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처음으로 접한 성장소설은 [내 영혼이 가장 따뜻했던 날들]. 이 책은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아마도 평생 이 책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에게 깊은 슬픔과 동시에 부러움을 안겨준다. 나에게 있어 할아버지라는 존재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존재였으니까. 그런 면에서 [리버보이] 또한 [내 영혼이 가장 따뜻했던 날들]과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수영을 좋아하는 소녀 제스. 물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명랑하고 똑똑한 소녀다. 그런 그녀에게 너무나 소중한 할아버지의 심장발작으로 인해 요양을 겸해 가족여행을 떠나게 된다. 장소는 할아버지의 고향. 어린 시절 가족을 화재로 다 잃어 등지고 떠난 고향으로,  할아버지는 마지막을 예감한 듯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찾고 싶다는 듯. 그리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꼭 그 곳에서 완성하고 싶어한다. <리버보이>라 이름붙인 그 그림을..할아버지의 고향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제스는 강가에 서 있는 신비로운 소년을 발견한다. 신비로운 소년의 정체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작품은 커다란 물줄기를 따라가는 것 같다. 잔잔하면서도 조용하고, 큰 굴곡은 없지만 그 안에서 뛰어노는 단어들은 내 마음을 충분히 맑고,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애틋한 사랑은 부러움을 넘어 박수를 쳐 주고 싶을 만큼 가슴을 울렸다. 특히 할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스스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제스가 할아버지의 손이 되어 대신 그림을 완성하는 부분은 엄숙하기까지 하다. 어린 소녀 제스가 할아버지에게 [다만 행복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점점 성숙해 가는  제스의 모습에 뿌듯함과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인생을 살다보면 소중한 것을 어쩔 수 없이 놓아주어야 할 때가 다가온다. 죽음은 탄생과 함께 모든 존재가 겪을 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 또한 죽음이라는 것에 그렇게 담담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우리의 생활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를 변화시킬 수도 있음을. [인생이란, 가장 슬픈 날 가장 행복하게 웃는 용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글귀에서 나는 아직도 나이만 먹었지 인생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음을 절감한다. . 

 이 책을 보는 동안 [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양귀자님의 [모순]의 글귀가 생각났다. 너무 소심한 마음에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정해진 일에 너무 겁먹어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장 슬픈 날  가장 행복하게 웃는 용기를 배우기 위해 내 삶의 순간순간, 모든 것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에게 필요한 주문
지수현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는 비밀(?)을 라디오에서 들은 적이 있다. 하나는 서로를 단순히 친구로만 여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우정이 깨질까봐 그 사랑을 숨기는 것이었다.  두 번째의 비밀을 들었을 때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기 위해 자신의 사랑을 숨겨야만 하는 사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아닐까. 나는 개인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꾸 만나고, 이야기하고, 세월을 나누다보면 정들어버리는 것이 사람이니까. 

 연주와 경주도 14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친구로만 지내오다 연인이 되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멀미"가 이들에게도 약점이다. 그 "멀미"가 그들을 친구로 만들어주었고, 결국은 경주가 연주에게 마음으로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14년의 친구 생활을 청산하고 바로 연인으로 지내는 것이 나에게는 어색할 것만 같은데, 이들은 너무 오랜 세월을 친구로 지내온 것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한 듯 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사랑도 세상의, 사람의 '편견'때문에 결국 이별을 맞이한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난 지금,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다시 나타난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을까. 

 조근조근한 대화체로 쓰여 있는 이 책은 단순히 소꿉친구의 우정에서 사랑으로 변한 이야기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연주는 술주정뱅이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뼛속까지 아버지를 미워하지 못한다.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괴팍한 그 노인은 연주에게 증오의 대상이자 사랑받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 된다. 항상 아버지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병에 걸린 남편을 내버려두지 못하고,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고 마는 연주의 어머니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모습과 가장 비슷하다.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막상 달아나버리면 아쉬운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니까. 콩가루 집안이지만,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가는 연주네 집은 현실 속의 보통 가정, 바로 그것이다. 

 오랜 친구사이였던 사람이 여자로, 남자로 보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절대 풀 수 없는 몇 가지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 오직 그 답을 알 수 있는 것은 살아온 삶을 정리할 때, 추억할 때일 것이다. 아직도 사랑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아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친구가 여자로 혹은 남자로 보이는 것, 그것 또한 인연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연주와 경주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고,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을 버텨내고 살아내는 것. 그러기 위해 우리는 각자 자신들만의 힘을 내기 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 혼자 깊은 밤 화이팅을 외치는 것, 누군가에게 기대어 위로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 불행하지 않도록, 강해지도록, 다시 태어나도록 우리에게는 정말 주문이 필요하다. 그 주문이 효과가 있든없든 사랑을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삶을 위해 각자 자신만의 주문을 외워봐도 좋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버웨어 판타 빌리지
닐 게이먼 지음, 나중길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덮은 순간, 나는 다른 공간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조그마한 난쟁이 나라가 책 한 권에 입체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그들보다 엄청나게 큰 내가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본 것은 글자가 아니라 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인 숨겨진 세계의 신비로운 이야기. 

 런던의 증권맨 리처드는 약혼녀인 제시카와 길을 걷던 도중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한 소녀를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은 Door, 도어. 런던의 지하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밴더마와 크루프라는 악당에게 쫓기고 있었다. (사실 밴더마와 크루프는 악당이라는 한 마디로 나타낼 수 없으나, 그들을 표현하기에는 엄청나게 잔인한 용어가 필요하므로 차마 여기에 쓸 수는 없었다) 리처드가 도어를 도와 준 후부터 그의 존재는 투명인간처럼 되어 버린다. 결국 지하세계로 도어를 찾으러 간 리처드는 , 가족이 살해당한 이유를 밝혀 복수를 꿈꾸는 도어와 그녀를 돕는 카라바스 후작, 경호원 헌터와 모험을 시작한다. 이상한 이동시장, 쥐대왕, 수도사들,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역과 지하터널, 거기에 천사까지 등장하는 와중에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닐 게이먼은 [스타더스트]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아직 국내에 익숙치 않은 작가이다. [스타더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 책 자체가 반짝거리는 듯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밤이 가는 줄 몰랐더랬다. 그런데 이 [네버웨어]는 [스타더스트]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고, 신비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게다가 그의 표현력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해서(물론 번역의 힘일 수도 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지 살짝 질투가 났다.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하고, 구성에도 빈틈이 없지만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주인공이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냥 회사에 다니고 약혼녀와의 결혼을 꿈꾸는 리처드는 처음에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도어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지하세계로 굴러떨어졌을 때도, 그는 그저 -내가 저 상황이었어도 저랬을거야-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저 그런 캐릭터였다. 그런 그가 도어 일행과 여행을 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한 후부터 그의 마음 속에서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사건 해결에 커다란 역할을 하면서  리처드는 성장해간다. 게다가 마지막에 그가 선택한 삶은 우리 모두에게 충분히 교훈을 줄 수 있을만한 것이었다. 

 -저는 멋지고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을 원했습니다. 제가 머리가 이상한 놈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지상의 삶이 전부라면 이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나부터도.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계획하지만, 그  계획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느끼는 불안감에 정신이 멍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이룬 것이 우리가 진정 원한 것이 아니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마 다른 길을 모색하기보다 포기하고 원하지 않은 삶을 사는 쪽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용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리처드가 선택한 것처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라고. 그것이야말로 성장이고, 진정한 삶이라고.

 신비로운 동화같은 소재에 별가루같은 사랑, 마치 자신이 뛰어다니고 있는 듯한 숨막히는 스릴에 교훈까지 얹어주는 이 작품에 나는 완전히 닐 게이먼의 팬이 되어버렸다. 앞으로도 그의 작품이 나오기를 무척 고대할 것 같다. 나처럼 그의 이야기에 빠져버린 사람들에게, 책 뒤쪽에 실린 그의 인터뷰는 의미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부터 책은 내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지금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자칭타칭 밝은 성격임에도, 나의 내부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받기 싫어하고 복잡하게 섥히고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인간관계를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내가, 나만 아는 곳에 숨어 있다. 다른 사람을 마주 대할 때의 약간의 포장과 위선은 인간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치다.  나의 진정한 모습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으므로. 때문에 그러한 장치없이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고, 나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책은 무척 소중한 존재다.  표지에서 의자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는 소녀는, 바로 나다.

 가쿠타 미쓰요의 소설을 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품 [죽이러 갑니다]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제목이 너무나 자극적인 탓에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작가였다. 하지만 이 책은 제목부터가  내가 나의 분신이라 칭해 마지않는 <책>을 주제로 하고 있고, 띠지에 박힌 -모든 책에는 그 사람만을 위한 존재 이유가 있다-는 문구가 무척 마음에 들어 단번에 읽어버렸다.

이 책은 모두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헌책방에 팔아버린 책을 여행지에서 다시 찾게 되고, 그 곳에서 또 판 책을 또 다른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여행하는 책>, 여행지에서 병으로 앓아누워있을 때 읽은 책으로 책의 주인을 상상하는 <누군가>,  애인과 싸우고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발견하게 된 편지에 대한 이야기 <편지>,  동거하던 애인과 헤어지고 이사를 하기 위해 책장을 정리하면서 그려지는 <그와 나의 책장>,  책이 불행의 편지처럼 그려지는 <불행의 씨앗> , 전설의 책을 찾아헤매는 이야기 <서랍 속>,  작가가 된 주인공이 어린시절 추억의 책방에서 책을 훔친 사실을 사죄하러 가는 <미쓰자와 서점>, 병상에 누운 할머니를 위해 오래된 책을 찾아헤매는 <찾아야 하는 것>,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 대신 소중한 책을 선물하는 <첫 밸런타인데이>까지.

처음에는 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금방 책 속 이야기에 빨려든다.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그들의 이야기이지만, 그 모두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이 낡고 난해하고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책은 세월이 지날수록 의미가 변한다. 슬픈 일을 한 번 경험하면 의미가 바뀌고, 새로운 사랑을 하면 다시 의미가 바뀌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면 또 의미가 바뀐다-는 부분은 어쩐지 책에 대한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아서 마음이 벅찼다. 처음 읽을 때와 다시 읽을 때의 의미가 바뀌는 책.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책을 빌려서 보기도 하지만 사서 보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그 책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미쓰자와 서점>의 주인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저 펼치는 것만으로 어디든 데려가 주는 건 책밖에 없지 않니-라고.  그 한 마디로 책의 존재이유가 정의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로든 데려가주고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준 것은 바로 언제나 나의 곁에 함께였던 <책>이었다. 

새삼 내 방에 있는 책들이 새롭게 보여진다.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었고, 그 중에서 또 많은 책에 감동받았지만 과연 나에게 있어 꼭 존재해야만 하는 책은 무엇일까. 이 책이 있어서 내가 좋았다고, 소중한 사람에게 꼭 선물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책. 오늘밤은 책장을 모두 뒤져서 그런 책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를라 기담문학 고딕총서 8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깊은 밤, 나는 꿈을 꿨다. 희뿌연 안개가  온 방안을 뒤덮고 있는 그 공간 사이로,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꿈. 머리로는 -이건 꿈이야, 어서 일어나야 해-하며 몸부림쳐보지만, 쉽사리 잠에서 깰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무 생각없이 잠들어버리기를 기도하던 중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나는 내가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단번에 알았다. 내 머리맡에 바로 이 책, 기 드 모파상의 [오를라]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기 드 모파상은 나에게 [여자의 일생]이라는, 어린 시절 읽은 책의 작가였다는 사실로만 기억된다. 안타깝고  마음 아프고, 답답하면서, 나는 꼭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기억을 남겨준 [여자의 일생].  하지만 [오를라]에 담겨있는 작품들은 어쩐지 몽환적이고, 섬뜩하고, 훨씬 더 우울하다. 표지에 그려져 있는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처럼. 

 기담문학 고딕총서의 8번째 이야기  [오를라]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 중 가장 무섭고 인상깊었던 작품은 <박제된 손>과, <마드무아젤 코코트>, 그리고 <산장>이었다. <박제된 손>에서는 한 남자가 이미 죽은 어떤 늙은 마법사의 박제된 손을 가져와 그것을 자기 집 현관 초인종으로 쓰겠다며 시작된다. 그를 바라보는 친구가 이 글의 서술자로, 어느 날 그 박제된 손을 가져간 친구가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의 집으로 달려간다. 친구는 목에 심한 상처를 입고 정신착란을 일으키다가 손이 자기를 공격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결국 죽는다. 그리고 친구의 시신을 묻으려고 땅을 파던 중 늙은 마법사의 시신으로 보이는 해골을 발견하고, 그 옆에는 잘려 나간 손목이 놓여 있다. <마드무아젤 코코트>는 애완용 개인 코코트가 가진 심각한 결점으로 인해 코코트를 물에 빠트려 죽인 후, 부패한 시신을 멱을 감으러 간 강에서 발견하고 미쳐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산장>은 한 겨울 내내 산장을 지키는 산장지기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사냥을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나머지 다른 한 사람이 찾으러 나가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죽은 다른 산장지기의 환영에 시달리다 미쳐버린다는 이야기다. 

 다른 작품들이 이 작품들에 못미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 세 작품이 유독 무서웠던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근원적인 공포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박제된 손>은 그렇다치더라도, 단지 발정기가 계속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폐가 되기 때문에 개를 죽인 남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공포, 죄없는 생명을, 자신을 믿고 있던 동물을 물 속에 던져버리고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그 시신을 육십리외나 떨어진 곳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공포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또한 <산장>은 아무도 없는 곳, 자신과 다른 한 사람 뿐이었던 고립된 곳에 둘이 아닌  홀로 남겨졌을 때의,  두려움이 극도의 공포감으로 증폭되는 분위기를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그려냈다.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서, 평소 때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한 번 마음의 수면 위에 떠오르면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깊은 두려움들이 작품들 안에 눈을 번뜩이고 있다.   

 기 드 모파상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이것이다!-라고 눈 앞에 바로 들이대지 않는다.  글을 읽는 동안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한기와  대상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느껴지는 공포는  꿈 속에서까지 나를 괴롭혔다. 직접 눈 앞에 보여지는 것보다 정체를 알 수 없을 때의 무서움이 한 층 더 심한 법이다. 또한 과장되지 않고,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문체 때문에 괴기스러움은 한층 심해지고, 극적인 분위기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오를라]를 읽으면 세상에는 좋을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만큼 우울하다. 하지만 기 드 모파상이라는 유명한 작가의 정신세계가 궁금하다면, 한 번쯤 읽어볼 것을 권한다. 단, 깊은 밤에는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의 잔영이 꿈 속까지 따라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을 괴롭힐지 모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