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 채널 자주 본다. 

태국 코끼리 보호 구역에 사는 피아니스트 폴 버튼이 

코끼리들을 위해 피아노 연주. 코끼리들이 가만히 서서 듣는다. 

집중해서 듣는다고 느껴진다. 그러다 귀 펄럭이기도 하고 코를 움직이기도 하는데 

(어떤 땐 박자 따라 스텝을 하기도 한다. 코끼리 버전 헤드뱅잉 나오는 동영상도 있고) 

주로 조용히 가만히 집중해서 듣는다. 


 

코끼리들을 위해 피아노 연주 하면서 태국에 오기 전까지 몰랐던 지극한 행복감 느낀다고 

폴 버튼이 말하는 인터뷰 동영상도 있다. 그는 코끼리와 같이 걷기도 하고 코끼리 코에 양손을 가져다 대고 이마로 코끼리 코 부비기도 한다. 코끼리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 감사만이 아니겠지만. 






덩달아 애청하게 된 채널. 

역시 태국의 코끼리 구조 활동가인 Lek. 

그녀가 자장가를 부르면 코끼리가 금세 바닥에 누워 잠이 든다. 

코끼리가 잠에 드는 (무거운 몸 천천히 바닥에 누이면서) 과정, 어째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 인간의 삶을 말하는 거 같아진다. 우리의 (동물의) 운명을 말하는 거 같아진다. 


Lek 여사도 인터뷰 동영상들이 있는데 

"나는 어렸을 때 마당에 코끼리를 한두 마리 키우고 싶었다" 

"코끼리를 언제나 사랑했다" "태국 불교에서 코끼리가 신성하게 여겨진다면 

진정 코끼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수시로 위협을 받는다." 

"코끼리 가족이 함께 하는 걸 보면 코끼리들에게 유머가 있다는 걸 모를 수 없다. 코끼리는 행복을 안다. 

코끼리는 웃을 줄도 안다." 


인터뷰어가 "코끼리들에게도 성격이 있는가?" 질문하기도 하는데 

아주 잠시 (이 무슨 멍청한. 그걸 질문이라고 함? 말잇못...................) 이런 반응이다가 

"그렇다. 각각 다르다. 어떤 아이는 질투심이 강하고 저기 저 아이는 고집이 엄청나게 세다. 

인간이 가진 좋은 면들 모두가 코끼리에게 있다. (...) 인간이 가진 나쁜 면도 있다. 나쁜 면들 중 몇 가지가 있다...." 



코끼리. 코끼리 보러 언제, 몇 년 뒤에 

태국에 꼭 가야할 것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책 포함해서 Raymond Geuss의 책들 여럿 

인쇄본으로 입수했다. 


"기독교가 사라져도 

기독교가 생산한, 기독교가 주었던 무엇을 향한 욕구는 남을 것이다. 

철학의 경우도 그럴까? 철학이 사라져도 철학을 향한 욕구는 남을 거라면 

그 욕구가 무어라고 당신은 말하겠는가."


이런 얘기 하는 글이 있다. 

이것 포함해서 그의 글들엔 거의 반드시, 철학(인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걸 주제로 토론(잡담)해보고 싶을 만한 대목들이 있다. 어찌 보면 급진성. 어찌 보면 분방함. 

그런 면모가 그의 글에 있다. 분방함 쪽으로 좀 멀리 가면 허술함이 되고 마는. 그런데 분방함-허술함을 

견제하는 엄격함이 공존하기도 한다. 그보다 못한 다른 사람 글에 등장했다면 단순히 허술함으로 남았을 것이 

그의 글이라서 조금 다른 무엇이 된다는 느낌 든다. 확 풀렸다가 갑자기 팽팽해지기. 이것이 반복되면서 

얻어지는 효과가 있다. 


분방함, 엄격함, 엄격함으로 분방함을 견제하기. 

.............. 아무튼 특이하다. 


책들을 입수하면 뭐하나. 

읽을 시간도 에너지도 없다 (오열) 이긴 한데 

이 분 책들은 다른 책들에 비해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읽게 될 거 같은 건 

저런 특이함도 있지만 역시 이 분이 좌파시다보니 현실 자각에 특히 더 도움되기도 한다. 

의식화에 도움이, 되는 분이다. 격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며칠 전 발견한 책 중 이것이 있다. 표지디자인이 뭔가 사이키델릭한. 

집에서 발견(발굴)한 건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그 책계의 소리바다에서. 

마르크스 과연 얼마나 어떻게 읽게 될까 몰라도 일단 주변(에리히 프롬이 자전적인 내용으로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만남> 같은 책도 썼던데 그런 책들)은 둘러보는 것이. 


출간 연도 보면 마틴 제이가 40대초 나이일 때 나온 책이다. 

저자 서문을 보면, 책의 기원은 그의 대학원 시절의 한 일화에 있다. 

때는 69년. 사회과학자들의 한 학회에서 미국의 좌파 운동에 대한 격한 토론이 있었고 

토론에서, 혁명은 미국적 삶의 방식과 완전히 결별할 때 가능하다는 입장인 이들이 있었다. 

"Total Break with America." 그들의 주장에서 이 구절이 취재되었고 대서특필되었다. 

그 구절의 출전으로 마틴 제이가 지목되었다. "학계의 사회주의자 마틴 제이, 미국의 전면 거부를 요청하다." 


마틴 제이는 그 구절을 사실 반대의 맥락에서 (""total break with america"는 요청은 반-생산적인 수사적 과잉일 뿐이다") 썼던 거지만 그는 잠시 캠퍼스의 유명인이 되어야 했다. 급진주의자 친구들이 그에게 갑자기 친한 척을 했고 그런가 하면 대학원의 한 교수는 그를 질책했다. 그 교수에게서 잃었던 신임을 회복하는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했다. 


이 책의 기원은 바로 그 사건에 있다고 회고한다. 



그는 44년생이고 69년이면 그러니까 25세. 우리식으로 26-7세. 

그가 서른 되기 전에 쓴 박사학위 논문인데 고전이 된 책 <변증법적 상상력>. 

이거 나는 수시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 일은 (그러니까, 한국에서) 재연될 수 있는가. 

생각하는 편이다. 위의 책 <마르크스주의와 총체성> 저자 서문에 미미하지만 힌트가 있다.  

40대의 그가 기억하는 20대의 그에게, 40대의 그에게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자신"("confidence" 컨피던스.....) 이게 있다. 나는 학자이고 나는 사회과학을 하고 나는 학회에 참여하고 나는 발언하고 나는 내 발언에 책임을 지고.... 이게 있다. 


그렇다면 그런 "자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고전이 되는 박사학위논문. 마틴 제이가 보여주는 거 같은 종류 자기신뢰. 

이런 게 나오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답하기 어렵다면, 거의 나올 수가 없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로. 

일단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사회에서 

조금의 권력이라도 가진 모두에게 "because I say(said) so" 이것이 허락된다. 출세의 보람 하나가 여기 있는 것이다. 

맹목이 성공의 보상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30대부터 (그 새파란 나이에) "파파" 하이든이라 불리었다는 하이든. 

그건 그가 진정 다정하고 다감하고 공정하고 활수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궁정 악장으로서 그는, 그의 밑에서 일했던 음악가들에게 최상의 보스였다. 그가 "진정" (전략적 위선으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그의 생애를 통틀어 무수히 발견된다. 무수한 증언을 포함해서. 


하이든은 베토벤을 어떻게 아주 잠시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게 그런 인연이 어떻게 맺어졌었다. 베토벤이 경의를 표한 음악가는 단 2인, 바흐와 모차르트였고 

그래서 그에게 하이든은 노바디 노인일 뿐이었으며 잠시 (두 달?) 배우던 동안 그는 하이든에게 여러 결례, 비례, 무례를 범했다. 하이든을 속이기도 했다. 그 모두에도 불구하고 하이든은 베토벤을 이해하고자 했고 베토벤 편이었다. 




하이든 강좌에서 기억에 남은 몇 대목 중 저런 얘기 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그의 50대 이후 삶을 말하던 대목. 

그는 헝가리 귀족 궁정 악장으로 일하다가 그를 고용했던 귀족이 죽으면서 영국으로 오게 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전혀 새로운 삶. 하이든은 유년기가 아마 불우했을 것이다. 거의 떠돌이의 삶. 

어디서도 정착이 어려웠던 삶. 청년기에서 중년까지, 살림이 피기는 하지만 (살림이 핀다 정도 아니라 

천천히 그러나 점점 더 갑부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을 것이긴 하다. 한 2-30년 세월의 문제기도 

하고 그를 고용했던 귀족은 그의 음악에 깊이 만족해 적지 않은 돈으로 보상했고, 그에게 돈 쓸 곳은 

별로 없었고....) 그가 깊은 행복을 알았을 시기는 아마 없었다. 그러다가 거의 노년에 진입할 때,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하고 그는 청년의 순진한 눈과 뛰는 심장으로, 모두를 깊이 만족하며 체험하는 

시기를 보낸다. 


대강 저런 얘기 끝에 교수가 덧붙이던 말. 

"아아 한 사람의 한 번의 생에, 얼마나 많은 삶들이 있기도 한가!"  


들으면서 깊이 감탄했었다. 

저런 말을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도 되어야 한다... 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나도 좀.... 다른 삶 좀.... 새로운 삶 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도르노가 발자크 주제로 쓴 꽤 긴 에세이가 있어서 

당장 페이퍼 주제와 상관 없지만 보고 있다. 많이 말하고 멋있게 말하는 분이셔서 

집중할 수만 있다면 최상의 저자 아닌가 아도르노 쌤. 집중이 잘 안되고 있는데 이걸 끝내고 

다음 밥을 하고 


산책도 하고 

밥을 먹고 

청소도 하고 

그러면 좋겠으니 이걸 끝내야 하는데 

단 네 페이지 남았으면 힘들긴 뭐가 힘드냐고 

끝내려 하지만 너무 힘들고 있는 중. 


2월이 다 가는 소리가 들리니 극히 조바심 난다. 

남은 삶에서, 조바심 모르고 그냥 늙어가기만 해도 되는 시기가 과연 있을 거냐. : (......... 쓴 웃음.... ㄲㄲㄲㄲㄲ) 

평생 대학원생처럼 산다는 건 무슨 뜻이냐.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런데 어쨌든 

아도르노 읽어주는 대로라면 

발자크는 진정 "그의 소설 읽으며 여생 보내기" 할만한 작가라는 생각 든다. 한국계 작가 민진 리가 

그런 계획을 가진 자기 친구 얘기했었다. 그 친구가 겨우 40대였던가? 발자크의 90여권 소설들을 하나씩 읽으며 

노인의 삶을 살아가기가 꿈인 친구. 


지옥의 한복판에서 찾아내 도피한 고요한 해변이 있다면

그 해변에서는, 내가 어떤 지옥을 통과했는지, 바로 그걸 보는 게, 기묘히 오락이고 깨달음일 것이다. 

노인을 위한 발자크. 노인을 위한 오락. 이미 발자크 책들이 다수 집에 있어서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읽을 시간은 적어도 3년 동안 없을 것이다. 

그 3년이 낭비가 아니게, 계속 페이퍼를 써야 하는데 

..... (비명! 비명!) 너무 힘듬. 너무도 힘들 때 서재 와서 힘들다고 

포스팅하고 있으면 ......... 좀 (좀 많이) 가벼워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0-02-26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26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