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 Home의 많은 웃긴 대목 중 이것도 있다. 

은밀히 게이였던 아버지. 꽃과 색채, "예쁨"의 전문가이고 감식가였던 아버지. 

레즈비언인 딸. 일찌감치 아홉 살(혹은 일곱 살. 방금 읽었어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시절 트럭 운전하는 진성 부치 레즈비언에게서 자신의 동족을 첫눈에 알아보았던 딸. 


너 뭐가 무섭다는 거냐. 

아름다운 사람 되기? 걸어, 젠장. 

(............ 이거 진짜, 만화적으로 축소된 감 없지 않지만 

명언이다.) 


그 아버지는 

이 딸만이 아니라 가족 누구와도 가깝지 않았던 사람이고 

촌구석에서 조용한 절망 속에 살다가 아마도 자살로 44세에 세상을 떠난 사람. 

그런데 이 책이 놀라운 건, 아버지의 삶이 온전히 그리고 정당하게 복원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의 결함과 기벽, 그가 가족에게 무심히 행했던 여러 불의들... 이것이 중심인데도 


그게 조금도, 그랬던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같은 걸로 보이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고, 그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 자기 삶의 여러 지점들을 다시 방문하면서 

딸에게 끄덕끄덕 하는 거 같은 느낌? 


한 사람의 삶에 보낼 수 있는 최고의 경의는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아마 그래서인지 모르지. 같은 생각이 듬. (.....) 이 방향 생각을 나중 확장해 보아야겠. 

어쨌든 벡델의 아버지는, 자기 딸이 무한히 자랑스러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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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Home 영어판 구입해서 보고 있는데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이미지는, 앨리슨 벡델이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알리는 편지를 고향 집에 쓰고 난 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반응. 전체 7장인 책에서 3장이고 이 대목 전까지 벡델의 부모가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의 결혼은 어떤 결혼이었나에 대해 세부의 조각 만으로 전체가 자세히 상상되는 (어항 속에 집어 넣으면 

꽃으로 피어나고 집으로 완성되는 종이 예술의 마법. 같은.....) 얘기가 있다. 그냥 짧게 요약하면, 둘 다 아주 독특하고 관습에 의해 파괴된 사람들. 파괴된 다음에도 독특한 사람들. 


웃기는 순간이 꽤 있는데 

위의 이미지 오른쪽 상단에서 아버지의 반응도 웃겼다. 


(내 편지를 받고 나서 아버지가 전화했고, 내가 모종의 난교를 즐기고 있을 거란 생각에 

아버지는 기이한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실험은 모두의 권리다. 그게 건강한 거야.")  


그런가 하면 그녀의 선택을 말리면서 그녀 어머니가 쓴 편지는 고통의 편지. 더 명백하게 고통의 편지. 

("지금 나의 삶은 가족과 일에 단단히 묶여 있고 너의 선택이 그 둘 다에 위협이란 걸 나는 알아본다. 

세월이 지난 후 너의 선택이 진지한 선택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걸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희망한다. 너의 이상주의적 관점이 아직 대면하지 못한 위험들이 

세상엔 있다. 낭만적 사랑에 관한 나의 냉소를 네가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성애의 낭만적 사랑만이 아니라) 동성애에서도 똑같은 문제와 똑같은 착취가 있을 (.....)") 


진지하게 오래 이모저모로 얘기해 볼만한 지점들이 

곳곳에 있다. 무엇보다 특히 문학이 우리 삶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 

벡델의 부모는 둘 다 영어교사였고 둘 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 이 두 사람의 삶에서 책이 없다면? 

벡델이 책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책이 출전이라고 밝히지 않으면서 

그대로 아니면 조금 비틀어서 인용하고 싶은 대목들도 적지 않고 

만들어 두고 싶은 토론 질문들도 있는데 .... 시간이 참 빠르. 세월이 거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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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3-2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또 여기와서 몰리님 페이퍼 읽고 있노라니... 제대로 읽지도 못할텐데 이 책을 사서 보고싶지 말입니다. 엉엉 ㅠㅠ

몰리 2018-03-21 17:23   좋아요 1 | URL
제겐 한 3년 동안 읽은 책들 중 최고!
벡델 여사가 보여준 무엇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 같아요. 아 정말...
 
















앨리슨 벡델의 이 책이 2015년 

Duke 대학 신입생 권장 도서로 선정되었을 때 

신입생 중 기독교 보수 성향 학생들이 "(노골적 섹스 장면 포함) 우리의 가치와 배치되는 내용인 책이며 우리는 읽지 않겠다"는 입장을 적극 표명했고 이게 잠시 논란이 되었다 한다. 대학이 읽으라는 책을 그 대학 학생이 거부할 수 있는가. 



fun home alison bechdel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Culture gabfest에서 이 논란이 주제였을 때 

대나 스티븐스와 스티븐 멧캐프가 날카롭게 대립했다. 

스티븐스는 거부를 주도한 학생에게 2인칭으로 "너에게 <율리시스>를 포함해 너의 서가에 둘 수 없는 수많은 책들이 있다. "나는 성경만 읽겠다. 나는 탁월한 문학엔 관심 없다"가 네 입장이면 넌 대학에 가지 마라. 아니 왜 가는지 모르고 가라." "섹슈얼리티는 인간성의 한 부분미여 때로 예술이 그것을 주제로 삼는다. 이게 네가 벌이는 십자군 전쟁의 이유냐?" "그래 너는 무지의 벽돌로 쌓은 보호의 장벽 뒤에서 살거라. 나는 상관 않겠다." 


라며 조롱하기도. 


멧캐프는 그 학생이 자기 입장을 명석하게 제시한 건 아니지만 (그 정반대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의 편에 서겠다면서 


"그 자신 의식한 건 아니겠지만,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을 신입생 권장도서로 선택하는 배경, 그것이 시사하는 것과 다른 배경에서 나는 성장했다. 

진보적 혹은 인문적이라 여겨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는 나의 배경과 그 배경이 갖는 일군의 관점들을 내 것으로 주장할 권리를 갖는다. 대학의 선택에 맞서 인신공격이나 증거없는 주장의 형식으로 내 입장을 말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대학의 인문적 문화에 온전히 참여하겠다. 그러나 나의 동의 없이 수립된 사회적 문화적 순응을 대학이 미리 내게 강요할 수는 없다. X에 대해 Duke 신입생 모두가 합의하며 4년 동안 그에 대한 이의가 없을 거라고 Duke 대학에선 여길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X는 인문교육이 전제하는 논쟁의 문화 속에서 도달하고 옹호되어야 하는 무엇이다. 우리와 X 의 만남은 소크라테스적 조우여야지, 무의식적으로 공유되는 전제의 강요일 수 없다."  


이런 입장이 우리에게 소중한 건, 대학이 공유하는 가치들의 제시와 옹호에서 대학이 더 공격적이고 더 엄정할수록 

대학을 생각없는 좌파들이 장악했다, PC의 만장일치가 대학이 가르치고 있는 전부다 같은 우파들의 반동적 공격으로부터 대학을 더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 생각없는 정치적 합의의 공간이 아님을, 특히 대학의 인문학 영역에서 선제적 논의로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말을 열정적으로 (그의 말을 듣는 즐거움이 여기 있다. 열정....) 했다.  

스티븐스가 "그에게 네가 지금 보여준 바의 수사적 세련이 가능했다면 그는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하고 있는 말은 "이건 내게 낯선 체험이고 나는 그걸 거부하겠다"가 전부다"고 반응하자 멧캐프의 말. 


"이 학생은 그와 동시대 작품을 거부했다. 

동시대 작품을 향해, 이건 지금 내게 너무 가깝고 (그리하여) 너무 정치적이며 너무 자극적일 수 있으므로 

과제의 대상이 되어선 안되겠다고 말하는 건 사실 그 작품을 향한 존중의 표시일 것이다. (....) 이 학생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더 열린 정신을 갖고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오려는 학생들을 대신해 열린 정신을 규정함은, 반-인문적이다." 


여기서 마지막 문장. 

But I think defining what an open mind is on the way in is actually anti-liberal. 이 문장 너무 좋고 꼭 기억해 두어야겠어서 이 포스트 쓰기 시작했다. 멧캐프의 말을 더 많이 옮겨두긴 했지만 사실 스티븐스의 말도 다 잘 듣고 기억해 둘만한 말들. 논의를 종결하던 스티븐스의 말은: "그래, 넌 너의 대학을 열도록 해. OK. You have to start your own university." 에피를 끝내는 인사에서 멧캐프가 그녀에게 하던 말은 "Are we still friends?" 


(울프의 서한집을 읽는 Fun Home의 주인공). 


지난 학기 수업에서, 토론을 포함해 우리가 해야 하는 "아름다운 협력"을 말하다가 

그게 무엇인지 알지만 나 자신 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오그라듬만 유발할 거 같은 이런 얘기 

........ 다 하지 말고 그냥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다른 얘기 시작할까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 극히 중요하고 자주 생각하고 할 수 있는 한 실천해야 하는 무엇임을 다시 확인.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정직하고 최선인 자아를 보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그 협력 잘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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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2-28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 놈의 말을 저렇게 멋있게, 잘, 하지..... 한국어로도 될까요?
영어라는 언어가 가지는 힘일까요? 어떤 언어를 몇 십년 갈고 닦으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의 모양새가 각 언어마다 제각기 독특하고 개별적인 거라서, 한국어를 아무리 연마해도 저렇게는 안 되고 저것과는 또 다른 곳에만 도착할 수 있는 걸까요? 선생님 가르쳐주세요.

개폭풍질문.

몰리 2018-02-28 11:03   좋아요 3 | URL
사실 위 메캐프 말에서 ˝생각없는˝이라고 옮긴 건
영어로는 ˝mindless˝였는데, ˝mindless˝ 이 말을 ˝정신없는˝으로 번역할 수 없다는 사정, 여기에 우리 곤경이 있다고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정신 부재인 곳. 정신 이전인 곳. ˝은메달은 금메달보다 값집니다˝ 학력자본(만이겠어요....)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 저런 말을 할 수 있고 그래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곳.

영어권 지식인들은 문장 단위, 심지어 정말 ˝문단˝ 단위로
길게 말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참 많은데 우리는 아니죠.
일관되게 문장으로 성립하는 문장들로 말하는 사람도 아주 드물고요. (거의 대부분, 문장이 되려다 말거나. 주술호응이 안되거나 하여튼 비문. 글에선 덜하지만 말에선 거의 예외가 없이....) 정확하고 좋은 문장을 말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글에서도

아도르노 문장같은 문장들을 쓰는 이들이 있고 그들 독자도 많아진다면
뛰어난 영어권 학자가 말년에 도달하는 경지에, 한국인 학자가 한국어로 도달하는 일도
서서히 일어나지 않을까. (지금은 일어날 수 없다 ㅎㅎㅎㅎㅎㅎ 쪽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이 말도, 하면 욕먹고 친구 잃을 말...........)
 




호주에서 발행되는 온라인 잡지 Aeon에 실렸던 

<공간의 시학> 다시 읽기 주제의 글("Intimate Spaces"가 제목이었다)은 

바슐라르가 그의 미천했던 출발에서 어떻게 그 위대했던 여정을 살 수 있었나 말하면서 


"그의 성취는 그의 "intellectual tenacity" 덕분이었다" 같은 문장을 쓴다. 

intellectual tenacity. 이 구절이 순간 깊이 새겨짐. 한편 바슐라르를 아는 사람이면 

이건 쓸 수 없는 구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내하기, 버티기, 이런 건 바슐라르의 정신에 

할 수 없는 말이지 않나. 그 유연하고 유희적인 정신에게? 


그런데 그보다는 

무시, 몰이해, 저평가 같은 것이 

자신의 지적 과제... 아니면 더 사소하게 들릴 지적 "관심"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치게 하지 않았던 게 바슐라르다....... 같은 뜻으로 들리기도 해서 

그 뜻으로 이해하기로 함. 바슐라르의 intellectual tenacity. 그의 (그의 정신의) 주인은 그 자신이었다. 같은 뜻으로. 




얼마 전 들었던 culture gabfest 에피에서 스티븐 멧캐프는 

N+1 매거진에 실린, 랩퍼가 되고자 했던 백인 소년에 대한 에세이를 추천했다. 

에세이 필자는 그 소년을 (그 자신 10대 시절) 지인의 지인으로 알기 시작했다가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알게 되는데

재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재능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던 그 소년은 


예술 지향인 인간들이 

대략 빠르면 17세에서 늦으면 35세 사이에 (그들이 아주 멍청하지 않고 최소의 현실 감각이 있다면) 하게 되는 자각, "나는 나 자신의 열등한 버전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자각을 거부했다. 

어떤 조롱을 받고 어떤 실패를 하든 

그에게 그 자신의 온전한 버전은 언제나 무사히 건재했다. 

그리고 세월이 가는데 ......... 세월이 가면서 그는, 조금씩 천천히 

그의 능력, 그의 수준에서 그가 갈 수 없는 곳이라 사람들이 말하던 "next, next level"을 성취하기 시작했다. 


............ 멧캐프의 요약에 따르면 에세이 내용이 대략 이렇다. 

(실제 에세이를 찾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조금 긴 편). 

멧캐프가 말하는 걸 들을 때 이상하게 감동적이고 맞아 이런 얘기의 중요한 진실이 있지... 같은 심정이더니 

지금 적어놓고 보니까 


가장 흔해빠진 자기계발서 주장의 재탕처럼 들린다. 


"글쓰기는 한편 기적이다. 공들여 쓴다면 반드시 너의 능력을 초과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건 아도르노 영어 번역을 다수 했던 로버트 훌롯-켄터의 말인데, "tenacity"를 아는 바슐라르와 위의 청년들은 바로 그 "기적"을 (그것도) 알았던 것일 것이다. 흐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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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2-12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그림은 tenacity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셔서 골라주신건가요?
저는 시지프의 신화가 먼저 떠올라서요. next, next level이면 좋은데 ‘원점으로‘ again, again... 이랄까요.
개가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의 소매끝을 물고 안놔주는 장면, 저는 tenacity 하는 단어를 보면 그 장면부터 떠올리는걸 보면 아마도 옛날 언젠가 영어 선생님께서 그렇게 예를 들어 설명하셨는가봐요 ^^

몰리 2018-02-12 09:14   좋아요 0 | URL
구글 이미지에서 ˝tenacity˝를 검색했더니 (포스팅할 때 짤방 찾으면서 늘 이 방법으로 ㅎㅎ) 나온 이미지 중에 저것이 있었는데, 이건 내가 찾는 주제 이미지가 아닌데

했다가 좀 더 생각하니
이게 맞다고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돌의 무게 아래 깔리는 게 아니라 나의 힘으로 막고 있기.
바슐라르의 버티기에도 그런 요소가 없었던 게 아니다....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유연하고 유희적이지만 동시에 강인한 사람. 자신의 이상적 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랩퍼 청년에게도 같은 강인함이 있었던 거란 생각이 들고요. tenacious, tenacity 이 단어들도 어감이 나름 오묘해요. tenebrous 같은 단어와 공유하는 ten(tene) 때문에 어둠(검음)이 암시되기도 하고

검은 강철, 휘더라도 부러지지 않는. 그런 느낌 품고 있지 않나 해요.
 




이 영화(다큐멘터리)를 만든 Marina Lutz의 이야기. 

그녀는 97년 LA에서 예전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의 창고에 

세상을 떠난 부모가 남긴 물건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을 정리하면서 

놀라운 발견을 한다. 그녀 부친이 남긴 1만장에 이르는 그녀의 사진. 

역시 그녀를 찍은, 수백 릴에 이르는 super 8 필름. 그리고 몇 박스 분량의 오디오테입들. 

유아기부터 16세까지 강박적으로 그녀를 관찰(관음)했던 아버지가 남긴 기록. 그녀는 이 기록을 

검토하면서 10년을 보내고, 위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오늘 새벽에 깨서 누워 있다가 ; 

To the best of our knowledge 최근 에피에 포함된 그녀 인터뷰를 들었다. 

대략 이런 얘기를 한다. 


"창고에서 이것들을 발견했을 때 내 친구 진이 나와 같이 있었다. 그녀는 이건 보물 발굴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들을 전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 


열세살 쯤의 나를 찍은 필름이 있는데 

여기서 내 머리는 잘려 있고 카메라는 막 나오고 있는 내 가슴에 집중한다. 

나는 내 고양이를 괴롭히는 중이고 그건 내 가슴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관심을 흩트리기 위해서인 거 같다. 

그 장면 속의 나를 보면, 내가 그 자리에 실제로 있지도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내 몸을 떠나 있었다고 느낀다. 

그 자리에 현존하지 않고 정신이 내 몸을 떠나는 일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무엇이 있을 때마다 지금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배변훈련하는 나를 찍은 사진들이 있다. 이 사진들 중 몇 장을 아무렇게나 뽑아 보여준다면 

보는 사람은 '배변훈련하는 아이를 찍은 사진이구나' 반응하고 별 생각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찍힌 이 사진들에서 관심은 엉덩이에 있다. 내 엉덩이를 필요 이상 오래 보고 있는 아버지가 있다. 여자의 엉덩이를 보는 남자의 시선이 있다. 


사춘기 시절 흰색 면속옷을 입고 집 복도에서 아버지 요구에 따라 포즈를 취하면서 찍은 필름도 있다. 

여기서 나는 극히 불행하고 극히 불편해 보인다. 속옷 차림 딸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고 홈무비를 찍는 건 옳지 않다. 


오디오테입에 

싫다고 우는 나와 강요하고 괴롭히는 아버지가 있다. 이 테입들을 들으면서 나의 온몸이 반응했다. 

2003년에 나는 나의 테라피스트에게 이 필름, 오디오테입, 사진들의 일부를 보여주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야 테라피스트가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알 거 같았다. (*이것이 영화화의 시작이었다...) 


The Marina Experiment를 발표하고 나서 

나는 내게 고마움을 전하는 수많은 이메일들을 받았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정 끔찍한 일이다. 

그들은 내게,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며 그리고 이것들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증거를 마침내 갖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이들만큼 많은 수로 받은 건 아니지만, 적지 않은 항의의 

이메일도 받아야 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하는 딸은 교도소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찍은 사진엔 죄가 없고 그 사진을 아버지를 중상하는 방식으로 진열한 내게 죄가 있다고 했다. 


나는 이 필름, 오디오테입, 사진들을 "증거"로 본다. 이것들은 행복한 유년기의 기록이 아니다. 

이 안에 사랑은 완전히 부재한다. 나를 안고 나를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하라는 대로 

포즈를 취하는, 불행하고 슬픈 아이가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아주 슬픈 유년기의 기록이다. 


나는 "피해자(victim)"라는 말 대신 "반대자(opponent)"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보통은 

나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를 피해자로 느낄 때도 있는데, 내가 과거의 일로 두고 떠날 만큼 

온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는 난제와 언제나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러겠듯이 나도 내 삶에서 사랑을 원한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나의 경험이 너무도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누가 날 소중히 여기는 게 내겐 고통을 안긴다. 그건 내게 공포심을 자극한다." 



비몽사몽간이다가 그녀의 말들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내게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말들이 극히 지적이고 정신적이어서. 

악을 녹이는 지성. 그게 바로 여기 있어서. 이렇게 텍스트만으론 (그리고 이건 온전히 옮겨 온 것도 아니고) 

충분히 전해지지 않을 거 같다. 


그녀 영화를 이렇게 요약한 관객이 있다. 

"(....) The daughter, who is also the filmmaker, presents this evidence in a subtle intellectual investigation that is grotesquely truthful and forthrightly condemning."


"영화 감독인 딸이 제시하는 이 섬세하고 지적인 탐구는 그로테스크하게 진실하고 

정직하게(꾸밈없이, 우회없이) 단죄한다." 


특히 마지막 두 단어. forthrightly condemning. 두고두고 생각해 볼만한 두 단어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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