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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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게 어떻게 끝날진 모르겠어. 내 진짜 위치를 모르겠어.
그녀는 어둠에게 말했다
.
하지만 그녀가 받은 유일한 답은 더 깊은 어둠뿐이었다
.
하지만 위층에는 빛이 있을지도 모르고

다시 밖으로 나가면 분명 빛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운명의 장난으로 빛이 없다면
,
세상에 남는 것이 밤뿐이고 빠져나갈 길이 없다면
?
그렇다면 그녀는 밤과 친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추락한 이유> 495쪽

 

<우리가 추락한 이유><미스틱 리버>, <살인자들의 섬>, <운명의 날>의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애드거 상, 앤소니 상, 배리 상 등 수많은 저명한 추리 문학상을 수상한, 범죄 소설의 대가다. <우리가 추락한 이유>가 그의 전작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여성 시점으로 서술되는 루헤인의 첫 로맨틱 스릴러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출간 전부터 할리우드 제작사들의 치열한 판권 경쟁으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드림웍스에서 판권을 획득해 영화화를 진행중이고, 데니스 루헤인이 직접 각색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루헤인은 이번 소설에서 어린 시절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생긴 트라우마를 극복해나가고 있는 주인공 레이철이 살인, 사기, 복수, 탐욕 등이 뒤섞인 사건에 휘말리며 거침없이 폭주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레이철의 삶을 추적하는 전반부와 반전을 내포하고 있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충격적인 레이철의 독백을 도입으로 해서 그녀의 삶과 가족에 대한  대한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성격 파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멋대로인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와 생이별한 레이철, 그녀는 어머니와의 끝없는 반목 속에서 생부에 대한 그리움이 더 깊어만 간다. 그녀가 대학생 때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레이철은 물려받은 적지 않은 유산으로 생부를 찾아나선다.

하지만 그녀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제임스'라는 이름과 과거의 아버지의 직업, 그리고 어릴적 그녀의 곁을 떠나던 모습이 전부였다. 의뢰를 받은 사설 조사원마저도 친부를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돈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와 함께 의뢰를 거절한다. 낙담한 레이철은 이후에도 여러 노력을 거듭하지만 끝내 아버지를 찾지 못한다.

수년이 흐른 후, 레이철은 자신의 재능을 살려 언론사에서 기자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게 되고 이 과정에서 뜻밖에 친부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되고 수소문 끝에, 드디어 제임스란 이름의 남자를 찾아낸다. 레이철이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던 제임스는 그녀를 따뜻하게 반기지만, 자신이 레이철의 생부가 아님을 알려준다. 어머니의 외유로 인해 자신이 태어났음을 알게 된 레이철은 절망에 이르고, 급기야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

친부를 찾다가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과 기자로서 겪게 된 일련의 사건 때문에 레이철은 극심한 공황장애와 대인공포증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해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집안에만 틀어박힌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친부를 찾는 것을 의뢰했던 사설 조사원 브라이언과 다시 만나게 되고, 그의 열렬한 구애를 받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그리고 그와 결혼 후 2년 동안 남편의 한결같은 헌신과 노력으로 레이철은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해 나간다.

 

하지만 연인과의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게 된 이 시점부터 소설의 전반부는 정리되고 반전이 내포되어 있는 후반부가 시작된ㄷ. 어느 비오는 날, 대인기피증과 공황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나온 거리에서 해외 출장을 떠났을 남편 브라이언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레이철,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불안감과 의혹에 남편 브라이언의 정체를 캐내려 그의 주변을 탐문한다. 그리고 드러나는 충격적인 진실, 그리고 살인과 폭력, 속임수 등 하나씩 남편의 정체를 알아가며 레이철은 돌아올 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루헤인이 처음으로 시도한 로맨틱 스릴러의 결말을 어떻게 될까? 직접 책을 읽고 확인해보시길

#데니스루헤인, #황금가지, #우리가추락한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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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타 할머니의 우아한 강도 인생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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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Too Old to Rock and Roll!! (락앤롤을 하기에 결코 늙지 않았다!!)
 
영화 '로큰롤 인생'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노인 밴드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평균나이 81세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엔 다소 많은 나이의 노인들이마음은 청춘이라는 이름의 밴드에 모여 가사를 까먹고 박자를 놓치면서도 세계적인 락밴드의 곡을 열정적으로 부르는 모습은 당시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비슷한 평균연령과 합창단 출신이라는 이력 그리고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현재의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 메르타 할머니 일행은영앳하트밴드의 멤버를 연상시킨다. ‘영앳하트밴드에 메르타 할머니와 같은 리더가 있었다면 그들도 소설 같은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

 


전 시리즈에서 은행과 박물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까지 털었던 메르타 할머니 일행은은행 터는 일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는 메르타 할머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메르타 할머니의 우아한 강도 인생>에서는 쓰레기 수거차와 진공 파이프를 이용한 통쾌한 은행털이극으로 그 포문을 열고 있다. 우리가 메르타 할머니 일행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미 은퇴할 나이를 넘어선 노인들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행동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적 복지국가인 스웨덴에 살고있는 노인들이 그들이 직면한 각종 사회 부조리를 통쾌하게 비꼬고 저항하면서 정치와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젊은이들에게 잘 모른다는 이유로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눈감지 말라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
 

 


또한 그들은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한 명확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돈은 모두 더 나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지만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쓰일 것이다.’ (33) 는 메르타 할머니의 말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메르타 일행은 모든 구성원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작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빈티지빌이나환희마을’, ‘회색 표범들이 사는 동굴로 이름을 붙인 그곳은 노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남은 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메르타 할머니는 그 곳을 만드는 일을 연인과의 결혼 보다도 우선순위로 두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인다
.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일들을 저지르지만 원칙을 세워 일정 수준의 선을 지키고 있다. 범죄의 대상을 부패한 자본가로 정하는 것, 총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 도주시 길거리에 타이어 펑크용 쇠못을 뿌리지 않는 것, 차량을 불태우거나 인질극을 벌이지 않는 것 등 그들이 정한 원칙은 범죄 후 도주에 불리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특징을 이용해 좁혀오는 수사망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원칙을 고수하는 이유는 사회 개혁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억울하고 불필요한 희생은 없어야 한다는 그들의 의지의 표명 아닐까?

 

 


이번 시리즈의 백미는 소설의 중후반부 5억 크로나 ( 625억원)의 초호화 요트를 훔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앞에서 열거한 메르타 할머니 열풍의 원인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은행털이에 몇 십번 이상 성공해야 모을 수 있는 부를 축적한 요트의 주인이 사기꾼이자 조세 포탈범이라는 것을 포착하고 지중해 생트로페에 있는 그의 요트를 훔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또한 탈취한 요트를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수십억 달러를 굴리면서 세금은 한푼도 내지 않는 올레크와 보리스를 만나게 된다. 요트를 헐값에 갈취하려는 그들과 메르타 일행의 싸움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연륜을 기반으로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어느새 그들의 행동을 지지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합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그래왔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겁니다
."
 
모지스 할머니가 자전 에세이 <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에 남긴 말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화가를 꿈꿨지만 삶의 무게로 인해 76세가 되어서야 붓을 잡았고,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때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93세에는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으며, 100번째 생일은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지정되었다. 그녀는 그녀가 살아낸 삶과 삶의 순간순간을 표현한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누구나 다른 삶의 밀도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소설 속 그들의 삶 보다 높은 밀도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 시리즈에서는 표범동굴에서 회색표범이 되어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때는 메르타와 천재의 사랑도 완결되지 않을까? 이 소설을 읽게 될 당신의 삶에도 그들처럼 열정과 유쾌함이 깃들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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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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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1999 4월 나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고통과 인내로 점철된 고3 시절을 지나 꿈에 그리던 대학 캠퍼스의 낭만과 여유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의 내게 이 사건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유난히 싱그럽게 느껴졌던 캠퍼스라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살인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그 대조적인 상황적 간극이 내게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에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연구실 문 앞에 놓여진 신문 1면의 조승희의 사진과 사건에 대한 헤드라인을 보고 받은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se)'...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타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지켜보면서 내가 주목하게 된 용어이다. '샤덴'은 상처를 주는것, '프로이데'는 환희라는 뜻으로 '샤덴프로이데'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줌으로서 느끼는 환희를 의미한다. 총기난사사건의 범인들처럼 우리는 삶의 어느 한 순간에 세상의 멸망을 꿈꾸고 자살충동을 느끼는 등 부정적 파괴욕구를 경험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나의 행위로 인해 타인이 처하게 되는 고난적 상황을 기뻐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일까? 사회를 향해 날이 서 있는 가시적 폭력을 간접 경험하면서 나는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 무해한 존재』의 주인공들은 지나온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절 관계의 '형성'이 아닌 '단절'이 남긴 균열의 흔적들을 세월이 지나 되새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소설은 가시적이고 의도된 폭력이 아닌 가시화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폭력을 조명한다.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자신의 작은 모서리를 쓰다듬어주는 진희와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주나가 있었던 학창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행복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깨닫는다. (『고백』, 196) 또한, 자신이 눈빛으로서 주나가 진희에게 했던 말 보다 더 가혹한 말을 했었다는 것을, 지금까지 애써 부정해 오던 잔인한 진실을 인정하게 된다. (『고백』, 207) 모래는 공무의 사진 속 어느 순간처럼 영원을 꿈꾸지만 (『모래로 지은 집』, 131), 그들의 관계는 프레임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사진 속 모래의 모습처럼 불안정했고, 결국 영원이 아닌 멈춤과 단절을 향해 나아간다. 혜인은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것인지, 또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관계가 남긴 흔적을 통해 깨닫는다. (『손길』, 226)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공무와 모래, 나비가 함께 길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 서로의 섬에 발을 내디뎠 듯이 (『모래로 지은 집』, 181)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이로움만을 건네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까?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세계에서 멈추지 않고 영원히 굴러가는 구와 같은 삶은 바람직한 삶일까? 이경은 수이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너에겐 아무 잘못이 없어. 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야 (『그 여름』, 49) 이경은 관계의 미숙함으로 인한 상실의 경험을 훗날 아프게 회고하지만, 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그 말만큼은 어리숙했던 시절의 그녀도 상대에게 위안이 아닌 상처를 주는 말임을 알았다. 랄도는 비록 부정적인 방향이지만 자신이 엄마를 아직 요동치게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런 식으로라도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며 관계에 아직도 피가 흐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기뻐한다. (『아치디에서』, 248)


어쩌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가시화된 폭력과,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와 배려로 포장된 무례, 자기기만과 이기적 방어기제 등이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상처와 균열은 삶을 영위하고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부정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무해한 존재였다는 자기기만과 진실에 대한 외면이, 그 오만한 태도와 피상적 단면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 세상의 진화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 정말 육아휴직 갈꺼니?"


작년 세상에 태어난 딸에 대한 축하인사 다음으로 회사의 지원부문 임원이 내게 건넨 말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해 회사는 작년부터 남성육아휴직을 의무화하기로 하였지만 아직 안정적으로 정착이 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인사와 복지정책을 총괄하는 지원부문 임원의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건넨 말 한마디는 내게 항거할 수 없는 압박이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이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평범한 남자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또한, 가시적인 폭력의 파괴력을 넘어서는 비가시적 폭력의 힘을, 그 지난한 세월을 거치면서도 변하지 않은 편견과 관습의 실재를 체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인간은 의도의 유무를 떠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하지만 상처와 균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일 수 밖에 없다. 함께라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흩어지는 안개와 모래, 이름 없는 고양이처럼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삶의 흔적, 아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이해 받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해라는 것은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와 타인의 배려에 대한 무시와 거부 (『모래로 지은 집』, 127) 넘어서야 하고, 또한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세상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이해를 이용하는 위선 (『모래로 지은 집』, 121) 극복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의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진정한 위로의 경험을 얻는다.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을 없는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백』, 209)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보이지 않지만, 인간은 서로간에 존재하는 적당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과 온기로 서로를 알아볼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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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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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는 해리성 인격장애자인 '이해리'와 위선적인 카톨릭 신부 '백진우'로 대표되는 불의한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낸 악의 카르텔을 포착하고 이에 맞서고자하는 약자들의 투쟁을 담은 이야기다. 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종교라는 성역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존재를 파헤치는 과정이 자못 충격적이다. <도가니>와 마찬가지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도시 무진에 펼쳐진 안개는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의 치부가 가려져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어버린 현실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안개는 손에 잡히진 않지만 우리 곁에 뚜렷이 존재하면서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은 곳까지 진실을 질식시키고 악이 번성하게 만든다. 안개는 모든 것을 가리는 환하고 하얀 어둠이다. (1112)

 

카프카는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악은 항상 선을 의식하기에 선을 알고 있지만, 선은 악을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악을 모른다는 것이다. 선은 상식의 영역에서 옳은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비상식의 악의 세계를 알 필요가 없지만, 악은 비상식의 영역에 위치하면서 상식의 가면을 쓰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선을 의식하게 된다.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잘 보이지 않지만, 어두운 곳에서 보면 밝은 곳의 세세한 부분이 잘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카프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선도 악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아니었을까? 동기적인 측면에서 선은 악을 알 필요가 없지만 악은 선을 필연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도 악을 알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선은 상식의 기준으로 내린 자신의 결정이 악을 번성하게 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고 악에 대해 무지하다. 이에 반해 비상식의 영역에 위치한 악은 선을 알고 이를 이용하면서 수더분한 얼굴과 선한 목소리로, 또한 자기 합리화라는 도구로서 자신을 포장할 정도로 치밀하고 영악하다.

 

안타깝게도 삶은 상식만으로 구성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자행되고 있을 악은 이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알프레드 델프가 '악이 역사 속에서 번창했던 이유를 선이 삶에 대한 시험의 극복을 삶의 한복판이 아닌 그 주변에서 행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280)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해리>를 읽으며 어쩌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가시화된 폭력과,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자신의 상처에 갇혀 발동되는 이기적 방어기제, 행동하지 않는 지식 등이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자기기만과 진실에 대한 외면이, 그 오만한 태도와 피상적 단면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 '잔디에서 하나둘씩 싹이 돋아나듯, 작은 실개천이 하나둘 모여들듯, 어느 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192)의 도래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인간이 쌓은 언어들, 이념들 혹은 평가들은 그저 허구에 불과했다.'(2273)는 작가의 말처럼 이념이라는 것은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인간의 산물이기에 본질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개라는 환하고 하얀 어둠에 둘러싸여 있을 때 인간은 해가 솟고 바람이 불어 세상이 스스로 정화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안개 속에서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깨어 있는 비판의식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였을 때 침묵하지 않고 여기 악이 있다고 외칠 수 있는 용기이다. '안개를 뚫고 나올 수 있는 단 하나의 것은 소리이며, 그 소리는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을 통해야 한다.'는 소설 속 이나의 말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인간 스스로 빛을 내고 바람을 일으켜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201610월 광화문을 밝힌 촛불은 20174월까지 전국 150여개 시군으로, 전 세계 31개국 71개 도시로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했지만, 1,700만여 개의 빛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을 이끌어내며 찬란하게 빛났다. 독일의 에버트 재단은 촛불집회에 참여한 우리 국민을 2017'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특정 국가의 국민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상이 제정된 이래 최초의 사례였다. 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에 집회에 참여한 모든 분들을 대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이며, 악을 극복하게 하는 건 두려움을 떨쳐내고 이루어낸 신뢰와 연대이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사회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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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 미드나잇 -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나를 위해 하루 15분 차분한 글쓰기
단디 편집부 지음 / 단디(도서출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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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미드나잇>은 시, 명언, 소설 등을 다양한 그림과 같이 구성하여 독자들이 자신만의 필체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이다. 책의 성격상 필체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독자들은 여기에 구속될 필요는 전혀 없다. 차분한 마음으로 정성스레 한획, 한획 그어가면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필체가 완성되어갈 것이다. 만년필을 처음 사용하거나 오랜만에 사용하는 사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런 독자들을 위해서 선 긋기 페이지도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이 있는 그림 위에 선 긋기를 하다 보면 나만의 그림이 완성될 것이다. 채색 여부의 선택도 독자들의 자유다.

 

 

 

필기구가 왜 만년필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도 책에 포함되어 있다. 책에서 만년필은 아름다운 손글씨에 최적화된 필기구로 정의된다. 그 이유는 만년필은 잡는 법은 볼펜과 비슷하지만, 붓글씨를 쓰는 것처럼 필체수정에 적합하다는 점, 펜촉의 필압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필압과 촉압의 강약을 고려하며 글씨 쓰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점, 글씨를 쓸 때도 펜촉의 리듬과 탄력을 살려서 쓰기 때문에 쓰는 사람의 감정과 의지가 나타나는 필기구라는 점을 들고 있다. 사용자의 마음과 감정상태가 필체에 그대로 나온다는 것, 정말 매력적인 필기구가 아닐까? 이러한 만년필 사용을 위한 팁과 펜촉 세척 등 관리방법에 대한 설명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책은 Part1 한글쓰기, Part2 영문쓰기, Part3 한문쓰기의 3가지 Part로 이루어져 있다.

 

 

 

 

Part1의 한글쓰기는 다양한 명화들과 명언과 소설문구, 시구절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 마음 안에 정답이 있다.’는 빈센트 반 고흐의 명언은 고흐의 자화상과 같이 구성되어 있고, 김소월의 시 <산유화>와 디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내용에 걸맞는 아름다운 그림과 같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독서에 어찌 장소를 택해서 하랴, 향리에 있거나 서울에 있거나, 오직 뜻을 세움이 어떠한가에 있을 따름이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퇴계 이황이 아들에게 남긴 편지 문구를 필사하면서는 학자로서의 이황이 아닌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로서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을 울렸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유>는 원고지 형식을 차용하여 독자들이 다양한 형식에 자신의 필체를 적용시켜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Part2의 영문쓰기는 영문 캘리그래피 (calligraphy, 손으로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의 기초를 익힐 수 있는 알파벳 필사 연습 페이지가 영문필체를 연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볍게 따라 써보면서 영문 필사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영어명문을 따라 써보는 동시에 이에 대한 해석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Part3의 한문쓰기는 무엇보다 감각적인 페이지 구성이 눈길을 끌었다. 이규보의 <술을 보낸 벗에게 사례하다>나 강세황의 <노상소견>, 권필의 <뚝뚝> 등의 페이지 구성은 한시와 그 배경이 되는 그림의 조화가 하나의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다.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가지, 고요한 방에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한다.”고 말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단순함이야말로 궁극적인 세련됨이다.” (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는 말을 했다. 바쁜 하루를 마감한 저녁, 잠시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나 하루 소설 속 글쓰기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여기 여유로운 마음으로 따라 쓰며 그리는 라이팅 & 드로잉 노트가 있다. 준비할 것은 만년필 한 자루와 진정한 나와 마주할 시간뿐이다. 행복은 결코 종착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는 길에 펼쳐져 있다고 로이 굿먼이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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