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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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누구를 미치광이라 부를 수 있겠소?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요. 현실은 진실의 적이지요."
-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매트릭스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를 의미하며, 이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네오에게 두 가지 형태의 알약을 건넨다. 파란 알약은 비록 허구로 이루어진 세계이지만 그러한 현실에 안주하며 살 수 있는 약이고, 빨간 알약은 참혹하고 고통스럽지만 거짓을 꿰뚫고 불편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약이다. 네오는 단 한번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빨간 알약을 삼키고 진실을 택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히피>를 읽고, 알록달록한 주홍빛의 표지를 바라보며 나는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을 떠올렸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풍족한 삶을 가져다 주었지만, 자본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를 능가하게 되면서 개인은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되어왔다. 눈부신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히피운동은 기존의 제도와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 회복과 동등하고 평등한 사회 구축을 기치로 내세우며 등장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히피>에는 저마다의 환경 속에서 진실한 삶을 위해 '빨간 알약'을 삼킨 다양한 히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매직버스 안에서 자신을 향한 진실한 여정의 동반자로 만난다. 여행 속에서 진리를 찾는 파울로의 이전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이번에도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타의 소설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작가 파울로 본인도 여행에 참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의 파울로는 작가의 젊은 시절 모습으로 <히피>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브라질 청년 파울로는 삶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홀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만난 동반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지만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곤충이나 모래알 등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그는 중도에 여행을 멈추고 수행하는 삶을 택한다. 인생의 진리는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늙은 수피스트의 말은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모피어스의 말을 연상시킨다. 진실은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할 뿐, 진실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은 어쩌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우리들 자신 아닐까?

 

네덜란드 여성 카를라는 매력적인 외모와 번듯한 직장 등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바라보는 삶은 평생 남을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코 그녀 자신을 넘어서 본 적이 없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는 고독하고 우울한 삶이었다. '진실한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 (Now and Here)를 살지 못한다'는 정신과 의사 남자친구의 말은 그녀를 여행으로 이끌었다. 여행 중 파울로를 만난 그녀는 거짓을 진실로, 폭력을 평화로,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결국 사랑을 통해 그녀는 미지의 세계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었다.

 

매직버스의 운전사인 영국인 마이클의 꿈은 진정한 세상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까지 마친 그는 세계 각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성직자가 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탐낸 영국정부가 그를 스파이로 활용하려 하고, 그는 정부의 제의를 거절하고 매직버스에 오른다. '뒤를 돌아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감기고, 인류에게서 모든 희망의 흔적이 사라질 뿐이다.' (215)라고 말하는 마이클은 그가 쌓아온 과거 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프랑스인 자크와 마리는 부녀지간으로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그들 부녀의 존재는 중요한 것은 여정 그 자체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프랑스 유명 화장품회사의 마케팅 디렉터였던 자크는 68혁명과 임사체험이라는 두 가지 강렬한 경험 후에 딸과 함께하는 여행을 계획한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그가 낡고 오래된 버스를 선택한 이유는 열두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비행하면서도 옆 사람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에어프랑스 일등석은 그가 원하는 여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인 자크의 딸 마리는 여행중에 마약 LSD를 체험한다. 마약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심연에 도달하는 경험을 하지만 동시에 세상과의 접속을 끊고 타인의 행운이나 불행에 무심한 채 환각과 황홀경에만 집중하게 되는 어두운 단면도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마약의 유혹을 극복하고 세상에 재접속하여 일상의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택한다.

 

아일랜드인 라이언은 네팔에서 평행현실 속 시간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였고, 그 경험이 연인 미르트와 다시 여행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평행현실이라는 말은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평행현실은 라이언에게는 여행의 계기가 되었지만, 파울로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파울로는 이전의 여행에서 사회주의 운동가로 몰려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고, 그 고통스런 기억은 그의 물리적 현실에서는 사라졌지만, 평행현실, 즉 그가 동시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실들 중 하나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메트릭스의 설계자 아키텍트 (The Architect)와 만났을 때 등장한 수많은 모니터들은 네오의 선택에 따라 미래에 실현되는 수많은 평행현실을 나타낸다. 우리의 의식세계에서 현실은 고정된 실체처럼 인식되지만, 현실은 수많은 평행현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평행현실 중 하나를 실현시키는 것은 나의 행위, 즉 선택이다. 라이언은 평행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며, 그들이 지금 이 버스 안에서 같이 여행하는 것은 그들 각자가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수천 킬로미터를 가야 하는데, 이게 어떤 여행이 될지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달렸어. 이제까지는 불가능해 보이던 꿈을 추구해나가느냐. 아니면 불편한 좌석과 거슬리는 승객들한테만 얽매이느냐. 지금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모든 게 여행하는 내내 우리의 현실이 될 거야." (171)

 


 


소설을 읽으며 오늘날의 우리는 히피운동을 어떻게 봐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히피운동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 속에서 현실을 거부하고 이상을 추구했던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반항에서 비롯된 실패한 혁명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선택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71)는 말처럼 우리는 저마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소설 속 히피들도 서로가 여행의 동반자가 되지만 그들 각자가 도달하는 진리는 저마다 다르다. 히피들은 현실적 제약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상을 갈망했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해나갔다. 소설 속에서 '하루 5달러로 유럽 여행하기'는 세계 각지로 여행을 떠났던 히피들에게 경전으로 통하지만, 또 다른 책을 경전으로 삼았던 히피들도 존재했다. 바로 반권위주의와 사회변혁의 분위기는 받아들이면서 정치와 환경운동 보다는 테크놀로지에 주목했던 이들이다. 테크놀로지를 통해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홀 어스 카탈로그 (Whole Earth Catalog)>라는 잡지가 바이블이었다.

 

<홀 어스 카탈로그>는 당시의 첨단기술 또는 아직은 기술로 구현되지 않았지만 히피사상을 현실화시킬 빛나는 아이디어로 무장된 제품과 서비스들이 소개된 잡지였다. 자유와 공생, 공유와 개방의 히피문화는 이들의 존재로 인해 오늘날의 PC와 인터넷, SNS로 구체화될 수 있었고, 애플과 구글, 페이스북과 트위터라는 글로벌 혁신기업들도 탄생할 수 있었다. 시대의 화두로 남아 있는 스티브 잡스의 말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갈망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라)" <홀 어스 카탈로그>의 폐간호에 등장한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10대의 잡스가 읽고 기억하고 있다가 세월이 흘러 재인용한 것이다. 잡지의 창시자 스튜어트 브랜트는 1995년 타임지 기고문을 통해 PC와 인터넷 혁명은 모두 대항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의 기고문의 부제는 "우리는 모두 히피에게 빚을 졌다."였다.



 

 

"카를라 여기에 있니?" (356)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파울로가 외친 이 말은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며 가슴에 스며 들었다. 파울로는 왜 히피 시절을 떠올렸을까? 무엇이 세계적 작가가 된 그가 수많은 대중과 언론이 주목하는 컨퍼런스에서 카를라의 이름을 부르게 했을까? 젊은 시절 파울로가 자신만의 진리를 탐구했던 기억은 그가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근간이 되었다. 그 시절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뜬 카를라는 그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언젠가 뒤를 돌아보고 여정의 초기를 떠올리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극히 하잘것 없었던 이유들 때문에 걸었던 그 모든 길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우리에겐 필요한 순간에 길을 바꿀 능력이 있다." (160)

 

파울로의 외침은 그 시절 진리를 탐구하는 여정을 함께 했던 길동무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들의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온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 앞으로도 세상이라는 진실한 교실에서 주도적인 삶을 살아갈 것임이 분명한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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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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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 보다 더욱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 동물농장 -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음을 규정하고 있다. 평등하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리와 의무를 포함한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한 상태를 더욱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평등하다는 것 자체가 등급이나 수준 차이 등의 높낮이가 존재하지 않는 동등한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미 평등한 상태에 도달한 대상을 어느 쪽이 더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평등은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비교급이나 최상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등과 민주사회 구현을 목표로 했던 혁명가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특정집단에게만 특권을 부여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반민주적 행태를 보인 것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지켜봐왔다. 조지 오웰은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 보다 더욱 평등하다는 동물농장의 계명을 통해 형식적으로는 평등을 외치며 실제로는 특정 집단에게 권력과 특권을 부여하는 사회의 부조리와 특권의식을 풍자하고 있다.

 

조지오웰은 1945년 이 책을 처음 출간하면서 "동물농장, 한 편의 동화 (Aniaml farm : A fairy story)"라는 제목을 붙였다. 부제에서도 나타나듯 동물농장은 정치적 알레고리 (Allegory)이자 동물우화이다. 동물농장은 사건의 배경과 이를 묘사하는 언어가 축어적이고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비유적이고 이면적인 의미를 가진다. 일차적으로 동물세계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세계에 대한 풍자와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오웰이 표현한 동물농장의 이면의 의미는 볼셰비키 혁명과 소비에트연방의 수립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모습이다. 유산자와 무산자간 계급차별이 사라진 자리에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라는 또 다른 계급이 생겨나 평등과 자유 실현이라는 이념은 한낱 구호에 그치게 된 동물농장 속 동물들의 삶은 혁명 전 제정 러시아 시대나 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 시대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민중들의 삶이기도 하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오웰은 작가의 글을 쓰는 동기에 대해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을 들면서 자신의 글쓰기의 출발점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실을 조명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스탈린과 소비에트 전체주의 체제를 겪은 오웰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이 소설을 썼다. 이는 이 시대에 살면서 전체주의나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글을 쓰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고,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태도라는 오웰의 발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동물농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단지 러시아의 근현대사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오웰은 특정시대만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근원으로 반복되는 사회구조와 역사에 주목하였고, 이는 소설 동물농장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풍자 대상은 당시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착취하는 모든 형태의 독재체제에 확대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농장은 반세기 이전의 과거에 일어난, 이미 확정되어버린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우리 삶을 다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알베르 까뮈는 모든 혁명가는 압제자 (oppressor)나 이단자 (heretic)로 끝난다고 말한다. 혁명가의 말로는 혁명의 동기가 된 순수한 이념과 열정을 망각한 채 헤게모니를 쥐고 지배하거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이단으로 단죄 받는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도 나폴레온은 부패한 압제자가 되었고, 스노볼은 변절자로 몰려 농장에서 쫓겨난다. 그렇다면 모든 혁명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일까? 동물농장의 중요한 통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오웰은 혁명 초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권력층의 배반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 대중의 무기력함 또한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혁명의 이념이 지배층의 권력욕으로 변질되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대중들의 비판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전체주의와 독재는 지배층만의 산물은 아니며, 오히려 권력에의 무비판적 순응이 역사의 진화를 가로막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나이가 들자 도살업자에 팔려가 죽임을 당한 말 복서는 비판의식 없는 어리석은 충성심의 상징이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처럼 악은 대중들의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사유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고, 대중의 침묵은 결과적으로 체제에의 동조로 작용한다.

 

또한 오웰은 악성 프로파간다와 날조된 사실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대중을 분열시키는 과정에도 주목했다. 나치정권의 선전장관 괴벨스를 연상시키는 스퀼러는 공산당의 기관지였던 프라우다를 상징한다. 대중을 선동의 대상으로 여긴 괴벨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대중은 작은 거짓말 보다는 큰 거짓말을 잘 믿고 이는 곧 '진실'이 된다는 말을 남겼다. 러시아어 프라우다는 역설적이게도 '진실'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스퀼러의 존재는 과거는 객관적 진실의 영역이 아니고, 기록의 조작과 기억의 통제를 통해 왜곡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동물평등을 규정한 불가침의 7계명에 대한 기록을 날조하고, 이에 대한 기억마저 왜곡시켜 결국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 보다 더욱 평등하다."라는 단 하나의 계명만이 남는 과정 속에는 항상 스퀼러가 있었다. 대중의 기억을 말살하고 조작하기 위해서 스퀼러는 과거를 지우거나 왜곡하고, 각종 궤변과 공포를 이용한 선전·선동전술을 사용하였다. 오웰의 풍자는 의제설정을 통한 여론통제와 사실 왜곡을 일삼는 언론, 거짓이 사실을 압도하는 가짜뉴스 (fake news)와 탈진실 (Post-truth)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오웰은 구성원들이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진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지식인의 역할도 강조했다. 그는 대중에게 객관적 사실이 충분히 제공되는 것만으로도 편견과 오판을 줄이고 독재체제의 등장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오웰은 소설 '1984'에서 '보편적 기만과 거짓이 지배하는 시대에 진실을 말하고 사실을 수집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 행동'이라고 표현하였다. 결국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독재와 전체주의 체제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짓 선동과 사실의 말살이며,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와 거짓을 정화하고 진실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개인의 자유도 지켜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동물들의 힘으로 건설한 동물농장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장원농장 (The manor farm)으로 회귀하고 동물들은 다시 노예상태로 전락한다. 나폴레온을 비롯한 돼지들은 이웃 농장주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고 카드놀이를 하며 술을 마신다. 그 광경을 지켜본 농장의 동물들은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 조차할 수 없었다. 자본과 권력을 대변하는 이들 지배층들은 영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명백한 사실은 지배계층은 결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을 호위하는 ""들이 아니라 의심의 순간에 대중들을 침묵시키며 그들의 지배를 단단하게 유지시키는 우둔한 ""들이며, 비판의식 없이 지배당하는 ""들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완벽할 수 없고, '사람' 그리고 ''은 이념만으로 결코 재단할 수 없다. 항상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생각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과감히 저항하는 용기가 중요한 이유이다. 부패한 권력의 파티가 무르익어가는 그날 저녁, 농장의 동물들이 밤하늘 속에서 절망적인 어둠이 아닌 빛나는 무수한 별들과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희망을 보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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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스 - 어떻게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애덤 그랜트 지음, 홍지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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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시감 (未視感, Vuja de) : 독창성의 발현

독창성의 출발점은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왜 애초에 현재 상태가 존재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는 행위이다. 우리는 '기시감 (旣視感, Déjà vu)'의 정반대 현상인 '미시감 (未視感, Vuja de)'을 경험할 때 현재상태에 의문을 품게 된다. 기시감은 우리가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전에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현상을 말한다. 미시감은 그 반대다. 늘 봐온 익숙한 것이지만,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서 기존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함을 뜻한다.

 

 

2. 가치 창출의 원천 : 세그웨이의 실패사례

상품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는 고객이 창출한다. 시장견인 전략 (Market Pull)  VS  기술주도 전략 (Technology Push)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세그웨이를 발명한 카멘은 다른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데는 뛰어났지만, 풀어야 할 문제를 찾는데는 그다지 재주가 없었다. 세그웨이의 경우, 카멘은 먼제 해결책을 찾은 후에 비로소 그 해결책이 쓰일 문제를 찾아 나섰다. 그는 시장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시장견인 전략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만든 신기술을 시장에 공급하는 기술주도 전략을 밀어붙이는 실수를 했다.

1) 시장견인 전략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전략으로 시장 중심의 전략

2) 기술주도 전략기업이 기술 중심으로 전략을 세워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일방적으로 공급하는 전략을 말한다.

 

 

3. 혁신의 과정

권한은 단순히 기존 체제에 도전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일단 기존체제 내에서 자위를 확보한 후에, 기존 체제에 도전하고 뒤엎어야 얻어진다.  <Francis Ford Coppola>

 

 

4. 성공에 가장 중요한 요소

아이디어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독창성도, 재능도, 실행능력도, 사업모델의 질도, 가용자금이 있는지 여부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기포착이다.  <Bill Gross>

 

 

5. 변화를 일으키는 힘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게 만들고 싶다면, 가장 먼저 현재 상테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을 안전지대에서 몰아내고 싶다면,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 좌절, 분노를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가장 뛰어난 소통의 달인은 현재 상태를 먼저 규정하고 나서 이를 가능한 미래의 상태와 비교하고, 그 괴리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만든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그 유명한 취임연설에서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의 절박한 현실을 묘사하고 나서야 비로소 도달가능한 미래상을 언급하였고 마틴 루터킹도 인종분리와 차별의 악몽 같은 현실을 고발하고 나서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였다. 일단 결의가  굳건히 다져지면, 과거를 돌아보는 대신 앞으로 해야할 일을 강조함으로 시선을 미래로 향하게 하는 것이 좋다. 일단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결심이 서면 현재 상태와 바라는 상태 사이의 괴리가 사람들의 열정을 불타오르게 만든다.

 

 

6. 독창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과 세상을 즐기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때문에 하루일과를 계획하기가 어렵다.  <E. B. 화이트>

독창적인 사람이 된다 함은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쉬운 길은 아니지만, 숭고한 목적을 추구함으로서 행복을 느끼기에는 최적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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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하의 야생학교 - 도시인의 생태감수성을 깨우다
김산하 지음 / 갈라파고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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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발견하고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삶 (LIFE)의 목적이다.

 

 

이는 잡지 라이프(Life)의 모토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실제 라이프의 창간사이자 모토인 '라이프를 통해 세상을 보라'를 영화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라이프지는 필름 시대의 아이콘이자 '포토 저널리즘'을 개척한 20세기를  대변하는 잡지였다. 글 보다는 사진의 강렬함으로 1960년대까지 공황, 세계대전, 냉전의 처절한 현실을 전했던 라이프는 TV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쇠락하기 시작했다. 라이프지는 73년에 주간지 시대를 마감하였고, 월간지와 특별호 체제로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2007 3월 종이 잡지로서 마지막 호를 발간하고 온라인 잡지로 전환되었다.

 

 

영화 속에서 42세의 '소심남' 월터는 잡지사 라이프에 다니는 평범한 미혼의 직장인이다.입사 후 16년 동안 그가 맡은 업무는 필름을 현상하는 것이었다. 글 보다 한 장의 사진에담긴 힘을 믿었던 잡지사 라이프에서 현상부서는 핵심부서였지만 디지털 사진이 보편화되면서 필름 사진은 퇴색되어 갔고, 수작업으로만 가능했던 인화기술 또한 디지털 보정기술로 대체되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라이프는 종이 잡지를 폐간하고 온라인 잡지로 거듭나기 위해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고, 경영진은 마지막으로 발간될 종이 잡지의 표지를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의 사진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말과 함께 숀이 월터에게 보낸 필름은 어디에도 없었고 월터는 필름을 받기 위해 숀을 찾아서 모험을 떠난다. 온갖 고난과 역경 끝에 월터는 멸종위기종 눈표범 (Snow leopard)을 사진에 담을 준비를 하고 있는 숀을 만나게 된다.

 

 

“언제 찍을 건가요?”
“어떤 때는 찍지 않아.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에 머물고 싶지. 진정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바라지 않거든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자연과의 만남처럼 진정으로 경이로운 순간은 포토제닉하지 않다.그 순간은 카메라의 존재를 잊게 만들 정도로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전설적인 사진기자 숀도 고산지대에 서식하며 우아한 외형과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특성 때문에 실존 동물 중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물로 꼽히는 눈표범과 만난 순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보다 그 순간에 남아 있는 것을 택한다. 눈표범은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산간에 사는 고양이과 동물로 털 색깔 때문에 회색표범, 또는 설표(雪豹)라고도 불린다. 눈표범은 밀렵, 인프라 개발 등으로 인간에게 서식지를 빼앗기고 환경변화로 먹잇감이 줄어들면서 멸종위기 희귀 동물의 대명사로 꼽힌다.

 

 

영화 속의 숀이 맞이한 경이로운 순간은 현실 속에서도 한 사람의 인생과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영국의 변호사 스티븐 스패로우는 2005년 히말라야를 여행하다가히말라야의 유령이라 불리는 눈표범과 마주쳤다. 이 만남을 계기로 스패로우는 런던으로 돌아와눈표범 살리기 재단을 만들고 눈표범의 이름을 딴 보드카 브랜드스노우레퍼드를 만들었다. 보드카 판매수익금의 일정 부분은 몽골, 중국, 인도, 키르기스스탄 등에 남아있는 눈표범을 살리기 위한 기금으로 적립되어 10년 간 약 11억원이 눈표범 보존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에 힘입어 눈표범은멸종위기 수준에서레어 수준으로 개체 수가 크게 증가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자연과 만났던 순간이 있다. 그것은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한 쌍의 잉꼬를 키우던 어린 시절, 먹이를 찾아 열린 창문으로 느닷없이 들이 닥친 잿빛의 매에 대한 기억이다.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애완동물을 향해 느닷없이 달려든 거친 존재로부터 느낀 위협감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원치 않았던 조우는 내 삶의 영역을 침범하고 내가 사랑하는 존재에게 상처를 주는 야생이라는 존재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오랜 기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도시 속에서 살아가면서 야생과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도 긴 시간 동안 오해가 풀리지 않았던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도심 속의 삶이 역설적으로 야생과 자연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도시의 삶이 나에게는 야생학교였던 셈이다.

 

현대 도시인의 삶이란 부대낌의 연속이다. 출퇴근 시간의 만원 버스와 지하철 등 하나의 공간 속에 삶의 여러 주체가 경쟁하며 본의 아니게 불편과 해를 끼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일어난다. 나는 도시의 삶을 통해 모든 소유와 점유는 일시적이며 잠시의 사용에 대한겸손한 자세와 공존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지구라는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자연의 소리에 너무나 무신경하다. 아니 무신경한 것을 넘어서 동식물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그러한 강요된 침묵을 당연시한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자연에 영향을 끼칠 때, 그 자연의 반응을 우리의 잣대로서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자 교만이다. 인간은 자연의 마음을 자의적으로 넘겨짚어서는 안 된다. 자연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장애물이 아니라, 지구라는 공간에서 공존하면서 생태계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이끌어갈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서 인간은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발을 맞추어야 한다.

 

 

또한 다른 관점에서 보면 도시 속 현대인의 삶은 야생동물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개와 고양이 등 애완동물로서 인간과 역사를 함께 해온 가축들을 제외하고 야생성이 살아있는 동물들은 현대인의 일상에 직접적으로 등장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일상에 부재하는 야생동물들은 브랜드로서 현대인의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우직하고 뚝심 있는 믿음직한 이미지의 곰은 밀가루와 자양강장제 등 제품과 기업의 경영철학을 대변한다. 스포츠 구단들은 힘과 기민함, 날렵하고 역동적인 다양한 야생동물의 이미지 중에서 자신의 종목의 특성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차용한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는 고래와 여우 등이 브라우저간의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트위터에서는 새들이 지저귄다. 기업의 경제활동을 비롯한 모든 상업 활동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자원을 활용하며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부작용은 생태계의 교란 또는 파괴다. 야생동물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제 매커니즘 안에서 소비되고, 그 소비의 효과가 클수록 자신의 존립의 기반을 헤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하지만 야생동물들이 사라지면 그들의 경제행위의 효과는 지속될수 있을까?

 

 

눈표범의 사례처럼 최근 야생동물의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는 재규어의 힘과 기민함,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자신의 브랜드 네임을 재규어로 명명하였고, 재규어를 위한 각종 보전사업을 펼치고 있다. 아메리카 표범 퓨마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차용하여 네이밍을 한 스포츠 브랜드 퓨마도 탄소절감과 동물보호활동을 하고 있다. 나아가 퓨마를 보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잠비아의 사자, 라이베리아의 코끼리, 나이지리아의 고릴라 등 야생동물 전반을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나도 작년 랫서팬더, 모래 고양이, 황제펭귄 등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물의 보호사업의 활성화를 위한 기금 모금에 작은 힘을 보탰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는 영화 속 숀의 말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잡지 라이프의 모토처럼 우리는 진정한 세상을 보기 위해서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가까이 다가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는 자연을 발견해야 한다. 어린 시절 갑작스럽게 내 삶 속에 들어온 잿빛의 매는 자연이 친히 나에게 선사한 가르침 아니었을까? 우매한 중생은 나이가 들고 나서야 자연의 소리를 알아채고 답한다.

 

 

“네가 거기 있으니, 내가 여기 있다. 참 고맙다

#김산하의야생학교, #김산하,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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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우리 부부에게 오랜 기간 간절하게 기다리던 딸이 가족의 일원으로 찾아와 주었던 날, 나는 딸의 태명을행복이라고 지었다. 무엇보다 딸과 함께 만들어갈 우리 가족의 행복한 삶이 그때 당시 내가 직면한 가장 큰 화두였기 때문이었다. 한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익숙지 않은 부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 것, , 가정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이가 눈을 떠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내게 지은 미소, 첫 걸음마, 처음으로 말을 하고 나와 소통했던 순간들이는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님과 공유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내가 부모로서 앞으로 내 딸과 공유해갈 기억들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와 내 가족은 삶의 어떤 순간순간들을 공유하며 추억을 만들어나갈까?

 

 

 

정재승 교수는 <열두 발자국>이란 제목에는인간이라는 경이로운 미지의 숲을 탐구하면서 과학자들이 내디딘 열두 발자국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밝히고 있다. (11) 정재수 교수는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에 등장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경험을 떠올리며 본서의 제목을 지었다. 나는 <열두 발자국> 한 생명의 탄생과 미래의 삶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부모로서 읽었다. 이 세상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내게 있어 딸의 탄생은 움베르토 에코의 체험 못지 않게 신비롭고 낭만적이고 때론 비현실적인 경험이었고, 그 체험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가 가장 흥미를 느낀 챕터는 세번째 발자국 (결핍 없이 욕망할 수 있는가?), 네번째 발자국 (인간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일곱번째 발자국 (창의적인 사람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아홉번째 발자국 (4차산업혁명시대, 미래의 기회는 어디에 있는가) 이었다. 여기서는 <열두 발자국> 중 딸에게 전해주고 싶은 4개의 발자국을 소개하고자 한다.


 

세번째 발자국에서 다루는 주제는결핍이다. 경제학도인 내게 결핍은 희소성 (Scarcity)과 근접한 개념이었는데, 저자는 경제학적 희소가치가 아닌 심리학적 결핍과 삶과의 연관관계를 다루고 있다. 누구나 결핍 없는 삶을 원한다.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한 노력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만든다. 결핍에는 동기부여 (Motivation)라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하지만 저자가 결핍의 관점에서 바라본 교육의 문제는 아이들이 결핍을 경험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전 만난 친한 형의 고민은 초등학생이 고교 교과과정인수학의 정석을 선행 학습하는 강남 일대의 교육열이었다. 남보다 빨리, 더 잘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과도한조기교육’, ‘선행학습이 행해질 때 아이들은 스스로 학교 공부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고 정규교육 시스템은 서서히 무너진다. 세번째 발자국을 보며아이들이 진정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할 시간과, 기회,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번째 발자국에서 저자는인간에게 놀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나의 성정과정과 마찬가지로 딸이 성장해나가면서 가장 많이 받게 될 질문 중 하나는 꿈과 장래희망에 대한 것일 것으로 생각했다. 아이에게 꿈이 무엇인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건 상당히 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걱정했던 부분은 딸이 성장해가면서 질문이 담고 있는 의미가 '너는 도화지와 같아서 어떤 그림으로든 완성될 수 있단다. 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맘껏 펼쳐보렴'에서 "이제는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지 정해야 하지 않겠니?"로 바뀌어 가는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문제제기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너는 커서 뭐가 될래?”에 대한 질문은 많이 받지만어떻게 놀며 성장할래?”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하는 시간 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노는데 사용한다. 어떻게 노는냐가 그 사람을 규정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시간도 바로 노는 시간이다. 더군다나 이제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 시대 아닌가? 놀이가 창의력을 높이고, 혁신의 열쇠가 된다는 과학적 분석 결과를 보며, 일과 더불어 놀이를 함께 성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일곱번째 발자국은 창의적인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룬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이긴 하지만 창의성으로 가는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창의성은 남과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고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노력들, 다양한 시도를 하며 세상과의 의미 있는 충돌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다. ‘창의적인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순간의 있을뿐’ (220)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한가지 궁금했던 건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저자가 제시한 주장이다. 동양인은 대체로 눈을 보고 감정을 읽어내는데, 서양인은 입을 통해 감정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본서를 접하기 이전에 저자가 알쓸신잡에 출현해서 동일한 내용을 소개한 것을 보고 상당히 흥미를 느꼈었다. 헬로키티는 그러한 주장에 딱 맞는 사례였지만, 딸아이가 사랑하는 입이 없는 형태의 유럽회사의 국민 애착인형을 보면서 이 경우 어떻게 해석을 내려야 하는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자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아홉번째 발자국은 제4차산업혁명시대를 맞은 우리의 미래를 전망하는 내용이다. 나는 딸이 살아갈 세상은 우리 세대가 살아온 세상보다 분명 더 나은 곳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버지로서 딸이 살아갈 세상은뿐만 아니라우리가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이길 바란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존재한다. ‘증기’, ‘전기’, ‘인터넷등 단일의 기술로서 이루어 낸 1, 2, 3차 혁명과는 달리 여러 가지 기술이 융복합되는 4차 혁명의 허구성을 지적하기도 하고, 아직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선언된 혁명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의심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지만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볼테르의 말에 주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혁신으로 변화하는 세상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일자리의 지형도가 아니라 업무의 지형도이다. 직업이 아니라 작업이 중요하다.’ (270)는 저자의 주장이 인상 깊었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겪는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완전한 어른은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시대에 존재하는 일렁임을 경험하고 극복하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딸 아이가 시대의 풍랑을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자신이 살아 있고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 가족과 사회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 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사랑과 신뢰 속에서 하나의 조각 (One Piece)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행복 아닐까? 아직은 대화하고 토론하기에 어린 나이의 딸이지만 언젠가 나와 소통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열두 발자국>을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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