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7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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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부를 거울처럼 비춰줄 영원한 고전]

 

학창시절 처음 읽었던 [데미안]은 저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했습니다. 울림은 커녕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역시 세계문학은 두번, 세번 읽어야 하는가봅니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4로 다시 한 번 만나게 된 이 작품은, 여전히 오묘하고 알쏭달쏭한 부분이 있지만 예전보다 조금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에요. 독서만큼 중요한 것이 삶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책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삶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한편, 경험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책 안에 존재하기도 하고요. 제가 [데미안]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데는 지나온 시간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 싱클레어의 '결정적 한순간'은 역시 데미안과의 만남이겠죠.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엄하고 바른 교육을 받아온 싱클레어의 앞으로의 삶은, 아버지가 걸어온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보입니다. 한 번의 거짓말로 인해 더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지는 싱클레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데미안. 그러나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처음에는 그에게 거리를 둡니다. 그와 접촉하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이 숨쉬는 세상에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각성한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의 의무만 존재할 뿐 다른 의무는 결단코, 전혀 없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단단해지는 것, 어디로 가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p191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미안의 사고방식, 주위야 어떻든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들어가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려는 모습은 결국 싱클레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방황한 싱클레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저 문장들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단단해지는 것, 어디로 가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의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치며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헤세가 창조해낸 '데미안'이라는 인물은 20세기 초 유럽에 산재해 있던 신구 학문과 사상들에 정통으로 도전장을 내밉니다. 물질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회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이성 중심의 이기적이며 자연 파괴적인 욕망에 대해.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인물이자, 낡고 공허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타파하려는 개혁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탐구하려는 시류에 부합하는 존재예요. 데미안, 그리고 싱클레어가 불가항력적으로 빠져드는 에바 부인은 그 자체가 헤세가 주장하려 하는 무언가이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그는 또한 청년들에게 '의지'에 대해서도 역설하는데요. 저는 어쩐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반드시 북극에 가보겠다거나 그와 비슷한 일을 상상해볼 수 있어. 하지만 그 소원이 완전히 나 자신 안에 자리 잡았을 때, 정말로 나의 존재가 그 소원으로 채워졌을 때만 그 일을 실행할 수 있고 충분히 강해지기를 원할 수 있는 거야.

p 85

 

청춘이 겪어야 하는 고행과 열정을 지나치지 않고 직접 그들에게 말을 건 작가. [데미안]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위로의 상징이 된 이유는 자신의 무의식과 개인의 내면에 집중한 스스로의 경험을 진실성 있게 기록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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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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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여행의 순간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4의 '결정적 한순간'이라는 테마에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바로 [여행자와 달빛]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여행을 가서 기차나 비행기, 버스를 잘못 탄 경험 해보셨을까요? 저는 낯선 곳에서 홀로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두려워서, 여행 전의 동선은 세세하게 짜지 않더라도 교통편만큼은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에요. 버스나 지하철 정도는 반대로 타본 적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황급히 내려 방향을 바로잡기 때문에 크게 놀랐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미하이는 심지어 신혼여행 도중에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다 아내 에르지와 헤어져 로마가 아닌 페루자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올라타고 맙니다.

 

미하이는 현실 세계보다는 관념에, 그리고 삶보다는 죽음에 사로잡힌 인물이에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울피우시 터마시와 그의 여동생인 에버입니다. 울피우시 남매는 어머니의 이른 죽음, 음울하고 냉정한 아버지, 비틀린 가치관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립된 세계를 구축했고, 예민한 성정인 데다가 공황장애(로 추정)를 앓고 있던 미하이는 그런 그들의 세계에 큰 매혹을 느껴요. 항상 죽음을 갈구하는 듯 보였던 터마시는 두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죽음에 이르고, 울피우시 가의 남매를 중심에 둔 미하이, 에르반, 세페트네키 야노시의 세계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미하이가 15년 동안 축적된 피로에 지배당하기 시작한 것은 테론톨라에서 원하지도, 의도하지도 않게 다른 열차에 올라탈 때였다. 에르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고독과 그 자신을 향했던, 그 열차에 오를 때였다.

p119

 

미하이의 '결정적 한순간'은 역시 그가 기차에 잘못 올라탔을 때일 겁니다. 페루자에 도착한 후 미하이는 자신이 얼마나 삶에 지쳐있었는지, 홀로 죽음의 땅으로 떠난 터마시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마주하고 자신 또한 돌고 돌아 결국 죽기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보여 요. 작품 안에서 그는 종종 '소년'같은 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던 이유는, 그의 두 발은 도저히 현실에 발 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항상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은 특히 미하이에게는 결여되어 있어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가정이 있던 에르지와 '불륜'으로 이어져 결혼까지 이르렀음에도, 그런 그녀를 신혼여행지에서 내팽개치다시피 하는 상황은 저로서는 그가 응석받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물론 예민한 소년 시절에야 얼마든지 죽음이라든가 다른 관념들에 사로잡힐 수 있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도 마냥 과거를 헤매는 모습은, 역시 그가 경제적으로 부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그가 아버지의 경제력에 기대지 않거나 혹은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요? 아니면 더욱 갈등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을까요?

 

[여행자와 달빛]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미하이는 여행자입니다. 단순히 신혼여행을 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 '여행자'의 기분으로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죽음의 순간, 역설적으로 삶을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미하이는 이제 여행자의 모습에서 탈피하게 됩니다. 아마도 미하이는 진정으로 죽음을 원했다기보다는, 동경하던 터마시의 죽음을 통해 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그를 찬미하는 마음이 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열차를 잘못 탔던 그 한순간이 결국 그를 현실로 되돌려놓았습니다.

 

미하이의 결정적 한순간은 에르지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녀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어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되죠. 이렇게 보면 우리 삶의 '결정적 한순간'은 우리가 선택한 순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선택에 대한 반동으로 의도치 않게 마주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네요.

 

앞서 읽은 시즌4의 두 작품보다는 확실히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작품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는 것, 그것이 바로 세계문학의 묘미 아니겠어요! 헝가리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펼쳐진 덕분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한껏 담긴 작품, 우리는 과연 이 삶에서 무엇을 좇고, 무엇을 원하는지 자문해보며 읽어보면 좋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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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앰버슨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0
부스 타킹턴 지음, 최민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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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사라지고,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제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의 출간을 기다리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표지'입니다. 마치 한폭의 그림같은 표지가 너무나 매혹적이에요. 책을 소장하는 이유로 내용만큼이나 표지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로서는 정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표지들인데요, 특히 이번에 출간된 [위대한 앰버슨가]의 표지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아련한 향수같은 감정이 느껴져 시즌4의 또다른 작품인 [악의 길]과 함께 '어느 책을 먼저 읽을 것인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용으로 사용 중인 전면 책장에 언젠가는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책들을 꽂아두게 되길 바라봅니다!

 

[위대한 앰버슨가]에서 '결정적 한순간'을 맞닥뜨린 인물은 이 집안의 유명한 망나니 '조지 앰버슨 미내퍼'입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 그가 천벌을 받아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라는 그런 인물이에요. 하지만 그에게 세상 사람들의 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앰버슨가'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그 명성과 부가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신은 오직 주어진 것을 충실히 누릴 뿐이라고 생각하죠. 조건도 조건이지만 정신까지도 완벽한 금수저의 길을 걸어온 그가, 한 여성에게 매료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모건. 바로 조지의 어머니 이저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유진 모건의 딸인데, 조지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던 걸까요. 유진 모건이 자신이 받들어 모시는 '앰버슨가'의 명예에 위협이 될 거라는 것을요.

 

"내......어머니는 당신이 오, 오늘 여기 온 걸 전혀 알 생각이 없을걸. 다른 날이라 해도 마찬가지고!"

"내가 자네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 집에서는 당신을 원하지 않아, 모건 씨. 지금이건 다른 어느 때건. 이만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지는 유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았다.

p 332

 

이미 영화로도 제작된 이 작품을 제가 만약 영화로 만든다면, 저는 이 장면을 비중있게 다루었을 것 같아요. 닫히는 문 소리를 엄청 크게 한다든지, 닫히는 문 사이로 조지와 유진의 눈길이 마주치는 장면을 슬로우로 진행시킨다든지 해서요. 제가 이 장면을 조지의 '결정적 한 순간'으로 꼽는 이유는, 이 때를 계기로 조지의 행동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한때 자신에게 청혼했다가 자동차 산업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남자 유진을 다시 만나게 된 이저벨은 분명 설레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는 남편과 아들이 있다고 고개를 저었겠지만 남편이 병사하자 그녀와 유진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자신이 애지중지 키워온 아들 조지입니다. 뼛속까지 앰버슨가의 사람. 자신에 대한 평판은 평범한 사람들의 시기로 여기지만, 어머니의 평판은 추문으로 여겨 어떻게든 이저벨과 유진 사이를 막으려고 하는 아들. 결국 헌신적인 어머니인 이저벨은 아들의 소망, 혹은 강압에 못이겨 유진과 결별하게 됩니다.

 

육성으로 '이눔의 자식, 그러지 마'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조지는 끝까지 이저벨에게 잔인해요. 그리고 앰버슨가는 시대의 흐름에 의해 역사 속에서 사라져갑니다. 그 과정에서 모든 걸 잃게 된 조지는, 한때는 루시에게 '자신은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떵떵거렸던 조지는, 고모를 부양하며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화학 회사에서 일하게 되죠. 작품의 초반에 묘사된 앰버슨 가의 부와 명예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후회와 절망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

 

하지만 조지에게 '결정적 한 순간'이 있었듯, 유진 모건에게도 '결정적 한 순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으로 인해 아마 저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이 결말에 만족하지 않았을까요. 100여 년 역사의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한 네 명의 작가 중 하나인 부스 타킹턴. 게다가 [위대한 앰버슨가]는 모던 라이브러리에서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영어 소설 100선'중 하나에 꼽힌 수작입니다. 독서의 재미를 정말 충분히 맛보게 해주었던 재미있는 작품이었어요. 부스 타킹턴의 또 다른 작품들도 어서 만나보고 싶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이 작품에서 영화 <타이타닉>을 떠올렸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타이타닉이 출발할 때의 환성과 그 호화로운 분위기는 이 배가 영원히 그 명성을 유지할 것만 같았죠. 하지만 배는 침몰하고 역사상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타이타닉의 한때 누렸던 명성과 그 침몰은, 앰버슨가의 그것과 닮아 있어 특히 영화를 애정하는 저로서는 그리운 느낌으로 [위대한 앰버슨가]를 바라보았던 것 같아요. 혹시나 저처럼 <타이타닉>을 즐기신 분들이라면 이 작품에서 비슷한 감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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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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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귓가에 울리는 소리없는 절규!!]

 

매 시즌마다 하나의 주제 아래 다섯 권씩 출간되는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4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시즌의 주제는 '결정적 한 순간'인데요, 저는 [악의 길]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부터 이 작품은 어쩌면 시즌 3의 주제인 <질투와 복수>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남자의 열정으로 시작된 사랑, 그 사랑에 대한 여자의 배신과 그에 따른 질투와 복수가 담겨 있어 한편의 스릴러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결정적 한 순간'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며 읽는 과정 속에서 인간을 광기의 길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지, 그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인지 혹은 운명인 것인지 등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이끈 그 한순간은 대체 언제였을까요.

 

"마리아는 사비나를 질투해요"

"무엇 때문에?"

"당신 때문이죠, 멍청이!"

 

이것이 씨앗이었다.

p 46

 

가난하고 다소 거칠지만 성실한 일꾼인 피에트로 베누는 니콜라 노이나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처럼 가진 것은 없으나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인 사비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니콜라의 딸인 마리아가 자신 때문에 사비나를 질투한다는 타인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려요. 사비나에게 불타올랐던 마음은 한순간에 사그라져 마리아를 향합니다. 그리고 저는 피에트로가 '악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결정적 한 순간을 바로 이 장면으로 꼽았어요. 피에트로를 그리 격정적으로 만든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마리아의 아름다운 외모? 자신을 밀어내는 주인집 딸을 향한 오기? 원인이 무엇이었든, 저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피에트로는 주인집 딸인 마리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못했을 겁니다.

 

처음에는 하인의 구애에 질색하던 마리아였지만 남자로부터 그런 열정적인 마음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녀는 어느새 피에트로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고뇌는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되어 결국 피에트로를 배신하고 오래 전부터 자신을 마음에 둔 프란체스코와의 결혼을 선택하죠.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한때는 격하게 입맞춤을 나누었던 남자가 감옥에 있게 되었는데도 마리아는 자신의 안전한 결혼식을 위해 피에트로가 조금 더 수감생활을 하게 되길 바라기까지 해요. 결국 그녀는 피에트로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한순간 밀회를 즐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결혼은 돈 많고 안정적인 남자와 하고 싶었고요. 이리 보면 마리아의 모습은 지금 현대인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마리아의 배신으로 결국 악의 길에 들어서게 된 피에트로. 하지만 진정한 '악의 길'은 바로 마리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피에트로가 저지른 악행을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끝내 외면하다가, 결국 진실을 알게 된 후에는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질까 두려워해요. 마리아가 어떤 선택을 할 지 작품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저는 왠지 이 두 사람이 끝없는 절망과 두려움의 나락에서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결혼 생활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여성 작가로서 두 번이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라치아 델레다. 특히 [악의 길]은 사르데냐 섬의 독특한 풍경과 문화가 녹아들어 있어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한층 현실감있게 다가옵니다. 읽는 동안 어쩐지 뭉크의 <절규>가 떠올랐던 작품. 어쩌면 마리아와 피에트로의 내면도 이렇게 절규로 가득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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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3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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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매력을 알게 해 준 작품입니다. 읽기는 했으나 너무 오래 되어서 세세한 부분이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번역도 다듬어졌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다시 꼼꼼하게 읽으며 빠져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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