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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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을 열면서 나는 42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를 읽었다. 세대간, 성별간 시각 차이의 기저에 내려앉은 상실과 절망에 대해 무겁고 깊게 성찰한 소설이었다. 작가의 전작 <그 남자의 가출>에서 다룬 좌절, 실패, 상실감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더욱 깊게 침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은 유예 기간을 겪어야만 진정한 슬픔에 이르게 되지. 깊은 슬픔은 단번에 그냥 주어지지 않아. 어느날 문득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두 눈에서 용암처럼 눈물이 흘러나와 귓속에 고이지 않던가.”(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65)하고 읊조리던 소설 속 늙은 불한당의 독백은 가슴에 오래 남았다. 작가의 수상소감은아짐찮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아짐찮다는 말,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 말. 유언처럼 아껴둔 이 말.” 작가가 이 말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 작가는 작품집에 수상소감과 함께 자신의 문학적 자서전을 남겨 놓았다. 이것이 나를 작가의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으로 이끌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작가의 문학에 대한 진정성을 느꼈고, 동시에 온 생애를 다해 성과 속의 경계를 떠돌아야 하는 소설가로서의 그의 삶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학적 자서전은 본 산문집 1부에도절망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우리에게 문학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 손흥규에게 문학은 소다. 소는 그에게 다정한 동무인 동시에 소통불능의 벽이었고, 긴 세월 그의 삶을 담담하게 지켜봐온 목격자인 동시에 그를 배신하고 다른 세계로 떠난 그 무엇이었다. 또한 그것은아직 차갑기만 한 불꽃’ (18)처럼 삭혀지는 서투른 욕망과 분출되려는 욕망의 충돌이었고, ‘육식동물의 송곳니’ (20)처럼 단단하고 투박한 그의 잃어버린 일부분이기도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이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문학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눌 수 있을테니. <그 남자의 가출>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소설은 온기가 남은 아궁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 앉아 손을 내민 우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삶의 숨결을 느낀다. 산문집 뒷편의 미니픽션 <불한당의 소설사>에서 노소설가는문학은 감동을 통해 평범하고 흔한 진리를 비범하고 독특한 진리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341)라고 말한다. 이는 노소설가의 입을 빌린 작가 손흥규의 아포리즘 (Aphorism)임을 나는 이 산문집을 읽으며 깨달았다. 결국 문학은 우리가 선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118)

 

산문집에는아짐찮다.’는 작가의 수상소감의 의미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아짐찮다는 사전에 담기지 않은 말로 저자의 할머니가 자주 사용한, 저자가 결코 흉내낼 수 없다고 말하는 단어다. 언어는 기표 (Signifiant)와 기의 (Signifie)가 유동적인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작가는 할머니의 말투와 어휘를 흉내낼 수 없는 이유는 할머니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사연들과 그 말에 깃든 정서를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하나의 낱말 속에 담긴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무거운 한 사람의 인생과 진심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사전은 할머니의 삶과 정서, 목소리의 떨림까지는 담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작가는 소설가로서 사전에 없는 말을 탐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어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소설가는 사전이 아닌 삶에서 언어를 발굴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미 아는 삶이 아닌 다른 형태의 삶을 추구하는, 불확정의 영역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작가가 가진 사연의 일면들을 엿보면서 나는 조심스레 짐작을 해본다. ‘아짐찮다는 작가의 수상소감 속 마지막말은 긴 세월동안 함께 해온 문학에게 그가 건넨 인사 아니었을까?

 

산문집 전반에 흐르는 감정 중 하나는 작가의 딸을 향한 애정이다. 산문집의 제목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도 딸과의 에피소드에서 따왔다. 아이가 오른팔을 다쳐 아픔을 달래기 위해 왼손으로 감싸쥔 모습을 보고 작가는 결국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최선의 혹은 최소의 방법은 자신에게 기대는 것임을,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 속한다는 걸 (212) 부모의 입장에서 안쓰러운 시선으로 지켜본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몸이 아닌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이 많아지게 될 아이가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길 바란다. 어쩌면 나에게도 작가와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어 더 마음이 가고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완전한 어른은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시대에 존재하는 일렁임을 경험하고 극복하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딸 아이도 나이가 들면서모호한 단어들을 하나씩 명백한 단어들로 뒤바꿔가고’ (52),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제아무리 반듯이 펴놓는다 해도 구겨진 은박지처럼 삶에 흔적이 남을’ (195)것이다. 하지만 딸 아이가 삶을 살아가며 시대의 풍랑을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최고이자 최선의 응원은 자신이 살아 있고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 가족과 사회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종국에는가난하고 고된 시간이라 할지라도 사랑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장엄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임을, 무엇을 기억하든 실제로 기억하는 건 사람과 사랑뿐임을 (241) 깨닫게 되길 바란다.

 

“괴물은 숲속에 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숲속에는 네가 잃어버린 것들, 두고 온 것들이 있어. 잃어버린 걸 찾고 싶으면 깊은 숲으로 들어가야 해... 우리는 우리라는 하나의 사연이 되어 깊어가는 가을밤에 소리 없이 지는 낙엽처럼 서로의 손안에서 바스락거렸다.” (5)

 

우리가 잃어버린것들, 두고온 것들은 무엇일까? 개개인이 켜켜이 쌓아올린 저마다의 사연들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을 머금은채 조용히 빛난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혹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문학이라는 숲에 머물 것이다. 나 역시 그 속에 머물면서 앞으로의 작가의 여정을 지켜보며 응원할 것이다. 2018년 한해의 시작과 끝을 손흥규라는 한 사람의 작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손흥규, #마음을다쳐돌아가는저녁, #교유서가, #이상문학상수상자, #꿈을꾸었다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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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보이 2018-12-3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을 울리는 문장들이 많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잭와일드 2018-12-31 23:57   좋아요 0 | URL
2019년 새해 첫 책으로 추천 드립니다^^
골든보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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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유정 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출간을 기다리고 찾아 읽어본지 어느덧 3년이 된 것 같다. 김유정 문학상은 한 해 동안 문예지에 발표된 모든 중단편 소설을 대상으로 작품을 선별하고 시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에 걸맞게 올해 역시 표제작인 한강의 <작별>을 포함하여 7명의 빛나는 작품이 한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2018년을 이 책과 함께 마무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강화길의 <>은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자기본위적 편향에서 기인한 오해를 극복하고 삶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감춰진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음을 소설 속 화자와 독자들이 동시에 깨닫게 만드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은 악의 없는 무심함과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소외된 자들의 삶에 가하는 폭력을 그린다. 그럼으로서 종국에는 약자이자 소수일수 밖에 없는 우리를 지탱하는 건이해배려임을 보여준다. 김혜진의 <동네사람>은 집단 이기주의와 배타주의로 인한 왜곡된 인식과 믿음이 진실에 이르는 눈을 멀게 하고, 인간이 인간을 장담하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음을 아프게 그려낸다.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은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에 대한 일화를 통해서 인간 행동의 동기가 되는 집단적 광기와 비이성적 열기, 욕망의 실체에 대해 밀착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차분히 성찰한다. 정이현의 <언니>는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패악과 구시대적 질서 속에서 희생되는 가치와 약자들의 삶을 다룬다.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는 신기루와 같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허망함이 1970년 한국 뿐만 아니라 21세기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마지막으로 수상작인 한강의 <작별>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흰색을 말할때, ‘하얀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하얀과 달리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책이었다.” - <> 작가의 말 중 -

 

폴란드 바르샤바의 천변을 걸으며 썼다는 작가의 전작 <>을 읽었을 때, 어쩌면 나는 본작 <작별>을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로 시작하는 <작별>의 첫 대목부터 나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에게 생긴난처한 일이란 겨울날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는데, 눈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이 눈사람으로 변한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상식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는 그녀의 상처를 읽어내기 어렵다.

 

합의금으로 대체된 오빠의 죽음, 생존에 급급한 가난한 연인, 홀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자본주의 시스템의 도구로서의 삶... 그녀는 희지도 검지도,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삶을 살아 왔다. 자신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사물화된 그 어떤 것이라고 상상하는 그녀의 삶은 개인의 취향인 식성마저 억압당하는 <채식주의자>의 영혜를 연상시킨다.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몸도 사회와 권력을 통해 규제되고 강제된다. 하지만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자본주의 사회와 가부장적인 권력과 대면하여 저항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면, <작별>의 그녀에게서는 의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녀에게 눈사람으로 변하는 일은 그저 난처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그녀의 절망감이,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체념적이고 순응적인 태도가 슬프고 아프다. 멀쩡한 사람이 눈사람이 된 기막힌 사실 조차 그저 난처한 일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녀 주변을 둘러싼 참담한 현실이 가슴을 울린다. 눈사람이 된 이후에도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있는 몸을 다시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동안 어떤 시간들을 견뎌왔던 것일까?

 

하이데거는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매순간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다 종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다. 하지만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 (46)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일까, 그녀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53

 

<작별>은 인간적 가치가 소실되는 임계점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녀가 인간으로서 존재했던 것은 언제까지일까? 눈사람으로 변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아직  미미하게 따뜻하다. 그녀는 몸이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홀로 남겨질 아이와 연인을 걱정하며 서둘러 세상과의 작별을 준비한다. 부모님의 안위를 물으려 한 전화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안부를 묻자 그녀는 차마 대화를 더 이어나가지 못하고 잠시 전화를 끊는다. 마지막 순간 그녀가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뒤를 돌아본 이유는 세상에 대한 절망과 혐오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미련 때문 아니었을까? 동시에 그것은 슬픔과 외로움이 삶의 근원적 속성이며, 마지막 순간에도 그 사실 자체는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그녀의 마지막 몸짓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스러져 간다. 다만 눈 알갱이 안에 담긴 슬픔처럼 잠시 바닥을 적셨다가 고독하게 증발해버리고 말 뿐이다.

 

<작별>을 읽고 난후 내리는 눈을 하염 없이 바라 보았다. 눈은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하얀눈이 아닌 아닌 슬픔과 고독,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 있는눈으로 보였다. 저 내리는 눈이 세상을 정화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공중에서 제각각으로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지면에서 서로의 냉기를 견디며 하나가 되고 공기 입자들을 덜어내며 단단해진다.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연약하고 쉽게 증발해버리는 것이지만...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낸 뒤에야 남는 한마디 그 말... 사랑한다는 것이...



 


#김유정문학상, #은행나무, #작별, #한강, #강화길, #권여선, #김혜진, #이승우, #정이현, #정지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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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러시아
시베리카코 지음, 김진희 옮김 / 애니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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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러시아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맛있는 러시아>의 저자 시베리카코는 일본여성으로 러시아인 남편과 결혼했다. 일본으로 유학 온 남편에게 길안내를 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 케이스다. 결혼 후 남편과 일본에서 생활하던 중 "1년만 러시아에서 살아보면 좋을 것 같지 않아?"라는 남편의 뜬금 없는 제안에 의해 저자의 러시아 생활은 시작되었다.

 

러시아 남편을 두고 있는 저자에게도 러시아는 어둡고, 춥고, 무서운 '공포 이미지'가 강했다. 남편이 러시아 생활에 대해 제안을 하고 유학비용 전액부담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체험 등 당근을 던져도 저자가 완강하게 거부한 이유이다. 이런 이미지는 한국의 독자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영화나 미드를 통해 접한 러시아는 핵, 스파이, 킬러 등 범죄 조직의 악당 이미지와 도수 높은 보드카를 마시는 마초 이미지가 강했다. 따라서, '미술관도 가고 피자, 파스타,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이탈리아 생활에 대한 제안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귀여운 푸념을 하는 저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공감이 됐다.

 



그 나라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엿본다는 측면에서 호기심이 생기고 즐거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도전정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러시아 음식은 멕시코나 이탈리아음식처럼 세계적으로 대중화되지 않은 생소한 요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된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는 '음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었다. 일본인인 아내를 위해 남편은 쌀을 사오지만 저자 리카코는 러시아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만든 음식을 맛보며, 진정한 식도락 생활을 즐기기로 마음을 먹는다.

 

저자 시베리카코는 이렇게 시작된 1년간의 러시아 생활에서 겪은 일들을 만화 에세이 형태로 <맛있는 러시아>에 담아내었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음식을 매개로 진행이 되는데, 인상적인 부분은 음식에 대한 소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료부터 자세한 레시피, 음식과 얽힌 러시아 문화, 저자의 체험, 간단한 생활 러시아어까지 잘 버무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국민 스프 '보르시'를 소개할 때는 마트에서 재료를 구입하며 체험한 채소와 고기를 파는  러시아 마트의 방식과 구입시 흥정을 위한 생활 러시아어, 저자만의 독특한 레시피와 다양한 변형까지 보여주고 있다. 만화형식으로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지만 각 에피소드가 끝나면 이를 정리된 레시피 형태로 보여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대부분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지만 어려운 경우 한국에서도 공수할 수 있는 재료로 대체하여 만드는 방법도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다.

 



책에는 다양한 러시아 음식이 소개되어 있다. 하이라이스와 비슷한 '비프 스트로가노프', 잘게 자른 감자와 당근, 햄 등을 마요네즈로 버무린 '올리비에 샐러드',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리니', 러시아식 꼬치구이 '샤슬릭' 등의 요리는 물론 '홍차 버섯''크바스'등의 마시는 음료와 '메도빅''러시아 흑빵' 등의 디저트도 나온다.

 

아쉬웠던 것은 러시아식 만두 '펠메니'에 대한 내용이 적었다는 점이다. 교자랑 샤오롱바오와 비슷한 맛이라는 간략한 평만 나와 있어 만두를 좋아하는 내게는 다른 음식처럼 자세한 레시피와 다양한 변형요리에 대해 소개가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졌다.

 

전반적으로 책에 대해 평을 하자면 처음 책을 접했을 때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러시아의 이미지 때문에 "무섭다"로 시작했다면, 저자와 남편P씨의 아기자기한 음식소개로 인해 "맛있다"로 끝난 즐거운 한편의 코믹 에세이였다. 러시아 문화와 음식이 궁금한 분들에게, 또 러시아를 춥고 어두운 나라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분들에게도 소개할만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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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사일런스
외이뒤르 아바 올라프스도티르 지음, 양영란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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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이 궤도를 이탈하였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소설 <호텔 사일런스>에서 49세의 평범한 남자 요나스는 삶을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고,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 님페아도 자신의 핏줄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런 이유로 그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고 한다. 하지만 죽은 후 자신의 모습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발견하였을 때 그들이 받을 충격을 고려하여 죽음을 위한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다. 그가 선택한 곳은 전쟁이 막 끝나 죽음이 만연했던 곳,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전 중에 있는 나라다. 그는 천장에 밧줄을 달아 자살할 생각으로 ‘공구함’을 챙겨 여행을 떠난다.

그는 목적지인 호텔 사일런스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전쟁의 참극을 온몸으로 겪은 호텔의 직원들 메이, 피피, 아담을 만나게 된다. 그는 자살을 위해 준비해간 도구로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고쳐주면서, 서로를 위로하게 되고, 삶을 이어갈 용기를 서서히 회복하게 된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삶의 의욕을 다시 찾은 것이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이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배꼽은 태어날 때 탯줄이 떨어지면서 생긴 흉터로, 아기가 태어날 때 탯줄을 자름으로써 어머니 몸과 아기 사이의 연결을 끊는다. (25)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저마다의 삶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 재앙 앞에서 두 눈을 꼭 감고 모든 게 순조로운 것처럼 사는 것 같은 사람도 실상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삶의 형태를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전쟁의 참상을 겪은 메이는 말한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거예요. (261쪽)

절망 속에서 헤매던 요나스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돌보면서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되살린 것은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의 반증이다. 호텔 사일런스에 찾아온 몇 안되는 손님 중에는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한몫 잡으려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요나스를 보며 시소한 온정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수 없다고 말한다.

“당신은 정말로 ‘이 나라 전체를 땜질하듯 수리할 작정이오? 기껏 드릴 하나와 알량한 스카치테이프만 가지고 말이오? 산산조각 난 나라를 정말로 다시 붙일 수 있다고 믿느냔 말이오? 세상은 고작 스카치테이프만으로 좋아질 수 없소. (264쪽)

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서로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삶의 흔적, 아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재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의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진정한 위로의 경험을 얻는다.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을 수 없는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보이지 않지만, 인간은 서로 간에 존재하는 적당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과 온기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나스의 엄마는 치매에 걸린 상태에서도 세상을 향한 끈을 놓지 않는다. 그의 엄마가 보청기를 조절하려 애쓰는 이유는 아들 요나스와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과 같은 파장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이고 잠시나마 세상의 주파수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이다.33쪽)

여자가 별안간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손을 내민다. “메이”
나도 여자쪽으로 손을 내민다. “요나스”
우리는 이제 개인적인 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된다. 이 말은 곧 여자가 근무하는 동안에는 내가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173쪽)

모든 삶의 희망을 버리고 절망의 땅에 죽음을 구하고자 찾아온 요나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시 삶의 의지를 다진다.

아들과 동생을 데리고 어떻게든 비 오듯 쏟아지는 폭탄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이 젊은 여자에게 나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이 여자와 그의 동생에게 천장에 매달린 나를 끌어내리는 일까지 맡길 수는 없다. 창문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먼지와 폐허뿐인 상황에서, 나의 불행은 아무리 후하게 봐주어도 하찮기만 하다.“(177쪽)

 

작가는 독자에게 전하는 말에서 침묵은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말하는 침묵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 묻어나는 진정성 아닐까? 나도 다른 이의 삶을 응원하며 지지를 보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침묵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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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안개 속으로 잠복해 들어간 정의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일하는

태양 같은 존재를 위해’...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런 자세로 일했었어...’ (2권 123쪽)


<골든아워>의 저자 이국종 교수는 빛 바랜 수첩에서 전공의 시절 자신이 필사해놓은 문장을 보며 의사로서의 초심을 떠올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저자가 언급한 안개는 진실이 가려진 채 불의가 행해지는, 질서와 혼돈의 경계가 모호한 현실을 의미할 것이다. 안개는 손에 잡히진 않지만 우리 곁에 뚜렷이 존재하면서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은 곳까지 퍼져나가 진실을 질식시킨다. 2018년, 그 안개는 이제 걷혀졌을까?


2018년 10월 이국종 교수는 국감에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닥터헬기 운용에 대한) 문제점들이 1992년에도 똑같았고요. 한발짝도 못나갑니다.” 출근길에 미세먼지로 인해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20여년전 저자가 필사한 문장을 떠올렸다. 미세먼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의 물질로 대기를 부유한다. 하지만 눈으로 감지할 수 없기 때문에 미세먼지의 폐해는 더 파괴적이고 치명적이다. 미세먼지는 호흡기를 거쳐 폐 등에 침투하거나 혈중으로 유입되어 뇌질환과 심혈관계 질환을 유발하고 사망률을 증가시킨다.


한국의 환자 이송 시간은 평균 4시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전투 지역과 다르지 않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은 1940년대에 머물러 있었다.” (1권 52쪽)


한국사회의 안개는 걷혀지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더 위협적인 미세먼지로 퇴보한건 아닐까?


중증외상은 국민의 3대 사망 원인 중 하나이며, 특히 40대 이전 젊은층의 가장 큰 사망원인으로 노동자, 농민과 같은 블루칼라 계급이 집중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중증외상환자를 살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최대한 빠른 시간에 의료공백 없이 환자가 의료적 시술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골든 아워’이며, 이는 생과 사의 경계에 놓인 그들을 살리기 위해 절박하게 지켜내야 할 60분이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는데 필요한 것은 한명의 영웅이 아니라, 골든 아워를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 책은 시스템이 부재하거나 열악해서 길에서 허비되는 시간과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삶을 건져내기 위해 노력해 온 이국종 교수와 팀원들의 20여년 동안의 분투기이다.


얼마전 이국종 교수의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들었다. 우리는 혼돈과 질서의 기로에 선 경계인으로 삶을 살아간다. 안정된 삶 속에서도 갑작스럽게 사고는 발생하고,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안타까운 생명은 스러져간다. 가난해도, 정치적으로 이슈화되거나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아도 쓸쓸하게 생명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외상환자를 위한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하다. 죽음은 언젠가 찾아오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지는 않고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였을때 극복이 가능하게 하는 주위의 도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국종 교수가 ‘원칙’과 ‘표준’을 지향하는 시스템 구축을 거듭 주장하는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다. 이국종 교수에게 ‘원칙’은 어떤 환자라도 조건은 같고 환자는 언제나 상황에 우선한다는 것, 환자에게 가능한 더 빨리, 더 가까이 다가가야 생존율이 높아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람을 깎아내며 추진력을 얻는 헬리곱터처럼 이국종 교수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 원칙을 지키며, 중증외상센터의 세계적 표준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팀원들의 삶을 깎아내며 버티고 있었다.


점점 짙어지는 안개와 미세먼지 농도처럼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태양이 비추고 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고 세상이 스스로 정화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고 바람을 일으켜 사회를 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개와 미세먼지로 뒤덮인 현실에서 표준 외상센터 시스템 구축이라는 좌표까지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칙’이라는 불빛이다. 또한 현장을 위한 정책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한 ‘지속적 지원과 관심’이라는 바람이다.


최근 들어 의료행위의 보장 범위를 확대하는 요양급여 고시가 개정되고, 경기도에 24시간 닥터헬기가 도입되는 등 희망적인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봄은 형형색색의 꽃으로 구성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과 배려와 온정의 시민의식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모습일 것이다. 더이상 봄날이 그에게 피와 죽음의 바람이 부는 계절 (1권 18쪽)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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