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전설 세피아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제가 어렸을 때 가장 무서워했던 괴담은 '빨간마스크'였지요. 피로 물든 빨간 마스크를 하고 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다가, 붙잡고 물어보는 겁니다. "너는 혈액형이 뭐니?" 하고. 혈액형별로 입을 찢어준다는,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괴담이었던 것 같습니다. (혈액형이 뭔지 그가, 혹은 그녀가 어떻게 알까요..물론 괴담이었으니, 알 수도 있었겠지만은..)지역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제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저를 괴롭힌 것은 빨간마스크였습니다. 

 그런 저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만든 한 권의 책이 여기 있네요. '도시전설 세피아'-슈카와 미나토. 이 작가는 제가 생각하기에 아주 특이한 사람입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꾼이지만, 저의 취향과는 약간 안 맞는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엽기적이고 잔혹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랄까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갖는 이 사람에 대한 인상은 그렇습니다.  그런 인상은 이 책을 읽기 훨씬 전에 읽은 <새빨간 사랑>에서 받았었죠. 읽어보신 분들은 알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더 낫네요. 아니, 괜찮은 작품입니다. 물론 이것도 제 기준입니다만. 뭔가 가슴 한 켠을 쓰리게 하는 아련함이 있다고 할까요.  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어 작품은 <새빨간 사랑>에 실린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라 어째 무섭습니다. 이 사람의 머리속은 무슨 생각으로 가득할까 궁금할 정도로 상상력이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표지를 이루고 있는 올빼미 모습을 한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 <올빼미 사내>는 어쩐지 코믹하지만, 뒷부분에 가면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괴담을 현실에 재현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해야 하나. 가장 마음에 든 작품은 <어제의 공원>입니다. 죽은 친구를 살려내기 위해 시간여행을 계속하는 주인공에게 숨겨진 엄청난 비밀. 여러분은 만약 이 사람의 입장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스맨>은 글쎄요.  작가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작품 중 하나였다고만 말해 둡시다. <사자연>은 일본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이었어요. 고풍스럽다고 해야 할지, 괴기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마도 주인공이 화가이기 때문일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작품이죠.  마지막 작품인 <월석>도 꽤 마음에 듭니다.  지금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게 해주는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지요. 마음이 아프면서도 왠지 훈훈함마저 느껴지는 괜찮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단편의 제목을 보고 작가가 월석에 무척 흥미가 많은 사람인가 보다 했답니다.  전에 읽은 <새빨간 사랑>에도 월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도시전설 세피아>는 이 작가의 데뷔 작품집이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새빨간 사랑>보다 훨씬 나은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고보면 세상에는 글 쓰는 직업을 가질 사람이 정해져 있나 봅니다. 5개의 단편으로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그 흡입력.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 면에서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엽기적인 면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되면서도 은근히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하는 이야기꾼. 남은 여름이 가기 전에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오싹한 한기를 한 번 느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면, 저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  어렸을 때 혹은 지금도 당신이 무서워하는 도시전설은 무엇인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7-08-28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빨간 마스크 얘기는 원래 일본에서 건너온건데요, 얼마전에 일본에서는 '나고야 살인사건'인가 뭔가 하는 영화도 만들었더라구요. ^^ 무서울 것 같아서, 하나도 안 보고 싶지만 말입니다. 전 이 작가의 <꽃밥>을 읽었어요. 도시괴담과 노스탤지어를 훌륭하게 녹여 내었더군요. 이 책도 궁금하네요.

분홍쟁이 2007-08-28 21:29   좋아요 0 | URL
네^^ 책에 보니 빨간마스크 이야기가 나와 있더라구요~그래서 저도 그게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 어렸을 때 정말 너무 무서워해서 지금도 잊지 못한답니다 ^^;; 꽃밥은 사놓고 책장에 꽂혀만 있습니다;; 하이드님, <도시전설 세피아>도 괜찮은 작품입니다. <새빨간 사랑>보다는 권해드리고 싶네요 ^^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 - 내가 뉴스를, 뉴스가 나를 말하다
김주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빈틈없는 이목구비, 빛나는 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철함, 그리고 중성적인 보이스. 김주하 아나운서에 대한 내 인상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아나운서들에 대한 이미지야 크게 차이나는 것은 아니지만, 김주하 아나운서에게 찾아 볼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엉뚱하지만 가끔은 그녀가 혹시 인조인간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가 쓴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는  '내가 뉴스를, 뉴스가 나를 말한다'에서 알 수 있듯, 방송생활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와 감상을 묶은 다큐에세이다. 만약 성공한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인생을 단순히 나열하기만 했다면, 오히려 그녀와 정반대되는 이미지로 괴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김주하'하면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뉴스. 그 뒷면의 모습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도 느껴볼 수 있다. 

 
-그래서 나같이 아무것도 없는, 하지만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말한다. 진정 원하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노력하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 노력해 보라고.-
흔히 성공한 사람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디에 무슨 복을 타고났냐고'. 김주하 아나운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예쁜 얼굴, 중성적인 목소리, 야무진 방송진행. 무엇 하나 꼬집을 것 없는 장점만 가지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하지만 누구나 말을 하듯 노력 없이 진행되는 일은 없다. 그녀 또한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로 방송사에 입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 뿐이었다. 물론 운도 우리 인생에서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요소지만, 김주하 아나운서가 앵커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책을 보며 깨달은 순간, 단순히 그녀를 부러워하기만 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내가 얻기 위해 노력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힘들지만, 남이 얻은 것은 그냥 공으로 얻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진정 원하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노력하라는 글귀가 나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삭막한 내용만 뉴스가 아니다-
뉴스를 차지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사건, 사고다. 누군가의 선행, 가슴 따뜻하게 하는 기사는 아마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동물을 좋아한다는 김주하 아나운서는 도심속 황조롱이를 취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삭막한 내용만 뉴스가 아니다'라고. 기자로도 활동하는 그녀가 현장을 직접 취재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느꼈는지도 책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이 그녀를 더욱 인간적이게 보이게 한다.  드라마나 방송에서 그려지는 기자의 모습은 내 눈에 그다지 인간적이지 않다. 아무리 일이라고는 해도 시도때도 없이 마이크를 들이밀며 취재를 하는 그네들을 보면, '참, 저러고 싶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김일병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의 집에 쳐들어가 어린 동생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취재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경악하게 할 정도였다. 특종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어느 정도 인간적인 면은 지켜주길 바랐기 때문에  김주하 아나운서의 저 말은 참 반가웠다. 사건, 사고, 특종만을 노리는 뉴스나 기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기자겸 아나운서가 되어 주길 바란다. 

 책에는  그녀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손석희 아나운서에게 호되게 교육을 받은 이야기, 엄기영 아나운서의 약간 코믹한 모습, 방송생활의 급박함이 생생하게 잘 그려져 있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살아있고, 뒤에 실은 실제 방송내용은 더욱 현장감을 전해준다. 왠지 딱딱한, 유리 상자 속의 인간미 없게 느껴지던 세계가 마치 내 세계인양 가슴이 뛴다. 화려하게만 비춰지던 생활에도 어려움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김주하 아나운서는 참 빛나는 사람이다. 그녀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 그리스 여신 같은 그녀의 외모 때문이 아니다. 항상 도전하는 열정을 가지고, 인간적이며, 어려움 속에 있을 때 더 유쾌해지는 사람.  그녀의 따뜻함이 앞으로의 뉴스 속에서 더 빛을 발하길 희망해본다.
(여담이지만, 김주하 아나운서가 내 고등학교 선배란다!  책에서 이 사실을 발견하고 얼마나 가슴이 뿌듯해지던지. 어쩔 수 없이 나도 학연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던가 싶지만, 뭐 어떤가. 상대가 김주하 아나운서라는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7-08-2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걸 발견하는 것도 공통점이죠!
이금희 아나운서의 책을 본 이후로 이런 류는 안 봤는데, 님의 글 보니 읽어보고 싶군요.

분홍쟁이 2007-08-28 21:32   좋아요 0 | URL
^^ 읽으셔도 후회는 없으실 겁니다. 딱딱하지 않고, 뉴스를 중심으로 해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아내가 마법을 쓴다
프리츠 라이버 지음, 송경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어두운 조명, 부옇게 피어오르는 연기들, 이상하게 생긴 병들, 그 병들에 담긴 색색의 용도를 알 수 없는 내용물.그리고 그 앞에서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정체모를 누군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상상하던 마법에 대한 이미지는 이랬다. 아마도 '백설공주'에 나온 의붓엄마의 모습이 기억속에 꾸욱! 박혀버린 모양이다. '신데렐라'에는 착한 마법을 부리는 요정도 나오지만, 나쁜 마녀의 이미지는 쉽사리 지워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을 보고도 '분명히 아내가 나쁜 마법을 써서 남편을 잡아먹으려고 하거나, 불행을 가져다주려고 하다가 들켜서 벌을 받는 이야기일거야!'라고 단순하게 생각해버렸다. 표지를 보라.  사악한 것일수록 아릅답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주인공 노먼은 젊은 사회학과 교수로 사랑하는 아내 탠시와 살고 있다. 어느 날 아내의 화장방을 장난삼아 몰래 뒤적이다가, 그 곳에서 마법과 주술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노먼에게 있어, 탠시 또한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그는 곧 아내에게 당장 마법을 그만 둘 것을 권유한다. 탠시는 처음에는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교수진의 아내들도 모두 마법을 사용하며, 당신을 노리고 있다고 흥분하지만, 곧 마법 도구를 없애고 그의 말에 따른다. 그런데, 그 후로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온다. 여학생과의 불건전한 루머, 총기에 의한 살해 위협..더구나 주위 상황은 그가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할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며,탠시를 살리기 위해 흑마술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상황까지 내몰린다. 

 -탠시는 그의 연구 작업 내내 지치지 않고 능률적인 비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책은 단순히 마법을 사용하는 악인과 선인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대결 구도가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대결은 어디까지나 여자들의 싸움이다. 탠시는 과연 노먼의  '비서'역할을 한 것일까. 대답은 NO다.책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 아직 혼전순결이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고, 대학은 보수적이고, 꽉 막힌 사람들로 가득찬 답답한 공간이었다. 물론 남자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시대에  앞에 나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노먼의 몫이지만 그런 그를 지켜내는 것은 그의 아내 탠시의 몫이다.즉, 단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호하고, 안전한 세계로 그를 이끌고 있다고 해야 맞겠다.  다른 교수의 아내들도 마찬가지다. 교수인 남자들은 뒤에서 자신들의 아내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학과장이라는 자리에 아내가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겉으로는 정숙하지만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책은 강한 듯 하지만 약한 남자들의 모습과, 순종적인 듯 하지만 뒤에서 온갖 마법을 부리는  탐욕스러운  여성들의 모습을 재미있으면서도 섬뜩하게 보여준다.

-마법은 실용적인 과학이다.-
노먼은 죽음에 다다른 아내를 구하기 위해 마법 안에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결국 공식을 찾아내고 아내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지금까지 마법은 근거없는 미신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 마술도 단순한 눈속임이라고 믿으며, 그 속임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근거없는 것인 걸까. 나는 사람의 의지는 어떤 것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예전부터 믿어왔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마술의 중요 요소는 사람의 동기다. 마술이 사람의 동기와 욕망을 고려한다면, 의지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결국 마술도 옛날에는 부정되었던 많은 과학이론들처럼 나중에는 실용적 과학이 되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단순히 미신이다, 쓸모없다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왠지 꺼림칙하다.

<아내가 마법을 쓴다>는 책 앞장에 적힌 것처럼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도 마법을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을 들게했고, 작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였다. 내가 싫어하는 온갖 과학 법칙 이야기가 나와도 참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내가 정말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니었을까? 독특한 분위기, 곳곳에 숨어있는 철학적인 이야기는 몇 번 음미해도 좋을 정도로 멋지며 영화로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많은 상을 휩쓴만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향기 2007-09-03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리뷰 뽑히신 것 축하드려요. 리뷰 읽어보니 재미있는 책일거 같네요. 보관하고 갑니다.^^

분홍쟁이 2007-09-04 23: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악의 영혼 1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현실이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한 것이 아닐까-
경기도 일대에서 잔인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곧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 그 사건은 아직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미 공소시효를 지나 범인이 잡히더라도 법적으로 형벌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범인이 잡히기를 기다린다. 우리나라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있다면, 미국에는 '조디악'이라는 유명한 킬러가 있다. '현대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선전문구를 인용하여 홍보하는 이 영화와 더불어, 또 하나의 '현대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책이 있다.  바로 왠지 달콤할 것은 이름을 가진, 막심샤탕의 <악의 영혼>이다.

 고문당하고 신체의 일부가 심하게 훼손되어 죽음을 당한 여성들의 시신이 하나씩 발견된다. 이 사건을 맡은 젊고 유능한 수사관이며 범죄 프로파일러인 조슈아 브롤린은 단서를 잡아, 살인마에게 붙잡힌 죽음 직전의 여성 줄리에트 라파예트를 구해내고, 살인마는 브롤린의 총에 맞아 숨진다. 그로부터 1년 후..깊은 산 속 폐가에서 1년 전 사건을 재현하는 듯한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고, 머리에 있는 범죄사인 또한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진다.시간이 지나 다른 피해 여성이 나오고, 브롤린과 다른 형사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신출귀몰한 범인은 그 정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1년 전 죽었다고 생각한 범인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온 것이 아닌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서서히 범인의 정체와 그의 목표가 밝혀진다.

 내가 프로파일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크리미널 마인드 속의 수사관들은 단서를 가지고 범인이 어떤 인물인지, 어떠한 성장과정을 거쳤고,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파일을 만든다. 드라마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간의 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내가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과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낀 것은, 어쩌면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인공 브롤린 또한 자신이 받은 교육을 토대로 범인의 파일을 만들어간다. 작품 속에서 다른 부분의 묘사도 훌륭하지만, 내가 특히 감탄한 부분은 검시라든가, 법의학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점이었다. 작가들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 취재를 나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름만 달콤한 이 작가는 <악의 영혼>을 쓰기 위해 대학에서 범죄학과 범죄심리학 강의를 수강했고, 담당교수 덕택에 부검에도 수차례 입회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해부하는 장면의 묘사는 너무 적나라해서 거의 읽지 못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작가의 책을 쓰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는 감동했다고 해야 할까. 

결말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마음이 아팠고, 한동안 머리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범인이 내세우는 살인의 목적은 너무 어처구니 없었고, 짜증이 날만큼 바보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씁쓸함을 느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해칠 수가 있을까. 동물도 필요하지 않으면 다른 생물을 해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쾌락과 목적을 위해 인간마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돋는다. 인간의 잔인함은 과연 어디가 종착역인 것일까.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바친 2년동안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사건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공포감보다 작가의 그 한 마디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책은 더운 여름의 아찔함을 잊어버리게 해 줄만큼 자극적이고, 재미있었다. 맛있는 이름을 가진 작가의 브롤린 시리즈가 또 출간된다고 하니, 잔인한 묘사에 놀랐으면서도 내심 기대가 된다. 다만, 노약자와 임산부, 그리고 어린이들은 이 책을 금할 것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5년 전의 날씨
볼프 하스 지음, 안성철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이 책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형식이 대화체이기 때문이었다. 대화체로 된 소설은 제법 나와 있지만, 나는 한 번도 대화체로 된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 대화체도 작가가 자신이 쓴 소설을 여기자와 5일동안 인터뷰하는 식으로 소개한단다. 게다가 소재 또한 특이하다. 15년간 자신이 사는 마을도 아닌, 알프스 마을의 날씨를 외워온 한 남자의 이야기다. 

 비토리오 코발스키는 15년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알프스의 어느 한 마을의 날씨를 연구한다. 기온, 기압, 강수량, 일조량까지 빠짐없이 연구해오던 어느 날 <베텐, 다스>라는 유명한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서, 15년동안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사랑을 생각해낸다. 15년전 그들이 헤어지게 된 사건을 떠올리고, 급히 그녀, 아니를 찾아가는 비토리오. 그러나 그녀는 어렸을 때 친구 루키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마음을 정리하려고, 15년 전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찾은 그는 그 장소에서 뜻밖의 사고와 뜻밖의 편지를 발견하면서 다시 아니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작가가 그린 비토리오는 평범함 뒤에 독특함을 숨긴 사람이다. 아무리 어떤 사건에 의해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어떻게 15년간의 날씨를 외우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몇 분 뒤에는 태풍이 온다는 것 등등 시간을 셀 수 있다고도 하니, 워낙 숫자에 약하고, 과학으로부터 먼 나에게 비토리오는 무슨 외계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은 서술형보다 생동감 있고, 나 또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중간중간 작가가 여기자와 대화를 나눌 때 나오는 멋진 문구들도 인상에 남는다.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 또한 독특하다. 특히 이야기를 맺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는데,  앞으로 작가와 여기자가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에 대해 궁금하게 한다. 책 구성은 깔끔하다. 표지도 귀엽고, 중간중간 모르는 말들의 설명도 세세하게 잘 들어가 있다. 

 하지만 책에 대한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나는 기대했던만큼의 그렇게 큰 즐거움을 이 책에서 찾아내지 못했다. '볼프하스신드롬'을 만들어 낼 정도로 대단한 작가라고는 하나, 사람마다 맞는 작가와 작품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작가의 의도였는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가 논점에서 옆으로 새는 것 같은 느낌이 간혹 들었고, 그 때문에 산만하다는 인상도 받았다. 또한 '미스터리한 러브스토리'라고 하기에는 강도가 너무 약하다고 해야 하나..미스터리라고 하기에는 긴장감이 부족했고, 러브스토리라고 하기에는 보통 사랑을 말할 때 느끼는 애틋함이 부족했다. 

 대화체 소설에 익숙하지 않아 읽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문학을 접한 것도 실로 오랜만이다. 복잡한 책을 읽었다는 생각에 어지럽다. 눈이 뱅글뱅글 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