 우리 문화유산 무엇을 볼 것인가
홍지석 지음 / 모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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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답사의 맛'은 표지에 등장하는 질문 "우리 문화유산 무엇을 볼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고민의 결과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문화유산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저자가 고민 끝에 이 책에 담아내고자 한 우리 문화유산 답사의 방향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산해진미가 아닌 정갈하게 차려진 한 그릇의 김치찌개와 같은 답사이다. 저자는 본 도서를 통해 느린 호흡의 여유로운 답사 형식, 차분한 호흡의 사색과 치유의 시간을 누리는 답사여행을 지향한다. 거창한 답사가 아닌 작품 한 두 점을 보아도 수십 점의 작품을 보는 것 못지 않은 충만감을 느끼는 산해진미로 풍성한 밥상이 아닌 매콤한 김치찌개 한 그릇과 같은 답사기… 매력적이지 않은가?

 

 

둘째, 현장에서 만나는 유물들을 하나의 미술작품으로서 향유가 가능한 답사이다. 우리가 지역 답사에서 만나는 문화유산들은 역사의 발전, 선인들의 기억과 경험, 지혜를 반영하는 유물이자 사료이며 동시에 인간의 감성과 지성에 호소하는 '예술작품'이다. 따라서 저자는 본 도서를 통해 오직 답사를 다녀본 사람만이 알고 있는 각별한 즐거움을 제공하고자 한다. 작품의 실제 규모, 미세한 색감, 재료의 질감, 광택이 주는 자극, 작품이 주변환경과 어울려 자아내는 미묘하고 독특한 분위기 등은 오로지 답사 현장에서만 체감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각별한 즐거움을 오롯이 아우른 감각적인 답사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큰 방향성을 두고 저자는 세부 기준을 정함으로써 구체적 답사지를 선정하였다. 구체적인 세부기준은 다음과 같다.

 

 

 

 

이 세가지 세부 기준 중 저자는 2번째 기준을 주요하게 검토한 듯 하다. 저자가 언급하는 두 번째 세부기준, 독특한 매력을 지닌 빼어난 작품이란 한국 미술사에서 갑자기 익숙한 미의 표준이나 관습적 형식을 벗어난 파격적인 작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 의해 선택된 작품들은 4등신의 강렬한 외양을 지닌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 성덕대왕 신종으로 대표되는 한국 종의 위대한 전통에서 벗어난 보신각종 등이 있다. 구체적인 각각의 답사의 소제목은 다음과 같다.

 

 

 

 

결론적으로 이 책 '답사의 맛'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의 규범적 걸작들에서 벗어난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 몇 가지에 주목하고 이를 여유로운 호흡의 느린 답사, 그리고 그러한 답사를 수행하는데 있어 현장에서만 체감할 수 있는 맛을 느끼게 해주는 가이드와 같은 답사기이다.

 

 

본 도서를 읽으며 미(美)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미(美)의 세계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까?'하는 생각… 단순하게 생각해보아도 미(美)의 기준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절대적이지 않다. 미의 기준은 본 도서에 등장하는 '종'이나 '불상', '석탑'의 사례처럼 시대에 변화에 따라 발전하기도 혹은 퇴보하기도 하며, 때로는 빅뱅 방식처럼 파격적인 형태로 갑자기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문화권의 차이에 따라 미의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문명의 교류에 의해 그 격차는 많이 좁혀졌지만 동양과 서양의 미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 시대와 문화권이 동일하더라도 미의 기준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서로 다른 예술관, 가치관, 미적 취향 속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 우열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까? 여기에 본 도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예술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은 가치의 교차로, 취향의 갈림길에 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저자가 제시하는 작품들은 한국미술사의 규범적 걸작들이 아닌 오히려 그 규범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맛보기로 도서에서 언급한 가치의 교차로, 취향의 갈림길의 사례를 든다면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함께 언급된 작품이 이탈리아 로렌초 베르니니의 <아폴로와 다프네>이다. 베르니니라는 최고의 조각가의 최고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은 어디에서 작품을 찍을지 몰라 당황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작품을 대표할만한 결정적인 지점, 이미지를 찾기 힘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람객들은 어느 쪽에서 봐도 극적이고 아름다운 이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손쉽게 확보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품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이 있다. 부분과 전체의 균형과 비례, 안정감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자들이다. 힐데브란트는 조각가들에게 '환조 (3차원의 입체조각)를 만들 때는 부조 (평면상에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것)처럼 만들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환조를 만들 때 입체성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억눌러 전체성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이는 환조의 360도 방향 모두를 존중하기보다 부조처럼 어느 한면에 에너지를 집중해 전체를 제시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균형과 안정감이 예술이 중시해야 할 가치인가? 아니면 다양성과 역동성을 더 추구해야 하는가? 다양한 불상과 탑들이 일정한 규칙 없이 존재하는, 부분과 전체간의 균형과 통일성이 없는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평가절하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이 책에는 미적 가치를 탐구하는 질문과 사색들이 역사적 사실과 맞물려 흥미로운 지점이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최초의 근대 조각가 김복진의 거대 불상 도전기, 최초의 전형석탑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왕년의 답사광들의 경주 순례기, 1942년 옛것을 좋아하는 호고(好古) 일당의 조선백자 유람기를 현 시점에서 추적하는 이야기 등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우리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저자의 가이드에 따라 답사를 진행하며 당신이 추구하는 미적 가치와 취향을 토대로 TV 오디션 프로그램의 평가위원처럼 평가를 해보는 건 어떨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당신의 점수는 몇점인가?

 

 

'제 점수는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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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보이 2017-08-29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준이 확실한 답사기이군요. 규범적 걸작들에게서 벗어난 독특한 미에 대한 주목을 하는 ㅎㅎ 관심이 갑니다. 저도 읽고 제 나름의 미적 기준을 가지고 평가해보고 싶어지네요^^

잭와일드 2017-08-30 09:21   좋아요 0 | URL
네 독특한 관점이 돋보이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시간 나실때 읽어보세요.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